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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아가 ― 그리스도의 신부가 준비되도록 개개인의 믿는 이가 그리스도와 나누는 사랑의 교통에 대한 점진적인 체험

한 편의 시인 아가(雅歌)의 주제는 탁월한 결혼에 이르는 사랑의 역사(歷史)이며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부가 준비되도록 개개인의 믿는 이가 여섯 가지 주요 단계 안에서 그리스도와 나누는 사랑의 교통에 대한 점진적인 체험을 계시해 준다.

아가의 첫 번째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만족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추구하도록 이끌린다(1:2-2:7). 주님은 그분을 추구하는 이가 그분과 개인적이고 다정하며 내밀하고 영적인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신다.

“나를 이끌어 주세요”(아 1:4)는 개인적인 것이다. 주님은 “사람의 줄들로, / 사랑의 끈들로 / 나는 그들을 이끌었고”(호 11:4상)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신성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인성의 수준에서,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사람의 줄들은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 인성 안에서 통과하신 이 모든 단계들에 의해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나타난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개인적인 방식으로 도달한다.

“내게 입맞춤해 주었으면!”(아 1:2)은 다정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신성한 생명으로 받아들인 후에(요 1:4, 12) 우리는 개인적이고 다정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며,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을 추구하고 그분을 우리의 만족으로 누리게 된다. 시편 2편 12절은 우리에게 “아들께 입 맞추어라.”라고 명령한다. 그리스도께 입 맞추는 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추구하는 이가 그리스도를 추구할 때, 그녀는 그분에 의해 지성소(그분의 내실 ― 아 1:4)인 그녀의 거듭난 영 안으로 이끌려 그분과 교통을 갖게 된다. 그분의 내실은 주님과의 내밀한 관계를 가리킨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내실인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서 우리를 방문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그분의 관계는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분은 물질적인 방식이 아닌 영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의 영 안에서 내밀하게 우리를 방문하신다.

모든 영적인 원칙은 추구하는 이의 이기는 생활에 대해 말하는 아가의 이 첫 번째 단계에 담겨 있다. 이후의 공과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 공과들이 더 깊은 방식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유전자를 우리 안에 가져오며, 일생에 걸친 그리스도인 생활의 모든 체험은 이 유전자 안에 있다.

아가의 두 번째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 됨으로써 자아에서 벗어나도록 부름받는다.

아가 2장 8절과 9절은 부활의 생명력에 대해 말한다. 이 절들에서 그리스도는 ‘산들을 뛰어오르고 언덕들을 뛰어넘는’ 가젤이나 젊은 수사슴에 비유되신다. 산들과 언덕들은 어려움과 장애물을 가리키지만, 어떤 것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막을 수 있을 만큼 높거나 크지 않다. 우리는 산들을 뛰어오르고 언덕들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추구하고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자기 성찰에 빠지는데, 이 자기 성찰이 그녀를 그리스도의 임재에서 벗어나 담을 쌓고 은둔하게 만든다(아 2:9하).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녀가 일어나 자신의 침체된 상태에서 나와 그분과 함께 있도록 그녀를 격려하신다(10절).

또한 그리스도의 연인은 주님께서 그녀에게 휴면(겨울)의 때가 끝났고 시련(비)이 지나고 사라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아 2:11). 아울러 주님은 그녀에게 봄철이 왔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의 넘치는 풍성으로 주님께 간청과 격려를 받는다(12-13절).

그리스도의 연인들인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아닌 부활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 됨으로써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수 있게 된다(아 2:14-15). 부활의 실재는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이며, 이분은 완결되신 영으로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의 거듭난 영과 연합되셨다. 이러한 연합된 영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고 부활을 체험하는데, 이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십자가와 하나 되어 자아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새 창조물 안에 있는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을 건축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게 된다.

아가의 세 번째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승천 안에 살도록 부름받는다.

승천 안에 사는 것은 계속해서 우리의 영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 안에서 생활할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솔로몬왕이 자신을 위해 / 레바논 나무로 가마를 만들었다네. / 그 기둥들은 은으로, / 바닥은 금으로, / 자리는 자주색으로 만들었는데 / 그 한가운데는 예루살렘 딸들의 /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었다네.” ― 아 3:9-10.

그 영께서 우리 안에서 변화시키는 일을 하심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몸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몸을 위하여 움직이실 때 타고 다니시는 그분의 운송 수단인 그분의 탈것 곧 그분의 ‘자동차’가 된다.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으로 재건축되어, 예수님의 부활하고 승천한 인성이 우리의 외부 골격이 되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내부 장식이 된다.

우리의 내적 존재는 ‘사랑이 아로새겨져야’ 한다(아 3:10).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성으로 지니는 영역 안에 지켜질 것이고, 우리의 인성은 강권하는 그분의 애정 안에 보호받을 것이다.

우리가 개인적이고 다정하며 내밀하고 영적인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타고난 존재는 허물어지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죽음(은으로 만든 기둥들)과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금으로 된 바닥)과 생명 주시는 영이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는 것인 그리스도의 왕권(자주색 자리)으로 개조된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 안의 새 창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으로 성숙되어, 그리스도의 내밀한 누림을 위한 동산이 된다(아 4:12-15). 그리스도의 연인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을 준비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어려운 환경(북풍)과 즐거운 환경(남풍)이 동산인 그녀에게 발생하여 그 향기를 날리기를 원한다(16절).

아가의 네 번째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 후 십자가를 통하여 휘장 안에 살도록 더 분명하게 부름받는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휘장 안에 생활함으로써 천체로 변화된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새벽처럼 밝아 오고 달만큼이나 아름다우며 해만큼이나 맑다 ― 아 6:10.

이기는 이들의 길은 여명의 빛 같아 점점 더 밝게 빛나 한낮에 이른다 ― 잠 4:18, 요 1:5.

