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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소제물에 대한 이상과 누림

소제물은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사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소제물의 주된 요소인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곱고 온전하며 
부드럽고 균형 잡혔으며 
모든 면에서 합당하여 
지나침이나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과 
일상의 행동이 
아름답고 뛰어나다는 것을 
상징한다.

소제물의 기름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요소이신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소제물을 만들 때 
고운 가루와 기름을 연합시킨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령과 연합된 것을 상징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과 
연합된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하나님-사람이 되셨다. 
이 하나님-사람은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계신데, 
그분의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각각 구별되며,
제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는다.

소제물에 넣은 유향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한다. 
유향을 
고운 가루 위에 놓은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의 부활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사복음서에 묘사된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과 인성이 연합된 
생활을 하셨으며, 
그분께서 받으신 고난들을 통해 
부활을 표현하셨다.

영으로 충만하고 
부활로 적셔진 
그리스도의 생활은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향기, 
곧 하나님께 
안식과 평안과 
기쁨과 누림과 
완전한 만족을 드리는 
향기였다.

소제물에 쳐진 소금은 
그리스도의 죽음 
또는 십자가를 
상징한다. 
소금의 기능은 
맛을 내고, 
세균을 죽이며, 
보존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항상 소금이 쳐진 생활, 
십자가 아래 있는 생활을 하셨다.

심지어 그분은 
실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시며 
그분 자신과 그분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시고 
부활 안에서 아버지의 생명을 사셨다.

하나님의 언약의 기본 요인은 
소금으로 상징된 십자가,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보존되어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이 된다.

소제물에 누룩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죄나 부정적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소제물에 꿀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천연적인 애정이나 천연적인 선함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소제물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사람의 생활의 복사판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예표한다.

우리가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먹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먹은 
그것이 되고 
우리가 먹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말씀 안에 구체화되신 
그 영을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 생명과 인간 생활을 먹고
예수님으로 조성되며, 
예수님의 인간 생활은 
우리의 인간 생활이 된다. 
이러한 인간 생활에는 
신성하게 부요해진 
그분의 인성의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예수님의 인성은 
모든 의를 이룬다.

2. 예수님의 인성은 
안식할 곳이 없다.

3. 예수님의 인성은 
마음이 겸허하다.

4. 예수님의 인성은 
연약한 이들을 사랑한다.

5. 예수님의 인성은 
융통성이 있다.

6. 예수님의 인성은 
다른 이들을 섬긴다.

7. 예수님의 인성은 
사람들을 소중히 보살핀다.

8. 예수님의 인성은 
부주의하지 않고 질서 정연하다.

9. 예수님의 인성은 
시간의 제한을 받는다.

10. 예수님의 인성은 
유일무이하다.

11. 예수님의 인성은 
울어야 할 때를 안다.

12. 예수님의 인성은 
겸손하다.

소제물은 
온전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의 
단체적인 생활인 
교회생활을 
예표한다.

그리스도의 생활과 
우리의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의 총체, 
곧 단체적인 소제물인 
교회생활로 귀결된다.

우리는 
소제물인 교회생활을 
고린도전서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람이시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 사람이 되십시오.”
(고전 16:13)
라고 당부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높은 인성, 높여진 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생활은 
그 영에 의해 
그리고 그 영으로 
기름 발라지고, 
그 영과 합해진 
인성의 생활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 주시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반드시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에 대하여 죽음으로, 
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부름받은 
그 신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부활의 실재를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과 타고난 재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부활 생명과 능력이신 
주님에 의해서 
수고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문제들의 해결책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누룩 없는 잔치이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교회생활 안에서 
타고난 생명은 반드시 
소금에 의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죽임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각 지방에 있는 교회가 
소제물이 되어 
그분을 만족하게 하고, 
날마다 
성도들에게 
충분한 공급을 주기를 
갈망하신다. 
이것은 
교회생활이 
우리의 매일의 공급이 될 것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교회생활을 
먹을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소제물에 관한 
법을 보아야 한다. 
제물에 관한
법은 
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관한 
규례와 규정이다. 
제물의 실재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제물에 관한 법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 
곧 생명의 영의 법과 
일치한다. 
제물에 관한 법은 심지어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일에서도 
무질서해지지 않고
생명의 법의 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호와 앞’은 
소제물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께 바쳐지는 것을 의미하고,
‘제단 앞’은 
제단이 
십자가의 예표이므로, 
소제물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과 연관되어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제물 중에서 
고운 가루 일부와 
기름의 일부와 
유향 전부는 
하나님의 음식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탁월하고 온전하고 영으로 충만하고 
부활로 적셔진 
생활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하나님의 누림을 위한 
음식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몫은 
하나님을 
매우 만족시켜 드렸기 때문에 
기념물이 되었다.
소제물의 나머지 부분, 
즉 유향이 빠진 
고운 가루와 
기름은
섬기는 제사장들을 위한 
음식이었다.

