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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양 떼의 본이 됨으로써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함

Shepherding the Flock of God
according to God
by Being Patterns
of the Flock

그 양 떼의
본들이 됨에 의하여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함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갈망을 따라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는 것이다
— 벧전 5:1-4.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
하나님의 기쁨이
생수의 원천, 곧 근원이
되어
그분 자신을
그분의 선민 안으로
분배하심으로
그들의 만족과 누림이
되시는 것임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이러한 누림의 목표는
하나님의 증가와 확장인
그분의 배필, 곧 교회를
산출하여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하나님의 충만이
되게 하는 것이다
— 렘 2:13, 요 3:29-30,
엡 1:22-23, 3:16-19, 21.

우리는
하나님을 마심으로써
그분의 표현을 위한
그분의 증가가 되기보다는,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리의 누림이신
하나님을 대치하는
(우상들을 예표하는)
웅덩이들을 팜으로써
이스라엘처럼
될 수 있다
— 렘 2:13.

우리 안에 있는 것 중에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우리의 삶에서
주님을 대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상이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자신의
모든 어떠함까지도
우상이 될 수 있다
— 겔 14:3, 요일 5:21.

우리의 평안, 안전, 건강, 소유물이
우리에게
우상들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가져가심으로
우리가
생수의 원천이신
그분을 마시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경륜 안으로
이끄시는 데
신실하시며,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고 흡수하고
마시고 먹고 동화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분의 표현을 위해
우리 안에서
증가되시는 것이다
— 고전 1:9, 5:7-8,
12:12-13, 렘 2:13.

우리는
우리의 누림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반드시 새롭게
다시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누리는 법을
알도록
도와야 하고,
빗나간 믿는 이들을
그들의 생명과 모든 것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귀한 인격을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누리는
단순성 안으로
다시 이끌어야 한다
— 고후 11:2-3, 1:24, 계 2:4, 7.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교회생활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한다.
교회생활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데
달려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면 누릴수록
교회생활의 내용은
더 풍성해질 것이다.

고린도전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관한
책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누리는 것이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다
— 고전 1:2, 9, 24, 30, 2:2, 5:7-8.

우리는 반드시
양 떼의 본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하나의 본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연장으로서,
그리스도를 확대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살았다
— 벧전 5:3, 빌 1:19-21상,
행 9:4-5, 15, 26:19, 딤전 1:16.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를 듣고,
그리스도를 배웠다
— 행 9:1-19, 25-27,
22:14-15, 엡 4:20-21.

바울은
그리스도의
선택된 그릇으로서,
그리스도의 충만을 위해
그리스도를 담고,
그리스도로 채워지며,
그리스도로 흘러넘쳤다
— 행 9:15, 고후 4:7,
엡 1:22-23, 3:19.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 행 9:11, 13:1-3, 14:23,
16:13, 25, 20:36, 21:5,
22:17, 28:8, 엡 6:18, 골 4:2.

바울은
몸을 의지하면서,
몸 안에서
몸을 통해
몸을 위해
모든 것을 하였다
— 행 9:11-12, 17-18, 25-27,
고전 1:1, 12:14-27.

바울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실행했다
— 행 9:14, 21, 22:16, 딤후 2:22,
롬 10:12-13, 빌 2:9-11.

바울은
그의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예수님의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
(고난을 견디는 데
넘치는 힘을 가진
한 사람의 영)으로 말미암아
살았다.
그의 복음 전파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인간 생활 안에서
사람들 가운데,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수행된
고난의 사역이었다
— 요 7:37-39, 행9:16, 16:7, 22-34,
빌 3:10, 골 1:24, 고후 6:4, 11:23,
히 6:19-20, 13:13.

바울은
그의 연합된 영
(그의 사람의 영과
한 영으로 연합되신
신성하신 영) 안에서
살았다
— 행 17:16, 19:21,
롬 8:4, 6, 16, 고전 6:17.

바울은
본질적으로
그의 존재를 위해
기쁨의 영으로
충만했고,
경륜적으로
그의 기능을 위해
능력의 영으로
충일했다
— 행 13:9, 52, 엡 5:18.

바울은
선하고 순수한 양심을
항상 간직하도록
자신을 훈련하였다
— 행 23:1, 24:16, 딤전 1:19, 3:9.

바울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모든 일에서
주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였다
— 행 16:25, 27:35, 빌 4:4,
골 3:16, 살전 5:16-18.

바울은
하나님과 동맹을 맺고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담대히 복음을 말함으로써
예수님의 증거를
땅끝까지 확산했다
— 행 9:20, 27, 26:22-29,
28:31, 1:8, 살전 2:2, 롬 15:24, 28.

바울은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성도들을
소중히 보살폈고,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한
모든 진리들로
성도들을 보양하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그의 생활 안에서
나타내 보였다
— 행 20:18-38, 살전 2:1-12.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에게
하나의 본,
곧 장로들이
교회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본이었다
— 행 20:27-38.

그는
노예로서
모든 겸손과 눈물로,
모든 시련을 겪으며
주님을 섬겼다
— 행 20:19.

