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속죄

The Expiation

레위기 16장은
속죄를
상세히 설명해 준다.

레위기 11장부터 15장까지에서
묘사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의
부정적인 상황 때문에,
하나님의 개념(concept; 사고 방식, 관점)에 따라
또 그분의 신성한 경륜 안에서
구속의 필요가 있다
— 골 1:14, 엡 1:7.

구약 시대는
구속이 일어나는 때가
아니었으므로
장차 올(coming; 오고 있는) 구속의
한 예표, 곧 한 그림자가
필요했다.
이 그림자가 바로
레위기 16장에 있는
속죄이다.

구약에서
동물 희생 제물을 통하여
성취된 속죄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된 구속을
가리키는 한 예표이다
— 히 9:11-12.

‘속죄’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은
‘덮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의 명사형은
레위기 16장 2절과 출애굽기 25장 17절에서
‘속죄 덮개’로
번역된다.

속죄일에
속죄 제물의 피가
지성소 안으로 가져가져서
그 언약궤의 덮개인(lid; 뚜껑인)
그 속죄 덮개 위에
뿌려졌는데,
이는
그 언약궤 안에 있는
십계명을
(the Ten Commandments; 십계명 돌판을)
덮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접촉하기 위하여
나아오는 사람들의
죄가
덮이기는 했지만
아직 제거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 레 16:14-15, 출 25:16.

이 방식으로(In this way; 이렇듯)
하나님과 관련하여
타락한 사람의 상황이
진정되었지만(was appeased; 달래졌지만),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야
사람의 죄를 없애시는
화해 제물로서
그분 자신을 바침으로써
구속을 성취하셨다.

레위기 16장 15절부터 19절까지는
속죄, 곧 죄들을 덮음을
성취하는 것에 대한
한 그림을 보여 준다:

속죄의 성취를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은(단계는)
그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인
염소를 도살하는 것이었다
— 레 16:15상.

염소들은
죄인들을 나타낸다
— 마 25:32-33, 41.

속죄제물로 도살된 염소는
죄인들인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신
그리스도의 한 예표이다
— 롬 8:3, 고후 5:21.

속죄를 성취하기 위한
두 번째 단계는
염소의 피를
휘장 안으로 가져가서
속죄 덮개 위와
속죄 덮개 앞에
뿌리는 것이었다
— 레 16:15하.

염소의 피를
언약궤의 덮개인 속죄 덮개 위와
속죄 덮개 앞에
뿌린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께 다가오는 사람과
교통을 가지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해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속죄제물의 피를
속죄 덮개 위에
뿌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를
하늘들 곧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가져가서
하나님 앞에 뿌려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레 16:14-15, 히 9:12.

피를
번제단의 네 뿔 위와 주위에
바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성취된
구속의 효능이
땅의 사방에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레 16:18.

번제단 위에
피를
일곱 번 뿌린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효능이
완전하여
죄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레 16:19상.

번제단 위에
뿌려진 피는
죄인의 평안을 위한 것이었지만,
속죄 덮개 위에
뿌려진 피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 레 16:14, 18-19상.

속죄 덮개 위에
뿌려진 피는
하나님께서
보시기 위한 것이었고,
번제단 위에
뿌려진 피는
죄인이
보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과 사람 모두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로
만족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몫이 된
염소는
죽음을 당했지만,
아사셀의 몫이 된
염소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악을 지워
광야로 보내어졌다
— 레 16:9-10, 20-22.

아사셀은
죄가 있는 자,
곧 죄의 근원이며 죄의 기원인
사탄, 마귀를 상징한다
— 요 8:44.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한 면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처리하셨고,
다른 한 면으로는
십자가의 효능을 통해,
사람에게
죄가 들어오게 한 근원인
사탄에게로
죄를 되돌려 보내셨다.

십자가를 통해
주 예수님은
구속받은 이들에게서
죄를 없애고
죄를
그 근원인 사탄에게로
돌려보내는
능력과 힘과 권위가 있는
위치와 자격을
얻으셨다.
사탄은
불 못에서 영원토록
죄를 짊어질 것이다
— 요 1:29, 히 9:26, 계 20:10.

구약의 속죄는
신약의 화해를 예표한다
— 롬 3:24-25, 히 2:17, 4:16, 요일 2:2, 4:10.

화해는
양편을 중재하여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 히 2:17.

화해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을
만족시킴으로써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상황을 진정시키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 롬 3:25, 요일 2:2.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
곧 우리의 죄들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 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막았다
— 요일 4:10.

