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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날이 밝고 샛별이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함

믿는 이들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언들을 알기를 요구하시며, 믿는 이들은 예언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언들을 이해하라고 명하셨다. 여기서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믿는 이들이 반드시 성경에 있는 예언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이 예언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많은 믿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믿음을 잃고, 거짓말에 속고, 예언에 대한 지식이 없어 멸망하고, 깨어 있지 않아 주님의 오심을 잊어버릴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 성경의 예언들이 없다면, 그들은 어둠 속에 빠질 것이다.

현시대는 밤중이다.

주 예수님께서 오실 때 날이 밝을 것이고(벧후 1:19하), 다음 시대인 왕국 시대는 낮 시간일 것이다.

베드로는 성경에 있는 예언의 말씀을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에 비유했다.

이것은 이 시대가 어두운 밤(롬 13:12)이자 어두운 곳이며,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며 행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 있는 예언의 말씀은 믿는 이들을 비추는 등불로서 (다만 정신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문자로 된 지식이 아닌) 영적인 빛을 전달하여 그들의 어둠을 비추며, 그들이 밝은 낮에 들어가도록 안내할 뿐 아니라, 어두운 밤을 지나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날이 밝을 때까지 안내한다.

햇빛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까지, 우리에게는 우리의 발걸음을 비추는 빛인 이 말씀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어두운 곳을 등불처럼 비추는 성경의 예언의 말씀에 주의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떠오르셔서 어둠을 비추실 것이다.

우리는 날이 밝고 샛별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두운 곳’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또한 ‘아주 음산하고 어두컴컴한 곳’, 즉 ‘지저분하고 메마르고 방치된 곳’으로 번역될 수 있다.

날이 밝는 것은 하나의 비유로서, 빛으로 충만하게 될 장차 오는 때를 설명하고 있으며, 동트기 전 샛별이 떠오르면서 날이 밝는 것처럼, 샛별이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 믿는 이들은 성경에 있는, 빛을 비추는 예언의 말씀에 주의함으로써 비춤을 받고 밝아진 사람들이다.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믿는 이들은 주님의 임재를 간절히 추구하고 깨어 있도록 동기를 부여받고 격려받아, 주님께서 도둑처럼 오실 때에 그분께서 오시는 것(파루시아)의 은밀한 방면을 놓치지 않고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비유는 의의 해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오실 때)에 밝아 올 날인 오는 시대, 곧 왕국 시대를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 이 의의 해의 빛은 캄캄한 밤과 같은 이 시대의 암흑을 뚫고 빛을 비출 것이다.

샛별은 동트기 전인 가장 어두운 시간에 나타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시대가 끝나기 전인 가장 어두운 시기에 빛나는 샛별로서 나타나실 것임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샛별로 나타나시는 것과 의의 해로 나타나시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샛별은 날이 밝기 전에 나타나며, 해가 나타나는 것은 날이 밝은 후에 일어난다.

날이 밝은 후에 뜨는 의의 해로서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날이 밝기 전에 뜨는 빛나는 샛별로서 그리스도는 깨어 있고 준비하고 그분을 기다리는 이기는 이들에게 은밀히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사랑하고 깨어서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샛별이신 그분 자신을 은밀하게 나타내 주실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그분께서 오랫동안 이 땅에 계시지 않다가 돌아오실 때, 그분의 임재의 신선함을 가장 먼저 맛보는 특권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성경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 속의 상태는 날이 밝고 샛별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처럼 될 것이다.

비유적으로, ‘날이 밝는 것’은 밝아 오는 대낮과 같은 다가올 왕국 시대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예표들과 관련해서, 성경 전체는 빛이신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샛별이신 그리스도로 끝마친다.

‘샛별’은 왕국 시대가 밝아 오기 전인 가장 어두운 밤 시간에,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이들의 마음에 은밀하게 떠오르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우리가 빛을 비추는 성경 말씀에 계속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리스도께서 밝은 샛별로서 실지로 나타나시기 전에, 우리 안에서 낮처럼 밝아 오는 왕국과 우리의 마음속에서 샛별처럼 떠오르시는 그리스도를 얻게 될 것이다.

샛별이신 그리스도는 이기는 이들에게 첫 번째 보상으로 주어지실 것이다. 우리는 샛별이신 주님의 은밀한 나타나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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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마 2:9-10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는데, 보아라, 전에 떠오를 때 보았던 그 별이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그 아기가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우리는 말씀을 사랑하지만 죽은 문자를 대하는 식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밝아 오고 솟아오를 때까지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말씀을 사모한다. 그것은 지식이나 기록된 문자가 아닌 하루를 여는 빛나는 별의 떠오름이다.

박사들의 시대에는 별을 보는 것이 기적적인 일이었지만, 오늘날 샛별을 보는 것은 정상적이고 우리의 규칙적인 체험이 되어야 한다. 매일 우리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샛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저 성경을 읽기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날이 밝고 샛별이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신언자가 말한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 별은 살아 있는 말씀에서 비롯된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는 말씀과 샛별이 함께 있다. 첫째, 우리는 말씀을 갖는다. 둘째, 우리가 신언자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샛별을 갖는다. 우리가 단순히 이 내면의 떠오르는 별을 그대로 계속해서 따른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영 안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봉사이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는 빛의 세 근원이 언급된다. 그것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 밝아 오는 날, 떠오르는 샛별이다.

