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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신성한 흐름이라는 유일한 흐름 안에서 사도행전을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한 하늘에 속한 이상에 따른 신성한 위임

The Divine Commission
according to the Heavenly Vision
for the Continuation
of the Book of Acts
in the Unique Flow
of the Divine Stream
그 신성한 흐름인(흐름의)
그 유일한 흐름 안에 있는(안에서의)
사도행전의
계속을 위한
하늘에 속한
그 이상에 따르는(따라 있는)
그 신성한 위임(위탁, 임무, 의뢰, 권한)

성경에서
신성한 흐름,
곧 유일한 흐름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 창 2:10-14, 시 46:4상,
요 7:37-39, 계 22:1.

성경은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
곧 생명의 원천이신
아버지와
생명의 샘이신
아들과
생명의 강이신
그 영을
계시해 준다
— 렘 2:13, 시 36:9상,
요 4:14, 7:37-39.

흐름의 근원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이다
— 계 22:1.

성경에는 오직
한 흐름, 한 신성한 흐름만 있다
(창 2:10-14, 계 22:1).
오직 한 신성한 흐름만 있으며,
이 흐름은
유일하게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한 흐름 안에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신성한 흐름,
곧 유일한 흐름은
주님의 일의 흐름이다
— 고전 16:10.

우리가
일의 흐름,
곧 조류라고
부를 수 있는
한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이
흐르는 곳에는
하나님의 일이 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움직임 안에
오직 한 흐름이 있으며,
우리가
이 한 흐름 안에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계시해 준다
— 비교 행 15:35-41.

오순절날에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역대로 흘러온
신성한 생명의 흐름은
단 하나의 흐름이다.

교회 역사는
역대로
그 영의 한 흐름만이
항상 흘러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하여
일해 왔지만,
모두가
이 한 흐름 안에
있지는 않았다.

주님은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주님의 일의
흐름 안으로
인도하셨으며,
그가
주님을 본 일들과
장차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실 일들
모두에 대해
그를
사역자와 증인이
되게 하셨다
— 행 26:16, 1:8,
23:11, 20:20, 31.

바울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을
담고
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그릇인 사람,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에 대한
하늘에 속한 그 이상을
거스르지 않았다
— 행 26:19, 9:4-5, 15,
롬 9:21, 23, 고후 4:6-7,
골 2:2, 엡 3:4, 5:32.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이상을 보고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 자신께로
전환했다면,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는
무언가가
우리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우리가
사도행전의 계속 안에서
살고 수고하는 동안에
우리의 부담이
될 것이다
— 갈 1:15-16, 롬 15:16, 고전 15:10.

사도행전 26장 18절은
오늘날
우리가
사도행전의 계속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증가와 건축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계시한다.
이 절은
우리가 받은
신성한 위임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한
내용을 밝혀 준다.

그것은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라
누가복음 4장
18절부터 21절까지에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희년,
즉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해를
성취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26장 18절에 나오는
우리가 받은
신성한 위임에 관한
내용들에 대해
기도하면서,
주님께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체험과 실재가
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을
이러한 체험과 실재 안으로
이끌 수 있다
— 엡 3:8.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몸,
신성한 경륜을 위한
신성한 분배에 대하여
더욱더 이해하고
볼 수 있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을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한다
— 엡 1:17, 3:5,
계 4:6, 3:17, 마 6:6.

우리는
주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이상이 없이는
전진할 수 없다
— 행 26:16, 빌 3:8하,
10상, 13, 신 4:25.

사역자와 증인이
되는 것은
가르침과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나타남과 이상의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본 일들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실 일들을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 행 22:14-15.

우리의 위임은
‘비밀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모든 사람에게
밝히는 것’이다
— 엡 3:9.

“어둠에서 빛으로
… 돌아가게 하고”.

빛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 사 2:5, 요일 1:5.

우리는
빛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 눅 11:34-36.

우리는
‘빛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몫이신
그리스도를
누린다
— 골 1:12, 요 8:12, 1:4,
시 119:105, 130, 마 5:14, 계 1:20.

우리는
세상에서
발광체들이 되어
생명의 말씀을
밝혀야 한다
— 빌 2:14-16.

우리는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시어
자신의 기묘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미덕들을
널리 알려야 한다
— 벧전 2:9.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의
영적 체험의
최고점은
맑은 하늘과 함께
그 위에 있는
보좌를 가지는 것이다
— 겔 1:22, 26.

맑은 하늘 위의
보좌를 가지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존재 안에서
으뜸이 되시도록 하고
우리의 삶에서
가장 높고 가장 탁월한
위치를 가지시도록 하는 것이다
— 골 1:18, 비교 겔 14:3.

우리의 하늘이
맑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보좌, 곧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게 된다
— 행 24:16.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보좌를 가지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위치를 가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 롬 5:17.

우리가
위에 보좌가 있는
맑은 하늘 아래 있다면,
진정한 권위가
우리와 함께하여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권위 아래로
이끌 것이다
— 고후 10:4-5, 8, 13:3, 10.

주님에 대한
우리의
최고도의 사랑이
주님의 권위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
말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자격을 주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며
장비시킨다
— 요 21:15, 17.

“죄들이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들이
철저하게 용서받도록
주님께 가야 한다
— 요일 1:7, 9.

다윗은
하나님께
그의 죄과들을
지워 주시고,
그의 죄악을
철저히 씻으시며,
그의 죄를
깨끗이 제하시고,
그의 죄를
우슬초로
정결하게 해 주시기를
간청했다
— 시 51:1-2, 7, 9.