죄인들인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우리의
상황을 진정시키고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화해가 필요했다
— 롬 3:23, 눅 18:13-14.

화해는
양편과 관련되는데,
상대방에게 잘못 행하여
빚을 지게 된 사람은 반드시
상대방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행동을 해야 한다.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14절까지에 나오는
세리의 이야기는
화해의 필요성을
보여 주는
예이다.

“그러나 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직역하면,
이 죄인을
화해시켜 주십시오.).’ ”
(13절)
이것은
구속자가 필요하고
또한 화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세리는
자기의 범죄가
하나님을
얼마나 노하시게 했는지를
깨닫고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자기와 화해하시기를,
즉 죄들을 위한
화해 제물을 통해
자기에 대한
진노를 가라앉히시기를
구했다
— 눅 18:13-14.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시는 분이시고,
화해 제물이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구속된 백성과
만나실 수 있는
화해 장소이시다
— 히 2:17, 9:5, 요일 2:2, 4:10, 출 25:17, 롬 3:25.

‘힐라스코마이’는
‘화해시키다’, 곧 ‘진정시키다’를 의미하며,
상대편에 대한
한쪽 편의 요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양편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다
— 히 2:17.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화해를 이루셨고
우리를
하나님께
되돌아가게 하셨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들에 대해
화해를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의의 요구는
만족되었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진정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평 가운데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

‘힐라스모스’는
‘화해시키는 것’ 즉 화해 제물을
의미한다
— 요일 2:2, 4:10.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
곧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희생 제물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들에 대한
희생 제물로서
그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
이것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히 9:28.

‘힐라스테리온’은
화해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가리킨다
— 롬 3:25, 히 9:5.

화해 덮개는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장소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화해 덮개는
우리가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는 곳인
은혜의 보좌와
일치한다
— 히 4:16.

증거궤가
우리의 체험과 누림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 모두에게
화해 덮개가
필요하다
— 출 25:22.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전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화해 장소로
드러내셨다
— 롬 3:24-25, 행 2:24, 32-36, 히 9:5.

화해 장소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나셨다
— 롬 3:24-25.

구속의 피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의로우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 레 16:14-15, 히 10:19, 계 22:14.

화해 장소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길은
그분의 피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 롬 3:25.

피가
화해 덮개에 뿌려졌고
하나님의 입지는
피에 근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빛나는 영광 가운데서
우리와 만나실 수 있다
— 출 25:22.

우리는
영광 안에서
하나님과 만날 때마다,
우리가
피로 씻어진다는 것을
우리 영의 깊은 곳에서
느낀다.
이것이
우리의 체험 안에 있는
화해 장소이다
— 요일 1:7, 계 1:5, 7:13-14.

승천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는
장소 곧 화해 덮개이시다
— 롬 3:24-25.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이 장소는
은혜의 보좌라고
불린다.
은혜의 보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를 뿌리신
언약궤의 덮개이다.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가
뿌려졌기 때문에,
언약궤의 덮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접촉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충만히 누릴 수 있는
장소인 화해 덮개가
되었다
— 히 4:16.

 

Hits: 1

7 replies on “속죄”

6일

롬 3:24-25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와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드러내시어
화해 장소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사람들이 지은
죄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면서
지나쳐 가심으로
그분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안
어둠이
온 땅을 덮은 시점에,
곧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죄에 대한 유일한 희생 제물,
곧 속죄제물의 실재로서
바치셨을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화해 장소로
드러내기 시작하셨다
(눅 23:44, 히 9:26).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지
삼 일째 되는 날에
하나님은
그분을
부활하게 하셨는데,
이 부활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과정의 일부였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은
그분을
하늘들 안으로 영접하여
자신의 오른편에 두셨다.
이렇게 영접하시고 두시는 것 또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과정의 일부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승천 안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것 등의
모든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셨다.
…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신 때부터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때까지에 걸쳐
그리스도를
화해 장소로
세우시고 드러내셨다.

구약에서
언약궤의 덮개인
속죄 덮개는
하나의 예표인데,
그것은
지성소 안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신약에서
속죄 덮개의 실재,
곧 화해 장소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나셨다.