여명 곧 해 뜰 무렵의 빛은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와 우리가 매일 아침 부흥되는 것 둘 다를 상징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해가 떠오르는 것과 같다 ― 눅 1:78, 잠 4:18, 시 110:3, 삿 5:31.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숙하여 (‘솔로몬’의 여성형인) 술람미가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연인이 결혼을 위해 그리스도와 어울리도록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되어 그분의 재생산과 복사판이 되었음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술람미는 두 진영 혹은 두 군대(히브리어로 ‘마하나임’)의 춤에 비유된다.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들 곧 하나님의 두 군대를 만난 후에, 자신이 있던 곳을 마하나임이라 부르고 자신의 아내들과 자녀들과 소유를 ‘두 군대’로 나누었다 ― 아 6:13, 창 32:1-2.

영적인 의미에 따르면, 두 군대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원칙에 따라 넉넉히 이긴다는 것, 곧 ‘대승을 거둔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하나님은 그들 자신 안에서 강한 사람들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연약한 이들, 더 약한 이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원하신다. 이기는 이들로 여겨지는 이들은 주님을 의지하는 더 약한 이들일 것이다.

아가의 다섯 번째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주님의 일에 동참한다.

아가 7장 4절에서 그 영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고난을 통한 그 영의 변화시키심으로 조성된 추구하는 연인의 복종하는 의지(목)의 아름다움과, 빛을 향해 열려 있고 정결하며 안식이 가득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녀 마음의 표현(연못 같은 눈, 비교 아 1:15, 4:1, 5:12)의 아름다움과, 높고 예리한 분별력을 지닌 그녀의 영적 지각(코, 비교 빌 1:9-10, 히 5:14)의 아름다움을 살펴보신다.

아가 7장 11절은 그리스도의 연인이 사랑하는 분과 함께 이곳저곳에 머물며(마을들에서 묵음) 온 세상(들)을 위한 일을 수행하기 원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그녀가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종파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녀는 일을 공개해 다른 이들이 그곳에 와서 머물 수 있게 하고 또 그녀도 다른 곳에 가서 머문다. 이것이 한 몸 안에서 한 일을 지키는 것이다.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고후 6:1상). 주님과 함께 일하려면, 우리는 생명이 성숙해야 하고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하며 우리의 일이 반드시 그분의 몸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배필로서 일하며, 모든 포도원(아 8:11) 곧 온 땅에 있는 교회들과 믿는 이들을 돌본다. 우리는 반드시 온 세상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각 지방에 교회들을 세우고서 그 교회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충만한 실재 안으로 이끎으로써 수행한 일이다.

아가 7장 12절은 “우리 일찍 일어나 포도원들로 가서 / 포도나무 움이 돋았는지 / 꽃망울이 터졌는지 / 석류나무 꽃이 피었는지 보아요. / 거기서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바칠게요.”라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주님의 일을 주님 자신과 연계할 수 있다. 이제 그녀는 주님의 일을 하는 곳에서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아가의 여섯 번째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휴거되기를 소망한다(8:1-14). 그녀는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광야(땅에 속한 영역)에서 올라오고 있다(5절).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라는 말은 야곱과 같이 그리스도의 연인도 주님께 엉덩이뼈를 맞고 타고난 힘을 처리받았다는 것을 함축한다 ― 창 32:24-25.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라는 말은 또한 그리스도의 연인이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으며, 광야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 그 압박이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을 도장처럼 그분의 사랑이 가득한 마음에, 도장처럼 그분의 힘이 가득한 팔에 지녀 주시기를 구한다. 이 시점에 그리스도의 연인은 자신이 무력하고 의지할 데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보존하시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 아 8:6-7.

그리스도의 연인은 자신도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해 달라고 그분의 동산들인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시는 그분께 요청한다 ― 아 8:13.

이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분이신 그분을 위해 일할 때, 언제나 그분께 귀 기울이며 그분과 교통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생활은 주님의 말씀에 달려 있고, 우리의 일은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다. 우리의 기도의 중점은 주님의 말씀하심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에 대한 어떤 계시나 빛이나 주관적인 지식도 없을 것이다(골 2:2, 엡 3:4-5, 5:32). 믿는 이들의 생활은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하심에 달려 있다(엡 5:26-27).

이 시적인 책의 결론으로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사랑하는 분께 부활 능력(가젤과 젊은 수사슴) 안에서 속히 오셔서 온 땅을 가득 채울 그분의 달콤하고 아름다운 왕국(향기 그윽한 산들)을 세우시기를 기도한다.

그러한 기도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연인 사이의 혼인의 사랑 안에서의 연결과 교감을 묘사하는데,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연인인 요한의 기도가 성경의 결론의 말씀으로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성한 사랑 안에 있는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계시해 주는 것과 같다 ― 계 22:20.

“주 예수님, 오십시오!”(계 22:20)는 성경에 있는 마지막 기도이다. 성경 전체는 주님께서 오시는 것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하나의 기도로 끝맺는다.

“그분께서 오실 때 믿음은 사실로 변하고 찬양은 기도를 대신할 것이다. 사랑은 그늘이 전혀 없는 온전함으로 완결될 것이고, 우리는 죄 없는 영역에서 그분을 섬길 것이다. 그날은 얼마나 놀랍겠는가! 주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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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아 8:5-6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광야에서 올라오는 이 사람이 누구인가?” … “나를 도장처럼 당신 마음에, 도장처럼 당신 팔에 지녀 주세요. …

아 8:13-14 “동산들에 거하시는 이여, 나의 벗들이 당신 목소리에 귀 기울이니 나도 그 목소리를 듣게 해 주세요. 내 사랑하는 이여, 속히 오셔서 향기 그윽한 산들 위에 있는 가젤이나 젊은 수사슴처럼 되어 주세요.”

