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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시대의 이상을 가진 시대의 사역자를 긴밀히 따름으로써 시대의 사역 안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네 여정

엘리야는 그의 시대를 위한 이상을 가진 시대의 사역자였다. 매 시대마다 주님께는 성취하기 원하시는 특별한 일들이 있으시다. 주님은 그분 자신이 회복하셔야 할 것들과 이루셔야 할 일들이 있으시다. 한 시대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특정한 회복과 일이 곧 그 시대의 사역이다. 엘리야의 사역은 그가 반대 증거가 되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우상숭배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온 이스라엘이 우상에 경배했을 때, 엘리야는 그들에게 그들이 경배하는 우상들이 거짓 신들이며 오직 여호와만이 참하나님이시라고 말하였다.

엘리야의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의 위임과 메시지를 말해 준다. 그는 이스라엘의 포로 시기 이전의 신언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대표적인 신언자였다. 그는 이기는 이였다.

엘리야 때에 온 이스라엘은 바알에 경배했으며, 오직 엘리야만이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들 중 한 시기, 즉 이스라엘의 황폐함과 어둠이 가장 심각했던 때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신언자였다. 이스라엘 왕국 전체가 우상숭배의 본을 따르고 있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본을 따라야 한다. 바울은 과거에 한때 자신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배설물’(찌꺼기, 쓰레기, 오물, 개가 먹는 것, 똥)로 여겼다고 말했다.

아합은 자기 앞에 있던 모든 왕보다 더 많이 여호와의 진노를 샀다. 결국 하나님은 엘리야를 일으키시어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숭배 때문에 곤경에 처했고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게 하셨다.

신약의 믿는 이들인 우리는 사도 요한이 “어린 자녀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지켜 우상들을 멀리하십시오.”(요일 5:21)라고 한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상은 참되시고 진실하시며 실재이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요 20:28-29)를 대치하거나 그리스도의 대체물인 모든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사람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여호와는 에스겔에게 “사람의 아들아, 이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에 우상들을 두고”라고 말씀하셨다. 무엇이든 우리 안에서 주님보다 더 사랑하며 우리의 생활에서 주님을 대치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에 있는 우상이다.

‘적그리스도(antichrist)’라는 단어에서 ‘적(anti)’이라는 접두사는 헬라어에서 주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그것은 첫째로 ‘반대하는’을 의미하고, 둘째로 ‘대치하는’ 혹은 ‘대신하는’을 의미한다.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한 면에서는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이고, 다른 한 면에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어떤 것, 즉 그리스도를 대치하는 어떤 것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원칙, 곧 기름부음 받으신 분이시자 기름을 바르시는 분 둘 다이신 그리스도를 대치하는 원칙 안에서 생활하는 데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도록 주님께 구해야 한다. 적그리스도의 원칙 안에서 생활하는 것은 ‘적-기름바름(anti-anointing)’의 원칙, 곧 우리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고 일하시고 적시시는 것을 ‘적대하는’ 원칙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사탄의 목표는 수많은 우상과 종교의 배후에 숨어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는 것이다(마 4:8-9). 우상들 배후에는 사탄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 배후에는 악한 영들과 귀신들이 숨어 있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경배를 사탄이 빼앗으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경배자들을 찾으셔야만 한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증거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원칙을 대표한다. 엘리야는 강하고 담대하게 왕과 백성과 바알의 신언자 사백오십 명 앞에 섰다. 교회가 황폐하고 대부분의 믿는 이들이 미지근할 때, 하나님은 이기는 이들을 일으키시어 (‘나의 신실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서 곧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음을 당하던’ 것과 같이) 반대 증거, 곧 자기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주의하는 이들이 되게 하신다.

야고보서 5장 17절과 18절은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가 비가 오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않았으며, 그가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었고 땅이 열매를 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은 직역하면 그가 ‘기도 안에서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엘리야가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기도 안에서 기도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엘리야는 자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환경이나 상황에서 기인한 자신의 느낌, 생각, 의도, 기분, 혹은 어떤 동기에 따라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분께서 자신에게 주신 기도 안에서 기도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온 백성과 바알의 신언자 사백오십 명에게 “여러분은 언제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우왕좌왕할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십시오. 그러나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라고 말했다.

엘리야가 ‘여호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하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들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을 핥아 버렸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에 있을 때 갑자기 여호와께서 지나가셨는데, 그분은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다음에 하나님께서 ‘부드럽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신약 시대 안으로 이끌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천둥소리로 말씀하시지 않고 부드럽고 나지막하게 말씀하신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서 “내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맞춤하지도 않은 이들이다.”라고 말씀하셨다(왕상 19:18, 롬 11:2-5). 이 신실한 이기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숨겨 두신 이들’(시 83:3하)이고, 우리의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사 45:15)이시다.

엘리사가 길갈에서 벧엘까지, 벧엘에서 여리고까지, 여리고에서 요단강까지 엘리야를 따른 것은, 신약 시대의 사역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가 시대의 이상에 따라 시대의 사역자를 내재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따라 중요한 네 장소를 통과해야 한다.

엘리야는 구약 경륜에 따른 구약 시대의 예표이고, 엘리사는 신약 경륜에 따른 신약 시대의 예표이다.

길갈을 통과함으로써 시대가 전환되었다. 길갈은 하나님의 백성이 할례를 받고 그들의 육체를 처리한 곳이다. 길갈은 육체가 심판받는 곳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시어 육체를 심판하게 하시는 곳이다.

육체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소유한 모든 것이다. 육체는 세 부분으로 된 타락한 사람이 극도로 표현된 것이고,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그 영은 삼일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실재화되신 분이시다. 타락한 육체는 가장 강하고도 사악한, 하나님의 원수이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철저히 미워하시는 것이다.

육체를 거절하는 것은 영적인 생활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육체를 거절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모든 이들은 영적인 노정을 시작하지 않은 것이며 영적인 생활을 참되게 알지 못한다.

벧엘을 통과함으로써 시대가 전환되었다. 벧엘은 세상을 버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돌이켜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취한 곳이다. 벧엘은 세상에 대한 승리를 가리킨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곳, 즉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한 곳이다. 벧엘은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곳이자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져서 세상을 이기는 곳이다.

세상에 대한 승리는 휴거되고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한 조건이다. 믿는 이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휴거되기를 참으로 갈망한다면, 반드시 세상을 버리는 대가를 지불하고 완전한 헌신이라는 제단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여리고를 통과함으로써 시대가 전환되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좋은 땅으로 들어갔을 때 반드시 패배시켜야 했던 첫 번째 성으로서,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상징한다.

여호수아기 6장은 ‘저주받은 곳’을 의미하는 여리고를 이기는 것에 대해 말한다. 가나안 족속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 언급된 하늘들의 영역에 있는 악한 영적인 세력들을 상징한다.

사탄은 이 세상의 통치자이고(요 14:30), 악한 영들은 오늘날의 세상을 가리키는 이 어둠의 세상 지배자들이다. 악한 영들은 반역한 천사들로서, 사탄이 하나님을 반역할 때에 사탄을 따랐고, 페르시아의 군주와 헬라의 군주처럼(단 10:20) 지금은 하늘들의 영역에서 세상 나라들을 다스리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한’(엡 6:11, 13) 이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는 몸의 어떤 개별적인 지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개인들로서가 아니라, 몸 안에서 영적 전쟁을 해야 한다.

세상을 이기는 길은 우리의 믿음의 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며,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수행한 결과들을 받으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고후 4:13, 요 17:17, 6:63, 엡 6:17-18). 여리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들의 위치에 견고히 섬으로써 무너졌다. 주님께서 마귀에게 세 번 유혹을 받고 계셨을 때, 주님은 세 번 “성경에 …라고 기록되어 있다.”(마 4:4, 7, 10)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대응하셨다.