번제물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음식인 데 반해, 
소제물은 
우리를 만족시키는 
우리의 음식이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몫이기도 하다. 
합당한 경배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고,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로 
우리가 만족하며, 
이러한 만족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모든 소제물은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 바쳤는데,
이것은 
음식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지신, 
인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시험하는 불을 
통과하신 것을 
상징한다. 
레위기 2장의 불은 
태워 버리는 불이신 
하나님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소제물을 
불로 태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그분을 만족시키는 음식으로 
기쁘게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상징한다.

소제물은 
평범한 음식이 
아니었다. 
소제물은 
오직 교회생활 안에서 
실지적으로 참되게 
복음의 제사장 직분 안에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믿는 이들을 위한 
음식이었다.

소제물 중에서 
제사장의 몫을 
누룩을 넣지 않고 
거룩한 곳에서 
먹는 것은 
우리의 봉사를 위해 
죄(누룩) 없는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분별된 거룩한 곳에서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회막이 
교회의 예표이기 때문에 
회막의 뜰에서 
소제물을 먹는 것은 
우리가 교회생활의 영역 안에서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제물을 구울 때에 
누룩을 넣지 않은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께 참여하기 위하여 
수고할 때에 
결코 
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제물에 관한 
법을 설명하면서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을 
언급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누리려면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 있는 
죄와 
우리의 행위에 나타난 
죄들(잘못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이들은 
신성한 생명 안에서 
강한 이들(남자)이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 
곧 하나님의 제사장들(아론의 아들들)이어야 한다.

아론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소제물을 바친 것은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제사장의 봉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의 소제물인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의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바쳐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의 
최고의 몫, 
곧 십분의 일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누림이 
우리의 제사장 봉사에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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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plies on “소제물에 대한 이상과 누림”

6일

레 6:17-18 
“거기에 
누룩을 넣어 
구워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내가 
나의 화제물 가운데서 
그들의 몫으로 
주는 것이다. 
그것은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처럼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 
아론의 자손 가운데 
모든 남자는 
그것을 먹어야 한다. 
이것은 
여호와에게 바치는 
화제물과 관련하여 
너희가 대대로 지켜야 할 
영구한 율례이다. 
누구든지 
이 제물을 만지는 사람은 
거룩하게 된다.”

소제물에 대해 
레위기 6장 17절 상반절은
“거기에 
누룩을 넣어 
구워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한다. 
소제물을 구울 때 
누룩을 넣지 않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일에 
죄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제물은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처럼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

(레 6:17하). 
여기서 소제물은 
속죄제물과 속건제물과 연관되어 
언급되고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제물들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속죄제물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 있는 
죄를 처리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서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처리해야 한다. 
속건제물은 
우리의 행위에 나타난 
죄들을 처리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서 
누리고자 한다면, 
죄뿐 아니라 
우리의 죄들도
처리해야 한다.

우리는 
제사장 봉사를 위한 
매일의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 
이 누림이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 있는 
죄를 처리하는 것과 
또한 우리의 행위에 나타난
죄들을 처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한 처리 없이
소제물을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죄를 범하게 된다. 
우리의 
내적인 죄와 외적인 죄들을 
처리하지 않고서는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취할 수 없다. 
이것이 소제물과 함께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 
언급되는 이유이다.

레위기 6장 18절 상반절에서 
우리는 
아론의 자손 가운데 
모든 남자가 
소제물을 먹을 수 있음을 
본다. 
이것은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이들은 
신성한 생명 안에서 
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제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 
강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느끼며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거의 매일 
주님께
“주님, 
우리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라고 강하게 간구한다. 
우리의 상황은 아마도 
주님의 긍휼만을 
바라야 하는 
상황일 것이다. 
소제물에 관한 법에 포함된 
이러한 특별한 규례에 따르면, 
사실상 우리는 
소제물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우리는 
아론의 자손 가운데 있는 
남자들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성도들 가운데서 
신성한 생명 안에서 
더 강한 이들이 아니다.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신성한 생명 안에서 
더 강한 이들이다.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를 
어느 정도 누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그분을 많이 누리지 못한다. 
우리의 누림이 부족한 것은 
우리가 신성한 생명에 관해서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생명이 어리며 
연약하다. 
우리는 
합당한 남자들이 아니다. 
… 우리는 
자신이 
신성한 생명 안에서 
충분히 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우리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아론의 자손 가운데 있는 
남자들이 
소제물을 먹는 것은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섬기는 이들, 
곧 제사장들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서도 
일상적인 일을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누림에 
참여할 수 없다. 
이럴 경우에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우리의 생각은 
실지 상황과 
맞지 않다.