우슬초는
겸손하고 낮추어진
인간 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왕상 4:33상, 출 12:22상)를
예표하며,
우리의
중보자와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함축한다
(히 8:6, 9:15, 10:9).

다윗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면서
철저하고 진정한
회개와 자백을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용서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즐거움을 가질 것이고
자원하는 영으로
북돋아질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범죄자들에게
그분의 길을
가르칠 수 있고,
죄인들이
그분께로
돌아올 것이다
— 시 51:12-13.

“나를 믿음으로써
…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있는
유업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이 유업은
삼일 하나님 자신과
그분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과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것과
그분께서
구속받은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실 모든 것이다.

삼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 안에 체현되셨고,
이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유업으로
할당된 몫이시다
— 골 2:9, 1:12.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즉 교회생활 안에 있는
우리의 유업의
보증(엡 1:14)이신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를 누린다
— 딤후 2:22.

우리는
사람들을
교회생활 안에서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데로
이끌어야 한다.
그럴 때 그들도
우리처럼
그리스도를 누리고,
자신의 영을 훈련하여
기질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으로
거룩하게 될 수 있다
— 히 2:10-11, 고전 1:9, 고후 4:13.

우리가
사도행전의 계속 안에
있고자 한다면,
다락방의 헌신을 함으로써
신성한 역사 안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
— 행 1:13-14.

바닷가에서
베드로는
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의 직업을 버렸지만,
다락방에서
그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버렸다
— 마 4:18-20, 행 1:13-14.

그는
하늘에 속한
이상과 함께
서 있으면서
그의 조상들의 종교를
버렸다.

그는
그의 조국,
그의 이웃들과 친구들과의 관계,
그의 친척들을 버렸으며,
기꺼이 그의 목숨을
희생하고자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헌신은
다락방의 헌신이다.
이러한 헌신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전 존재가
하늘에 속한 이상과
‘결혼하도록’
대가를 지불한다
— 행 26:19, 1:8, 20:24.

우리가
하늘에 속한 이상을 위해
대가를 지불한다면,
‘우리 뒤에 있는
다리들을 불태울’ 것이고
되돌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이상을 보았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안약이신
기름 바르시는 영을
사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 계 3:18.

주님의 회복의 길을
취하는 것은
값싼 일이 아니다.
이 길은
값비싸며,
큰 희생이 따르는
헌신을 요구한다.

우리는
여기에
어떤 운동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회복을 위해
있다.
회복은
다락방에서의
분명하고도 비범한
헌신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다락방에 있던
백이십 명 모두는
하나의 번제물이 되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영 안에서 불타고 있었으며,
신성한 생명의
신성한 불로
다른 사람들을
불태웠다
— 눅 12:49-50,
행 2:3-4, 롬 12:11.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큰 무리가
그분을 따랐지만,
그들은
주님의 움직임을 위해
주님께
어떤 것도
드리지 않았다.
주님의 움직임은
다락방에 있었던 사람들,
곧 눈이 열리고
마음이 감동받은
사람들과 함께하였다
— 행 17:6하.

세상을 바꾸고
시대를 전환할
사람들은
소수일 것이다.
우리가
다락방에 있고자 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명확하게 기도하며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저는
당신의 증거의
회복을 위해
기꺼이 다락방에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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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신성한 흐름이라는 유일한 흐름 안에서 사도행전을 계속 이어 나가기 위한 하늘에 속한 이상에 따른 신성한 위임”

6일

행 1:13-14
그들은
성안에 들어가서
자기들이 묵고 있던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 그들은
여인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를 꾸준히 계속하였다.

사도행전 1장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대해
말한다.
이 다락방에서
백이십 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열흘간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했다.
그들은
기도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헌신했다.
즉 자신을
주님께
매우 참되고 실지적인 방식으로
드렸다.

삼 년 반 전에
주 예수님은
바닷가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거기서 베드로는
그분께
자신을 드렸다.
베드로는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마 4:18-20).
우리는
베드로가
자신을
주님께 헌신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락방에서의
베드로의 체험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여기서 베드로는
새로운 종류의 헌신,
곧 평범한 헌신이 아닌
구체적인 헌신을 했다.
그물을 던져 버린 것이
말해 주듯이
베드로는
바닷가에서
자신의 직업을 버렸다.
그러나 다락방에서
그는
훨씬 더 많은 것을
버렸다.
… 베드로와 여러 사람들은
다락방에 있기 위해
유대교와
자신들의 고향과
이웃과
친구와
친척들을 버렸고
심지어 그들의 목숨까지
기꺼이 희생하고자 했다.

주님의 회복의 길을
취하는 것은
값싼 일이 아니다.
이 길은
값비싸며,
큰 희생이 따르는
헌신을 요구한다.
… 우리는
여기에
어떤 운동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회복을 위해
있다.
회복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회복은
다락방에서의 헌신을
체험함으로써
실현되고 수행될 수 있다.
이것은
평범한 헌신이 아니라
특별하고도
구체적이며
탁월한
헌신이다.
이 헌신이
전환점이다.