믿는 이들에게 비추는 등불인 성경 말씀은 비추는 영적인 빛을 전달한다. 많은 신학교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이들이 아직도 어둠 속에 있다. 그들에게는 성경 말씀으로부터 오는 빛이나 비춤이나 밝힘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성경을 열 때마다 빛 비춤을 받는다는 것이다. 매 쪽이 빛을 내고, 매 줄이 빛 비춤을 주며, 심지어 매 단어가 우리를 밝혀 준다. 그러한 비춤을 통해 우리는 낱낱이 폭로된다.

과거에 우리 모두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본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았다. 우리는 어둠 속에 있었고, 그 누구도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납득시킬 수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옳다는 것을 더 주장했고, 자신을 더 변명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교회 집회에 참석했고, 집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는 폭로되었다. 우리는 우리를 비추는 신성한 빛의 비춤을 받았고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회생활 안에는 외적으로 매력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를 매혹했고 여전히 매혹하는 것은 빛의 비춤이다. 신성한 빛이 항상 성도들 안에서 비추고 있다. 그 결과, 교정이나 바로잡음이나 설득이나 유죄판결이 별로 필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내적 비춤이 여러 가지 모든 문제들과 필요를 돌본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을 받을 때마다 이 말씀은 우리 속에서 비추고, 이 비춤은 우리를 폭로하며, 이 폭로는 우리를 굴복시킨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을지라도, 성경 말씀은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 속에는 항상 비추고 우리를 굴복시키는 놀라운 무언가가 있다. 때로 우리는 배우자와 다투고 싶지만, 즉시 이 놀라운 비춤이 우리를 제한한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에서 살아 있는 말씀이 비추는 빛이 된 것이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처럼 영적인 빛을 전달하여 믿는 이들을 밝혀 준다. 이 등불은 믿는 이들 속에서 떠오르는 샛별이 되고, 결국에는 동이 트게 한다. 곧 의의 해(말 4:2)이신 주 예수님께서 오실 때 밝아 오는 낮인 왕국 시대를 가져온다. 이렇게 비추는 빛은 등불에서 날이 새는 것으로 진보한다. 우리가 빛 아래 있을수록 복사 과정이 더 많이 이루어진다. 신성한 빛의 비춤 아래서, 사복음서에 기록된 주 예수님의 인간 생활이라는 원본이 완전히 계시된다.

5일

마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께서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그분의 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나의 천사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이고 자손이며, 빛나는 샛별이다.”

예언들을 이해하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에녹은 첫 번째로 예언한 사람, 즉 예견한 사람이다. 그는 육십오 세에 낳은 아들에게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창 5:21). 이 이름에는 예언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 뜻은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이 온다’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장차 올 홍수의 심판을 예언한 것이다. 에녹은 홍수가 올 것에 관한 예언을 받은 후에, 일어나서 경건하지 않은 세대를 떠났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는 죽음을 보지 않았다(창 5:22-24). 다니엘이 이상을 보고 예언을 기록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보배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단 10:11, 19, 9:23).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의 이상을 썼던 것도 그가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였고 일찍이 주님의 품에 기대었던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요 21:20). 이러한 예들은 다음의 말씀을 입증해 준다. “여호와의 친밀한 조언이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있나니 /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분의 언약을 알려 주시리라.”

우리는 신언자가 말한 말씀인 성경을 갖고 있다(벧후 1:19). 그러나 신언자가 말한 말씀과 성경은 별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신언자가 말한 말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날이 밝고 샛별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별’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인(燐)’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 별은 어두운 곳에 빛을 가져오는 인과 같은 것이다. 성경은 단지 흰 종이에 검은 글자가 쓰인 책이어서는 안 된다. 죽은 문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인과 같은 어떤 것, 즉 샛별이신 그리스도께서 떠오르실 때까지 우리는 성경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합당하고 살아 있는 방식으로 대한다면, 이 성경은 확실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바뀔 것이다. 이것이 전환점이다. 곧 말씀이 그리스도로 바뀌어야 하고, 문자인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말씀과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신언자가 말한 말씀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 인으로서, 어둠을 뚫고 나온 샛별로서 떠오를 때까지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손에 성경을 갖는 것과 우리의 마음속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성경 지식을 갖는 것과 우리의 영 안에 빛나는 별이 떠오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신학교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떠오르고 빛날 때까지 우리 안으로 말씀을 취하며 살아 있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별을 가질 것이며 또한 별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별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을 읽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때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신언자가 말한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 안에는 무언가가 빛나고, 떠오르며, 밝아 오고, 뚫고 나오는 것이 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기도로 읽는 동안에 우리 속 깊은 곳에는 빛나고 빛 비추는 어떤 느낌이 있으며, 이 빛 비춤은 주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솟구치게 한다. 우리는 그분이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느낀다. 우리는 “오,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이신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많은 때에 이러한 빛 비춤에 의해 우리는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제정신이 아닐 정도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여명, 곧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샛별로서 오시는 것이다. 많은 때 나에게 이 거룩한 말씀이 있었을 때 어떠한 것이 내 안에 샛별처럼 떠올랐다. 오, 이것은 놀랍다! 상황은 밝지 않고 주변 환경은 어둠이 가득하지만, 우리 안에는 빛을 비추고 빛나며 영광으로 충만한 무언가가 있다.

4일

계 2:28 나는 또 그에게 샛별을 줄 것이다.