휴거의 준비는 오늘날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끊임없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거듭해서 올라가고 올라가서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실 때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그리스도의 연인은 무력하여 걸을 수 없는 것 같다.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그녀는 그녀가 사랑하는 분이 짊어져야 할 짐이 된다.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그녀의 엉덩이뼈는 하나님께서 치신 것 같다.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이것은 그녀가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으며, 광야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 그 압박이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가 휴거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실 수 있다. 그러므로 의지하는 생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가 의지할 데 없어 그분만 의지할 때에야, 성령은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 … 올라오는 이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말씀하시며 감탄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끝까지 견딜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코 자신의 버티는 힘에 달려 있지 않고 주님의 보존하심과 지키심에 달려 있음을 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온전함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보존하시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도장처럼 당신 마음에, / 도장처럼 당신 팔에 지녀 주세요.”(아 8:6)라고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은 사랑하는 곳이고, ‘팔’은 능력이 있는 곳이다. “저를 도장처럼 영원히 당신의 마음에 지녀 주시고, 저를 도장처럼 없어지지 않도록 당신의 팔에 지녀 주십시오. 이전에 대제사장이 그의 가슴과 어깨에 이스라엘 백성을 품고 메었듯이, 당신께서 오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저를 기억해 주시고 팔로 계속 저를 지탱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저는 저의 약함과 공허함을 알며, 저의 무력함을 인식합니다. 주님, 저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께서 오실 때까지 제가 자신을 스스로 보존하려고 한다면, 저는 다만 당신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고 제 자신에게 해를 입힐 뿐입니다. 오늘날 저의 모든 소망은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능력에 있습니다. 오늘 이후로 모든 것은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아가 8장 13절의 ‘동산들’은 복수이다. 그분은 그녀의 동산에 거하실 뿐 아니라(6:2) 또한 많은 동산에도 거하신다. 그녀와 함께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제 다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8:13). 그들은 빨리 듣고 더디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과 그녀 모두는 이제 이전처럼 그렇게 말이 많지 않다.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계속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으며, 이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릇 자질구레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다 땅에 속한 생명이 그들 안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다 듣고자 하며,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생활이 주님의 말씀에 달려 있고, 그들의 일이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직 들으려고 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 없으면 계시와 빛과 지식이 없다. 믿는 이들의 생활은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하심에 달려 있다.

아가 8장 14절은 향기 그윽한 산들에 대해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의 다시 오심과 그분의 왕국의 상태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는 여인의 체험이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바다에 들어가 사라지는 것과 같음을 본다. 흐름은 갈수록 깊어질 수 있지만, 더 이상 진보의 여지는 없다. 이제 세상에 남겨진 것은 다만 그녀의 몸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 사랑하는 이여, 속히 오셔서 / 향기 그윽한 산들 위에 있는 / 가젤이나 젊은 수사슴처럼 되어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젤이나 젊은 수사슴처럼, 속히 오십시오. 가젤이나 젊은 수사슴이 향기 그윽한 산들 위에 나타나듯이 왕국 안에서 오셔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랑이 완전할지라도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 그분께서 오실 때 믿음은 사실로 변하고 찬양은 기도를 대신할 것이다. 사랑은 그늘이 전혀 없는 온전함으로 완결될 것이고, 우리는 죄 없는 영역에서 그분을 섬길 것이다. 그날은 얼마나 놀랍겠는가! 주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5일

아 7:11-12 오세요, 내 사랑하는 이여, 우리 함께 들로 나가 마을들에서 묵어요. 우리 일찍 일어나 포도원들로 가서 포도나무 움이 돋았는지 꽃망울이 터졌는지 석류나무 꽃이 피었는지 보아요. 거기서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바칠게요.

아가 6장 끝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변화의 여러 단계를 거친 후에 솔로몬의 복사판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술람미’(솔로몬의 여성형―아 6:13)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녀가 생명과 본성과 형상에서 솔로몬과 동일하게 됨으로써 결혼을 위해 솔로몬과 어울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끝나야 할 것 같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솔로몬은 많은 포도원의 주인이고, 이 포도원들을 가꾸는 데에는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이제 술람미가 된 시골 소녀는 마땅히 그의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연인이 결국 주님의 일에 동참해야 함을 가리킨다. 주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는 자격을 갖추어야 하며, 주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은 영적으로 장비되는 것에 달려 있다. 즉, 신성한 생명의 모든 속성으로 장비되는 것에 달려 있다.

“네 목은 상아 망대 같고 / 네 눈은 바드랍빔 성문 가에 있는 / 헤스본 연못 같으며 / 네 코는 다마스쿠스를 바라보는 / 레바논 망대 같구나.”(아 7:4) 여기에서 그 영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고난을 통한 그 영의 변화시키심으로 조성된 연인의 복종하는 의지(목으로 상징됨)의 아름다움과, 빛을 향해 열려 있고 정결하며 안식이 가득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녀 마음의 표현(눈, 비교 아 1:15, 4:1, 5:12)의 아름다움과, 높고 예리한 분별력을 지닌 그녀의 영적 지각(코)의 아름다움을 살펴보신다.

아가 7장 11절은 그리스도의 연인이 사랑하는 분과 함께 이곳저곳에 머물며 온 세상을 위한 일을 수행하기 원한다는 것을 계시한다. 이것은 그녀가 종파적인 사람이 아님을 가리킨다. 주님의 일에서 우리의 일을 공개하고 우리 ‘주머니’ 속에 넣지 않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일을 공개해 다른 이들이 그곳에 와서 머물 수 있게 하고 또 우리도 다른 곳에 가서 머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한 몸 안에서 한 일을 지키는 것이다.

아가 7장 12절은 연인과 그녀가 사랑하는 분이 그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들 안에서 다른 이들이 움 돋고, 꽃망울 터지고, 꽃 피도록 부지런히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교회들 안에서 자신의 사랑을 자기가 사랑하는 분께 바친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일한다면, 다른 이들이 많은 도움을 입을 것이다.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일하려면 생명이 성숙해야 하고 높은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아가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일하려면 생명이 성숙해야 하고,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하며, 우리의 일이 반드시 그분의 몸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본다. 우리의 주님은 솔로몬이시고, 우리는 술람미가 되어야 한다. 즉,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살았기 때문에 참술람미였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배필로서 일하며, 모든 포도원을 돌본다(아 8:11). 이것은 우리의 일이 단지 한 도시만을 위하지 않고 몸을 위해야 함을 보여 준다. 우리는 반드시 온 세상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각 지방에 교회들을 세우고서 그 교회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충만한 실재 안으로 이끎으로써 수행한 일이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장소만 위하는 데 있다. 우리 모두는 예루살렘을 위하겠지만, 유다는 유다를, 베냐민은 여전히 베냐민을 위한다. 이제 들로 나가 마을들에서 묵으면서 모든 동산을 보자. 우리는 근시안적이어서는 안 되며 넓혀진 이상을 가져야 한다. 전 세계의 모든 교회들에 대해 할렐루야를 외치자! 우리 모두가 들로 나가 마을들에서 묵으면서 모든 동산을 방문하도록 하자.