사도행전 1장의
다락방에 있었던
백이십 명의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그들은 모두
번제물이 되었다.
… 우리도
불태워져야 하며,
그런 다음
다른 사람들을
불태울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부흥인가
아니면 운동인가?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 활동인가?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다른 곳에서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기 위해서
모였는가?
이것 때문에
여기에 왔을지 모르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다락방에서의 헌신의 결과인
주님의 회복을 위해
여기에 있어야 한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큰 무리가
그분을 따랐다.
무리들이
구원과 치료함을 얻고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백이십 명가량만이
다락방에 있었다.
군중 곧 무리는
주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움직임을 위해서
아무것도 드리지 않았다.
주님의 움직임은
다락방에 있는 이들,
곧 눈이 열리고
마음이 감동받은
이들에게 있었다.
이 작은 숫자가
다락방 안에 들어와
불태워지고
온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오늘날도
원칙은 똑같다.
그 세상을 뒤집어엎고
(will turn the world upside down)
또 그 시대를 바꿀
(and change the age; … 변화시킬)
사람들은
소수이다.

여러분은
군중 속에 있겠는가
아니면 다락방에 있겠는가?
여러분은
군중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긍휼로
다락방 안으로
들어올 것인가?
나는
여러분에 대해 모른다.
오직 주님만이
누가 다락방에 있을 것인지를
아신다.

나는
여러분이
주님의 긍휼을 받아
다락방에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기를
권한다.
기꺼이 여기에 오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 장들에서 읽은 것은
여러분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군중 속에 있는 사람들,
주님께서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들과
같을 것이다.
우리가
다락방에 있고자 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명확하게 기도하며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저는
당신의 증거의
회복을 위해
기꺼이 다락방에 있겠습니다.”
(위트니스 리 전집,
1965년, 3권,
하늘에 속한 이상, 317-318쪽)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이 흐름과 함께
가는 것이고,
성령의 일의 흐름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내게는
개인적인 자유가 없다.
이것은
나의 생각들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분의 흐르심에 따른 것이다
(찬송가 650장).

 

5일

행 26:18
… (그들이)
나를 믿음으로써
죄들이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있는
유업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시 51:1-2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과를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우리는 또한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님,
저의 모든 죄들을
완전하고 철저히
용서해 주소서.
… 저는
어떤 것도
처리되지 않은 채로
두지 않겠습니다.
주님,
저는 또한
완전히 거룩해지기를
원합니다.
저는 단지
용서만 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고
거룩하게 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럴 때 저는
제 몫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몫으로
누린다.
개인적인 방식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가운데서
… 곧 교회 안에서
거룩하게 된 이들 가운데서
그분을 누린다.

다윗은
하나님께
그의 죄과들을
지워 주시고,
그의 죄악을
철저히 씻으시며,
그의 죄를
깨끗이 제하시고,
그의 죄를
우슬초로
정결하게 해 주시기를
간청했다
(시 51:1-2, 7,9).
다윗이 사용한
‘지우다’,
‘씻다’,
‘깨끗이 제하다’,
‘정결하게 하다’와 같은
동사들은
그의 회개와 자백이
철저했고,
용서함을 구하는
그의 간구가
진실했음을
나타낸다.

다윗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면서,
우리가
죄 중에 출생하였음을
시인하고,
우리를
씻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시기를,
곧 우리의 죄과를
지워 주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자신이
죄악되고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오직 그분만을
신뢰한다.
또한 우리에게는
우리의
중보자와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시편 51편 7절 상반절에서
다윗은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라고 기도했다.
우슬초는
겸손하고 낮추어진
인간 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왕상 4:33, 출 12:22).
시편 51편 7절에서
우슬초는
중보자와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함축한다.

10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다.
여기서 사용된
‘정한’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순수한’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해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낡아지지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후에는
새롭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누린 후에
하나님께
새롭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11절에서
다윗은
계속하여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거룩하신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마음과
정직한 영이
필요하며
또한 하나님의 임재도
필요하다.
… 하나님의 임재는
사실상 그 영이다.
그 영이
떠나가실 때
하나님의 임재도
사라진다.

8절에서
다윗은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주시사”
라고 기도했으며,
12절에서는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영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라고 간구했다.
여기서 우리는
즐거움과
자원하는 영이
연결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기쁠 때
자원하는 영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기는 생활이다.
반면에
패배한 사람은
기쁘지 않으며
자원하는 영도
없다.
만일 그러한 패배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즐거움을 가지게 될 것이며,
자원하는 영도
가지게 될 것이다.
자원하는 영을
우리 안에
유지해 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즐거움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시 51:18-19).
이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의 집인
각 지방에 있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성인
우주적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누리는 것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회개하고
죄들을 자백하며
하나님의 정결하게 하심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집인
각 지방에 있는
교회 안에서와
하나님의 성인
우주적인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누리게 될 것이다.

 

4일

행 24:16
이 때문에
나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하여 항상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겔 1:22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
보기에 두려운데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에 대하여
맑은 하늘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그분과
투명한 교통을
가져야 함을
뜻한다.
우리와 주님 사이에는
막힘이 없어야 한다.
막힘이 없다면
우리의 하늘은
수정같이 맑을 것이고,
우리의 양심은
순수하며
거리낌이 전혀 없을 것이다
(행 24:16).

종종 사소한 일로 인해,
예를 들면
우리의 배우자에게
좋지 않은 태도를
보인 것 때문에
우리의 하늘이
흐려질 수 있다.
상대편이
그릇될 수 있지만,
우리의 태도 역시
그릇되다.
우리는
기쁨과 평강을
잃고 만다.
또한 우리는
한동안
기름 바름이 없어서
기도할 수도 없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유죄 판결하고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맑은 창공을
상실한 것이다.
즉 맑은 하늘을
잃어버린 것이다.
…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자백하고
사과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자마자
‘날씨’가 바뀐다.
구름은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돌아온다.

