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rd’s Jealousy
over the Church
as His Wife
우리가
성경의
깊은 사상 안으로
들어간다면,
성경이
아주 순수하고 거룩한 의미에서
로맨스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 고후 11:2, 계 19:7-9.
이 부부 중에
남자는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이 우주적인 부부 중에
남자가 되기를
갈망하신다
― 사 54:5-6, 62:5, 렘 3:14, 31:32.
이 부부 중에
여자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포함하는,
선택받고
구속받은
단체적인 한 백성이다
― 계 19:7-9, 21:9-10, 22:17.
역대로
하나님은
사람과
로맨스를
가져 오셨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에게
어떻게 구애하시고
결국 그들과
어떻게 결혼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이다
― 창 2:21-24, 아 1:2-4,
사 54:5, 62:5, 렘 2:2, 3:1, 14,
31:32, 겔 16:8, 23:5, 호 2:7, 19,
마 9:15, 요 3:29, 고후 11:2,
엡 5:25-32, 계 19:7, 21:2, 9-10, 22:17.
이 연결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생명이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표현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선민은
우주적인 한 쌍이 된다
― 계 22:17.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때,
하와가
아담의 생명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다
― 창 2:21-22.
바로 이 생명이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할 수 있고
그분을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한다
― 요 3:3, 5-6, 15-16, 29-30.
주님을
우리의 남편으로
사랑하고
그 결과
그분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배필과 확대와 표현으로서
그분과
하나가 된다
― 고후 11:2, 벧후 1:4,
요 3:15-16, 29-30.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분의 배우자로
선택하셨다.
성경의 예표에 따르면,
구약의 어떤 여인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배필이라는 것을
계시해 준다
― 호 2:19-20, 렘 2:2, 31:3,
겔 16:8, 창 24:67, 41:45,
룻 4:13, 삼상 25:40-42, 아6:13.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는
아담의 배필인
하와로
예표된다.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온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게 된 것을
예표한다
― 창 2:21-24, 엡 5:23-32.
리브가는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선택받은 것을
예표한다
― 창 24:67.
룻은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가
구속받은 것을
예표한다
― 룻 4:13.
아가에는
신성한 로맨스가
묘사되어 있다
― 아 1:2-4.
이 책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그분의 연인들 사이의
신혼의 사랑을
시적인 형태로
놀랍고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연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속성들과
그분의 연인들의
인간 미덕들의
연합 안에서
서로를 누린다
― 아 1:15-16, 4:7, 10-15,
5:1-2, 6:4, 10.
아가에 따르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매우 로맨틱해야 한다.
우리와 주 예수님 사이에
로맨스가 없다면,
우리는
로맨틱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주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신부를 위한
신랑으로 오셨다
― 요 3:29, 마 9:15.
주 예수님은
교회를
거듭나게 하셔서
그분의 신부가
되게 하신다
― 요 3:3, 5-6, 29-30.
거듭남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생명인
신성한 생명을 받는다.
이 생명 안에서,
이 생명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배필이
되고
그분과 짝을 이루는
자격을 가지게 된다
― 요 3:3, 5-6, 15, 29, 계 22:17.
이 시대의 마지막에
그리스도는
다시 오셔서
그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과
결혼하시고
그들을
그분의 아내로
맞이하실 것이다
― 계 19:7.
그리스도는
결혼 날에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원수와 맞서
전쟁을 해 온 이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이미 악한 자를 이긴
이기는 이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 계 19:7-9, 11-16.
영광스러운 결혼 날이
있을 것이며,
그때 그리스도는
그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 계 19:7-9.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은
영원토록
어린양의 아내일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계시된
신성한 로맨스의
완성이다
― 렘 2:2, 호 2:19-20,
계 19:7-9, 22:17.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원수를
패배시키는
전투원이어야 한다
― 엡 5:25-27, 6:10-18,
계 19:7-9, 11-16.
영적 전쟁은
몸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권익을 위해
전투를 벌이는
단체적인 군대이다
― 계 17:14, 19:14, 딤후 2:4.
그리스도는
싸우는 장군으로서
그분의 군대인
그분의 신부와
함께 오셔서,
아마겟돈에서
적그리스도와
싸우실 것이다
― 계 19:11-21.
그리스도는
그분의 군대와
함께 오실 때,
사람의 아들로서
오실 것이다
― 마 26:64, 계 14:14.
사람의 아들로서
그분은
그분께 어울리고
그분을 완전하게 하는
짝이 필요하실 것이다.
이 짝이
그분의 신부일 것이다
― 요 3:29.
결혼 예복은
우리가
우리의 매일의 의로서
살아 나타낸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결혼식에 참여할
자격을 줄 뿐 아니라,
아마겟돈 전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적그리스도와 싸우는
군대에 합류할
자격을 준다
― 마 22:11-12, 계 19:7-8, 14.
아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기는 연인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될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녀는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곱지만,
원수에게는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준다는 것을
본다
― 아 6:4, 10.
그리스도의 연인들은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동시에
두려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믿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고
원수 앞에서
더 이상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 아 6:4, 10.
그리스도의 연인은
주님 앞에서
아름답고
어여쁘며,
하늘에 속한 성처럼
견고하고,
성소처럼
고요하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연인은
원수와 세상 앞에서
자신의 승리의 영광을
나타내 보인다
― 아 6:4.