그는
대중 앞에서나
이 집 저 집에서
성도들을 가르침으로써,
즉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의결,
곧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속한
모든 것을
선포함으로써
그들을 목양했다
— 행 20:20, 26-27.

바울의 부담은
장로들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교회가
얼마나 소중하고
뛰어난 가치를 가졌는지를
알아,
하나님처럼
그들도
교회를
귀히 여기는 것이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온 양 떼를 위해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 오신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십시오.”
라고 훈계했다
— 행 20:28.

바울은
신성한 건축물을
파괴하는 이들,
곧 양 떼를 아끼지 않는
이리 같은 사람들과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에 관해
장로들에게
경고했다
— 행 20:29-30.

바울은
성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접촉했으며,
장로들에게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 행 20:31.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유일한 목표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몸에 의해
몸을 건축하신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기능을 발휘하는
본을 보여 주었다.
즉 모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 사역의 일,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일’을
하게 함으로,
모든 성도들이
생명 안에서
자라고
생명의 분량에 따라
생명 안에서
기능을 발휘하여
생명을 공급함으로써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게 하는’
본을
보여 주었다
— 엡 4:11-16.

바울의
네 번째 사역 여행(행 27-28장)은
특별한 방식으로
바울의 생활을
보여 주는데,
그의 생활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고,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 빌 1:19-21상, 3:8-9, 14, 4:13.

사도가
오랫동안 감금된 채
순탄하지 않은 항해를
계속하는 동안,
주님은
사도를
그분의 초월 안에
있게 하시고
염려의 영역을
뛰어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셨다.
가장 뛰어난
신성한 속성들을 표현하는
최고 수준의
인간 미덕을 지닌
이러한 삶은
완전히 위엄 있는 삶이었다
— 행 28:5-9.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성하게 부요해진
인성 안에서
또다시
이 땅에
사시는 것이었다!
이것은
복음서들에서 사셨던,
놀랍고 탁월하고 비밀하신
하나님-사람께서
그분의 많은 지체 중
한 사람을 통해
사도행전에서
계속해서
사시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께서 높이신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증인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생활과 사역에서
참되신 하나님 자신을
표현했는데,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의 과정들을
거치셨고,
이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으로서
바울 안에서,
바울을 통해서
살고 계셨다
— 갈 1:15-16, 24,
2:20, 3:14, 행 28:6.

주님은
사도를
폭풍이 이는
바다 위에서
함께 항해하는 사람들의
주인으로뿐만 아니라
(행 27:24),
생명의 보증인과 위로자로
삼으셨다
(22, 25절).
더 나아가 이제
평온한 육지에서
주님은
그를,
미신적인 사람들의 눈에
신기한 매력을 지닌 사람만이 아니라
(28:1-6),
그들의 치료자와 기쁨이
되게 하셨다
(7-10절).

바울이
로마에 있는
형제들에게서
받은
따뜻한 환영과
보디올에 있는
형제들에게서
받은
사랑스러운 돌봄
(행 28:13-15)은
초기에
교회들과 사도들 사이에 있었던
아름다운 몸의 생활을
보여 준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도가
결박당한 죄수로서
사탄이 점령한 제국의
어두운 수도(首都)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진
그리스도의 대사(엡 6:20, 마 28:18-19)로서
이 땅 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
곧 몸의 생활에 참여하는
또 다른 부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는
사탄의 제국(옛 창조물에 속한 사탄적인 혼돈) 안에서
종교의 박해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교회생활(새 창조물을 위한 신성한 경륜)을
누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교회의 궁극적인 결과는
영원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충만하고도 영원한 표현인
새 예루살렘일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의 본을 따르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의
실재와 목표가
되어야 한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가르쳤다.”
— 행 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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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양 떼의 본이 됨으로써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함”

6일

빌 1:19-21
왜냐하면
여러분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이러한 일이 결국에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나에게 있어서
죽음은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주님께 돌이켰을 때,
그는
율법과 그의 이전 종교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져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 되었다
(고후 12:2).
이제 바울은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
즉 유대인들과 천사들과 귀신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기대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온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잠기고
그리스도로 적셔져,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그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를
열망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그리스도는
표현되시고 확대되실 것이다
(빌 1:20, 3:9).

주님은
사도를
폭풍이 이는
바다 위에서
함께 항해하는 사람들의
주인으로뿐만 아니라
(행 27:24),
생명의 보증인과 위로자로
삼으셨다
(22, 25절).
더 나아가 이제
평온한 육지에서
주님은
그를,
미신적인 사람들 눈에
신기한 매력을 지닌 사람만이 아니라
(28:3-6),
그들의 치료자와 기쁨이
되게 하셨다
(8-9절).
사도가
오랫동안
감금된 채
순탄하지 않은
항해를 계속하는 동안,
주님은
사도를
그분의 초월 안에
있게 하시고
염려가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셨다.
가장 뛰어난
신성한 속성들을 표현하는
최고 수준의
인간 미덕을 지닌
이러한 삶은
완전히 위엄 있는 삶이었으며,
수년 전에
주님 자신이
이 땅에서 사셨던 삶과
닮은 삶이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성하게 부요해진
인성 안에서
또다시
이 땅에
사시는 것이었다!
이것은
복음서들에서 사셨던,
놀랍고 탁월하고 비밀하신
하나님-사람께서
그분의 많은 지체 중
한 사람을 통해
사도행전에서
계속해서
사시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께서 높이신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증인이었다!
바울은
항해하는 동안에
그리스도를
살고 확대했다
(빌 1:20-21).
사람들이
극진한 예우를 갖추어
(행 28:10),
즉 지대한 존경과
최고의 경의로
그와 그의 일행들을
예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대사(大使)는 마땅히
사람들에게
그러한 존경과 경의로
대우받아야 한다
(행 28:9).

