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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생명이 자라 성숙에 이름으로써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함

야고보는 그의 서신서에서 농부가 오래 참으면서 땅의 귀중한 열매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을 예시로 사용한다.

주 예수님은 사실상 참된 농부, 유일한 농부이시다.

우리가 주님께서 오시기를 오래 참으며 기다리는 동안, 참된 농부이신 주님도 밭의 첫 열매와 곡식인 우리가 생명 안에서 성숙하기를 인내하시며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주님, 속히 돌아오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주님은 “너희가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희가 성숙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너희가 성숙해야만 내가 돌아가는 것이 앞당겨질 수 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것을 우리가 진지하게 기다린다면, 생명이 자라 성숙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성숙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속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갔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 안으로 태어나셨다. 이제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도록 우리 안에서 살고 계시며, 우리가 성숙할 때 우리 속에 그분의 형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변화의 마지막 단계는 성숙, 곧 생명의 충만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우리가 변화되고 성숙되는 것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성숙은 우리가 생명의 충만함을 얻을 때까지 신성한 생명을 거듭해서 우리 안으로 분배받는 문제이다.

성숙은 용량이 증가하는 문제이다.

생명의 성숙은 성령의 징계를 받은 것의 총합이다.

다른 사람들은 생명이 성숙한 한 사람을 보겠지만, 그 사람이 수년에 걸쳐 남모르게 매일 받아 온, 축적된 성령의 징계는 볼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채운 모든 것을 비워 내시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여러 사람과 일과 사건을 사용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채워지도록 우리의 용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아들의 자격에 있어서 성숙하고 성년이 된 아들들이 되려면,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거듭난 이후로 주님은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계속 일해 오셨다.

주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우리 안으로 완전히 일해 넣으시고 우리를 통해 완전히 표현되실 때, 우리는 생명이 성숙할 것이다.

신약의 용법에 따르면, ‘성숙’이라는 단어는 믿는 이들이 거듭났을 때 받은 하나님의 생명이 완전히 자라고 성숙하고 온전해진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고 성숙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함으로써, 즉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를 극도로 누리기 위해 그리스도를 가장 충만하게 누리고 얻기를 추구함으로써, 성숙에 이르도록 계속 나아가고 전진해야 한다.

영적 생명이 성숙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신성한 생명이 계속 자라는 것이다.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한 것의 궁극적인 결과로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된다. 곧 성숙한 사람으로 자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된다.

바울의 사역의 목표는 한 새사람을 위해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 곧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골로새서 1장 28절에서 ‘충분히 성장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또한 ‘온전한’, ‘완전한’, 혹은 ‘성숙한’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바울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분배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함으로 온전하고 완전하게 되어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그리스도는 우리 안으로 더 들어오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더 들어오실수록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더 들어간다. 바로 이러한 순환에 의해 우리는 생명이 자란다.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과 교통하는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그들 안으로 공급함으로, 그들이 생명이 성숙하여 그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드려지게 하는 것이다.

휴거될 준비가 되려면 우리는 생명이 성숙해야 한다.

휴거는 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완결 단계로서 우리 몸의 변형, 우리 몸의 구속이다.

우리가 받아들인 신성한 생명의 요구와 주님을 향한 우리의 강렬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생활을 추구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주님의 임재 앞으로 휴거되기를 소망한다.

성숙하게 되는 것은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준비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 안에서 자라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는 휴거되도록 성숙되어 있을 것이다.

성숙의 표시에는 다음의 항목이 포함된다.

