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기는 이의 생활이며, 신약의 모든 이기는 이들은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아 생명 안에서 다스리는 왕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언자들과 제사장들인 우리는 또한 왕들로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그분의 모든 원수를 다스리시도록 허락해 드린다. 신약의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왕들과 제사장들과 신언자들의 예표의 성취가 되어야 한다.
신약에서 모든 믿는 이는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도록 구원받았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위해 말할 때 하나님의 대변인, 즉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며, 이들이 곧 신언자들이다.
신언(그리스도를 사람들 안으로 말해 넣는 것)은 우리를 이기는 이들이 되게 한다. 신언은 이기는 이들의 기능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왕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합당한 표준 이하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린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과연 어느 정도로, 얼마만큼 그리스도를 누리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이 ‘일 인치 높이’밖에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무한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은 왕의 직분의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은혜가 우리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려서 우리를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가 되게 할 정도로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은 우리가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구원받아 이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의의 선물은 실지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적용된 하나님의 법리적인 구속이다. 은혜는 우리의 유기적인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충족하는 공급이 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이들에 관한 책이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주님은 그분의 믿는 이들이자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들인 우리가 그분의 이기는 이들(계 2:7, 11, 17, 26, 3:5, 12, 21), 곧 모든 사탄적인 혼돈을 정복하고 신성한 경륜 안에서 승리하는 이들이 되도록 칠중(七重)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하나님의 관점에는 주로 네 족속, 곧 아담 족속, 육체에 따른 아브라함 족속(창 13:16), 그 영에 따른 아브라함 족속(창 15:5, 갈 3:7, 29), 이기는 이들 족속이 있다. 우리는 믿음의 영을 사용하여 우리가 이기는 이들 족속에 속한다고 선포해야 한다(고후 4:13).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이들이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길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이시라는 것을 알지만(요 14:6상), 그리스도는 그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기는 이들에게 그들이 그분의 길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기는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수 있도록 하는 바로 그 길이다(계 19:7-9, 시 45:13-14).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어 오늘 여러분이 왕으로서 다스리는 생활을 하는 이기는 이가 되게 하시기를 바란다. 이 유일한 축복은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영원한 축복이다.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려 주님의 이기는 이들이 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신성하고 영적이고 하늘에 속하고 왕의 신분을 지니고 왕가에 속한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왕국은 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고서”라고 말씀하셨다 ― 막 4:26, 요일 3:9.
이 씨는 믿는 이들 안으로 뿌려진 신성한 생명의 씨(요일 3:9, 벧전 1:23)이다.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주님의 복음의 결과요 목표인 하나님의 왕국과 이 시대의 교회(롬 14:17)가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 맺고 성숙하여 수확하는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 자신이다(눅 17:21). 인성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골 2:9)이신 그분은 하나님의 왕국의 씨 곧 ‘유전자’로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안으로 뿌려지셔서 그들 안에서 자라시고, 그들 안에서 사시며, 그들 안에서부터 표현되시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으로 발전하신다.
신약의 가르침 전체의 내재적인 요소는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께서 선택하신 백성 안으로 뿌려지시고 그들 안에서 왕국으로 발전하시기 위해 육체가 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하나님의 왕국의 완전한 발전이다.
복음서들에는 왕국의 씨, 왕국의 유전자가 뿌려지는 것이 있다.
사도행전에는 왕국의 씨, 왕국의 유전자를 받은 수많은 씨 뿌리는 사람들에 의해 이러한 씨 뿌림이 번식하고 확산하는 것이 있다.
서신서들에서 우리는 왕국의 씨, 왕국의 유전자가 자라는 것을 본다.
이 씨의 수확은 첫 열매를 거두고 수확을 하는 요한계시록에서 발견된다.
천년왕국은 왕국의 씨, 왕국의 유전자가 최고도로 발전한 것으로서, 거기에서 아들은 왕이시고 모든 이기는 이들은 그분의 공동 왕들, 곧 ‘왕국의 유전자를 가진 백성’일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인 새 예루살렘은 사복음서에서 나사렛 사람 예수님께서 뿌리신 왕국의 씨, 왕국의 유전자가 완전히 발전한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 왕국 복음을 사람들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하여 왕국의 씨, 왕국의 유전자가 번식하고 발전하게 함으로써 이 시대를 완결해야 한다.
체험에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은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있음으로써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의 본이시다.
바울은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서 생활하고 사역한 사람의 본이다.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모든 믿는 이는 신성한 생명의 규제와 제한을 받는 것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왕국의 다스림 아래 있는 생활은 의와 화평과 성령 안에 있는 기쁨의 생활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는 것은 노예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며, 이러한 생활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신명기는 합당한 왕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시받고 통치받으며 다스림 받고 통제받아야 했다는 것을 계시한다(신 17:14-15, 18-20). 이 원칙은 교회들 안의 장로들과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기를 열망하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장로들은 교회 안에서 행정을 수행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되어야 한다(딤전 3:2, 5:17).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제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결정과 함께하실 것이며, 장로들은 하나님을 대표하여 교회의 사무를 관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관리가 신정(神政)이다.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인도 직분 아래 단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 재조성되어, 하나님의 증거인 한 나라가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넣음으로써 말씀으로 적셔지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영과 하나이다(요 6:63, 엡 6:17). 우리가 날마다 신성한 말씀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그 영은 말씀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요소와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분배하시어 우리를 하나님으로 조성되게 하신다.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려면, 우리는 또한 그 영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 요셉의 삶에 대한 기록은 그 영의 통치에 대한 계시이다. 왜냐하면 그 영의 통치는 성숙한 성도의 다스리는 방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왕국의 실재 안에서 신성한 생명의 규제와 제한을 받으며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생활이고, 그 영의 어느 다른 방면보다도 더 높은 것이다.