사도는
… 자신의 생활과 사역에서
참되신 하나님을
표현했다.
참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가 되시고
인간 생활을 사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을
거치시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으로서
바울 안에서,
바울을 통해
살고 계셨다
(행 28:6).

로마에서 온
형제들의
따스한 환영과
보디올에 있는
형제들의
사랑스러운 돌봄(행28:13-14)은
초기에
교회들과 사도들 사이에 있었던
아름다운 몸의 생활을
보여 준다.
이러한 생활은
사탄이
어둡게 한 땅,
곧 사람이
거주하는 땅 위에 있는
하늘에 속한
왕국 생활의
일부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도가
결박당한 죄수로서
사탄이 점령한 제국의
어두운 수도(首都)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진
그리스도의 대사(엡 6:20, 마 28:18-19)로서
이 땅 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왕국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
곧 몸의 생활에 참여하는
또 다른 부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는
사탄의 제국 안에서
종교의 박해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교회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행 28:15).

사복음서에서
하나님은
육체가 되셨고
인간 생활을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이렇게 하여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골 2:9)는
완성되셨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체현이신
이분은
생명 주시는 영(고전 15:45)으로서
자신을
그분의 믿는 이들 안으로
확산시키신다.
즉, 하나님께서
표현되시도록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변화된
백성 안으로
일해 넣으심으로
그들을
교회의 구성원들이
되게 하신다.
교회의 궁극적인 결과는
영원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충만하고도 영원한 표현인
새 예루살렘일 것이며,
새 예루살렘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영원히 세세토록 다스리시는 영역인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일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모든 복음 전파의
실재와 목표가
되어야 한다
(행 28:31).

 

5일

행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엡 4:16
온몸은
그분에게서 나온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입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자신의 피’라는 말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귀한 사랑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교회의 귀중함,
교회의 뛰어난 가치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사도는
에베소서 5장 23절부터
32절까지에서와 같이
교회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보물인,
곧 주님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얻으신
보물인
교회의 가치를
언급했다.
바울은
장로들도
감독들로서
하나님처럼
교회를 소중히 여기기를
기대했다.

성령과
하나님 자신의 피는
다 그분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교회를 위한
신성한 공급이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고,
하나님 자신의 피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일은
교회를 얻었고,
이제 하나님 자신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생명 주시는 영께서
(고전 15:45)
감독들을 통해
교회를 돌보신다
(행 20:28).

에베소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유일한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주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건축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은
교회가
주님에 의해
직접 건축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많은 지체들을 통해
건축된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몸에 의해서
몸을 건축하신다.
하나님은
이 목표를
성취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에베소서 3장 2절은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 직분을,
4장 12절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말하고 있다.
…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 직분은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바울은
그런 청지기였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라.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성도들에게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 직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 주려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 따르면,
몸의 건축은
사도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책임이다.
… 성도들은
온전하게 되어
그 사역의 일,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 절에서
‘…하게’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결과적으로 하게’,
‘목적으로 하게’
혹은 ‘위하여 하게’를
의미하기도 한다.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것은
사역의 일을
가져오며,
사역의 일은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몸은
사도들이나
다른 인도하는 이들에 의해
직접 건축되지 않고
성도들에 의해
직접 건축된다.

에베소서 4장 12절은
성도들에 대해 말하고
16절은
‘각 지체’를 언급한다.
16절에 따르면,
몸은
스스로 자라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된다.
실지로 이렇게 되기 위해서
사도들과
다른 인도하는 이들에 의해
모든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자신과 똑같이 되기를
기대했다.

바울은
사도만이 아니라
또한 신언자요,
복음 전하는 이요,
목자 및 교사였다.
아마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에베소서 4장 11절에 언급된
은사 있는 이들을,
명백한 네 가지 구별되는 범주로,
곧 사도들과
신언자들,
복음 전하는 이들과
목자 및 교사들로
구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본인
바울은
이 모든 이였다.
바울은
확실히 신언자였다.
그는
그의 서신서들에서,
고린도전서 15장과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몇 가지 위대한
예언을 했다.
바울은 또한
복음 전하는 이였다.
어느 누가
바울보다 더 위대한
복음 전파자이겠는가?
그는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다.
더욱이 바울은
목자와 교사이기도 했다.
밤낮으로 그는
모든 교회들과 모든 성도들을
돌보았다.
끝으로 바울이
교사였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 그러므로 바울은
사도요,
신언자요,
복음 전하는 이요,
목자 및 교사였다.
에베소서 3장과 4장에 있는
바울의 부담과 의도는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방면에서
자신과 똑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4일

행 20:27-28
왜냐하면 내가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의결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온 양 떼의 감독들로
세우셨으니,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온 양 떼를 위해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 오신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십시오.