그리스도의 이기는 연인은
소망으로 가득한
장래와
절대적으로 하늘에 속한
생활을
가질 뿐 아니라,
끊임없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승리자이다
― 아 3:7-8.
두렵게 하는 군대는
주님의 이기는 이들이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두렵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아 6:4, 10.
원수는
하나님의 성으로 건축된
교회로 인해
두려워한다
― 느 6:15-16, 시 102:12-16.
사탄은
개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무서워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곧 사탄과 그의 왕국에 대항해
싸우는
단체적인 전투원은
두려워한다
― 엡 6:10-20.
다윗은
고난 가운데서 전쟁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삼상 25:28),
아비가일은
고난 가운데서 전쟁하는
교회를 예표한다
― 삼상 25:2-42.
사무엘기상 25장부터 계속해서
아비가일은
전사인 다윗 편에
늘 함께하면서
전쟁 중에 있는
그를 따랐다
― 삼상 25:40-42.
아비가일이
다윗과 결혼한 것은
교회가
전쟁을 위해
군대로 징집된 것을
예표한다
― 엡 6:10-20.
아비가일은
전쟁하는 교회,
곧 고난들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싸우는 교회를
예표한다
― 계 1:9, 11:15, 12:10.
아비가일의 예표는
교회가
주 예수님과 함께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묘사해 준다
― 엡 6:10-20.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
만족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 또한
패배당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교회는
전투원이
되어야 한다
― 엡 1:11, 3:9-11, 6:10-12.
영적 전쟁이
필요한 이유는
사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와
정면으로 대립되기 때문이다
― 마 6:10, 7:21, 사 14:12-14.
영적 전쟁의 근원은
신성한 의지와
사탄의 의지의
충돌에 있다.
교회로서
우리의 싸움은
사탄의 의지를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원수를
패배시키는 것이다
― 계 12:11.
영적 전쟁의 목적은
하나님의 왕국을
이끌어 오는 것이다
― 계 12:10.
민수기 5장
11절부터 31절까지에서
남편에게
질투심을 일게 한
아내를 처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믿는 이들과
교회에 대하여
질투하시는 것을
보여 주는 예표이다
― 신 6:6-15, 출 20:5, 34:14,
고후 11:2-3.
그리스도의
싸우는 군대는
이기는 이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의 싸우는 아내로서
그분과 짝을 이룬다
― 계 19:7-9, 11-16.
주님의
싸우는 군대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분께
순결해야 한다
― 고후 11:2-3.
우리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구하고 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눈에
영적인 간음이다
― 비교 약 4:4.
영적인 간음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저주하실 것이며
(고전 16:22)
하나님을 위하여
싸울 수 없고
그분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질투는 보통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들 중
하나이다
― 출 20:5, 34:14.
하나님의 질투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질투와 같다
― 고후 11:2-3.
우주에서
가장 질투가 많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이름은
질투이다
― 출 34:14.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단일하고도
유일하게
또한 전적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 막 12:30.
우리가
하나님 대신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마다
하나님은 질투하신다.
질투하는 남편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그분 한 분만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 마 6:24.
우리의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안 후에
우리는
그분의 질투를
우리의 질투가 되게 하여,
오직 하나님만 관심하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분을 대치하도록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 출 20:5, 34:14, 고후 11:2-3.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 아 8:6하.
주님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은
그분의 사랑에
사로잡혔다.
그분의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
― 고후 5:14, 아 8:6하.
이 사랑과
이 질투에는
순식간에 타오르는
불길이 있다.
태우시는 하나님과
질투하시는 하나님,
다시 말하면
태우는 불과
질투,
이 둘은
함께한다
― 아 8:6하.
시간이 시작될 때부터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셨다
― 출 20:5.
하나님의 질투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원수들을
파멸시키실 것이다
― 출 34:14.
하나님은
유일한 주님,
모든 사람의 하나님,
도전을 받지 않는 왕이
되실 때까지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실 것이다
― 고전 14:25-28, 시 45:11,
계 19:16.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질투로
그들에게 질투하며,
그들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다고
말했다
― 고후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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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아내인 교회에 대한 주님의 질투”
6일
아 8:6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여러분에게 질투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기 때문입니다.
남편에게
질투심을 일게 한
아내를 처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믿는 이들과
교회에 대하여
질투하시는 것을
보여 주는
예표이다.
… 우리는
반역적이지 않을 수 있고
(나병이 없고),
자신을
매우 잘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으며
(유출이 없고),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매우 올바를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한 아내로서
과연 우리는
순결한가?
… 아내가
남편 외의 다른 사람을
더 귀중히 여긴다면,
그녀는
순결을 잃기 직전에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싸우는 군대는
이기는 이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의 싸우는 아내로서
그분과 짝을 이룬다
(19:7-9, 11-14).
주님의 싸우는 군대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분께
순결해야 한다.
민수기에 나오는
처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군대로 편성되기 위한
요구 조건이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교회와
모든 믿는 이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해야 한다
(고후 11:2-3).
만일 교회나
어떤 믿는 이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구하고
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눈에
영적인 간음이다.
영적인 간음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저주하실 것이며
(고전 16:22)
하나님을 위하여
싸울 수 없고
그분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질투는 보통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들 중
하나이다.