악한 영들의 공격을 이기려면, 우리는 반드시 모든 상황과 느낌을 무시하고 우리의 믿음의 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치인 하늘들에 있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하며,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을 우리의 위치보다 더 낮은 그들의 위치로 끌어내려야 한다.

여리고에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멘 것은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께 첫째 위치 곧 으뜸의 위치를 드림으로 그분을 높이는 것임을 상징한다. (일곱 번째로 성을 돌 때) 나팔을 불고 외친 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언약궤)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것을 상징한다.

요단강을 통과함으로써 시대가 바뀌었다. 이 강은 신약의 침례가 시작된 곳으로서, 죽음을 상징한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부활 안에서 생활하고 사역하기 위하여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주님의 침례는 죽음을 상징하고, 주님께서 물에서 나오신 것은 부활을 상징한다. 주님은 부활 능력으로 죽음을 이기셨다. 주님은 침례 받으심으로써, 삼 년 반 후에 실제로 죽고 부활하시기 전에도 부활 안에서 생활하시고 사역을 수행하실 수 있었다.

우리는 거듭날 때 이 부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얻었다. 사람-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불법자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음을 당하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에 붙잡혀 계실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기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자아를 부인함으로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 됨으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한 것이다.

휴거되기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반드시 어떻게 요단강을 건너고 죽음을 이기는지 배워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의 환경 안에 존재하는 죽음의 능력을 어떻게 대항하는지 배워야 하며, 모든 일에서 부활 능력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표현함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부활하신 주님과 합해졌다는 것을 보여 주고 나타내야 한다.

십자가의 생활은 부활 능력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며 부활의 풍성으로 격려받는다. 아가의 결론의 말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추구하는 이가 사랑하는 분께 부활 능력(가젤과 젊은 수사슴) 안에서 속히 돌아오셔서 온 땅을 가득 채울(아 8:13-14, 계 11:15, 단 2:35) 그분의 달콤하고 아름다운 왕국(향기 그윽한 산들)을 세우시기를 기도하는 기도이다.

우리가 엘리야의 휴거와 성령의 능력을 지닌 영의 두 배의 몫을 받기 원한다면(왕하 2:9-15), 반드시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강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바뀌려면, 반드시 우리의 육체를 처리하고, 세상을 버리고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사탄을 패배시키고,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 안에 있는 생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현시대는 이기는 이들의 시대이며, 현시대의 사역자들을 통한 현시대의 사역은 이기는 이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부름의 나팔을 부는 것이다. (이기는 이들은 영원의 이상을 보고, 영원의 삶을 살며, 영원의 일을 하는 이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를 보고 새 예루살렘을 살아 내고 이루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건축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신부를 준비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왕국이 출현하는 것을 위해 있다. 이 마지막 날들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이기는 이들 곧 활력화된 이들이 되기로 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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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replies on “시대의 이상을 가진 시대의 사역자를 긴밀히 따름으로써 시대의 사역 안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네 여정”

신언노트2, 2022 08 14

그 시대의 이상을 가진
그 시대의 사역자를
가깝게 따름에 의해
그 시대의 사역 안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네 여정들

매 시대마다
주님께는
성취하기 원하시는
특별한 일들이 있으시다.
주님은
그분 자신이
회복하셔야 할 것들과
이루셔야 할 일들이 있으시다.
한 시대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특정한 회복과 일이
곧 그 시대의 사역이다.

어떤 사람이
그 시대의 사역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지나간 사역을
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는
또 다른 일이다.
그러나 사람이
지나간 사역을
한쪽에 제쳐 둘 수
있는가 없는가는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엘리야의 사역은
반대 증거였다.
온 이스라엘이
우상에 경배했을 때,
엘리야는
그들에게
그들이 경배하는 우상들이
거짓 신들이며
오직 여호와만이
참하나님이시라고
말하였다.
반대 증거인 엘리야는
그들에게,
우상숭배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임을
말해 주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포로 시기 이전의
신언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대표적인
신언자였고,
이기는 이였다.
사람들이
우상에 절하였을 때,
그는
굳게 서서
우상에 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반대 증거였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왕의 인도 아래서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일으키시어
왕과 백성 앞에
반대 증거로서
서게 하셨다.
그때 백성은
바알에 절하였지만,
엘리야는
바알에 절하지 말고
여호와께 경배하라고
백성에게 말했다.
백성이
모든 것이
평안하고 좋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엘리야는
삼 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왕과 백성 앞에
살아 있는 증거였고,
그의 행동은
백성의 행동과
반대되었다.

아합 시대에
바알의 신언자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신언자라고
칭했다.
비록 그 당시에
바알에 절하지 않은
칠천 명의
감추어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엘리야만이
공개적으로
반대 증거를 지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홀로
왕과 백성 앞에,
그리고 바알을 섬기는
사백오십 명의 신언자들 앞에
아무 두려움 없이
서 있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증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원칙을 대표한다.
엘리야가
서서 증언했을 때,
온 땅이
그를 대적했다.
엘리야만이
하나님을 위해
증언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엘리야는
특별했다.
역대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어떤 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이기는 이들이었다.

구약에 있는
이러한 문제는
신약에 있는
교회의 문제를
예표한다.
교회가
황폐하고
대부분의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증거를 버릴 때,
하나님은
이기는 이들을 일으키시어
반대 증거가 되게 하신다.
오늘날 교회에는
이러한 원칙에 따른
이기는 이들,
즉 자기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이들이
필요하다.
모든 이기는 이들과
하나님을 위한 증인들은
자기 혼자만 서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
하나님은
바알에 절하지 않은
칠천 명을 숨겨 두셨지만,
엘리야의 느낌에는
자기 혼자만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이기는 이가 되려면
결과를 두려워하거나
과거를 붙들거나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주의해서는
안 된다.
그는
하나님의 뜻만을
주의해야 한다.
엘리야는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반대 증거로서 서서
하나님의 증거를 지켰고,
바알을 따르지 말고
여호와를 따라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기간에
그가 대표한
이기는 이들의 원칙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증거를 버렸을 때
일어나
반대 증거가 되는 것이다.

엘리야는
일어나
반대 증거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온 이스라엘이
바알에 경배했으며,
오직 엘리야만이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다.
그는
어둠과 황폐함이
가장 심각했던 때에
일으켜진 신언자였다.
그때 아합왕과 이세벨은
우상들을 숭배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신언자들을 죽였다.
왕국 전체가
우상숭배의 본을
따르고 있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일으키시어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숭배 때문에
곤경에 처했고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게 하셨다.
엘리야는
그들이 믿지 않으면
그가 여호와께 구할 것이고,
삼 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강하고 담대했다.
그는
바알의 신언자 사백오십 명과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과 맞서서
나아갔다.

황폐한 때에
반대 증거로서 서려면, 반드시
엘리야의 영,
엘리야의 용기,
엘리야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황폐한 시대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엘리야와 같은
이기는 이들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우상을 따라가고 있을 때,
일어서서
모든 사람의 잘못을
공공연히 책망할 수 있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여전히
황폐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엘리야같이 일어나
반대 증거가 되고,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으며,
밖의 반대의 정도에 개의치 않고,
수많은 반대자를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결국 모든 신언자가 죽었지만
엘리야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살아서 휴거되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우리가 죽기를 원하겠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휴거시키기 원하신다.
이것이 엘리야의 증거였다.

