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물은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소제물의 주된 요소인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곱고 온전하며 부드럽고 균형 잡혔으며 모든 면에서 합당하여 지나침이나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과 일상의 행동이 아름답고 뛰어나다는 것을 상징한다.
소제물의 기름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요소이신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소제물을 만들 때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은(연합시킨)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령과 연합된 것을 상징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과 연합된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하나님-사람이 되셨고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갖고 계신데, 그분의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각각 구별되며, 제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는다.
소제물에 넣은 유향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한다. 유향을 고운 가루 위에 놓은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의 부활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사복음서에 묘사된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연합된 생활을 하셨으며, 그분께서 받으신 고난들을 통해 부활을 표현하셨다.
영으로 충만하고 부활로 적셔진 그리스도의 생활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향기였으며, 하나님께 안식과 평안과 기쁨과 누림과 완전한 만족을 드렸다.
소제물에 쳐진 소금은 그리스도의 죽음 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소금의 기능은 맛을 내고, 세균을 죽이며, 보존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항상 소금이 쳐진 생활, 십자가 아래 있는 생활을 하셨다.
심지어 그분은 실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시며 그분 자신과 그분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시고 부활 안에서 아버지의 생명을 사셨다.
하나님의 언약의 기본 요인은 소금으로 상징된 십자가,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보존되어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이 된다.
소제물에 누룩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죄나 부정적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소제물에 꿀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천연적인 애정이나 천연적인 선함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소제물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사람의 생활의 복사판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예표한다.
우리는 우리의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제사장 음식으로 날마다 누려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는 신성하게 부요해진 인성 안에서 또다시 이 땅에서 우리를 통해 사실 수 있다. 우리가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먹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먹은 그것이 되고 우리가 먹은 그것에 의해 살 것이다.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말씀 안에 응축되신 그 영을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 생명과 인간 생활을 먹고, 예수님으로 조성되며, 예수님의 인간 생활이 우리의 인간 생활이 된다(엡 6:17-18, 렘 15:16, 갈 6:17). 이러한 인간 생활에는 신성하게 부요해진 그분의 인성의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인성은 모든 의를 이룬다.
예수님의 인성은 쉴 곳이 없다.
예수님의 인성은 마음이 겸허하다.
예수님의 인성은 연약한 이들을 사랑한다.
예수님의 인성은 융통성이 있다.
예수님의 인성은 다른 이들을 섬긴다.
예수님의 인성은 사람들을 보살핀다.
예수님의 인성은 부주의하지 않고 질서 정연하다.
예수님의 인성은 시간의 제한을 받는다.
예수님의 인성은 유일무이하다.
예수님의 인성은 울어야 할 때를 안다.
예수님의 인성은 겸손하다.
그리스도의 생활과 우리 개인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은 결국 하나의 총체, 곧 단체적인 소제물인 교회생활을 가져온다.
이러한 생활은 인성과 성령이 연합된 생활이며 그 위에 성령이 부어진 생활이다. 거기에는 소금과 유향은 있지만 누룩이나 꿀은 없다. 두 형태의 소제물, 곧 개인적인 그리스도와 단체적인 그리스도(교회생활)는 모두 하나님의 만족과 우리의 영양 공급을 위한 음식이다.
소제물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도록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으로 이끄는 섞임의 예표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7절에서 바울은 ‘떡이 하나이요, 우리 많은 사람이 한 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교회가 한 떡이라는 바울의 사상은 … 구약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레위기 2장 4절에 나오는 소제물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과자로 이루어진다. 고운 가루의 모든 부분이 기름과 섞이고 연합되었다. 이것이 섞임이다.”
소제물로 예표된 것처럼 우리가 함께 섞임으로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온전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의 단체적인 생활이다. 이들은 진정한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생명에 의해 살지 않고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살고 있으며, 자신들의 인간 미덕들을 통해 그분의 속성들을 표현해 왔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계속해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자아를 부인함으로써, 그리고 또 다른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삶으로써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몸을 고르게 섞으셨다(고전 12:24). ‘섞이다’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차이점들을 잃어버리는 것을 함축하며, 또한 ‘조화되다’, ‘조절되다’, ‘연합되다’, ‘고르게 되다’를 의미한다.
몸의 생활, 곧 소제물인 교회생활 안에서 섞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통과하고, 그 영에 의해 모든 것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해야 한다.
이 모든 요점은 우리가 교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통은 우리를 섞는다. 즉 우리를 고르게 하고 조정하고 조화되게 하고 연합되게 함으로, 우리의 차이점들을 잃어버리게 하고, 교회생활과 일에 우리 개성의 자국을 남기는 것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모든 것이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실 수 있게 한다.
“우리는 함께 동역하는 다른 성도들과 교통하지 않은 채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교통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 멈출 것을 요구한다. 교회생활과 주님의 일에서 우리가 동역할 때, 우리는 모두 교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섞임은 우리가 다른 이들과 교통하기 위해 항상 멈추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소제물인 교회생활을 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람이시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사람이 되십시오.”(고전 16:13)라고 명령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높은 인성, 높아진 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인성에는 비범한 사랑, 끝없는 관용, 비할 데 없는 신실함, 절대적인 겸손, 최고의 순수함, 지고한 거룩함과 의, 밝음과 올곧음과 같은 최고의 미덕들이 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여 그분의 오심(헬. 파루시아, ‘임재’를 의미함)을 고대한다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성으로 소유하는 영역 안에 지켜질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이들의 인성은 그들이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자신을 지켜 주님을 극도로 사랑함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적시는 이슬로 잉태되도록 헌신의 광채와 아름다움 안에서 매일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드림으로 지켜진다.
교회생활은 인성이 그 영에 의해, 그 영으로 기름 발라지고 그 영과 합해진 연합의 생활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 주시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를 향하여 날마다 죽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부름받은 신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소유함으로써 부활의 실재를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과 타고난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부활 생명과 부활 능력이신 주님에 의해 수고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 안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룩 없는 잔치로, 즉 순수하고 진실한 생명 공급으로 누려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온전히 순수하시고 혼합된 것이 없으시며 실재가 충만하시다.
