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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성전 재료들의 내재적인 의미

우리가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한 재료가 되려면, (편백 나무*로 상징되시는) 죽음 안에 계신 그리스도, (백향목으로 상징되시는)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올리브 나무로 상징되시는) 그 영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과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임재로서, 그리스도의 확대와 확장인,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재료들의 실재이시다.

우리는 그 영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건축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장 충만한 정도로 누림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생명의 풍성한 공급)를 맡은 선한 청지기들이 될 수 있다.

편백 나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고대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무덤 위쪽에 편백나무를 심었다. 따라서 편백 나무는 죽음을 거치신 그리스도의 인성,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성전의 문들은 편백 나무로 만들어졌고 그룹과 야자나무가 새겨져 있었다.

그룹은 피조물에게서 나타난 주님의 영광을 상징하고(겔 10:18, 히 9:5), 야자나무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리스도의 영원하며 영존하는 능력을 상징한다.

편백 나무로 된 문짝들에 야자나무와 그룹을 새긴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주님의 영광이 고난을 통해 우리의 존재에 ‘새겨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백향목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백향목은 레바논 산지에서 자랐다. 따라서 백향목은 부활을 거치신 그리스도의 인성,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왕이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다윗 집안에서 나오신 웅대하고 훌륭한 백향목이시다.

우리는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그리스도 안으로 뿌리를 내리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여호와의 집에 심어진 우리는 생명이 자랄 것이고, 우리 하나님의 뜰에서 번성하며,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 맺고, 진액이 가득하며 항상 푸를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의 저장고와 창고이다. 이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운행할 때 그분을 머리가 되시게 했으며, 이 능력이 우리 안에서 운행할 때 우리를 그분의 몸이 되게 한다.

올리브 나무는 생명 주시는 영이신 변화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올리브기름은 하나님의 영의 예표이다. 따라서 올리브 나무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인성, 곧 기름부음 받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 그리스도는 또한 기름바름이신 복합되신 영이시다.

우리는 참올리브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진 그리스도의 가지들로서 그분을 누린다(롬 11:17, 24). 생명 주시는 영은 하늘에 속한 올리브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생명 즙이시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올리브나무의 기름진 것 곧 진액인 그리스도의 풍성에 참여하기를 갈망한다면, 그리스도의 생명 즙이신 생명 주시는 영을 접촉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것이 우리의 영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오, 주님! 오, 주님!”이라고 주님을 부를 때,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게 되며, 즉시 생명 주시는 영이신 주님께 참여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는 또 하나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모든 말씀에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고, 주님을 접촉하며, 주님을 누리고, 기름진 것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께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본성을 거슬러’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본성을 거슬러’라는 말은 ‘자아를 거슬러’라는 뜻이다.

우리의 옛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은 주님의 본성을 거스른다. 우리의 본성은 죄의 본성이고, 주님의 본성은 신성하고 영적이며 거룩한 본성이다.

올리브나무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풍성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야생 가지로서의 우리의 옛 배경, 옛 역사, 옛 생활, 옛 습관, 옛 관습으로부터 완전히 잘려야 한다.

우리의 옛 생활 방식으로부터 잘리는 것을 체험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진 것에 대한 체험을 누리려면,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말씀을 기도로 읽어야 한다.

로마서 11장은 우리가 올리브나무이신 그리스도의 가지들로서(17, 24절) ‘올리브’를 맺고, 성령을 상징하는 진정시키는 기름을 산출한다는 것을 계시한다. 요한복음 15장은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가지들로서(5절) ‘포도’를 맺어 신성한 생명을 상징하는, 활기를 주는 포도주를 산출한다는 것을 계시한다. 그리고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죽어 가는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다.

기름과 포도주는 함께 사람들에게 하나의 치료제가 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의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써 그분 안에 더 많이 거할수록, 더욱더 우리는 ‘올리브’와 ‘포도’를 맺어 기름과 포도주를 산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내적으로 상처받고 침체되고 낙심한 사람들 속으로 부어 주기 위한 것이다.

올리브나무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존귀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삿 9:8-9). 이것은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고(갈 5:16, 25), 그 영을 공급하는 이들이 사람을 존귀하게 한다는 것(고후 3:6, 8, 빌 3:3)을 상징한다.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포도주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데 사용되었다(삿 9:12-13). 이것은 희생하고 활기를 주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이들이 하나님께 힘을 북돋아 드리고(마 9:17), 희생하고 활기를 주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이들이 사람에게 힘을 북돋아 준다는 것(고후 3:6, 빌 2:17, 딤후 4:6)을 상징한다.

성전의 기둥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놋으로 건축되었다.

성경에서 기둥은 몸의 생활을 실행하는 가운데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건축물에 대한 표징, 곧 증거이다.

하나님께 유용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심판(놋) 아래 있으면서, 자신이 육체 안에 있는 사람이고, 죽고 장사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믿는 이들 가운데 분열과 열매 없음, 이 두 가지가 있는 이유는 놋, 곧 하나님의 심판에 속한 것이 전혀 없고, 반대로 교만과 자기 자랑, 자기변호, 자기 정당화, 자화자찬, 자기변명, 스스로 의롭다 함, 다른 사람들을 목양하고 찾는 대신에 유죄판결 하고 규제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놋의 사람(겔 40:3)으로 체험할 때, 그분은 우리의 비범한 사랑, 끝없는 관용, 비할 데 없는 신실함, 절대적인 겸손, 최고의 순수함, 지고한 거룩함과 의, 우리의 빛남과 올곧음이 되실 것이다.

