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우리의 본성에 내주하는 죄를 가리키고,
‘죄들’은
내주하는 죄의 열매인
죄악이 가득한 행위들을 가리킨다.
마귀 사탄이
죄의 근원이다.
사람의 타락을 통해
사탄의 인격이
사람의 혼과
하나가 되었다.
또한 사람이
사탄을
자신의 몸 안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탄은
사람의 육체의 지체들 안에서
악으로서 작용하는
죄가 되었다.
마귀가
죄인들의 아버지,
곧 거짓말쟁이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죄인들은
마귀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고
아담 안에서
죄 중에 잉태되었으며,
뱀의 독을 가지고 태어나
뱀들, 곧 독사의 자손들이 되었다.
죄는
악한 자 사탄의
악한 본성이다.
사탄은
아담의 타락을 통해
자신을 사람 속에 주입한 후에,
이제는 타락한 사람 안에서
하나의 법으로서
거하고 활동하며 작용하는,
극히 죄악된 본성이 되었다.
죄는
불법이다.
실수로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 있는 죄,
곧 내주하는 죄를
나타낸다.
이 죄는
사탄에게서
아담을 통하여
인류에게로 들어왔으며,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죄를 짓게 한다.
로마서 7장에서 인격화된
이 죄는,
우리의 타락한 육체 안에 거하는
사탄의 악한 본성,
심지어 사탄 자신이다.
우리의 육체가
죄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로 하는 것은
선하든 악하든
모두가 죄이다.
더욱이 육체는
타락한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에,
타락한 모든 사람은
죄 자체이다.
속죄제물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죄가
유죄 판결 받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가 되신 것을
상징한다.
육체 되심을 통해
하나님이신 말씀은
죄의 육체의 모양,
곧 타락한 사람의 모양에 있어서
(in the likeness of;
닮음 안에서, 겉모습으로)
육체가 되셨다.
그리스도는
비록 모양에 있어서만
타락한 사람이셨지만,
그분께서
십자가에 계셨을 때
하나님은
그 모양을
실재로 간주하셨다.
죄와 옛사람과
사탄과 세상과
세상의 왕은
모두 육체와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서 죽으셨을 때,
죄가
유죄 판결받았고,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사탄이
멸망당했고,
세상이
심판받았으며,
세상의 왕이
쫓겨났다.
따라서 육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부정적인 모든 것들이
처리되었다.
이것이
속죄제물의 효능이다.
사람의 육체 안에 있는
사탄의 악한 본성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뱀의 형태로 죽으신 것을 통해
심판받았으며,
이것은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가 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거듭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물과 속건제물로
매일 취해야 한다.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제물의
연결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물로
취하는 것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죄가
유죄 판결받고,
우리의 옛사람이
처리되며,
죄 자체인 사탄이
멸망당하고,
세상이
심판받으며,
세상의 왕이
쫓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왕’에서
‘왕’이라는 단어는
권위 혹은 권력
그리고 권력을 얻으려는 투쟁을
함축한다.
권력을 얻으려는
투쟁은
육체, 죄,
옛사람, 사탄,
세상, 세상의 왕에게서 나온
산물이자 결과이다.
죄는
권력 투쟁과 관련되며,
죄의 법은
하나님과 싸우는
자동적인 능력과 힘과 에너지이다.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과
참되고 친밀하며
살아 있고 사랑이 가득한
교통을 가질 때,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신이
죄악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물로
취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누릴수록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를
더욱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죄악이 가득한
본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물로
취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받고 정복되게 하며,
또한 우리를 지켜 준다.
왜냐하면 이러한 체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윗의 체험으로부터
자신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패하도록 허락하시는
고통스러운 방식을
사용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이 얼마나
끔찍하고 추하며 혐오스러운지를
보고,
자아에서 비롯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분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죄악으로 가득한지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물로
누릴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목적으로 창조하신
사람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위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한 것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악으로 가득한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죄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파한다면,
그것은 죄이다.