레위기 6장 20절은
“아론이 
기름 부음을 받는 날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여호와에게 바쳐야 할 
제물은 이러하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제사장의 봉사와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20절 하반절은
“매일의 소제물로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절반은 아침에, 
절반은 저녁에 
바쳐야 한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의 
십분의 일,
곧 최고의 몫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우리의 제사장 봉사에 
항상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소제물의 절반은 
아침에 드려졌고 
나머지 절반은 
저녁에 드려졌다.
이것은 
제사장 봉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5일

레 6:14 
소제물에 관한 
법은 이러하다. 
아론의 아들들은 
제단 앞에서 
여호와 앞에 
그것을 바쳐야 한다.

레 6:16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한다. 
곧 회막의 뜰에서 
그것을 먹어야 한다.

레위기 6장 14절에서 
소제물을
‘여호와 앞’에 
바친다는 것은 
소제물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제물이 
제단 앞에서 
바쳐지는 것은 
소제물이 
십자가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구속과 
연관되어 바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단은 
십자가의 예표이다. 
구약에는 
제단이 있고, 
신약에는 
십자가가 있다. 
그러므로 ‘제단 앞’은 
십자가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구속과 
연관된다는 것을 뜻한다. 
소제물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께 바쳐지지만, 
십자가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구속과 연관되어 
바쳐져야 했다.

레위기 6장 16절은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한다. 
곧 회막의 뜰에서 
그것을 먹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위한 
소제물의 몫, 
곧 제사장의 봉사 안에 있는 
제사장들을 위한 몫에 관해 
말한다.

레위기를 고찰하고 있는 요즈음에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 우리 가운데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제사장의 음식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누가 제사장들이며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 나는 레위기가 
제사장들을 위한 책이라는 
이 한 가지 요점을 
강하게 지적하고자 하는 
부담이 있다. 
… 우리는 모두 
우리의 길을
재고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믿는 이들인가? 
우리는 
제사장인 믿는 이들인가, 
아니면 일반적인 믿는 이들인가?

우리는 
번제물은 
먹을 수 없지만 
소제물의 일부분은 
먹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소제물을 바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바쳐야 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 전부를 
한 손 가득 퍼내어’, 
‘그것을 
기념의 몫으로 
제단 위에서 
불태워야 한다. 
이것이 화제이며, 
여호와를 만족시키는 향기이다’

(레 2:2). 
여기서 우리는 
가루와 기름 일부분 
그리고 모든 유향이 
하나님의 음식임을 본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소제물을 
맛보고 누리셔야 했다. 
유향을 제외한 소제물 가운데 
남은 고운 가루와 기름은 
제사장을 위한 음식이 되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의 봉사는 거룩하며 
그들의 음식 또한 거룩하다. 
만일 우리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제사장의 음식,
곧 우리의 거룩한 봉사에 적합한 
거룩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 음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소제물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만족으로서 누리는 
문제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소제물 중 그분의 몫을 누리시고, 
그런 다음에 우리가 
우리의 누림을 갖는다. 
따라서 우리의 누림은 
공동의 누림, 
곧 하나님의 누림과 함께하는 
누림이다.

모든 소제물은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 
바쳤는데, 
이것은 
음식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지신, 
인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시험하는 불을 
통과하신 것을 
상징한다. 
레위기 2장의 불은 
태워 버리는 불이신 
하나님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소제물을 
불로 태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그분을 만족시키는 음식으로
기쁘게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상징한다.

소제물은 
평범한 음식이 아니었다. 
소제물은 
오직 제사장, 
즉 교회생활 안에서 
실지적으로 참되게 
복음의 제사장 직분 안에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믿는 이들을 위한 음식이다.