성전에 있는 기둥들의 기둥머리에는 ‘(격자 울타리와 같은) 격자무늬 그물과 사슬 모양 고리가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건축물 안에서 기둥인 이들이 그 안에서 살며 책임을 지고 있는 복잡하고 얽혀 있는 상황을 상징한다. 기둥머리 꼭대기에는 백합들과 석류들이 있었다.

백합은 하나님을 믿는 생활, 곧 우리의 어떠함에 의해 살지 않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의해 사는 생활을 상징한다. 놋은 ‘내가 아니요’를 의미하고, 백합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기둥머리의 고리들 위에 둘러져 있는 석류들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충만함과 풍성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분의 풍성의 표현을 상징한다.

우리는 십자가로 제해지고(격자무늬) 제한받는 것(사슬 모양)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수하고 단순한 생활을 하여, 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건축물을 위해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의 풍성을 표현할 수 있다.

성전의 돌들은 그리스도의 변화된 인성, 곧 변화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을 통하여 사람의 육체를 입으셨다. 육체를 입은 사람, 곧 옛 창조물 안에 있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성의 부분이 변화되셔야 했다.

이렇게 변화되신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의 건축물의 살아 있는 돌, 기초 돌, 모퉁이 돌, 꼭대기 돌이시다.

성전의 돌들은 또한 돌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을 상징한다.

신약은 살아 있는 돌들에 대해 말하고(벧전 2:5), 구약은 떠 내어진 돌들에 대해 말한다(왕상 5:15, 17-18, 6:7). 교회 건축을 위해 사용되는 돌들은 반드시 내적으로는 살아 있어야 하고 외적으로는 떠 내어져야(처리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어떤 형제자매들은 ‘거친’ 돌, 곧 채석장에서 갓 떠 내어져 날카로운 모서리가 가득한 돌에 비유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들을 접촉하면 상처를 받아 불편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들은 건축될 만큼 충분히 안정적이지 않다. 즉 다른 이들과 함께 동역하고 봉사하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전쟁을 하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언약궤를 짊어질 만큼 충분히 안정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생명 주시는 영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존재 안으로 건축되시는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분의 부활 능력에 의해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감으로, 매일 새롭게 되고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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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성전 재료들의 내재적인 의미”

6일

왕상 6:7 집이 건축될 때, 채석장에서 떠 내져 미리 손질된 돌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

벧전 2:4-5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으셨으나 하나님께는 선택받으신, 살아 있는 보배로운 돌이신 그분께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자신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인 희생 제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 체계가 됩니다.

돌은 그리스도의 변화된 인성, 곧 변화되신 그리스도(왕상 6:7, 36, 5:17, 대하 3:6)를 상징한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을 통하여 사람의 육체를 입으셨다(요 1:14, 히 2:14). 육체를 입은 사람, 곧 옛 창조물 안에 있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성의 부분이 변화되셔야 했다. 이렇게 변화되신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의 신성한 건축물의 기초 돌, 모퉁이 돌, 살아 있는 돌, 보배로운 돌, 꼭대기 돌이시다(사 28:16, 고전 3:11, 엡 2:20, 벧전 2:4, 계 4:3, 슥 4:7). 성전의 돌들은 또한 돌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을 상징한다.

성전 건축의 재료는 나무 외에는 대부분이 돌이다(왕상 5:15-18). 돌은 채석장이 있는 산에서 많은 수고로 떠 내어졌다(6:7). 이것은 교회 건축에 사용되는 재료들이 세상에서 찾아내어 많은 수고로 떠 내어졌음을 말해 준다.

구원받고 교회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교회 안에서 하나의 돌이다. 이 돌들은 원래 깊은 산에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본래 세상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일꾼들이 우리를 찾아내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런 후 하나님의 일꾼과 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수고로 우리에게 떠 내는 일을 한다. 영적인 돌들이 교회 건축에 사용되는데, 이 돌들에는 한 면으로 안의 생명이 필요하고, 다른 한 면으로는 밖의 일이 필요하다. 신약은 살아 있는 돌들에 대해 말하고(벧전 2:5), 구약은 떠 내어진 돌들에 대해 말한다(왕상 5:15, 17-18, 6:7). 교회 건축을 위해 사용되는 돌들은 반드시 내적으로는 살아 있어야 하고 외적으로는 떠 내어져야 한다. 내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거듭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돌들인 우리는 거듭난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오랜 시간 우리를 떠 내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성전이 건축되던 때에 모든 돌은 다 예비되어 있었다. 예비하는 일은 채석장에서 이루어졌다. 돌들은 먼저 떠 내어졌고 특정한 치수의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실지로 건축할 때가 되면 다만 돌들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건축물이 되게 하였다. 성전을 건축하는 방식은 교회 안으로 건축되는 사람들 모두가 반드시 하나님의 떠 내시는 일을 상당한 정도로 거쳐야 함을 시사한다.

성전의 건축 재료는 나무와 돌이었다. 나무는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고, 돌은 사람이 안으로는 거듭나야 하고 밖으로는 처리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교회 사람들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고 처리를 받은 사람들이다. 무릇 처리를 받지 않은 사람은 거듭났을지라도 건축될 수 없다.

어떤 형제자매들의 상태를 볼 때, 그들이 돌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갓 떠 내어진 돌이다. 그들은 건축될 만큼 충분히 안정적이지 않다. 즉 다른 이들과 함께 동역하고 봉사하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전쟁을 하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언약궤를 짊어질 만큼 충분히 안정적이지 않다. 그들이 일을 잘하고 융통성을 지녔을지라도 우리와 함께 증거를 짊어지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전혀 처리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너무 둥글고 무책임해서 사람과 일에 대해 마치 뺀질뺀질한 돌과 같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지 구르는 돌처럼 슬그머니 빠져나갈 수 있다. 그들에게는 네모반듯해지도록 떠 내어지는 일이 많이 필요하다. 그럴 때에야 그들은 정확하게 치수를 갖추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그들은 그곳에서 안정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동역하며 함께 건축될 수 있다.

