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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신성한 로맨스 안에 삶으로써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체험함

성경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룩한 의미에서 우주적인 한 쌍의 로맨스이다. 이 한 쌍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신랑이시고,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은 신부이다.

역대로 하나님은 사람과의 로맨스에 빠져 계셨다. 하나님은 배필을 얻으시려는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분이시고, 사랑하는 분이신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전체는 신성한 로맨스이고, 아가는 이 로맨스의 요약본이다.

성경은 로맨틱한 책이며,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점점 더 로맨틱하게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와 주 예수님 사이에 로맨스가 없다면, 이때 우리는 로맨틱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전체적으로 성경은 신성한 구애에 대한 말씀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구하고 계심을 본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애하는 말씀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분께 바로 반응하는 다정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이처럼 바로 반응하는 다정한 사랑이 아가에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의 연인과 그녀가 사랑하는 분 사이의 사랑의 그림을 본다.

아가의 주제는 “탁월한 결혼에 이르는 사랑의 역사를 통해 개개인의 믿는 이가 그리스도와 나누는 사랑의 교통에 대한 점진적인 체험을 계시함”이다.

아가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그분의 연인 사이의 혼인의 사랑을 시적 형식으로 놀랍고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아가에서 우리는 신성한 분배를 체험하는 것과 신성한 로맨스 안에서 생활하는 것의 관계를 본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분명히 생명 안에서 자라고 변화될 것이다.

아가에서 추구하는 이는 사랑스러운 그분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신성한 분배를 체험하고, 생명이 자라면서 계속 변화된다.

사람이 무엇이든 사랑하게 되면 그의 온 마음, 심지어 그의 온 존재가 그것에 고정되고 사로잡히며 점유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온 존재―영과 혼과 몸, 또 마음과 혼과 생각과 힘(막 12:30)―를 절대적으로 그분께 두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온 존재가 그분으로 점유되고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이다.”(고전 2:9)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을 귀하게 여기고, 우리의 존재를 그분께 향하게 하고, 그분께 열어 드리고, 그분을 누리고, 그분께 첫째 지위를 드리고,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을 살고, 그분이 되는 것이다.

디르사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으로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는 하나님의 성소 곧 하나님의 거처를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연인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될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녀는 디르사만큼이나 아름답고 예루살렘만큼이나 사랑스럽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삶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 안에서 성숙하여 하나님의 건축물, 곧 하나님의 성소와 그 보호처가 된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승천을 체험하면서, 휘장 안에 있는 지성소 곧 하늘에 속한 성소의 내실 안에서 살고 있다.

제일 좋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는 삼일 하나님 안으로 합병되어 그분의 거처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연결되시고 연합되시고 합병되시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시는 것은 바로 그분 안에 있는 사랑으로 인한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고 연합되고 합병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는 것도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동일한 사랑으로 인한 것이다.

제일 좋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신성한 로맨스의 모든 방면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확대된 지성소인 새 예루살렘이 된다.

하나님의 성소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그 생명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자라 성숙하여 건축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건축물은 디르사와 예루살렘으로 예표된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건축물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이다.

몸의 건축은 유기적인 것이며, 우리가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또한 그리스도의 아내(엡 5:25-32)인데, 궁극적으로 이 유기적인 몸의 건축은 지성소의 완결인 거룩한 성, 곧 영원 안에서 하나님과 그분께서 구속하신 백성의 상호 거처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성숙하여 술람미가 되는데, 이것은 그녀가 결혼을 위해 그분과 어울리도록 그리스도의 재생산과 복사판이 된 것을 상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도가 그분 자신을 우리와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하는 것, 곧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똑같이 되게 하는 것임을 반복해서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을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신성한 계시의 고봉에 어떻게 도달할지를 고려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우리를 긍휼과 존귀와 영광의 그릇이 되게 하시는, 사랑과 능력과 긍휼이신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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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신성한 로맨스 안에 삶으로써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체험함”

6일

엡 4:15-16 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온몸은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입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받은 거의 모든 가르침과 온전하게 함은 개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는 우리의 영성이 단지 개인주의적 영성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의 영성은 전부 건축을 위해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어떤 형제들은 집과 건물을 건축할 때 도움을 준 적이 있는 목수들이다. 그들은 각각의 개별적인 재료가 재료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체적인 건축물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기독교 안에서 단체적인 건축물에 관해 결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삼 년 이상 워치만 니 형제님은 항상 건축의 문제에 대해서 말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의 처음 두 장과 마지막 두 장을 열어 주셨다. 성경에 나오는 건축이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는 우리가 단체적인 몸으로 건축될 필요가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메시지를 좀처럼 들어 볼 수 없다. 영성이 단지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인식을 갖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비둘기 같은 눈을 주시기 바란다. 영성은 단체적인 성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아가 6장 4절부터 13절까지는 휘장 안의 생활을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의 내재적인 의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십자가를 통하여 휘장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지성소 안에서 생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승천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가 6장 4절에서 추구하는 이가 사랑하는 분은 그녀를 자신의 사랑으로 소중히 여기시면서 그녀가 하늘에 속한 성소(디르사, 왕상 14:17)만큼이나 아름답고,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갈 4:26, 히 12:22)만큼이나 사랑스럽다고 칭송하신다. 이것은 그녀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승천을 체험하면서, 휘장 안에 있는 지성소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전에 연인은 파라오의 병거들 가운데 있는 암말, 샤론의 장미, 골짜기에 그리고 가시나무들 가운데 있는 백합화, 비둘기, 연기 기둥, 침상, 가마, 동산, 우물과 샘으로 비유되었지만, 이제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거처와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으로 비유되는데, 이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해 생명이 성숙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우리에게는 생명의 성숙이 필요하다. 몸의 건축에 대해 말하는 에베소서 4장 12절부터 16절까지는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될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성숙에 이르도록 자랄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 몸의 건축은 우리가 일들을 조직하거나 경영하거나 안배하는 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의 몸은 유기체이지 조직체가 아니다. 이 유기체를 건축하는 것은 생명의 성장과 성숙에 달려 있다. 몸의 건축은 유기적이다.