요셉은 ‘꿈쟁이’였으며(창 37:19), 하나님의 관점에 따라 그분의 백성이 생명이 충만한 곡식 단이고 빛이 가득한 천체라는 꿈을 꾸었다(5-11절). 요셉의 두 가지 꿈(창 37:7, 9)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었고,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본성과 위치와 기능과 목표에 관한 하나님의 신성한 관점을 그에게 계시해 주는 것이었다.
요셉의 꿈은 그의 삶을 통제하고 그의 행동을 지시하였다. 그가 그토록 탁월하고 놀랍게 행동한 것은 그가 꿈에서 본 이상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비교 행 26:19). 요셉의 형들은 분노를 터뜨렸고(창 37:18-31) 정욕에 빠졌다(창 38:15-18). 그러나 요셉은 분노를 억제했고 정욕을 이겼다(창 39:7-23). 그는 생명이 가득한 곡식 단으로서 처신하였으며,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하늘의 별처럼 행동하였다.
하늘에 속한 이상 아래 있었던 요셉의 생활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에 묘사된 천국 생활이었다. 그러한 생활을 함으로써 요셉은 왕으로서 다스리기 위해 완전히 준비되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에 계시된 하늘에 속한 왕국의 헌법에 따르면, 우리의 분노는 억제되어야 하고 우리의 정욕은 정복되어야 한다(마 5:21-32).
성숙한 생명의 다스리는 방면을 대표하는 이로서 요셉은 주님의 임재와 함께 주님의 권위와 번영과 축복을 누렸다.
비록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향하여 인간적인 느낌과 감정이 가득했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느낌을 그 영의 통치 아래 두었다. 요셉은 자기를 부인하였으며, 자기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 아래 두었고, 또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유익을 위하여 처신하였다.
요셉은 신약에 계시된 것의 생생한 예시이다. 요셉은 자신을 위한 유익이나 자신을 위한 누림이나 자신의 느낌이나 자신을 위한 야심이나 자신을 위한 목표가 없이, 자아를 부인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요셉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 아래서 제한받으며 자아를 부인한 것은 왕국 생활을 실행하는 열쇠였다.
요셉의 깨달음은 자신을 이집트에 보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은 형들에게 “형님들은 나에게 악한 일을 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선을 이루시어”라고 말했다(창 45:5, 7, 50:19-21, 비교 41:51-52). 이것은 로마서 8장 28절과 29절에 있는 바울의 말의 실재이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에게 한 모든 일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였고, 또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로하였다(창 45:5-8, 50:15-21). 그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있었는지! 그의 영은 얼마나 탁월했는지!
우리는 ‘신성한 망원경’을 사용해서 시간을 관통하여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아야 한다. 새 예루살렘에는 오직 생명이 충만한 곡식 단들과 빛이 가득한 별들이 있을 뿐이다. 생명이 성숙하면 할수록, 우리는 성도들이나 교회에 관해 부정적인 말을 더 적게 할 것이다.
우리는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의 목표를 보고 그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살면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고 있을 때, 그 결과는 교회생활에서 표현되는 참되고 실지적인 몸의 생활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간 이들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 안으로 옮겨졌으며, 교회생활 안에서는 사랑이 이긴다(골 1:12-13). 몸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고(고전 8:1, 엡 1:4, 3:17, 4:2, 15-16, 5:2), 사랑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이다(고전 12:31하, 13:4-8상).
우리에게 사랑이신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의 모든 말은 생명이 없이 소리만 내는 ‘울리는 징과 큰 소리 나는 제금’이 된다.
교회는 경찰서나 법원이 아니라, 영적인 자녀를 양육하는 사랑이 가득한 가정과 병든 이들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병원과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이다.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고 있을 때, 우리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은혜로서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 이것이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의 완결이다.
요한복음 4장 14절 하반절은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원천이 되어 샘솟아 올라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로마서 5장 21절에서처럼) ‘-에 이른다’는 것은 목적지를 말한다. 영원한 생명은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의 목적지이다. ‘-에 이른다’는 또한 ‘-이 되다’ 혹은 ‘-이 될 것이다’를 의미한다.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 곧 생명의 원천이신 아버지와 생명의 샘이신 아들과 생명의 강이신 그 영을 누림으로써 우리는 은혜를 넘치게 받아 하나님의 생명의 총체, 곧 생명의 성인 새 예루살렘이 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의 결과와 완결은 유일하게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목표인 새 예루살렘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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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은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인성 안에 계신 하나님-사람이셨던 주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계셨다. 그분께서 하신 모든 것은 아버지의 다스림 아래 있었다. 사람으로서 그분은 자신의 타고난 인성을 거절하셨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의 제한 아래서 인간 생활을 하셨다. 그분은 실지로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계심으로써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고 계셨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다.
우리는 반드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림으로 교회생활을 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의 생활을 위해 교회생활을 하는 본을 세웠다(롬 15:14-16:27).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있을 때,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먼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15:14-24). 그런 다음 바울은 이방인 믿는 이들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도록 사랑 안에서 물질을 드린 것을 통하여, 그들을 유대인들의 교회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 안으로 이끌었다(25-33절). 이것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한 몸의 교통 안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로마서 16장 1절부터 24절까지에서 추천하고 문안함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의 우주적인 교통 안에 있는 이 몸의 실지적인 생활을 위해, 그의 사역 아래 있는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을 함께 섞고 있었다. 오늘날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모든 믿는 이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 규제받고 제한받는 것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왕은 자신을 위하여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 앞에 있는 율법을 책에 베껴 써야 했다(신 17:18). 여기에서 율법은 모세오경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합당한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시받고 통치받으며 다스림 받고 통제받는 사람이었다.