우리가
구제하거나
기도하거나
금식하는 것과 같은
우리의 의로운 행실이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죄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곧 우리의 명성과 지위와
유익과 자랑거리를 위해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죄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장래를 위해
우리의 자녀를 키운다면,
그것은 죄이다.
속죄제물의 피에는
네 가지 효능이 있다.
피 얼마는
회막으로 가져가
여호와 앞,
곧 지성소의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렸는데,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하늘들에 있는 지성소 안으로
가져간 것을
의미한다.
피 얼마는
분향단의 뿔에 발랐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이
우리가 기도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함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하는
효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 얼마는
번제단의 뿔에 발랐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우리를 구속하는
효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에 쏟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장하심으로
우리가
양심 안에서
평안을 갖도록,
그리스도의 피가
십자가에서 쏟아부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시고
육체 안에서
죄에 대해
유죄 판결하신 결과로,
우리는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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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plies on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와 감상과 적용”
6일
레 4:4-6
그는
그 황소를
회막 입구,
여호와 앞으로 끌고 와서,
그 황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여호와 앞에서
그 황소를 잡아야 한다.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은
그 황소의 피 얼마를 가져다가
회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려야 한다.
속죄제물은
여호와 앞에서 잡았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
곧 그분께서
하나님에게서
인정받으셨다는 것을
상징한다.
속죄제물의 피에는
네 가지 다른 효능이 있다.
속죄제물의 피 얼마는
회막 안으로 가져가
지성소의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렸다.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를
하늘들에 있는
지성소 안으로 가져간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지성소 안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우리의 상황을
덮어 준다.
피 얼마는
분향단의 뿔에 발랐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이
우리가
기도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피를 통하여
기도해야 하고,
피를 통하여
기도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해야 한다.
피 얼마는
번제단의 뿔에 발랐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우리를 구속하는
효능이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곧 지성소 안으로
이끈다.
그 피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게 하는
위치와 권리를
우리에게 주며,
우리를 구속하는
효능이 있다.
나머지 모든 피는
번제단 밑에 쏟았다.
이것은
우리가
구속받고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의 양심 안에
평안을 갖게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소에서
속죄를 이루기 위하여
회막 안으로
피 얼마를 가져간 경우,
그 속죄제물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불태워야 한다.”
(레 6:30)
여기에 언급된 속죄는
지성소에서 이루어졌다.
이 구절은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구속을 이루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와
우리의 죄의 본성을
처리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누림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이것에 동참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몫이 있으며
또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몫도 있다.
가장 좋은 몫은
하나님의 누림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속죄를 이루도록 하셨으며,
우리는
이것에 동참할 수 없다.
… 그러나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를 공급할 때,
우리는
그분께 동참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몫을 가지시며
우리는
우리의 몫을 갖는다.
속죄제물에 관한
이 규례들은
‘속죄제물에 관한 법’
(레 6:25)으로 불린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데 있어서도
우리가
생명의 모든 규례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리는 방식에 관해서
우리 자신의 선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갈라디아서 6장 15절과 16절은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며,
중요한 것은
새 창조물뿐입니다.
이 규칙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안과 긍휼이 있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
새 창조물의 규칙은
우리가
밤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는 때를
통제할 것이다.
특히 주일에
새 창조물의 규칙은
우리에게
조금 더 일찍 일어나라고,
집회를 위해 기도하라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일찍 집회에 가라고
재촉할 것이다.
새 창조물의 규칙에 따라
행한 것에 대한
보상은
긍휼과 평안이다.
… 우리가
주일 집회를 준비하고
주일 집회에 가는 데 있어서
새 창조물의 규칙에 따라 행한다면,
우리는
긍휼과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5일
레 6:25
…속죄제물에 관한
법은 이러하다.
속죄제물은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아야 한다.
이것은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
마 6:1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들 앞에서
여러분의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 앞에서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마 6:3
그러나 그대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속죄제물은
번제물을 죽인 곳에서
죽여야 했다.