4일

아 6:10 ‘새벽처럼 밝아 오고 달만큼이나 아름다우며 해만큼이나 맑고 깃발을 든 군대만큼이나 두렵게 하는 이 여인이 누구인가?’ ”

아 6:13 “돌아와요, 돌아와요, 술람미여 돌아와요, 돌아와요, 우리가 그대를 볼 수 있도록.” “너희는 어찌하여 두 진영의 춤을 보듯 술람미를 바라보려 하느냐?”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생활하는 것과 더 나아가 휘장 안에 생활하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분명하게 체험함으로써 천체로 변화된다.

이기는 믿는 이들은 교회 시대에 햇빛을 반사하는 달과 같은 발광체들이 될 수 있다(빌 2:15). 이기는 믿는 이들은 왕국 시대에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 13:43, 단 12:3). 이기는 이들(사내아이)을 산출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해를 옷으로 입고 있고, 발 바로 밑에는 달이 있다(계 12:1, 5). 요한계시록 12장의 여자는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총체를 상징한다. 이 여자는 사내아이 곧 이기는 이들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해와 달과 별들로 빛난다. 이러한 광경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 하늘에 속해야 하고 밝게 빛나야 한다는 사상을 전달한다.

아가 6장 13절에서 술람미는 춤추는 두 군대, 혹은 두 진영에 비유된다.

‘두 군대’라는 어구는 히브리어로 ‘마하나임’이다. 이것은 범상한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구약의 창세기 32장 2절에 나온 역사적인 이름이다. 야곱은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때 그에게는 네 아내와 많은 자녀들뿐 아니라 많은 종들과 양 떼와 소 떼가 있었다. 야곱은 에서가 아직도 자신을 죽이기 원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야곱이 가족과 함께 여행했을 때, 그에게는 강한 사람들이 없었다. 오직 연약한 이들, 곧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만 있었다. 길에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에게 나타났다. 야곱은 그들을 보고 말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영이로구나.’ 그리하여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다.”(1-2절)

야곱은 하나님의 두 군대를 만난 후에 놀라운 일을 했다. 그는 자신의 아내들과 자녀들과 나머지 소유를 두 무리, 또는 ‘두 군대’로 나누었다.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가득하다. 이것은 우리가 넉넉히 이기고 정복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분명한 증거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거인들’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연약한 이들, 더 약한 이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원하신다. 이들이 그분의 군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싸움이 그들의 손이 아닌 그분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이들로 간주되는 이들은 더 약한 이들, 즉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이들일 것이다. “주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우리가 마땅히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계시하는 이 모든 최고봉의 진리들을 해방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휘장 안에 살면서 지성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당신과의 하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거처이시고, 우리는 당신의 거주자들입니다. 저는 이것에 도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다만 작은 이이며 연약한 이입니다.”

군대는 몸의 원칙을 시사한다. 디르사와 예루살렘은 모두 개별적인 돌 조각들이 아니라 건축물들이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저를 위해 당신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또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이 어떠한 기쁨인지요!”

모든 이기는 이들은 반드시 하나님과 하나여야 하고, 그리스도와 하나여야 한다. 솔로몬의 배필로서 술람미는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솔로몬과 동일하게 되었다.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이라는 이 네 가지 항목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똑같이 되지만, 신격에서는 아니다. 우리가 신격에서 하나님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크나큰 신성 모독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하나님과 똑같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불신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하나 되기 원하시고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하기를 원하신다고 거듭거듭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3일

아 3:9-10 솔로몬왕이 자신을 위해 레바논 나무로 가마를 만들었다네. 그 기둥들은 은으로, 바닥은 금으로, 자리는 자주색으로 만들었는데 그 한가운데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었다네.”

아 4:12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긴 동산, 덮인 우물, 봉해진 샘.

두 번째 단계(아 2:8-3:5)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의 능력, 부활의 풍성, 십자가의 생활이라는 세 가지 기본 공과를 배웠다.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승천 안에 살도록 부름받음(아 3:6-5:1)이라는 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영과 혼을 분별하는 공과를 배워야 한다(히 4:12). … 영과 혼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승천 안에 살도록 부름받는 단계에 이를 수 없다.

승천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땅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우리의 거듭난 영은 하늘에 계신 영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 이 두 영은 하나이다. 이것은 전기와 같다. 전기는 발전소에 있고 우리 방에도 있지만, 오직 한 흐름만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있을 때, 하늘에 계신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승천 안에 사는 것은 계속해서 우리의 영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혼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땅에 있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승천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엡 2:6). 위치적으로 우리가 하늘에 앉아 있을지라도, 우리는 승천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십자가로 부르신 후에, 더 나아가 우리가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승천 안에서 살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솔로몬이 밤에 안식할 수 있도록 하는 침상일 뿐 아니라(아 3:7), 또한 그가 낮에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가마이다(9-10절). … 추구하는 이는 이제 그리스도를 나르는 운송 수단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이동하실 때 그분을 실어 나른다. 가마는 왕이 타는 품위 있는 운송 수단이다. 운송 수단인 가마는 사람을 실어 나른다. 그녀는 이제 그리스도를 이동시키는 운송 수단이다.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실려 움직이신다. 그녀가 그분을 싣고 있는 동안, 그분은 그녀 안에서 그녀와 함께 움직이신다. 할렐루야! 이것이 그리스도의 가마이다.

그 가마는 나무와 은과 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나무는 레바논 백향목인데, 이것은 주님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 기둥들은 은이다. 은은 항상 그리스도의 구속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그 가마를 지지한다. 바닥 곧 기초는 금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이 그 기초이다.

우리가 이 모든 절들을 기도로 읽는다면, 추구하는 이가 얼마나 많이 변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인성과 하나님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구속이 모두 그녀 안으로 일해 넣어졌다. 오직 이러한 것들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가마가 될 수 있게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진 이 세 가지 재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분의 가마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으로 건축될 것이다.