사람 안에는
죄를 짓는 요소와
범죄에 대한 욕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탄이다.
성경에서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은
바알세불이다.
바알세불은
‘파리들의 주’를 의미하는
이름에서 온
‘똥 더미의 주’를 의미한다.
똥 더미의 주로서
사탄이
전문적으로 하는 일은
파리들을 이끌어서
똥을 먹고 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또한
파리들의 주이다.
그는 파리들의 주이기 때문에,
모든 죄인들은
사탄을 따라
‘똥을 먹고 사는’
파리들과 같다.

이 시대에
사탄은
이 세상의 통치자이다.
사탄의 평생의 목표는
수많은 우상과 종교의
배후에 숨어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는 것이다.
많은 우상들이
영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탄이
그것들 뒤에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경배를 빼앗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4장 23절은
“아버지는
이렇게 경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경배를
사탄이 빼앗으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경배자들을
찾으셔야만 한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 언급된
‘간절히 기도하니’는
직역하면 ‘기도 안에서 기도하니’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엘리야가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기도 안에서 기도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는
주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분께서 자신에게 주신
기도 안에서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밖으로 나가
산 위, 여호와의 앞에 서라고
명령하셨다.
엘리야는
위임의 말씀을 기다리면서,
그것이 틀림없이
지진이나 큰 폭풍이나 불 가운데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여호와께서는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엘리야가
완전히 낙심했을 때,
부드럽고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부드럽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신약 시대 안으로
이끌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늘날 하나님은
천둥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부드럽고도 나지막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위협적으로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제 저 혼자만 남았는데”
(왕상 19:14)
라고 말씀드렸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 같지만,
은밀하게 그분을 위하여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숨겨진 일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일은 항상
숨겨져 있다.
위대한 감동이나
위대한 이상이나
위대한 광경을
계속 바라지 말라.
이러한 것들이 반드시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가장 참된 일은
작은 음성이나
작은 느낌이나
작은 생각처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그분의 숨겨진 일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러한 하나님의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의 움직임처럼
생각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받은
어떤 인상처럼 생각된다.
게다가 그것은 종종
마치 없는 것처럼
매우 희미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귀하고 참된 일이다.
때로 우리 속 가장 깊은 부분에
“이것은
너의 육체이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았다.
이것은
주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작은 생각이나 느낌이나
음성이나 말이 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하고도 위대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지 않는
날이나 순간은 없다.
우리는
집회에 오지 않거나
주님을 가장 언짢으시게 하는
일을 하는 정도로
냉담해지거나
뒤로 물러갈 수 있지만,
이러한 때에도
이 실재는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이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분은
“됐다.
더 이상 하지 마라.
여기에서 멈추고
회개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우리가
두 달 동안
집회에 가지 않았을 때,
우리 안에서
아주 작은 음성이
“집회에 가라.
너는 얼마나 더
기다릴 작정이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우리는
그러한 음성을 의심하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것은
내 속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진실한 말씀이며,
그분의 가장 소중한 일이다.

엘리야는
구약 경륜에 따른
구약 시대의 예표이고,
엘리사는
신약 경륜에 따른
신약 시대의 예표이다.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강이라는
네 장소를 통과함으로써
시대가 전환되었다.

길갈은
하나님의 백성이
할례를 받고
그들의 육체를
처리한 곳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가장 강하고 악한 대적이
우리의 육체임을
계시한다.
육체는
하나님께서
철저하고도 절대적으로
미워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체를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범법은
용납하실 수 있지만,
육체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세 번째 타락 시에
인류 전체는
육체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그분의 종 노아에게
온 세대를 진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열왕기하 2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에는
네 단계의 노정,
즉 길갈에서 떠남,
벧엘에 이름,
여리고에 이름,
요단강을 건넘이 있다.
엘리야가
곧 하늘로 휴거되고
엘리사가
두 배 몫의 성령을 받으려고 하기 전에,
그 둘은 바로
이 네 장소를 거쳤다.
그러므로 여기의 중요한 공과는,
엘리야처럼
하늘로 휴거되거나
엘리사처럼
성령을 겉옷으로 입으려면,
이는
성령께서
그가 입은 겉옷처럼
그에게 임하셨음을
가리키는데,
이 네 단계의 노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휴거되든지
성령의 능력을 얻든지 하려면,
우리 모두는
길갈에서 떠나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

길갈은
‘굴리다’라는 의미이다.
여호수아기 5장
2절부터 9절까지를 읽으면,
이집트에서 나온 세대의
이스라엘 사람은
할례를 받았지만,
광야에서 태어난
두 번째 세대는
할례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그들은 막
가나안에 들어가서
유업을 얻으려던 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옛 육체를 굴려 보내고
이집트에서의 수치를 굴려 보냄으로써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할례의 의미는 바로
육체를 벗어 버리는 것이다.

성경에서 육체는
하나님께서
유죄판결 하신 것이며,
매우 싫어하시는 것이다.
육체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소유한
모든 것이다.
‘육체로 난 것은 육체이다’(요 3:6).
육체 안에는
죄와 더러움과 부패뿐 아니라
타고난
선함과 친절과 재능과
열정과 지혜와 능력도 있다.
믿는 이들이
일생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공과는 바로
자신의 육체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는 이가
여러 가지 실패와 폭로를
겪게 하심으로
비로소 육체를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육체는
벗어 버려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뜻이 같음을
표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잘라 버리라고 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잘라 버려야 한다.
어떠하든지 우리는
반드시 길갈에서 출발해야 하고,
반드시 육체를 거절해야 한다.
이것은
얼마나 잘라 버렸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육체를 심판했는가의 문제이다.
오늘날의 잘못은 바로
사람들이
어떻게 열심을 내고
선을 행하며 일하는가만
주목할 뿐
육체를 거절하는 것은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심판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육체를 심판하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배운 것에 따르면,
거듭남, 거룩하게 됨,
온전하게 됨, 죄를 이김,
능력과 같은 것들은 모두
영적인 생활의
가장 높은 표현이 아니다.
육체를 거절하는 것이
합당한 영적인 노정이며,
또한 영적인 생활의 목표이다.
무릇 길갈에서 떠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영적인 노정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이다.
육체를 거절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
참된 영적 생활인지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열심이 있을 수 있고
일할 수 있으며
기쁠 수도 있지만,
참된 영적 생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벧엘은
세상을 버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돌이켜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취한 곳이다.
여리고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좋은 땅으로 들어갔을 때
반드시 패배시켜야 했던
첫 번째 성으로서,
하나님의 원수 가운데 우두머리인
사탄을 상징한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곳이다.
제단은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한 곳이며,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곳이자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지는 곳이다.

길갈은
육체에 대한 승리를 가리키고,
벧엘은
세상에 대한 승리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집트는
세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승리는
휴거되고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세상을 이기지 않았다면,
또한 세상의
사람과 일과 사물이
우리 마음 안에서
지위를 잃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믿는 이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휴거되기를
참으로 갈망한다면,
반드시 주님께서
그분의 영을
그에게 주실 수 있는
곳에 이르도록
대가를 지불하고
주님의 길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세상을 버리고
완전한 헌신이라는
제단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시련이 없지만,
하나님께 복종하는 길에는
시련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휴거되고
능력을 얻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비록 우리가
이집트에서
시련은 피할 수 있겠지만,
이집트에는
제단이 없다.

여호수아기 6장 26절은
“이 성 여리고를
다시 건축하려고
일어나는 사람은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이름은
저주받음을 뜻한다.
이 부분의 역사는
이스라엘 사람이
처음으로
가나안에서
원수를 이긴 것에 대해
말한다.
가나안 족속은
마귀에게 속한
악한 영들을 상징한다.
악한 영들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 언급된
하늘들의 영역에 있는
악한 영적인 세력들이다.