  1. 우리를 변화시키는 신성한 생명으로 가득 채워짐
  2.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림
  3.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음
  4. 이해하는 데 있어서 충분히 성장함
  5.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하게 됨
  6. 몸을 보고, 몸을 알고, 몸 안에서 몸을 위해 살고, 몸을 돌보고, 몸을 존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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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골 1:28-29 우리가 그분을 전파하여 온갖 지혜로 각 사람에게 권면하고 각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나도 내 안에서 능력으로 운행하시는 분의 운행에 따라 수고하며 분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공급하며 그들이 주님을 받아들이도록 도울 때, 우리의 목표는 그들이 단지 불 못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유죄판결에서 구원받게 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체험하는 것만도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그들 안으로 공급함으로, 결국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드려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표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우리와 대화하는 모든 사람 안으로 그리스도가 주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분배하는 것이 우리의 복음 전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리려면 그리스도를 성도들의 몫으로 그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우리가 공급하는 그리스도는 분명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이시자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과 전부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완전한 방식으로 체험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사는 것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가 그리스도에 의해 살도록 도와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자라게 하고 그리스도를 산출한다면, 사람들을 접촉할 때 자연스럽게 그들 안으로 그리스도를 주입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과 인격으로 취할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더욱더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좋은 땅으로 누리고 그리스도께 수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체험하고 사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주입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 안으로 그리스도의 풍성을 공급함으로써 그들이 자라고 성숙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가 직접 성도들의 몫이신 그리스도를 더 많이 체험해야 한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리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교회 건축을 위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공급해야 한다. 나는 여행할 때, 모든 이에게 매우 좋은 형제자매로 여겨지지만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풍성이 부족한 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해지고자 하는 열망을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는 그리스도의 풍성에 관해서는 가난하면서 겉보기에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 교회 건축을 위하여 저를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채워 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 곧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를 공급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지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과 교통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날마다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체험하는지를 간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그 영 안에 있다.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그 영은 실제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매일 우리는 주님과 한 영이어야 하고 그분께서 우리와 하나이신 것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점점 더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서 우리가 주님과 한 영임을 체험해야 한다. 이것이 교리나 이론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의 실지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어야 한다.

나는 나의 사역을 두고 자주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제가 말할 때 당신과 한 영이 되도록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제가 말할 때 당신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께서 저와 한 영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을 공급할 때 당신과 한 영이 되기를 구합니다.” 이 사역의 영향력은 전부 주님과 이렇게 하나 되는 것에서 나온다.

5일

빌 3:13-15 형제님들, 나는 아직 내가 붙잡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일만을 합니다. 즉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함으로써, 나에게 주실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상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위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충분히 성장한 사람들은 이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절부터 15절까지에서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하기를 추구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 일에서 바울은 결코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고 항상 추구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함으로써 푯대와 표적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얻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하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이 인도하고 돌보는 믿는 이들에게 그의 추구를 본으로 삼아 자신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을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충만히 얻음으로써 자라고 성숙하게 되라고 권유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우리 가운데 (비교적) 충분히 성장한 많은 이들이 이것을 생각하고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마태복음 5장 48절의 시작에 있는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이 절이 앞의 성경 본문인 17절부터 47절까지의 결론임을 가리킨다. 17절부터 47절까지에서 주님은 천국 헌법 중에서 새 생명에 속한 율법을 반포하셨고, 그 결론인 48절에서는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생명 안에서) 우리도 온전하게 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생명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은 생명이 자라고 성숙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서 나서 우리 아버지의 생명을 가진 자녀들이기 때문에, 주님은 새 생명에 속한 천국의 율법의 결론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신 것이다. 이 생명은 우리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우리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명령은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에 근거한 것이며, 또한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에 의해 성취된다.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은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생명 안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자 우리에 대한 주님의 기대이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의 갈망에 주의를 기울이고 주님의 명령을 지키며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의 생명에 의해 자라고 성숙하게 됨으로써 삼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야 한다.

영적 생명이 성숙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이 생명이 계속 자라는 것이다. 믿는 이는 거듭나자마자 영적으로 갓난아기가 된다. 믿는 이는 순전한 젖과 같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영적 생명에 있어서 믿는 이는 한 면으로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다른 한 면으로 하나님의 농장에서 경작되는 식물과 같다. 믿는 이가 사람이든 식물과 같든 자라야 성숙할 수 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라는 것이 충분히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사랑 안에서 붙잡고, 모든 일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람으로써 영적 생명이 자란다. 그리스도를 참된 것으로 취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이러한 종류의 성장 또한 우리가 충분히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은 성숙한 사람으로 자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충만은 그리스도의 표현이 되는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킨다. 신장의 분량을 간단히 말하면 바로 신장이다. 이 신장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자라서 도달한 그리스도의 신장이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자라고 성숙한 것의 최종적이고도 충만한 결과이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변화됨으로 우리는 그분의 본질의 형상과 같아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숙됨으로 우리는 그분의 신장의 분량과 같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한 면으로 우리에게는 그분의 형상이 있고, 다른 한 면으로 그분의 신장이 있다.