이것은
속죄제물이
번제물에 근거한다는 것을
가리키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속죄제물이 되시는 것은
그분께서
번제물이신 것에
근거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기 위한
자격을 갖추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번제물이 되셔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회개했으며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죄악이 가득한지를
알 수 없다.
번제물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류가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위하지 않으며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 우리가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죄악이 가득한지를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자신이 얼마나
죄악이 가득한지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미움뿐 아니라
우리의 사랑까지도
죄악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윤리적으로,
다른 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용인되고
다른 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용인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서 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사람들을 미워하고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해
사람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위해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다른 이들을 미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도
죄이다.
… 어떤 것이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독립되어 산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미워할 때
하나님에게서 독립적이며,
다른 이들을 사랑할 때도
역시 하나님에게서 독립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미움과 사랑이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미움이나 사랑은
모두 우리의 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에서 나온 것이며,
… 둘 다
사탄을 상징하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에서
나온 것이다.
…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이
둘 다
사탄에게 속한 것이다.
우리가
선하든 악하든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곧 우리의
명성과 지위와
유익과 자랑거리를 위해
다른 이들을 사랑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도
… 육체 안에 있을 수 있다.
신약은
우리에게
주님 안에서
자녀들을 양육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장래를 위해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죄이다.
교회생활 안에서조차도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우리는
매우 선한 어떤 일을
할지 모르나,
깊은 속에 감추어진
우리의 의도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이다.
예를 들어,
간증하거나 기도하는 중에
우리는
모든 이들이
우리에게
‘아멘’으로 화답하기를
원할지 모른다.
… 그런 기도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이다.
우리는
영적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감추어진 동기들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주 예수님은,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그들 앞에서
여러분의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마 6:1)
구제에 관해서 주님은
“그대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3절)라고 말씀하셨으며,
이어서 기도에 관하여
“여러분은 기도할 때,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5절)라고 말씀하셨다.
금식에 관해서 주님은
“또한 여러분은
금식할 때,
침울한 얼굴을 한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금식하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얼굴을 흉하게 합니다.”
(16절)라고 말씀하셨다.
의를 행하는 것이나,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조차도
하나님과의
권력 투쟁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한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은 죄이다.
4일
요일 1:5
우리가
그분께 듣고서
여러분에게 전해 주는
메시지는
바로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요일 1:7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안에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안에서 행하면,
우리는 서로
교통을 갖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온갖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레위기 1장 1절부터 6장 7절까지에
나타난
다섯 가지 제물들의 순서는
요한일서 1장에 나타난
영적 체험의 순서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물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을 갖도록 한다.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것,
곧 우리 안에는
죄가 있고
우리 밖에는
죄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일서 1장 8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물로
삼아야 하며,
9절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건제물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속죄제물로 취하는 것은
아주 깊은 것이다.
속죄제물을 체험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 예수님을
우리의 번제물로 누리는 것과
관련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를
더 알게 될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감출 곳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바울은
자신에 관하여
그런 깨달음을 가졌다.
주님을 추구할 때,
바울은
자신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음을
보았다.
번제물이시고 소제물이신
주님을 누림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신이
죄악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속죄제물로 취하고
그런 다음 그분을
속건제물로 취한다.
이것이
우리가 요한일서 1장에서
본 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교통 안에서
삼일 하나님을 누릴 때,
우리는 내적으로
여전히 죄가 거하며
외적으로
죄들을 지었음을
깨닫는다.
그런 다음 우리는
보혈에 의해
정결하게 된다.
이것은 순환된다.
우리가 정결하게 될수록,
우리는
삼일 하나님과의 교통 안으로
더 들어가게 된다.
즉 이러한 교통을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는
더욱더 빛 비춤을 받으며,
빛 비춤을 받을수록
자신이 죄악으로 가득하고
심지어 죄 자체임을
더 깨닫게 된다.
이러한 순환으로 인해
우리는
자아에서 해방되고
구원받는다.