교회생활 안에서 타고난 생명은 소금,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죽음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각 지방에 있는 교회가 소제물이 되어 그분을 만족하게 하고, 날마다 성도들에게 충분한 공급을 주기를 갈망하신다. 이것은 교회생활이 우리의 매일의 공급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교회생활을 먹을 것임을 의미한다.
삼일 하나님과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연합인 새 예루살렘은 위대한 소제물, 곧 삼일 하나님과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연합의 궁극적인 완결일 것이다.
새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숫자 12는 새 예루살렘이 삼일 하나님(3)과 그분의 피조물인 사람(4)의 연합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새 예루살렘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과 과정을 거치고 완결된 세 부분으로 된 교회의 연합이다.
결국, 삼일이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와 연결되고 연합되고 합병된 새 예루살렘이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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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새 예루살렘은 삼일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최종 완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뿐 아니라 그분 자신을 우리와 연결하시고 연합하시기 위해서 아주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다.
새 예루살렘은 물질적이고 하늘에 속한 저택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다. 그것은 삼일 하나님과 그분께서 구속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변화시키신 사람들의 완전한 연합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레위기 2장 4절에 있는 예표인, 고운 가루와 기름이 섞인 소제물로 나타난다. 새 예루살렘 전체가 고운 가루와 기름의 연합일 것이다. 삼일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와 연합하고 계시며, 이러한 연합은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는 열두 기초와,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열두 진주로 되어 있는 열두 문과,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다. 공간적으로 볼 때, 성(城)의 본체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각각 열둘의 천 배인 만 이천 스타디온이며, 그 성벽의 높이는 열둘의 열두 배인 백사십사 규빗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매년 열두 달이 있고, 매일 낮 열두 시간과 밤 열두 시간이 있다. 열둘은 새 예루살렘의 숫자이다.
그 성의 사면 각각에 세 개의 문이 있다. 그러므로 사면에 총 열두 문이 있다. 숫자 4는 하나님의 창조물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4장 6절에서 우리는 다른 모든 생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을 본다. 숫자 4는 하나님의 창조물들인 우리를 가리키고, 숫자 3은 삼일 하나님을 가리킨다. 숫자 12는 3 곱하기 4로 된 연합된 또는 섞인 숫자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 전체가 삼일 하나님과 우리 사람의 섞임 또는 연합임을 뜻한다.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에서의 그분의 영원한 행정 안에서 그분의 창조물인 사람과 연합되신다.
숫자 12는 하나님의 행정이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영원히 완성되었음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열두 지파를 통하여 그분의 통치를 수행하셨다. 신약에서 열두 사도의 전파는 교회들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교회들은 하나님의 행정을 위한 그분의 통치이다. 숫자 12는 하나님의 통치적인 행정을 가리키며, 새 예루살렘 전체는 하나님의 행정의 완결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의 중심이 하나님의 보좌인 이유이다. 이 보좌는 주로 하나님의 통치적인 행정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다만 단체적인 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삼일 하나님과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세 부분으로 된 하나님-사람들이 영원한 연결 안에서 섞이는 생활이다. 이 삼일 하나님은 바로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이며, 이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 곧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의 실재이시자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시다.
이러한 섞이는 생활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이며, 궁극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결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증가와 표현이 될 것이다.
누구든지 이러한 섞이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결코 그 누구에게도 어려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에게서 구출되어 변화되고 온전하게 되었다.
5일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소제물이 되기 위해 가장 높은 인성을 가진 생활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십시오.”(고전 16:13)라고 말한 이유이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에 따르면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가 높아진 고양된 인성을 지녀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자신을 절제하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혜와 사랑의 측면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높아진 인성을 갖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 우리는 참된 고운 가루를 볼 수 있다. 이 책은 분명히 소제물의 교회생활을 제시한다.
소제물의 두 번째 요소는 기름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고린도전서는 그 영에 관해 많이 언급한다. 바울은 2장과 3장에서 하나님의 영에 대해 말한다. 그는 2장 4절에서 “나의 말과 선포를 … 그 영…을 나타내면서 한 것은”이라고 말하고, 12절에서는 “하나님에게서 오신 그 영을 받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우리가 알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3장 16절에서 이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영을 받았고, 지금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 영과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교회생활을 할 수 없다. 교회생활은 성령에 의해 그리고 성령으로 기름 부어지고 기름 발라진 인성의 생활이다. 우리는 성령과 하나이며, 이 하나 안에 머물러야 한다.
고린도전서에서 우리는 또한 유향, 즉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본다. 사실상 15장 전체가 부활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격려의 말을 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님들, 여러분은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고전 15:58)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생명 안에서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수고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하여 그분의 부활 안에서 하는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믿는 이들에게 그들이 부름받은 신분 안에 그대로 머물라고 명령한다. “형제님들, 각 사람이 어떤 신분에서 부름을 받았든지 하나님과 함께 그대로 지내십시오.”(24절) 그는 노예를 다음과 같이 예로 든다. “그대가 노예로 있을 때에 부름을 받았습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라도 노예의 신분 그대로 지내십시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노예라도 주님께 속한 자유인이요”(21-22상절). 바울은 노예였던 믿는 이들에게 해방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들이 부름받았을 때의 신분, 즉 노예의 신분을 유지하고 그 처지를 견디며 이기는 생활을 하라고 격려한다. 노예는 노예의 처지를 이기는 생활을 함으로써 부활의 실재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얻는다.
(부름받았을 때의) 신분이 더 낮을수록,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살 수 있는 더 많은 기회가 있다. 이것이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 영으로 기름 부어지고 발라진 사람이 되고 그 영과 합하여 한 영이 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완전히 부활 안에 있음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소제물의 네 번째 요소인 소금 역시 발견된다. 고린도에 있는 믿는 이들에게 편지할 때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관해 말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요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1:22-23상) 바울은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나 기적이나 지혜를 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했다.