마 24:42-43 그러므로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만일 집주인이 밤 어느 시각에 도둑이 오는지를 안다면, 깨어 있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예언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 속을 비추는 등불을 체험할 것이고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샛별을 누릴 것이며 우리 속에서 밝아 오는 영적인 낮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주 예수님께서 샛별로 나타나시어 의의 해이신 그분으로 동이 틀 때까지 이런 상태에 머물 것이다.

지난 오십 년 동안 세상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지만, 나는 신언자가 말한 성경 말씀의 빛으로 인해 놀라지 않았다. 나는 또한 베드로의 말에 따라 샛별을 누리며 내적으로 영적인 낮이 밝아 오는 것을 누리고 있음을 증언할 수 있다.

먼저 우리에게는 신언자가 말한 말씀의 비춤이 있다. 그런 다음 이 비춤은 우리 속에서 밝아 오는 낮이 된다. 겉으로 볼 때 우리는 어둠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빛이 충만하다. 주님께서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샛별로 나타나시고 의의 해로 떠오르실 때까지 우리는 샛별과 영적인 낮의 밝아 옴을 계속 누릴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베드로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형제님들, 유대인 믿는 이들인 여러분은 구약의 예언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며, 주님의 오심에 관한 우리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지금 어떤 이단자들은 여러분에게 이것이 일종의 미신이고 일종의 이야기, 신화, 전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이단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우리의 증언이 있고 여러분 속을 비추는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날이 밝고 샛별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신언자가 말한 말씀이 여러분 속을 비추게 하십시오.”

요한계시록 2장 28절은 그리스도께서 이기는 이들에게 샛별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예표들과 관련해서, 성경 전체는 빛이신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샛별 곧 발광체이신 그리스도로 끝마친다. 샛별은 자정 후 동트기 전인 가장 어두운 시간에 나타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시대가 끝나기 전인 가장 어두운 시기에 빛나는 샛별로서 나타나실 것임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샛별로 나타나시는 것(계 2:28)과 의의 해로 나타나시는 것(말 4:2)은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자는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고, 후자는 날이 밝은 후에 일어난다. 날이 밝은 후에 뜨는 의의 해로서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날이 밝기 전에 뜨는 빛나는 샛별로서 그리스도는 깨어 있고 준비하고 그분을 기다리는 이기는 이들에게 은밀히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사랑하고 깨어서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샛별이신 그분 자신을 은밀하게 나타내 주실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그분께서 오랫동안 이 땅에 계시지 않다가 돌아오실 때, 그분의 임재의 신선함을 가장 먼저 맛보는 특권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을 격려하여 주님의 임재를 간절히 추구하고 깨어 있게 함으로써, 그분께서 도둑같이 은밀하게 오실 때 그분 앞에 설 수 있게 할 것이다. 샛별이신 그리스도는 이기는 이들에게 첫 번째 보상, 가장 이른 보상으로 주어지실 것이다. 우리는 샛별이신 주님의 은밀한 나타나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가장 어두운 때에 이기는 이들 안에는 빛나는 별이 있다. 이기는 이들은 샛별이신 그리스도라는 특별한 빛을 소유하고 누릴 것이다.

3일

벧후 1:19 또한 우리에게는 신언자가 말한 더 확실한 말씀이 있습니다.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여러분은 날이 밝고 샛별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딤후 4:8 …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나에게 그것을 보상으로 주실 것인데, 나에게만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어두운 곳’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또한 ‘아주 음산하고 어두컴컴한 곳’, 즉 ‘지저분하고 메마르고 방치된 곳’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변절이라고 하는 어둠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베드로는 날이 밝고 샛별이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우리가 신언자가 말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하나의 비유로서, 빛으로 충만하게 될 장차 오는 때를 설명하고 있으며, 동트기 전 샛별이 떠오르면서 날이 밝는 것처럼, 샛별이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 믿는 이들은 성경에 있는, 빛을 비추는 예언의 말씀에 주의함으로써 비춤을 받고 밝아진 사람들이다.

변절의 때에 믿는 이들은 신언자가 말한 말씀이 등불처럼 변절의 어둠을 뚫고 그들을 비추어 날이 밝아 올 때까지,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믿는 이들은 주님의 임재를 간절히 추구하고 깨어 있도록 동기를 부여받고 격려받아, 주님께서 도둑처럼 오실 때에 그분의 파루시아의 은밀한 방면을 놓치지 않고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의의 해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오실 때)에 밝아 올 날인 오는 시대, 곧 왕국 시대를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 이 의의 해의 빛은 캄캄한 밤과 같은 이 시대의 암흑을 뚫고 빛을 비출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전, 밤이 가장 깊을 때에 주님께서 사랑스럽게 나타나시는 것을 깨어서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샛별처럼 나타나실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날이 밝는 것이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를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정확한 말이다. 바로 그날에 주님은 의의 해로서 빛나실 것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이 매우 가까운 때는 이른 새벽에 비유될 수 있는데, 그때에 주 예수님은 깨어 있는 믿는 이들에게 샛별이 되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지만, 베드로는 더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상 1장 19절에서 베드로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 그는 온 세상이 어두운 곳이고 현시대가 어두운 밤이라고 말한다. 성경의 예언들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등불이 없기 때문에 우리 역시 어둠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언자가 말한 말씀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는 우리의 등불이다. 우리는 신언자가 말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빛의 비춤을 받는다. 결국 이 빛은 우리 속에서 영적인 낮이 밝아 오고 샛별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비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먼저 영적인 낮, 즉 우리 속에서 밝아 오는 낮에 대해 말한다. 또 베드로는 장래의 어느 날, 곧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날에 대해서도 말한다.