사실상 우리는
죄와 육체와
사탄과 세상과
세상의 왕과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으로부터
해방되고 구원받는다.
그리스도를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가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권력 투쟁이 줄어든다.
결국 우리는
그분께 완전히 굴복될 것이다.
믿는 이들이
구원받은 후
성령께서
믿는 이들 안에서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자아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 결과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아에서 나온
모든 것을 거절하고
완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자아를 아는 것은
얼마나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는지!
자아를 거절하는 것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
믿는 이들은
자아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자아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의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자아를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은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그들의 참된 모습을
계시하실 수 있는
길을 얻지 못하신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부득불
더 고통스러운 방식을 사용하여
믿는 이들로 하여금
자아를 알게 하신다.
이것은 바로
믿는 이들이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때로 믿는 이들은
영적인 노정에서
약간 진보했을 때,
자신이 이제 승리했고
거룩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자만할 때,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혹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실패하고 범죄하게 하여,
자신이 결코
다른 사람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만약 우리가
로마서 7장의 체험을
가지지 못한다면,
즉 실패를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주님은
왜 우리를
늘 넘어지게 하시는가?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실패하게 하시는 것 배후에
그분의 놀라운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의도는
바로 우리가 할 수 없음을
보게 하는 것이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할 수 없었고,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는 할 수 없다.
주님은
우리가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를 원하신다.
이럴 때
우리에게 있는 문제가
거의 해결된다.
3일
요일 1:8-9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또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레 4:3-4
만일 기름 부음받은 제사장이
죄를 지어
… 그는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소 떼 가운데서
흠 없는 황소 한 마리를
여호와께
속죄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는
… 그 황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여호와 앞에서
그 황소를 잡아야 한다.
우리의 죄,
곧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내주하는 죄는
우리의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처리되었다.
우리의 죄들,
곧 우리의 잘못들은
우리의 속건제물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처리되었다.
거듭난 후에도
우리는
요한일서 1장 8절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여전히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물로
취해야 하고,
9절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건제물로
취해야 한다.
속죄제물에
손을 얹는 것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과
제물이
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관점에 따르면,
육체는
나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선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선하든 나쁘든,
또는 그 중간이든
우리가 육체인 한
우리는 죄이다.
육체는
완전히 죄와 하나이며,
죄는
완전히 사탄과 하나이다.
사실상 죄는
사탄이다.
더 나아가서
사탄은
세상과 하나이며,
세상은
세상의 왕과 하나이다.
이 다섯 가지,
곧 육체와 죄와
사탄과 세상과
세상의 왕(권위혹은 권력)은
하나이다.
오늘날의 세상은
육체와 죄와
사탄과 세상의 왕과
연관된다.
여기서의‘ 왕’은
권위나 권력을
함축한다.
세상은 사실상
권력을 얻으려는 투쟁이다.
모든 사람과
모든 나라가
권력을 얻으려고 싸운다.
곳곳에서 권력을 얻으려고
경쟁하며 싸운다.
… 권력을 얻으려는
이러한 투쟁은
육체, 죄,
옛사람, 사탄,
세상, 세상의 왕에게서 나온
산물이자 결과이다.
사탄은
이 세상의 왕이다.
사탄은
그러한 왕이 된 것을
심지어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이사야서 14장은
그가
하나님과 가까웠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음을
계시한다.
그는
하나님보다 높아지기를
원했으며,
적어도 하나님과 대등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성경이
죄에 대해 유죄 판결할 때,
사탄을 유죄 판결하고
또한 육체와 세상과
권력을 얻으려는 투쟁을
유죄 판결한다.
속죄제물은
하나님께서
죄와 관련하여
자신의 아들을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육체 안에 있는 죄에 대해
유죄 판결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육체가 되셨다.
즉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오셨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죄가 되게 하셨다.
십자가에 계시는 동안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뱀의 모양으로
심판받으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육체 안에 있는 죄에 대해
유죄 판결하셨다.