4일
레위기 2장에서 우리는 소제물이 여러 다른 형태일 수 있음을 본다. 소제물은 기름을 섞은 가루의 형태이거나 과자의 형태였다. 가루 형태의 소제물은 개인적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또한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 과자 형태의 소제물은 단체적인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 상징한다. 신약은 개인적인 그리스도께서 과자로 상징되신 단체적인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계시한다(고전 12:12). 바울은 “떡이 하나이요, 우리 많은 사람이 한 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10:17)라고 말한다. 이 한 떡이 ‘과자’ 형태의 소제물이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의 몸인 교회와 함께 사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단체적인 방식으로 사신다. 그분은 머리이시며, 지체들로 이루어진 그분의 몸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과자 형태의 소제물에서 우리는 교회생활을 본다.
과자 형태의 소제물을 얻으려면, 우리는 기름을 섞은 고운 가루가 필요하다. 가루와 기름이 섞이면 반죽이 만들어진다. 그런 다음 이 반죽은 오븐에 구워져 과자가 된다. 이 과자는 교회생활의 상징이다. 이 상징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우리의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결국 하나의 총체가 되며 이 총체가 교회생활임을 가리킨다.
교회생활을 위하여 우리는 매우 인간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인성은 성령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이 인성은 성령과 연합되어야 하며 그 위에 성령이 부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생활을 위하여 우리는 기름 부어진 사람들, 곧 성령에 의해 그리고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에게 누룩이나 꿀이 있어서는 안 되며, 그 대신 소금과 유향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생활에는 많은 소금 곧 십자가의 죽음이 적용되어야 하며, 우리는 부활로 충만해야 한다. 이것이 합당한 교회생활이다.
이런 교회생활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는 인성으로 충만해야 하며, 천사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자매들 심지어 몇몇 형제들까지도 마치 자신이 천사인 것처럼 살려고 한다. 이 성도들은 독특하며, 인성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나는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인성으로 가득해야 하고, 성령에게서 독립된 인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거듭 말한다.
우리는 온전히 성령께 의존해야 하며, 내적으로 성령으로 기름 발라지고 외적으로 우리 위에 성령이 부어져야 한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그 영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영께 초점이 맞추어지고 그 영으로 점유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소금을 통과하고 유향 안에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과하고 그분의 부활 안에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소금은 죄의 세균이 가득한 누룩을 처리할 것이며, 또한 꿀을 처리하여 타고난 생명을 죽음에 넣을 것이다. 이것이 소제물인 교회생활을 갖는 길이다.
소제물인 교회생활은 불로 태워져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향기를 산출할 수 있으며, 이 제물의 나머지 부분은 우리의 음식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교회생활을 먹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생활이 우리의 매일의 공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매일의 공급인 소제물은 단지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생활이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있으며 또한 교회생활을 먹고 있다. 우리는 첫 번째 형태인 가루로 상징되는 개인적인 그리스도를 먹을 뿐 아니라, 두 번째 형태인 과자로 상징되는 단체적인 그리스도 곧 교회도 먹는다. 나는 우리가 장차 모든 교회들에서 소제물인 교회생활, 즉 하나님을 먼저 만족시켜 드리고 그다음 우리를 위한 음식이 되는 생활을 목격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3일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고운 가루이셨고, 성령으로 기름 부어지시고 발라지셨으며, 항상 소금에 절여지셨고, 부활 안에서 사시면서 유향의 향기를 지니셨다. 그러나 그분께는 누룩이나 꿀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은 소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이와 같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그리스도의 생활의 복사판, 복사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로마서 8장에는 그리스도의 인성(3절)과 생명의 영(2절)과 십자가(13절)와 부활(11절)이 하나로 함께 싸여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야 하는 생활을 보여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분은 사람이셨으며, 우리도 사람이다. 그분은 성령으로 기름 부어지시고 발라지셨으며, 우리도 적어도 약간은 성령으로 기름 부어지고 발라졌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의 영과 연합되었다. 그리스도는 소금에 절여지셨고 즉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우리 또한 우리의 타고난 존재를 죽음에 넘겨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사셨고, 우리 또한 부활 안에서 살 수 있다.
우리는 소제물이 주로 우리를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직 한 움큼만이 기념물로서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소제물의 나머지 부분, 즉 대부분은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다. 제사장들은 매일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산다. 우리는 제사장들로서 반드시 우리의 제사장 음식인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
우리가 소제물을 먹는다면, 이 제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먹는 그것이 결국 우리의 존재가 된다. 매일 우리가 우리의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먹는다면,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다’(빌 1:21).
우리는 우리가 먹는 그것에 의해 살며, 점차적으로 우리가 먹은 것이 우리의 어떠함이 된다. 소제물은 예수님의 인성과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을 포함한다. 거기에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과 소금이 있다. 이 소제물 안에는 어떤 누룩이나 꿀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사람이신 예수님의 생명 안에는 어떤 종류의 불순함이나 부패가 있을 여지가 없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예수님을 먹는다면, 우리에게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소금과 유향이 있을 것이고, 어떠한 누룩이나 꿀도 없을 것이다.
2일
유향은 달콤한 냄새가 나며 사람들에게 매우 즐거운 느낌을 준다. 성경의 예표에서, 소제물에 넣은 유향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한다.
유향은 고운 가루 위에 놓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께서 받으신 고난들을 통해 퍼져 나온 그분의 부활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비록 그분은 매우 많은 고난을 당하셨지만, 달콤한 향기 곧 그분의 부활의 향기가 풍겨 나오게 하셨다.
소제물에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들어 있다. 주 예수님은 계속하여 이 세 가지 요소 안에서 살고 행하셨다. 즉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고 그분의 부활을 표현하는 그분의 인성 안에서 사시고 행하셨다.
소제물의 네 번째 요소는 소금이다. 성경의 예표에서 소금은 그리스도의 죽음 또는 그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소금은 맛을 내고, 세균을 죽이며, 보존하는 기능을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능이다.