언약궤의 덮개 위에
피를 일곱 번 뿌렸다는 것은
완전함을 의미한다.
이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금덮개는
붉게 변했다.
화해 덮개 위에 뿌려진
피로 말미암아
죄인들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교통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구속의 피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의로우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로마서 3장 25절은
그분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화해 장소로
드러내셨다고
말한다.
화해 장소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길은
믿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다시 말하면
그분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

구속 혹은 화해가
성취된 후,
이 피는
지성소 안으로 가져와
언약궤의 덮개 위에
뿌려졌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룹들 사이에서
사람과 만나시고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만나실 때
그분이
서 계신 곳은
구속하는 피이다.
피가
화해 덮개 위에 뿌려지고
하나님께서
그 피 위에
서 계시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빛나는 영광 가운데서
우리와 만나실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

이제
우리의 영 안에는
이토록 놀라우신
그리스도께서
거하고 계신다.
그러나 눈멂과 무지함 때문에
그분에 관한
합당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덮개가 있는 언약궤가
바로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묘사해 준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 화해 덮개 위에
뿌려진 피가
단지 교리가 아니라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체험에서
아주 실지적이다.
우리가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셨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다는
깊은 느낌을 가졌다.
이제 우리는
영광 안에서
하나님과 만날 때마다,
우리가
피로 씻어진다는 것을
우리의 영의 깊은 곳에서
느낀다.
이것이
우리의 체험 안에 있는
속죄 덮개이다.

승천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는 장소,
곧 화해 덮개이시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이 장소는
은혜의 보좌라고 불린다.
은혜의 보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를 뿌리신
언약궤의 덮개이다.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가
뿌려졌기 때문에,
언약궤의 덮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접촉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충만히 누릴 수 있는
장소인 화해 덮개가
되었다.

 

5일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히 9:28
그러므로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짊어지시려고
한 번 드려지셨고,
그분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번째 나타나시어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2절과 4장 10절의
이 두 구절에서
헬라어 단어 ‘힐라스모스’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화해시키는 어떤 것,
곧 화해 제물을
의미한다.
요한일서 2장 2절과 4장 10절에서
주 예수님은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 제물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들에 대해
화해를 이루셨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의의 요구는
만족되었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진정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평 가운데
은혜를 베푸실 수 있으시다.

그리스도께서
화해시키시는 분이시고
화해 제물이실 뿐만 아니라
화해 장소, 화해 덮개이신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자.
여기서 하나님은
만족하시고
우리는
즐거워한다.
여기의 화해 덮개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와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언약궤의 화해 덮개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만족하는 상황 아래서 만나
교통을 나눌 수 있다.

얼굴을
화해 덮개로 향한
영광의 두 그룹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만족하게 했음을
상징한다.
화해 덮개 위에 뿌려진
화해의 피는
(레 16:14-15)
덮개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와
덮개 위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요구를
만족하게 하여
사람의 양심에
평안을 준다.

화해 덮개 아래,
곧 언약궤 안에는
율법과 그 요구들이 있어서
우리를
폭로하고 유죄 판결한다.
더 나아가,
화해 덮개 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일어나는 모든 것을
주시하고 관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와
하나님의 영광의 요구가
모두 만족되었다.
이제 우리는
피가 뿌려진
화해 덮개 위에서
영광 가운데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
구속하는 피가 뿌려진
언약궤의 덮개로 말미암아
죄인 편의 모든 상황이
다 해결된다.
그러므로 화해 덮개인
언약궤의 덮개 위에서
하나님은
통치적으로
그분의 의와 상반되지 않은 채,
심지어 언약궤의 덮개를 드리우는
하나님의 영광을 지닌
그룹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분의 의로운 율법을
범한 사람들과
만나실 수 있다.
율법과 그 요구들이 덮어졌고
하나님의 영광이 만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인들과 말씀하실 수 있고
이 죄인들은
하나님과 화평 가운데 있을 수 있고,
그분에게서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화해 덮개는
은혜의 보좌와 동일하다
(히 4:16).

화해 덮개 위에 있는
구속하는 피를
바라볼 때
우리의 양심은
평안하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과
그분의 죽음의 상징인 피가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만족시키도록
우리를 위해
화해 덮개 위에
뿌려졌다는 것을
안다.
이제 하나님은
“나의 자녀들아,
기쁘지 않으냐?”
라고 물으시고,
우리는
“그렇습니다.
아버지,
저는 매우 기쁩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때 아버지는
“나는
너보다 더 기쁘다.
우리 서로 껴안고
친밀한 교통을 나누자.”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것이
언약궤 위에 있는
화해 덮개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누림이다.