바울은
에베소의 믿는 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관심사를
돌보며,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관심했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의결과 계획과 경륜을
선포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관하여
상당히 많이 가르쳤다.

이와 같이
모든 장로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하고
성도들에게
이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성도들 대부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앎으로 인하여
뿌리를 깊이 내리고
터를 견고히 잡게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선하고 겸손하고
사랑하고 친절하라고
말하는
얕은 가르침만을
받았을 뿐이다.
… 하나님의 신약 경륜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것들이
절대적으로
그들 가운데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한
합당하고 성경적인
신성한 계시이다.

장로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워야 하고
그러한 것들에
몰두해야 한다.
… 그들은
낙심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경륜을
말함으로써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듣는 것과
그러한 높은 부름을
받는 것은
낙심한 성도들에게
강한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회복 안에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주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바울은
장로들에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온 양 떼를 위해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 오신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십시오.”
라고 권면했다.

그들을
장로들로
임명한 것은
외견상으로는
바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을
감독자로
세우신 분은
성령이셨다.
여기서 바울은
‘장로’라는 말 대신에
‘감독’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두 용어는
동의어로서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
‘장로’는
사람을
언급하는 용어이고,
‘감독’은
장로의 책임에 대해
말하는 용어이다.
감독은
부주의하거나 잠자서는 안 되며
항상 깨어서 경계해야 한다.
그는 반드시
교회의 상황을
알고 있어야 하고
양 떼 가운데 있는
한 명 한 명을
감독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장로는
양 떼의 필요가
무엇이고,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가르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 오신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라고
권면하였다.
헬라어에서
‘사 오다’는
‘획득하다’
혹은 ‘얻다’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피’는
보배로운 표현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그분의 눈에
매우 소중하고 귀중한
보물로 여기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로
교회를 사실 정도로
교회를 사랑하신다.

이와 같이
장로들도
하나님처럼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피를
쏟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섬세한
감정과 애정을 가지고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사도행전 20장 29절은
“나는 압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
들어올 것이며,
그들은
양 떼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양 떼를 아낀다는 것은
소중히 보살피고 보양함으로
부드러운 관심을 가지고
양 떼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리들은
이런 식으로
교회를
돌보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자신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
교회를 희생시킨다.
그들은
먹이를 사냥하는
이리들이다.

계속해서 사도행전 20장 30절은
“그리고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서도
일어날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밖에서 들어온
이리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20장 31절은
“그러므로 여러분은
늘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바울은 단지
사람들의 집에
갔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 각 사람을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했다.
우리 중 장로들은 반드시
밤낮으로
이러한 일을 할
부담을 취해야 한다.
그들은
성도들의 가정으로 가서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해야 한다.

 

3일

행 20:19-20
나는
모든 겸손과 많은 눈물로
노예로서
주님을 섬겼으며,
또 유대인들의 음모 때문에
닥친 시련도
겪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대중 앞에서나
이 집 저 집에서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선포하고 가르쳤으며,

성도들 중에
누구도 스스로
장로 직분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다.
고린도후서 3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스스로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충분한 자격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장로 직분의
책임을 지고 있는
모든 형제들은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 바울은
모든 장로들에게
진정한 본이다.
… 비록 그 자신은
결코 장로가 된 적이 없었지만,
그는
그가 훈련시켰던
장로들에게
모범과 귀감과 본보기였다.
그래서 그가
자신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그의 기대는
모든 장로들이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며
자신이 행한 것을
본받는 것이었다.
첫째로,
바울은
자신이
노예로서
주님을 섬겼다고
말했다.
장로들은 모두
노예로서
주님을 섬겨야 한다.
그들은
존엄하거나
높은 위치에
자신을 두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는
계급도 지위도 없다.
오직 겸손과
노예의 신분만이 있다.
둘째로,
바울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님을 섬겼다고 말했다.
겸손 뒤에는
기쁨과 행복 대신에
눈물이 있다.
그런 다음에
셋째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주장하면서
일을 손상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다른 이들로부터 온
시련을 겪었다고
말했다.

장로들은 단지
종으로서만이 아니라
노예로서
주님을 섬겨야 하며,
자신의 권리와 모든 자유를
잃어야 한다.
사실상
장로 직분 안에 들어가는 것은
노예의 신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섬기는
노예들이다.
여기서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들을 섬김으로
간접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장로들은
그들의 주인의
대가족을 섬기는
노예의 부담을
반드시 짊어져야 한다.
우리는
노예로서
모든 겸손으로
행동하고
일하며
심지어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겸손’이라는 단어를
낙인처럼
우리 자신에게
새겨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것도
자랑할 권리가 없다.
모든 영광은
우리의 주인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분만이
어떤 것을 자랑하실
자격이 있으시다.
우리는
겸손하도록
운명 지어졌다.
겸손한 것은
쉬운 것이 아니지만
자랑하는 것은 쉽다.
겸손해지는 것과
심지어 겸허하게 되는 것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20장 20절은
“나는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대중 앞에서나
이 집 저 집에서
주저하지 않고
여러분에게
선포하고 가르쳤으며”
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의무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주저하지 않고
전파했다.
전파하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유익한 것들을
남김없이
전파하기 위해
신실하게
수고했다.