우리는 소제물에 네 가지 요소가 포함되지만 특별히 두 가지 다른 요소는 제외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을 아는 것이 실지적이고 상세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소제물에는 누룩이나 꿀이 없다. 누룩은 죄와 다른 부정적인 것들을 상징한다. 복음서들에서 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 사두개인들의 누룩, 헤롯의 누룩을 말씀하신다.
꿀은 타고난 사람의 생명을 상징한다. 그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의 나쁜 방면이 아닌 좋은 방면을 상징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항상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때로는 매우 선하기 때문이다. 미움은 누룩인 반면에, 천연적인 사랑은 꿀이다. 마찬가지로 교만은 누룩이지만, 천연적인 겸손은 꿀이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꿀은 발효하는데, 그 결과 꿀은 누룩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좋든 나쁘든 결과가 결국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한 이유로 창세기 2장은 선과 악의 지식나무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결과는 둘 다 누룩일 것이다.
이혼으로 끝나는 결혼 생활에서 어떤 꿀, 즉 천연적인 사랑이 발효하여 누룩이 되었다. 누룩인 미움과 꿀인 천연적인 사랑의 결과는 동일하다. 부정적인 것들은 누룩이며, 꿀로 상징되는 타고난 생명의 선한 방면도 결국 발효하여 누룩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생활은 누룩과 꿀이 없는 생활이었으며,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네 가지 긍정적인 요소들 즉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과 소금을 가져야 하지만, 두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 즉 누룩과 꿀은 가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의 상태라면, 우리는 합당한 소제물, 곧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부활 안에서 신성으로 기름 발라진 인성으로만 이루어질 뿐 누룩과 꿀은 없는 제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음식이며,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인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결혼 생활과 가정생활에서 부활 안에 살아야 한다. 여러분의 결혼 생활에서 여러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어떤 일이 발생했다고 해 보자. 그럴 때 여러분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명을 산다면 분명히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을 살지 않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계시된 생명을 살 수 있다. 이 절에서 바울은 먼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소금을 체험하는 문제, 즉 죽음에 넘겨지고 십자가로 제해지는 문제이다. 그런 다음 바울은 이어서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부활이다.
신언노트, 2023 05 14
소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누림으로
소제물인
그리스도인 생활과
소제물인
교회생활을 하여,
위대한 소제물인
새 예루살렘,
곧 삼일 하나님과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연합의 궁극적인 완결인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됨
그 소제물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고
한 소제물 그리스도인 생활과
또 한 소제물 교회생활을 가져,
한 큰 소제물인
그 새 예루살렘,
곧 그 삼일 하나님의
세 부분으로 된 그 사람과의 섞임의
궁극적인 완결 안으로 완결됨
고운 가루는
소제물의 주된 요소이다.
이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우리가
외적으로는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거칠다.
인류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만이
온화한 분이시다.
그분만이
고운 가루이시다.
그분은
거칠지 않으시다.
그분의 인성은
곱고 온전하며
균형 잡혔고 모든 면에서 합당하다.
앞뒤, 위아래, 좌우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그분은 합당하시다.
소제물의 고운 가루는
많은 과정,
즉 씨가
뿌려지고,
땅에 묻혀 죽고,
자라고,
비바람과 서리를 맞고,
태양에 쪼인 다음
거두어지고, 탈곡되며,
체질되고, 빻아지는
과정을 거친 밀에서
얻어진다.
이러한 과정들은
그분을
‘슬픔의 사람’(사 53:3)으로
만들었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다양한 고난들을
상징한다.
고운 가루는
고움, 공평함,
부드러움, 온화함의 방면에서
완전하고, 완전히 균형 잡혔으며,
지나침이나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과 일상의 행동이
아름답고 뛰어나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분의 인성은
우리의 타고난 타락한 인성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소제물의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이시며,
사람으로서
뛰어난 인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분께는 또한
신성한 요소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영이다.
신성한 요소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 자체이다.
소제물로서
그리스도는
기름으로 충만하시다.
심지어 우리는
그분께서
‘기름 발라지셨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분은
기름과 섞이셨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과
섞였다는 뜻이다.
소제물에서
기름은
고운 가루 위에 부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그리스도 위에
부어지신 것을
상징한다.
주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기 위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사람이시다.
섞임이 없었다면
그분께서 어떻게
하나님-사람으로서
사실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분의 인성과
섞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섞임은 확실히
한 세번째 요소,
즉 신성하지도 않고
인간적이지도 않은
무언가를 산출하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히
‘섞이다’라는 그 단어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아니다.
우리는
〈웹스터 새 국제 사전 제3판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에 있는
정의에 동의하는데,
거기서 ‘섞이다’는
‘다른 어떤 것과
함께 또는 같이
합치거나 결합하여
그 구성 요소들이
그 조합 안에서
구분될 수 있게 남아 있다’로
정의된다.
두 가지 요소가
이와 같이 섞일 때,
그 요소들은 여전히
각각 구별되며,
한 세번째 요소가
산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으로서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분의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각각 구별되며,
한 세번째 본성이
산출되지 않는다.
이것은
신약에 계시되어 있으며
레위기 2장에
예표로 묘사되어 있다.
그 기름과 또 고운 가루가
섞이지만(연합되지만),
각 요소의 본질은
구별되게 남아 있고,
또 한 세번째 요소가
산출되지 않는다.
이것이 섞임의
정확한(올바른) 이해이다.
우리의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과 인성,
두 방면 모두에서
탁월하시다.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의 이 속성들은
그리스도의 인간 미덕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간 미덕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인간 미덕들 안에서
표현된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보다
더 높은 수준의
윤리와 도덕성을 지니셨다.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어떠함이
인간 미덕들을 지닌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어떠함에
더해졌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이며,
이 탁월함은
신성과 인성의 섞임의
산출물이다.
소제물은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소제물의 주된 요소인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곱고 온전하며
부드럽고 균형 잡혔으며
모든 면에서 합당하여
지나침이나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과 일상의 행동이
아름답고 뛰어나다는 것을
상징한다.