화해 덮개가 있는
언약궤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이러한 이상은
놀랍고 다함이 없다.
나는
여러분이
그러한 그리스도에 대해 들은 후
여러분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이전보다 더 보배로운 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화해 덮개가 없다면,
우리는
언약궤를 누릴 길이 없다.
언약궤에
덮개가 있기 때문에
이 언약궤는
우리의 누림이
될 수 있다.
만일 언약궤의 덮개인
화해 덮개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없고
하나님도
우리에게 오실 수 없다.
언약궤가
여전히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접촉할
길이 없는 것이다.
언약궤가
우리의 누림이 되기 위해서는
화해 덮개가
하나님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제 화해 덮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갖는다.

 

4일

요일 4:10
사랑은 이렇습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분의 아들을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 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히 2:17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일에
그분의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에 관한 일에 있어서
긍휼이 많으시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의 죄들에 대하여
화해를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서
우리는
멸시받고 비난받으며 유죄 판결받은
세리가
지극히 겸손하게 기도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직역하면,
이 죄인을
화해시켜 주십시오.).’ ”
이것은
구속자가 필요하고
또한 화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세리는
자기의 범죄가
하나님을 얼마나 노하시게 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자기와 화해하시기를,
즉 죄들을 위한
화해 제물을 통해
자기에 대한 진노를
가라앉히시기를
구했다.

주님은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우리의 죄들에 대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
(히 9:28).
우리의 대치물이신 그분 안에서,
그분의 대신하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만족하시고 진정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이시다.

그리스도는
화해 제물이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구속된 백성과 만나실 수 있는
화해 장소이시다.
화해 장소는
출애굽기 25장 17절에서
언약궤의 덮개로
예표된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만나시는
장소였다.
언약궤의 덮개 아래에는
십계명이 있어서
사람들의 죄악된 상태를
폭로하고
그들을
유죄 판결했다.
그리고 언약궤의 덮개 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대표하고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관찰하는
두 그룹이 있었다.
폭로하고 유죄 판결하는 율법은
그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가
요구하는 것들을
상징하며,
관찰하는 그룹은
하나님의 표현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이
요구하는 것들을
상징한다.
이 요구들이
충족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시지 않는다면,
죄인들이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교통하실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러나 속죄일에
화해를 이루는 피가 뿌려진
언약궤의 덮개로 말미암아
죄인들 편의 모든 상황이
완전히 덮어졌다.

히브리서 2장 17절에서
바울은
‘힐라스코마이’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상대방의 요구를 만족시킴으로써
그를 진정시키고
화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 단어는
화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2장 17절에 따르면,
주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을
만족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를 이루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번역자들은 때때로
헬라어 단어
‘힐라스테리온’, ‘힐라스모스’, ‘힐라스코마이’를
번역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힐라스테리온’은
화해 장소를 뜻하고,
‘힐라스모스’는
화해 제물을 의미하며,
‘힐라스코마이’는
화해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부채가 있어
그의 요청과 요구를
충족할 수 없을 때
화해가 필요하다.
만일 제삼자가
화해자로 등장한다면,
그는 빚진 사람의
부채를 지불하여
상대방을 만족하게 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시려고
화해 제물로
그분 자신을 드리셨을 때
성취된 일을
정확히 묘사해 준다.

화해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없게 한
문제는
바로 우리의 죄들이었다.
이 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막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해 드리는
화해가 필요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화해를 이루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를 이루셨다
(히 2:17).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을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셨다
(요일 2:2, 4:10).
이러한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화해를 이루셨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다시 데리고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로 만드셨다.

 

3일

계 20:10
그들을 미혹하던
마귀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졌는데,
거기에는
짐승과 거짓 신언자도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요일 2:2
그분은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 제물이시며,
또한 우리의 죄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화해 제물이십니다.

아사셀은
죄가 있는 자,
곧 죄의 근원이며 죄의 기원인
사탄, 마귀를 상징한다
(요 8:44).
여호와의 몫이 된
염소는
죽음을 당했지만
(레 16:9),
아사셀의 몫이 된
염소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악을 지워
광야로 보내어졌다
(레 16:10, 20-22).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한 면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처리하신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한 면으로는
십자가의 효능을 통해,
사람에게
죄가 들어오게 한
근원인 사탄에게로
죄를 되돌려 보내신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를 통해
주 예수님은
구속받은 이들에게서
죄를 없애고
(요 1:29, 히 9:26)
죄를
그 근원인 사탄에게로
돌려보내는
능력과 힘과 권위가 있는
위치와 자격을
얻으셨다.
사탄은
불 못에서
영원토록
죄를 짊어질 것이다
(계 20:10).