우리의 체험은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베드로가 영적인 낮과 주님께서 오시는 날 모두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많은 경우 어둠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성경의 예언들에 온다. 예언들을 연구할 때 등불이 우리 속에서 빛나기 시작한다. 자연히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밤에 있지 않고 낮에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서 영적인 낮이 밝았기 때문이다. 등불이 우리를 비출 뿐 아니라 우리 속에서 동이 틀 것이다. 샛별이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얼마나 기쁜가! 우리 주변이 전부 어두울지라도 우리 속에는 샛별이 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날이 밝는 것은 또한 주 예수님께서 의의 해로 다시 오실 때인 장래 어느 날을 가리킨다. 주님은 눈에 보이게 오시기 전에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샛별이 되실 것이다. 그러므로 1장 19절에 있는 베드로의 말은 우리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오심에 모두 적용된다.

2일

벧후 1:19 또한 우리에게는 신언자가 말한 더 확실한 말씀이 있습니다.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여러분은 날이 밝고 샛별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시 119:105 주님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이요 제 길의 빛입니다.

시 119:130 주님의 말씀들이 열리면 빛이 비치어 단순한 이들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서 시편 작가는 빛에 관해 실지적인 말을 한다. 이것은 교리나 가르침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편 작가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한 것이다. 시편 작가의 일상생활에서 걸음마다 말씀은 그의 빛이었다.

물론 고대에는 가로등이 없었다. 밤에 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길을 비추어 주는 등불이나 손등이나 횃불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실지적으로 시편 작가의 길에 빛을 밝히는 등불이었다.

유일한 빛이신 하나님의 체현인 하나님의 말씀은 비추는 빛이다. 이 빛은 사실상 말씀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다. 말씀에는 신성한 빛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에 올 때마다 빛의 분위기 안으로 들어간다. 전등이 켜진 방에 있을 때, 우리는 그저 빛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을 때, 우리에게는 빛 안에 있다는 느낌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한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말씀을 읽거나 말씀 몇 절을 기도로 읽는다면, 우리가 빛 안으로 인도되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합당한 방식으로 말씀에 올 때마다 우리는 빛 안으로 들어와서 빛의 영역 안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빛을 얻게 되고, 완전히 빛 안에 있는 사람이 된다.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는 믿는 이들에게 강하게 증언함으로 이단에 대해 예방접종을 하고 있다. 베드로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단자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나는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거룩한 산 위에서 주님의 위엄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변형되셨을 때 그분과 함께 있었고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를 기쁘게 하는 아들이다.’라고 선포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말해 준 것은 전설이나 신화나 미신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변형되셨을 때 영광스럽게 되신 것처럼, 영광 가운데서 다시 오실 것을 압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말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부터 21절까지에서 베드로는 구약에서 발견되는 예언의 말씀을 사용하여 계속해서 그들의 증언을 확증하고 있다. 성경에서 사도들의 증언과 예언의 말씀은 모두 진리의 비춤이다. 이 비춤은 신성한 공급의 일부, 즉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녀들이 이단과 변절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공급하신 것의 일부이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또한’이라는 말은, 앞 절들에서 주님의 변형에 관한 진리를 미신적인 신화에 대항하기 위한 예방접종으로 다루었고, 이것에 더하여 19절에서 신언자가 말한 말씀의 진리를 사용함으로써 한층 더 신뢰할 만한 확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변형되셨을 때 그분의 영광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에 대해 말하고 나서, 계속해서 예언의 말씀을 사용하여 자신의 증언을 확증하고 강화한다.

베드로는 믿는 이들이 신언자가 말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구약의 예언들을 연구하고 있었고 그것들에 주의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베드로는 성경에 있는 예언의 말씀을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에 비유했다. 이것은 이 시대가 어두운 밤이자 어두운 곳이며,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며 행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 그것은 성경에 있는 예언의 말씀이 믿는 이들을 비추는 등불로서 (다만 정신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문자로 된 지식이 아닌) 영적인 빛을 전달하여 그들의 어둠을 비추며, 그들이 밝은 낮에 들어가도록 안내할 뿐 아니라, 어두운 밤을 지나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날이 밝을 때까지 안내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신언노트, 2023 04 23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날이 밝고
샛별이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함
그 날이 밝아오고
또 금성이
우리의 마음들 안에 떠오를 때까지
한 어두운 장소 안에서
한 빛나는 등을 향한 것과 같이
그 신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임에 의하여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들을 준비함

밤은 잠자는 때이다.
그러나 ‘밤이 깊었다’
(롬 13:12).
그러므로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며,
더 이상 잠을 자서는 안 된다.