속죄제물의 효능은
단지 죄를 처리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결과는
훨씬 더 크다.
속죄제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포함되어 있던
타락한 사람인
옛사람은
처리되었고,
타락한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죄는
유죄 판결받았으며,
죄 자체인
사탄은
멸망당했고,
세상은
심판받았고,
세상의 왕은
쫓겨났다.
이것이
속죄제물의 효능에 관하여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계시이다.
죄에 대해 다루면서
바울은
마침내 더 깊은 것,
곧 죄 자체뿐만 아니라
죄의 법을 말한다.
… 죄의 법은
다만 하나님과 싸우는
자동적인 능력과 힘과 에너지이다.
…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우리를 점령하기 위해
올라온다.
이것이
죄의 법이다.
… 이것은
바울을
비참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
이것이
죄에 대한
더 깊은 의미인
죄의 법이다.
우리는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를
피상적으로 취해서는 안 되며,
속죄제물이신 그분을
더 깊은 방식으로
취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온 존재를
바꾸어 줄 것이다.
2일
롬 8:3
율법이
육체 때문에
연약하여 할 수 없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관련하여
그분 자신의 아들을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육체 안에서
죄에 대해
유죄 판결하셨습니다.
고후 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우리 대신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속죄제물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 때문에 바쳐지신,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 우리의 죄는
우리의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처리되었고,
우리의 죄들,
곧 우리의 잘못들은
우리의 속건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셨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죄의 총체,
곧 안의 죄와 밖의 죄들을
모두 없애셨다.
하나님이신 말씀은
육체 되심을 통해
죄의 육체의 모양,
즉 타락한 사람의 모양에 있어서
육체가 되셨다.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육체 안에서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단지 모양에서만
타락한 사람이셨는데도,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 계셨을 때
하나님은
그 모양을
실재로 여기셨다.
죄, 옛사람,
사탄, 세상,
세상의 왕이
모두 육체와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서
죽으셨을 때,
죄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사탄은
멸망되었고,
세상은
심판을 받았으며,
세상의 왕은
쫓겨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서 죽으심으로써
부정적인 모든 것이 처리되었다.
이것이 속죄제물의 효능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육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복음 전체의 문맥에 따르면,
1장 14절의 육체는
타락하고 죄악된 사람을
의미한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타락하고 죄악된
사람이 되셨으나,
단지 모양에 있어서만
그러하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절에서
“하나님은
죄와 관련하여
그분 자신의 아들을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라고 말함으로써
이것을 분명히 밝힌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하는
육체가
죄의 육체라는 것을
증명한다.
육체 되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모양에 있어서’
죄악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라일리(Ryrie) 박사는
그의 성경 주석에서
이 구절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분이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셨으며
육체 되심 안에서
그분 자신을
죄악된 인성에
연결시키셨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놋 뱀의 예표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육체를
가지신 것이 아니라
죄의 육체의 모양을
가지셨음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때,
그들은
뱀에게 물려
죽어 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실상 그들은
죽은 이들이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도록
놋 뱀을
장대 위에 매달게 하셨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놋뱀을 바라봄으로써
구원받아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놋 뱀이
그들의 구원자였다.
이것은 예표이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주 예수님은
이 예표를
그분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자신이
육체 안에 있을 때
놋 뱀의 모양으로
계셨다는 것,
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계셨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놋 뱀은
뱀의 형체는 가졌지만
독은 없었다.
그리스도는
죄의 육체의 모양이 되셨지만
육체의 죄에는
참여하지 않으셨다.
놋 뱀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어 올려져야 합니다.
이것은
그분을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요 3:14-15)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육체 안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분은
죽으셨을 때
다만 하나님께
유죄 판결을 받은
육체 안에서 죽으신 것이다.
로마서 8장 3절은
“하나님은
죄와 관련하여
그분 자신의 아들을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육체 안에서
죄에 대해
유죄 판결하셨습니다.”