우리가
육체를 이기고
세상을 이겼다면,
이제는
원수를 이겨야 한다.
원수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며,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수행한
결과들을 받으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리고의 사람들은
그들이
한 도시를 가졌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리고의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았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말한다.
여리고의 사람들은
도시에 의해 둘러싸인
모든 곳들이
그들에게 속했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들의 발바닥들이
그 위에 밟을
모든 곳들을
우리에게 약속하셨다고
말한다.

실지적인 영적 싸움은
우리와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 사이의
싸움이다.
모든 성숙한 믿는 이들은
이 싸움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땅에서 항상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는다.
어떤 이는
환경 안에서,
어떤 이는
자신의 몸 안에서,
어떤 이는
생각 안에서,
어떤 이는
감정 안에서,
어떤 이는
영 안에서
공격을 받는다.

여리고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들의 위치에
견고히 섬으로써
무너졌다.
악한 영들의
공격을 이기려면,
우리는 먼저 반드시
모든 상황과 느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럴 때 원수는
패배당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치인
하늘들에 있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하며,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을
우리의 위치보다 더 낮은
그들의 위치로
끌어내려야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위치를 취하는
믿음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원수를
이길 수 없다.

요단강은
신약의 침례가 시작된 곳으로서,
죽음을 상징한다.
엘리야는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자신의 겉옷으로
물을 쳤는데,
겉옷은
부어지신 영
곧 능력의 영의
예표이다.
능력의 영께서
죽음의 강을 처리하심으로써
엘리야와 엘리사가
건널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바뀌려면,
반드시 우리의 육체를 처리하고,
세상을 버리고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사탄을 패배시키고,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요단강은
죽음의 능력을 상징한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곧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휴거되는 것이다.

사탄의 가장 큰 능력은
죽음이다.
주님은 마치
원수에게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내게 해 보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사탄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부활이었다.
사탄은
주님을 완전히
죽음에 넣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이 만지지 못하고
잡아 두지 못하는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주님은
마른 땅을 걸어서
건너셨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주님의 부활 외에는 없다.
우리가 거듭날 때 얻은 생명이
바로 이 부활 생명이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사람의 원함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람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큰 능력을
원하지 않는다.
바울은 거듭
부활의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힘을 다해
그것을 추구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주님과 함께 부활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주님의 부활의
큰 능력인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죽음을 이기는
체험을 하지 못한다.

휴거가 가까운 이때에,
믿는 이가 이겨야 할
마지막 원수는 바로
죽음이다.
신체의 죽음이든,
생각의 죽음이든,
혹은 영적인 생활에서의 죽음이든
우리는
모든 죽음을
이겨야 한다.
지금의 세상에는 참으로
죽음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믿는 이들은
휴거되기를 준비하는 동안,
반드시 어떻게
요단강을 건너고
죽음을 이기는지
배워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그들 안에
그리고 그들의 환경 안에
존재하는
죽음의 능력을
어떻게 대항하는지
배워야 하고,
모든 일에서
부활 능력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신 분이심을
더욱더 증명해야 하고,
동시에
그분과 합한 우리 또한
이미 부활한 이들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가
엘리야의 휴거를
얻으려고 하고,
엘리사의 겉옷인
성령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길갈에서 시작하여
요단강을 건너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성령은
부활 생명이
충만한 사람에게만
임하실 수 있다.
우리는 그날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반드시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강을
통과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휴거되려면
마땅히 걸어야 할 길,
곧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이 길을 계속 걸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현시대는
이기는 이들의 시대이며,
현시대의 사역자들을 통한
현시대의 사역은
이기는 이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부름의
나팔을 부는 것이다.
(이기는 이들은
영원의 이상을 보고,
영원의 삶을 살며,
영원의 일을 하는 이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를 보고
새 예루살렘을
살아 내며
이루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건축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신부를
준비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왕국이
출현하는 것을 위해 있다.
이 마지막 날들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이기는 이들
곧 활력화된 이들이 되기로
결심해야 한다.

6일

왕하 2:8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만 다음 그것으로 강물을 치자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고, 두 사람은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갔다.

왕하 2:14 엘리사는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을 가지고 … 강물을 치자,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고, 엘리사는 건너갔다.

요단강은 신약의 침례가 시작된 곳으로서, 죽음을 상징한다. 엘리야는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자신의 겉옷으로 물을 쳤는데, 겉옷은 부어지신 영 곧 능력의 영의 예표이다. 능력의 영께서 죽음의 강을 처리하심으로써 엘리야와 엘리사가 건널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바뀌려면, 반드시 우리의 육체를 처리하고, 세상을 버리고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사탄을 패배시키고,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요단강은 죽음의 능력을 상징한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곧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휴거되는 것이다.

요단강에서의 주님의 침례는 죽음을 상징하고, 그분께서 물에서 나오신 것은 부활을 상징한다. 주님은 부활 능력으로 죽음을 이기셨다. 사탄의 가장 큰 능력은 죽음이다. 주님은 마치 원수에게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내게 해 보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사탄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부활이었다. 사탄은 주님을 완전히 죽음에 넣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이 만지지 못하고 잡아 두지 못하는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주님은 마른 땅을 걸어서 건너셨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주님의 부활 외에는 없다. 우리가 거듭날 때 얻은 생명이 바로 이 부활 생명이다.

홍해를 건너는 것과 요단강을 건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홍해는 시간이 긴박하여 건너지 않을 수 없어서 건넜다. 원수가 몰아붙이기 때문에 건너가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사람의 원함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람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큰 능력을 원하지 않는다. 바울은 거듭 부활의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힘을 다해 그것을 추구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주님과 함께 부활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주님의 부활의 큰 능력인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죽음을 이기는 체험을 하지 못한다.

휴거가 가까운 이때에, 믿는 이가 이겨야 할 마지막 원수는 바로 죽음이다. 신체의 죽음이든, 생각의 죽음이든, 혹은 영적인 생활에서의 죽음이든 우리는 모든 죽음을 이겨야 한다. 지금의 세상에는 참으로 죽음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믿는 이들은 휴거되기를 준비하는 동안, 반드시 어떻게 요단강을 건너고 죽음을 이기는지 배워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그들 안에 그리고 그들의 환경 안에 존재하는 죽음의 능력을 어떻게 대항하는지 배워야 하고, 모든 일에서 부활 능력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신 분이심을 더욱더 증명해야 하고, 동시에 그분과 합한 우리 또한 이미 부활한 이들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가 엘리야의 휴거를 얻으려고 하고, 엘리사의 겉옷인 성령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길갈에서 시작하여 요단강을 건너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성령은 부활 생명이 충만한 사람에게만 임하실 수 있다. 우리는 그날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반드시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강을 통과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휴거되려면 마땅히 걸어야 할 길, 곧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이 길을 계속 걸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5일

왕하 2: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나를 멀리 벧엘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니 그대는 여기에 머무십시오.” 그러자 엘리사가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신 것과 스승님의 혼이 살아 있는 것을 두고 맹세하는데, 저는 스승님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벧엘로 내려갔다.

창 12:8 그는 그곳을 떠나 벧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옮겨 가서, …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벧엘은 세상을 버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돌이켜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취한 곳이다(창 12:8). 여리고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좋은 땅으로 들어갔을 때 반드시 패배시켜야 했던 첫 번째 성으로서, 하나님의 원수 가운데 우두머리인 사탄을 상징한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곳이다(창 12:8). 제단은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한 곳이며,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곳이자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지는 곳이다.