몸을 유기적으로 건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숙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지금 교회의 건축보다 몸의 건축을 훨씬 더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전서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관한 책이다(3:15). 이 책에는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에 관한 것이 없다. 디모데전서 3장은 봉사에서 장로들과 집사들을 안배하는 것에 관해 말하지만, 에베소서는 장로들과 집사들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에베소서는 지체들이 성장하는 것에 관해 말한다. 먼저 우리는 자라야 하며, 그럴 때 다른 이들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 이 온전하게 함은 고린도후서 13장에 따른 것인데, 이 장에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살며 자라고 계시고(5절),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그 영의 교통 안에서 삼일 하나님을 누리고 있다(14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지, 교회를 일종의 조직체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생명의 성숙을 요구하는 건축물은 하나밖에 없다. 이 건축물은 바로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이며, 이 몸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유기적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5일

아 6:4 “내 사랑이여, 그대는 디르사만큼이나 아름답고 예루살렘만큼이나 사랑스러우며 깃발을 든 군대만큼이나 두렵게 한다오.

고전 3:9 … 여러분은 하나님의 경작지이며, 하나님의 건축물입니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이는 승천 안에 살도록 부름받는 지점에 도달한 후, 가장 높은 성취에 이르렀다. 이렇게 가장 높은 성취에 이른 그녀는 그녀의 변화의 완결로서 네 가지 놀라운 것, 즉 동산과 성소와 천체와 두려운 군대가 된다. 두려운 군대는 인도자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인 이기는 이, 곧 술람미로 이루어진다. 그녀가 동산이 되는 것은 그녀가 보호처가 있는 성소, 곧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것만큼 높거나 깊지 않다. 그녀는 보호처인 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하나님의 거처인 이러한 건축물이 된다.

디르사는 결국 어두운 배경을 갖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왕국이 분열될 때 디르사가 이스라엘 왕들의 수도와 왕의 궁전이 있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가에서는 디르사가 아름다움이 뛰어나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언급된다(6:4).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디르사가 어두운 배경을 갖게 되었지만, 추구하는 이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디르사처럼 아름답다고 칭찬받는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 안에서 새 창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삶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 안에서 성숙하여 그리스도께 동산이 될 뿐 아니라, 디르사로 상징된 하나님의 성소와 예루살렘으로 상징된 그 보호처가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숙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추구하는 이는 두 건축물에 비유된다. 하나는 왕의 궁전이고, 다른 하나는 그 궁전을 둘러싼 성 곧 보호처이다.

동산은 다만 왕이 방문하는 곳일 뿐, 왕이 사는 거처나 왕의 궁전을 보호하는 성이 아니다. 동산이 되는 것은 매우 훌륭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물이라는 최고봉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스도께 동산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요소가 번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소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그 생명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자라 건축되는 것이다(엡 4:15-16). 구약에서 하나님의 건축물은 디르사와 예루살렘으로 예표된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건축물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이다.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은 또한 그리스도의 아내이다(5:25-32). 더욱이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은 새 예루살렘의 건축을 완결하고 완성한다.

성경의 신성한 계시는 매우 일관적이다. 성경의 신성한 계시는 영을 가진 사람의 창조와 생명나무와(창 2:7, 9), 물이 흐르고 세 가지 귀한 재료들이 있는 동산…으로(10-12절) 시작된다. 마침내 한 여자가 아담에게서 나와, 아담의 배필 곧 아담의 아내로 건축된다(22절). 이 여자는 또한 아담의 몸이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예루살렘성이 먼저 건축되었고, 나중에 솔로몬 아래서 성전과 궁전이 건축되었다(왕상 6:1-7:1). 궁전은 왕의 거처였고, 성전은 하나님의 거처였다. 구약에서 궁전과 성전은 분리되어 있다. 왕인 솔로몬은 궁전에 거했고, 하나님은 성전에 거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의 글이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영원한 관점에서 궁전은 성전과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둘 모두가 하나님의 처소이기 때문이다. 신약에 기록된 예표의 실재와 성취에 따르면, 궁전과 성전은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일한 거주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 거하시고, 또한 다스리시는 분 곧 위대한 왕으로서 궁전에 거주하신다. 디르사는 여기서 하나님의 궁전으로 사용된다.

4일

고전 2:9 …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으로 본 적이 없는 것들이고, 귀로도 들은 적이 없는 것들이며,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들이다.” …

고후 3:18 그러나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게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정하시고 예비하신, 깊고 감추어진 것들을 깨닫고 그것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그분을 믿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온 존재―영과 혼과 몸, 또 마음과 혼과 생각과 힘(막 12:30)―를 절대적으로 그분께 두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온 존재가 그분으로 점유되고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가장 가깝고도 친밀한 교통을 하며, 그분의 마음 안에 들어가서 그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