주님의 임재는 항상
보좌와 함께한다.
주님께서 계신 곳에
그분의 보좌가 있다.
그분의 임재와 그분의 보좌는
결코 떼어 놓을 수 없다.
주님의 보좌는
셋째 하늘에 있지만
우리의 영 안에도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보좌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
우리는
보좌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를 통제하는
경찰이나 법정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과
교회생활에서
하늘이 맑다면,
거기에 보좌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의
최고점은
맑은 하늘과 함께
그 위에 있는
보좌를 가지는 것이다.
보좌를 가지는 것
또는 보좌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가장 높고 가장 탁월한
위치를 가지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보좌를 가지신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지위를 가지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체험에서
보좌에 도달하는 것은
모든 일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와 행정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하늘이
맑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보좌 아래
있게 된다.
주님과의 교통이
맑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분의 권위 아래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에
보좌가 있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맑은 하늘 위에
보좌가 있다면
우리는
크게 축복을 받은 것이고,
이 축복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우리가
위에 보좌가 있는
맑은 하늘 아래 있다면,
진정한 권위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하늘과 보좌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어떤 반대나 박해도
우리를
패배시키거나 흔들 수 없다.
우리 위에 있는
하늘이 맑고
우리에게
보좌가 있다면,
우리는
권위와 장중함을
가질 것이다.

중국에 온
여선교사가
배를 타고
여행하는 중에
그 배가
해적들에게 붙잡혀
여러 날 동안
억류되었다.
… 그녀는
해적 두목에게
날이 너무 덥기 때문에
승객들을
방에 가두어 둘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또 그녀는
그가
배를 청소할
책임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해적 두목은
그녀에게 순종하여
부하들을 시켜
배를 청소하게 했다.
흉악한 해적 두목이
이 선교사의
권위 아래 있게 된 것은
그녀 자신이
보좌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탄이
그분의 보좌에 대항해
반역했기 때문에
(사 14장)
우리를
보좌로 이끌기를
갈망하신다.
… 하나님께서
우주 안에서
직면하신
가장 큰 어려움은
반역의 세력이
그분의 보좌를
거스르고 공격한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절대적이지만,
그분의 피조물 중 하나가
반역하여
자기의 보좌를 높여
하나님의 보좌에
비기려고 했다
(12-14절).
… 사탄의 반역 때부터
지금까지
이 우주에는
권위와 관련된
싸움이 있어 왔다.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일들은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에
저항하는 것의
표출이다.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이 땅에서 누가
실지로 다스리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사탄인가?

 

3일

행 26:18
이것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 돌아가게 하고, …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해 주시고,

엡 3:9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영원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모든 사람에게 밝히어,

사도행전 26장 18절 상반절에 있는
이 말씀은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라
누가복음 4장
18절부터 21절까지에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희년(禧年),
즉 주님께서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해를
성취하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신약 희년의
영적이고 신성한 축복들,
즉 하나님의 복음의 복들 가운데
첫 항목은
타락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가게 함으로
영적인 영역 안에 있는
신성한 것들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보려면,
영적인 시력과
신성한 빛이
필요하다
(행 26:18).

지혜는
우리 영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위한 것이다.
계시는
하나님의 영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휘장을 여시어
우리에게
이상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먼저 우리에게
깨닫는 능력인
지혜가 있을 때,
우리는
영적인 일들을
알 수 있다.
그다음에
하나님의 영께서
영적인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
우리가
깨닫게 된다
(엡 1:17).

하나님의 비밀은
감추어져 있던
그분의 목적인데,
그 목적은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분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
있는 것이다.
이 비밀은
하나님 속에
영원부터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신약의 믿는 이들은
빛 비춤을 받아
그것을
볼 수 있다
(엡 3:9).

골로새서 1장 12절에서
바울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빛 가운데에서
성도들에게 할당된
몫을 받을
자격이 있도록’ 하셨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절을 읽을 때
‘빛 가운데에서’라는 말을
주의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몫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빛 가운데에서
누려야 한다.

하나님 한 분만이
빛이시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참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분의 임재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묘한 빛 안으로
들어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벧전 2:9).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어둠 가운데 있었고,
우리와 관계된
모든 일과 상황은
어둠 안에 있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빛이
우리에게
함께 임했다.
이 빛이
우리를
하나님께 회개하게 했고,
우리가
회개했을 때 저절로
그분께
마음이 열렸다.
우리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을 때,
그 무언가가
우리 안에서
빛나고 있음을
체험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믿었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에 대해
감사드렸으며,
그분을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돌이켰을 때
빛이
우리 안에 들어왔고,
우리 안의 빛 비춤은
더 강해졌다.

빛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빛 가운데
거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깊은 속에서
주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그렇게 하면
주님의 임재가
비추는 빛이 된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는
실지적으로
성도들의 몫이 되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또한
빛이다.
믿는 이들에 대해
주 예수님은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
(마 5:14)
라고 말씀하셨다.
빌립보서 2장 15절에서
바울은
믿는 이들이
세상의 발광체들로
빛나야 한다고
말한다.
… 이 발광체는
자체적으로
빛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른 근원에서 오는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은
그러한 발광체들이다.
우리 자신 속에는
빛이 없다.
빛은
우리 안에서 타고 있는
기름, 즉 그 영으로부터
나온다.
우리의 빛의 근원은
우리 자신이 아닌
그 영이신 그리스도이다.