이 원칙은 오늘날 교회들 안의 장로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장로들은 교회 안에서 행정을 수행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되어야 한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제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결정과 함께하실 것이며, 장로들은 하나님을 대표하여 교회의 사무를 관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관리가 신정(神政)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이 땅에서 그분의 증거가 될 신성하게 조성된 백성을 얻으시는 것이었다. 재조성되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 곧 그분의 말씀으로 돌아옴으로써 그분께 돌아와야 했다.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 단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 조성되어 하나님의 증거인 한 나라가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려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씀으로 그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넣음으로써 말씀으로 적셔지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영과 하나이다(요 6:63, 엡 6:17). 우리가 날마다 신성한 말씀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그 영은 말씀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요소와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분배하시어 우리를 하나님으로 조성되게 하신다.
6일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살면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고 있을 때, 그 결과는 참되고 실지적인 몸의 생활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된다(엡 4:16). ‘사랑 안에서’라는 말은 에베소서에서 반복해서 사용된다(1:4, 3:17, 4:2, 15-16, 5:2). 하나님은 창세전에 사랑 안에서 우리를 아들의 자격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셨고, 그리스도의 몸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된다. 생명의 성장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 지난 몇 년 동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신성한 계시의 고봉을 보여 주심에 감사드린다. 나는 우리가 고봉의 진리에 관해 말할지라도 우리 가운데 사랑이 없을까 봐 염려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만한 것이고 건축되지 않은 것이다.
원천이 샘솟아 오를 때, 이것은 원천의 나타남이다(요 4:14하). 그런 다음 강이 흐른다. 아버지는 원천이시고, 아들은 샘이시며, 그 영은 강이시다.
이렇게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신다’(요 4:14하). ‘-에 이른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에는 풍성한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에 이른다’는 것은 목적지를 말한다. 영원한 생명은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의 목적지이다. 새 예루살렘은 신성하고 영원한 생명의 총체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입니다’는 ‘새 예루살렘에 이를 것입니다’를 의미한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신성한 새 예루살렘에 이르도록 흐르는 무언가가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요한복음 4장 14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온 성경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근원인 원천이시고, 아들은 샘이시며, 그 영은 흐르는 강이시고, 이러한 흐름이 영원한 생명 곧 새 예루살렘을 산출한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연결되시고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된 것의 총체이다.
결국 삼일 하나님은 생수가 되시며, 주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생수를 주셨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야곱의 우물은 물질적인 것이지만, 야곱의 꿈은 신성하고 비밀하다. 이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참된 원천이 있다. 이 원천은 아버지이다. 이 원천이 나타나고 샘솟아 오를 때, 이것은 아들이다. 샘이 강으로 흐를 때, 이것은 그 영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에 이르며 새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한다. 요한복음의 처음 네 장은 흐르는 물이신 삼일 하나님을 제시한다. 6장과 7장에는 두 명절이 있다. 이 두 명절은 흐름의 산물이다.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는 목마르고 배고프다. 명절 곧 잔치에는 우리의 배고픔을 만족시킬 먹을 것이 있고,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마실 것이 있다. 음식은 그리스도이고, 물 또한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통하여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계신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 물을 마실 때, 그것은 우리 안에서 원천이 된다. 이 원천은 샘으로 나타나고, 이 샘은 새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하여 강으로 흘러나온다. 이것이 요한복음 전체를 여는 열쇠이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말씀하심이고 신성한 확산이며 신성한 분배이다. 원천이신 아버지, 샘이신 아들, 강이신 그 영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신다. 그분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실 때 우리와 함께 흐르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새 예루살렘에 이르도록 흘러가게 하심으로 새 예루살렘이 되게 하실 것이다. ‘-에 이른다’는 또한 ‘-이 되다’를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에 이른다’는 ‘새 예루살렘이 된다’를 의미한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새 예루살렘 안에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내재적인 의미이다.
5일
그 영의 통치는 그 영에 대한 가르침의 구조에서 머리 돌이다. 요셉의 삶에 대한 기록은 그 영의 통치에 대한 계시이다. 왜냐하면 그 영의 통치는 성숙한 성도의 다스리는 방면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형들을 탓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형들이 자신에게 한 모든 일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였고, 또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그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있었는지! 그의 영은 얼마나 탁월했는지!
요셉의 두 가지 꿈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었고,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본성과 위치와 기능과 목표에 관한 하나님의 신성한 관점을 그에게 계시해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의 타락한 본성에 따르면 사악하고 더럽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관점에 따르면 생명이 충만한 곡식 단이고 빛이 가득한 천체이다. 다스리는 방면의 성숙한 생명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유죄판결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생명은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며 감상한다. 요셉의 꿈은 그의 행동을 통제하고 지시하였다.
