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하고 현명한 노예가 되어, 주인이 맡긴 집안 식구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나눠 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인이 와서 노예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 노예는 복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인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길 것입니다.” ― 마 24:45-47.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은 그분의 ‘가정’ 경영, 즉 그분의 가정 행정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그분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어 자신을 표현하는 집을 얻으시는 것인데, 이 집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신실하고 현명한 노예는 하나님의 집의 청지기이자 가정 관리인으로서,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분배한다.
신실함은 주님께 보이는 것이지만, 현명함은 믿는 이들에게 행하는 것이다.
주님은 천국의 출현 안에서 신실한 노예에게 그분의 모든 소유를 맡기실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노예에게 주시는 보상일 것이다.
‘양식을 나눠 줄’은 교회 안의 믿는 이들에게 생명 공급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양식으로서 생명의 말씀 안에 체현되시고 실재화되어 계신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영적 양식으로 누려 이 주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먹일 수 있기 위해서는 온갖 기도를 통해,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읊조림으로 즉 깊이 숙고하며 크게 말함으로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의 사역을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신언해야 한다. 즉 이 생명의 살아 있는 말씀과 우리가 본 것을 성령의 즉각적이고도 신선한 감동과 기름바름과 빛 비춤 아래서, 우리의 영을 사용해 말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돌봄 아래 있는 이들을 먹이려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기도를 함으로 생명 주시는 영을 우리의 공급 곧 영적인 양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생명을 주는 ‘구하는 사람’, 곧 생명 주시는 영의 통로로서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신선한 기름의 아들들’, 곧 즐거움의 기름이신 신선하시고 현존하시며 완결되신 영으로 계속 충만하게 되어, 등잔대의 빛나는 증거 곧 예수님의 증거를 위해 등잔대 안으로 그 영을 흘려 보내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대가를 지불하여 신성한 본성을 지닌 금기름이신 하나님을 더 많이 얻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금으로 된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기 위해 순수한 금등잔대가 될 수 있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체험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그 영께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금이신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 주어 그들에게 기름을 공급해 줄 때, 우리는 사실상 그들에게 하나님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흘러나오셔서 그들 안으로 들어가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악한 노예가 마음속으로 ‘나의 주인이 더디 오실 것이다.’라고 하며, 동료 노예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면, 예기치 않은 날, 알아채지 못하는 시각에 그 노예의 주인이 와서, 그를 엄하게 처벌하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 마 24:48-51.
마음속으로 우리의 주인께서 더디 오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악한 현시대를 사랑하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지 않는 것이다.
‘오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임재’를 의미하는 ‘파루시아’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즉 주님께서 오시기를 사모한다면, 오늘 우리는 그분의 나타나심, 그분의 임재를 사모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오늘이 있는 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면서,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그분의 오심을 경고와 격려와 동기 부여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오심에 대해 깨어 있고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탐심을 주의해야 하며, 우리 자신을 위해 보물을 쌓아 두지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해야 한다.
우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철저히 멸하실 악한 세상을 사랑하거나 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이 덫과 같이 갑자기 우리에게 닥치지 않도록 깨어서 간구해야 한다.
“주 예수님, 오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염원과 부르짖음과 지속적인 기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것은 동료 믿는 이들을 학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 믿는 이들을 판단하거나 유죄판결 해서는 안 되며, 친절하게 대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욕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보다 그들을 더 낫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 믿는 이들 위에 (그들을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 것과 같이) 군림해서는 안 되며, 노예로서 그들을 섬김으로 생명 주시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먹여야 한다.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은 세상적인 것들로 취해 있는 세상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다.
믿는 이들은 신성한 본성과 거룩한 위치가 있으므로, 믿지 않는 이들과 멍에를 함께 메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결혼이나 사업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 사이의 모든 친밀한 관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이들과 함께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한다.
신실하고 현명한 노예는 왕국이 출현할 때 다스리는 권위를 보상으로 받을 것이지만, 악한 노예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의 영광과 왕국 안에 있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임재에서 끊어질 것이다.
왕국의 출현에서 끊어지는 것은 바깥 어둠 속에 던져져,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이다.
바깥 어둠은 왕국의 출현 안에 있는 밝은 영광 바깥에 있는 어둠이다.
슬피 우는 것은 후회하는 것을 가리키고, 이를 가는 것은 자책하는 것을 가리킨다.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민족들을 다스리는 것은 그분의 신실하고 현명한 노예들에게 주어지는 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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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신실하고 현명한 노예가 됨으로써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함”
6일
우리는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셔서는’(마 24:49) 안 된다. 이것은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것보다 훨씬 더 떠내려가고 타락한 것이다. 이것은 세상으로 떠내려가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것들에 취해 있고 심지어 마취되어 있다. 그들은 현시대에 의해 무감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은 그들이 즐기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여러분이 성도들을 때리고 있다면 아직 교회생활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교회생활에 관심이 없다면 결코 장로들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교회에 대한 부담이 너무 무겁고’ 교회생활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을 비난한다. 일단 여러분이 교회에 대해 잊어버리기로 결심하고 교회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즉시 세상을 사랑하는 데 빠질 것이고 이 시대에 의해 늘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세상 사람들과 사귈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는 장로들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마음이 없다. 그는 한때 동료 노예들을 때렸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세상적인 누림이 완전히 그를 점유하고 있다. 이제 그는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 그는 무감각하게 만드는 세상적인 것들을 즐기고 있기 때문에, 거의 매일이 행복한 날이고 거의 매 주말이 즐거운 주말이다.