소제물의 기름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요소이신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그 소제물 안에
고운 가루가
그 기름과
섞인(연합된)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 성령과 섞이고,
또 그분의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과
섞여,
그분께서
한 하나님-사람이 되시고,
그 신성한 본성과
또 그 사람의 본성을
구별되게 소유하시며,
한 세번째의 본성이
산출되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유향은
달콤한 냄새가 나며
사람들에게
매우 즐거운 느낌을 준다.
성경의 예표에서,
소제물에 넣은 유향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한다.
유향은
고운 가루 위에 놓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께서 받으신
고난들을 통해 퍼져 나온
그분의 부활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비록 그분은
매우 많은 고난을 당하셨지만,
달콤한 향기
곧 그분의 부활의 향기가
풍겨 나오게 하셨다.
소제물에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들어 있다.
주 예수님은 계속하여
이 세 가지 요소 안에서
살고 행하셨다.
즉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고
그분의 부활을 표현하는
그분의 인성 안에서
사시고 행하셨다.
소제물의 네 번째 요소는
소금이다.
성경의 예표에서
소금은
그리스도의 죽음
또는 그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소금은
맛을 내고,
세균을 죽이며,
보존하는
기능을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능이다.
우리는 소제물에
네 가지 요소가 포함되지만
특별히 두 가지 다른 요소는
제외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을 아는 것이
실지적이고 상세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소제물에는
누룩이나 꿀이 없다.
누룩은
죄와 다른 부정적인 것들을
상징한다.
복음서들에서
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
사두개인들의 누룩,
헤롯의 누룩을
말씀하신다.
꿀은
타고난 사람의 생명을
상징한다.
그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의
나쁜 방면이 아닌
좋은 방면을 상징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항상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때로는 매우 선하기 때문이다.
미움은
누룩인 반면에,
천연적인 사랑은
꿀이다.
마찬가지로 교만은
누룩이지만,
천연적인 겸손은
꿀이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꿀은 발효하는데,
그 결과
꿀은 누룩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좋든 나쁘든
결과가 결국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한 이유로
창세기 2장은
선과 악의 지식나무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결과는
둘 다 누룩일 것이다.
이혼으로 끝나는
결혼 생활에서
어떤 꿀,
즉 천연적인 사랑이
발효하여
누룩이 되었다.
누룩인 미움과
꿀인 천연적인 사랑의
결과는 동일하다.
부정적인 것들은 누룩이며,
꿀로 상징되는
타고난 생명의 선한 방면도
결국 발효하여
누룩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생활은
누룩과 꿀이
없는 생활이었으며,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네 가지 긍정적인 요소들
즉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과 소금을
가져야 하지만,
두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
즉 누룩과 꿀은
가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의 상태라면,
우리는
합당한 소제물,
곧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부활 안에서
신성으로 기름 발라진
인성으로만 이루어질 뿐
누룩과 꿀은 없는
제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음식이며,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인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우리는
결혼 생활과 가정생활에서
부활 안에 살아야 한다.
여러분의 결혼 생활에서
여러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어떤 일이 발생했다고
해 보자.
그럴 때 여러분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명을 산다면
분명히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을 살지 않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계시된
생명을 살 수 있다.
이 절에서
바울은 먼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소금을 체험하는 문제,
즉 죽음에 넘겨지고
십자가로 제해지는 문제이다.
그런 다음
바울은 이어서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이 부활이다.
소제물에 넣은
유향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한다.
유향을
고운 가루 위에 놓은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의 부활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사복음서에 묘사된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연합된 생활을 하셨으며,
그분께서 받으신
고난들을 통해
부활을 표현하셨다.
영으로 충만하고
부활로 적셔진
그리스도의 생활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향기였으며,
하나님께
안식과 평안과
기쁨과 누림과
완전한 만족을 드렸다.
소제물에 쳐진
소금은
그리스도의 죽음
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소금의 기능은
맛을 내고,
세균을 죽이며,
보존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항상
소금이 쳐진 생활,
십자가 아래 있는 생활을 하셨다.
심지어 그분은
실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시며
그분 자신과
그분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시고
부활 안에서
아버지의 생명을 사셨다.
하나님의 언약의 기본 요인은
소금으로 상징된 십자가,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보존되어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이 된다.
소제물에
누룩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죄나 부정적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소제물에
꿀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천연적인 애정이나
천연적인 선함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고운 가루이셨고,
성령으로
기름 부어지시고 발라지셨으며,
항상 소금에 절여지셨고,
부활 안에서 사시면서
유향의 향기를 지니셨다.
그러나 그분께는
누룩이나 꿀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은
소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이와 같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그리스도의 생활의
복사판, 복사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로마서 8장에는
그리스도의 인성(3절)과
생명의 영(2절)과
십자가(13절)와
부활(11절)이
하나로 함께 싸여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야 하는
생활을 보여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분은 사람이셨으며,
우리도 사람이다.
그분은
성령으로
기름 부어지시고 발라지셨으며,
우리도
적어도 약간은
성령으로
기름 부어지고 발라졌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의
영과 연합되었다.
그리스도는
소금에 절여지셨고
즉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우리 또한
우리의 타고난 존재를
죽음에 넘겨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사셨고,
우리 또한
부활 안에서 살 수 있다.
우리는
소제물이 주로
우리를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오직 한 움큼만이
기념물로서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소제물의 나머지 부분,
즉 대부분은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다.
제사장들은 매일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산다.
우리는
제사장들로서 반드시
우리의 제사장 음식인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
우리가
소제물을 먹는다면,
이 제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먹는
그것이 결국
우리의 존재가 된다.
매일 우리가
우리의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먹는다면,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다’
(빌 1:21).
우리는
우리가 먹는
그것에 의해 살며,
점차적으로
우리가 먹은 것이
우리의 어떠함이 된다.
소제물은
예수님의 인성과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을
포함한다.
거기에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과 소금이 있다.