우주에서
가장 질투가 많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 대신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마다
하나님은
질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단일하고도
유일하게
또한 전적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질투는
남편이
아내에 대해 가지는
질투와 같다.
어떤 남편도
자기 아내가
자기 외의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질투하신다.
그러므로 질투는
하나님의 속성들 중
하나이다.
우리의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안 후에
우리는
그분의 질투를
우리의 질투가
되게 하여,
오직 하나님만 관심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분을 대치하도록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순결해야 하고,
그분을 향한
우리의 생각은
단일해야 하며,
또 우리의 전 존재는
그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가 8장 6절에서
추구하는 이는
기도하면서
주님의 사랑이
죽음같이 강하다고
말한다.
… 주님의 사랑의 힘을
죽음만큼
잘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은
하나님 외에
우주 안에서
가장 강한 능력이다.
죽음이
사람을 방문할 때,
그 누구도
죽음을
거부할 수 없다.
… 이와 유사하게
주님의 사랑이 그저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다!
주 예수님을
추구하는 이들은 모두
그분의 사랑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죽음같이 강하다.
그런 후에
추구하는 이의
기도는
이렇게 계속된다.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6).
이런 사랑과
이런 질투에는
불길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태워 버리는 하나님이심을
이미 보았다.
“그대의 하나님 여호와는
태워 버리는 불이시며”
(신 4:24).
태워 버리시는 하나님과
질투하시는 하나님,
다시 말하면
태워 버리는 불과
질투,
이 둘은
함께한다.
“주님,
당신의 눈은
당신께 속한 사람들이
세상에 의해
더럽혀지고
다른 사랑에 의해
빼앗기는 것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당신은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태고 때부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출 20:5).
당신의 사도들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질투를
말하지 않았습니까?
(고후 11:2)
당신께서 질투하신다면,
누가 능히
당신의 질투에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당신의 질투에
저항하겠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모든 원수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당신께서
유일하신 주님,
모든 사람의 하나님,
도전을 받지 않는 왕이
되실 때까지
당신은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보호받을 것이고,
당신의 얼굴을
뵐 때까지
저의 정결함은
보전될 것입니다. …”
5일
엡 6:11
마귀의 계략에 대항해
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십시오.
마 6:10
(당신의) 왕국이
오게 하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분의 믿는 이에게
단지 하늘에 속한
아름다움만 있고
전쟁의 성질은 없기를
결코 바라지 않으셨다.
하늘에 속한 전쟁은
주님 앞에서
한 번도 약해진 적이 없다.
믿는 이는 마땅히
사랑스러워야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을 주어야 한다.
오늘날
믿는 이들은
주님 앞에서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고,
원수와 세상 앞에서
더 이상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 성경은 자주
주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거룩함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거룩함을 유지하고
계속 승리한다면,
우리는
원수가 달아나고
세상이 물러가는 것을
볼 것이다.
신부는
소망으로 가득한
장래와
절대적으로 하늘에 속한
생활을
가질 뿐 아니라,
끊임없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승리자이다.
그녀는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준다’.
그녀는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다.
그녀가
디르사와 예루살렘이 될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여 주는 무언가가
건축된다.
그때
하나님의 원수는
두려워 떠는데,
이는
이 작은 시골 소녀가
깃발을 세운
군대가 되기 때문이다.
엄위한 군대는
주님의 이기는 이들이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무섭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보기에
두려움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군대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락할 때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기는 이들이 되어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전쟁을 치른다
(계 2:7, 11, 17, 26,
3:5, 12, 21).
교회는
몸과 새사람과
신부와 가족과
왕국과 거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전투원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은
그러한 교회를
무서워한다.
사탄은
개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
교회의 몸의 방면과
기타 여러 방면으로
함께 모일 때마다
사탄은
무서워 떤다.
이러한 일곱 방면을 가진
교회에 의해
그리스도는 표현되시고,
아버지는 안식을 가지시며,
원수는 패배한다.
우리 모두는
교회가
개인의
거룩함이나 영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상을 보기 바란다.
그와 반대로
교회는
… 함께 건축되는 문제이다.
그러한 교회인 우리는
원수를 패배시키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수 있는
길을 예비한다.
다윗은
고난 가운데서 전쟁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삼상 25:28),
따라서 그의 아내인 아비가일은
고난 가운데서 전쟁하는
교회를 예표한다.
사무엘기상 25장부터 계속해서
아비가일은
전사인 다윗 편에
늘 함께하면서
전쟁 중에 있는
그를 따랐다.
그러므로 아비가일은
전쟁하는 교회,
곧 고난들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싸우는
교회를 예표한다.
우주 가운데에는
세 가지 의지,
즉 신성한 의지와
사탄의 의지와
사람의 의지가 있다.
만일 교회가 어떻게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전투원이
될 수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세 가지 의지
혹은 세 가지 의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의지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영원하며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창조된 존재들인
천사들도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천사들 중 하나인
천사장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에 존재했던
우주를 다스리도록
하나님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 천사장은
자신의
높은 위치와 아름다움 때문에
교만하게 되었다.
그 교만이
악한 의도를 일으켰으며,
그것은
사탄의 의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도인
하나님의 의지에 더하여
두 번째 의도인
두 번째 의지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
사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
만족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 또한
패배당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교회는
전투원이
되어야 한다.