신성한 로맨스는 아가에서 시적으로 묘사된다. … ‘솔로몬’의 여성형인 ‘술람미’라는 그 연인의 이름은 아가 6장 13절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하와가 아담에게 그러하듯(창 2:20-23) 이 시점에서 그녀가 생명과 본성과 형상에서 솔로몬과 똑같은, 솔로몬의 복사판이자 배필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연인이 생명과 본성과 형상에서 그분과 똑같이 되어 그분과 결혼할 짝이 됨을 상징한다(고후 3:18, 롬 8:29).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모든 사람을 포함한 단체적인 술람미일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솔로몬으로 상징되신) 구속하시는 하나님과 (술람미로 상징된) 그분의 구속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가 된다. 새 예루살렘은 신성과 인성의 연합체로서 인간 미덕들 안에서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을 표현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내는 함께 결합되어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완결된 술람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솔로몬과 같은 형상을 이룬 놀라운 술람미가 될 것이다. 이 술람미는 솔로몬의 복사판으로서 그리스도의 배필인 새 예루살렘에 대한 가장 위대하고도 궁극적인 예표이다. 솔로몬왕이 시골 사람이 되어 시골 소녀를 자기의 왕비, 자기의 복사판으로 만들기 위해 그녀에게 구애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시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시려고 사람에게 구애하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애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을 계시하고, 이제는 우리가 그분과 개인적이고 다정하며 내밀하고 영적인 관계를 가져 그분의 표현을 위해 신성하게 됨으로, 우리가 그분께 구애하기를 원하심을 계시한다. 술람미는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인 우리의 예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많은 연인이 결국에는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의 복사판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을 하나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신성한 계시의 고봉의 성취이다. 단체적인 이기는 이, 즉 솔로몬의 복사판인 술람미는 새 예루살렘의 예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격의 면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신성 모독이지만,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의 면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신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그분과 하나로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거듭해서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숙한 이기는 믿는 이들이 이전에는 죄인들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성취를 위해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그리스도와 똑같이 된 것을 의미한다.

3일

아 2:2 “가시나무들 가운데 백합화처럼 내 사랑이 딸들 가운데 그러하여라.”

아 2:14 바위틈에 있는,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 그대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 표정은 사랑스럽다오.

아 3:6 “몰약과 유향, 상인의 온갖 향료로 향기 날리며 연기 기둥처럼 광야에서 올라오는 저 여인이 누구인가?

(아가의 처음 세 장에서) 주님은 그분을 추구하는 이를 묘사하는 데 최소한 여덟 가지 상징을 사용하셨다. 주님은 그분을 추구하는 이를 여러 가지 상징으로 묘사하시는데, 이러한 묘사는 추구하는 이가 각각의 때에 어떤 상태에 도달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여덟 가지 상징 모두를 함께 살펴보고 서로 비교해 본다면, 이 상징들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여덟 가지 상징은 생명의 성장과 생명의 변화를 나타낸다.

맨 먼저 주 예수님은 암말이라는 상징을 사용하셨다. 다음으로 주님은 비둘기 같은 눈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녀는 아직 비둘기는 아니지만 비둘기 같은 눈을 가졌다. 비둘기 같은 눈 다음에 백합화가 있다. 백합화에 뒤이어 비둘기의 일부가 아닌 비둘기 한 마리 전체가 나온다. 비둘기에 뒤이어 연기 기둥, 침상, 가마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면류관이 있다. 나의 부담은 아가를 강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님의 생명을 취하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만, 그분을 생명으로 체험하는 법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누리고 체험하는 길이 아가에서 발견된다.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누리는 길은 놀라운 인격이신 그분을 다만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교리나 은사나 능력에 대한 책이 아니라 놀라운 인격을 제시하는 책이다. 아가도 정확히 똑같다. 이 여덟 장들은 사랑스러운 한 인격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그분은 전적으로 사랑스러운 분이시다! 아가에서 이 사랑스러운 분은 바로 그분을 추구하는 이의 생명이시며 생활이시다. 추구하는 이는 사랑스러운 이분을 사랑함으로써, 내적으로는 그분을 그녀의 생명으로 취하고 외적으로는 그분을 그녀의 생활로 취한다. 오,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대화와 행함과 태도와 표현과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그분은 내적으로 우리의 생명이 되실 뿐 아니라 외적으로 우리의 생활이 되실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빌 1:21). 이것이 아가이다.

이 책은 이렇게 놀랍고도 사랑스러운 분에 대한 그림을 제시할 뿐 아니라, 그분을 너무도 사랑하는 추구하는 이에 대한 분명한 그림도 제시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가 생명이 성장하면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생명이 자라지 않을 수 없고 생명의 변화가 없을 리 없다. 만일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해를 거듭해도 똑같은 상태라면, 나는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생명 안에서 지속적으로 자라고 변화될 것이다. 그것은 가르침이나 교훈이나 교정이나 조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러한 것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마치 시체를 다루는 장의사와 같이 단지 외적인 방식으로 조금 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무언가 바뀌게는 하지만, 그러한 바뀜은 모두 외적인 것일 뿐 생명에서 비롯된 것은 조금도 없다. 그것들에는 성장이나 변화나 발전이나 바뀜이나 살아 전진하는 것이 조금도 없다.

아가에 나오는 추구하는 이를 깊이 생각해 보자. 항상 그녀는 자라고 있고 바뀌고 있으며 변화되고 있다. 암말에서 비둘기로 변화되고, 비둘기에서 연기 기둥으로 변화되고, 연기 기둥에서 침상으로 변화되고, 침상에서 가마로 변화되고, 가마에서 면류관으로 변화되다니, 이 어떠한 변화인가! 이 모든 상징들에서 우리는 추구하는 이의 생명이 이렇게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가르침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은사에 의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은사도 생명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요한복음 2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그분을 믿었다. 우리는 기적을 귀히 여기는 이들이 아니라 인격을 귀히 여기는 이들이어야 한다. 곧 주님 자신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이들이어야 한다. 그럴 때 생명의 성장과 생명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2일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여러분에게 질투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기 때문입니다.