현시대는 밤중이다.
주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
날이 밝을 것이다.
다음 시대는
낮 시간일 것이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할 뿐 아니라,
어둠의 일들을 벗어 버리고
빛의 무기로 무장해야 한다.
이것은
전쟁을 암시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언들이
흥미롭지 않고
해석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은사들과 거룩함과 왕국을
추구하는 것은
중요하고 긴급하게 필요하지만,
예언들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부차적이고
꼭 알고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언들을 연구하는 것이
지식의 증가만 가져다줄 뿐
영적 생명이 성장하는 데에는
유익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모두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언들을 알기를
요구하시며,
믿는 이들은
예언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베드로의 말은
구약의 신언자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증언을
확증하고 강화하며,
이단과 변절에 대항하도록
믿는 이들에게
예방접종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주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예언들을 이해하라고
명하셨다.
교회가
이 예언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많은 믿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믿음을 잃고,
거짓말에 속으며,
예언에 대한 지식이 없어
멸망하고,
깨어 있지 않아
주님의 오심을 잊어버릴 것이다.

성경은
매우 정확한 책이다.
심지어 한 글자도
틀리지 않는다.
우리는
한 단어도
잘못 해석하거나
바꾸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부주의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놓칠 것이다.
만일 예언들을 읽는 사람이
정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정확성이 희생된다.
주 예수님께서
출생하시기 전에
많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메시아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구약의 예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메시아, 곧 기름부음 받으신 분을
보내 주실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실제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을
몰랐다.
그들은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신 예수님을
갈릴리 출신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을 거절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오신
메시아를 놓치고 말았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구약의 예언들을 이해하는 데
섬세하지 못했고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을
놓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 또한
예언들을
개괄적으로만 이해할 뿐
정확하고 섬세하게는
알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놓칠 것이고
손실을 겪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언들을 반드시
정확하게 알도록
배워야 하고
부주의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는
태도를 지녀서는 안 된다.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인 가치를
완전히 놓칠 것이다.
성경은
영적인 책이다.
우리가
정확히 알고자 하는 목적이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채우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언들을 연구하는 목적은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예언들을 연구할 때
호기심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생명을 만지고
영을 만지며
주님을 만져야 한다.

믿는 이들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언들을 이해하라고
명하셨다.
여기서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믿는 이들이 반드시
성경에 있는 예언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
성경의 예언들이 없다면,
그들은
어둠 속에 빠질 것이다.

현시대는 밤중이다.

주 예수님께서 오실 때
날이 밝을 것이고,
다음 시대인 왕국 시대는
낮 시간일 것이다.

시편 119편 105절에서
시편 작가는
빛에 관해
실지적인 말을 한다.
이것은
교리나 가르침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시편 작가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한 것이다.
시편 작가의 일상생활에서
걸음마다
말씀은
그의 빛이었다.

물론 고대에는
가로등이 없었다.
밤에 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길을 비추어 주는
등불이나 손등이나 횃불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실지적으로
시편 작가의 길에
빛을 밝히는
등불이었다.

유일한 빛이신
하나님의 체현인
하나님의 말씀은
비추는 빛이다.
이 빛은 사실상
말씀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다.
말씀에는
신성한 빛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에 올 때마다
빛의 분위기 안으로
들어간다.
전등이 켜진
방에 있을 때,
우리는 그저
빛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을 때,
우리에게는
빛 안에 있다는
느낌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한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말씀을 읽거나
말씀 몇 절을
기도로 읽는다면,
우리가
빛 안으로 인도되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합당한 방식으로
말씀에 올 때마다
우리는
빛 안으로 들어와서
빛의 영역 안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빛을 얻게 되고,
완전히
빛 안에 있는
사람이 된다.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는
믿는 이들에게
강하게 증언함으로
이단에 대해
예방접종을 하고 있다.
베드로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단자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나는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거룩한 산 위에서
주님의 위엄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변형되셨을 때
그분과 함께 있었고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를 기쁘게 하는 아들이다.’
라고 선포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말해 준 것은
전설이나
신화나
미신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변형되셨을 때
영광스럽게 되신 것처럼,
영광 가운데서 다시 오실 것을
압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말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부터 21절까지에서
베드로는
구약에서 발견되는
예언의 말씀을 사용하여
계속해서
그들의 증언을
확증하고 있다.
성경에서
사도들의 증언과
예언의 말씀은 모두
진리의 비춤이다.
이 비춤은
신성한 공급의 일부,
즉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녀들이
이단과 변절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공급하신 것의 일부이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또한’이라는 말은,
앞 절들에서
주님의 변형에 관한 진리를
미신적인 신화에 대항하기 위한
예방접종으로 다루었고,
이것에 더하여
19절에서
신언자가 말한
말씀의 진리를 사용함으로써
한층 더 신뢰할 만한
확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변형되셨을 때
그분의 영광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에 대해
말하고 나서,
계속해서
예언의 말씀을 사용하여
자신의 증언을
확증하고 강화한다.

베드로는
믿는 이들이
신언자가 말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들이
구약의 예언들을
연구하고 있었고
그것들에
주의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베드로는
성경에 있는 예언의 말씀을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에 비유했다.
이것은
이 시대가
어두운 밤이자
어두운 곳이며,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며 행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 그것은
성경에 있는
예언의 말씀이
믿는 이들을 비추는
등불로서
(다만 정신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문자로 된
지식이 아닌)
영적인 빛을 전달하여
그들의 어둠을 비추며,
그들이
밝은 낮에 들어가도록
안내할 뿐 아니라,
어두운 밤을 지나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날이 밝을 때까지
안내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햇빛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까지,
우리에게는
우리의 발걸음을 비추는 빛인
이 말씀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어두운 곳을
등불처럼 비추는
성경의 예언의 말씀에
주의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떠오르셔서
어둠을 비추실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어두운 곳’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또한
‘아주 음산하고 어두컴컴한 곳’,
즉 ‘지저분하고 메마르고 방치된 곳’으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변절이라고 하는 어둠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베드로는
날이 밝고
샛별이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우리가
신언자가 말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하나의 비유로서,
빛으로 충만하게 될
장차 오는 때를 설명하고 있으며,
동트기 전
샛별이 떠오르면서
날이 밝는 것처럼,
샛별이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 믿는 이들은
성경에 있는,
빛을 비추는
예언의 말씀에 주의함으로써
비춤을 받고
밝아진 사람들이다.