이 소제물 안에는
어떤 누룩이나 꿀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사람이신 예수님의 생명 안에는
어떤 종류의
불순함이나 부패가 있을
여지가 없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예수님을 먹는다면,
우리에게는
고운 가루와 기름과
소금과 유향이 있을 것이고,
어떠한 누룩이나 꿀도
없을 것이다.
소제물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사람의 생활의
복사판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예표한다.
우리는
우리의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제사장 음식으로
날마다 누려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는
신성하게 부요해진
인성 안에서
또다시 이 땅에서
우리를 통해
사실 수 있다.
우리가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먹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먹은
그것이 되고
우리가 먹은
그것에 의해
살 것이다.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말씀 안에 응축되신
그 영을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 생명과
인간 생활을 먹고,
예수님으로 조성되며,
예수님의 인간 생활이
우리의 인간 생활이 된다.
이러한 인간 생활에는
신성하게 부요해진
그분의 인성의
다음과 같은 특징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인성은
모든 의를 이룬다.
예수님의 인성은
쉴 곳이 없다.
예수님의 인성은
마음이 겸허하다.
예수님의 인성은
연약한 이들을 사랑한다.
예수님의 인성은
융통성이 있다.
예수님의 인성은
다른 이들을 섬긴다.
예수님의 인성은
사람들을 보살핀다.
예수님의 인성은
부주의하지 않고
질서 정연하다.
예수님의 인성은
시간의 제한을 받는다.
예수님의 인성은
유일무이하다.
예수님의 인성은
울어야 할 때를 안다.
예수님의 인성은
겸손하다.
레위기 2장에서
우리는
소제물이
여러 다른 형태일 수 있음을
본다.
소제물은
기름을 섞은
가루의 형태이거나
케이크의(빵의, 과자의) 형태였다.
가루 형태의 소제물은
개인적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또한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
케이크 형태의 소제물은
단체적인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
상징한다.
신약은
개인적인 그리스도께서
그 케이크로 상징되신
단체적인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계시한다.
바울은
“떡이 하나이요,
우리 많은 사람이 한 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 한 떡이(이 한 빵이)
한 ‘케이크’이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의 몸인
교회와 함께 사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단체적인 방식으로 사신다.
그분은
머리이시며,
지체들로 이루어진
그분의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한 케이크의 형태 안에 있는
그 소제물과 함께
우리는
그 교회생활을 가진다.
한 케이크 소제물을
가지려면,
우리는
기름을 섞은
고운 가루를 필요로 한다.
가루와 기름이 섞이면
반죽이 만들어진다.
그런 다음 이 반죽은
오븐에 구워져
케이크가(빵이, 과자가) 된다.
이 케이크는
그 교회생활의 한 상징이다.
이 상징은
그리스도의 생명과
우리의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결국 하나의 총체가 되며
이 총체가
그 교회생활임을 가리킨다.
교회생활을 위하여
우리는
매우 인간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인성은
성령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것은
성령과 섞이는
또 그 위에 쏟아지는
성령을 가지는
한 인성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생활을 위하여
우리는
기름 부어진 사람들,
곧 성령에 의해
그리고 성령으로
기름 부어진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에게
누룩이나 꿀이 있어서는 안 되며,
그 대신 소금과 유향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생활에는
많은 소금
곧 십자가의 죽음이
적용되어야 하며,
우리는
부활로 충만해야 한다.
이것이
합당한 교회생활이다.
이런 교회생활을
가지고자 한다면
우리는
인성으로 충만해야 하며,
천사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자매들
심지어 몇몇 형제들까지도
마치 자신이 천사인 것처럼
살려고 한다.
이 성도들은
독특하며,
인성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나는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인성으로 가득해야 하고,
성령에게서 독립된
인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거듭 말한다.
우리는 온전히
성령께 의존해야 하며,
내적으로
성령으로 기름 발라지고
외적으로
우리 위에 성령이 부어져야 한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그 영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영께
초점이 맞추어지고
그 영으로
점유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소금을 통과하고
유향 안에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과하고
그분의 부활 안에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소금은
죄의 세균이 가득한
누룩을 처리할 것이며,
또한 꿀을 처리하여
타고난 생명을
죽음에 넣을 것이다.
이것이
소제물인 교회생활을
가지는 길이다.
소제물인 교회생활은
불로 태워져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향기를 산출할 수 있으며,
이 제물의 나머지 부분은
우리의 음식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교회생활을
먹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생활이
우리의 매일의 공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매일의 공급인
소제물은
단지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생활이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있으며
또한 교회생활을 먹고 있다.
우리는
첫 번째 형태인
가루로 상징되는
개인적인 그리스도를 먹을 뿐 아니라,
두 번째 형태인
과자로 상징되는
단체적인 그리스도
곧 교회도 먹는다.
나는 우리가
장차 모든 교회들에서
소제물인 교회생활,
즉 하나님을 먼저 만족시켜 드리고
그다음 우리를 위한 음식이 되는
생활을 목격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생활과
우리 개인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은
결국 하나의 총체,
곧 단체적인 소제물인
교회생활을 가져온다.
그러한 생활은
성령과 섞인 인성의 한 생활이며
또 그 위에 쏟아진
성령을 가지는 한 생활이다.
거기에는
소금과 유향은 있지만
누룩이나 꿀은 없다.
두 형태의 소제물,
곧 개인적인 그리스도와
또 단체적인 그리스도
곧 그 교회생활은 모두
하나님의 만족과
또 우리의 영양 공급을 위한
음식이다.
소제물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도록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으로 이끄는
섞임의 예표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7절에서
바울은
‘떡이 하나이요,
우리 많은 사람이 한 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교회가 한 떡이라는
바울의 사상은
구약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레위기 2장 4절에 나오는
소제물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케이크들로 이루어진다.
그 고운 가루의
각각의 모든 부분들이
그 기름과
버무려지거나(혼합되거나),
또는 섞였다.
그것이 섞임이다.”
소제물로 예표된 것처럼
우리가 함께 섞임으로
실현되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온전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의
단체적인 생활이다.