막 12:30 그러므로 그대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그대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역대로 하나님은 사람과의 로맨스에 빠져 계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는 주로 종들을 얻으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배필을 얻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랑이 가득한 분이신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 안에서 하나님은 혼자이셨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외로우셨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갈망은 천사들에 의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존재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사랑이 가득한 분이시며, 그분은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배필로 창조된 이들인 인류 사이에는 상호 간에 사랑의 관계가 있게 될 것이다.

성경 전체는 신성한 로맨스이다. 이것은 성경이 매우 로맨틱한 책임을 의미한다. 특히 아가가 그러하다. 어떤 현대주의자들은 아가가 성경에 포함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젊었을 때 왜 성경에 이러한 책, 즉 남녀의 로맨스에 관한 책이 있는지 궁금했었다. 이 책은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한다. 만일 우리와 주 예수님 사이에 로맨스가 없다면, 우리는 로맨틱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아가를 읽어 보고 기도로도 읽어 보라. 이 로맨스의 책을 기도로 읽을 때, 우리는 주님과 로맨틱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제정신이 아니게 될 것이다. 성경은 신성한 로맨스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점점 더 로맨틱하게 되어야 한다.

신약 전체가 로맨스와 구애의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마태복음은 그리스도를 신랑이시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결혼을 언급하며,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에 대한 계시로 끝맺는다. 더욱이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여러분에게 질투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동일한 사상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자신이 교회를 교회의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약혼시키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한다(5:25). 그러므로 신약 전체가 로맨스의 분위기 안에서 기록되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께서 구애하시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구하고 계심을 본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분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의 다정한 사랑을 구하시면서 베드로에게 구애하고 계셨다. 전체적으로 성경은 이처럼 신성한 구애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애하는 말씀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분께 바로 반응하는 다정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식으로 그분을 사랑할 것을 요청하셨고, 바울에게도 그러한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도록 강권하셨다(고후 5:14-15). 모든 믿는 이들이 이렇게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요 14:21, 23). 이처럼 바로 반응하는 다정한 사랑이 아가에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의 연인과 그녀가 사랑하는 분 사이의 사랑의 그림을 본다(아 1:2-4).

아가에서 추구하는 이는 “나는 내 사랑하는 이의 것, 내 사랑하는 이는 나의 것.”(6:3)이라고 말한다. 찬송가 232장의 “날 사랑한 주 사랑”에는 ‘나는 주께 속하고 주는 내게 속하네’라는 후렴이 있다. 이것은 아가에 언급된 말이다. 이러한 관계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다정한 관계이다. 아가는 지금까지 기록된 책 중에서 가장 로맨틱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하나님과 그분께 선택받은 백성 사이의 사랑의 관계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와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의 결혼 생활에 대한 묘사를 보여 준다.

신언노트 2023 01 01

신성한 로맨스 안에 삶으로써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체험함
신성한 로맨스 안에 삶에 의해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하심을 체험함

우리가
성경의 깊은 사상 안으로
들어가 본다면,
성경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룩한 의미에서
우주적인 한 쌍의 로맨스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한 쌍에서
남자는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신성한 분이시지만
이 우주적인 한 쌍에서
남자가 되기를
갈망하신다.
바로 이 하나님께서
긴 과정을 거치신 후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 한 쌍에서
여자는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인
단체적인 한 사람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포함한다.
긴 과정을 거친 후에
이 단체적인 사람은
신부인
새 예루살렘이 된다.

이 거룩한 로맨스는
구약 전체에 걸쳐
반복해서 계시된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기록에 이어서 곧바로
우리는
결혼 이야기를
발견한다.
이 결혼에서
아담은
남편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고,
하와는
아내인 교회의 예표이다.
에베소서 5장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로 예표된 한 쌍,
즉 그리스도와 교회를
본다.
아담과 하와라는 예표는
이 우주적인 한 쌍의 두 인격이
근원이 같아야 함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하와를
따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다.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온 뼈인
갈빗대 하나로
만들어졌다.
이 우주적인 한 쌍에서
아내는
남편에게서 나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야 한다.
이 한 쌍의 두 인격은
근원이 같아야 한다.
이 두 인격은 또한
하나의 본질을
가져야 한다.
더욱이 이 두 인격은
공통된 한 생명을
가져야 한다.
하와는
아담이 가진 것과 동일한
본질과 생명을 가졌다.
이 한 쌍을 이루는 두 인격은
근원이 하나이고,
하나의 본질을 가졌으며,
동일한 생명을 가졌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하나의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함께 살았다.
하와는
아담 곁에서
아담과 함께 살았고,
아담은
하와 곁에서
하와와 함께 살았다.