요셉의 이야기에 나타난 생명은 부활 생명이자 하나님의 생명이다. 요셉은 흥분되는 상황에 있었지만, 그에게는 흐트러졌다는 표시가 없었다. 이것이 생명이다. 우리는 요셉에게서 생명을 볼 뿐 아니라 생명의 길, 곧 우리 자신을 통제 아래 두는 것을 본다. 요셉이 인간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는 인간적인 느낌과 감정이 가득했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느낌을 그 영의 통치 아래 두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에게서 성숙한 생명을 볼 뿐 아니라 다스리는 생명과 이 다스리는 생명의 길을 본다. 우리 모두에게, 특히 청년들에게는 그러한 생명이 필요하며, 또한 그러한 길 곧 성숙한 사람이 왕으로서 다스리는 방면이 필요하다. 이 생명은 쉽게 흥분하지 않으며, 그 생명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흥분된 가운데서도 이 생명은 잠잠하며 스스로를 통제하고 그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
요셉은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요셉만큼 마음이 상하고도 복수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 또 있는지 모르겠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을 용서할 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당신이 한 일의 심각성을 당신에게 일깨워 주고 싶습니다.” 이런 종류의 용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것은 전혀 용서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제들을 용서할 때, 형제들을 위로했고 그들에게 자책하지 말고 자신에게 한 일을 잊어버리라고 말했다. 요셉은 형제들이 자신을 종으로 팔아넘긴 것이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하신 일이었다고 말했다. 요셉은 형제들이 한 일 때문에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형제들을 하나님의 조력자들로 여겼다.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시도록 하나님을 도왔다.
요셉의 삶에 대한 기록은 얼마나 달콤한가! 요셉은 완전히 하나님의 안내 아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후회할 필요가 없었다. 요셉은 신약에 계시된 것의 생생한 예시이다. 요셉은 자신을 위한 유익이나 자신을 위한 누림이나 자신의 느낌이나 자신을 위한 야심이나 자신을 위한 목표가 없이, 자아를 부인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요셉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 아래서 제한받으며 자아를 부인한 것은 왕국 생활을 실행하는 열쇠였다. 자신을 부인한 요셉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왕국이 도래하며 실현되고 실행된다. 이러한 성취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왕국의 누림에 참여하게 되었다.
3일
노예-구주를 믿는 사람들 안으로 뿌려진 신성한 생명의 씨가 가리키는 것은, 노예-구주의 복음의 결과요 목표인 하나님의 왕국과 이 시대의 교회가 사람의 지혜와 재능을 통하여 만들어진 생명 없는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 맺고 성숙하여 수확하는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사실상 사람의 존재 안으로 뿌려져 그들 안에서 왕국으로 발전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이 가르침이나 활동이나 조직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인상을 받아야 한다. 도리어 하나님의 왕국은 육체 되신 삼일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뿌려지시어 이 선택받은 사람들 안에서 왕국으로 자라시고 발전하신 것이다.
신약의 가르침 전체의 내재적인 요소는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께서 선택하신 백성 안으로 뿌려지시고 그들 안에서 왕국으로 발전하시기 위해 육체가 되신 것이다.
사복음서는 육체 되신 삼일 하나님을 계시한다. 마침내 이 하나님-사람은 전파하시고 가르치심으로써 그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뿌리시려고 나아오셨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였을 때, 왕국의 씨와 유전자를 받아들였다. 이 씨, 이 유전자는 육체 되신 하나님, 곧 인성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이다. 복음서들에는 이러한 왕국의 씨가 뿌려지는 것이 있다.
사도행전에는 이러한 씨 뿌림이 번식하고 확산하는 것이 있다. 사도행전에서 수백 명, 심지어 수천 명의 씨 뿌리는 사람들이 일으켜졌다. 씨 뿌리는 이 모든 이들은 씨와 유전자를 받아들인 이들이었다. 그들은 씨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씨를 다른 이들 안으로 뿌릴 수 있는 이들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에게서 씨와 씨 뿌림이 번식한다.
서신서들에서 우리는 왕국의 씨, 왕국의 유전자가 자라는 것을 본다. 고린도전서 3장 9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경작지이며, 하나님의 건축물입니다.” 같은 장 다른 곳에서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6절)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씨가 자라고 발전하는 것이 있다.
이 씨의 수확은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발견된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따르면, 먼저는 첫 열매가 있고, 그런 다음에 곡식이 있다. 요한계시록 14장 4절은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로 드려지도록 사람들 가운데서 사 온 이들’에 대해 말한다. 그다음에 15절에서 우리는 ‘땅의 곡식이 익은 것’을 본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첫 열매로 언급된 이들은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왕이 될 이들 가운데 있을 것이다. 천 년의 기간 동안 있을 천년왕국은 왕국의 유전자의 완전한 발전일 것이다. 천년왕국 동안, 왕국의 유전자를 받아들인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으로 다스리는 왕들일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영원한 왕국을 소유하실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왕들의 구성체일 것이고, 이 왕들은 완전히 회복된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인성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 곧 나사렛 사람 예수님께서 복음서들에서 뿌리신 유전자가 완전히 발전한 것인 영원한 왕국을 소유하실 것이다.
복음서들 안에 뿌려진 왕국의 유전자는 얼마나 놀라운가! 결국 이 유전자는 요한계시록 20장에 언급된 천년왕국으로 발전할 것이며,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으로 발전할 것이다. 왕국의 유전자와 발전에 대한 이러한 그림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한다!
2일
성경은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책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제삼자인 사탄이 있다. 사탄은 항상 문제를 일으키며, 그 모든 문제는 혼돈이다. 주님께는 특별한 한 무리의 사람들인 이기는 이들이 필요하신데, 이러한 이기는 이들은 주님과 하나 되어 모든 파괴적인 혼돈을 정복하고 주님의 유일한 건설적인 경륜 안에서 승리하는 이들이다.
창세기 처음 11장 전반부까지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아담 족속으로 대하고 계셨다. 그러나 창세기 11장 후반부부터 하나님은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로 전환하셨다. 이러한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조상의 후손들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아담 족속에게서 아브라함 족속에게로 전환하셨다. 구약은 아담 족속과 아브라함의 육체에 속한 후손들을 다룬다.