5일

왕상 7:15 그는 두 놋 기둥을 만들었는데, 각 기둥의 높이가 십팔 규빗이었고 각 기둥의 둘레가 십이 규빗이었다.

롬 7:18 내 안에, 곧 내 육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것을 내가 압니다. 왜냐하면 원하는 것은 나에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예표에서 놋은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두 기둥이 놋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기둥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이들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바울처럼 우리는 반드시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나는 오직 죽기에만 합당할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많은 형제들이 총명하며 능력이 있고, 많은 자매들이 아주 좋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실지로 자신이 전혀 좋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오직 죽기에만 좋을 뿐이다.

교회 건축에 참된 유익이 되는 이들은 모두 자신을 인도 직분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항상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너무나 형편없습니다. 저의 기질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저의 타고난 생명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반드시 우리 안에, 즉 우리의 육체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롬 7:18). 우리는 “저는 죽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어떻게 형제님들은 제가 장로들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주님은 결코 스스로 자격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자격 있다고 생각할 때 놋과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된다. 놋을 체험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우리 자신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반드시 “주님, 제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제 안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함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야 한다.

열왕기상 7장 17절은 “격자무늬 그물과 사슬 모양 고리가 있었는데, 한 기둥머리에 일곱 개가 있고 다른 기둥머리에도 일곱 개가 있었다.”라고 말한다.

교회 지체들이 겪는 모든 상황은 격자무늬, 곧 핀(pins)과 가시로 만든 관으로 둘러싸인 격자 울타리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얽혀 있고 복잡한 상황 안에서 책임을 짊어져야 할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안에서 책임을 짊어지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열왕기상 7장 19절은 “주랑에 있는 기둥 꼭대기의 기둥머리는 백합 모양으로, 직경이 사 규빗이었다.”라고 말한다. 백합은 하나님을 믿는 생활을 상징한다. 먼저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유죄판결 하면서, 우리 자신이 타락하고 능력이 없으며 자격이 없다는 것과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하며, 우리의 존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어떠함이 아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어떠함으로 존재하는 백합이어야 한다(마 6:28, 30). 오늘날 땅에서의 우리의 생활은 그분께 달려 있다. 얽혀 있고 복잡한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우리 자신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산다면 할 수 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이것이 백합이다. 내가 책임을 짊어지는 이가 아니다. 그분께서 책임을 짊어지는 분이시다. 나는 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산다. 나는 나 자신으로 말미암아 공급하지 않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공급한다. 교회 안에서 어머니인 자매들은 반드시 “내가 교회 안에서 어머니인 것은 나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유죄판결 받고 심판받은 놋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살아 있는 백합들이다. 놋은 ‘내가 아니요’를 의미하고, 백합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백합들인 사람들은 “지금 내가 사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격자무늬와 사슬 모양으로 가득한 얽혀 있고 복잡한 상황 안에서 책임을 짊어지는 백합들임을 알 수 있다. 모든 격자무늬는 그 안에서 백합들이 자라는 토대이며 모판이다.

4일

눅 10:34 다가가 그의 상처를 싸매며 기름과 포도주를 부은 다음, …

삿 9:13 그러나 포도나무는 이렇게 대답하였소. ‘나더러 하나님과 사람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새 포도주를 내는 일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건들거리란 말이오?’

올리브나무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비교 롬 11:17, 슥 4:11-14, 계 11:4상),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시고, 올리브기름으로 상징되신 그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이시다(눅 4:1상, 18상, 히 1:9). 올리브나무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존귀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삿 9:9). 이것은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고(갈 5:16, 25), 그 영을 공급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존귀하게 한다는 것(고후 3:6, 8)을 상징한다.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새 포도주를 산출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시어 십자가에서 ‘짓눌리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마 9:17).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졌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옛 길, 옛 습관, 옛 배경에 어느 정도 묶여 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것에 묶여 있는 한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풍성에 참여할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호흡할수록 우리는 그분의 풍성을 더 많이 누리고, 그 풍성에 더 많이 참여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고 우리의 옛 배경에서 더욱 잘리게 된다. 우리는 모든 옛것에서 잘리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을수록,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통해 옛것에서 더욱더 잘릴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매일 말씀을 기도로 읽는다면, 이렇게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 우리의 옷 입는 옛 방식을 잘라 낼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자르는 일을 할 것이다.

요한복음 15장과 로마서 11장은 두 종류의 나무, 곧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의 가지들에 대해 말한다. 포도나무는 포도주를 내는 포도를 산출하고, 올리브나무는 기름을 내는 올리브를 산출한다. 기름은 진정시키는 효능을 가지고 있고, 포도주는 활력을 주고 분발시키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주님은 진정시키는 기름을 산출하는 올리브나무이시며, 또한 활력을 주는 포도주를 산출하는 포도나무이시다.

모든 세대에 걸쳐 많은 사람이 내적으로 상처받고 침체되고 낙망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상처를 진정시킬 기름이 필요하고, 그들을 분발시키는 포도주가 필요하다. 우리는 올리브나무의 가지들과 포도나무의 가지들로서 진정시키는 기름과 활력을 주는 포도주를 산출하는 가지들이다. 기름과 포도주가 함께 더해질 때 사람들을 치료한다.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함으로써 진정시키는 기름과 분발시키는 포도주를 산출할 수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써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더욱 주님 안에 거하게 될 것이고, 주님을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는 더욱더 ‘올리브’와 ‘포도’를 맺어 다른 이들의 상처를 진정시키는 기름과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포도주를 산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형제자매들을 접촉할 때 진정되고 위로를 얻고 분발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그러한 형제자매들이 종일 말씀을 기도로 먹고, “오,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이 주님 안에 거함으로써 많은 기름과 포도주가 산출되었다.