빛은
일종의 영역이며 범위이다.
빛의 영역은
생명의 영역이다.
… 생명과 빛의 영역은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이다.
빛은
비춤으로써 다스린다.
그러므로 생명의 빛이
비추고 다스릴 때
그것이 왕국이다.
우리가
빛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생명의 영역 안에,
곧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왕국은
사탄의 왕국인
어둠의 권세와
대조를 이룬다.
새 예루살렘은
생명의 영역의
궁극적인 완결일 것이다.
성(城) 전체가
빛이 충만한
생명의 영역이
될 것이다.
이 영역은
생명의 빛일 것이다.

 

2일

행 26: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너에게 나타난 것은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너에게 보여 줄 일에 대하여
너를
사역자와 증인으로
삼기 위한 것이다.

행 26:19
아그립바왕이시여,
그러므로 내가
하늘에 속한
그 이상을
거스르지 않고,

사울이
엎어진 후에,
주님은
그를 부르셨다.
… 종종 주님은
우리를
엎어지게 하신 후에
일어나라고
말씀하신다.
그럴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거기에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라.
네가
일어나면,
나는
너를
종교인이 아닌
사역자와 증인으로
삼을 것이다.
나는
너를
네가 본 것의
증인으로 삼을 것이다.”
주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너는
하늘로부터
네게 말하는
나를 보았다.
이제 가서
이 일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라.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증언하라.
전에 너는
나를 가리켜
죽고 장사 지낸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이제 너는
내가 부활하여
지금 하늘들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해야 한다.”

사도행전 26장 16절에서
주님은
사울에게
그가
주님을 본 일들과
장차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실 일들
모두에 대한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장차 내가
너에게 보여줄 일’은
직역하면
‘장차 내가
너에게 나타날 일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음
—역자 주).
주님은
가르침의 방식이 아니라
나타남의 방식으로
사울에게
다른 것들을
계시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사울은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모든 일에 대하여
백성에게
증언해야 했다.
이것은
가르침이나 교리나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예수님의 계시이다.
이후에
사도 바울이
공급한 것은 모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주님께
어떤 것을
배운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타나심에서 비롯된
계시를 받은 것이다.
… 증인이 되는 것은
가르침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나타남과 이상의 문제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을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사도행전 26장 18절에서
주님은
사울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나를 믿음으로써
죄들이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있는
유업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 일을
하려면
우리 자신이
이상을 가지고
하늘에 속한 것들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것들을
보아야 한다.
그 이상을
본 후에
여러분은
사람들을 접촉하여,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나셨고
여러분이
그분을 보았음을
말해야 한다.
낮고 전통적인 복음을
전하지 말라.
이 가련한 복음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눈먼 채
어둠 가운데 있다.
사람들에게
종교를 가르치지 말라.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과 사탄에게서부터
빛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라.
이렇게 돌아옴으로써
그들은
사탄의 권세인
어둠의 악한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해방될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죄들이
용서받고,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있는
유업을 받을 것이다.
구원받고 용서받은 사람들은 모두
성도들이고,
모든 성도들은
몫을 가지고 있다
(골 1:12).
골로새서에 의하면,
성도들의 몫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할당되셨고,
우리는 모두
그분 안에서
한 몫을
나누어 가졌다.
… 우리의 몫이신
그리스도는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실 것이다.
사탄에게서
하나님께로
돌이킨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몫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단체적으로, 집합적으로
몫을 가질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교회생활을 하는
지체들 가운데서
한 몫을 가지리라는
뜻이다.

사도행전 26장 18절에는
완전한 복음이
제시되어 있다.
… 이 한 절에
일곱 가지의
요점이 있다.
(1)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한다.
(2)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가게 한다.
(3) 그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한다.
(4) 죄들이
용서받도록
그들을 돕는다.
(5) 믿음으로써
거룩하게 되도록
그들을 돕는다.
(6) 그리하여 그들이
성도들 가운데서
공동의 몫을
얻도록 한다.
(7) 그들이
교회생활 안에
있게 한다.

 

신언노트, 2018-12-23

그 신성한 흐름인
그 유일한 흐름 안에 있는
사도행전의
계속을 위한
하늘에 속한
그 이상에 따르는
그 신성한 위임

그 성경 안에서
 그 신성한 흐름의,
 곧 그 유일한 흐름의
 개념은,
 중대합니다
 (crucial; 결정적입니다):

그 성경은
 그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
 —생명의 그 원천이신
 그 아버지,
 생명의 그 샘이신
 그 아들,
 또 생명의 그 강이신
 그 영을
 계시합니다.

그 흐름의 그 근원은
 하나님의 또 그 어린양의
 그 왕좌입니다.

그 성경 안에는
 오직 하나의 흐름,
 곧 하나의 신성한 흐름만
 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신성한 흐름만 있고,
 또 그 흐름이
 유일하게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하나의 흐름 안에
 우리 자신들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신성한 흐름,
 곧 그 유일한 흐름은,
 주님의 일의 그 흐름입니다:

우리가
 그 일의 그 흐름(the stream),
 곧 그 조류라고(the current)
 부를 수 있는
 한 흐름이 있습니다;
그 흐름이
 흐르는 곳에,
 거기에 하나님의 그 일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움직이심 안에
 오직 하나의 흐름이 있고,
 또 우리가
 이 하나의 흐름 안에
 우리 자신들을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계시합니다.

오순절날에 시작되었고
 또 오늘까지
 모든 세대들 동안 내내
 (throughout …;
 모든 세대들 전체에 걸쳐서)
 흘러온(has been flowing),
 그 신성한 생명의 흐름은,
 딱(just; 단지, 정확히) 하나의 흐름입니다.