신약 경륜 안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로 중대하고도 긴요한 전환을 가지셨다. 그분은 육체에 따른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서 그 영에 따른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로 전환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은 그들의 인종에 관계없이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들이다(갈 3:7, 29).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들 가운데 대부분이 또한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누구에게 가실 수 있겠는가?
성경의 마지막 책의 시작에서 금등잔대들 가운데 거니시는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님은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인 이기는 이들을 부르신다. “이기는 이에게는”(계 2:7, 11, 17, 26, 3:5, 12, 21). 이것은 우리, 곧 그분의 믿는 이들이며 우리의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을 향한 칠중(七重)의 부르심이다. 이기는 이들은 네 번째 족속이다.
신약 시대의 역사는 이천 년이 지났다. 아담 족속을 위해 이천 년이 있었고, 육체에 따른 아브라함 족속을 위해 이천 년이 있었으며, 그 영에 따른 아브라함 족속을 위해 거의 이천 년이 있었다. 주님께 필요한 것은 모든 사탄적인 혼돈을 정복하고 신성한 경륜 안에서 승리하는 이기는 이들 족속이다.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이들에 대한 책이다. 이기는 족속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하여 하나님께 승리를 가져온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신약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반드시 요한계시록 4장부터 22장까지에 이르는, 곧 보좌에서부터 새 예루살렘까지에 이르는 성경의 마지막 열아홉 장에 있는 이기는 족속에 속하는 이들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르면, 이 땅에는 오직 네 족속, 곧 아담 족속, 육체에 따른 아브라함 족속, 그 영에 따른 아브라함 족속, 이기는 이들 족속만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기는 이들 족속에 속한다고 믿음으로 선포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이들이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길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이시라는 것을 알지만(요 14:6상), 그리스도는 그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기는 이들에게 그들이 그분의 길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에게 길이 없지만, 오늘날 이기는 이들이 없다면 그리스도께 길이 없다. 이기는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수 있도록 하는 바로 그 길이다.
신언노트, 2022 10 23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림으로써
이기는 생활을 하여
생명의 성인
새 예루살렘이 됨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림에 의해
한 이기는 생명을 살아서
생명의 그 도시인
그 새 예루살렘이 됨
이스라엘의 예표의
대부분은
왕들에 관한 것이다.
왕들은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이며
최고의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은 땅이라는 근원에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다.
좋은 땅을
최고 수준에서
누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왕들이었다.
이러한 왕들은
신약의 믿는 이들의 예표이다.
왜냐하면 신약의 모든 믿는 이는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도록
하나님께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그분의 대표 권위로
말하는 부분뿐 아니라
다스리는 부분도
맡기셨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말하는 이들이었고
또한 왕들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대신하는
왕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다만
그분의 권위가 행사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있었던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에
왕은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우림과 둠밈이 있었다.
우림과 둠밈은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다스리심을 위한
일종의 대표 권위였다.
신약에서
모든 믿는 이는
왕들과 제사장들과 신언자들이 되도록
구원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이 되고
요소이신 하나님으로 변화됨으로써
그러한 왕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이었지만
타락하였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이며,
또한 하나님으로 거듭나고 변화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요소로 변화되어
하나님-사람들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바로
부활 안에 있다.
부활 안에 있다는 것은
모든 옛것을 부인함으로써
새것이 되고
새로움의 요소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새로움은
신성한 생명
곧 하나님 자신이다.
부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 창조물이 되었다.
이 새 창조물은
하나님으로
재창조되고 거듭나며 변화된 사람들이다.
이것은 또한
각 지방에서는 교회이고
우주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표의 시대에
이기는 이들은
신언자들이었다.
신언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을
돌보았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신탁의 말씀에 근거하여
어느 정도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수많은 왕이
신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따라서 모든 참된 신언자들은
이기는 이들이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성취된다.
이 책에서 주님은
‘이기는 이에게는’이라는 말씀을
일곱 번 반복하셨다.
이러한 이기는 이들은
예표인 신언자들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어떻게 교회가 모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할 때,
신언하는 것을
강조하고 높인다.
신언은
우리를
이기는 이들이 되게 한다.
그리스도를
사람들 안으로
말해 넣는 것이
신언하는 것이다.
신언은
이기는 이들의
기능이다.
신약의
모든 이기는 이들은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음으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왕들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은
우리가
은혜
(우리의 유기적인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충족하는
공급이 되시는
하나님 자신)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
(실지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된
하나님의 사법적인 구속)을
넘치게 받음으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책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제삼자인 사탄이 있다.
사탄은 항상
문제를 일으키며,
그 모든 문제는
혼돈이다.
주님께는
특별한 한 무리의 사람들인
이기는 이들이 필요하신데,
이러한 이기는 이들은
주님과 하나 되어
모든 파괴적인 혼돈을 정복하고
주님의 유일한 건설적인 경륜 안에서
승리하는 이들이다.
창세기 처음 11장 전반부까지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아담 족속으로 대하고 계셨다.
그러나 창세기 11장 후반부부터
하나님은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로
전환하셨다.
이러한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조상의
후손들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아담 족속에게서
아브라함 족속에게로 전환하셨다.
구약은 아담 족속과 아브라함의 육체에 속한 후손들을 다룬다.
신약 경륜 안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로
중대하고도 긴요한
전환을 가지셨다.
그분은
육체에 따른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서
그 영에 따른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로
전환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은
그들의 인종에 관계없이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들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들 가운데
대부분이 또한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누구에게 가실 수 있겠는가?
성경의 마지막 책의 시작에서
금등잔대들 가운데 거니시는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님은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인
이기는 이들을 부르신다.
“이기는 이에게는”(계 2).
이것은
우리,
곧 그분의 믿는 이들이며
우리의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을 향한
칠중(七重)의 부르심이다.