주님의 위임에 그다지 신실하지 않은 게으른 노예들은 주님께서 즉시 오시지 않고 더디 오시리라는 핑계를 댄다(마 24:48). 그 결과 그들은 동료 노예들을 학대하고 세상적인 것들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지금 당장 돌아오신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은 더 이상 세상을 누릴 시간이 없게 될 것이라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의 주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이러한 변명을 수긍하지 않으실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분은 다시 오실 때 그분의 신실하지 않은 노예들을 끊어 버리시고 엄하게 처벌하실 것이다(51절). 엄하게 처벌한다는 것, 또는 둘로 쪼갠다는 것은 산산조각 낸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을 때, 기름부음 받은 분이신 그리스도께 붙여졌다(고후 1:21). 우리가 뒤로 물러난 상태에 있다 해도 주님은 우리를 끊어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신실하지 않고 게으른 상태에 있다면, 주님은 다시 오실 때 이렇게 붙여진 데서 우리를 끊어 버리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그분 사이를 둘로 쪼개실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임재에서 끊어져 위선자들이 받을 몫인 어떤 장소로 내던져질 것이다. 믿지 않는 이들이 받을 몫은 영원한 멸망이지만, 게으른 노예들이 받을 몫은 일시적이고 시대적인 형벌이다.
신실하게 되는 길은 모든 배고픈 사람의 양식인 주님의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주님의 집안 식구들은 믿는 이들뿐 아니라 죄인들로도 구성된다. 누가 배고픈 죄인들을 먹이러 그들에게 갈 것인가? 우리는 모두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가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확산시킬 수 있도록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또한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우리는 동료 노예들인 동료 믿는 이들을 때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들을 비난하거나 그들에 대해 불평하지 말라.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것을 조금도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는 그러한 말을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입은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말해 내기 위해서 지어졌다. 형제들을 비난하는 것이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것이다. 동료 노예들을 때린다면 우리는 벌을 받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무감각하고 술 취한 세상적인 사람들과 어울려 즐기려고 세상으로 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깨어 있는 이들이어야 한다.
5일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이 보배롭다는 것을 안다면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해야 한다(딤후 4:8). 성경의 마지막은 “주 예수님, 오십시오!”(계 22:20)라는 기도로 끝맺는다. 사도들은 마음속으로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돌아오시기를 준비하는 생활을 하였다. 자신이 주님의 오심에 대한 징조를 알기 때문에 느슨해도 되고, 먼저 세상을 사랑했다가 마지막 이레가 되면 주님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은 어떤 부자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 부자는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아 두고 자기의 혼을 즐겁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너에게서 너의 혼을 도로 찾아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16-20절). 우리에게 날마다 ‘오늘’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주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늘이 있고 아직 호흡이 있는 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면서,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그분의 오심을 항상 격려로 삼아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 디모데에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또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분께서 나타나시는 것과 그분의 왕국을 두고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에 한 권유이다. 그는 자신이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 심판대에서 의의 면류관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이며,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이 면류관이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디모데와 우리에게, 주님의 심판과 왕국을 두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것은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약해지지 않고 끝까지 신실한 상태로 남아 있게 할 것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 그분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둑같이 은밀하게 오셔서 그분의 보물인 그들을 훔쳐 가실 것이고 하늘들에 있는 그분의 임재 안으로 그들을 이끄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고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휴거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늘에 속한 숨으로 가득 채워지고 우리의 그릇에 기름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날마다 이 세상의 염려와 땅에 속한 즐거움으로 점유된다면 휴거될 길이 없다. 우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해야 한다. 그녀는 소금 기둥이 되어 수치스러운 장소에 버려졌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 남겨 두셔서 우리가 대환난을 통과하게 하심으로, 성숙되고 휴거될 때까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실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조심할 것을 상기시켜 주셨다. 또한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우리의 마음이 억눌려 대환난의 날이 덫과 같이 닥치지 않도록 늘 간구하며 항상 깨어 있을 것을 상기시켜 주셨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할 수 있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모든 여지를 주님께 드려야 한다.
성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성숙되어 휴거되고 보상을 얻도록,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 안에서 자라야 한다.
4일
마태복음 24장 48절의 그 악한 노예는 믿는 이인데, 왜냐하면 그가 주님께 임명되고, 주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며, 주님께서 오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49절은 그 악한 노예가 자기 동료 노예들을 때리고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고 말한다. 우리의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것은 동료 믿는 이들을 학대하는 것이고,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은 세상적인 것들로 취해 있는 세상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다.
그 악한 노예의 문제는, 그가 주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기다리지 않는 데 있다. 그 노예는 주님의 오심을 위해 준비된 삶을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그분은 그 악한 노예를 엄하게 처벌하시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리실 것이다. ‘그를 엄하게 처벌하고’는 그를 끊어 버린다는 뜻이다. 이것은 장차 영광 안에서 오실 주님에게서 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의 결말에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과 일치한다. 주님 자신은 영광 안에 계실 것이며, 주님은 그 악한 노예를 이 영광에서 끊어지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과 같다.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는 사람마다 주님과 그분의 임재와 그분과의 교통과 주님께서 계실 영광스러운 영역으로부터 끊어질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징벌을 받는 것이다. 주님은 거짓 믿는 이에게는 임무를 맡기지 않으실 것이다. 분명 그 악한 노예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왕국의 책인 마태복음에서의 쟁점은 구원이 아니라 왕국에 있다. 즉, 우리가 보상을 받아 왕국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보상을 잃고 왕국의 누림을 놓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곳에서 처벌과 징계를 받을 것인지에 있다.