바울은
자신의 책임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는 이들을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쳤고
이 집 저 집에서
개별적으로 가르쳤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의 행정은
사무적인 일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경영이 필요하다.
그러나 장로의 주된 책임은
베드로가
그의 첫 번째 서신서의
5장 2절에서 말한 것처럼,
먼저는
목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적했듯이
목양은
가르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장로들은 또한
가르쳐야 한다
(딤전 3:2, 5:17).
장로들은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먼저
배워야 한다.

성도들의 집을
방문해서
단순히
그들에게
주님을 신뢰하고 믿으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장로들은
그들에게
몇 가지 유익한 절들을
읽어 주어야 하고,
몇 가지 정의를
내려 주며,
거룩한 말씀으로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럴 때 성도들은
온전하게 되고
세워지며
견고하게 되고
건축될 것이다.

목양하는 것은
단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충분하지도 않고
주된 일도 아니다.
주된 책임은
성도들에게 가서
그들의 집에서
그들을 목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장로들을 위하여
대중 앞에서나
이 집 저 집에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본을 세웠다.
헬라어로
‘이 집 저 집에서’는
‘집들을 따라서’를
의미한다.
만일 방문해야 할
어떤 집이 있다면
장로들은 가야 한다.
만일 방문해야 할 집이
열 집이라면,
장로들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방문하기 위해
각 집에 가야 한다.

 

2일

고후 11:3
전에
뱀이
간교하게
하와를
속였던 것처럼,
나는 다만
여러분의 생각이
부패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단순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릴까
두렵습니다.

고전 1:9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통 안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서
‘단순성’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는 이들의
단일한 마음에서 나온
충성과
단일한 생각에서 나온
신실성을
가리킨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아내인
하와는
뱀, 곧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품게 하고
그분의 말씀을
은밀히 손상할 때에
그에게 속았다.
그 결과 하와는
생명나무를 먹는
단순성에서 빗나가
지식나무로
이끌려 갔다
(창 3:1-6).
… 그리스도와 약혼한
순수한 처녀인
고린도 교회는
유대교도들,
곧 사탄의 사역자들(고후 11:15)에게
속고 있었다.
그 당시 유대교도들은
또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고후 11:4)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은밀히 손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은밀히 손상하며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는
고린도 사람들이
유대교도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빗나가고,
또 그들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참되게 감상하고 사랑하고 누리는 데서
떨어질까 봐
두려워했다.

생명나무를 먹는 것,
곧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한다.
교회생활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데
달려 있다.
우리가
그분을
누리면 누릴수록
그 내용은
더 풍성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누리려면,
첫째가는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첫째가는 사랑을
버린다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잃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증거를
상실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등잔대가
우리에게서
옮겨질 것이다
(계 2:7).

고린도전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관한
책이다
(1:2, 9, 24, 30).
… 이 그리스도 안에는
절대적이고 놀랍고도 뛰어난
살균시키는 죽음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는
부정적인 모든 ‘세균’을
죽이는
살균의 요소가 있다.
…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를 먹고 누린다면
우리는
자양분을
얻게 될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은
죽음을 당할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십자가의 작용을 통해
교회 안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다
(고전 1:13상, 18, 23-24, 2:2).
‘십자가’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
특별히 그분의 죽음의
주관적인 방면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존재 안에는
죽이는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그분을 누리는 동안에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을 당한다.
우리가 날마다
그분을 누릴 때
우리는 날마다
죽음을 당한다.
한 형제가
다른 형제로 인해
마음이 몹시 상했거나,
심지어는 증오가
가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형제가
그리스도를 누릴 때,
다른 형제에 대한
증오의 세균은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당한다.
결혼 생활에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마음 상하게 한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가
날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누린다면,
서로에 대한
나쁜 느낌은
사라진다.
이처럼 깨끗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체험한
그리스도 자신 안에 있는
죽이는 요소에 의한 것이다.
그들 안에는
증오가 사랑으로 바뀌는
커다란 변화가 있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누렸기 때문이다.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에는
너무도 많은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대한
편지를 썼다.
이 누림은
우리 안에 있는
세균들을 죽임으로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한다.

하나님은
고린도전서에 계시된
적어도 스무 개 항목의
풍성을 소유하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몫으로
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외에
어떤 사람들이나 사물들에
주의를 집중해서는 안 되고
그분께 집중해야 한다.
즉 믿는 이들 가운데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유일한 중심이신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분의
교통 안으로
부르신 것이다
(고전 1:9).