구약에서
속죄는
죄를 덮는 것이다
(레 25:9, 민 5:8).
신약의 화해를 예표하는
속죄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을
만족시킴으로써
우리를 위해
하나님을
진정시키고 가라앉히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의 속죄는
신약의 화해를 보여 주는
예표였다.
화해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다섯 번 언급된다.
두 번은
화해 제물이신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것이고
(요일 2:2, 4:10),
두 번은
화해가 이루어진
장소에 대한 것이며
(롬 3:25, 히 9:5),
한 번은
화해시키는
행위에 대한 것이다
(히 2:17).

신약에서
화해와 관련된
다섯 구절에 더하여,
우리는 또한
성전에서 기도하던
세리가
화해와 동일한
어근을 가진
말을 사용한 것을
본다
(눅 18:13).

화해란 무엇인가?
우리는
화해를
한 면에서
구속과 어떻게 구별하고,
또 다른 면에서
화목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 화목은
화해를 포함한다.
그렇지만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화해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그에게
죄를 범했거나
죄를 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여러분에게
잘못을 저질렀거나
빚을 지게 되어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게 되었다고 하자.
이 문제 혹은 이 빚 때문에
여러분은
나에게
요구가 있게 된다.
만일 여러분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이에 있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화해가 필요하다.

헬라어 단어 ‘힐라스모스’는
내가
여러분에게
잘못을 저질러서
여러분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는 것을
함축하는 말이다.
우리 사이에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는
문제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화해는
양편과 관련되는데,
상대방에게
잘못 행하여
빚을 지게 된
사람은 반드시
상대방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행동을 해야 한다.
잘못한 측이
피해를 입은 측을
진정시키려 한다면
그의 요구를
충족해 주어야 한다.
〈칠십인역〉 성경은
레위기 25장 9절과 민수기 5장 8절에서
속죄에 대한 단어로
‘힐라스모스’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이 헬라어 단어는
양편을 중재하여
하나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속죄이다.

<흠정역>에서는
‘속죄’에 대한 단어로
‘어톤먼트(atonement)’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양편을
하나 안으로 이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양편이 분리되어 있어
하나 안에 있기를 추구할 때,
화해가 필요한 것이다.
<흠정역>에서 사용한
이 단어는 바로
화해의 행위를
의미한다.

히브리서 2장 17절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우리의 죄들에 대해
화해를 이루시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것을
본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를 이루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을 진정시키셨음을
의미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의와
그분의 모든 요구들을
이루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

 

2일

레 16:14-15
그는
황소의 피 얼마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찍어
속죄 덮개 동편 위에 뿌려야 하고,
또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속죄 덮개 앞에
일곱 번 뿌려야 한다.
그런 다음
그는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로
염소를 잡고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져가서,
… 속죄 덮개 위와
속죄 덮개 앞에
뿌려야 한다.

속죄를 성취하기 위한
두 번째 단계는
염소의 피를
휘장 안으로 가져가서
속죄 덮개 위와 속죄 덮개 앞에
뿌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피 흘림이 없으면
죄들의 용서도 있을 수 없다
(히 9:22).
그러므로 염소의 피를
언약궤의 덮개인 속죄 덮개 위와
속죄 덮개 앞에
뿌린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께 다가오는 사람과
교통을 가지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해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언약궤의 덮개와 그 위에
뿌려진
속죄하는 피는
죄인의 모든 상황을
완전히 덮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덮개 위에서
그분의 의로운 율법을
범한 사람들과
만나실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가지신
요구가 만족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실 수 있었으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게 되었다.

제사장은
염소의 피를
휘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속죄 덮개 위와
속죄 덮개 앞에
뿌렸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하늘들에 있는
지성소 안으로 가져가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을 위해
영원한 구속을
성취한 것을
상징한다
(히 9:12).
…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한 번 만에 영원히
자신을
죄들에 대한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셨다
(요 1:29).
그분께서
우리의 속죄를 위해
하늘에 있는
장막 안에서
하나님 앞에
뿌리신 피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구속을
성취하였으며,
심지어 옛 언약 아래서
동물의 피로
덮어지기만 했던
죄들에 대해서도
구속을 성취했다
(히9:15).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해
구속을 받았다
(벧전 1:18-19).