우리 모두는 제때에 주님의 백성에게 양식을 주고, 주님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최대한으로 사용해야 한다. 부정적인 면에서 우리는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이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봉사와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형제들을 비난하거나 종종 형제들을 심하게 반대하기까지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일은 하지 않으면서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것이다. 각지에 있는 교회들의 많은 장로들은 조금이라도 잘못된 일을 하기를 두려워한다. 일단 그들이 잘못된 일을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전화로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모든 전화가 때리는 것이다. 많은 성도가 장로들을 때리고 있다.
한 성도에게 부정적인 일이 일어날 때, 어떤 이들은 결코 그것을 마음에만 간직하지 못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소식을 전하는 것이 일종의 때리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기도 집회에서 부정적인 상황에 처한 어떤 성도에 대해 미묘한 방식으로 기도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때에는 그를 폭로하지 않지만 우리의 기도를 통해 그를 폭로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 우리의 마음과 기도 속의 의도는 그리 순수하지 않다. 우리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매우 영적인 체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의 기도의 십분의 일은 일종의 판단이다. 이것이 바로 때리는 것이다. 어떤 지방에 있는 장로들은 다른 지방에 있는 장로들을 비판할지도 모른다. 이것도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것이다.
여러분은 봉사하는 시간을 때리는 데 허비하고 있다. 여러분은 봉사하는 대신, 형제들인 동료 노예들을 때리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일종의 때리는 것인 비난과 판단과 반대와 불평을 멈추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권익을 위해 긍정적인 봉사를 하는 데 우리의 시간과 힘과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한다.
3일
스가랴서 4장 3절에서 이 두 올리브나무는 그 당시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와 총독인 스룹바벨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위해 여호와의 영으로 채워진 기름의 두 아들이었다. 기름의 두 아들은 또한 현시대의 마지막 삼 년 반 동안 활동할 두 증인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 대환난 때에 하나님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이 두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는 대환난 동안 박해받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믿는 이들을 지지하고 공급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증거를 상징하는 등잔대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빛나야 한다. 이렇게 빛나려면 불타야 하고, 불타려면 올리브기름이 공급되어야 한다. 올리브기름을 얻기 위해서는 몇 그루의 올리브나무가 있어야 한다. 등잔대 양편에 있는 올리브나무는 기름의 두 아들, 곧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다.
스가랴서 4장 11절에는 두 나무가 있고, 12절에는 두 가지가 있다. 두 가지는 두 나무에 속한 부분이다. 등잔대의 대접에 기름이 없을 때, 두 나무가 가지들을 통하여 두 대롱 속으로 기름을 흘려 보냄으로써 기름을 공급한다. 그러면 기름은 대롱에서 대접으로 흐르고 또한 대접에서 등잔대로 흐를 것이다.
스가랴서 4장 12절에서 금을 흘려 보내는 것은 대롱들이 아닌 가지들이다. 이 가지들은 ‘금을 흘려 보낸다’. 금을 흘려 보내는 것은 금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 절에서 ‘금’이란 단어는 기름을 가리킨다. 기름과 금이 하나이다. 기름은 그 영을 가리키고, 그 영은 하나님이시다. 더욱이 성경의 예표에서 금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대접을 채우는 금은 그 영이고, 그 영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금으로 예표되신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체험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그 영께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금이신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 주어 그들에게 기름을 공급해 줄 때, 우리는 사실상 그들에게 하나님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흘러나오셔서 그들 안으로 들어가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서 다른 이들 안으로 하나님을 흘려 보내는 올리브나무들이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흘러나오는 올리브나무인 사람들에게서 빈곤한 이들에게로 기름이 공급될 것이다.
더 나아가 왜 두 나무가 두 가지로 불리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스가랴서 3장과 4장에서 스룹바벨이라는 동일한 인물이 순(3:8), 나무(4:3, 11), 가지(12절)로 상징된다. 이것은 스룹바벨 자신이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만일 그 자신이 하나의 완전한 나무라면, 그가 근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무이지만 이 나무는 사실상 다른 나무의 한 가지이며, 그 다른 나무가 근원이다. 더욱이 스룹바벨은 그 다른 나무에서 나온 한 순이기도 한데, 그 다른 나무는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올리브나무이시고, 스룹바벨과 우리 자신은 모두 그리스도의 가지들, 순들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올리브나무이시지만, 그분에게서 많은 순이 돋아났다. 이러한 순들의 돋아남은 곧 그리스도께서 가지들을 뻗어 내시는 것이다. 이 가지들 또는 순들은 이제 오늘날 이 땅에 있는 많은 올리브나무들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올리브나무가 아닌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올리브나무들이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올리브나무인 것은 개별적인 나무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유일한 올리브나무이신 그리스도의 가지들이라는 의미이다. 가지들인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기름 곧 그 영을 공급함으로써 그들을 소생시켜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을 다른 이들에게 공급하는 올리브나무들인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자!
2일
믿는 이들, 교회들, 그리고 수많은 죄인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 우리의 의무와 책임은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들이 죄인들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필요한 양식인 은혜의 복음을 공급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 믿는 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상황에 맞는 성경 말씀을 공급하여 그들을 양육하고 치료하고 강화하며 심지어 깨어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신실하고 현명한 노예로서 주님의 소유인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제때에 합당한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다. 사무실에 들어갈 때, 우리는 지금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이라는 합당한 양식을 공급할 제때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학교에 가르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들으러 갈지라도, 우리 주위의 모든 급우가 우리에게 맡겨진 주님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공급할 기회, 곧 제때를 붙잡아야 한다.