 

신언노트, 2018 11 18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갈망을 따라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
 곧 충분한 기쁨이(the good pleasure),
살아 있는 물들의,
 원천, 곧 근원이 되어
 그분의 선택된 백성 안으로
 그들의 만족과 누림을 위하여
 그분 자신을
 분배하시는 것임을
 반드시 보아야만 합니다;
이 누림의 목표는
 그 교회,
 곧 하나님의 배필을
 (counterpart; 한 짝을),
 하나님의 증가,
 곧 하나님의 확장으로
 산출하여,
 그분의 표현을 위한
 하나님의 충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을 마셔서
 그분의 표현을 위한
 그분의 증가가 되는 대신에,
우리는
 살아 있는 물들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버림에 의해
이스라엘처럼 되어
 (우상들을 예표하는)
 물통들을
 (cisterns; 물탱크들을, 저수지들을)
 잘라내 만들고
 (to hew out; 잘라 만들어 버려서)
우리의 누림이신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한 우상은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이든
 우리가
 주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또는 우리의 생활에서
 주님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것은 무엇이든,
 또 심지어 우리가
 어떤 것인 것조차도 무엇이든
 (whatever we are),
 한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평안, 안전, 건강,
 또 소유물들이(possessions; 재산이)
 우리에게
 우상들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 안에서
 신실하셔서
 이것들을 없애 버리시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 있는 물들의 원천이신
 그분께로부터(of Him; 그분에게서 [조금])
 마실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경륜 안으로
 이끄심 안에서
 신실하시고,
또 그분의 경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흡수하며,
 그리스도를 마시고,
 그리스도를 먹으며,
 또 그리스도를 동화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표현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증가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림으로
 필요로 한다는
 깨달음으로
 (to the realization; 실재화로, 실현으로)
 다시 데려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누리는지
 알도록
 도와야만 하고,
 또 우리는
 주의가 산만해진
 (distracted; 주의가 다른 데로 쏠린,
 혼란스럽게 된, 흩뜨려진, 빗나간)
 그 믿는 이들을
 그들의 생명과
 또 각각의 모든 것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귀중한 인격의
 진짜(genuine; 참된)
 감상(appreciation; 평가, 인식, 식별,
 진가를 알아봄, 맛보아 앎, 감사),
 사랑,
 또 누림의
 단순함으로
 (to the simplicity; 간단함으로, 평이함으로)
 다시 데려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이
 그 교회생활 안에 있는
 주된 문제가
 (the primary matter;
 그 기본적인[근본적인, 가장 중요한, 제일의] 일이[사안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교회 생활의
 내용은(the content; 내용물은)
 그리스도를 누림에
 달려 있습니다;
더 많이
 우리가
 그분을 누릴수록,
 그 내용이
 더 부유해질(the richer …; 풍성해질)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그리스도를 누림에 관한
 책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부활하신
 그 그리스도를
 생명 주시는 그 영으로
 누림이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 양 떼의
 본들이 됨에 의하여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해야만 합니다;
그 사도 바울은,
 그 모든 믿는 이들,
 곧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
 한 본으로서,
 그분의 계속인
 (as … continuation; 존속인, 연장인)
 그분의 확대를 위하여
 (for His magnification)
 그리스도를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한 제자였고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를 들으며
 (hearing Christ; 그리스도께 들으며),
 또 그 실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으로(as …;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배웠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선택된 한 그릇이었고,
그분의 충만을 위하여
 그분을 담았고,
 그분으로 채워졌으며,
 그분으로 넘쳐흘렀습니다.

바울은
 기도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몸을 의존하였고,
그 몸 안에서,
 그 몸을 통하여,
 또 그 몸을 위하여
 각각의 모든 것들을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실행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영에 의해
 (고통을 겪음을 위한
 풍부한[abundant; 충분한] 힘을 가지신
 한 사람의 영[대문자][에 의해])
 살았고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을 위한
 그 사람의 생활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또 사람들을 위해
 수행된
 그의 전파하는 사역,
 곧 고통을 겪음의 한 사역을
 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섞인 영
 (그의 사람의 영과
 한 영으로 섞이신
 그 신성하신 영) 안에
 살았습니다.

바울은
 본질적으로
 그의 존재를 위한,
 큰 기쁨의(of joy) (그) 영으로,
 또 경륜적으로
 그의 기능을 위한,
 능력의 (그) 영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was filled).

바울은
 그 자신을 훈련하여
 좋고(good; 선하고) 또 순수한
 한 양심을
 항상 가졌습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함,
 끊임없이
 기도함,
 또 각각의 모든 것들 안에서
 그분께 감사함의
 한 생활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동맹을 맺게 되었고
 (was allied with God;
 하나님께 연합되었고[지지를 받았고])
또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담대하게
 그 복음을 말하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도움을 받아서
 그 땅의
 가장 멀리 떨어진
 부분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증거를
 퍼뜨렸습니다
 (to spread; 확산시켰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그 성도들을
 소중히 여겼고
 (cherished; 마음에 품었고),
또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모든 진리들로
 그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였으며
 (nourished; 영양분을 주어 길렀으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축복받은 것이라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그의 생활함 안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에게
 한 본이었는데,
 그 장로들이
 그 교회에게
 무엇이(what; 어떤 것이)
 되어야만 했는지의
 한 본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겸허와(humility; 겸손과)
 또 눈물과(tears; 눈물들과)
 또 시련들로(trials; 괴로움들로)
 한 노예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publicly; 공공연하게)
 또 집에서 집으로
 (from house to house; 이 집 저 집에서)
 그 성도들을
 가르침에 의하여
 그들을
 목양했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의결
 (all the counsel; 모든 의도[계획]),
 곧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모든 것들을
 선포하였습니다
 (declaring; 분명히 밝혔습니다, 단언하였습니다).