그 교회의 그 역사는
 그 세대들 동안 내내
 줄곧(all the time) 흐르는
 그 영의 하나의 흐름이
 있어 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하여
 일해 왔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그 흐름의 흐름 안에
 (in the flowing of that one stream)
 있어 온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고
그를 주님의 일의
 그 흐름 안으로
 데려가셨으며,
그를
 그 안에서(the things in which)
 바울이 그분을 보았던
 그 일들의
또 그 안에서
 그분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실(would appear)
 그 일들 둘 다의
한 사역자와 또 한 증인으로
 만드셨습니다
 (making;
 임명[지명]하셨습니다):

바울은
과정을 거치셨고 또 완결되신
 그 삼일 하나님을
 담고,
 (그 삼일 하나님)으로
 채워지며,
 또 (그분을)
 표현하는
 한 그릇인
 사람의
하나님의 그 비밀인
 그리스도의,
또 그리스도의 그 몸,
 곧 그리스도의 그 비밀인
 그 교회의
하늘에 속한 그 이상에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was not disobedient;
 반항하지[거역하지,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의
 한 이상을 보았고(have seen)
 또 각각의 모든 것들로부터
 그리스도 그분 자신께로
 전환되었다면
 (have been converted;
 전향되면),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도록
 여러분에게
 힘을 주는
 (energizing;
 동력을 공급하는, …을 활발하게 하는)
 어떤 것이
 여러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이 이상은
 여러분이
 사도행전의 계속 안에서
 살고 또 수고할 때
 여러분의 부담이
 (burden;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18절은
 사도행전의 그 계속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증가와 또 건축함을 위하여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그 일을
 계시합니다:
이 절은
 우리의
 신성한 위임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내용물들을
 (contents; 목차들을)
 밝힙니다
 (unveils; …의 덮개를 벗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라
 누가복음 4장 18-21절 안에서
 주 예수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의 희년,
 곧 주님의 그 받아들일 수 있는 해의
 성취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6장 18절 안에 있는
 우리의 신성한 위임의
 그 내용물들 위에
 (over; …에 관하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그것들을
 우리의 체험과 또 실재로
 만드셔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이 체험과 또 실재 안으로
 데리고 가도록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눈들을
 뜨게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그 몸,
 또 그 신성한 경륜을 위한
 그 신성한 분배하심을
 이해하도록
 또 더욱더 많이 보도록
 (to see more and more of;
 점점 더 많이 알기 위한)
 지혜와 또 계시의
 한 영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continually; 끊임없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새 지식과
 (new knowledge of;
 인식과, 이해와, 알고 있음과)
 또 그분의
 한 새 이상 없이
 계속 갈 수 없습니다
 (cannot go on;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한 사역자와 또 한 증인이 됨은
 가르침과 또 지식의
 한 문제가 아니고
 오직 나타나심과 또 이상의
 (한 문제입니다);
그 안에서(the things in which)
 우리가 주님을 본(have seen)
 그 일들과
 또 그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실(will appear)
 그 일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반드시 공급해야만 하는
 (must minister;
 반드시 사역해야만 하는)
 그 일들입니다.

우리의 위임은
 “그 비밀의 그 경륜이
 무엇인지
 그들이(they)
 볼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enlighten all;
 모든 사람들을
 계몽하는[깨우치는,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 엡 3:9.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게 하고”.

빛은
 하나님의 그 임재입니다.

우리는
 빛으로 충만한
 (full of light)
 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몫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은
 “그 빛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세상 안에서
 발광체들이
 (luminaries; 천체들이, 조명들이)
 되고,
 생명의 그 말씀을
 제공할
 (holding forth;
 오랫동안 남 앞에서 이야기할, 밖으로 붙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에서부터
 (out of; 어둠에서 밖으로)
 그분의 기이한 빛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has called)
 그 한 분의
 그 미덕들을
 멀리에 알릴
 (to tell out; 밖으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을
 사탄의 권위로부터
 (the authority; 권세로부터)
 하나님께
 돌아서게 하고
 (to turn;
 돌리고, 전환시키고, 마음을 돌리고)”:

우리의
 영적 체험 안에서
 그 가장 높은 끝은(point; 곳은)
 그것 위에
 (about it; 하늘 위에)
 그 왕좌와 함께 있는
 한 맑은 하늘을(sky)
 가지는 것입니다:

한 맑은 하늘 위에
 그 왕좌를 가지는 것은
 주님께
 우리의 존재 안에서
 (in; 안에 있는)
 그 우위를
 (the preeminence; 그 탁월함을)
 또 우리의 생활 안에서
 가장 높고
 또 가장 두드러진
 (most prominent; 가장 현저한[돌출된, 탁월한])
 그 위치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이
 더 맑을수록,
 더 많이
 (the more; 더욱더)
 우리가
 그 왕좌 아래,
 곧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 왕좌를
 가지시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 안에
 다스리시는
 그 위치를
 가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 위에
 그 왕좌와 함께 있는
 한 맑은 하늘 아래
 있다면,
 진짜 권위가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데려올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for; 위한)
 우리의
 최대한의(uttermost; 극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자격을 주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며,
 또 우리를
 준비시켜서
 (equips;
 채비[장비]를 갖추게 해서)
그분의 권위와 함께
 (with; …를 가지고)
 주님을 위하여
 말하게 합니다.