매일이 우리가 누구에게든 합당한 양식을 공급해야 하는 제때이다. 우리 모두는 분발되고 깨어나서 어리석지 않고 부지런하고 신실하고 현명한 이들이 되어, 양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때에 합당한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
빌립보서 1장 24절에서 사도가 고려한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주님과 교회로 철저하게 점유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바울은 교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 더욱 필요함을 깨달았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할 때 그리스도를 말했다. 그는 살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 그는 일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일했으며 교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했다. 교회를 위해서 바울은 기꺼이 육체에 남아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기 원했다.
빌립보서 1장 25절에 언급된 ‘믿음’은 성도들이 믿는 내용을 가리키고, ‘진보’는 생명의 성장을, ‘기쁨’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감옥 안에 있든 감옥 밖에 있든 바울은 성도들의 진보와 기쁨의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 바울 때문에 교회들은 생명이 성장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몸의 생활에서 어떤 사람들은 공급의 통로로서 기능을 발휘해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바울과 같은 지체들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지체들이 죽는다면, 매우 실지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주입되시는 것이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한, 그리스도가 주입되시는 것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자랑할 수 있다. 각지 교회에서 인도하는 이들은 모두 그러한 통로, 그러한 공급의 수단이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은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공급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주입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인도하는 이들의 경우 그리스도를 교회에 공급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살아 있든 죽든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있는 것과 죽어서 우리와 헤어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우리에게 너무도 사랑스러웠던 한 형제를 한 예로 생각해 보고 싶다. 그는 확실히 몸에게 공급의 수단이었다. 그 형제가 살아 있다가 주님 품에 간 것은 우리에게 차이를 가져왔다. 우리 모두도 이와 동일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지 죽는지가 교회에게 중요한 문제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공급하고 그리스도를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성도들 안에 주입하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린다면, 우리가 살아 있는지 주님 품에 가는지가 교회에게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신언노트, 2023 04 23
신실하고 현명한 노예가 됨으로써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함
신실하고 현명한 한 노예가 됨에 의하여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들을 준비함
마태복음 24장
45절부터 51절까지는
신실함과 현명함에 관한 말씀이다.
신실함은
주님을 향한 것이고,
현명함은
믿는 이들을 향한 것이다.
주님의 임재 안으로 휴거되려면
깨어 있어야 하고,
왕국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려면
신실해야 한다.
45절에 언급된
‘집안 식구들’은
교회인 믿는 이들을 가리킨다.
음식을 나눠 주는 것은
교회 안의 믿는 이들에게
생명 공급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집안 식구들에게
제때에 어떻게 생명을 공급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마태복음 24장 46절의
‘복이 있습니다(축복을 받는다)’는
그 왕국의 나타남 안에서
다스리는 권위로(with)
보상받는 것이다.
주님의 신실한 노예는
그 하늘들의 왕국의 나타남 안에서
한 보상으로
그분의 모든 소유를
맡게 될 것이다
(~소유물들[재산] 위에 두어질 것이다).
우리는
생명 공급이 되는 음식을
제때에
주님의 백성에게
공급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가르치는
은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영적인 음식을 공급하지만,
자신은
그러한 은사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여기에는
그러한 사상이 없다.
주님의 모든 노예는
각자 맡은 위임을 수행하도록
은사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전체에서
훌륭한 설교자들이
사람들에게 말하는
실행만 보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일어나서 말하는
집회를 본 적이 없다.
팝콘이 튀는 것처럼
사람들이
잇달아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전적으로 우리가 하기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우리 모두는
기능을 발휘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여러분이
사역 집회에서도
사람들이
‘팝콘처럼 튀어 일어날’ 수 있도록,
항상 삼십 분 정도를
남겨 두려고 한다.
그저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하지 말라.
우리는
벌떡 일어나서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곧 주님의 집안 식구들에게
제때에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다.
음식을 차리는 사람은
언제가 제때인지를 안다.
우리가 매일
음식을 차린다면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아침 시간에
제때에 아침 식사를 한다.
또한 좋은 아내는
남편이
제때에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훌륭한 도시락을 준비하고,
온 가족을 위해
풍성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데
익숙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함께 모이는 시간이
주님의 식구들에게
합당한 음식을 공급해야 하는
제때, 곧 정해진 때이다.
그러나 내가 게을러서
성경을 읽지 않았다고 해 보자.
내가 말씀에 합당하게
수고하지 않은 채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면,
단지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만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양분이 풍부하고
맛있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신실함은
부지런함과 동일하고,
불성실함은
게으름과 동일하다.
우리가
집회에 올 때
훌륭한 음식을 제공할 수 있도록
반드시 부지런히
말씀을 추구해야 한다.
식사 시간이 제때이고,
집회 시간이 제때이다.
주일 아침과 저녁,
화요일 저녁과 금요일 저녁마다
우리에게 제때가 온다.
집회 시간이 바로
제때이다.
그 시간에 우리 모두는
식구들과 동료 믿는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생명을
공급해야 한다.
우리가
죄인들에게 공급해야 할
합당한 음식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병원에 있는 간호사들은
환자에 따라
다른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각 환자에게
그의 특별한 필요에 맞는
특별한 음식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온 땅은
온갖 질병과 온갖 환자로 가득한
병원과 같다.