이기는 이들은
네 번째 족속이다.
신약 시대의 역사는
이천 년이 지났다.
아담 족속을 위해
이천 년이 있었고,
육체에 따른 아브라함 족속을 위해
이천 년이 있었으며,
그 영에 따른 아브라함 족속을 위해
거의 이천 년이 있었다.
주님께 필요한 것은
모든 사탄적인 혼돈을 정복하고
신성한 경륜 안에서 승리하는
이기는 이들이라는(~의) 인종이다.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이들에 대한 책이다.
이기는 족속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하여
하나님께 승리를 가져온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신약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반드시
요한계시록 4장부터 22장까지에 이르는,
곧 보좌에서부터
새 예루살렘까지에 이르는
성경의 마지막 열아홉 장에 있는
이기는 족속에 속하는 이들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르면,
이 땅에는
오직 네 인종들(종족들, 족속들),
곧 아담이라는 인종,
육체에 따른 아브라함이라는 인종,
그 영에 따른 아브라함이라는 인종,
이기는 이들이라는 인종만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기는 이들 족속에 속한다고
믿음으로 선포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이들이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길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이시라는 것을 알지만,
그리스도는
그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기는 이들에게
그들이
그분의 길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에게 길이 없지만,
오늘날 이기는 이들이 없다면
그리스도께 길이 없다.
이기는 이들이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수 있도록 하는
바로 그 길이다.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려
주님의 이기는 이들이 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신성하고
영적이며
하늘에 속하고
왕의 신분을 지니며
왕가에 속한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노예-구주를 믿는 사람들 안으로 뿌려진
신성한 생명의 씨가
가리키는 것은,
노예-구주의 복음의
결과요 목표인
하나님의 왕국과
이 시대의 교회가
사람의 지혜와 재능을 통하여 만들어진
생명 없는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 맺고 성숙하여
수확하는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사실상
사람의 존재 안으로 뿌려져
그들 안에서
왕국으로 발전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인성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이신
그분은
하나님의 왕국의 씨
곧 ‘유전자’로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 안으로 뿌려지셔서
그들 안에서 자라시고,
그들 안에서 사시며,
그들 안에서부터 표현되셔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으로 발전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이
가르침이나 활동이나 조직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
인상을 받아야 한다.
반대로,
하나님의 왕국은
그분의 육체 되심 안에서
그분의 선택된 사람들 안으로
뿌려지셔서
그들 안에서
한 왕국 안으로
자라시고
또 성장하시는
그 삼일 하나님이시다.
신약의 가르침 전체의
내재적인 요소는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께서 선택하신
백성 안으로
뿌려지시고
그들 안에서
왕국으로 발전하시기 위해
육체가 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하나님의 왕국의
완전한 성장이다(발전이다).
사복음서는
육체 되신 삼일 하나님을
계시한다.
마침내 이 하나님-사람은
전파하시고
가르치심으로써
그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뿌리시려고
나아오셨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였을 때,
왕국의 씨와 유전자를
받아들였다.
이 씨, 곧 이 유전자는
육체 되신 하나님,
곧 인성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이다.
복음서들에는
이러한 왕국의 씨가
뿌려지는 것이 있다.
사도행전에는
이러한 씨 뿌림이
번식하고
확산하는 것이 있다.
사도행전에서
수백 명,
심지어 수천 명의
씨 뿌리는 사람들이
일으켜졌다.
씨 뿌리는 이 모든 이들은
씨와 유전자를
받아들인 이들이었다.
그들은
씨를 받아들임으로써
그 씨를
다른 이들 안으로
뿌릴 수 있는
이들이 되었다.
이 방식으로
우리가
그 씨 뿌림의
또 그 씨의
번식을(전파를) 가진다.
서신서들에서
우리는
왕국의 씨,
왕국의 유전자가
자라는 것을
본다.
고린도전서 3장 9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경작지이며,
하나님의 건축물입니다.”
같은 장 다른 곳에서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 장의 여기에
그 씨의
자람,
곧 성장이 있다.
이 씨의 수확은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발견된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따르면,
먼저는
첫 열매가 있고,
그런 다음에
수확물이(수확이) 있다.
요한계시록 14장 4절은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로 드려지도록
사람들 가운데서
사 온 이들’에 대해
말한다.
그다음에 15절에서
우리는
‘그 땅의 수확물이 익은 것’을
본다.
천년왕국은
왕국의 씨, 왕국의 유전자가
최고도로 발전한 것으로서,
거기에서
아들은
왕이시고
모든 이기는 이들은
그분의 공동 왕들,
곧 ‘왕국의 유전자를 가진 백성’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첫 열매로 언급된 이들은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왕들이 될 이들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 천년왕국,
곧 그 천년은,
그 왕국의 유전자의
완전한 성장일(발전일) 것이다.
천년왕국 동안,
왕국의 유전자를
받아들인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왕들일 것이다.
그 새 하늘과 또 그 새 땅 안에서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이 그 수도인
한 영원한 왕국을
가지실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왕들의 한 구성체일 것이고,
이 왕들은
완전히 회복된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인성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이셨던
나사렛 사람 예수님에 의해
그 복음서들 안에 뿌려진
그 유전자의
완전한 성장인
한 영원한 왕국을
가지실 것이다.
복음서들 안에 뿌려진
왕국의 유전자는
얼마나 놀라운가!
결국 이 유전자는
요한계시록 20장에 언급된
천년왕국으로
발전할 것이며,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 왕국 유전자와 또 그것의 성장에 대한
이러한 그림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한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
왕국 복음을
사람들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하여
왕국의 씨, 왕국의 유전자가
번식하고 발전하게 함으로써
이 시대를 완결해야 한다.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은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인성 안에 계신 하나님-사람이셨던
주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계셨다.