온 우주의 비밀은
하나님과
그분께 선택받은 이들이
한 쌍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들인 우리와
하나님은
근원이 하나이고,
한 본질을 갖고 있으며,
한 생명을 갖고 있다.
이제 우리는 또한
한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의해서나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있으며,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서
살고 계신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구약에서 여러 차례
자신을
남편이라고 언급하셨고,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아내라고 언급하셨다.
하나님은
남편이 되기를
갈망하셨고,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아내로 얻기를
갈망하셨다.
여러 차례 신언자들은
남편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했고,
하나님의 아내인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말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항상 우리는
종교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데,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여러분의 아내가
여러분을
위대한 사람이나 거인으로 생각하면서,
여러분을 숭배하듯이
여러분에게 다가와
절하고 무릎을 꿇으며
여러분에게 경배한다고 하자.
여러분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
왜 이러는 거예요?
나에게는
이렇게 경배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요.
나에게는
나를 안아 주고
입맞춤해 주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필요해요.
당신이
나에게
살짝 입맞춤해 준다면
나는
하늘을 날 듯이
행복할 거예요.”
우리 하나님은
분명히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의 창조물인
우리는 마땅히
그분께 경배해야 한다.
성경의 많은 절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호세아서에서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시기를
갈망하신다는 말씀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는가?
고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성전을 건축했고,
제사장 체계와 희생 제물을 갖춘
경배의 체계를 제정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것이 지겹다.
나는
너희의 희생 제물에
싫증이 난다.
나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를
원한다.
나는
너희의 남편이다.
너희는
나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
나는
결혼 생활을 하고 싶다.
나는 쓸쓸하다.
나에게는
너희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내가 선택한 백성인 너희가
나의 아내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역대로 하나님은
사람과의 로맨스에
빠져 계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의도는 주로
종들을 얻으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배필을 얻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사랑이 가득한 분이신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 안에서
하나님은 혼자이셨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외로우셨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갈망은
천사들에 의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존재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사랑이 가득한 분이시며,
그분은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배필로 창조된 이들인
인류 사이에는
상호 간에
사랑의 관계가
있게 될 것이다.

성경 전체는
신성한 로맨스이다.
이것은
성경이
매우 로맨틱한 책임을
의미한다.
특히 아가가 그러하다.
어떤 현대주의자들은
아가가
성경에 포함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젊었을 때
왜 성경에
이러한 책,
즉 남녀의 로맨스에 관한 책이 있는지
궁금했었다.
이 책은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한다.
만일 우리와 주 예수님 사이에
로맨스가 없다면,
우리는
로맨틱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아가를 읽어 보고
기도로도 읽어 보라.
이 로맨스의 책을
기도로 읽을 때,
우리는
주님과
로맨틱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제정신이 아니게 될 것이다.
성경은
신성한 로맨스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점점 더
로맨틱하게 되어야 한다.

신약 전체가
로맨스와
구애의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마태복음은
그리스도를
신랑이시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결혼을 언급하며,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에 대한
계시로 끝맺는다.
더욱이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여러분에게 질투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동일한 사상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자신이
교회를
교회의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약혼시키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므로 신약 전체가
로맨스의 분위기 안에서
기록되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께서
구애하시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구하고 계심을
본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분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의 다정한 사랑을 구하시면서
베드로에게
구애하고 계셨다.
전체적으로 성경은 이처럼
신성한 구애에 대한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애하는 말씀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분께 바로 반응하는
다정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식으로
그분을 사랑할 것을
요청하셨고,
바울에게도
그러한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도록
강권하셨다.
모든 믿는 이들이 이렇게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처럼 바로 반응하는
다정한 사랑이
아가에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의 연인과
그녀가 사랑하는 분 사이의
사랑의 그림을 본다.

아가에서
추구하는 이는
“나는
내 사랑하는 이의 것,
내 사랑하는 이는
나의 것.”
이라고 말한다.
찬송가 232장의
“날 사랑한 주 사랑”에는
‘나는
주께 속하고
주는
내게 속하네’
라는 후렴이 있다.
이것은
아가에 언급된 말이다.
이러한 관계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다정한 관계이다.
아가는
지금까지 기록된 책 중에서
가장 로맨틱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하나님과
그분께 선택받은 백성 사이의
사랑의 관계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와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의
결혼 생활에 대한
묘사를 보여 준다.

성경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룩한 의미에서
우주적인 한 쌍의 로맨스이다.
이 한 쌍에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신랑이시고,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은
신부이다.

역대로 하나님은
사람과의 로맨스에
빠져 계셨다.
하나님은
배필을 얻으시려는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분이시고,
사랑하는 분이신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전체는
신성한 로맨스이고,
아가는
이 로맨스의 요약본이다.

성경은
로맨틱한 책이며,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점점 더
로맨틱하게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와
주 예수님 사이에
로맨스가 없다면,
이때 우리는
로맨틱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전체적으로 성경은
신성한 구애에 대한 말씀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구하고 계심을
본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애하는 말씀을
지키고자 한다면,
그분께 바로 반응하는
다정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이처럼 바로 반응하는
다정한 사랑이
아가에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의 연인과
그녀가 사랑하는 분 사이의
사랑의 그림을 본다.

아가의 주제는
“탁월한 결혼에 이르는
사랑의 역사를 통해
개개인의 믿는 이가
그리스도와 나누는
사랑의 교통에 대한
점진적인 체험을
계시함”이다.

아가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그분의 연인 사이의
혼인의 사랑을
시적 형식으로
놀랍고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아가의 처음 세 장에서
주님은
그분을 추구하는 이를 묘사하는 데
최소한 여덟 가지 상징을
사용하셨다.
주님은
그분을 추구하는 이를
여러 가지 상징으로 묘사하시는데,
이러한 묘사는
추구하는 이가
각각의 때에
어떤 상태에 도달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여덟 가지 상징 모두를
함께 살펴보고
서로 비교해 본다면,
이 상징들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여덟 가지 상징은
생명의 성장과
생명의 변화를
나타낸다.