요한복음 15장과 로마서 11장은 우리에게 한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즉 우리는 나무들이 아니라 가지들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의 가지가 아니라 많은 가지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기름진 뿌리를 가진 나무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할 뿐 아니라, 우리의 동료 가지들이 필요하다. 우리 각자는 단지 가지들 중 하나일 뿐이며, 가지들은 함께 조율되어 몸이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할 뿐 아니라 교회도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에게는 뿌리가 필요하고 다른 가지들도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써 기름진 것이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하고, 다른 가지들과 적절하고 합당하게 조절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몸의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있는 신격의 충만을 누릴 것이고, 기름과 포도주를 내는 두 종류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3일

롬 11:17 … 야생올리브나무인 그대가 꺾어진 가지들 자리에 접붙여져서 올리브나무의 기름진 뿌리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면,

롬11:24 그대가 원래의 야생올리브나무에서 잘라져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나무에 접붙여졌다면, 원래의 가지들인 이 사람들이야 자기 올리브나무에 얼마나 더 잘 접붙여지겠습니까!

로마서 11장 17절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 가운데로 접붙여져 올리브나무의 기름진 뿌리에 함께 참여하는 이들이 된 것에 관해 말한다. 17절에서 ‘기름진’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말한다.

나무에서 기름진 것은 나무의 진액, 곧 생명 즙이다. 실지적으로 오늘날 올리브나무의 기름진 것, 곧 그리스도의 풍성은 생명 주시는 영이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 우리가 하늘에 속한 올리브나무의 기름진 것인 그리스도의 풍성에 참여하기를 갈망한다면, 그리스도의 생명 즙이신 생명 주시는 영을 접촉해야 한다.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기 위해서 그분은 반드시 그 영이셔야 하며(고후 3:17), 우리에게는 반드시 영이 있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질 길이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것은 영 안에 있는, 곧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의 연합 안에 있는 사실이자 실재이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시며,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관인 사람의 영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것은 우리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것이 우리의 영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고 우리의 영을 무시한다면, 실지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것이다. 우리의 영을 사용하는 가장 좋은 길은 “오, 주님! 오, 주님!”이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상황에서 우리는 “오, 주님!”이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올리브나무의 기름진 것을 누릴 것이다. 우리가 입을 열어 “오, 주님!”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게 되며, 즉시 생명 주시는 영이신 주님께 참여한다(고전 12:3하). 우리는 긴 기도문을 지어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두 단어의 간단한 말인 “오, 주님!”이라고 말해야 한다. 주님을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이 영적인 호흡이다(애 3:55-56).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는 또 하나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모든 말씀에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고, 주님을 접촉하며, 주님을 누리고, 기름진 것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께 참여하게 된다.

로마서 11장 24절은 우리가 참올리브나무에 ‘본성을 거슬러’ 접붙여졌다고 말한다. 주님께 접붙여지는 것은 항상 우리의 본성을 거스른다. 우리는 본성상 모두 야생올리브나무의 가지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본성을 거슬러 그분께 접붙이셨다. 이것은 주님의 접붙임 안에는 항상 우리를 거스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접붙여진 참올리브나무의 본성은 우리의 본성, 곧 우리의 자아를 거스른다. 사실상 ‘본성을 거슬러’라는 말은 ‘자아를 거슬러’라는 뜻이다. 주님께 접붙여지는 것은 우리의 교만을 거스르는 것이고, 또한 우리의 타고난 겸손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은 주님의 본성을 거스른다. 우리의 전 존재와 우리의 본성 안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본성을 거스른다. 이러한 두 본성은 서로 부합되지 못한다. 우리의 본성은 죄의 본성이고, 주님의 본성은 신성하고 하늘에 속하며 영적이고 거룩한 본성이다.

하나님의 참올리브나무의 기름진 뿌리인 그리스도의 풍성에 더 많이 참여하는 것은 전적으로 연합된 영 안에 있는 문제이고,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반대된다는 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더 많이 계시해 주시기를 바란다.

2일

왕상 6:34-35 편백 나무로 된 문짝 둘… 위에는 그룹과 야자나무와 활짝 핀 꽃 모양을 새기고, …

호 14:5-6 이스라엘에게 나는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처럼 망울지고 레바논 나무들처럼 뿌리 내리리라. 그의 가지는 뻗어 나가고 그의 광채는 올리브나무 같으며 그의 향기는 레바논 나무들 같으리라.

성전과 관련된 건물의
모든 부분에는
나무가 입혀져 있었다.

덧입힌 나무에는 모두
그룹과 야자나무가
새겨져 있었다(겔 41:18-20).
그룹은
피조물에게서 나타난
주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그룹들 사이에
야자나무가 새겨져 있었는데,
야자나무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리스도의 영원하며 영존하는
능력을
상징한다.

그룹과 야자나무는
나무 위에 그려지지 않았고
나무 안으로 새겨졌다.
이것은
덧입힌 나무인
우리가
주님에 의해
‘새겨질’ 필요가 있음을
계시한다.
우리는
어떤 형제자매를 만날 때,
그들에게
주님께서 새기신
무언가가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주님의 영광이
그들 안으로 새겨졌다.
영원한 능력,
신선함,
항상 푸른 생명이
그들의 존재 안으로
새겨졌다.
주님께서 새기신 것 때문에,
그들은
어디로 가든지
이러한 종류의
형상과 인상을
지닌다.