소제물 중에서 
제사장의 몫을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에서 먹는 것은 
우리의 봉사를 위해 
죄(누룩) 없는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분별된 거룩한 곳에서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회막이 
교회의 예표이기 때문에 
회막의 뜰에서
소제물을 먹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생활의 영역 안에서 
우리의 생명 공급이 
되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일

고전 12:12 
왜냐하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가 한 몸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7 
떡이 하나이요, 
우리 많은 사람이 한 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장에서 우리는 
소제물이 
다양한 형태로 있음을 
볼 수 있다. 
… 소제물은(素祭物, the meal offering; 곡물의 제물)
기름을 섞은 
가루(flour; 고운 가루) 형태일 수 있고 
혹은 과자(a cake; 둥글 납작한 빵) 형태일 수 있다. 
가루인 소제물은 
개인적인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또한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과자 형태의 소제물은 
단체적인 그리스도, 
곧 그분의 몸인 
교회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이다. 
신약은 
개인적인 그리스도가 
떡으로 상징된 
단체적인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계시한다. 
바울은 
“떡이 하나이요, 
우리 많은 사람이 한 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기
(partake of the one bread; 그 한 떡을 함께 먹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7)

라고 말한다. 
이 한 떡이 
바로 (한) ‘과자’이다.

교회생활을 위해 
우리는 기름 발라진 사람, 
곧 성령에 의해, 성령으로 
기름 발라진
(oiled by the Spirit and with the Spirit)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누룩이나 꿀을 
가져서는 안 되고 
소금과 유향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는 
많은 소금, 
곧 십자가의 죽음을 
적용해야 하고, 
부활로 충만해야 한다. 
이것이 합당한 교회생활이다.

교회생활에서 우리는 
인성이(humanity; 인간성, 인간애, 인도적임, 인정)
가득해야 하지만, 
이 인성은 
성령으로부터 독립된 인성이 아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성령을 의지해야 하며, 
우리 속에 
그분이 계셔야 하고 
우리 위에 
그분이 쏟아부어져야 한다. 
(being oiled with Him inwardly
and having Him poured upon us outwardly;
내적으로 그분으로 기름발라져야 하고
외적으로 그분께서 우리 위에 쏟아부어지셔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 영으로 충만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소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이 
반드시 가장 높은 인성을 가진 
생활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 … 사람이 되십시오.”
(고전 16:13)

라고 당부한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에 따르면,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가 
높은 인성, 높여진 인성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 이러한 인성은 
강하면서 부드러운, 균형 잡힌 
성격을 갖는다. 
우리는 
강해야 하며, 
또한 부드러워야 한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강하지만 부드럽지 않다면, 
다른 이들을 마음 상하게 할 것이다. 
비록 우리가 
강한 것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워야 하지만, 
너무 부드러워서 
… 국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소제물의 두 번째 요소는 
기름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 고린도전서 2장 4절에서 바울은
“내가 나의 말과 선포를 
… 그 영…을 나타내면서 한 것은”

이라고 말하며, 
12절에서는
“우리는 
… 하나님에게서 오신 
그 영을 받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우리가 
알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3장 16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라고 말한다.
… 만일 그 영과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교회생활을 가질 수 없다. 
교회생활은 
성령에 의해, 
성령으로
기름 발라진
(oiled 
by the Holy Spirit
and with the Holy Spirit)
인성의 생활이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며 
내가 아니라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따르면,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 않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생명 안에서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수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그분의 부활 생명 안에서 
수고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가르친다. 
십자가가 없다면 
교회생활이 없다. 
소금이 없다면 
소제물이 없다. 
소제물에는 반드시 
소금이 쳐져야 한다.

교회생활 안에서 
타고난 생명과 천연적인 애정은 
처리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생활 안에 
꿀이 없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천연적이 되기 쉽고 
타고난 생명을 살기 쉽지만, 
교회생활 안에서는 
타고난 생명을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에 넘겨져야 한다. 
꿀인 
타고난 생명은 
반드시 소금에 의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죽임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지방에서 
소제물을 얻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각 지방에 있는 교회가 
소제물이 되어 
그분을 만족하게 하고, 
날마다 성도들에게 
충분한 공급을 주기를
갈망하신다.