아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추구하는 이가
주님의 임재를 누리는 동안에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에 따라
은혜에 의해 행하고,
사랑과 빛 안에서 살며,
사탄의 의지를
정복하기 위해
싸운다.
4일
딤후 2:4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자기 생활 문제에
얽매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집한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 6: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주는구나
교회로서
우리는
신부와 전투원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는
단체적인 전투원으로 구성된
한 군대가 있다.
이것은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전투원이
단체적인 한 실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체적인 한 실체인
몸으로서만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를
입을 수 있다.
이것은
믿는 이인
한 개인이
전투 장비 전체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관념과 반대된다.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전투 장비는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체적인 몸인 교회를
위한 것이다.
에베소서 6장이
계시하는 것은
믿는 이들이
개별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단체적인 한 군대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권익을 위해
전투를 하는 것이다.
영적 전쟁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몸의 문제이다.
몸은
단체적인 한 실체로서
하나님의 원수에 대항해
전투를 벌인다.
… 하나님의 전략은
교회를
그분의 군대로 사용하여
원수에게 대항해
싸우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대에서 떨어져
고립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오직 군대 안에 머무름으로써
우리는
필요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결혼식 후에
그리스도는
싸우는 장군으로서
그분의 신부,
곧 그분의 군대인
이기는 믿는 이들과
함께 오셔서
아마겟돈에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수하에 있는
왕들과
그들의 군대들과
싸우실 것이다.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부와
함께 오셔서
인간 정부를
산산이 부서뜨리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치는 돌로
오실 때
홀로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그분은
그분의 신부와
함께 오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와
싸우러 오실 때,
그분은
사람의 아들로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로서
그분은
그분께 어울리고
그분을 완전하게 하는
짝이 필요하실 것이다.
이 짝이
그분의 신부일 것이다.
교회를
그분의 신부로 얻으시고
교회와 결혼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치는 돌로서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신부를 얻지 못하신다면,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와
홀로 싸우셔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군대를 가지실 것이고,
이 군대는
그분의 신부일 것이다.
이기는 성도들은
두 가지 옷을
가질 것인데,
하나는
구원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상을 위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서
세마포는
두 번째 옷이다.
이기는 이들의
이 두 번째 옷은
어린양의 결혼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줄 뿐 아니라
(계 19:9),
주님과 함께
그분의 원수에 맞서
싸울 자격을 준다.
이처럼 결혼 예복은
전투복이 된다.
… 신부의 결혼 예복은
이 신부가
하나님의 군대로서
그분의 원수와 맞서
싸우기 위해
입는 전투복이 될 것이다.
우리가 본 것처럼,
이 옷은
우리가
우리의 매일의 의로서
살아 낸
그리스도이다.
심지어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옷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싸우고 있다.
에베소서 6장은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이기는 연인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될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녀는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곱지만,
원수에게는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준다.
깃발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가리킬 뿐 아니라,
또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표시하기도 한다.
… 결국 이기는 이들은
단체적인 한 신부가 되어
그리스도와 결혼할 것이다
(19:7-9).
결혼식 후에
이 신부는
군대가 되어
남편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싸워
적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을
패배시킬 것이다
(11-21절, 아 6:4)
아가 6장 4절은
그녀가
주님 앞에서
아름답고
어여쁘며,
하늘에 속한 성처럼
견고하고,
성소처럼
고요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동시에 그녀는
원수와 세상 앞에서
자신의 승리의 영광을
나타내 보인다.
3일
계 19:7-8
우리가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시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결혼 날이
다가왔고,
그분의 아내도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되었는데,
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입니다.
주 예수님은
교회를
거듭나게 하셔서
그분의 신부가
되게 하신다
(요 3:3, 5, 29-30).
주님은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진
신랑이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신부가 되려면,
우리도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져야만 한다.
이것을 위해
거듭남은
필수이다.
이러한 생명과 본성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동반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우리는
거듭남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직 우리가
신성한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받은 후에야,
죄인인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분의 연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서
또 다른 생명,
즉 신성한 생명을
받았다.
이 생명 안에서,
이 생명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배필이
되고
그분과 짝을 이루는
자격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는
결혼 날에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원수와 맞서
전쟁을 해 온 이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악한 자 마귀를 이긴
이기는 이들과
결혼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계 12:11).
하나님에 의해
떠 내어진 돌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이기는 이들,
곧 단체적인 그리스도는
거대한 인간 형상의
열 발가락으로 상징된,
적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열 왕들을
칠 것이다
(계 19:11-21).
이렇게 함으로써
단체적인 그리스도는
거대한 형상을
발가락부터 머리까지
산산이 부술 것이다
(단 2:35).
다시 말하면,
단체적인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그분과 막 결혼한
이기는 이들로 구성된
신부―는
손을 대지 않고
떠 내어진
돌로 와서
인간 정부를 쳐서
산산조각 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는
인간 정부를
없앨 것이다.
이 시대의 마지막에
그리스도는
그분께서
구속하신 이들과
결혼하시고
그들을
그분의 아내로
맞이하시기 위해
오실 것이다
(계 19:7).