길갈은 육체에 대한 승리를 가리키고, 벧엘은 세상에 대한 승리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집트는 세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승리는 휴거되고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세상을 이기지 않았다면, 또한 세상의 사람과 일과 사물이 우리 마음 안에서 지위를 잃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믿는 이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휴거되기를 참으로 갈망한다면, 반드시 주님께서 그분의 영을 그에게 주실 수 있는 곳에 이르도록 대가를 지불하고 주님의 길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세상을 버리고 완전한 헌신이라는 제단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시련이 없지만, 하나님께 복종하는 길에는 시련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휴거되고 능력을 얻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비록 우리가 이집트에서 시련은 피할 수 있겠지만, 이집트에는 제단이 없다.

여호수아기 6장 26절은 “이 성 여리고를 다시 건축하려고 일어나는 사람은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이름은 저주받음을 뜻한다. 이 부분의 역사는 이스라엘 사람이 처음으로 가나안에서 원수를 이긴 것에 대해 말한다. 가나안 족속은 마귀에게 속한 악한 영들을 상징한다. 악한 영들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 언급된 하늘들의 영역에 있는 악한 영적인 세력들이다.

우리가 육체를 이기고 세상을 이겼다면, 이제는 원수를 이겨야 한다. 원수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며,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수행한 결과들을 받으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리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성(城)이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말한다. 여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성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말한다. 여리고 사람들은 성 주변의 모든 곳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발로 밟는 땅을 다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다고 말한다.

실지적인 영적 싸움은 우리와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 사이의 싸움이다. 모든 성숙한 믿는 이들은 이 싸움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땅에서 항상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는다. 어떤 이는 환경 안에서, 어떤 이는 자신의 몸 안에서, 어떤 이는 생각 안에서, 어떤 이는 감정 안에서, 어떤 이는 영 안에서 공격을 받는다.

여리고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들의 위치에 견고히 섬으로써 무너졌다. 악한 영들의 공격을 이기려면, 우리는 먼저 반드시 모든 상황과 느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럴 때 원수는 패배당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치인 하늘들에 있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하며,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을 우리의 위치보다 더 낮은 그들의 위치로 끌어내려야 한다. …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위치를 취하는 믿음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원수를 이길 수 없다.

4일

왕하 2:1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데려가시려고 할 무렵, 엘리야는 엘리사와 함께 길갈을 떠났다.

빌 3:3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엘리야는 구약 경륜에 따른 구약 시대의 예표이고, 엘리사는 신약 경륜에 따른 신약 시대의 예표이다.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강(왕하 2:1-8)이라는 네 장소를 통과함으로써 시대가 전환되었다. 길갈은 하나님의 백성이 할례를 받고 그들의 육체를 처리한 곳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가장 강하고 악한 대적이 우리의 육체임을 계시한다. 육체는 하나님께서 철저하고도 절대적으로 미워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체를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범법은 용납하실 수 있지만, 육체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세 번째 타락 시에 인류 전체는 육체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그분의 종 노아에게 온 세대를 진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열왕기하 2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에는 네 단계의 노정, 즉 길갈에서 떠남, 벧엘에 이름, 여리고에 이름, 요단강을 건넘이 있다. 엘리야가 곧 하늘로 휴거되고 엘리사가 두 배 몫의 성령을 받으려고 하기 전에, 그 둘은 바로 이 네 장소를 거쳤다. 그러므로 여기의 중요한 공과는, (1) 엘리야처럼 하늘로 휴거되거나 (2) 엘리사처럼 성령을 겉옷으로 입으려면(성령께서 그가 입은 겉옷처럼 그에게 임하셨음을 가리킴), 이 네 단계의 노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휴거되든지 성령의 능력을 얻든지 하려면, 우리 모두는 길갈에서 떠나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

길갈은 ‘굴리다’라는 의미이다. 여호수아기 5장 2절부터 9절까지를 읽으면, 이집트에서 나온 세대의 이스라엘 사람은 할례를 받았지만, 광야에서 태어난 두 번째 세대는 할례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그들은 막 가나안에 들어가서 유업을 얻으려던 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옛 육체를 굴려 보내고 이집트에서의 수치를 굴려 보냄으로써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할례의 의미는 바로 육체를 벗어 버리는 것이다.

성경에서 육체는 하나님께서 유죄판결 하신 것이며, 매우 싫어하시는 것이다. 육체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소유한 모든 것이다. ‘육체로 난 것은 육체이고’(요 3:6), 육체 안에는 죄와 더러움과 부패뿐 아니라 타고난 선함과 친절과 재능과 열정과 지혜와 능력도 있다. 믿는 이들이 일생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공과는 바로 자신의 육체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는 이가 여러 가지 실패와 폭로를 겪게 하심으로 비로소 육체를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육체는 벗어 버려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뜻이 같음을 표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잘라 버리라고 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잘라 버려야 한다. 어떠하든지 우리는 반드시 길갈에서 출발해야 하고, 반드시 육체를 거절해야 한다. 이것은 얼마나 잘라 버렸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육체를 심판했는가의 문제이다. 오늘날의 잘못은 바로 사람들이 어떻게 열심을 내고 선을 행하며 일하는가만 주목할 뿐 육체를 거절하는 것은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심판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육체를 심판하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배운 것에 따르면, 거듭남, 거룩하게 됨, 온전하게 됨, 죄를 이김, 능력과 같은 것들은 모두 영적인 생활의 가장 높은 표현이 아니다. 육체를 거절하는 것이 합당한 영적인 노정이며, 또한 영적인 생활의 목표이다. 무릇 길갈에서 떠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영적인 노정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이다. 육체를 거절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 참된 영적 생활인지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열심이 있을 수 있고 일할 수 있으며 기쁠 수도 있지만, 참된 영적 생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3일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가 비가 오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않았으며,

왕상 19:11-12 … 여호와는 그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 여호와는 그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 여호와는 그 불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다음에 부드럽고 나지막한 음성이 있었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 언급된
‘간절히 기도하니’는
직역하면 ‘기도 안에서 기도하니’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엘리야가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기도 안에서 기도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엘리야는
자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환경이나 상황에서 기인한
자신의 느낌, 생각, 의도, 기분,
혹은 어떤 동기에 따라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분께서 자신에게 주신
기도 안에서 기도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약 5:17)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시험을 견디지 못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은 분명
그와 함께 계셨다.
그러나 그분께서
분명한 임재를
허락하지 않으셨을 때,
엘리야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낙심하여
동굴로 들어갔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어려움을 알고 계셨고,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했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밖으로 나가
산 위, 여호와의 앞에 서라고
명령하셨다
(왕상 19:11상).
엘리야는
위임의 말씀을 기다리면서,
그것이 틀림없이
지진이나 큰 폭풍이나 불 가운데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여호와는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11중-12상절).
엘리야가
완전히 낙심했을 때,
부드럽고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12하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부드럽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신약 시대 안으로
이끌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늘날 하나님은
천둥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부드럽고도 나지막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위협적으로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제 저 혼자만 남았는데”
(왕상 19:14)
라고 말씀드렸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 같지만,
은밀하게 그분을 위하여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숨겨진 일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일은 항상
숨겨져 있다.
위대한 감동이나
위대한 이상이나
위대한 광경을
계속 바라지 말라.
이러한 것들이 반드시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가장 참된 일은
작은 음성이나
작은 느낌이나
작은 생각처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그분의 숨겨진 일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러한 하나님의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의 움직임처럼
생각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받은
어떤 인상처럼 생각된다.
게다가 그것은 종종
마치 없는 것처럼
매우 희미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귀하고 참된 일이다.
때로 우리 속 가장 깊은 부분에
“이것은
너의 육체이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았다.
이것은
주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작은 생각이나 느낌이나
음성이나 말이 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하고도 위대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지 않는
날이나 순간은 없다.