변절의 때에
믿는 이들은
신언자가 말한
말씀이
등불처럼
변절의 어둠을 뚫고
그들을 비추어
날이 밝아 올 때까지,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믿는 이들은
주님의 임재를
간절히 추구하고
깨어 있도록
동기를 부여받고
격려받아,
주님께서
도둑처럼 오실 때에
그분의 파루시아의
은밀한 방면을
놓치지 않고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의의 해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오실 때에)
밝아 올 날인
오는 시대,
곧 왕국 시대를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
이 의의 해의 빛은
캄캄한 밤과 같은
이 시대의 암흑을 뚫고
빛을 비출 것이다.
이 일이 있기 전,
밤이 가장 깊을 때에
주님께서
사랑스럽게 나타나시는 것을
깨어서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샛별처럼 나타나실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날이 밝는 것이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를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정확한 말이다.
바로 그날에
주님은
의의 해로서
빛나실 것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이
매우 가까운 때는
이른 새벽에
비유될 수 있는데,
그때에 주 예수님은
깨어 있는 믿는 이들에게
샛별이 되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지만,
베드로는
더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상 1장 19절에서
베드로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
그는
온 세상이
어두운 곳이고
현시대가
어두운 밤이라고
말한다.
성경의 예언들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등불이 없기 때문에
우리 역시
어둠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언자가 말한 말씀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는
우리의 등불이다.
우리는
신언자가 말한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빛의 비춤을 받는다.
결국 이 빛은
우리 속에서
영적인 낮이 밝아 오고
샛별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비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먼저 영적인 낮,
즉 우리 속에서 밝아 오는 낮에 대해
말한다.
또 베드로는
장래의 어느 날,
곧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날에 대해서도
말한다.

우리의 체험은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베드로가
영적인 낮과
주님께서 오시는 날
모두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많은 경우
어둠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성경의 예언들에 온다.
예언들을 연구할 때
등불이
우리 속에서
빛나기 시작한다.
자연히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밤에 있지 않고
낮에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서
영적인 낮이
밝았기 때문이다.
등불이
우리를 비출 뿐 아니라
우리 속에서
동이 틀 것이다.
샛별이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얼마나 기쁜가!
우리 주변이
전부 어두울지라도
우리 속에는
샛별이 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날이 밝는 것은 또한
주 예수님께서
의의 해로
다시 오실 때인
장래 어느 날을 가리킨다.
주님은
눈에 보이게 오시기 전에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샛별이 되실 것이다.
그러므로 1장 19절에 있는
베드로의 말은
우리의 영적 상태와
주님의 오심에
모두 적용된다.

우리가
성경의 예언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 속을 비추는
등불을 체험할 것이고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샛별을 누릴 것이며
우리 속에서 밝아 오는
영적인 낮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주 예수님께서
샛별로 나타나셔서
의의 해이신 그분으로
동이 틀 때까지
이런 상태에 머물 것이다.

지난 오십 년 동안
세상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지만,
나는
신언자가 말한
성경 말씀의 빛으로 인해
놀라지 않았다.
나는 또한
베드로의 말에 따라
샛별을 누리며
내적으로
영적인 낮이
밝아 오는 것을
누리고 있음을
증언할 수 있다.

먼저 우리에게는
신언자가 말한
말씀의 비춤이 있다.
그런 다음 이 비춤은
우리 속에서
밝아 오는 낮이 된다.
겉으로 볼 때
우리는
어둠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빛이 충만하다.
주님께서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샛별로 나타나시고
의의 해로 떠오르실 때까지
우리는
샛별과 영적인 낮의 밝아 옴을
계속 누릴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베드로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형제님들,
유대인 믿는 이들인 여러분은
구약의 예언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주님의 오심에 관한
우리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지금 어떤 이단자들은
여러분에게
이것이
일종의 미신이고
일종의 이야기, 신화, 전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이단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우리의 증언이 있고
여러분 속을 비추는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날이 밝고
샛별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신언자가 말한 말씀이
여러분 속을
비추게 하십시오.”