“그는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으로 나와
그 제단을 위하여
속죄해야 하는데,
황소의 피 얼마와
염소의 피 얼마를
가져다가
제단의 뿔 위와 주위에
발라야 한다.”
(레 16:18)
피를
번제단의 네 뿔 위와 주위에
바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성취된
구속의 효능이
땅의 사방에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소의 피는
아론과 그의 집을 위한 것이고,
염소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한 것이다.
또한 제단의 네 뿔은
땅의 네 방향을 향하였다.
따라서 황소와 염소의 피를
제단의 네 뿔 위와 주위에 바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성취된
구속의 효능이
온 땅을 위한 것이고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요한일서 2장 2절에서
사도가
“그분은
우리의 죄들에 대한
화해 제물이시며,
또한 우리의 죄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화해 제물이십니다.”
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하는 효능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는
모든 것을 포함할 정도로
광대하다.

황소의 피와 염소의 피는
제단의 네 뿔 위와 주위에
발라졌을 뿐만 아니라
번제단 위에
일곱 번 뿌려졌다
(레 16:19상).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효능이
완전하여
죄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
번제단 위에 뿌려진
피를 볼 때,
우리의 죄와 죄들이
이미 처리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마음 안에서
평안을 누린다.

번제단 위에
뿌려진 피는
죄인의 평안을 위한 것이었지만,
속죄 덮개 위에
뿌려진 피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피는 먼저
휘장 안에 있는
속죄 덮개 위에
뿌려졌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그 후에
피는
바깥뜰에 있는
번제단 위에 뿌려졌다.
이것은
죄인이 보기 위한 것이었으며
죄인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로써
하나님과 우리는 모두
만족을 얻었다.

 

신언노트, 2018 09 09

레위기 16장은
 그 속죄를
 묘사합니다.

레위기 11장부터 15장까지에서
 묘사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의
 부정적인 상황 때문에,
 하나님의 개념에 따라
 또 그분의 신성한 경륜 안에서
 구속의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는
 구속이 일어나는 때가
 아니었으므로
 장차 올 구속의
 한 예표, 곧 한 그림자가
 필요했습니다;
이 그림자가
 레위기 16장에 있는
 속죄입니다.

구약에서
 동물 희생 제물들을 통하여
 성취된 속죄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된 구속을
 가리키는 한 예표입니다.

‘속죄’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은
 ‘덮다’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의 명사형은
 레위기 16장 2절과 출애굽기 25장 17절에서
 ‘속죄 덮개’로
 번역됩니다.

그 속죄일에
 그 속죄 제물의 피가
 그 지성소 안으로 가져가져서
 그 언약궤의 덮개인(lid; 뚜껑인)
 그 속죄 덮개 위에
 뿌려졌고,
이는
 그 언약궤 안에 있는
 십계명을(십계명 돌판을)
 덮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접촉하기 위하여
 나아오는 사람들의
 죄가
 덮였지만
 아직 제거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방식으로
 하나님과 관련하여
 타락한 사람의 상황이
 진정되었지만(was appeased; 달래졌지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야
 사람의 죄를 없애시는
 그 화해 제물로서
 그분 자신을 바침으로써
 구속을 성취하셨습니다.

레위기 16장 15절부터 19절까지는
 속죄, 곧 죄들을 덮음을
 성취함의
 한 그림을 보여 줍니다:

속죄를 성취함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은
 그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인
 염소를 도살하는 것이었습니다:

염소들은
 죄인들을 나타냅니다.

그 도살된 속죄 제물인 염소는
 우리, 곧 죄인들을 위하여
 죄가 되신
 그리스도의 한 예표입니다.

속죄의 성취를 위한
 두 번째 단계는
 그 염소의 피를
 그 휘장 안으로 가져와서
 그 속죄 덮개 위와 또 앞에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염소의 피를
 그 언약궤의 뚜껑인(덮개인)
 그 속죄 덮개 위와 또 앞에
 뿌림은
 하나님께서
 그 다가오는 한 사람과
 교통을 가지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속죄 제물의 피를
 그 속죄 덮개 위에 뿌림은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가
 그 하늘들 안으로,
 곧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가져와졌고,
 또 우리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 뿌려졌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피를
 그 번제단의 네 뿔 위와 또 주위에
 둠은(putting; 바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의 효능이
 그 땅의 네 구석들을(corners; 모퉁이들을) 위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피를
 그 제단 위에 일곱 번 뿌림은
 그리스도의 피의
 완전한 효능이 있어서
 그 죄인이
 그것을 보고
 그의 마음 안에서
 평안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제단 위에
 뿌려진 피는
 그 죄인의 평안을 위해 있었지만,
그 속죄 덮개 위에
 뿌려진 피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있었습니다.