그는
 그 교회를 향한(for; 위한)
 하나님의 귀한(precious; 소중한) 사랑과
 또 하나님의
 눈들 안에서의(in; 안에 있는)
 그 교회의
 귀중함,
 곧 뛰어난(exceeding; 대단한, 초월하는) 가치를
 그 장로들이
 보고(to see; 알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그 교회를
 매우 귀하게 여기도록
 (would treasure; 소중히 간수할 수 있게)
 부담을 졌습니다;
그는
 그 장로들에게
 “여러분 자신들에게
 또 그 모든 양 떼에게
 주의하십시오
 (take heed to; 조심하십시오),
 그들 중에
 (among whom; 그들 가운데에)
 그 거룩하신 영께서
 (the Holy Spirit;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독들로 두셨고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게 하셨으며,
 이는(which; 그 교회를)
 그분께서
 그분 자신의 피를 통하여
 얻으셨습니다(obtained)”
 (행20:28)라고 권고하였습니다
 (admonished; 충고[훈계]했습니다, 꾸짖었습니다).

그는
 그 장로들에게
 그 신성한 건축물의 파괴자들에 관하여
 경고하였는데,
 그들은 이리들이고,
 그 양 떼의 목숨을
 살려주지 않으며
 (not sparing the flock;
 그 양 떼를 아끼지 않으며),
 또 왜곡된(perverted; 그릇된) 것들을
 말하여
 그 제자들을
 멀리 끌어내서
 (to draw away; 떼어놓아서)
 그들을 따르게 합니다.

그는
 그 성도들 각 사람을
 접촉하였고,
 “삼 년 동안,
 밤과 또 낮에,
 내가
 눈물로
 각 사람에게
 권고하기를(admonishing)
 중단하지 않았다”
 (행 20:31)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그 장로들에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유일한 목표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이고
 또 그리스도께서
 그 몸에 의하여
 그 몸을 건축하시는 것을
 바울이
 보았기 때문에,
그는
 그 모든 성도들을
 “그 사역의 일에 이르도록,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에 이르도록,”
 온전하게 하는
 기능을 발휘함에 있어서(of; … 관하여)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에게
 한 본이었고,
 그래서
 그 모든 성도들이
 생명 안에서
 자라게 하였고
 또 그들의 생명의 분량에 따라
 생명 안에서
 기능을 발휘하게 하였으며
 (그래서) 생명의 한 공급이
 되게 하였고
 “사랑 안에서
 그 자체를 건축함에 이르도록
 그 몸의 성장을”
 (엡 4:11-16)
 야기하게 하였습니다
 (to cause …; 초래하게 했습니다).

바울의
 네 번째 사역 여행은
 (행 27-28장)
 그리스도를 삶,
 그리스도를 확대함,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들을 함,
 또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도록
 그리스도를 추구함의
 그의 생활을
 특별한 한 방식으로
 보여 줍니다:

그 사도의
 길고
 또 불행한(unfortunate; 재난을 입은)
 투옥(imprisonment; 감금)-항해의
 모든 (기간) 동안,
주님께서
 그 사도를
 그분의 승천 안에
 지키셨고
또 그가
 걱정의(of anxiety; 불안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far beyond; 멀리 떨어져서)
 한 생활을
 (a life; 한 생명을)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생활은
 그 가장 뛰어난
 신성한 속성들을
 표현하는
 그 가장 높은 표준의
 사람의 미덕들로,
 완전히 위엄있게 되었습니다
 (fully dignified).

이 분은(This; 이는)
 그분의
 신성하게 부유해진
 인성 안에서
 그 땅 위에
 다시 살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이 분은(This)
 기이하시고, 탁월하시며, 또 비밀하신
 그 하나님-사람이셨고,
 그분은
 그 복음서들 안에서
 사셨으며,
 그 사도행전 안에서
 그분의 많은 지체들 중의
 한 사람을 통하여
 계속하여 살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은(This)
 육체가 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부활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높이신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한 증인이었습니다!

바울의 생활과 또 사역 안에서
 그는 바로 그 참되신 하나님을
 표현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그분께서는
 육체 되심,
 사람의 생활,
 십자가에 못 박히심,
 또 부활의
 과정들을 통과하여
 가셨고,
또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영으로서,
 그러고 나서(then; 그 다음에)
 그의(him)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살고 계셨습니다.