가마의 내부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다. 우리의 내부에는 오직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만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 가마인 우리의 내부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장식되고 아로새겨져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이 책 전체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그러한 단계로 변화되었을 때조차도 우리의 내부는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실어 나르는 가마이다. 이 가마는 예수님의 인성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님의 신성으로 만들어지고 또한 가마의 내부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 안의 새 창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으로 성숙되어, 그리스도께 동산이 된다.

추구하는 믿는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그리스도만을 위한 내밀하고 감추어지고 덮여 있고 봉해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2일

아 2:8-10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 지금 그이가 오고 있어요, 산들을 뛰어오르고 언덕들을 뛰어넘어. 내 사랑하는 이는 가젤이나 젊은 수사슴 같답니다. 지금 그이가 우리 담 뒤에서 서성이며 창문들 틈으로 들여다보고 창살 틈으로 엿보고 있군요. 내 사랑하는 이가 내게 응하여 말하네요. ‘일어나 주오, 내 사랑 내 어여쁜 이여, 어서 와 주오.

아가 2장 8절과 9절은 부활의 생명력에 대해 말한다. 성경에서 산들과 언덕들은 어려움과 장애물을 가리킨다. 어떤 것도 그분을 막을 수 있을 만큼 높거나 크지 않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모든 어려움과 장애물을 극복하셨다. 어려움과 장애물은 모두 전날의 것들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다음 날에 살고 계신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 모든 어려움과 장애물은 그분의 발아래에 있을 뿐이다. 그분께서 뛰어넘으시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과 장애물은 사라진다.

아가 2장 14절과 15절은 그리스도의 연인이 그분의 십자가에 의해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을 묘사한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만족과 안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추구하여 얻은 성취로 인해 그리스도 앞에서의 자기의 영적 상태를 지나치게 주의하는 상태에 빠졌다.

그리스도의 연인이 자기 영적 상태를 지나치게 주의하는 것은 그녀를 자기 성찰에 빠지게 하였으며, 이 자기 성찰이 그녀를 그리스도의 임재에서 벗어나 담을 쌓고 은둔하게 만들었다(아 2:9).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목하라고 말하지만(히 12:2), 자기 성찰은 항상 우리가 자기 속을 들여다보게 한다. 자기 성찰을 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할 것이다. “나는 지금 온전한가?” 이러한 자기 성찰은 자아를 증가시키며,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재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담을 쌓고 은둔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산들을 뛰어오르는 가젤과 언덕들을 뛰어넘는 젊은 수사슴같이 오셔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부활 능력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그녀가 자신의 침체된 상태에서 일어나도록, 또한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그분과 분리하는 상태에서 그분께로 어서 오도록 반복해서 그녀를 부르신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의 십자가를 체험함으로써 그분의 부활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신다. 아가 2장에는 십자가로 부름과, 봄철로 비유된 부활이 있다. 꽃들, 열매, 노래의 때, 산비둘기 소리는 부활의 그림이다. 주님을 추구하는 이가 자기 속을 들여다볼 때는 겨울철의 휴면의 때이다. 그러나 그녀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목할 때, 그녀는 부활의 단계를 상징하는 봄의 단계로 들어간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연인을 강하게 하시고 격려하시어 자기 성찰이라는 낮은 상태에서 일어나 나오게 하려고 하신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가젤이 산들을 뛰어오르고 젊은 수사슴이 언덕들을 뛰어넘는 것과 같은 그분의 부활 능력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녀를 강하게 하신다(아 2:8-9).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연인들인 우리는 자아를 부인함으로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다(마 16:24). 또한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연인들인 우리는 바위틈과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머무는 것처럼(아 2:14) 그분의 십자가와 하나 됨으로써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수 있게 된다(빌 3:10).

그리스도는 그분의 부활의 넘치는 풍성으로 그분을 추구하는 이를 격려하신다(아 2:11-13). 휴면의 때(겨울)가 끝났고 시련(비)이 지나고 사라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풍성을 묘사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부활의 실재(요 11:25)이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영, 곧 생명을 주시는 분과 연결되어 있다. 이 생명 주시는 영은 우리의 영에 내주하신다(롬 8:11, 엡 2:22). 따라서 생명 주시는 영께서 내주하시는 우리의 거듭난 영은 지성소가 된다. 즉, 셋째 하늘에 있는 지성소와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히 4:16).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부활의 실재이신 생명 주시는 영을 체험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영과 혼을 분별해야 한다.

신언노트, 2022 11 06

아가
― 그리스도의 신부가
준비되도록
개개인의 믿는 이가
그리스도와 나누는
사랑의 교통에 대한
점진적인 체험
아가
― 그리스도의 신부의
준비를 위한
한 개인적인 믿는 이의
그리스도와 사랑하는 교통의
점진적인 체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생명으로
받아들인 후,
여러분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추구해야 한다.
이 점에서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대신할 수 없고,
여러분을 위해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다.
모든 믿는 이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개인적이고도 다정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요즈음 나는
나와 나의 하나님 사이에
따뜻하고 친근하며 친밀한
애정이 있음을
깊이 느낀다.
추구하는 그 여인은
“우리를
이끌어 주세요.”
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이끌어 주세요.”
라고 말한다.
“나를 이끌어 주세요.”는
개인적인 것이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하나님을 단지
위대하시고 전능하시며
주권적이시고 위엄 있으시며
심지어 접근할 수 없는 분으로만
묘사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고,
감히 접촉하지도 못한다.
하나님을
위엄 있는 분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신성한 분의
한 속성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사람과 관계를 세우기
원하셨을 때
개인적이고도 다정한
방식을 취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는
방식을 취하셨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위엄 있고
접촉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오시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은
베드로에게
한 동네 사람처럼
오셨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품에
기댈 수 있었다.
그것은 얼마나
개인적이고도
다정한 것이었는가!
바로 그 하나님,
우리가 추구하는
바로 그 주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잔치를 누리도록
초대하신다.