호세아서 2장
15절부터 23절까지,
3장 5절,
6장
1절부터 3절까지,
10장 12절에
계시된 것과 같이,
호세아서 14장
4절부터 8절까지는
복원된 이스라엘(마 19:28)에 대한
그림이다.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수한 생활을 상징하는)
백합화처럼
망울질 것이며,
(높아진 인성 안에
견고히 서는 것을 상징하는)
레바논의 나무들처럼
뿌리 내릴 것이다.
(번성과 확산을 상징하는)
그의 가지는
뻗어 나갈 것이며,
(열매 맺음으로 나타난
영광을 상징하는)
그의 광채는
올리브나무 같으며,
(높아진 인성 안에 나타난
생활의 달콤한 향기를
상징하는)
그의 향기는
레바논 나무들 같을 것이다.
(그들이 누린
충분한 은혜가
그들 위에 드리워지는 것을
상징하는―고후 12:9)
그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이들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만족시키는 양식을 산출하도록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곡식같이 소생될 것이고,
(기운을 북돋우는
음료를 산출하도록
꽃을 피우는 것을
상징하는)
포도나무같이
움 돋을 것이다.
(맛 좋은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는 것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명성은
레바논의 포도주 같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주님의 회복 안의
모든 지방에 있는
교회들의 상태이기를
바란다.
그럴 때 우리는
백합화들과
레바논 나무들과
올리브나무들과
움 돋는 포도나무들 같을 것이다.

에베소서 1장
19절과 20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운행되게 하신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에 대해서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강한 권능의
운행을 보여 주는 곳이다.
강하다고 해서
권능이 있는 것은 아니고,
권능이 있다고 해서
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강한 권능’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운행되게 하신 것과
동일한 강한 권능이 마찬가지로 지금
교회 안에
운행되고 있다.
교회는
본성에서뿐 아니라
능력에서도
부활하신 주님과 똑같다.
하나님은
주님 안에서
모든 장애물을
돌파하신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모든 장애물을
돌파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마땅히
부활하신 주님과
똑같아야 한다.
교회는
주님과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주님과 동일하게
자유로우며,
주님과 같이
어떠한 제한에도
묶이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강한 권능은
그리스도 안에
운행되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교회 안에도
운행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의
저장고와 창고이다.

오늘날
동일한 부활 능력이
우리 안에
운행하고 있다.
이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 운행할 때
그분을
머리가 되시게 했으며,
이 능력이
우리 안에 운행할 때
우리를
몸이 되게 한다.

신언노트, 2022 09 18

성전 건축에 사용된
다양한 종류의 나무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다양한 방면을 상징한다.
고대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무덤 위쪽에
편백나무를 심었다.
따라서 편백 나무는
죽음을 거치신
그리스도의 인성,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백향목은
레바논 산지에서 자랐다.
따라서 백향목은
부활을 거치신
그리스도의 인성,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올리브기름은
하나님의 영의 예표이다.
따라서 올리브 나무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인성,
곧 기름부음 받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성전에는
세 종류의 나무들,
곧 편백 나무와
백향목과
올리브 나무가
사용되었다.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편백 나무는
죽음을 상징하며,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들의 죽음을
상징한다.
성전의 문들은
편백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주 예수님의 죽음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입구라는 것을
상징한다.

레바논에서 가져온
백향목은
높은 산지에서 자랐다.
영적인 관점에서
백향목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 이들을
상징한다.
성전 바닥부터 위까지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백향목으로 건축되었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위로 건축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세 번째 나무는
올리브 나무이다.
올리브 나무는
문들에 사용되었고,
그 문들 위에는
그룹이 새겨져 있었다.
올리브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따라서 올리브 나무는
성령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충만한 이들을
상징한다.
그룹이 새겨진
올리브 나무로 된
문들은
영적인 것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신 성령을
상징한다.

요약하면,
이 세 종류의 나무는
주 예수님에 관한
위대한 세 항목을
보여 준다.
첫째 항목은
주님께서 죽으신 것이고,
둘째 항목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이며,
셋째 항목은
주님께서
그 영이 되신 것이다.
이 세 종류의 나무는 또한
구원받은 이들인 우리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우리의 영적인 체험의
세 방면을 보여 준다.
교회 안에서
함께 건축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들이어야 한다.
즉, 그들은 반드시
편백 나무여야 한다.
둘째로, 그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이들이어야 한다.
즉, 그들은 반드시
백향목이어야 한다.
셋째로, 그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 안에 있는 이들로서,
영적인 것들 안으로 들어가는
영적인 입구를 가지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영적인 이해를 가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나타나야 한다.
즉, 그들은 반드시
올리브 나무여야 한다.
교회 안에는 오직
부활 안에 있고
성령 안에 있는
새사람만 있으며,
이 새사람 안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자와 무할례자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타고난 사람들로 구성되지 않고,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
즉 편백 나무이며
백향목인
사람들로 구성된다.

사람의 타고난 능력은 결코
교회 안으로
가져올 수 없으며,
또한 교회 건축의 재료가
될 수 없다.
오직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것만
교회 안으로
가져올 수 있다.