현시대는
‘데이트하는’
구혼의 시대,
즉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간의
약혼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마지막 날에
영광스러운 결혼 날이
있을 것이며,
그때에
그리스도는
그분께서
구속하신 이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께 구속받은 이들의
이러한 결혼은
성경에 있는
중요한 계시이다.
성경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 안에서
영원토록
그분의 백성과
결혼 생활을
누리시리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은
영원토록
어린양의 아내일 것이다
(계 21:9).
이것이
성경에 계시된
신성한 로맨스의
완성이다.
에베소서 6장에서
교회는
몸이나 건축물이나
가족이나 왕국이나
새사람이나 신부가
아니다.
이 장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전투원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몸과
하나님께서 거주하시기 위한
처소와
하나님의 경륜을 완성하는
새사람이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패배시키는
전투원,
곧 군인이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따르면,
교회는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신부인 동시에
하나님의 원수를 대항하여
그분과 함께 싸우는
전투원이다.
주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먼저
자신의 신부를
맞이하실 것이다.
신부를
영접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이기는 이들과 함께
원수에 대항하는
싸움에 들어가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과 8절에서
우리는
신부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후에 14절에서는
전쟁에 참가하려고
주님을 따르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절들은
신부의 결혼 예복이 또한
하나님의 원수를 대항하여
싸우는
하나님의 군대인
신부가 입는
제복이기도 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결혼 예복을
입는 것은
또한 제복을
입는 것이다.
신부로서
우리는 반드시
점이나 주름이 없이
아름다워야 하고
고운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한다.
전투원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를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반드시 장비되어야 한다.
2일
아 1:2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요 3:29
신부를 얻는 사람은
신랑이지만,
곁에 서서 듣는
신랑의 친구도
신랑의 음성을 듣고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에 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의 큰 비밀이라는 것을,
교회는
신부이고
그리스도는
신랑이시라는 것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배필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결혼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의 배필이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배필이
영원 안에서
한 부부가 될 것이라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는
아담의 배필인
하와로
예표된 것을
보았다.
하와는
아담의 일부이고,
아담에게서 나왔으며,
아담에게로 돌아가고,
아담과 하나이며,
아담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고,
아담의 형상과 모양을 가지며,
아담의 반쪽으로서
아담의 배필이다.
리브가가 예표하는
교회의 중점과
하와가 예표하는
교회의 중점은
매우 다르다.
하와는
교회의 산출과 본성을
예표하고,
리브가는
교회가
세상에서 선택받아 나왔음을
예표한다.
이 예표 안에는
아버지의
선택,
그리고 성령의
부름과 인도가
포함된다.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또 한 사람은
보아스이다.
보아스는
아주 특별한 여인을
아내로 얻었다.
그녀는
성경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다.
보아스의 아내인 룻은
교회의 구속의 방면을
예표한다.
룻기 전체가
구속에 관한 이야기이다.
리브가는
부름받은 교회를,
십보라는
광야에 있는 교회를,
룻은
구속받은 교회를
예표한다.
성경 전체가
하나의 신성한 로맨스이다.
이것은
성경이
매우 로맨틱한 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히
아가에서 그러하다.
… 나는
젊었을 때
왜 성경에
한 남녀의 로맨스와 관련된
책이 있는지
이상하게 여겼었다.
이 책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한다.
아가에 의하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매우 로맨틱해야 한다.
만일 우리와 주 예수님 사이에
로맨스가 없다면,
우리는
로맨틱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적인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말하는
로맨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한다면,
아가를
기도로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로맨스에 대한
이 책을
기도로 읽을 때,
여러분은
주님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
여러분은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미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신성한 로맨스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더 로맨틱해야 한다.
아가는
왕과
시골 소녀의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시가서로서
일종의 예표이다.
이 책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그분의 연인들 사이의
신혼의 사랑을
놀랍고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연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속성들과
그분의 연인들의
인간 미덕들의
연합 안에서
서로를 누린다.
주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신부를 위한
신랑으로 오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침례자 요한이
“보십시오,
…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요 1:29)
라고 한 선포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요한이 또한
주 예수님을
신랑으로 언급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요한복음 3장 29절에서
그는
“신부를 얻는 사람은
신랑이지만”
이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거듭남(3-6절)에 관한 장에
포함되어 있다.
거듭남의 목적은
신랑을 위해
신부를
산출하고 예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부를 취할 분이시기 때문에
신랑이시다.
육체 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속자와 구주가 되시기 위해
오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신랑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
마태복음 9장 15절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 자신을
신랑으로
언급하셨다.
신언노트, 2019 02 17
그분의 아내인
그 교회 위에의
주님의 질투
만약 우리가
그 성경의
그 깊은 사상 안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그 성경이
가장 순수하고 거룩한
한 의미 안에서
한 로맨스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한 쌍 안에 있는
(in this couple;
이 부부[약혼한 남녀, 연인] 안에서)
그 남성은
(The male;
그 남자는)
하나님 그분 자신이시고,
그분께서는(who)
이 우주적인 한 쌍의
그 남성이 되는 것을
갈망하십니다
(desires;
원하십니다, 바라십니다).
이 한 쌍의
그 여성은
(The femail;
그 여자는)
선택되고
또 구속받은
단체적인 한 백성이고,
그 구약과 또 그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포함합니다.