3일

롬 8:6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롬 8:13 
여러분이 
육체를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그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여러 세부적인 항목들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체험과 관련된 
주요 제물은 
바로 소제물이다. 
… 우리가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먹는다면 
그리스도로 조성될 것이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고운 가루이셨고, 
성령으로 기름 발라지셨으며, 
항상 소금에 절여지셨고, 
부활 안에 사시면서 
유향의 향기를 지니셨다. 
그러나 그분께는 
누룩이나 꿀이 없으셨다. 
따라서 그분은 
소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동일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그리스도의 생활의 
복사판이자 복사본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로마서 8장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함께 둔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3절)과 
생명의 영(2절)과 
십자가(13절)와 
부활(11절)을 
한 꾸러미처럼 
모두 얻는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분은 사람이셨으며
우리도 사람이다. 
그분은 
성령으로 기름 발라지셨으며 
우리도 
적어도 얼마쯤은
성령으로 기름 발라졌다. 
우리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의 영과 
연합되었다. 
그리스도는 
소금에 절여지셨으며, 
즉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우리 또한 
우리의 타고난 존재를 
죽음에 넣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 사셨고, 
우리 또한 
부활 안에 살 수 있다.

신약에 따르면, 
신성한 영은 
우리 사람의 영과 관계있다.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주님의 말씀을 
접촉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영으로 접촉하는 방법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다. 
말씀을 대할 때, 
… 우리는 
기도해야 하며, 
우리의 눈과 생각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외적으로는 
말씀을 접촉하지만 
실제로는 
그 영을 접촉하는 것이다. 
그 영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연합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말씀 안에 구체화되신 
그 영을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간 생명과 인간 생활을 
먹을 수 있다.

우리 스스로는 
주 예수님의 인간 생활과 같은 
그러한 생활을 
할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이 
그러한 생활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말씀 앞에 나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써 
어느 때든지 
예수님을 취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영을 접촉하며, 
그 영은 
우리의 영양 공급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다. 
우리는 
우리가 먹은 
그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더 예수님으로 조성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간 생활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생활은 
우리의 생활이 된다. 
자연히 
우리는 노력하지 않고서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음식이신 
예수님을 누림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그러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요한은 
…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십시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합니다.”

(마 3:15)
라고 말씀하셨다. 
… 이것이 
예수님의 인성이다. 
우리는 결코 
자신은 예외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룰 필요가 있다.

조금 더 나아가 
마태복음 11장에서 
주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허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십시오.”

(29절)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허하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때 우리는 
아주 온유하고 겸허한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속은 
높아져 있고 
교만하다. 
이것은 결코 
교회생활을 
건축할 수 없다.

예수님의 인성은 
가장 높은 인성이다. 
이것이 
참된 소제물이다.

2일

레 2:11 
너희는 
여호와에게 바치는 모든 소제물에 
누룩을 넣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여호와에게 화제물을 바칠 때 
어떤 누룩이나 어떤 꿀을 
불태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레 2:13 
너는 소제물로 바치는 모든 제물에 
소금을 쳐야 한다. 
너는 너의 소제물에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빼놓아서는 안 되며, 
너의 모든 제물에 
소금을 넣어 바쳐야 한다.

최고의, 최상의 인성인 
그리스도의 인성에
‘기름이 더해졌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간 생활에서 
고난들이 아닌 
부활을 표현하셨다. 
이 부활은 
우주 안에서 
유향, 
곧 향기롭고 달콤한 향기이다. 
… 이것이 
이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이었다.

주 예수님은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조차도, 
신성과 연합된 인성의 생활, 
곧 부활을 표현하는 
생활을 사셨다. 
… 그분은 
거짓 제자에게 배반당하시고 
군인들에게 체포당하시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제자들을 돌보셨다. 
…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의 어머니를 돌보셨다. 
…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의 고난을 통해 표현되는 
부활을 본다.

주 예수님은 
고난의 삶을 사실지라도 
어떤 환경에서도 
부활의 향기를 표현하셨다. 
어떤 장소에서, 
어느 때든 
그리스도는 
신성과 연합된 인성 안에서 
부활을 표현하는 
삶을 사셨다. 
이것이 소제물이다.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향기는 
달콤한 향기, 
곧 하나님께 
안식과 평안과 
기쁨과 누림과 
완전한 만족을 
드리는 향기이다. 
소제물의 풍성한 요소들인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그리고 그분의 
탁월하고 완전하고 
그 영으로 충만하고 
부활로 적셔진
생활은 
하나님께 
안식과 평안과 
기쁨과 누림과 
완전한 만족을 
드리는 향기이다.

주 예수님의 인성과 인간 생활은 
흠이 없었다. 
그분은 
빌라도에게 끌려가 
로마의 권력에 의해 
재판받으셨지만, 
빌라도는 
그분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했다고 선포했다.

소제물에 
누룩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죄나 부정적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주 예수님께는 
꿀이 없다. 
어느 날 주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마 12:46). 
예수님은 
이 상황을 들으셨을 때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입니까?”