좋은 의미에서
교회 또한
아픈 사람들로 가득한 병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때에
다양한 말씀을
그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믿는 이들,
교회들,
그리고 수많은 죄인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
우리의 의무와 책임은
그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다.
그들이 죄인들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필요한 음식인
은혜의 복음을 공급해야 한다.
그들이
어떤 병을 앓고 있는
믿는 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상황에 맞는
성경 말씀을 공급하여
그들을
양육하고 치료하고 강화하며
심지어 깨어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신실하고 현명한 노예로서
주님의 소유인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제때에
합당한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다.
사무실에 들어갈 때,
우리는
지금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이라는 합당한 음식을 공급할
제때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학교에
가르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들으러 갈지라도,
우리 주위의 모든 급우가
우리에게 맡겨진
주님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공급할 기회,
곧 제때를
붙잡아야 한다.
매일이
우리가
누구에게든
합당한 음식을 공급해야 하는
제때이다.
우리 모두는
분발되고 깨어나서
어리석지 않고 부지런하며
신실하고 현명한 이들이 되어,
음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때에
합당한 음식을
공급해야 한다.
빌립보서 1장 24절에서
사도가 고려한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주님과 교회로
철저하게 점유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바울은
교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
더욱 필요함을
깨달았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할 때
그리스도를 말했다.
그가
살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
그가
일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일했으며
교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했다.
교회를 위해서
바울은 기꺼이
육체에 남아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기
원했다.
빌립보서 1장 25절에 언급된
‘믿음’은
성도들이 믿는 내용을
가리키고,
‘진보’는
생명의 성장을,
‘기쁨’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감옥 안에 있든
감옥 밖에 있든
바울은
성도들의 진보와 기쁨의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
바울 때문에
교회들은
생명이 성장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 몸 생활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공급의 통로로서
기능을 발휘해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바울과 같은 지체들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지체들이 죽는다면,
매우 실지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주입되시는 것이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한,
그리스도가 주입되시는 것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자랑할 수 있다.
각지 교회에서
인도하는 이들은 모두
공급의
그러한 통로,
곧 그러한 수단이어야만 한다.
우리의 생활은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공급하며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주입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인도하는 이들의 경우
그리스도를
교회에 공급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살아 있든 죽든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있는 것과
죽어서 우리와 헤어지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우리에게
너무도 사랑스러웠던 한 형제를
한 예로 생각해 보고 싶다.
그는 확실히
몸에게
공급의 수단이었다.
그 형제가 살아 있다가
주님 품에 간 것은
우리에게
차이를 가져왔다.
우리 모두도
이와 동일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지 죽는지가
교회에게
중요한 문제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며
그리스도를 공급하고
그리스도를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부터
성도들 안에 주입하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린다면,
우리가
살아 있는지
주님 품에 가는지가
교회에게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신실하고 현명한
노예가 되어,
주인이 맡긴
집안 식구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나눠 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인이
와서
노예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 노예는
복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인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길 것입니다.”
― 마 24:45-47.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은
그분의
‘가정’ 경영,
즉 그분의 가정 행정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그분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셔서
자신을 표현하는
집을 얻으시는 것인데,
이 집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신실하고 현명한
노예는
하나님의 집의
청지기이자
가정 관리인으로서,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음식’으로 분배한다.
신실함은
주님께 보이는 것이지만,
현명함은
믿는 이들에게 행하는 것이다.
주님은
천국의 출현 안에서
신실한 노예에게
그분의 모든 소유를
맡기실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노예에게 주시는
보상일 것이다.
‘양식을 나눠 줄’은
교회 안의 믿는 이들에게
생명 공급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생명 주시는 그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음식이시며,
생명의 말씀 안에
체현되시고
실재화되신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영적 음식으로 누려
이 주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먹일 수 있기 위해서는
온갖 기도를 통해,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읊조림으로
즉 깊이 숙고하며
크게 말함으로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의 사역을
꾸준히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신언해야 한다.
즉 이 생명의
살아 있는 말씀과
우리가 본 것을
성령의
즉각적이고도 신선한
감동과 기름바름과 빛 비춤 아래서,
우리의 영을 사용해
말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돌봄 아래 있는 이들을
먹이려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기도를 함으로
생명 주시는 영을
우리의 공급
곧 영적인 음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생명을 주는
‘구하는 사람’,
곧 생명 주시는 영의
통로로서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이가
되어야 한다.
스가랴서 4장 3절에서
이 두 올리브나무는
그 당시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와
총독인 스룹바벨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위해
여호와의 영으로 채워진
기름의 두 아들이었다.
기름의 두 아들은 또한
현시대의 마지막 삼 년 반 동안 활동할
두 증인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을
강하게 하기 위해
대환난 때에
하나님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이 두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는
대환난 동안 박해받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믿는 이들을
지지하고 공급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증거를 상징하는
등잔대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빛나야 한다.
이렇게 빛나려면
불타야 하고,
불타려면
올리브기름이 공급되어야 한다.
올리브기름을 얻기 위해서는
몇 그루의 올리브나무가 있어야 한다.
등잔대 양편에 있는
올리브나무는
기름의 두 아들,
곧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다.
스가랴서 4장 11절에는
두 나무가 있고,
12절에는
두 가지가 있다.
두 가지는
두 나무에 속한 부분이다.
등잔대의 대접에
기름이 없을 때,
두 나무가
가지들을 통하여
두 대롱 속으로
기름을 흘려 보냄으로써
기름을 공급한다.
그러면 기름은
대롱에서 대접으로 흐르고
또한 대접에서 등잔대로 흐를 것이다.