이들은
진정한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생명에 의해 살지 않고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살고 있으며,
자신들의 인간 미덕들을 통해
그분의 속성들을 표현해 왔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계속해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자아를 부인함으로써,
그리고 또 다른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삶으로써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몸을 고르게 섞으셨다.
‘섞이다’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차이점들을 잃어버리는 것을
함축하며,
또한 ‘조화되다(잘 배합되다)’,
‘조절되다(순응되다)’,
‘연합되다(섞이다)’,
‘고르게 되다(완화되다, 반죽되다)’를
의미한다.
몸의 생활,
곧 소제물인
교회생활 안에서
섞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통과하고,
그 영에 의해
모든 것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해야 한다.
이 모든 요점은
우리가
교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통은
우리를 섞는다.
즉 우리를
고르게 하고
조정하며
조화되게 하고
연합되게 함으로,
우리의 차이점들을
잃어버리게 하고,
교회생활과 일에
우리 개성의 자국을 남기는 것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모든 것이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실 수 있게 한다.
“우리는
함께 동역하는
다른 성도들과
교통하지 않은 채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교통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
멈출 것을 요구한다.
교회생활과
주님의 일에서
우리가 동역할 때,
우리는 모두
교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섞임은
우리가
다른 이들과 교통하기 위해
항상 멈추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소제물이 되기 위해
가장 높은 인성을 가진
생활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십시오.”(고전 16:13)라고 말한
이유이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에 따르면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가
높아진 고양된
인성을 지녀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자신을 절제하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혜와 사랑의 측면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높아진 인성을 가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 우리는
참된 고운 가루를
볼 수 있다.
이 책은 분명히
소제물의 교회생활을
제시한다.
소제물의 두 번째 요소는
기름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고린도전서는
그 영에 관해
많이 언급한다.
바울은
2장과 3장에서
하나님의 영에 대해
말한다.
그는
2장 4절에서
“나의 말과 선포를
… 그 영…을 나타내면서 한 것은”
이라고 말하고,
12절에서는
“하나님에게서 오신
그 영을 받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우리가
알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3장 16절에서 이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영을 받았고,
지금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 영과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교회생활을 할 수 없다.
교회생활은
성령에 의해
그리고 성령으로
기름 부어지고
기름 발라진
인성의 생활이다.
우리는
성령과 하나이며,
이 하나 안에
머물러야 한다.
고린도전서에서 우리는 또한
유향,
즉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본다.
사실상 15장 전체가
부활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격려의 말을 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님들,
여러분은
견고하여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고전 15:58)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생명 안에서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수고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하여
그분의 부활 안에서 하는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믿는 이들에게
그들이 부름받은
신분 안에
그대로 머물라고
명령한다.
“형제님들,
각 사람이
어떤 신분에서
부름을 받았든지
하나님과 함께
그대로 지내십시오.”
(24절)
그는
노예를
다음과 같이
예로 든다.
“그대가
노예로 있을 때에
부름을 받았습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라도
노예의 신분 그대로 지내십시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은
노예라도
주님께 속한 자유인이요”
(21-22상절).
바울은
노예였던 믿는 이들에게
해방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들이 부름받았을 때의 신분,
즉 노예의 신분을 유지하고
그 처지를 견디며
이기는 생활을 하라고
격려한다.
노예는
노예의 처지를
이기는 생활을 함으로써
부활의 실재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얻는다.
(부름받았을 때의)
신분이 더 낮을수록,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살 수 있는
더 많은 기회가 있다.
이것이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 영으로
기름 부어지고 발라진 사람이 되고
그 영과 합하여
한 영이 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완전히 부활 안에 있음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다.
고린도전서에서
소제물의 네 번째 요소인
소금 역시 발견된다.
고린도에 있는 믿는 이들에게
편지할 때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관해
말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요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1:22-23상)
바울은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나
기적이나 지혜를
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소제물인 교회생활을
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람이시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사람이 되십시오.”
(고전 16:13)라고 명령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높은 인성, 높아진 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인성에는
비범한 사랑, 끝없는 관용,
비할 데 없는 신실함, 절대적인 겸손,
최고의 순수함, 지고한 거룩함과 의,
밝음과 올곧음과 같은
최고의 미덕들이 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여
그분의 오심
(헬. 파루시아, ‘임재’를 의미함)을
고대한다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성으로 소유하는
영역 안에 지켜질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이들의 인성은
그들이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자신을 지켜
주님을 극도로 사랑함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적시는 이슬로 잉태되도록
헌신의 광채와 아름다움 안에서
매일 자신을 기꺼이
주님께 드림으로
지켜진다.
교회생활은
그 영에 의해,
또 그 영으로
기름 발라지고
또 그 영께 결합되는
인성의
섞이는 한 생활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 주시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를 향하여
날마다 죽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부름받은 신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소유함으로써
부활의 실재를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과
타고난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부활 생명과
부활 능력이신
주님에 의해
수고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 안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룩 없는 잔치로,
즉 순수하고 진실한
생명 공급으로
누려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온전히 순수하시고
혼합된 것이 없으시며
실재가 충만하시다.
교회생활 안에서
타고난 생명은
소금,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죽음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각 지방에 있는 교회가
소제물이 되어
그분을 만족하게 하고,
날마다 성도들에게
충분한 공급을 주기를
갈망하신다.
이것은
교회생활이
우리의 매일의 공급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교회생활을
먹을 것임을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은
삼일 하나님과 사람의 섞임의
최종 완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뿐 아니라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결합하시고
또 우리와 섞으시기 위해서
아주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다.
새 예루살렘은
물질적인, 하늘에 속한 한 저택보다
훨씬 더 좋다.
그것은
삼일 하나님과
그분께서
구속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변화시키신
사람들의
완전한 섞임이다.
하나님의 사람과의 섞임은
레위기 2장 4절에 있는 예표인,
고운 가루와 기름이 섞인
소제물로 나타난다.
그 새 예루살렘 전체가
그 기름과 섞인
그 고운 가루일 것이다.