“그들이
 죄들의 용서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들의
 한 철저한(thorough; 완전한) 용서를
 받아들이도록
 주님께 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그의 범죄들을
 (transgressions;
 위반들을, 반칙들을, 죄과들을)
 완전히 닦아 내시고
 (to blot out;
 완전히 덮으시고, 지우시고),
그의 부정으로부터
 (iniquity; 불법[사악, 죄악]으로부터)
 그를
 철저히 씻으시며
 (wash … thoroughly),
그의 죄로부터(from … sin)
 그를 깨끗하게 하시고
 (cleanse;
 씻으시고, 세척하시고, 정화하시고),
그의 죄를
 우슬초로
 (with hyssop;
 히솝풀을 가지고)
 제거하시기를
 (purge;
 깨끗하게 하시기를, 정화하시기를, 속죄하시기를)
 간청했습니다
 (begged; 애원했습니다):

우슬초는
 그분의
 겸허하고
 (humble; 겸손하고)
 또 낮추어진
 (humiliated;  창피를 당한, 자존심이 상한)
 사람의 본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우리의
 중보자와
 (Mediator; 중재자와, 조정자와)
 또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함축합니다
 (imply;
 내포합니다, 시사합니다, 나타냅니다).

다윗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그 임재 안에
 머물러
철저하고 또 진짜의
 (genuine; 진정한, 참된)
 한 회개와 또 자백을
 (a … repentance and confession;
 하나의 뉘우침[참회]과 고백을)
 가져서
하나님께로부터
 한 완전한 용서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여
 (confess … to; 자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을(gladness; 즐거움을)
 가질 것이고
 또 한 자원하는(willing; 적극적인) 영으로
 북돋아질 것입니다
 (will … be sustained
 지탱될[지속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범죄자들에게
 (transgressors; 위반자들에게)
 그분의 길들을
 가르칠 수 있고,
또 죄인들이(sinners)
 그분께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이
 내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하여
 (by faith in Me;
 나를 믿음으로써)
 거룩하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among; 중에서)
 한 상속 재산을
 (a inheritance; 유업을)
 …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 상속 재산은
 그분의 구속된 백성을 위하여
 그분께서
 가지고 계시는 모든 것,
 그분께서
 하신 모든 것,
 또 그분께서
 하실 모든 것을
 가지신
 (with; …과 함께 하시는)
 그 삼일 하나님 그분 자신이십니다.

그 삼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그리스도 안에
 체현되시고,
그분께서는
 (who;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서
 할당되신
 (alloted; 배당되신)
 그 몫이십니다
 (the portion;
 그 분여 재산[상속분]이십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즉, 그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의 상속 재산의
 그 보증으로서
 (as the pledge;
 그 담보이신, 그 증표이신)
 공기이신
 (pneumatic; 공기가 가득하신, 영이신)
 그 그리스도를
 누립니다.

우리는
 그 교회생활 안에서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그리스도를
 누림 안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올
 필요가 있고
그 결과
 (so that; 그래서)
 그들이
 우리가 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고
 또 그들의 영의
 훈련을 통하여
 (through the exercise;
 연습[활동, 발휘, 행사, 실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으로
 (with …; …을 가지고)
 기질적으로
 (dispositionally; 성향[성격]적으로)
 거룩하게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도행전의 그 계속 안에
 있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다락방의(upper-room; 윗방의)
 한 헌신을
 가짐에 의하여
 그 신성한 역사 안에서
 사는 것을 계속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바닷가에서
 베드로는
 그의 직업을
 포기하고
 (gave up; 두만두고, 버렸고)
 주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 다락방에서
 그는
 훨씬 더 많이
 포기했습니다:

그는
 하늘에 속한
 그 이상과 함께
 (with …; 그 이상으로)
 섰고
 그의 조상들의
 그 종교를
 포기했습니다.

그는
 그의 조국(country; 나라, 지방),
 그의 이웃들 또 친구들과의 관계,
 또 그의 친척들을
 포기했고,
또 그는
 기꺼이 그의 생명의
 위험을 무릎썼습니다
 (to risk …;
 생명을 걸었습니다[위태롭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헌신의 종류는
 다락방의 한 헌신,
 곧 그 안에서(in which)
 우리가
 그 대가를
 (the price; 그 값을)
 지불하여
 우리의 전 존재가
 하늘에 속한
 그 이상과
 (to …; 그 이상에)
 “결혼하도록” 하는
 한 헌신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늘에 속한
 그 이상을 위하여
 그 대가를 지불한다면,
 우리는
 “우리 뒤에 있는
 그 다리들을
 불태울” 것이고
 또 뒤로 갈
 (to go backward;
 되돌아갈, 역행할, 퇴보할)
 길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그 이상을
 보았는지(have seen)
 또는 아닌지는
우리가
 그 안연고이신
 (as the eyesalve; 그 안약으로서)
 기름 바르시는 그 영을
 사기 위해
 그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는지에
 (are willing to pay)
 달려 있습니다.

주님의 회복의
 그 길을
 취하는 것은
 가치가 낮지 않습니다
 (is not cheap;
 값싸지[보잘것없지, 시시하지, 천박하지] 않습니다);
이 길은
 비용이 많이 들고
 (expensive; 값비싸며)
 또 큰 대가가 따르는
 (costly;
 큰 희생이 따르는, 많은 비용이 드는, 값비싼)
 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한 운동을(movement; 움직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회복을 위하여
 여기에 있고,
또 그 회복은
 오직 그 다락방 안에 있는
 특정한
 (specific;
 특유의, 특이한, 분명한, 특효가 있는, 명확하고)
 또 비범한
 (extraordinary; 기이한, 놀랄 만한, 비상한)
 그 헌신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습니다.