그 세기들 동안 내내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한 로맨스를
가지셨습니다
(has had;
가져 왔습니다);
이와 같이
그 성경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택된 백성에게
구애하시고
또 결국
그들과 결혼하시는지에 관한(of)
한 기록입니다:
이 합일(union; 결합, 결혼)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생명이시고,
또 그들은
그분의
표현입니다;
이 방식으로
하나님과
또 그분의 선택된 백성은
우주적인 한 쌍이 됩니다
(become a universal couple):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과의
한 사랑 관계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하와가
아담의 그 생명을
받아들였던 것과 똑같이,
그분의 생명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게 하고
또 그분을
우리와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 생명입니다.
우리의 남편이신
주님을
사랑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thereby; 그것 때문에)
그분의
생명과 본성에
함께함에 의하여
(by … partaking of;
…을 먹음[취함, …에 참가함]에 의하여,
…의 성질을 띰에 의해),
우리는
그분의
짝(counterpart; 상대, 배필),
확대(enlargement; 확장, 증축),
또 표현으로서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배우자가 되도록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예표 안에서
(in typology;
예표론에서, 유형학에서, 상징으로)
그 구약 안에 있는
어떤 여자들은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그 짝이라는 것을
계시합니다.
그리스도의 그 짝인
그 교회는
아담의 그 짝인
하와에 의하여
(by Eve)
예표됩니다;
하와의
아담에게서 나옴은
(coming out of Adam)
그 교회가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고
또 그리스도의
그 생명과 또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예표합니다.
리브가는
그 세상으로부터
선택받는
(being chosen)
그리스도의 그 짝인
그 교회를
예표합니다.
룻은
구속받는
(being redeemed)
그리스도의 그 짝인
그 교회를
예표합니다.
그 신성한 로맨스가
아가서 안에
묘사됩니다:
이 책은
시적인 형식 안에 있는,
놀랍고 또 생생한
한 묘사인데,
그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또 그분의 신부인
그분의 연인들 사이의
신혼의(bridal) 그 사랑에 관한 것이고
(이는)
그분의
신성한 속성들이
그분의 연인들의
사람의 그 미덕들과
섞임으로
(in the mingling … with;
…과의 그 섞임 안에)
그들의
상호적인 누림 안에 (있습니다).
아가서에 따라서,
우리의
주님과의 관계는
정말 애정 어려야만 합니다
(should be very romantic;
매우 로맨틱해야[아주 낭만적이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와
또 주 예수님 사이에
연애가(로맨스가) 없다면,
그때(then; 그러면) 우리는
종교적인 그리스도인들이고,
애정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그 신부를 위한
그 신랑으로서
오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 교회가
그분의 신부가
될 수 있도록
그 교회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생명
(another life;
또 하나의 생명),
곧 그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입니다;
이 생명 안에서
또 이 생명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짝이 되고
(to become Christ’s counterpart)
또 그분과 어울리는
(to match Him;
그분과 일치하는[조화되는, 짝짓는])
자격을 얻습니다
(are qualified).
이 시대의 그 끝에,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고
그분의 구속된 사람들과
(His redeemed)
결혼하실 것이며
또 그녀를(her)
그분의 아내로
취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결혼식의 그 날에
(On the day of His wedding;
그분의 결혼의 그 날에),
그리스도께서는
수년간
(for years;
몇 년 동안)
하나님의 적에 반대하여
그 전투를 해 온
사람들과
결혼하실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그 악한 한 존재를
(the evil one)
이미 이긴,
그 이기는 이들과
결혼하실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한 결혼식의 날이
있을 것이고,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구속된 사람들과
(redeemed ones)
결혼하실 것입니다.
그 새 하늘과 또 새 땅 안에서
영원토록,
그 새 예루살렘은
그 어린양의
그 아내일 것입니다;
이것이
그 성경(the Scriptures) 안에
계시되는
그 신성한 연애의(로맨스의)
그 성취입니다
(the fulfillment; 그 실현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신부인
그 교회는 또한
하나님의 적을
패배시키는
한 전사여야만 합니다:
영적인 전투는(warfare)
그 몸의 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이익을 위하여
(for … interest;
관심사를 위하여)
그 전투를 벌이는
(fighting the battle;
그 싸움을[교전을] 싸우는)
한 단체적인 군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싸우는 장군으로서
그분의 군대인
그분의 신부와 함께
오실 것이고
아마겟돈에서
적그리스도에 반대하여
(against; 맞서)
싸우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군대와 함께
오시는 때에,
그분께서는
사람의 그 아들로서
오실 것입니다.
사람의 그 아들로서,
그분께서는
그분께 어울리고
또 그분을 완전하게 하는
(to … complete Him)
한 짝을
필요로 하실 것입니다;
이 짝이
그분의 신부일 것입니다.
그 결혼식의 옷이
(garment; 예복이)
―우리의 매일의 의로서
우리에게서부터 밖으로
살아 내지신
(lived out of us)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 결혼식에 참여할 뿐 아니라,
아마겟돈에서의 그 전쟁 안에서
적그리스도에 반대하여(맞서)
그리스도와 함께 싸우는
그 군대에
합쳐질
(to join;
접합할, 가입하는, 합류하는)
자격을 줍니다.