그 속죄 덮개 위에
 뿌려진 피는
 하나님께서 보시기 위해
 있었습니다;
그 제단 위에
 뿌려진 피는
 그 죄인이 보기 위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모두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에 의해
 만족하게 됩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있었던
 그 염소는
 죽어야만 했지만,
 아사셀을 위하여 있었던
 그 염소는
 그 황무지 안으로
 보내져야만 했고
 그 위에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모든 죄악들을(iniquities; 부정들을)
 지고 가야만 했습니다.

아사셀은
 사탄,
 그 마귀,
 그 죄 많은 한 존재,
 죄의 근원, 곧 출처인 한 존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는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처리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십자가의 효능을 통하여,
 그로부터 사람 안으로
 죄가 왔던
 사탄에게
 죄를 되돌려 보내십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주 예수님께서
 그 능력과, 힘과, 또 권위와 함께
 그 위치와 또 자격을 가지고 계셔서
 그 구속된 사람들로부터
 죄를 없애 주시며
 또 그것을(죄를)
 그것의 근원, 곧 사탄에게로
 되돌려 보내시는데,
 그가(사탄이)
 그것을(죄를)
 영원토록
 불 못에서
 질(bear; 가질, 떠맡을, 견딜) 것입니다.

구약 안에 있는 속죄는
 신약 안에 있는 화해의(propitiation; 달래기, 가라앉힘)
 한 예표입니다:

화해는
 두 당사자들을(two parties; 양편을)
 진정시켜서(conciliate; 조화시켜, 중재하여)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화해는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들을
 만족시킴으로써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상황을 진정시키고
 우리를
 하나님께
 일치시킵니다(reconcile; 화해시킵니다, 중재합니다).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를
 –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고
 (kept us away from …; 떨어져 있게 했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심을
 방해한
 우리의 죄들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죄인들로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상황을
 진정시키고
 그분의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화해를 필요로 했습니다.

화해는
 두 당사자들을 포함하는데,
 그들 중 하나는
 그 다른 이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그 다른 이에게 빚지게 되었으며,
 또 그 다른 이의 요구들을 충족시키도록
 행동해야만 합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부터 14절까지에서
 그 세리는
 화해의 필요성에 관한
 한 실례이다.

“그러나 그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직역하면,
 이 죄인을
 화해시켜 주십시오;
 그 죄인, 저에게
 진정되십시오).’ ”
 (13절)
이것은
 한 구속자의 필요성과
 또한 화해의(propitiation; 전정시킴의) 필요성을
 함축합니다.

그 세리는
 그의 죄 많음이(sinfulness; 사악함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는지
 깨닫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도록
 하나님께서
 죄들을 위한
 한 화목 제물에 의해서
 그를 향하여
 진정되시기를, 곧 달래지시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화해를 이루시는
 그 한 분이시고,
 그분은
 그 화해 제물이시며,
 그분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의 구속된 백성과
 만나실 수 있는
 화해 장소이십니다.

‘힐라스코마이(Hilaskomai)’는
 ‘화해시키다’, 곧 ‘진정시키다’를 의미하며,
 한 사람의
 다른 사람 위에의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두 당사자들을(two parties; 양편을)
 화해시키는 것입니다
 (to reconcile; 조화시킴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화해시켜셨고
 또 우리를
 하나님께
 다시 데리고 오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화해시키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며
 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진정시키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하게
 은혜로우실 수 있습니다.

‘힐라스모스(Hilasmos)’는
 ‘화해시키는 것’ 즉 화해 제물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그분 자신께서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해,
 곧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화해를 위한
 그 희생 제물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한 희생 제물로서
 그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속을 위함만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요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힐라스테리온(Hilasterion)’은
 화해가 이루어지는(made; 만들어지는)
 그 장소를 나타냅니다.

그 화해 덮개는
 거기에서(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그 장소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 화해 덮개는
 거기에서
 우리가
 긍휼을 받고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은혜의 왕좌와
 동일합니다(equals; 같습니다).

그 증거궤가
 우리의 체험과 누림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과 우리 모두에게
 그 화해 덮개가
 필요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부활, 또 승천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 화해 장소로
 제시하셨습니다
 (has set forth; 드러내셨습니다).