우리는
집회에 오지 않거나
주님을 가장 언짢으시게 하는
일을 하는 정도로
냉담해지거나
뒤로 물러갈 수 있지만,
이러한 때에도
이 실재는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이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분은
“됐다.
더 이상 하지 마라.
여기에서 멈추고
회개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우리가
두 달 동안
집회에 가지 않았을 때,
우리 안에서
아주 작은 음성이
“집회에 가라.
너는 얼마나 더
기다릴 작정이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우리는
그러한 음성을 의심하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것은
내 속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진실한 말씀이며,
그분의 가장 소중한 일이다.

2일

왕상 18:21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두 의견 사이에서 우왕좌왕할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십시오. 그러나 바알이 하나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

왕상 18:37 오, 여호와님! 응답하여 주십시오. 응답하시어 이 백성이 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것과 여호와께서 자신들의 마음을 다시 돌이키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엘리야는 일어나 반대 증거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온 이스라엘이 바알에 경배했으며, 오직 엘리야만이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다. 그는 어둠과 황폐함이 가장 심각했던 때에 일으켜진 신언자였다. 그때 아합왕과 이세벨은 우상들을 숭배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신언자들을 죽였다. 왕국 전체가 우상숭배의 본을 따르고 있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일으키시어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숭배 때문에 곤경에 처했고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게 하셨다(왕상 18:18, 37). 엘리야는 그들이 믿지 않으면 그가 여호와께 구할 것이고, 삼 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17:1, 18:1).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강하고 담대했다. 그는 바알의 신언자 사백오십 명과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과 맞서서 나아갔다.

황폐한 때에 반대 증거로서 서려면, 반드시 엘리야의 영, 엘리야의 용기, 엘리야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황폐한 시대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엘리야와 같은 이기는 이들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우상을 따라가고 있을 때, 일어서서 모든 사람의 잘못을 공공연히 책망할 수 있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여전히 황폐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엘리야같이 일어나 반대 증거가 되고,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으며, 밖의 반대의 정도에 개의치 않고, 수많은 반대자를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결국 모든 신언자가 죽었지만 엘리야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살아서 휴거되었다(왕하 2:1).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우리가 죽기를 원하겠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휴거시키기 원하신다. 이것이 엘리야의 증거였다.

사람 안에는 죄를 짓는 요소와 범죄에 대한 욕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탄이다. 성경에서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은 바알세불이다. 바알세불은 ‘파리들의 주’를 의미하는 이름에서 온 ‘똥 더미의 주’를 의미한다. 똥 더미의 주로서 사탄이 전문적으로 하는 일은 파리들을 이끌어서 똥을 먹고 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또한 파리들의 주이다. 그는 파리들의 주이기 때문에, 모든 죄인들은 사탄을 따라 ‘똥을 먹고 사는’ 파리들과 같다.

이 시대에 사탄은 이 세상의 통치자이다. 사탄의 평생의 목표는 수많은 우상과 종교의 배후에 숨어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는 것이다. 많은 우상들이 영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탄이 그것들 뒤에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경배를 빼앗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4장 23절은 “아버지는 이렇게 경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경배를 사탄이 빼앗으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경배자들을 찾으셔야만 한다.

신언노트, 2022 08 14

매 시대마다
주님께는
성취하기 원하시는
특별한 일들이 있으시다.
주님은
그분 자신이
회복하셔야 할 것들과
이루셔야 할 일들이 있으시다.
한 시대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특정한 회복과 일이
곧 그 시대의 사역이다.

어떤 사람이
그 시대의 사역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지나간 사역을
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는
또 다른 일이다.
그러나 사람이
지나간 사역을
한쪽에 제쳐 둘 수
있는가 없는가는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엘리야의 사역은
반대 증거였다.
온 이스라엘이
우상에 경배했을 때,
엘리야는
그들에게
그들이 경배하는 우상들이
거짓 신들이며
오직 여호와만이
참하나님이시라고
말하였다.
반대 증거인 엘리야는
그들에게,
우상숭배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임을
말해 주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포로 시기 이전의
신언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대표적인
신언자였고,
이기는 이였다.
사람들이
우상에 절하였을 때,
그는
굳게 서서
우상에 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반대 증거였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왕의 인도 아래서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일으키시어
왕과 백성 앞에
반대 증거로서
서게 하셨다.
그때 백성은
바알에 절하였지만,
엘리야는
바알에 절하지 말고
여호와께 경배하라고
백성에게 말했다.
백성이
모든 것이
평안하고 좋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엘리야는
삼 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왕과 백성 앞에
살아 있는 증거였고,
그의 행동은
백성의 행동과
반대되었다.

아합 시대에
바알의 신언자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신언자라고
칭했다.
비록 그 당시에
바알에 절하지 않은
칠천 명의
감추어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엘리야만이
공개적으로
반대 증거를 지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홀로
왕과 백성 앞에,
그리고 바알을 섬기는
사백오십 명의 신언자들 앞에
아무 두려움 없이
서 있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증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원칙을 대표한다.
엘리야가
서서 증언했을 때,
온 땅이
그를 대적했다.
엘리야만이
하나님을 위해
증언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엘리야는
특별했다.
역대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어떤 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이기는 이들이었다.

구약에 있는
이러한 문제는
신약에 있는
교회의 문제를
예표한다.
교회가
황폐하고
대부분의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증거를 버릴 때,
하나님은
이기는 이들을 일으키시어
반대 증거가 되게 하신다.
오늘날 교회에는
이러한 원칙에 따른
이기는 이들,
즉 자기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이들이
필요하다.
모든 이기는 이들과
하나님을 위한 증인들은
자기 혼자만 서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
하나님은
바알에 절하지 않은
칠천 명을 숨겨 두셨지만,
엘리야의 느낌에는
자기 혼자만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이기는 이가 되려면
결과를 두려워하거나
과거를 붙들거나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주의해서는
안 된다.
그는
하나님의 뜻만을
주의해야 한다.
엘리야는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반대 증거로서 서서
하나님의 증거를 지켰고,
바알을 따르지 말고
여호와를 따라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기간에
그가 대표한
이기는 이들의 원칙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증거를 버렸을 때
일어나
반대 증거가 되는 것이다.

엘리야는
일어나
반대 증거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온 이스라엘이
바알에 경배했으며,
오직 엘리야만이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다.
그는
어둠과 황폐함이
가장 심각했던 때에
일으켜진 신언자였다.
그때 아합왕과 이세벨은
우상들을 숭배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신언자들을 죽였다.
왕국 전체가
우상숭배의 본을
따르고 있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일으키시어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숭배 때문에
곤경에 처했고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게 하셨다.
엘리야는
그들이 믿지 않으면
그가 여호와께 구할 것이고,
삼 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강하고 담대했다.
그는
바알의 신언자 사백오십 명과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과 맞서서
나아갔다.

황폐한 때에
반대 증거로서 서려면, 반드시
엘리야의 영,
엘리야의 용기,
엘리야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황폐한 시대마다
앞으로 나아가는
엘리야와 같은
이기는 이들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우상을 따라가고 있을 때,
일어서서
모든 사람의 잘못을
공공연히 책망할 수 있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여전히
황폐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엘리야같이 일어나
반대 증거가 되고,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으며,
밖의 반대의 정도에 개의치 않고,
수많은 반대자를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결국 모든 신언자가 죽었지만
엘리야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살아서 휴거되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우리가 죽기를 원하겠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휴거시키기 원하신다.
이것이 엘리야의 증거였다.

사람 안에는
죄를 짓는 요소와
범죄에 대한 욕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탄이다.
성경에서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은
바알세불이다.
바알세불은
‘파리들의 주’를 의미하는
이름에서 온
‘똥 더미의 주’를 의미한다.
똥 더미의 주로서
사탄이
전문적으로 하는 일은
파리들을 이끌어서
똥을 먹고 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또한
파리들의 주이다.
그는 파리들의 주이기 때문에,
모든 죄인들은
사탄을 따라
‘똥을 먹고 사는’
파리들과 같다.