계시된 것과 같이,
호세아서 14장
4절부터 8절까지는
복원된 이스라엘에 대한
그림이다.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수한 생활을 상징하는)
백합화처럼
망울질 것이며,
(높아진 인성 안에
견고히 서는 것을 상징하는)
레바논의 나무들처럼
뿌리 내릴 것이다.
(번성과 확산을 상징하는)
그의 가지는
뻗어 나갈 것이며,
(열매 맺음으로 나타난
영광을 상징하는)
그의 광채는
올리브나무 같으며,
(높아진 인성 안에 나타난
생활의 달콤한 향기를
상징하는)
그의 향기는
레바논 나무들 같을 것이다.
(그들이 누린
충분한 은혜가
그들 위에 드리워지는 것을
상징하는)
그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이들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만족시키는 양식을 산출하도록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곡식같이 소생될 것이고,
(기운을 북돋우는
음료를 산출하도록
꽃을 피우는 것을
상징하는)
포도나무같이
움 돋을 것이다.
(맛 좋은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는 것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명성은
레바논의 포도주 같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주님의 회복 안의
모든 지방에 있는
교회들의 상태이기를
바란다.
그럴 때 우리는
백합화들과
레바논 나무들과
올리브나무들과
움 돋는 포도나무들 같을 것이다.

에베소서 1장
19절과 20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운행되게 하신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에 대해서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강한 권능의
운행을 보여 주는 곳이다.
강하다고 해서
권능이 있는 것은 아니고,
권능이 있다고 해서
강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강한 권능’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운행되게 하신 것과
동일한 강한 권능이 마찬가지로 지금
교회 안에
운행되고 있다.
교회는
본성에서뿐 아니라
능력에서도
부활하신 주님과 똑같다.
하나님은
주님 안에서
모든 장애물을
돌파하신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모든 장애물을
돌파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마땅히
부활하신 주님과
똑같아야 한다.
교회는
주님과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주님과 동일하게
자유로우며,
주님과 같이
어떠한 제한에도
묶이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강한 권능은
그리스도 안에
운행되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교회 안에도
운행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의
저장고와 창고이다.

오늘날
동일한 부활 능력이
우리 안에
운행하고 있다.
이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 운행할 때
그분을
머리가 되시게 했으며,
이 능력이
우리 안에 운행할 때
우리를
몸이 되게 한다.

로마서 11장 17절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 가운데로 접붙여져
올리브나무의 기름진 뿌리에
함께 참여하는 이들이 된 것에 관해
말한다.
17절에서
‘기름진’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말한다.

나무에서
기름진 것은
나무의 진액,
곧 생명 즙이다.
실지적으로 오늘날
올리브나무의 기름진 것,
곧 그리스도의 풍성은
생명 주시는 영이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올리브나무의
기름진 것인
그리스도의 풍성에 참여하기를
갈망한다면,
그리스도의 생명 즙이신
생명 주시는 영을
접촉해야 한다.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지기 위해서
그분은 반드시
그 영이셔야 하며,
우리에게는 반드시
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질
길이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것은
영 안에 있는,
곧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의
연합 안에 있는
사실이자
실재이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시며,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기관인
사람의 영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것은
우리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것이
우리의 영 안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고
우리의 영을 무시한다면,
실지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것이다.
우리의 영을 사용하는
가장 좋은 길은
“오, 주님!
오, 주님!”이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상황에서
우리는
“오, 주님!”이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올리브나무의
기름진 것을
누릴 것이다.
우리가
입을 열어
“오, 주님!”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게 되며,
즉시
생명 주시는 영이신
주님께 참여한다.
우리는
긴 기도문을
지어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두 단어의 간단한 말인
“오, 주님!”이라고
말해야 한다.
주님을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이
영적인 호흡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는
또 하나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모든 말씀에
‘아멘’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고,
주님을 접촉하며,
주님을 누리고,
기름진 것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께
참여하게 된다.

로마서 11장 24절은
우리가
참올리브나무에
‘본성을 거슬러’
접붙여졌다고
말한다.
주님께 접붙여지는 것은 항상
우리의 본성을 거스른다.
우리는
본성상 모두
야생올리브나무의 가지이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본성을 거슬러
그분께 접붙이셨다.
이것은
주님의 접붙임 안에는 항상
우리를 거스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접붙여진
참올리브나무의 본성은
우리의 본성,
곧 우리의 자아를
거스른다.
사실상
‘본성을 거슬러’라는 말은
‘자아를 거슬러’라는 뜻이다.
주님께 접붙여지는 것은
우리의 교만을
거스르는 것이고,
또한 우리의 타고난 겸손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은
주님의 본성을 거스른다.
우리의 전 존재와
우리의 본성 안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본성을 거스른다.
이러한 두 본성은
서로 부합되지 못한다.
우리의 본성은
죄의 본성이고,
주님의 본성은
신성하고
하늘에 속하며
영적이고
거룩한 본성이다.

하나님의 참올리브나무의
기름진 뿌리인
그리스도의 풍성에
더 많이 참여하는 것은
전적으로
연합된 영 안에 있는 문제이고,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반대된다는 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더 많이 계시해 주시기를
바란다.

올리브나무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시고,
올리브기름으로 상징되신
그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이시다.
올리브나무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존귀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고,
그 영을 공급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존귀하게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새 포도주를 산출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시어
십자가에서 ‘짓눌리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여졌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옛 길,
옛 습관,
옛 배경에
어느 정도 묶여 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것에
묶여 있는 한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풍성에
참여할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호흡할수록
우리는
그분의 풍성을
더 많이 누리고,
그 풍성에
더 많이 참여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고
우리의 옛 배경에서
더욱 잘리게 된다.
우리는
모든 옛것에서 잘리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을수록,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통해
옛것에서 더욱더 잘릴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매일
말씀을 기도로 읽는다면,
이렇게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이
우리의 옷 입는 옛 방식을
잘라 낼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자르는 일을
할 것이다.