요한계시록 2장 28절은
그리스도께서
이기는 이들에게
샛별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예표들과 관련해서,
성경 전체는
빛이신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샛별 곧 발광체이신
그리스도로 끝마친다.
샛별은
자정 후
동트기 전인
가장 어두운 시간에
나타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시대가 끝나기 전인
가장 어두운 시기에
빛나는 샛별로서 나타나실 것임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샛별로 나타나시는 것(계 2:28)과
의의 해로 나타나시는 것(말 4:2)은
동시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자는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고,
후자는
날이 밝은 후에 일어난다.
날이 밝은 후에 뜨는
의의 해로서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날이 밝기 전에 뜨는
빛나는 샛별로서
그리스도는
깨어 있고
준비하고
그분을 기다리는
이기는 이들에게
은밀히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사랑하고
깨어서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샛별이신 그분 자신을
은밀하게 나타내 주실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그분께서
오랫동안
이 땅에 계시지 않다가
돌아오실 때,
그분의 임재의 신선함을
가장 먼저 맛보는
특권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을 격려하여
주님의 임재를
간절히 추구하고
깨어 있게 함으로써,
그분께서
도둑같이 은밀하게 오실 때
그분 앞에 설 수 있게 할 것이다.
샛별이신 그리스도는
이기는 이들에게
첫 번째 보상,
가장 이른 보상으로
주어지실 것이다.
우리는
샛별이신 주님의
은밀한 나타나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가장 어두운 때에
이기는 이들 안에는
빛나는 별이 있다.
이기는 이들은
샛별이신 그리스도라는
특별한 빛을
소유하고
누릴 것이다.

우리는
날이 밝고
샛별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언들을 이해하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에녹은
첫 번째로
예언한 사람,
즉 예견한 사람이다.
그는
육십오 세에 낳은 아들에게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이름에는
예언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데,
그 뜻은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이 온다’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장차 올 홍수의 심판을
예언한 것이다.
에녹은
홍수가 올 것에 관한
예언을 받은 후에,
일어나서
경건하지 않은 세대를 떠났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는
죽음을 보지 않았다.
다니엘이
이상을 보고
예언을 기록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께
‘보배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의 이상을 썼던 것도
그가
주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였고
일찍이 주님의 품에 기대었던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들은
다음의 말씀을 입증해 준다.
“여호와의 친밀한 조언이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있나니
/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분의 언약을 알려 주시리라.”

우리는
신언자가 말한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언자가 말한 말씀과 성경은
별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신언자가 말한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날이 밝고
샛별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별’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인(燐)’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이 별은
어두운 곳에
빛을 가져오는
인과 같은 것이다.
성경은 단지
흰 종이에
검은 글자가 쓰인
책이어서는 안 된다.
죽은 문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인과 같은 어떤 것,
즉 샛별이신 그리스도께서
떠오르실 때까지
우리는
성경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합당하고 살아 있는 방식으로 대한다면,
이 성경은 확실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바뀔 것이다.
이것이 전환점이다.
곧 말씀이
그리스도로 바뀌어야 하고,
문자인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으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말씀과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신언자가 말한 말씀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
인으로서,
어둠을 뚫고 나온 샛별로서
떠오를 때까지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손에
성경을 가지는 것과
우리의 마음속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성경 지식을 가지는 것과
우리의 영 안에
빛나는 별이 떠오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신학교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떠오르고
빛날 때까지
우리 안으로
말씀을 취하며
살아 있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별을 가질 것이며
또한 별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별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을 읽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때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신언자가 말한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 안에는
무언가가
빛나고, 떠오르며,
밝아 오고, 뚫고 나오는 것이 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기도로 읽는 동안에
우리 속 깊은 곳에는
빛나고 빛 비추는
어떤 느낌이 있으며,
이 빛 비춤은
주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솟구치게 한다.
우리는
그분이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느낀다.
우리는
“오,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이신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많은 때에
이러한 빛 비춤에 의해
우리는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제정신이 아닐 정도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여명,
곧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샛별로서
오시는 것이다.
많은 때 나에게
이 거룩한 말씀이 있었을 때
어떠한 것이
내 안에
샛별처럼 떠올랐다.
오, 이것은 놀랍다!
상황은 밝지 않고
주변 환경은 어둠이 가득하지만,
우리 안에는
빛을 비추고
빛나며
영광으로 충만한
무언가가 있다.

우리는
말씀을 사랑하지만
죽은 문자를 대하는 식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밝아 오고
솟아오를 때까지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말씀을 사모한다.
그것은
지식이나
기록된 문자가 아닌
하루를 여는
빛나는 별의 떠오름이다.

박사들의 시대에는
별을 보는 것이
기적적인 일이었지만,
오늘날 샛별을 보는 것은
정상적이고
우리의 규칙적인
체험이 되어야 한다.
매일 우리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샛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저
성경을 읽기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날이 밝고
샛별이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신언자가 말한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 별은
살아 있는 말씀에서 비롯된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는
말씀과 샛별이
함께 있다.
첫째, 우리는
말씀을 가진다.
둘째, 우리가
신언자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샛별을 가진다.
우리가 단순히
이 내면의 떠오르는 별을
그대로 계속해서 따른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영 안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봉사이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는
빛의 세 근원이 언급된다.
그것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
밝아 오는 날,
떠오르는 샛별이다.

믿는 이들에게 비추는 등불인
성경 말씀은
비추는 영적인 빛을
전달한다.
많은 신학교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이들이 아직도
어둠 속에 있다.
그들에게는
성경 말씀으로부터 오는
빛이나 비춤이나 밝힘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성경을 열 때마다
빛 비춤을 받는다는 것이다.
매 쪽이
빛을 내고,
매 줄이
빛 비춤을 주며,
심지어 매 단어가
우리를 밝혀 준다.
그러한 비춤을 통해
우리는
낱낱이 폭로된다.