맨 먼저 주 예수님은
암말이라는 상징을
사용하셨다.
다음으로 주님은
비둘기 같은 눈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녀는 아직
비둘기는 아니지만
비둘기 같은 눈을 가졌다.
비둘기 같은 눈 다음에
백합화가 있다.
백합화에 뒤이어
비둘기의 일부가 아닌
비둘기 한 마리 전체가 나온다.
비둘기에 뒤이어
연기 기둥, 침상, 가마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면류관이 있다.
나의 부담은
아가를 강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님의 생명을 취하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만,
그분을
생명으로 체험하는 법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누리고 체험하는 길이
아가에서 발견된다.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누리는 길은
놀라운 인격이신 그분을 다만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교리나 은사나 능력에 대한 책이 아니라
놀라운 인격을 제시하는 책이다.
아가도
정확히 똑같다.
이 여덟 장들은
사랑스러운 한 인격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그분은
전적으로 사랑스러운 분이시다!
아가에서
이 사랑스러운 분은 바로
그분을 추구하는 이의
생명이시며 생활이시다.
추구하는 이는
사랑스러운 이분을 사랑함으로써,
내적으로는
그분을
그녀의 생명으로 취하고
외적으로는
그분을
그녀의 생활로 취한다.
오,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분을
사랑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대화와 행함과
태도와 표현과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그분은
내적으로
우리의 생명이 되실 뿐 아니라
외적으로
우리의 생활이 되실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빌 1:21).
이것이
아가이다.

이 책은
이렇게 놀랍고도 사랑스러운 분에 대한
그림을 제시할 뿐 아니라,
그분을 너무도 사랑하는
추구하는 이에 대한
분명한 그림도 제시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가
생명이 성장하면서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생명이 자라지 않을 수 없고
생명의 변화가 없을 리 없다.
만일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해를 거듭해도
똑같은 상태라면,
나는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생명 안에서
지속적으로
자라고 변화될 것이다.
그것은
가르침이나 교훈이나
교정이나 조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러한 것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마치
시체를 다루는
장의사와 같이
단지 외적인 방식으로
조금 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무언가 바뀌게는 하지만,
그러한 바뀜은 모두
외적인 것일 뿐
생명에서 비롯된 것은
조금도 없다.
그것들에는
성장이나 변화나
발전이나 바뀜이나
살아 전진하는 것이
조금도 없다.

아가에 나오는
추구하는 이를
깊이 생각해 보자.
항상 그녀는
자라고 있고
바뀌고 있으며
변화되고 있다.
암말에서 비둘기로 변화되고,
비둘기에서 연기 기둥으로 변화되고,
연기 기둥에서 침상으로 변화되고,
침상에서 가마로 변화되고,
가마에서 면류관으로 변화되다니,
이 어떠한 변화인가!
이 모든 상징들에서
우리는
추구하는 이의 생명이
이렇게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가르침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은사에 의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은사도
생명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요한복음 2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그분을 믿었다.
우리는
기적을 귀히 여기는 이들이 아니라
인격을 귀히 여기는 이들이어야 한다.
곧 주님 자신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이들이어야 한다.
그럴 때
생명의 성장과
생명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아가에서 우리는
신성한 분배를
체험하는 것과
신성한 로맨스 안에서
생활하는 것의
관계를 본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분명히 생명 안에서
자라고 변화될 것이다.

아가에서 추구하는 이는
사랑스러운 그분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신성한 분배를 체험하고,
생명이 자라면서
계속 변화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정하시고 예비하신,
깊고 감추어진 것들을
깨닫고
그것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그분을 믿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온 존재
―영과 혼과 몸,
또 마음과 혼과 생각과 힘―를
절대적으로
그분께 두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온 존재가
그분으로 점유되고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가장 가깝고도 친밀한
교통을 하며,
그분의 마음 안에 들어가서
그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

신성한 로맨스는
아가에서
시적으로 묘사된다.
‘솔로몬’의 여성형인
‘술람미’라는
그 연인의 이름은
아가 6장 13절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하와가
아담에게 그러하듯
이 시점에서
그녀가
생명과 본성과 형상에서
솔로몬과 똑같은,
솔로몬의 복사판이자 배필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연인이
생명과 본성과 형상에서
그분과 똑같이 되어
그분과 결혼할 짝이 됨을
상징한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모든 사람을 포함한
단체적인 술람미일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솔로몬으로 상징되신
구속하시는 하나님과
술람미로 상징된
그분의 구속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가 된다.
새 예루살렘은
신성과 인성의 연합체로서
인간 미덕들 안에서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을 표현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내는
함께 결합되어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이것이 완결된 술람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솔로몬과 같은 형상을 이룬
놀라운 술람미가
될 것이다.
이 술람미는
솔로몬의 복사판으로서
그리스도의 배필인
새 예루살렘에 대한
가장 위대하고도 궁극적인 예표이다.
솔로몬왕이
시골 사람이 되어
시골 소녀를
자기의 왕비,
자기의 복사판으로
만들기 위해
그녀에게 구애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게 하시려고
사람에게 구애하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애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것을
계시하고,
이제는 우리가
그분과
개인적이고 다정하며
내밀하고 영적인
관계를 가져
그분의 표현을 위해
신성하게 됨으로,
우리가
그분께 구애하기를 원하심을
계시한다.
술람미는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인
우리의 예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많은 연인이
결국에는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의 복사판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을
하나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신성한 계시의
고봉의 성취이다.
단체적인 이기는 이,
즉 솔로몬의 복사판인 술람미는
새 예루살렘의 예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격의 면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신성 모독이지만,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의 면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불신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그분과 하나로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거듭해서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숙한
이기는 믿는 이들이
이전에는 죄인들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성취를 위해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그리스도와 똑같이 된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무엇이든 사랑하게 되면
그의 온 마음,
심지어 그의 온 존재가
그것에
고정되고
사로잡히며
점유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온 존재
―영과 혼과 몸,
또 마음과 혼과 생각과 힘―를
절대적으로
그분께 두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온 존재가
그분으로 점유되고
그분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실질적으로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이다.”
(고전 2:9)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을 귀하게 여기고,
우리의 존재를
그분께 향하게 하고,
그분께 열어 드리고,
그분을 누리고,
그분께 첫째 지위를 드리고,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을 살고,
그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이는
승천 안에 살도록
부름받는 지점에 도달한 후,
가장 높은 성취에 이르렀다.
이렇게 가장 높은 성취에 이른
그녀는
그녀의 변화의 완결로서
네 가지 놀라운 것,
즉 동산과 성소와
천체와 두려운 군대가 된다.
두려운 군대는
인도자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인
이기는 이, 곧 술람미로
이루어진다.
그녀가
동산이 되는 것은
그녀가
보호처가 있는 성소,
곧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것만큼
높거나 깊지 않다.
그녀는
보호처인 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하나님의 거처인
이러한 건축물이 된다.