스가랴서 4장 12절에서
금을 흘려 보내는 것은
대롱들이 아닌
가지들이다.
이 가지들은
‘금을 흘려 보낸다’.
금을 흘려 보내는 것은
금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 절에서 ‘금’이란 단어는
기름을 가리킨다.
기름과 금이
하나이다.
기름은
그 영을 가리키고,
그 영은
하나님이시다.
더욱이 성경의 예표에서
금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대접을 채우는 금은
그 영이고,
그 영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금으로 예표되신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체험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그 영께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금이신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 주어
그들에게
기름을 공급해 줄 때,
우리는 사실상
그들에게
하나님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흘러나오셔서
그들 안으로
들어가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서
다른 이들 안으로
하나님을 흘려 보내는
올리브나무들이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흘러나오는
올리브나무인 사람들에게서
빈곤한 이들에게로
기름이 공급될 것이다.
더 나아가 왜 두 나무가
두 가지로 불리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스가랴서 3장과 4장에서
스룹바벨이라는 동일한 인물이
순, 나무, 가지로
상징된다.
이것은
스룹바벨 자신이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만일 그 자신이
하나의 완전한 나무라면,
그가 근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무이지만
이 나무는 사실상
다른 나무의 한 가지이며,
그 다른 나무가 근원이다.
더욱이 스룹바벨은
그 다른 나무에서 나온
한 순이기도 한데,
그 다른 나무는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올리브나무이시고,
스룹바벨과 우리 자신은 모두
그리스도의 가지들, 순들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올리브나무이시지만,
그분에게서
많은 순이 돋아났다.
이러한 순들의 돋아남은 곧
그리스도께서
가지들을 뻗어 내시는 것이다.
이 가지들 또는 순들은 이제
오늘날 이 땅에 있는
많은 올리브나무들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올리브나무가 아닌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올리브나무들이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올리브나무인 것은
개별적인 나무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유일한 올리브나무이신
그리스도의 가지들이라는 의미이다.
가지들인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기름 곧 그 영을 공급함으로써
그들을 소생시켜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을
다른 이들에게 공급하는
올리브나무들인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자!
우리는
‘신선한 기름의 아들들’,
곧 즐거움의 기름이신
신선하시고 현존하시며 완결되신 영으로
계속 충만하게 되어,
등잔대의 빛나는 증거
곧 예수님의 증거를 위해
등잔대 안으로
그 영을 흘려 보내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대가를 지불하여
신성한 본성을 지닌
금기름이신 하나님을
더 많이 얻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금으로 된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기 위해
순수한 금등잔대가
될 수 있다.
마태복음 24장 48절의
그 악한 노예는
믿는 이인데,
왜냐하면 그가
주님께 임명되고,
주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며,
주님께서 오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49절은
그 악한 노예가
자기 동료 노예들을 때리고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고 말한다.
우리의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것은
동료 믿는 이들을 학대하는 것이고,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은
세상적인 것들로 취해 있는
세상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다.
그 악한 노예의 문제는,
그가
주님께서 오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 있지 않고
주님을
기다리지 않는 데 있다.
그 노예는
주님의 오심을 위해
준비된 삶을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그분은
그 악한 노예를
엄하게 처벌하시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리실 것이다.
‘그를 엄하게 처벌하고’는
(‘그를 잘라 내 떨어뜨리고’는)
그를 끊어 버린다는 뜻이다
(그를 잘라 내 버린다는 뜻이다).
이것은
장차 영광 안에서 오실
주님에게서 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의 결말에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과
일치한다.
주님 자신은
영광 안에 계실 것이며,
주님은
그 악한 노예를
이 영광에서 끊어지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과 같다.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는 사람마다
주님과
그분의 임재와
그분과의 교통과
주님께서 계실
영광스러운 영역으로부터
끊어질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징벌을 받는 것이다.
주님은
거짓 믿는 이에게는
임무를 맡기지 않으실 것이다.
분명 그 악한 노예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왕국의 책인
마태복음에서의 쟁점은
구원이 아니라
왕국에 있다.
즉, 우리가
보상을 받아
왕국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보상을 잃고
왕국의 누림을 놓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곳에서
처벌과 징계를
받을 것인지에 있다.
우리 모두는
제때에
주님의 백성에게
양식을 주고,
주님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최대한으로 사용해야 한다.
부정적인 면에서
우리는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이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봉사와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형제들을 비난하거나
종종 형제들을 심하게 반대하기까지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일은 하지 않으면서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것이다.
각지에 있는 교회들의
많은 장로들은
조금이라도 잘못된 일을 하기를
두려워한다.
일단 그들이
잘못된 일을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전화로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모든 전화가
때리는 것이다.
많은 성도가
장로들을 때리고 있다.
한 성도에게
부정적인 일이 일어날 때,
어떤 이들은 결코
그것을
마음에만 간직하지 못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소식을 전하는 것이
일종의 때리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기도 집회에서
부정적인 상황에 처한
어떤 성도에 대해
미묘한 방식으로
기도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때에는
그를 폭로하지 않지만
우리의 기도를 통해
그를 폭로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신다.
우리의 마음과 기도 속의 의도는
그리 순수하지 않다.
우리가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매우 영적인 체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의 기도의 십분의 일은
일종의 판단이다.
이것이 바로
때리는 것이다.
어떤 지방에 있는 장로들은
다른 지방에 있는 장로들을
비판할지도 모른다.
이것도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것이다.