그 화해 장소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제시되셨습니다.

구속의 피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그 의로우신 하나님과
 교통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화해 장소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길은
 그분의 피를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is through faith in His blood;
 그분의 피 안에 믿음을 통하여 있습니다).

그 피가
 그 화해 덮개 위에 뿌려졌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서 계심이
 (standing; 지위가, 입지가, 지속이)
 피 위에 있기 때문에,
 그분께서
 그분의 빛나는 영광 한가운데에서
 우리와 만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광 안에서(영광 안에 계신)
 하나님과 만날 때마다,
 우리는
 깊숙이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가 그 피로 씻겨진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체험 안에서의
 그 화해 장소입니다.

그분의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는,
 그 장소 곧 그 화해 덮개이십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이 장소는
 은혜의 왕좌라고
 불립니다;
은혜의 왕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그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 피를 그 위에 뿌리신
 그 언약궤의 덮개입니다.

그분의 구속하는 피를 뿌림 때문에,
그 언약궤의 덮개는
한 화해 덮개,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접촉하실 수 있고
또 거기에서 우리가
그분의 은혜를
충만히(in full; 완전하게, 전부)
누릴 수 있는
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1일

히 9:11-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온전한
장막을 통하여,
그리고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그분 자신의 피를 통하여,
한 번 만에 영원히
지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레위기 11장부터 15장까지에서
묘사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의 상황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에 따라
그분의 신성한 경륜 안에는
구속이 필요하다.
그러나 구약 시대는
구속이 이루어질 때가
아니었으므로
장차 이루어질 구속의
예표와 그림자가
필요했다.
이 그림자가 바로
레위기 16장에 있는
속죄이다.
구약에서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성취된 속죄는
신약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속을
나타내는
예표이다.

‘속죄’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은
‘덮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의 명사 형태가
레위기 16장 2절과 출애굽기 25장 17절에서
‘속죄 덮개’로 번역되었다.
〈칠십인역〉 성경과 헬라어 신약 성경에서
사용되었고
로마서 3장 25절, 히브리서 2장 17절,
요한일서 2장 2절, 4장 10절에서
‘화해’로 번역된
이 헬라어 단어의 어근은
‘(양편의 상황을) 진정시키다’라는 뜻이다.
속죄일에
속죄제물의 피를
지성소 안으로 가져가
언약궤의 덮개인
속죄 덮개 위에 뿌렸는데
(레 16:14-15),
속죄 덮개는
언약궤 안에 있는
십계명 돌판을
덮고 있었다
(출 25:16).
이것은
하나님을 접촉하기 위하여
나아오는 사람들의
죄가
덮이기는 했지만
아직 제거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렇듯
타락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상황은 진정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람의 죄를 가져가는
화해 제물로서
그분 자신을 바침으로써
구속을 성취하시기 전까지는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히브리서 10장 4절에 의하면,
구약의 속죄는
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속죄만으로
죄를 제거할 수 있었다면
사람들은 매년 끊임없이
속죄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반복해서
제물을 드린 것은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죄들을 제거하는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반드시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레위기 16장 15절부터 19절까지는
죄들을 덮어 주는
속죄를 성취하는 것에 대한
그림을 보여 준다.
구약 시대에 나오는
속죄의 예표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신약 시대에서
죄들을 제거하는 일을
성취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이제 속죄의 성취에 관해 말하는
레위기 16장의
자세한 내용과 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속죄를 성취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로
염소를 잡는 것이었다
(레 16:15상).
염소는
죄인을 상징한다
(비교 마 25:32, 33, 41).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우리는
안에 죄의 본성이 있고,
밖에는 죄의 행위들이 있다.
또한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롬 6:23).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다
(히 9:27).
이런 까닭으로
속죄를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은
속죄제물인 염소를
자신의 대치물로
취해야만 했다.

속죄제물로 잡은
염소는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속죄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분 자신의 아들을
죄의 육체의 모양으로 보내신
하나님은
육체 안에서
죄에 대해
유죄 판결하셨다’
(롬 8:3).
그리스도는
육체가 되셨을 때
(요 1:14)
육체 안에서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셨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셔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심으로
육체 안에서
죄에 대해
유죄 판결하셨다
(고후 5:21, 요 3:14).
그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분의 부활 안에서
그분과
하나 됨으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바로 이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롬 5:10).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