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께서
육체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하나님은
육체 안에서
죄에 대해
유죄 판결하셨다.
죄는
단지 어떤 문제가 아니라
한 인격이며,
이 인격은
유죄 판결을 받아야만 한다.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육체 안에서
죄에 대해
유죄 판결하셨다.
이것은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육체 안에 있는 죄가
유죄 판결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1일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두루 퍼졌습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고전 15:3
내가
우선적으로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나도
전해 받았던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들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신약은
‘죄’라는 단수와
‘죄들’이라는 복수를
둘 다 사용하여
죄의 문제를 다룬다.
죄는
사탄에게서
아담을 통하여
인류 안으로 들어온
내주하는 죄를 말한다.
그것은
로마서의 둘째 부분,
곧 5장 12절부터 8장 13절까지에서
다루어진다
(죄들을 언급하고 있는
7장 5절은 제외함).
죄들은
죄의 행위들,
곧 내주하는 죄의 열매들을
말하며,
이것은
로마서의 첫째 부분인
1장 18절부터 5장 11절까지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요한일서 1장 7절의
‘온갖’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단수의 죄는
내주하는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듭난 후에도 짓는
하나하나의 모든 죄를 말한다(10절).
요한일서 1장 8절은
내주하는 죄,
곧 출생에 의해
물려받은 죄를
말한다.
이것은
로마서 5장 12절에
언급되어 있는 죄이다.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난 후에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났으며,
주님을 추구하고 사랑하며
주님과 교통할지라도,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가 거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부인한다면
진리가 우리 안에 없는 것이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 지은 죄들을
자백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듭난 후에 지은 죄들을
자백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의‘ 죄들’은
우리의 죄악이 가득한 행위들을
말한다.
마귀는
죄인들의 아버지이므로
죄인들은
마귀의 자녀들이다.
마귀는 옛 뱀이고,
죄인들도 또한
뱀들, 곧 독사의 자손들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에게는
그들을 위해
뱀의 형체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시어
그들을
죄에서뿐만 아니라
죄의 근원인 마귀에게서
구원하시는
주님이 필요하다.
로마서 5장 11절까지에서는
죄들(sins)이 다루어졌다.
5장 12절부터는
죄(sin)가 다루어진다.
5장부터 8장까지에서는
죄가 인격화되었다.
죄는 다만
하나의 행위가 아니다.
죄는
들어오고, 왕 노릇 하며,
사람들을 지배하고,
사람들을 속이며 죽이고,
사람들 안에 거하며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하는
하나의 인격과 같다.
죄는
살아 있고,
대단히 활동적이다.
그러므로 죄는
악한 자 사탄의
악한 본성인 것이
분명하다.
사탄은
아담의 타락을 통해
자신을
사람 속에 주입한 후에
이제는
타락한 사람 안에
거하고, 활동하며, 일하는
바로 그 죄의 본성이 되었다.
이 내주하며 인격화된
죄의 본성은
밖의 모든 죄악이 가득한
행위들의 뿌리이다.
불법은
법이 없는 것,
곧 무법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죄는 이미
세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법이 없다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원칙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
곧 그 원칙을
따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불법을 일삼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원칙 밖에서
생활하는 것이고,
그 원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은 죄이며,
바꾸어 말하면
죄는 불법이다.
레위기 4장 2절에서
‘죄를 지으면’은
‘실수하면’,
‘잘못을 저지르면’
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실수로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 있는 죄
곧 내주하는 죄를
나타낸다.
이 죄는
사탄에게서
아담을 통하여
인류에게로 들어왔으며,
우리가 원하지 않는
죄를 짓게 한다.
로마서 7장에서
인격화된 이 죄는,
사탄의 악한 본성이며
심지어 우리의 타락한 육체 안에 거하는
사탄 자신이다.
우리의 육체가
죄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로 하는 것은
선하든 악하든
모두가 죄이다.
더욱이 육체는
타락한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에,
타락한 모든 사람은
죄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