이 시대에
사탄은
이 세상의 통치자이다.
사탄의 평생의 목표는
수많은 우상과 종교의
배후에 숨어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는 것이다.
많은 우상들이
영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탄이
그것들 뒤에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경배를 빼앗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4장 23절은
“아버지는
이렇게 경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경배를
사탄이 빼앗으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경배자들을
찾으셔야만 한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 언급된
‘간절히 기도하니’는
직역하면 ‘기도 안에서 기도하니’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엘리야가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기도 안에서 기도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엘리야는
자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환경이나 상황에서 기인한
자신의 느낌, 생각, 의도, 기분,
혹은 어떤 동기에 따라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분께서 자신에게 주신
기도 안에서 기도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약 5:17)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시험을 견디지 못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은 분명
그와 함께 계셨다.
그러나 그분께서
분명한 임재를
허락하지 않으셨을 때,
엘리야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낙심하여
동굴로 들어갔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어려움을 알고 계셨고,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했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밖으로 나가
산 위, 여호와의 앞에 서라고
명령하셨다
(왕상 19:11상).
엘리야는
위임의 말씀을 기다리면서,
그것이 틀림없이
지진이나 큰 폭풍이나 불 가운데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여호와는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11중-12상절).
엘리야가
완전히 낙심했을 때,
부드럽고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12하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부드럽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신약 시대 안으로
이끌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늘날 하나님은
천둥소리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부드럽고도 나지막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위협적으로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제 저 혼자만 남았는데”
(왕상 19:14)
라고 말씀드렸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 같지만,
은밀하게 그분을 위하여
칠천 명을 남겨 두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숨겨진 일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일은 항상
숨겨져 있다.
위대한 감동이나
위대한 이상이나
위대한 광경을
계속 바라지 말라.
이러한 것들이 반드시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가장 참된 일은
작은 음성이나
작은 느낌이나
작은 생각처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그분의 숨겨진 일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러한 하나님의
감추어진 일은
하나님의 움직임처럼
생각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받은
어떤 인상처럼 생각된다.
게다가 그것은 종종
마치 없는 것처럼
매우 희미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장 귀하고 참된 일이다.
때로 우리 속 가장 깊은 부분에
“이것은
너의 육체이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았다.
이것은
주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작은 생각이나 느낌이나
음성이나 말이 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하고도 위대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지 않는
날이나 순간은 없다.
우리는
집회에 오지 않거나
주님을 가장 언짢으시게 하는
일을 하는 정도로
냉담해지거나
뒤로 물러갈 수 있지만,
이러한 때에도
이 실재는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이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분은
“됐다.
더 이상 하지 마라.
여기에서 멈추고
회개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우리가
두 달 동안
집회에 가지 않았을 때,
우리 안에서
아주 작은 음성이
“집회에 가라.
너는 얼마나 더
기다릴 작정이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우리는
그러한 음성을 의심하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것은
내 속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진실한 말씀이며,
그분의 가장 소중한 일이다.

엘리야는
구약 경륜에 따른
구약 시대의 예표이고,
엘리사는
신약 경륜에 따른
신약 시대의 예표이다.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강이라는
네 장소를 통과함으로써
시대가 전환되었다.
길갈은
하나님의 백성이
할례를 받고
그들의 육체를
처리한 곳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가장 강하고 악한 대적이
우리의 육체임을
계시한다.
육체는
하나님께서
철저하고도 절대적으로
미워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체를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범법은
용납하실 수 있지만,
육체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세 번째 타락 시에
인류 전체는
육체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그분의 종 노아에게
온 세대를 진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열왕기하 2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에는
네 단계의 노정,
즉 길갈에서 떠남,
벧엘에 이름,
여리고에 이름,
요단강을 건넘이 있다.
엘리야가
곧 하늘로 휴거되고
엘리사가
두 배 몫의 성령을 받으려고 하기 전에,
그 둘은 바로
이 네 장소를 거쳤다.
그러므로 여기의 중요한 공과는,
엘리야처럼
하늘로 휴거되거나
엘리사처럼
성령을 겉옷으로 입으려면
(성령께서
그가 입은 겉옷처럼
그에게 임하셨음을
가리킴),
이 네 단계의 노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휴거되든지
성령의 능력을 얻든지 하려면,
우리 모두는
길갈에서 떠나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

길갈은
‘굴리다’라는 의미이다.
여호수아기 5장
2절부터 9절까지를 읽으면,
이집트에서 나온 세대의
이스라엘 사람은
할례를 받았지만,
광야에서 태어난
두 번째 세대는
할례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그들은 막
가나안에 들어가서
유업을 얻으려던 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옛 육체를 굴려 보내고
이집트에서의 수치를 굴려 보냄으로써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할례의 의미는 바로
육체를 벗어 버리는 것이다.

성경에서 육체는
하나님께서
유죄판결 하신 것이며,
매우 싫어하시는 것이다.
육체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소유한
모든 것이다.
‘육체로 난 것은 육체이고’(요 3:6).
육체 안에는
죄와 더러움과 부패뿐 아니라
타고난
선함과 친절과 재능과
열정과 지혜와 능력도 있다.
믿는 이들이
일생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공과는 바로
자신의 육체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는 이가
여러 가지 실패와 폭로를
겪게 하심으로
비로소 육체를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육체는
벗어 버려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뜻이 같음을
표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육체를 잘라 버리라고 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잘라 버려야 한다.
어떠하든지 우리는
반드시 길갈에서 출발해야 하고,
반드시 육체를 거절해야 한다.
이것은
얼마나 잘라 버렸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육체를 심판했는가의 문제이다.
오늘날의 잘못은 바로
사람들이
어떻게 열심을 내고
선을 행하며 일하는가만
주목할 뿐
육체를 거절하는 것은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심판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육체를 심판하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배운 것에 따르면,
거듭남, 거룩하게 됨,
온전하게 됨, 죄를 이김,
능력과 같은 것들은 모두
영적인 생활의
가장 높은 표현이 아니다.
육체를 거절하는 것이
합당한 영적인 노정이며,
또한 영적인 생활의 목표이다.
무릇 길갈에서 떠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영적인 노정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이다.
육체를 거절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무엇이
참된 영적 생활인지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열심이 있을 수 있고
일할 수 있으며
기쁠 수도 있지만,
참된 영적 생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벧엘은
세상을 버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돌이켜
하나님을
모든 것으로
취한 곳이다.
여리고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좋은 땅으로 들어갔을 때
반드시 패배시켜야 했던
첫 번째 성으로서,
하나님의 원수 가운데 우두머리인
사탄을 상징한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곳이다.
제단은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한 곳이며,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곳이자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지는 곳이다.

길갈은
육체에 대한 승리를 가리키고,
벧엘은
세상에 대한 승리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이집트는
세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승리는
휴거되고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세상을 이기지 않았다면,
또한 세상의
사람과 일과 사물이
우리 마음 안에서
지위를 잃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믿는 이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휴거되기를
참으로 갈망한다면,
반드시 주님께서
그분의 영을
그에게 주실 수 있는
곳에 이르도록
대가를 지불하고
주님의 길을
취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세상을 버리고
완전한 헌신이라는
제단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시련이 없지만,
하나님께 복종하는 길에는
시련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휴거되고
능력을 얻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비록 우리가
이집트에서
시련은 피할 수 있겠지만,
이집트에는
제단이 없다.