그분께서 하신 모든 것은
아버지의 다스림 아래 있었다.
사람으로서 그분은
자신의 타고난 인성을 거절하셨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의 제한 아래서
인간 생활을 하셨다.
그분은
실지로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계심으로써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고 계셨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다.
우리는 반드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림으로
교회생활을 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의 생활을 위해
교회생활을 하는
본을 세웠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있을 때,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먼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런 다음 바울은
이방인 믿는 이들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도록
사랑 안에서
물질을 드린 것을 통하여,
그들을
유대인들의 교회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 안으로
이끌었다.
이것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한 몸의 교통 안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로마서 16장
1절부터 24절까지에서
추천하고 문안함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의
우주적인 교통 안에 있는
이 몸의 실지적인 생활을 위해,
그의 사역 아래 있는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을
함께 섞고 있었다.
오늘날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모든 믿는 이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
규제받고 제한받는 것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왕은
자신을 위하여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 앞에 있는
율법을
책에 베껴 써야 했다.
여기에서 율법은
모세오경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합당한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시받고 통치받으며
다스림 받고 통제받는 사람이었다.
이 원칙은 오늘날
교회들 안의 장로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장로들은
교회 안에서
행정을 수행하고
관리하기 위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성되어야 한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제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결정과 함께하실 것이며,
장로들은
하나님을 대표하여
교회의 사무를 관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관리가
신정(神政)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이 땅에서
그분의 증거가 될
신성하게 조성된 백성을
얻으시는 것이었다.
재조성되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
곧 그분의 말씀으로 돌아옴으로써
그분께 돌아와야 했다.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
단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 조성되어
하나님의 증거인
한 나라가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려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씀으로
그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넣음으로써
말씀으로 적셔지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영과 하나이다.
우리가 날마다
신성한 말씀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서 일하고,
그 영은
말씀을 통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요소와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의 존재 안으로 분배하시어
우리를
하나님으로 조성되게 하신다.
그 영의 통치는
그 영에 대한 가르침의 구조에서
머리 돌이다.
요셉의 삶에 대한 기록은
그 영의 통치에 대한 계시이다.
왜냐하면 그 영의 통치는
성숙한 성도의
다스리는 방면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형들을
탓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형들이
자신에게 한 모든 일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였고,
또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그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있었는지!
그의 영은
얼마나 탁월했는지!
요셉의 깨달음은
자신을 이집트에 보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은
형들에게
“형님들은
나에게
악한 일을 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선을 이루시어”
라고 말했다.
이것은
로마서 8장
28절과 29절에 있는
바울의 말의
실재이다.
요셉의
두 가지 꿈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었고,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본성과 위치와
기능과 목표에 관한
하나님의 신성한 관점을
그에게 계시해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의 타락한 본성에 따르면
사악하고 더럽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관점에 따르면
생명이 충만한 곡식 단이고
빛이 가득한 천체이다.
다스리는 방면의
성숙한 생명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유죄판결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생명은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며 감상한다.
요셉의 꿈은
그의 행동을
통제하고 지시하였다.
요셉의 이야기에 나타난
생명은
부활 생명이자
하나님의 생명이다.
요셉은
흥분되는 상황에 있었지만,
그에게는 흐트러졌다는
표시가 없었다.
이것이 생명이다.
우리는
요셉에게서
생명을 볼 뿐 아니라
생명의 길,
곧 우리 자신을
통제 아래 두는 것을
본다.
요셉이
인간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는
인간적인 느낌과 감정이 가득했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느낌을
그 영의 통치 아래 두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셉에게서
성숙한 생명을 볼 뿐 아니라
다스리는 생명과
이 다스리는 생명의 길을
본다.
우리 모두에게,
특히 청년들에게는
그러한 생명이 필요하며,
또한 그러한 길
곧 성숙한 사람이
왕으로서 다스리는 방면이
필요하다.
이 생명은
쉽게 흥분하지 않으며,
그 생명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흥분된 가운데서도
이 생명은
잠잠하며
스스로를 통제하고
그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다.
요셉은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요셉만큼
마음이 상하고도
복수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
또 있는지 모르겠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을 용서할 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당신이 한 일의 심각성을
당신에게 일깨워 주고 싶습니다.”
이런 종류의 용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것은
전혀 용서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제들을 용서할 때,
형제들을 위로했고
그들에게 자책하지 말고
자신에게 한 일을 잊어버리라고
말했다.
요셉은
형제들이
자신을
종으로 팔아넘긴 것이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하시려고
하신 일이었다고
말했다.
요셉은
형제들이 한 일 때문에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형제들을
하나님의 조력자들로 여겼다.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시도록
하나님을 도왔다.
요셉의 삶에 대한 기록은
얼마나 달콤한가!
요셉은 완전히
하나님의 안내 아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후회할 필요가 없었다.
요셉은
신약에 계시된 것의
생생한 예시이다.
요셉은
자신을 위한 유익이나
자신을 위한 누림이나
자신의 느낌이나
자신을 위한 야심이나
자신을 위한 목표가 없이,
자아를 부인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요셉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 아래서
제한받으며
자아를 부인한 것은
왕국 생활을 실행하는
열쇠였다.
자신을 부인한
요셉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왕국이
도래하며 실현되고 실행된다.
이러한 성취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왕국의 누림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리는
‘신성한 망원경’을 사용해서
시간을 관통하여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아야 한다.
새 예루살렘에는 오직
생명이 충만한 곡식 단들과
빛이 가득한 별들이 있을 뿐이다.