디르사는 결국
어두운 배경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왕국이 분열될 때
디르사가
이스라엘 왕들의 수도와
왕의 궁전이 있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가에서는
디르사가
아름다움이 뛰어나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언급된다.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디르사가
어두운 배경을
가지게 되었지만,
추구하는 이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디르사처럼 아름답다고
칭찬받는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 안에서
새 창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삶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 안에서 성숙하여
그리스도께 동산이 될 뿐 아니라,
디르사로 상징된
하나님의 성소와
예루살렘으로 상징된
그 보호처가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숙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추구하는 이는
두 건축물에 비유된다.
하나는
왕의 궁전이고,
다른 하나는
그 궁전을 둘러싼
도시 곧 보호처이다.

동산은 다만
왕이 방문하는 곳일 뿐,
왕이 사는 거처나
왕의 궁전을 보호하는 도시가 아니다.
동산이 되는 것은
매우 훌륭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물이라는
최고봉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스도께 동산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요소가
번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소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그 생명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자라
건축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건축물은
디르사와 예루살렘으로
예표된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건축물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이다.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은 또한
그리스도의 아내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은
새 예루살렘의 건축을
완결하고 완성한다.

성경의 신성한 계시는
매우 일관적이다.
성경의 신성한 계시는
영을 가진 사람의 창조와
생명나무와,
물이 흐르고
세 가지 귀한 재료들이 있는
동산으로 시작된다.
마침내 한 여자가
아담에게서 나와,
아담의 배필
곧 아담의 아내로
건축된다.
이 여자는 또한
아담의 몸이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예루살렘 시가
먼저 건축되었고,
나중에 솔로몬 아래서
성전과 궁전이 건축되었다.
궁전은
왕의 거처였고,
성전은
하나님의 거처였다.
구약에서
궁전과 성전은
분리되어 있다.
왕인 솔로몬은
궁전에 거했고,
하나님은
성전에 거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의 글이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영원한 관점에서
궁전은
성전과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둘 모두가
하나님의 처소이기 때문이다.
신약에 기록된 예표의
실재와 성취에 따르면,
궁전과 성전은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일한 거주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 거하시고,
또한 다스리시는 분
곧 위대한 왕으로서
궁전에 거주하신다.
디르사는 여기서
하나님의 궁전으로 사용된다.

우리가
기독교에서 받은
거의 모든
가르침과 온전하게 함은
개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는
우리의 영성이 단지
개인주의적 영성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의 영적임은 전부
건축을 위해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어떤 형제들은
집과 건물을 건축할 때
도움을 준 적이 있는
목수들이다.
그들은
각각의 개별적인 재료가
재료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체적인 건축물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기독교 안에서
단체적인 건축물에 관해
결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삼 년 이상
워치만 니 형제님은 항상
건축의 문제에 대해서 말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의 처음 두 장과 마지막 두 장을
열어 주셨다.
성경에 나오는 건축이
우리에게
아주 분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는
우리가
단체적인 몸으로
건축될 필요가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메시지를 좀처럼 들어 볼 수 없다.
영성이 단지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인식을 가지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비둘기 같은 눈을
주시기 바란다.
영성은
단체적인 도시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아가 6장
4절부터 13절까지는
휘장 안의 생활을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의 내재적인 의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십자가를 통하여
휘장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지성소 안에서
생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승천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가 6장 4절에서
추구하는 이가 사랑하는 분은
그녀를
자신의 사랑으로
소중히 여기시면서
그녀가
하늘에 속한 성소(디르사)만큼이나
아름답고,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만큼이나
사랑스럽다고
칭송하신다.
이것은
그녀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승천을 체험하면서,
휘장 안에 있는
지성소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전에 연인은
파라오의 병거들 가운데 있는 암말,
샤론의 장미,
골짜기에 그리고 가시나무들 가운데 있는 백합화,
비둘기, 연기 기둥,
침상, 가마,
동산, 우물과 샘으로
비유되었지만,
이제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거처와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으로 비유되는데,
이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해
생명이 성숙했음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우리에게는
생명의 성숙이 필요하다.
몸의 건축에 대해 말하는
에베소서 4장
12절부터 16절까지는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될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성숙에 이르도록
자랄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몸의 건축은
우리가
일들을
조직하거나 경영하거나 안배하는
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의 몸은
유기체이지
조직체가 아니다.
이 유기체를 건축하는 것은
생명의 성장과 성숙에 달려 있다.
몸의 건축은
유기적이다.

몸을 유기적으로 건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숙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지금
교회의 건축보다
몸의 건축을
훨씬 더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전서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에 관한 것이 없다.
디모데전서 3장은
봉사에서
장로들과 집사들을
안배하는 것에 관해 말하지만,
에베소서는
장로들과 집사들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에베소서는
지체들이 성장하는 것에 관해 말한다.
먼저 우리는
자라야 하며,
그럴 때
다른 이들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
이 온전하게 함은
고린도후서 13장에 따른 것인데,
이 장에서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살며 자라고 계시고,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그 영의 교통 안에서
삼일 하나님을 누리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지,
교회를
일종의 조직체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생명의 성숙을 요구하는 건축물은
하나밖에 없다.
이 건축물은 바로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이며,
이 몸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유기적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디르사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으로 둘러싸여
보호받고 있는
하나님의 성소
곧 하나님의 거처를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연인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될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녀는
디르사만큼이나 아름답고
예루살렘만큼이나 사랑스럽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삶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 안에서 성숙하여
하나님의 건축물,
곧 하나님의 성소와
그 보호처가 된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승천을 체험하면서,
휘장 안에 있는 지성소
곧 하늘에 속한 성소의 내실 안에서
살고 있다.