여호수아기 6장 26절은
“이 성 여리고를
다시 건축하려고
일어나는 사람은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이름은
저주받음을 뜻한다.
이 부분의 역사는
이스라엘 사람이
처음으로
가나안에서
원수를 이긴 것에 대해
말한다.
가나안 족속은
마귀에게 속한
악한 영들을 상징한다.
악한 영들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 언급된
하늘들의 영역에 있는
악한 영적인 세력들이다.

우리가
육체를 이기고
세상을 이겼다면,
이제는
원수를 이겨야 한다.
원수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며,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수행한
결과들을 받으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리고의 사람들은
그들이
한 도시를 가졌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리고의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았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말한다.
여리고의 사람들은
도시에 의해 둘러싸인
모든 곳들이
그들에게 속했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들의 발바닥들이
그 위에 밟을
모든 곳들을
우리에게 약속하셨다고
말한다.

실지적인 영적 싸움은
우리와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 사이의
싸움이다.
모든 성숙한 믿는 이들은
이 싸움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땅에서 항상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는다.
어떤 이는
환경 안에서,
어떤 이는
자신의 몸 안에서,
어떤 이는
생각 안에서,
어떤 이는
감정 안에서,
어떤 이는
영 안에서
공격을 받는다.

여리고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들의 위치에
견고히 섬으로써
무너졌다.
악한 영들의
공격을 이기려면,
우리는 먼저 반드시
모든 상황과 느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럴 때 원수는
패배당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치인
하늘들에 있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하며,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을
우리의 위치보다 더 낮은
그들의 위치로
끌어내려야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위치를 취하는
믿음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원수를
이길 수 없다.

요단강은
신약의 침례가 시작된 곳으로서,
죽음을 상징한다.
엘리야는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자신의 겉옷으로
물을 쳤는데,
겉옷은
부어지신 영
곧 능력의 영의
예표이다.
능력의 영께서
죽음의 강을 처리하심으로써
엘리야와 엘리사가
건널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바뀌려면,
반드시 우리의 육체를 처리하고,
세상을 버리고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사탄을 패배시키고,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요단강은
죽음의 능력을 상징한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곧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휴거되는 것이다.

사탄의 가장 큰 능력은
죽음이다.
주님은 마치
원수에게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내게 해 보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사탄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부활이었다.
사탄은
주님을 완전히
죽음에 넣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이 만지지 못하고
잡아 두지 못하는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주님은
마른 땅을 걸어서
건너셨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주님의 부활 외에는 없다.
우리가 거듭날 때 얻은 생명이 바로 이 부활 생명이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사람의 원함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람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큰 능력을
원하지 않는다.
바울은 거듭
부활의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힘을 다해
그것을 추구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주님과 함께 부활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주님의 부활의
큰 능력인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죽음을 이기는
체험을 하지 못한다.

휴거가 가까운 이때에,
믿는 이가 이겨야 할
마지막 원수는 바로
죽음이다.
신체의 죽음이든,
생각의 죽음이든,
혹은 영적인 생활에서의 죽음이든
우리는
모든 죽음을
이겨야 한다.
지금의 세상에는 참으로
죽음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믿는 이들은
휴거되기를 준비하는 동안,
반드시 어떻게
요단강을 건너고
죽음을 이기는지
배워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그들 안에
그리고 그들의 환경 안에
존재하는
죽음의 능력을
어떻게 대항하는지
배워야 하고,
모든 일에서
부활 능력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신 분이심을
더욱더 증명해야 하고,
동시에
그분과 합한 우리 또한
이미 부활한 이들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가
엘리야의 휴거를
얻으려고 하고,
엘리사의 겉옷인
성령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길갈에서 시작하여
요단강을 건너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성령은
부활 생명이
충만한 사람에게만
임하실 수 있다.
우리는 그날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반드시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와 요단강을
통과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휴거되려면
마땅히 걸어야 할 길,
곧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이 길을 계속 걸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현시대는
이기는 이들의 시대이며,
현시대의 사역자들을 통한
현시대의 사역은
이기는 이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부름의
나팔을 부는 것이다.
(이기는 이들은
영원의 이상을 보고,
영원의 삶을 살며,
영원의 일을 하는 이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를 보고
새 예루살렘을
살아 내고
이루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건축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신부를
준비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왕국이
출현하는 것을 위해 있다.
이 마지막 날들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이기는 이들
곧 활력화된 이들이 되기로
결심해야 한다.

1일

왕상 18:18 엘리야가 말하였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이 아니라 왕…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왕은 여호와의 계명을 저버리고 바알들을 따랐습니다.

빌 3:7-8 … 나에게 유익이 되었던 것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 내가 모든 것을 또한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매 시대마다 주님께는 성취하기 원하시는 특별한 일들이 있으시다. 주님은 그분 자신이 회복하셔야 할 것들과 이루셔야 할 일들이 있으시다. 한 시대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특정한 회복과 일이 곧 그 시대의 사역이다.

어떤 사람이 그 시대의 사역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지나간 사역을 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는 또 다른 일이다. … 그러나 사람이 지나간 사역을 한쪽에 제쳐 둘 수 있는가 없는가는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엘리야의 사역은 반대 증거였다. 온 이스라엘이 우상에 경배했을 때, 엘리야는 그들에게 그들이 경배하는 우상들이 거짓 신들이며 오직 여호와만이 참하나님이시라고 말하였다. 반대 증거인 엘리야는 그들에게, 우상숭배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임을 말해 주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포로 시기 이전의 신언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대표적인 신언자였고, 이기는 이였다. 사람들이 우상에 절하였을 때, 그는 굳게 서서 우상에 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반대 증거였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왕의 인도 아래서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일으키시어 왕과 백성 앞에 반대 증거로서 서게 하셨다. 그때 백성은 바알에 절하였지만, 엘리야는 바알에 절하지 말고 여호와께 경배하라고 백성에게 말했다. 백성이 모든 것이 평안하고 좋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엘리야는 삼 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왕상 17:1). 그는 왕과 백성 앞에 살아 있는 증거였고, 그의 행동은 백성의 행동과 반대되었다.

아합 시대에 바알의 신언자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신언자라고 칭했다. 비록 그 당시에 바알에 절하지 않은 칠천 명의 감추어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엘리야만이 공개적으로 반대 증거를 지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홀로 왕과 백성 앞에, 그리고 바알을 섬기는 사백오십 명의 신언자들 앞에 아무 두려움 없이 서 있었다(왕상 18:17-40). 엘리야는 하나님의 증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원칙을 대표한다. 엘리야가 서서 증언했을 때, 온 땅이 그를 대적했다. 엘리야만이 하나님을 위해 증언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엘리야는 특별했다. 역대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어떤 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이기는 이들이었다.

구약에 있는 이러한 문제는 신약에 있는 교회의 문제를 예표한다. 교회가 황폐하고 대부분의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증거를 버릴 때, 하나님은 이기는 이들을 일으키시어 반대 증거가 되게 하신다. 오늘날 교회에는 이러한 원칙에 따른 이기는 이들, 즉 자기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이들이 필요하다. 모든 이기는 이들과 하나님을 위한 증인들은 자기 혼자만 서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 하나님은 바알에 절하지 않은 칠천 명을 숨겨 두셨지만, 엘리야의 느낌에는 자기 혼자만이 서 있는 것 같았다(왕상 19:10). … 이기는 이가 되려면 결과를 두려워하거나 과거를 붙들거나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주의해서는 안 된다. 그는 하나님의 뜻만을 주의해야 한다. 엘리야는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반대 증거로서 서서 하나님의 증거를 지켰고, 바알을 따르지 말고 여호와를 따라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 이 기간에 그가 대표한 이기는 이들의 원칙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증거를 버렸을 때 일어나 반대 증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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