아가서 안에서
그리스도의
그 이기는 연인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때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in the eyes of God;
하나님의 그 눈들 안에서)
그녀는
디르사같이
아름답고
또 예루살렘같이
사랑스럽다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하지만, 그 적에게
그녀는
깃발들을 가진
(with banners;
군기들[기치들]과 함께한)
한 군대같이
무시무시합니다
(terrible; 무섭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연인들은
동시에
사랑스러워야야만 하고
또 무시무시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많은 믿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그들의 사랑스러움을
또 그 적 앞에서
그들의 무시무시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연인은
주님 앞에서
아름답고
또 어여쁘며
(comely; 매력적이며),
하늘에 속한 그 도시같이
견고하고
(solid;
튼튼하고, 믿을 수 있고),
또 그 성소같이
(as the sanctuary)
평온합니다
(serene;
조용합니다, 차분합니다, 평화롭습니다);
동시에,
그녀는
그 적과
또 그 세상 앞에
그녀의 승리의
그 영광을
전시합니다
(display;
드러냅니다, 자랑해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이기는 연인은
희망으로 가득 찬
(is full of hope;
소망으로 가득한)
한 장래와
(a future;
한 장래성과, 한 미래와)
또 절대적으로 하늘에 속한
한 생활을
(a life; 한 생명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녀는 또한
그녀의 승리 안에서
끊임없이 승리하는
(triumphs;
개가를 올리는,
승리를 크게 기뻐하는,
개선식을 거행하는)
한 승리자입니다
(a victor; 한 정복자입니다).
한 무시무시한 군대는
주님의 이기는 이들이
하나님의 적,
곧 사탄을
무서워하게 한다는 것을
(that … terrify;
겁먹게[놀라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적은
하나님의 그 도시로(as)
건축되는
그 교회에 의하여
겁먹게 됩니다
(is frightened;
깜짝 놀라게 됩니다, 무서워하게 됩니다).
사탄이
개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수천 명이 되더라도
(even if they
number in the thousands;
그들이 무수히 많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is not afraid of;
무서워하지[겁내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그 몸인
그 교회,
곧 그와(him; 사탄과)
또 그의 왕국에 반대하여
싸우는
단체적인 그 전사는
무서워합니다
(is terrified of;
…에게는 놀랍니다).
다윗은
고통을 겪음들의 한가운데서
(in the midst of sufferings;
고생들의[괴로움들의] 한복판에서)
전쟁하시는
(warring; 교전 중인)
그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또 아비가일은
고통을 겪음들의 한가운데서
전쟁하는
그 교회를
예표합니다:
사무엘상 25장에서부터
계속
(onward; 앞으로, 나아가서),
아비가일은 항상
그 전사 다윗 편에 있었고
또 그의 전쟁들 안에서
그를 따랐습니다:
아비가일의
다윗과의 결혼은
(marriage to David;
…에게의 결혼은)
전투를 위하여
한 군대로(as)
징집되는
(enlisted;
병적에 넣어지는, 입대된)
그 교회를
예표합니다.
아비가일은
고통을 겪음들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싸우는,
전쟁하는 그 교회를
예표합니다.
아비가일의 그 예표는
그 교회의
주 예수님과 함께하는
영적인 전투 안에의 참여를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반드시 성취되어야만 하고
또 그분의 마음의 그 갈망이
반드시 충족되어야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적도 또한
반드시 패배당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그 교회는 반드시
한 전사가
되어야만 합니다.
영적인 전투가
필요한데
이는 사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하여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because … is set against …;
놓여 있기[준비되어 있기,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전투는
그 신성한 의지와
또 그 사탄적인 의지 사이의
그 충돌에
그것의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교회로서,
우리의 싸움은
그 사탄적인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이고
(to subdue;
복종시키는[억제하는, 약화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적을
패배시키는 것입니다.
영적인 전투의 그 목적은
하나님의 그 왕국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to bring in;
들여오는[받아들이는, 도입하는,
생기게 하는, 이끌어 오는] 것입니다).
민수기 5장
11절부터 31절까지 안에서
그녀의 위에
(over whom; 그녀에 대하여)
그녀의 남편이
질투하였던
한 아내를 처리함은
그분의 믿는 이들과
또 그 교회 위에의
그리스도의 질투를
예표합니다:
그리스도의
싸우는 군대는
그 이기는 이들로
구성되는데,
그들은(who)
그리스도께 어울리는
(to match Christ;
그리스도와 짝짓는[결혼하는, 부부가 되는])
한 싸우는 아내입니다:
주님의
싸우는 군대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그분을 향하여
순결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외의
다른 것을
찾음과
(seeking; 얻으려고 함과)
또 추구함은
(pursuing; 뒤쫓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in the eyes of God;
하나님의 그 눈들 안에)
영적인 간음입니다
(adultery; 간통[부정, 불륜]입니다).
영적인 간음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심판받을 것이고
또 저주받을 것이며
또 하나님을 위하여
싸울 수 없을 것이고
또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을 것입니다.
질투는 보통
한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그 질투는
그의 아내 위에의
한 남편의 그 질투와 같습니다.
그 우주 안에서
가장 질투심이 많은
그 한 존재는(one)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이
‘질투심이 많은
(jealous; 질투하는)’
입니다
― 출 34:14.