여러분은
봉사하는 시간을
때리는 데 허비하고 있다.
여러분은
봉사하는 대신,
형제들인 동료 노예들을
때리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일종의 때리는 것인
비난과 판단과
반대와 불평을
멈추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권익을 위해
긍정적인 봉사를 하는 데
우리의 시간과 힘과 모든 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 악한 노예가
마음속으로
‘나의 주인이
더디 오실 것이다.’라고 하며,
동료 노예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면,
예기치 않은 날,
알아채지 못하는 시각에
그 노예의 주인이 와서,
그를 엄하게 처벌하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 마 24:48-51.
마음속으로
우리의 주인께서
더디 오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악한 현시대를 사랑하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지 않는 것이다.
‘오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임재’를 의미하는
‘파루시아’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즉 주님께서 오시기를 사모한다면,
오늘 우리는
그분의 나타나심,
그분의 임재를
사모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오늘이 있는 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면서,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그분의 오심을
경고와 격려와 동기 부여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오심에 대해
깨어 있고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탐심을 주의해야 하며,
우리 자신을 위해
보물을 쌓아 두지 말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해야 한다.
우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철저히 멸하실
악한 세상을
사랑하거나
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이
덫과 같이
갑자기 우리에게 닥치지 않도록
깨어서 간구해야 한다.
“주 예수님,
오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염원과 부르짖음과 지속적인 기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것은
동료 믿는 이들을
학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 믿는 이들을
판단하거나 유죄판결 해서는 안 되며,
친절하게 대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욕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보다
그들을
더 낫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 믿는 이들 위에
(그들을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 것과 같이)
군림해서는 안 되며,
노예로서
그들을 섬김으로
생명 주시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먹여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이 보배롭다는 것을
안다면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해야 한다.
성경의 마지막은
“주 예수님,
오십시오!”
(계 22:20)라는
기도로 끝맺는다.
사도들은
마음속으로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돌아오시기를
준비하는 생활을 하였다.
자신이
주님의 오심에 대한
징조를 알기 때문에
느슨해도 되고,
먼저 세상을 사랑했다가
마지막 이레가 되면
주님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은
어떤 부자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 부자는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아 두고
자기의 혼을
즐겁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너에게서
너의 혼을
도로 찾아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16-20절).
우리에게
날마다 ‘오늘’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주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늘이 있고
아직 호흡이 있는 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면서,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그분의 오심을 항상
격려로 삼아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
디모데에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또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분께서 나타나시는 것과
그분의 왕국을 두고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에 한
권유이다.
그는
자신이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
심판대에서
의의 면류관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이며,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이 면류관이
보상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디모데와 우리에게,
주님의 심판과 왕국을 두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이것은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약해지지 않고
끝까지 신실한 상태로
남아 있게 할 것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
그분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둑같이 은밀하게 오셔서
그분의 보물인 그들을
훔쳐 가실 것이고
하늘들에 있는 그분의 임재 안으로
그들을 이끄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고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휴거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늘에 속한 숨으로
가득 채워지고
우리의 그릇에
기름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날마다
이 세상의 염려와
땅에 속한 즐거움으로
점유된다면
휴거될 길이 없다.
우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해야 한다.
그녀는
소금 기둥이 되어
수치스러운 장소에 버려졌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 남겨 두셔서
우리가 대환난을 통과하게 하심으로,
성숙되고 휴거될 때까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실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조심할 것을
상기시켜 주셨다.
또한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우리의 마음이 억눌려
대환난의 날이
덫과 같이 닥치지 않도록
늘 간구하며
항상 깨어 있을 것을
상기시켜 주셨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할 수 있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모든 여지를
주님께 드려야 한다.
성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성숙되어
휴거되고 보상을 얻도록,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 안에서 자라야 한다.
우리는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셔서는’(마 24:49) 안 된다.
이것은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것보다
훨씬 더 떠내려가고
타락한 것이다.
이것은
세상으로 떠내려가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것들에 취해 있고
심지어 마취되어 있다.
그들은
현시대에 의해
무감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은
그들이 즐기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여러분이
성도들을 때리고 있다면
아직 교회생활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교회생활에 관심이 없다면
결코 장로들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교회에 대한 부담이
너무 무겁고’
교회생활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을 비난한다.
일단 여러분이
교회에 대해
잊어버리기로 결심하고
교회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즉시 세상을 사랑하는 데
빠질 것이고
이 시대에 의해
늘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세상 사람들과 사귈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는
장로들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마음이 없다.
그는
한때 동료 노예들을
때렸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세상적인 누림이
완전히 그를 점유하고 있다.
이제 그는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
그는
무감각하게 만드는
세상적인 것들을
즐기고 있기 때문에,
거의 매일이
행복한 날이고
거의 매 주말이
즐거운 주말이다.
주님의 위임에
그다지 신실하지 않은
게으른 노예들은
주님께서
즉시 오시지 않고
더디 오시리라는
핑계를 댄다.
그 결과 그들은
동료 노예들을 학대하고
세상적인 것들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들은
주님께서 지금 당장 돌아오신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그들은 더 이상
세상을 누릴 시간이 없게 될 것이라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의
주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이러한 변명을
수긍하지 않으실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분은
다시 오실 때
그분의 신실하지 않은 노예들을
끊어 버리시거나
또는 엄하게 처벌하실 것이다.
엄하게 처벌한다는 것,
또는 둘로 쪼갠다는 것은
산산조각 낸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을 때,
기름부음 받은 분이신
그리스도께 붙여졌다.