요한복음 15장과
로마서 11장은
두 종류의 나무,
곧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의
가지들에 대해 말한다.
포도나무는
포도주를 내는
포도를 산출하고,
올리브나무는
기름을 내는
올리브를 산출한다.
기름은
진정시키는
효능을 가지고 있고,
포도주는
활력을 주고
분발시키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주님은
진정시키는
기름을 산출하는
올리브나무이시며,
또한 활력을 주는
포도주를 산출하는
포도나무이시다.

모든 세대에 걸쳐
많은 사람이
내적으로
상처받고
침체되고
낙망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상처를 진정시킬
기름이 필요하고,
그들을 분발시키는
포도주가 필요하다.
우리는
올리브나무의 가지들과
포도나무의 가지들로서
진정시키는 기름과
활력을 주는 포도주를
산출하는 가지들이다.
기름과 포도주가
함께 더해질 때
사람들을 치료한다.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함으로써
진정시키는 기름과
분발시키는 포도주를
산출할 수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써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더욱
주님 안에 거하게 될 것이고,
주님을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는 더욱더
‘올리브’와 ‘포도’를 맺어
다른 이들의 상처를 진정시키는
기름과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포도주를
산출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형제자매들을
접촉할 때
진정되고
위로를 얻고
분발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그러한 형제자매들이 종일
말씀을 기도로 먹고,
“오,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이
주님 안에 거함으로써
많은 기름과 포도주가
산출되었다.

요한복음 15장과
로마서 11장은
우리에게
한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즉 우리는
나무들이 아니라
가지들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의 가지가 아니라
많은 가지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기름진 뿌리를 가진 나무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할 뿐 아니라,
우리의 동료 가지들이 필요하다.
우리 각자는 단지
가지들 중 하나일 뿐이며,
가지들은
함께 조율되어
몸이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할 뿐 아니라
교회도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에게는
뿌리가 필요하고
다른 가지들도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써
기름진 것이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하고,
다른 가지들과
적절하고
합당하게
조절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몸의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있는
신격의 충만을
누릴 것이고,
기름과 포도주를 내는
두 종류의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성경의 예표에서
놋은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두 기둥이
놋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기둥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이들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바울처럼
우리는 반드시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나는 오직
죽기에만 합당할 뿐입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많은 형제들이
총명하며
능력이 있고,
많은 자매들이
아주 좋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실지로 자신이
전혀 좋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오직
죽기에만 좋을 뿐이다.

교회 건축에
참된 유익이 되는 이들은 모두
자신을
인도 직분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항상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너무나 형편없습니다.
저의 기질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저의 타고난 생명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반드시
우리 안에,
즉 우리의 육체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저는
죽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어떻게 형제님들은
제가
장로들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주님은 결코
스스로 자격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누구도 선택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자격 있다고 생각할 때
놋과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된다.
놋을 체험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우리 자신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반드시
“주님,
제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제 안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말함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야 한다.

열왕기상 7장 17절은
“격자무늬 그물과
사슬 모양 고리가 있었는데,
한 기둥머리에
일곱 개가 있고
다른 기둥머리에도
일곱 개가 있었다.”
라고 말한다.

교회 지체들이 겪는
모든 상황은
격자무늬,
곧 핀(pins)과 가시로 만든
관으로 둘러싸인
격자 울타리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사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얽혀 있고 복잡한 상황 안에서
책임을 짊어져야 할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안에서
책임을 짊어지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열왕기상 7장 19절은
“주랑에 있는
기둥 꼭대기의 기둥머리는
백합 모양으로,
직경이 사 규빗이었다.”
라고 말한다.
백합은
하나님을 믿는 생활을
상징한다.
먼저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유죄판결 하면서,
우리 자신이
타락하고
능력이 없으며
자격이 없다는 것과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하며,
우리의 존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어떠함이 아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어떠함으로
존재하는
백합이어야 한다.
오늘날 땅에서의
우리의 생활은
그분께 달려 있다.
얽혀 있고
복잡한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우리 자신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산다면
할 수 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이것이 백합이다.
내가
책임을 짊어지는 이가 아니다.
그분께서
책임을 짊어지는 분이시다.
나는
나 자신에 의해서(나 자신으로)
살지 않고
그분에 의해서
산다.
나는
나 자신에 의해서
공급하지 않고
그분에 의해서
공급한다.
교회 안에서
어머니들인 자매들은 반드시
“내가
교회 안에서
한 어머니인 것은
나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에 의해서입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유죄판결 받고
심판받은
놋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살아 있는 백합들이다.
놋은
‘내가 아니요’를 의미하고,
백합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백합들인 사람들은
“지금 내가 사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격자무늬와 사슬 모양으로 가득한
얽혀 있고 복잡한 상황 안에서
책임을 짊어지는
백합들임을 알 수 있다.
모든 격자무늬는
그 안에서
백합들이 자라는
토대이며
모판이다.

돌은
그리스도의 변화된 인성,
곧 변화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을 통하여
사람의 육체를 입으셨다.
육체를 입은 사람,
곧 옛 창조물 안에 있는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인성의 부분이
변화되셔야 했다.
이렇게 변화되신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의 신성한 건축물의
기초 돌,
모퉁이 돌,
살아 있는 돌,
보배로운 돌,
꼭대기 돌이시다.
성전의 돌들은 또한
돌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을
상징한다.

성전 건축의 재료는
나무 외에는
대부분이 돌이다.
돌은
채석장이 있는
산에서
많은 수고로
떠 내어졌다.
이것은
교회 건축에 사용되는
재료들이
세상에서 찾아내어
많은 수고로
떠 내어졌음을
말해 준다.