그분께서는
우리가
유일하게
(uniquely;
유일무이하게, 독특하게, 둘도 없게),
곧 단일하게
(singly;
홀로, 단독으로, 단순하게),
곧 전적으로
(wholly;
완전히, 단지, 오로지)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대신하여
(in place of Him;
그분의 위치 안에서, 그분의 자리에)
어떤 것이나
또는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질투하십니다.
질투하는 한 남편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또 오로지 그분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질투가 많으시다는라는 것을
알면서
(Knowing that …;
알면,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질투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해야만 하고(should)
그래서(so that)
우리가
오직 그분만을
관심해야 하며
(would care only for;
돌보아야만 하며, 좋아해야만 하며)
또 누구도
또 아무것도
그분을 대신하도록
허락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 질투는
스올(Sheol; 음부)같이
잔인하며;
/ 그것의 번쩍임들은
(flashes;
솟구침들은, 섬광들은)
불의 그 번쩍임들,
/ 곧 여호와의 한 불꽃이라
(a flame;
한 불길이라[광채라, 격정이라])”
― 아 8:6하.
주님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에 의하여
포로로 잡혔습니다
(have been captured;
체포되었습니다, 사로잡혔습니다,
포획[나포, 획득]되었습니다);
그것은(it; 그분의 사랑은)
죽음같이 강합니다.
이 사랑과 함께
또 이 질투와 함께
한 번쩍이는
(flashing;
이글거리는, 번쩍하고 나는,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번득이는)
불이
있습니다;
이 둘은
―태워 없애시는
(consuming;
전소시키시는, 다 써 버리시는)
그 하나님과
또 질투심이 많으신
그 하나님,
곧 태워 없애는
그 불과
또 그 질투는―
함께 갑니다
(go together;
공존합니다, 어울립니다).
시간의 그 시작으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질투심이 많으신
한 하나님이셨습니다(has been):
아무것도
하나님의 질투를
견뎌 낼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모든 적들을
파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그 유일하신 주님,
곧 모든 것들의
(of all; 모든 사람들의)
그 하나님,
곧 도전을 받지 않으시는
(unchallenged;
이의가 제기되지 않으시는,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시는,
용인되시는)
그 왕이
되실 때까지
모든 방해물들을
(hindrances; 장애물들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안에 있었던
그 성도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한 질투로(with)
그들 위에
질투심이 많았고
또 그가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그들을
드리기 위하여(to present)
그들을
하나의 남편에게(to one husband)
약혼시켰다고
(had betrothed;
시집보낸다고 약속했다고)
말했습니다.
1일
사 54:5-6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성경은
사랑의 이야기,
곧 로맨스이다.
여러분은
전에
이러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이 말은
세속적이고
비종교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깊은 사상 안으로
들어간다면,
성경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룩한 의미에서
우주적인 한 부부의
로맨스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 부부 중에
남자는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신성한 인격이시지만,
그분은 또한
이 우주적인 부부 중에
남자가 되기를
갈망하신다.
바로 이 하나님께서
긴 과정을 거치신 후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 부부 중에
여자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포함하는,
선택받고
구속받은
단체적인 한 백성,
곧 단체적인 한 사람이다.
긴 과정을 거친 후
이 단체적인 사람은 결국
신부인
새 예루살렘이 된다.
이 거룩한 로맨스는
구약 전체에서
반복해서 계시된다.
말씀을 통해
주님의 빛 비춤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성경 전체가
약혼,
곧 결혼을 위한
책이라고
말할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에게
어떻게 구혼하시고
결국 그들과
어떻게 결혼하시는지에 관한
기록을 본다.
영원토록
삼일 하나님은
남편으로서
그분의 아내,
즉 그분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백성과 함께
달콤한 결혼 생활을
누리실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아내라고
불릴 것이다
(계 21:9).
성경의 결론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결혼이다.
성경은
이렇게 끝나기 때문에
진실로 약혼의 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성경의 주요 주제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약혼이다.
만일 이것이
성경의 주제가 아니라면,
성경은
하나님과
그분께서 구속하신 이들의
우주적인 결혼에 관한 말씀으로
마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상호적인 사랑이
있어야 한다
(요 14:21, 23).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사랑은
주로 남녀 간의
깊은 사랑과 같다
(렘 2:2, 31:3).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시간을 들여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분과 교통할 때,
하나님은
그분의 신성한 요소를
그들에게 주입하심으로써,
그들이
그분의 배필로서
그분과 하나가 되고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서
그분과 똑같이 되게 하신다
(창 2:18-25).
성경 전체는
신성한 로맨스로서,
하나님께서
그분께서 선택하신 백성에게
어떻게 구혼하시고
결국 그들과
어떻게 결혼하시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창 2:21-24, 아 1:2-4,
… 계 19:7, 21:2, 9-10, 22:17).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될 때에
우리는
그분의 생명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하와가
아담의 생명을
받은 것과 같다
(창 2:21-22).
이 생명이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고
그분을
우리와
하나 되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사용함으로써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롬 7:18-25)
주님을
우리의 남편으로서
사랑하고,
그 결과
그분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여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의 확대와 표현이
됨으로써
율법을 지킨다
(출 20:6).
구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분의 배우자로
선택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예레미야서 31장 3절에서
여호와는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과
‘데이트하셨고’,
후에는
그들에게
구혼까지 하셨다.
에스겔서 16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보셨을 때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
8절은
이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하심으로써
그들과 약혼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