그 폭풍 안에 있는
 바다 위에서,
 주님께서
 그 사도를
 그의 동료 항해자들의
 소유자로
 만드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의 생명-보증인과
 또 위로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때(now), 평안 안에 있는
 그 땅 위에서,
 주님께서
 그를
 더욱이
 그 미신적인 사람들의 눈들 안에서
 한 신기한(magical; 마법적인) 매력으로
 만드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
 한 치유자와
 또 한 큰 기쁨으로
 (만드셨습니다).

바울이
 로마 안의 형제들로부터
 받았던
 그 따뜻한 환영과
 또 보디올 안의 그들의
 그 애정 어린 돌봄은
 그 교회들과 또 사도들 사이에
 그 이른 날들 안에
 (in the early days; 초기에)
 있었던
 그 아름다운 몸 생활을
 보여 줍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 사도는,
 속박들(bonds; 사슬들) 안에 있는
 한 수감자로서,
 사탄이 강탈한(Satan-usurped)
 그 제국의
 어두운 수도의
 지역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실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진
 그분의 대사로서,
 그는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그 몸 생활 안에
 참여함의
 다른 부분 안으로
 갔습니다(come).

사탄의 제국
 (그 옛 창조 안에 있는
 그 사탄적인 혼돈) 안에서
 그가
 종교의 박해를
 겪고 있었던 동안에,
 그는
 하나님의 왕국
 (그 새 창조를 위한
 그 신성한 경륜) 안에서
 그 교회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한 위로와
 또 한 격려였습니다.

그 교회의
 궁극적인 유출은
 영원 미래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하고(full; 완전하고)
 또 영원한
 표현인
 그 새 예루살렘일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모든 복음 전파의
 실재와 또 목표여야만 하고
이때(as) 우리는
 그 사도 바울의 본을
 따릅니다
 — “하나님의 왕국을
 전파하고
 또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모든 담대함으로,
 방해받지 않고
 가르쳤습니다”
 (행 28:31).

 

1일

벧전 5:2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십시오.
하나님을 따라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해서 하며,
비열한 수단으로
이익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탐내어서 하지 말고
정성을 다하여 하며,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내적 존재이자
우리의 참된 인격인
우리 혼의
목자이시고 감독이시라고
말했다
(2:25).
그런 다음 5장 1절과 2절에서
그는
장로들에게
그들의 의무가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따라’라는 말은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의 이해와 신학과 가르침 안에는
하나님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을 목양할 때는
하나님을 살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일 때
우리는
하나님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가지게 되고,
다른 이들을 목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을 따라
목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따라
목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빛이시고,
거룩함이시고,
의이시다.
‘하나님을 따라’
목양하는 것은 최소한
하나님의 이 네 가지 속성들을 따라
목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네 가지 속성들을 따라
어리고 약하고 물러난 이들을
목양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목자가 될 것이다.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의도가
생수의 원천, 곧 근원이 되어
그분 자신을
그분의 선민 안으로
분배하심으로
그들의 만족과 누림이
되시는 것임을
계시한다.
이러한 누림의 목표는
하나님의 증가와 확장인
그분의 배필, 곧 교회를
산출하여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하나님의 충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요 3:29-30, 엡 3:16-19, 21).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
하나님의 기쁨이다
(엡 1:5, 9, 3:9-11).
예레미야서 2장 13절에
씨로 뿌려진
이 사상은
신약에서
완전히 발전된다
(요 4:10, 14, 7:37-39,
… 계 22:1, 17).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표현인
하나님의 증가가 되기 위해서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마셔야 했지만,
오히려 두 가지 악을
행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원천, 곧 근원이신
하나님을 저버렸다.
또 그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근원을 향해
돌아섰다.
… 웅덩이들을 파는 것은
이스라엘이
사람의 노력으로 애쓰면서
하나님을 대치하는
어떤 것(우상들)을 만드는
모습을 묘사한다.
웅덩이들이 새서
물을 담아 둘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생수로
분배되시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우리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고
우리를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하나님의 증가로
만들 수 없음을
가리킨다
(요 4:13-14).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 자신을
사람의 만족으로서
사람 안에
분배하시어
그분께서
확장되시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사람은
신실하지도 순결하지도 않았으며,
우상을 위해
하나님을 저버렸다.
…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자신의
모든 어떠함까지도
우상이 될 수 있다.
… 하나님께
그처럼 신실하지 못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이스라엘과 동일하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믿었을 때
평안과 축복이 있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많은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안전이나 건강이나 소유물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일들을 겪을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서
왜 그들에게
그러한 어려움이 닥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아 주시지 않는가 하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들이 있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를
우상들로부터 돌이켜서
그분 자신께로 다시 이끄는
그분의 목적에 대해
신실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평안, 안전, 건강, 소유물이
우리에게 우상들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가져가심으로
우리가
생수의 원천이신
그분을 마시도록 하신다.
우리의 집이나 우리의 소유물이
우리에게 우상들이 될 때,
우리는
그것들은 마시고
하나님은 마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상들을 처리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마시게 하는
문제에 있어서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경륜 안으로
이끄시는 데 있어서
신실하시며,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고 흡수하고
마시고 먹고 동화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분의 표현을 위해
우리 안에서
증가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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