생명이 성숙하면 할수록,
우리는
성도들이나 교회에 관해
부정적인 말을
더 적게 할 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 아래 살면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고 있을 때,
그 결과는
참되고 실지적인 몸의 생활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된다.
‘사랑 안에서’라는 말은
에베소서에서
반복해서 사용된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사랑 안에서
우리를
아들의 자격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셨고,
그리스도의 몸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된다.
생명의 성장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
지난 몇 년 동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신성한 계시의 고봉을 보여 주심에
감사드린다.
나는
우리가
고봉의 진리에 관해 말할지라도
우리 가운데
사랑이 없을까 봐
염려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만한 것이고
건축되지 않은 것이다.
원천이
샘솟아 오를 때,
이것은
원천의 나타남이다.
그런 다음
강이 흐른다.
아버지는 원천이시고,
아들은 샘이시며,
그 영은 강이시다.
이렇게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신다’.
‘-에 이른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에는
풍성한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에 이른다’는 것은
목적지를 말한다.
영원한 생명은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의
목적지이다.
새 예루살렘은
신성하고 영원한
생명의 총체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입니다’는
‘새 예루살렘에 이를 것입니다’를
의미한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신성한 새 예루살렘에 이르도록 흐르는
무언가가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요한복음 4장 14절을
해석하는 데에는
온 성경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근원인 원천이시고,
아들은 샘이시며,
그 영은 흐르는 강이시고,
이러한 흐름이
영원한 생명 곧 새 예루살렘을
산출한다.
그 새 예루살렘은
사람과 연결되신 하나님과
또 하나님과 섞인 사람의
총체이다.
결국 삼일 하나님은
생수가 되시며,
주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생수를 주셨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야곱의 우물은
물질적인 것이지만,
야곱의 꿈은
신성하고 비밀하다.
이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 안에
참된 원천이 있다.
이 원천은 아버지이다.
이 원천이
나타나고
샘솟아 오를 때,
이것은 아들이다.
샘이 강으로 흐를 때,
이것은 그 영이다.
이것은
새 예루살렘에 이르며
새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한다.
요한복음의 처음 네 장은
흐르는 물이신 삼일 하나님을
제시한다.
6장과 7장에는
두 명절이 있다.
이 두 명절은
흐름의 산물이다.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는
목마르고 배고프다.
명절 곧 잔치에는
우리의 배고픔을 만족시킬
먹을 것이 있고,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마실 것이 있다.
음식은 그리스도이고,
물 또한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통하여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계신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 물을 마실 때,
그것은
우리 안에서
원천이 된다.
이 원천은
샘으로 나타나고,
이 샘은
새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하여
강으로 흘러나온다.
이것이
요한복음 전체를 여는
열쇠이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말씀하심이고
신성한 퍼짐이며
신성한 분배이다.
원천이신 아버지,
샘이신 아들,
강이신 그 영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신다.
그분은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실 때
우리와 함께
흐르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새 예루살렘에 이르도록
흘러가게 하심으로
새 예루살렘이 되게 하실 것이다.
‘-에 이른다’는 또한
‘-이 되다’를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에 이른다’는
‘새 예루살렘이 된다’를
의미한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새 예루살렘 안에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내재적인 의미이다.
1일
이스라엘의 예표의 대부분은 왕들에 관한 것이다. 왕들은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이며 최고의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은 땅이라는 근원에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다. 좋은 땅을 최고 수준에서 누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왕들이었다. 이러한 왕들은 신약의 믿는 이들의 예표이다. 왜냐하면 신약의 모든 믿는 이는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도록 하나님께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그분의 대표 권위로 말하는 부분뿐 아니라 다스리는 부분도 맡기셨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말하는 이들이었고 또한 왕들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대신하는 왕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다만 그분의 권위가 행사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있었던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에 왕은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우림과 둠밈이 있었다. 우림과 둠밈은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다스리심을 위한 일종의 대표 권위였다.
신약에서 모든 믿는 이는 왕들과 제사장들과 신언자들이 되도록 구원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이 되고 요소이신 하나님으로 변화됨으로써 그러한 왕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이었지만 타락하였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이며, 또한 하나님으로 거듭나고 변화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요소로 변화되어 하나님-사람들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바로 부활 안에 있다. 부활 안에 있다는 것은 모든 옛것을 부인함으로써 새것이 되고 새로움의 요소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새로움은 신성한 생명 곧 하나님 자신이다.
부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 창조물이 되었다. 이 새 창조물은 하나님으로 재창조되고 거듭나며 변화된 사람들이다. 이것은 또한 각 지방에서는 교회이고 우주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예표의 시대에 이기는 이들은 신언자들이었다. 신언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을 돌보았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신탁의 말씀에 근거하여 어느 정도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수많은 왕이 신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따라서 모든 참된 신언자들은 이기는 이들이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성취된다. 이 책에서 주님은 ‘이기는 이에게는’이라는 말씀을 일곱 번 반복하셨다(계 2:7, 11, 17, 26, 3:5, 12, 21).
이러한 이기는 이들은 예표인 신언자들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어떻게 교회가 모여야 하는지에 대해 말할 때, 신언하는 것을 강조하고 높인다. 신언은 우리를 이기는 이들이 되게 한다. 그리스도를 사람들 안으로 말해 넣는 것이 신언하는 것이다. 신언은 이기는 이들의 기능이다.
신약의 모든 이기는 이들은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음으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왕들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은 우리가 은혜(우리의 유기적인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충족하는 공급이 되시는 하나님 자신)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실지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된 하나님의 법리적인 구속)을 넘치게 받음으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