구원받고
교회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교회 안에서
하나의 돌이다.
이 돌들은 원래
깊은 산에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본래
세상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일꾼들이
우리를 찾아내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런 후
하나님의 일꾼과
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수고로
우리에게
떠 내는 일을 한다.
영적인 돌들이
교회 건축에 사용되는데,
이 돌들에는
한 면으로
안의 생명이 필요하고,
다른 한 면으로는
밖의 일이 필요하다.
신약은
살아 있는 돌들에 대해
말하고,
구약은
떠 내어진 돌들에 대해
말한다.
교회 건축을 위해 사용되는
돌들은 반드시
내적으로는
살아 있어야 하고
외적으로는
떠 내어져야 한다.
내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거듭났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돌들인 우리는
거듭난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오랜 시간
우리를 떠 내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성전이 건축되던 때에
모든 돌은
다 예비되어 있었다.
예비하는 일은
채석장에서 이루어졌다.
돌들은 먼저
떠 내어졌고
특정한 치수의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실지로 건축할 때가 되면
다만 돌들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건축물이 되게 하였다.
성전을 건축하는 방식은
교회 안으로 건축되는
사람들 모두가 반드시
하나님의 떠 내시는 일을
상당한 정도로 거쳐야 함을
시사한다.

성전의 건축 재료는
나무와 돌이었다.
나무는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고,
돌은
사람이
안으로는 거듭나야 하고
밖으로는 처리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교회 사람들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고
처리를 받은 사람들이다.
무릇 처리를 받지 않은 사람은
거듭났을지라도 건축될 수 없다.

어떤 형제자매들의 상태를 볼 때,
그들이 돌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갓 떠 내어진 돌이다.
그들은 건축될 만큼 충분히
안정적이지 않다.
즉 다른 이들과 함께
동역하고 봉사하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전쟁을 하거나,
다른 이들과 함께
언약궤를 짊어질 만큼
충분히 안정적이지 않다.
그들이
유능하고
재치있을 수 있지만,
증거를 짊어질 수 없는데
이는
그들이 전혀
처리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형제들과 자매들은
너무 둥글고
또 미끄럽다.
그들은
구르는 돌들과 같아서
그들이
어디에 위치하게 되든지 상관없이
미끄러져 사라진다
(슬그머니 떠난다).
그들이
특정한 크기가 되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도록
많은 잘라냄이 필요하다.
그럴 때에야 그들은
정확하게 치수를 갖추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방식으로
그들은
그들이
어디에 위치하게 되든지
다른 사람들과
동역할 수 있고
(조화롭게 될 수 있고;
어울리게 될 수 있고)
또 건축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생명 주시는 영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존재 안으로
건축되시는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분의 부활 능력에 의해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감으로,
매일 새롭게 되고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

1일

왕상 6:15 그는 백향목 널빤지로 집 안 벽을 만들었는데, 집의 안쪽을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나무로 입혔다. 그리고 집의 바닥에는 편백나무 널빤지를 깔았다.

고전 2:2 … 내가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전 건축에 사용된 다양한 종류의 나무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다양한 방면을 상징한다. 고대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무덤 위쪽에 편백나무를 심었다. 따라서 편백 나무(왕상 6:15하, 34)는 죽음을 거치신 그리스도의 인성,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비교 창 6:14과 각주 1). 백향목은 레바논 산지에서 자랐다(시 104:16). 따라서 백향목(왕상 6:9, 10하, 15상, 16, 36)은 부활을 거치신 그리스도의 인성,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비교 아 4:8과 각주 2). 올리브기름은 하나님의 영의 예표이다. 따라서 올리브 나무(왕상 6:23, 31-33)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인성, 곧 기름부음 받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히 1:9).

성전에는 세 종류의 나무들, 곧 편백 나무와 백향목과 올리브 나무가 사용되었다.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편백 나무는 죽음을 상징하며,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들의 죽음을 상징한다. 성전의 문들은 편백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주 예수님의 죽음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입구라는 것을 상징한다.

레바논에서 가져온 백향목은 높은 산지에서 자랐다. 영적인 관점에서 백향목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 이들을 상징한다. 성전 바닥부터 위까지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백향목으로 건축되었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위로 건축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세 번째 나무는 올리브 나무이다. 올리브 나무는 문들에 사용되었고, 그 문들 위에는 그룹이 새겨져 있었다. 올리브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따라서 올리브 나무는 성령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충만한 이들을 상징한다. 그룹이 새겨진 올리브 나무로 된 문들은 영적인 것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신 성령을 상징한다.

요약하면, 이 세 종류의 나무는 주 예수님에 관한 위대한 세 항목을 보여 준다. 첫째 항목은 주님께서 죽으신 것이고, 둘째 항목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이며, 셋째 항목은 주님께서 그 영이 되신 것이다. 이 세 종류의 나무는 또한 구원받은 이들인 우리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우리의 영적인 체험의 세 방면을 보여 준다. 교회 안에서 함께 건축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들이어야 한다. 즉, 그들은 반드시 편백 나무여야 한다. 둘째로, 그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이들이어야 한다. 즉, 그들은 반드시 백향목이어야 한다. 셋째로, 그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 안에 있는 이들로서, 영적인 것들 안으로 들어가는 영적인 입구를 가지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영적인 이해를 가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나타나야 한다. 즉, 그들은 반드시 올리브 나무여야 한다. 교회 안에는 오직 부활 안에 있고 성령 안에 있는 새사람만 있으며, 이 새사람 안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자와 무할례자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타고난 사람들로 구성되지 않고,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 즉 편백 나무이며 백향목인 사람들로 구성된다.

사람의 타고난 능력은 결코 교회 안으로 가져올 수 없으며, 또한 교회 건축의 재료가 될 수 없다. 오직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것만 교회 안으로 가져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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