우리가
뒤로 물러난 상태에 있다 해도
주님은
우리를 끊어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신실하지 않고
게으른 상태에 있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렇게 붙여진 데서
우리를 끊어 버리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그분 사이를
둘로 쪼개실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임재에서 끊어져
위선자들이 받을 몫인
어떤 장소로 내던져질 것이다.
믿지 않는 이들이 받을 몫은
영원한 멸망이지만,
게으른 노예들이 받을 몫은
일시적이고 시대적인 형벌이다.
신실하게 되는 길은
모든 배고픈 사람의 음식인
주님의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주님의 집안 식구들은
믿는 이들뿐 아니라
죄인들로도 구성된다.
누가
배고픈 죄인들을 먹이러
그들에게 갈 것인가?
우리는 모두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가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확산시킬 수 있도록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또한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우리는
동료 노예들인
동료 믿는 이들을 때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들을 비난하거나
그들에 대해 불평하지 말라.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것을
조금도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는
그러한 말을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입은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말해 내기 위해서
지어졌다.
형제들을 비난하는 것이
동료 노예들을 때리는 것이다.
동료 노예들을 때린다면
우리는
벌을 받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무감각하고 술 취한
세상적인 사람들과 어울려 즐기려고
세상으로 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깨어 있는 이들이어야 한다.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은
세상적인 것들로
취해 있는
세상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다.
믿는 이들은
신성한 본성과
거룩한 위치가 있으므로,
믿지 않는 이들과
멍에를 함께 메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결혼이나 사업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 사이의
모든 친밀한 관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이들과 함께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한다.
신실하고 현명한 노예는
왕국이 출현할 때
다스리는 권위를
보상으로 받을 것이지만,
악한 노예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의 영광과
왕국 안에 있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임재에서
끊어질 것이다.
왕국의 출현에서 끊어지는 것은
바깥 어둠 속에 던져져,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이다.
바깥 어둠은
왕국의 출현 안에 있는
밝은 영광 바깥에 있는 어둠이다.
슬피 우는 것은
후회하는 것을 가리키고,
이를 가는 것은
자책하는 것을 가리킨다.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민족들을 다스리는 것은
그분의
신실하고 현명한 노예들에게 주어지는
상일 것이다.
1일
마태복음 24장 45절부터 51절까지는 신실함과 현명함에 관한 말씀이다. 신실함은 주님을 향한 것이고, 현명함은 믿는 이들을 향한 것이다. 주님의 임재 안으로 휴거되려면 깨어 있어야 하고, 왕국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려면 신실해야 한다(마 24:47). 45절에 언급된 ‘집안 식구들’은 교회인(딤전 3:15) 믿는 이들을 가리킨다(엡 2:19). 양식을 나눠 주는 것은 교회 안의 믿는 이들에게 생명 공급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집안 식구들에게 제때에 어떻게 생명을 공급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마태복음 24장 46절의 ‘복이 있습니다’는 천국이 출현할 때 다스리는 권위로 보상받는다는 것이다. 주님의 신실한 노예는 천국이 출현할 때 보상으로 주님의 모든 소유를 맡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생명 공급이 되는 양식을 제때에 주님의 백성에게 공급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가르치는 은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영적인 음식을 공급하지만, 자신은 그러한 은사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여기에는 그러한 사상이 없다. 주님의 모든 노예는 각자 맡은 위임을 수행하도록 은사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전체에서 훌륭한 설교자들이 사람들에게 말하는 실행만 보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일어나서 말하는 집회를 본 적이 없다. 팝콘이 튀는 것처럼 사람들이 잇달아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전적으로 우리가 하기 원했던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우리 모두는 기능을 발휘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여러분이 사역 집회에서도 사람들이 ‘팝콘처럼 튀어 일어날’ 수 있도록, 항상 삼십 분 정도를 남겨 두려고 한다. 그저 의자에 앉아 있기만 하지 말라. 우리는 벌떡 일어나서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곧 주님의 집안 식구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다.
음식을 차리는 사람은 언제가 제때인지를 안다. 우리가 매일 음식을 차린다면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아침 시간에 제때에 아침 식사를 한다. 또한 좋은 아내는 남편이 제때에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훌륭한 도시락을 준비하고, 온 가족을 위해 풍성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데 익숙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함께 모이는 시간이 주님의 식구들에게 합당한 음식을 공급해야 하는 제때, 곧 정해진 때이다. 그러나 내가 게을러서 성경을 읽지 않았다고 해 보자. 내가 말씀에 합당하게 수고하지 않은 채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면, 단지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만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양분이 풍부하고 맛있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신실함은 부지런함과 동일하고, 불성실함은 게으름과 동일하다. 우리는 집회에 올 때 훌륭한 양식을 제공할 수 있도록 반드시 부지런히 말씀을 추구해야 한다. 식사 시간이 제때이고, 집회 시간이 제때이다. 주일 아침과 저녁, 화요일 저녁과 금요일 저녁마다 우리에게 제때가 온다. 집회 시간이 바로 제때이다. 그 시간에 우리 모두는 식구들과 동료 믿는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생명을 공급해야 한다.
우리가 죄인들에게 공급해야 할 합당한 양식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병원에 있는 간호사들은 환자에 따라 다른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각 환자에게 그의 특별한 필요에 맞는 특별한 음식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온 땅은 온갖 질병과 온갖 환자로 가득한 병원과 같다. 좋은 의미에서 교회 또한 아픈 사람들로 가득한 병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때에 다양한 말씀을 그들에게 공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