매일 나는
아침에 일어난 후,
책상으로 가서
맨 먼저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한다.
나는 다만
가련한 사람으로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주님께
개인적이고 다정한 것처럼,
나에게
개인적이시고 다정하신
구주를 접촉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추구하는 그 여인이
말한 것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그이 입의 입맞춤들로
내게
입맞춤해 주었으면!”
즉시
그녀의 어조가 바뀐다.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나은 까닭이랍니다.”
이것은
개인적이고도 다정한
기도이다.
“나를
이끌어 주세요,
우리가
당신을 좇아
달려가렵니다.”

만족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
아가의
첫 번째 ‘결정(結晶)’이다.
두 번째 결정은
왕이
그분을 추구하는 이를
그분의 내실로
이끄는 것이다.
왕의 내실은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내실인
우리의 거듭난 영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셔서
사람 안에 거하실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을 창조하셨다.
신약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의 거듭난 영은
우리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수단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담는
수단이기도 하다.
디모데후서 4장 22절은
“주님께서
그대의 영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2장 22절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거처, 곧 처소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
참된 내실은
우리의 영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며,
이 두 영은
함께 연합되어
한 영이 되었다.

기독교는
육체 안에 계셨던
예수님을 전파하지만,
우리는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
즉 그 영이신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서
내밀하게
우리를 방문하시고,
물질적인 방식이 아닌
영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그분을 추구하는 이들을
그분의 내실로,
즉 그분의 거처인
그들의 거듭난 영 안으로
이끄신다.
우리의 체험에 따르면,
우리의 영은
지성소
곧 삼일 하나님의
거처이자 내실이다.

왕은
그녀를 이끌었고
그녀는
왕을 따라갔지만,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왕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고 계신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으로
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내실은
생명을 분배하시는 영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러한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연인들의
거듭난 영이며,
그리스도의 내실은 또한
그리스도의 연인들 안에 있는
실지적인 지성소로서
그들이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신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그러한 분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아가 2장
8절과 9절은
부활의 생명력에 대해
말한다.
성경에서
산들과 언덕들은
어려움과 장애물을
가리킨다.
어떤 것도
그분을 막을 수 있을 만큼
높거나 크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고,
모든 어려움과 장애물을
극복하셨다.
어려움과 장애물은 모두
전날의 것들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다음 날에
살고 계신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 모든 어려움과 장애물은
그분의 발아래에
있을 뿐이다.
그분께서
뛰어넘으시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과 장애물은
사라진다.

아가 2장
14절과 15절은
그리스도의 연인이
그분의 십자가에 의해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을
묘사한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만족과 안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추구하여 얻은
성취로 인해
그리스도 앞에서의
자기의 영적 상태를
지나치게 주의하는
상태에 빠졌다.

그리스도의 연인이
자기 영적 상태를
지나치게 주의하는 것은
그녀를
자기 성찰에 빠지게 하였으며,
이 자기 성찰이
그녀를
그리스도의 임재에서 벗어나
담을 쌓고
은둔하게 만들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목하라고
말하지만,
자기 성찰은 항상
우리가
자기 속을
들여다보게 한다.
자기 성찰을 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할 것이다.
“나는 지금
온전한가?”
이러한 자기 성찰은
자아를 증가시키며,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재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담을 쌓고
은둔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산들을 뛰어오르는 가젤과
언덕들을 뛰어넘는 젊은 수사슴같이
오셔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부활 능력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그녀가
자신의 침체된 상태에서
일어나도록,
또한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그분과 분리하는 상태에서
그분께로
어서 오도록
반복해서
그녀를 부르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십자가를 체험함으로써
그분의 부활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신다.
아가 2장에는
십자가로 부름과,
봄철로 비유된
부활이 있다.
꽃들, 열매,
노래의 때, 산비둘기 소리는
부활의 그림이다.
주님을 추구하는 이가
자기 속을 들여다볼 때는
겨울철의
휴면의 때이다.
그러나 그녀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목할 때,
그녀는
부활의 단계를 상징하는
봄의 단계로 들어간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연인을
강하게 하시고
격려하셔서
자기 성찰이라는
낮은 상태에서
일어나
나오게 하려고 하신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그녀에게
가젤이
산들을 뛰어오르고
젊은 수사슴이
언덕들을 뛰어넘는 것과 같은
그분의 부활 능력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녀를 강하게 하신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연인들인 우리는
자아를 부인함으로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다.
또한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연인들인 우리는
바위틈과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머무는 것처럼
그분의 십자가와 하나 됨으로써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부활의
넘치는 풍성으로
그분을 추구하는 이를
격려하신다.
휴면의 때(겨울)가
끝났고
시련(비)이
지나고 사라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풍성을
묘사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부활의 실재이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영,
곧 생명을 주시는 분과
연결되어 있다.
이 생명 주시는 영은
우리의 영에
내주하신다.
따라서 생명 주시는 영께서 내주하시는
우리의 거듭난 영은
지성소가 된다.
즉, 셋째 하늘에 있는 지성소와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부활의 실재이신
생명 주시는 영을
체험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영과 혼을
분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연인들인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아닌
부활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 됨으로써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부활의 실재는
공기가 가득한(영이신) 그리스도이며,
이분께서는
완결되신 영으로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의 거듭난 영과
섞이셨다.
이러한 섞인 영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고
부활을 체험하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 십자가와 하나가 되어
그 자아로부터 구출되고
또 하나님의 새 창조물 안에 있는
한 새사람 안으로 변형되어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을
건축함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의 능력,
부활의 풍성,
십자가의 생활이라는
세 가지 기본 공과를
배웠다.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승천 안에 살도록
부름받음이라는
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영과 혼을 분별하는
공과를 배워야 한다.
영과 혼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승천 안에 살도록 부름받는
단계에 이를 수 없다.