그 다락방 안의
 그 백이십 명은 모두(all; 전부)
 한(a; 하나의) 번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 안에서
 주님을 위하여(for; 향하여)
 불타고 있었고,
 또 그들은
 그 신성한 생명의
 그 신성한 불로
 다른 사람들을
 불태웠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그 땅 위에 계셨을 때,
 큰 무리들이(crowds; 군중들이)
 그분을 따랐지만,
그들은
 그분의 움직이심을(move; 행동을, 이사를) 위하여
 어떤 것도
 그분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움직이심은
 그 다락방 안의 사람들과 함께,
 곧 그들의(whose) 눈들이 열렸고
 또 그들의 마음들이 감동받은
 (had been touched; 만져진, 접촉된)
 사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세상을 돌아서게 할
 (will turn;
 혼란스럽게 할, 갈아엎을,
 회심하게 할, 변화시킬)
 또 그 시대를 바꿀(change)
 이들은(who)
 한 소수입니다
 (a small number);
만약 우리가
 그 다락방 안에
 있으려고 한다면(would be),
우리는
 한 특정한 방식으로
 (in … way; 길 안에서)
 기도하고
 또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증거의
 그 회복을 위하여
 그 다락방 안에
 기꺼이 있겠습니다.”

 

1일

계 22:1
또 그 천사는
나에게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와
그 성의 길 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행 28:31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가르쳤다.

이 흐름은 또한
하나님의 일의 흐름이다.
이 흐름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일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말하는
사도행전에
분명히 나와 있다.
어떤 종류의 일이
하나님의 일인가?
하나님의 일은
생수의 흐름 안에 있는
일이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에는
하나님의 일이 있다.
하나님은
신성한 생명의 흐름을 따라
일하신다.
여러분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모든 것을 고려해 본다면,
이 그림을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순절날에
이 신성한 생명의 흐름은
보좌로부터,
다스리는 권위를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예루살렘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했다.
이 흐름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안디옥으로
흘렀고,
안디옥에서 서쪽으로
흘렀으며,
그리고 아시아로
흘렀고,
아시아를 거쳐
마케도니아로
또한 유럽으로
흘렀다.
우리는 여기에
신성한 생명의 강이
흘러가는 그림이 있고
이 흐름과 함께
하나님의 일이 있음을
본다.
하나님은
흐름에 의해
일하시고,
흐름에 의해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흐름에 의해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여기에
일의 흐름,
곧 일의 조류(潮流)라고
부를 수 있는
한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이 흐르는 곳에는
하나님의 일이 있다.

사도행전에는
결론과 끝이 없음을
주목하라.
성경에서
사도행전은
총 28장으로 되어 있지만,
오늘날
하늘에 있는
사도행전에는
이만 팔천 장쯤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성경의
사도행전 스물여덟 장은
단지 육십 년에서 칠십 년 정도 기간의
당대 역사의 기록일 뿐이다.
하늘에 있는
사도행전에는
시작이 있지만
마감이나 종결은 없다.
왜냐하면 이 생명의 흐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흐르고 있고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歷史)는
이 흐름이
여러 세대에 걸쳐
바로 이 순간까지 흘러왔고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흐름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이 흐름이 있는 곳에는
몸의 교통이 있다.
이 흐름이 있는 곳에는
예수님의 증거가 있다.
이 흐름이 있는 곳에는 또한
하나님의 일이 있다.
이것은
생명의 흐름이고,
교통의 흐름이며,
증거의 흐름이고,
하나님의 일의 흐름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반드시
이 흐름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 흐름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생명 밖에 있게 되고,
몸의 교통 밖에 있게 되며,
주 예수님의 증거 밖에 있게 되고,
하나님의 일 밖에 있게 된다.
우리가 단순히
이 흐름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어디로부터 흐르는가?
이것은
보좌로부터 흐른다.
이것은
어떤 보좌인가?
이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이다.
하나님은
어린양 안에 계시고,
어린양은
보좌 위에 계시며,
이 흐름은
이 보좌로부터 시작된다.
여러분이
이 흐름을 가진다면,
여러분은
보좌를 가지게 되고,
어린양을 가지게 되며,
어린양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가지게 된다.
여러분이
이 흐름을 가진다면
모든 것을
가지게 된다.
여러분이
이 흐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 있게 되고,
보좌와 함께 계신
어린양 안에 있게 되며,
생명 안에 있게 되고,
교통 안에 있게 되며,
증거 안에 있게 되고,
하나님의 일 안에 있게 된다.
여러분은
이 흐름 안에 있는가?
여러분은
그 여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만일 여러분이
이 흐름 안에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전환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 흐름 안에 있어야 한다.

우주 안에는
성경의 처음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흐르는
신성한 한 흐름이 있다.
우리는
성경의
처음부터 맨 마지막까지에 걸쳐
줄곧 나타나 있는
이 한 흐름을
따라가 볼 수 있다.
많은 곳에서
이 흐름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흐른다.
이것은
흐르고 있고,
항상 흐르고 있으며,
영원토록 흐를 것이다.
주님은
그분께서 주시는 물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샘솟는 원천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흐름은
영원토록 흐를 것이다.
이것은 결코 멈출 수 없으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해서
이러한 신성한 흐름은
항상 있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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