제일 좋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는
삼일 하나님 안으로 합병되어
그분의 거처가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연결되시고 연합되시고 합병되시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시는 것은 바로
그분 안에 있는
사랑으로 인한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고 연합되고 합병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게 되는 것도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동일한 사랑으로 인한 것이다.

제일 좋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신성한 로맨스의
모든 방면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확대된 지성소인
새 예루살렘이 된다.

하나님의 성소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그 생명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자라
성숙하여
건축되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건축물은
디르사와 예루살렘으로 예표된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건축물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이다.

몸의 건축은
유기적인 것이며,
우리가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또한
그리스도의 아내인데,
궁극적으로
이 유기적인 몸의 건축은
지성소의 완결인
거룩한 도시,
곧 영원 안에서
하나님과
그분께서 구속하신 백성의
상호 거처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성숙하여
술람미가 되는데,
이것은
그녀가
결혼을 위해
그분과 어울리도록
그리스도의
재생산과 복사판이 된 것을
상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도가
그분 자신을
우리와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하는 것,
곧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과 똑같이 되게 하는 것임을
반복해서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을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신성한 계시의 고봉에
어떻게 도달할지를 고려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우리를
긍휼과 존귀와 영광의
그릇이 되게 하시는,
사랑과 능력과 긍휼이신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1일

요 3:29 신부를 얻는 사람은 신랑이지만, …

마 25:6 한밤중에 ‘보십시오, 신랑입니다! 맞으러 나오십시오!’라고 외치는 소리가 나니,

계 19:7 우리가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시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결혼 날이 다가왔고, 그분의 아내도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깊은 사상 안으로 들어가 본다면, 성경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룩한 의미에서 우주적인 한 쌍의 로맨스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한 쌍에서 남자는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신성한 분이시지만 이 우주적인 한 쌍에서 남자가 되기를 갈망하신다. 바로 이 하나님께서 긴 과정을 거치신 후 신랑이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 한 쌍에서 여자는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인 단체적인 한 사람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을 포함한다. 긴 과정을 거친 후에 이 단체적인 사람은 신부인 새 예루살렘이 된다.

이 거룩한 로맨스는 구약 전체에 걸쳐 반복해서 계시된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기록에 이어서 곧바로 우리는 결혼 이야기를 발견한다(창 2:21-25). 이 결혼에서 아담은 남편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고, 하와는 아내인 교회의 예표이다. 에베소서 5장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로 예표된 한 쌍, 즉 그리스도와 교회를 본다. 아담과 하와라는 예표는 이 우주적인 한 쌍의 두 인격이 근원이 같아야 함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하와를 따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다.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온 뼈인 갈빗대 하나로 만들어졌다. 이 우주적인 한 쌍에서 아내는 남편에게서 나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야 한다. 이 한 쌍의 두 인격은 근원이 같아야 한다. 이 두 인격은 또한 하나의 본질을 가져야 한다. 더욱이 이 두 인격은 공통된 한 생명을 가져야 한다. 하와는 아담이 가진 것과 동일한 본질과 생명을 가졌다. 이 한 쌍을 이루는 두 인격은 근원이 하나이고, 하나의 본질을 가졌으며, 동일한 생명을 가졌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하나의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함께 살았다. 하와는 아담 곁에서 아담과 함께 살았고, 아담은 하와 곁에서 하와와 함께 살았다.

온 우주의 비밀은 하나님과 그분께 선택받은 이들이 한 쌍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들인 우리와 하나님은 근원이 하나이고, 한 본질을 갖고 있으며, 한 생명을 갖고 있다. 이제 우리는 또한 한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의해서나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있으며,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서 살고 계신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구약에서 여러 차례 자신을 남편이라고 언급하셨고,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아내라고 언급하셨다. 하나님은 남편이 되기를 갈망하셨고, 자신의 백성을 자신의 아내로 얻기를 갈망하셨다. 여러 차례 신언자들은 남편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했고, 하나님의 아내인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말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항상 우리는 종교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데,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여러분의 아내가 여러분을 위대한 사람이나 거인으로 생각하면서, 여러분을 숭배하듯이 여러분에게 다가와 절하고 무릎을 꿇으며 여러분에게 경배한다고 하자. 여러분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 왜 이러는 거예요? 나에게는 이렇게 경배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요. 나에게는 나를 안아 주고 입맞춤해 주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필요해요. 당신이 나에게 살짝 입맞춤해 준다면 나는 하늘을 날 듯이 행복할 거예요.” 우리 하나님은 분명히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의 창조물인 우리는 마땅히 그분께 경배해야 한다. 성경의 많은 절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호세아서에서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시기를 갈망하신다는 말씀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는가? 고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성전을 건축했고, 제사장 체계와 희생 제물을 갖춘 경배의 체계를 제정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것이 지겹다. 나는 너희의 희생 제물에 싫증이 난다. 나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를 원한다. 나는 너희의 남편이다. 너희는 나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 나는 결혼 생활을 하고 싶다. 나는 쓸쓸하다. 나에게는 너희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내가 선택한 백성인 너희가 나의 아내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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