승천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땅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인
우리의
거듭난 영은
하늘에 계신
영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
이 두 영은
하나이다.
이것은
전기와 같다.
전기는
발전소에 있고
우리 방에도 있지만,
오직 한 흐름만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있을 때,
하늘에 계신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승천 안에 사는 것은
계속해서
우리의 영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혼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땅에 있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승천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
위치적으로
우리가
하늘에 앉아 있을지라도,
우리는
승천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십자가로 부르신 후에,
더 나아가
우리가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승천 안에서 살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솔로몬이
밤에 안식할 수 있도록 하는
침상일 뿐 아니라,
또한 그가
낮에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가마이다.
추구하는 이는 이제
그리스도를 나르는
운송 수단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이동하실 때
그분을 실어 나른다.
가마는
왕이 타는
품위 있는 운송 수단이다.
운송 수단인 가마는
사람을 실어 나른다.
그녀는 이제
그리스도를 이동시키는
운송 수단이다.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실려
움직이신다.
그녀가
그분을 싣고 있는 동안,
그분은
그녀 안에서
그녀와 함께
움직이신다.
할렐루야!
이것이
그리스도의 가마이다.

그 가마는
나무와 은과 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나무는
레바논 백향목인데,
이것은
주님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 기둥들은
은이다.
은은 항상
그리스도의 구속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그 가마를 지지한다.
바닥 곧 기초는
금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은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이
그 기초이다.

우리가
이 모든 절들을
기도로 읽는다면,
추구하는 이가
얼마나 많이 변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인성과
하나님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구속이 모두
그녀 안으로
일해 넣어졌다.
오직 이러한 것들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가마가 될 수 있게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진
이 세 가지 재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분의 가마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으로
건축될 것이다.

가마의 내부는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다.
우리의 내부에는 오직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만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 가마인
우리의 내부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장식되고
아로새겨져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이 책 전체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그러한 단계로
변화되었을 때조차도
우리의 내부는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실어 나르는
가마이다.
이 가마는
예수님의 인성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님의 신성으로
만들어지고
또한 가마의 내부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 안의 새 창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으로
성숙되어,
그리스도의 내밀한 누림을 위한
동산이 된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을
준비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어려운 환경(북풍)과
즐거운 환경(남풍)이
동산인 그녀에게 발생하여
그 향기를 날리기를
원한다.

추구하는 믿는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그리스도만을 위한
내밀하고 감추어지고
덮여 있고 봉해진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이
끝나야 할 것 같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솔로몬은
많은 포도원의 주인이고,
이 포도원들을 가꾸는 데에는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이제 술람미가 된
시골 소녀는 마땅히
그의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연인이 결국
주님의 일에 동참해야 함을
가리킨다.
주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
우리는
자격을 갖추어야 하며,
주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
필요한 자격은
영적으로 장비되는 것에
달려 있다.
즉, 신성한 생명의
모든 속성으로
장비되는 것에
달려 있다.

“네 목은
상아 망대 같고
/ 네 눈은
바드랍빔 성문 가에 있는
/ 헤스본 연못 같으며
/ 네 코는
다마스쿠스를 바라보는
/ 레바논 망대 같구나.”
(아 7:4)
여기에서
그 영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고난을 통한
그 영의 변화시키심으로 조성된
연인의
복종하는 의지(목으로 상징됨)의 아름다움과,
빛을 향해 열려 있고
정결하며
안식이 가득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녀 마음의 표현(눈)의 아름다움과,
높고 예리한 분별력을 지닌
그녀의 영적 지각(코)의 아름다움을
살펴보신다.

아가 7장 11절은
그리스도의 연인이
사랑하는 분과 함께
이곳저곳에 머물며
온 세상을 위한
일을 수행하기 원한다는 것을
계시한다.
이것은
그녀가
종파적인 사람이 아님을
가리킨다.
주님의 일에서
우리의 일을 공개하고
우리 ‘주머니’ 속에
넣지 않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일을 공개해
다른 이들이
그곳에 와서
머물 수 있게 하고
또 우리도
다른 곳에 가서
머무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한 몸 안에서
한(하나의) 일을
지키는 것이다.

아가 7장 12절은
연인과
그녀가 사랑하는 분이
그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들 안에서
다른 이들이
움 돋고,
꽃망울 터지고,
꽃 피도록
부지런히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교회들 안에서
자신의 사랑을
자기가 사랑하는 분께
바친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일한다면,
다른 이들이
많은 도움을 입을 것이다.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일하려면
생명이
성숙해야 하고
높은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아가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일하려면
생명이 성숙해야 하고,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하며,
우리의 일이 반드시
그분의 몸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본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솔로몬이시고,
우리는
술람미가 되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살았기 때문에
참술람미였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배필로서 일하며,
모든 포도원을 돌본다.
이것은
우리의 일이 단지
한 도시만을 위하지 않고
몸을 위해야 함을
보여 준다.
우리는 반드시
온 세상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각 지방에
교회들을 세우고서
그 교회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충만한 실재 안으로 이끎으로써
수행한 일이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장소만 위하는 데 있다.
우리 모두는
예루살렘을 위하겠지만,
유다는
유다를,
베냐민은
여전히 베냐민을 위한다.
이제
들로 나가
마을들에서 묵으면서
모든 동산을 보자.
우리는
근시안적이어서는 안 되며
넓혀진 이상을
가져야 한다.
전 세계의 모든 교회들에 대해
할렐루야를 외치자!
우리 모두가
들로 나가
마을들에서 묵으면서
모든 동산을 방문하자.