라고 말씀하셨고, 
손을 내미시어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보십시오, 
나의 어머니이며 
나의 형제들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그 사람이 
나의 형제이고,
자매이며, 
어머니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48-50절). 
이것은 
그분께 
꿀이 없고,
그분께서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소제물에 
꿀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천연적인 애정이나 
천연적인 선함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마가복음 10장 38절과 
요한복음 12장 24절은 
주 예수님께서 
항상 소금에 절여지셨음을 가리킨다. 
즉 그분은 항상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생활하셨다. 
그분은 
실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셨다.

소금의 기능은 
맛을 내고, 
세균을 죽이며, 
보존하는 것이다. 
예표에서 소금은 
그리스도의 죽음 
또는 십자가를 
상징한다. 
주 예수님은 
항상 소금이 쳐진 생활, 
십자가 아래에 있는 생활을 
하셨다. 
심지어 그분은 
실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시며 
그분 자신과 
그분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하시고 
부활 안에서 
아버지의 생명을 
사셨다.

하나님의 언약의 기본 요인은 
소금으로 상징된 십자가,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보존되어 
영원히 지속되는 언약이 된다.

1일

레 2:1 
누구든지 
여호와에게 
소제물을 
제물로 바칠 때에는 
고운 가루를 바치되,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야 한다.

레 2:4 
네가 화덕에 구운 것을 
소제물로 바칠 경우에는,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무교 과자나 
기름 바른 무교 전병을 
바쳐야 한다.

소제물은 
고운 가루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고운 가루가 
소제물의 주된 요소이다. 
이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우리가 
겉으로는 
온유하며 친절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는 거칠다. 
인류 가운데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온유하신 분이시다. 
그분만이 
고운 가루이시다. 
그분은 
조금도 거칠지 않으시다. 
그분의 인성은 
모든 방면에서 
곱고 온전하며 
균형 잡히고 올바르다. 
앞뒤, 좌우, 위아래의 
어떤 각도에서 보든지 
그분은 올바르시다.

소제물의 고운 가루는 
많은 과정을 거친 
밀에서 나온 것이다. 
이 밀은 
심어지고,
땅에 묻혀 죽고, 
자라고, 
비바람과 서리를 맞고, 
햇볕에 쪼인 다음 
수확되고, 
탈곡되고, 
체질되고, 
갈리는 
과정들을 통과하여 
고운 가루가 된다. 
이러한 과정들은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다양한 고난들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고난들은 
그분을 
‘슬픔의 사람’(사 53:3)이 
되게 했다.

고운 가루는 완전히 
곱고 고르고 
부드럽고 적절하며, 
온전히 균형 잡혀 있어 
지나침이나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과 일상의 행동이 
아름답고 뛰어나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하다.

소제물의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이시고, 
사람으로서 뛰어난 인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분께는 또한 
… 신성한 요소도 
있으시다. 
신성한 요소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 자신이다.

소제물이신 그리스도는 
기름으로 충만하시다. 
… 그분은 기름과 연합되셨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제물에서 
기름은 
고운 가루 위에 부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그리스도 위에 부어지신 것을 
상징한다.

소제물을 만들 때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은(연합시킨)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령과 연합된 것을 
상징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과 연합된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하나님-사람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으로서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계신데, 
그분의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각각 구별되며, 
제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는다. 
신성한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인성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 
높여졌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가지고 계시며, 
이 하나님의 속성들은 
그분의 사람의 미덕들을 통하여, 
그분의 사람의 미덕들과 함께, 
그분의 사람의 미덕들 안에서 
표현된다.

소제물에서 
기름과 고운 가루는 
섞여 있어서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고운 가루를 먹는 것은 
기름을 먹는 것이다. 
레위기 2장의 그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양육받고 
그분의 인간 생활을 체험하는 길이 
바로 그 영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유향은 
달콤한 냄새가 나며 
사람들에게 
아주 즐거운 느낌을 갖도록 해 준다. 
예표에 있어서, 
소제물 안에 있는 유향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한다.

유향은 
고운 가루 위에 놓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의 고난으로부터
표현되어 나온 
부활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 비록 그분은 
매우 많은 고난을 당하셨을지라도 
달콤한 향기, 
곧 부활의 향기를 
풍기셨다.

소제물에는 
세 가지 요소들, 
곧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있다. 
… 주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이 세 가지 요소들 안에서, 
다시 말하면, 
신성과 연합되고 
부활을 표현하는 
인성 안에서 
사시며 행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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