과거에 우리 모두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본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았다.
우리는
어둠 속에 있었고,
그 누구도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납득시킬 수 없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납득시키려고 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옳다는 것을
더 주장했고,
자신을 더 변명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교회 집회에 참석했고,
집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는 폭로되었다.
우리는
우리를 비추는
신성한 빛의 비춤을 받았고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회생활 안에는
외적으로 매력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를 매혹했고
여전히 매혹하는 것은
빛의 비춤이다.
신성한 빛이 항상
성도들 안에서
비추고 있다.
그 결과,
교정이나 바로잡음이나
설득이나 유죄판결이
별로 필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내적 비춤이 여러 가지 모든 문제들과 필요를 돌본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을 받을 때마다
이 말씀은
우리 속에서 비추고,
이 비춤은
우리를 폭로하며,
이 폭로는
우리를 굴복시킨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을지라도,
성경 말씀은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 속에는
항상 비추고
우리를 굴복시키는
놀라운 무언가가 있다.
때로 우리는
배우자와 다투고 싶지만,
즉시
이 놀라운 비춤이
우리를 제한한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에서
살아 있는 말씀이
비추는 빛이 된 것이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처럼
영적인 빛을 전달하여
믿는 이들을 밝혀 준다.
이 등불은
믿는 이들 속에서
떠오르는 샛별이 되고,
결국에는
동이 트게 한다.
곧 의의 해이신
주 예수님께서 오실 때
밝아 오는 낮인
왕국 시대를 가져온다.
이렇게 비추는 빛은
등불에서
날이 새는 것으로
진보한다.
우리가
그 빛 아래
더 많이 있을수록
그 복사하는 과정이
더 많이 이루어진다.
신성한 빛의 비춤 아래서,
사복음서에 기록된
주 예수님의 인간 생활이라는 원본이
완전히 계시된다.

우리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성경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 속의 상태는
날이 밝고
샛별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처럼 될 것이다.

비유적으로, ‘날이 밝는 것’은
밝아 오는 대낮과 같은
다가올 왕국 시대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예표들과 관련해서,
성경 전체는
빛이신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샛별이신 그리스도로 끝마친다.

‘샛별’은
왕국 시대가 밝아 오기 전인
가장 어두운 밤 시간에,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이들의 마음에
은밀하게 떠오르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우리가
빛을 비추는 성경 말씀에
계속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리스도께서
밝은 샛별로서
실지로 나타나시기 전에,
우리 안에서
낮처럼 밝아 오는 왕국과
우리의 마음속에서
샛별처럼 떠오르시는 그리스도를
얻게 될 것이다.

샛별이신 그리스도는
이기는 이들에게
첫 번째 보상으로
주어지실 것이다.
우리는
샛별이신 주님의
은밀한 나타나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1일

롬 13:12 밤이 깊었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일들을 벗어 버리고, 빛의 무기로 무장합시다.

살전 5:4-6 그러나 … 여러분은 어둠에 있지 않으니, 그날이 여러분에게 도둑처럼 닥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아들들이고 낮의 아들들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서 정신을 차립시다.

밤은 잠자는 때이다. 그러나 ‘밤이 깊었다’(롬 13:12). 그러므로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며, 더 이상 잠을 자서는 안 된다.

현시대는 밤중이다. 주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 날이 밝을 것이다. 다음 시대는 낮 시간일 것이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야 할 뿐 아니라, 어둠의 일들을 벗어 버리고 빛의 무기로 무장해야 한다(롬 13:12). 이것은 전쟁을 암시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언들이 흥미롭지 않고 해석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은사들과 거룩함과 왕국을 추구하는 것은 중요하고 긴급하게 필요하지만, 예언들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부차적이고 꼭 알고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언들을 연구하는 것이 지식의 증가만 가져다줄 뿐 영적 생명이 성장하는 데에는 유익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모두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언들을 알기를 요구하시며, 믿는 이들은 예언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베드로의 말은 구약의 신언자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증언(16-18절)을 확증하고 강화하며, 이단과 변절에 대항하도록 믿는 이들에게 예방접종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주 예수님도 우리에게 예언들을 이해하라고 명하셨다(마 24:15). 교회가 이 예언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많은 믿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믿음을 잃고, 거짓말에 속고, 예언에 대한 지식이 없어 멸망하고, 깨어 있지 않아 주님의 오심을 잊어버릴 것이다.

성경은 매우 정확한 책이다. 심지어 한 글자도 틀리지 않는다. 우리는 한 단어도 잘못 해석하거나 바꾸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부주의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놓칠 것이다. 만일 예언들을 읽는 사람이 정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정확성이 희생된다. 주 예수님께서 출생하시기 전에 많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메시아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구약의 예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메시아, 곧 기름부음 받으신 분을 보내 주실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실제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을 몰랐다. 그들은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신 예수님을 갈릴리 출신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을 거절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오신 메시아를 놓치고 말았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구약의 예언들을 이해하는 데 섬세하지 못했고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을 놓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 또한 예언들을 개괄적으로만 이해할 뿐 정확하고 섬세하게는 알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놓칠 것이고 손실을 겪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언들을 반드시 정확하게 알도록 배워야 하고 부주의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는 태도를 지녀서는 안 된다.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인 가치를 완전히 놓칠 것이다. 성경은 영적인 책이다. 우리가 정확히 알고자 하는 목적이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채우려는 것이라면, 우리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언들을 연구하는 목적은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예언들을 연구할 때 호기심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생명을 만지고 영을 만지며 주님을 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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