휴거의 준비는
오늘날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끊임없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거듭해서
올라가고 올라가서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실 때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그리스도의 연인은
무력하여
걸을 수 없는 것 같다.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그녀는
그녀가 사랑하는 분이
짊어져야 할 짐이 된다.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그녀의 엉덩이뼈는
하나님께서 치신 것 같다. “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이것은
그녀가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으며,
광야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
그 압박이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가 휴거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실 수 있다.
그러므로 의지하는 생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가
의지할 데 없어
그분만 의지할 때에야,
성령은
“사랑하는 이에게
몸을 기댄 채
/ … 올라오는
이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말씀하시며
감탄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끝까지 견딜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코 자신의 버티는 힘에
달려 있지 않고
주님의 보존하심과 지키심에
달려 있음을
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온전함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보존하시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도장처럼 당신 마음에,
/ 도장처럼 당신 팔에
지녀 주세요.”
(아 8:6)라고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은 사랑하는 곳이고,
‘팔’은 능력이 있는 곳이다.
“저를
도장처럼
영원히 당신의 마음에 지녀 주시고,
저를 도장처럼
없어지지 않도록
당신의 팔에 지녀 주십시오.
이전에 대제사장이
그의 가슴과 어깨에
이스라엘 백성을
품고 메었듯이,
당신께서 오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저를 기억해 주시고
팔로 계속
저를 지탱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저는
저의 약함과 공허함을 알며,
저의 무력함을 인식합니다.
주님,
저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입니다.
당신께서 오실 때까지
제가
자신을 스스로 보존하려고 한다면,
저는 다만
당신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고
제 자신에게 해를 입힐 뿐입니다.
오늘날
저의 모든 소망은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능력에
있습니다.
오늘 이후로
모든 것은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아가 8장 13절의
‘동산들’은
복수이다.
그분은
그녀의 동산에
거하실 뿐 아니라
또한 많은 동산에도
거하신다.
그녀와 함께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제
다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들은
빨리 듣고
더디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과 그녀 모두는 이제
이전처럼 그렇게 말이 많지 않다.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계속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으며,
이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릇 자질구레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다
땅에 속한 생명이
그들 안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다
듣고자 하며,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생활이
주님의 말씀에 달려 있고,
그들의 일이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직
들으려고 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 없으면
계시와 빛과 지식이 없다.
믿는 이들의 생활은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하심에 달려 있다.

아가 8장 14절은
향기 그윽한 산들에 대해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의 다시 오심과
그분의 왕국의 상태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는
여인의 체험이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바다에 들어가
사라지는 것과 같음을
본다.
흐름은
갈수록 깊어질 수 있지만,
더 이상 진보의 여지는 없다.
이제 세상에 남겨진 것은 다만
그녀의 몸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내 사랑하는 이여,
속히 오셔서
/ 향기 그윽한 산들 위에 있는
/ 가젤이나 젊은 수사슴처럼
되어 주세요.”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젤이나 젊은 수사슴처럼,
속히 오십시오.
가젤이나 젊은 수사슴이
향기 그윽한 산들 위에 나타나듯이
왕국 안에서 오셔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랑이 완전할지라도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
그분께서 오실 때
믿음은 사실로 변하고
찬양은 기도를 대신할 것이다.
사랑은
그늘이 전혀 없는 온전함으로
완결될 것이고,
우리는
죄 없는 영역에서
그분을 섬길 것이다.
그날은 얼마나 놀랍겠는가!
주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1일

아 1:2 “그이 입의 입맞춤들로 내게 입맞춤해 주었으면!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나은 까닭이랍니다.

아 1:4 나를 이끌어 주세요, 우리가 당신을 좇아 달려가렵니다―왕께서 나를 그분의 내실로 이끌어 들이셨으니―…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생명으로 받아들인 후, 여러분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추구해야 한다. 이 점에서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대신할 수 없고, 여러분을 위해 어떤 것도 해 줄 수 없다. 모든 믿는 이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개인적이고도 다정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요즈음 나는 나와 나의 하나님 사이에 따뜻하고 친근하며 친밀한 애정이 있음을 깊이 느낀다. 추구하는 그 여인은 “우리를 이끌어 주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이끌어 주세요.”라고 말한다. “나를 이끌어 주세요.”는 개인적인 것이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하나님을 단지 위대하시고 전능하시며 주권적이시고 위엄 있으시며 심지어 접근할 수 없는 분으로만 묘사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고, 감히 접촉하지도 못한다. 하나님을 위엄 있는 분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신성한 분의 한 속성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사람과 관계를 세우기 원하셨을 때 개인적이고도 다정한 방식을 취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는 방식을 취하셨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위엄 있고 접촉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 오시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은 베드로에게 한 동네 사람처럼 오셨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품에 기댈 수 있었다(요 13:23). 그것은 얼마나 개인적이고도 다정한 것이었는가! 바로 그 하나님, 우리가 추구하는 바로 그 주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잔치를 누리도록 초대하신다(계 3:20).

매일 나는 아침에 일어난 후, 책상으로 가서 맨 먼저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다만 가련한 사람으로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주님께 개인적이고 다정한 것처럼, 나에게 개인적이시고 다정하신 구주를 접촉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추구하는 그 여인이 말한 것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그이 입의 입맞춤들로 내게 입맞춤해 주었으면!” 즉시 그녀의 어조가 바뀐다. “당신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더 나은 까닭이랍니다.” 이것은 개인적이고도 다정한 기도이다. “나를 이끌어 주세요, 우리가 당신을 좇아 달려가렵니다.”

만족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 아가의 첫 번째 ‘결정(結晶)’이다. 두 번째 결정은 왕이 그분을 추구하는 이를 그분의 내실로 이끄는 것이다. 왕의 내실은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내실인 우리의 거듭난 영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어 사람 안에 거하실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을 창조하셨다. 신약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의 거듭난 영은 우리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수단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담는 수단이기도 하다. 디모데후서 4장 22절은 “주님께서 그대의 영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2장 22절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거처, 곧 처소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 참된 내실은 우리의 영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며, 이 두 영은 함께 연합되어 한 영이 되었다(고전 6:17).

기독교는 육체 안에 계셨던 예수님을 전파하지만, 우리는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 즉 그 영이신 그리스도(고후 3:17)를 전파한다.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서 내밀하게 우리를 방문하시고, 물질적인 방식이 아닌 영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그분을 추구하는 이들을 그분의 내실로, 즉 그분의 거처인 그들의 거듭난 영 안으로 이끄신다. 우리의 체험에 따르면, 우리의 영은 지성소 곧 삼일 하나님의 거처이자 내실이다.

왕은 그녀를 이끌었고 그녀는 왕을 따라갔지만,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아 1:4). 왕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고 계신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으로 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내실은 생명을 분배하시는 영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러한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연인들의 거듭난 영이며(롬 8:16, 딤후 4:22, 롬 8:11), 그리스도의 내실은 또한 그리스도의 연인들 안에 있는 실지적인 지성소로서 그들이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신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그러한 분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히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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