삼일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와 섞이고 계시며,
또 이 섞임은
새 예루살렘으로(안에서)
완결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있는
열두 기초들과,
열두 지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
열두 진주들로 되어 있는
열두 문들과,
또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다
(생명의 나무의 열두 열매들이 있다).
공간적으로 볼 때,
성(城)의 본체는(그 도시 자체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각각 열둘의 천 배인
만 이천 스타디온이며,
그 성벽의 높이는
열둘의 열두 배인
백사십사 규빗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매년 열두 달이 있고,
매일 낮 열두 시간과
밤 열두 시간이 있다.
열둘은
새 예루살렘의 숫자이다.
그 거룩한 도시의
그 네 면들 각각에
세 개의 문들이 있다.
그러므로 네 면들에
총 열두 문들이 있다.
숫자 4는
하나님의 창조물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4장 6절에서
우리는
다른 모든 생물들을 대표하는
네 생물들을 본다.
숫자 4는
하나님의 창조물들인
우리를 가리키고,
숫자 3은
삼일 하나님을 가리킨다.
숫자 12는
3 곱하기 4로 된
연합된 또는 섞인 숫자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 전체가
삼일 하나님과
우리 사람의
한 섞임 또는 연합임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 새 예루살렘 안에서의
그분의 영원한 행정 안에서
그분의 창조물인 사람과
섞이신다.
숫자 12는
하나님의 행정이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영원히 완성되었음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열두 지파들을 통하여
그분의 통치를 수행하셨다.
신약에서
열두 사도들의 전파는
교회들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교회들은
하나님의 행정을 위한
그분의 통치이다.
숫자 12는
하나님의 통치적인 행정을 가리키며,
새 예루살렘 전체는
하나님의 행정의
완결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의 중심이
하나님의 왕좌인 이유이다.
이 왕좌는 주로
하나님의 통치적인 행정을 위해 있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다만 한 단체적인 생활이 아니라
거듭났고, 변형되었으며, 영광스럽게 된
세 부분으로 된 하나님-사람들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계시는
삼일 하나님과의
영원한 합일 안에서
섞이는 생활이다.
이 삼일 하나님께서는 바로
과정을 거치셨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이시며,
이 그리스도께서는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의 실재이신
또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영이시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인
그러한 섞이는 생활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증가와 표현인
그 새 하늘과 또 새 땅 안에 있는
그 새 예루살렘 안으로
완결될 것이다.
그러한 섞이는 생활을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결코
누구에게도
어려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서 구출되었고
변형되었으며
또 온전하게 되었다.
삼일 하나님과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섞임인
새 예루살렘은
한 위대한 소제물,
곧 삼일 하나님의
세 부분으로 된 사람과의 섞임의
궁극적인 완결일 것이다.
새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숫자 12는
새 예루살렘이
삼일 하나님(3)과
그분의 피조물인 사람(4)의
섞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새 예루살렘은
과정을 거치셨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과정을 거쳤고 완결된
세 부분으로 된 교회와의
섞임이다.
결국, 그 삼일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와 결합되고, 섞이며, 또 합병된
그 새 예루살렘이 되신다.
1일
고운 가루는 소제물의 주된 요소이다. 이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우리가 외적으로는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거칠다. 인류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만이 온화한 분이시다. 그분만이 고운 가루이시다. 그분은 거칠지 않으시다. 그분의 인성은 곱고 온전하며 균형 잡혔고 모든 면에서 합당하다. 앞뒤, 위아래, 좌우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그분은 합당하시다.
소제물의 고운 가루는 많은 과정, 즉 씨가 뿌려지고, 땅에 묻혀 죽고, 자라고, 비바람과 서리를 맞고, 태양에 쪼인 다음 거두어지고, 탈곡되고, 체질되고, 빻아지는 과정을 거친 밀에서 얻어진다. 이러한 과정들은 그분을 ‘슬픔의 사람’(사 53:3)으로 만들었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다양한 고난들을 상징한다.
고운 가루는 고움, 공평함, 부드러움, 온화함의 방면에서 완전하고, 완전히 균형 잡혔으며, 지나침이나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과 일상의 행동이 아름답고 뛰어나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분의 인성은 우리의 타고난 타락한 인성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소제물의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이시며, 사람으로서 뛰어난 인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분께는 또한 신성한 요소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영이다. 신성한 요소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 자체이다.
소제물로서 그리스도는 기름으로 충만하시다. 심지어 우리는 그분께서 ‘기름 발라지셨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분은 기름과 연합되셨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었다는 뜻이다.
소제물에서 기름은 고운 가루 위에 부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그리스도 위에 부어지신 것을 상징한다.
주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기 위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사람이시다. 연합이 없었다면 그분께서 어떻게 하나님-사람으로서 사실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분의 인성과 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연합은 단연코 제삼의 요소, 즉 신성한 것도 아니며 인간적인 것도 아닌 무언가를 산출하지 않았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연합되다’의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웹스터 새 국제 사전 제3판(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에 있는 정의에 동의하는데, 거기서 ‘연합되다’는 ‘어떤 것이 다른 것과 결합할 때 각각의 구성 요소는 여전히 식별 가능한 채로 함께 묶이거나 합쳐지다’로 정의된다. 두 가지 요소가 이와 같이 연합될 때, 그 요소들은 여전히 각각 구별되며, 제삼의 요소는 산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으로서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갖고 계시는데, 그분의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각각 구별되며, 제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약에 계시되어 있으며 레위기 2장에 예표로 묘사되어 있다. 기름과 고운 가루는 섞였지만(연합되었지만), 각 요소의 본질은 여전히 구별되며 제삼의 요소를 산출하지 않는다. 이것이 연합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우리의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과 인성, 두 방면 모두에서 탁월하시다.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갖고 계시며, 하나님의 이 속성들은 그리스도의 인간 미덕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인간 미덕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인간 미덕들 안에서 표현된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보다 더 높은 수준의 윤리와 도덕성을 지니셨다. 신성한 속성들을 지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어떠함이 인간 미덕들을 지닌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어떠함에 더해졌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이며, 이 탁월함은 신성과 인성의 연합의 산출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