4일

갈 4:19 나의 자녀인 여러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나는 다시 여러분을 위하여 해산하는 진통을 겪습니다.

고후 3:18 그러나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게서 비롯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셔서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갖는 것임을 안다(롬 8:29). 성숙하는 것은 주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숙하는 것은 또한 구원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천연적이기만 했던 우리 안에는 원래 주님의 생명과 본성과 형상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구원을 통해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더하셨다.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난 이후로 주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계속 더하셔서 우리가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갖게 하셨다. 즉, 우리가 구원받은 때부터 주님은 우리 안에서 계속 일하심으로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가질 수 있게 하셨다. 주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우리 안으로 완전히 일해 넣으시고 우리 안에서부터 완전히 표현되실 때, 우리는 생명이 성숙할 것이다.

서신서들에서 우리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확실히 주님을 믿었음을 본다. 그들은 죄들을 용서받았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지만, 여전히 그들 자신으로 말미암아 살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의지하기보다는 그들 자신을 너무나 많이 의지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나의 자녀인 여러분, … 나는 다시 여러분을 위하여 해산하는 진통을 겪습니다.”(갈 4:19)라고 말했다. 왜 바울은 다시 그들을 위하여 해산하는 진통을 겪어야 했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분 자신을 우리와 연합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골 3:4상), 우리 안에서 자라기를 원하신다(2:19하). 우리의 구원의 최종 목적은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됨으로써,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고(엡 3:17) 우리가 성숙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이다(4:13).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믿는 이들의 생명이 자라고 성숙하여 결국 그들이 그리스도와 똑같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러한 구원을 성취하시는가? 먼저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들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으로서(고전 15:45하)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 안에 사신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살고 계실 뿐 아니라(갈 2:20) 우리 안에서 자라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자라고 형상을 이루며 성숙하려고 하신다(엡 4:1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다. 자라서 성숙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으로 사신다는 뜻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형상을 이루실 때까지 계속해서 자라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완전히 형상을 이루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숙할 것이다.

자라지 않고 성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단한 음식 같은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어린아이 단계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의 히브리 믿는 이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더 깊은 말씀의 계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지혜는 오직 충분히 성장한 사람에게만 말할 수 있다(고전 2:6). 하나님의 신약 경륜 곧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할 필요가 있다.

우리 믿는 이들은 거듭난 후에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더 이상 갓난아기는 아닐지라도 여전히 어린아이일 수 있고, 쉽게 온갖 가르침의 바람에 밀려다니거나 파도에 요동할 수 있으며, 오류의 체계에 빠지게 하는 간교한 술수에 속임당하거나 이끌릴 수 있고, 사탄에게 기만당할 수 있다. 긍정적인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을 알기 위해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 부정적인 면에서 우리는 사탄에게 기만당하지 않기 위해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

3일

히 12:10-11 …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거룩함에 동참하는 데 유익하도록 징계하십니다. 모든 징계가 당시에는 기쁘지 않고 슬픈 것 같지만,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들에게 화평을 가져오는 의의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성숙은 용량이 증가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난을 주시는 것을 허락해 드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용량이 증가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환경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안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안배가 바로 성령의 징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안배를 한 번 피한다면, 우리의 용량이 증가될 기회를 한 번 놓치게 된다. 고난을 거친 믿는 이는 결코 전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고난을 통과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생명의 성숙이 성령의 징계를 받은 것의 총합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은 생명이 성숙한 한 사람을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수년에 걸쳐 남모르게 매일 받아 온, 축적된 성령의 징계는 볼 수 없다.

창세기 27장에서 우리는 빼앗는 사람을 본다. 야곱의 아버지, 형, 삼촌 등 야곱을 접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손해를 보는 사람이 되었다. 반대로 야곱은 항상 이득을 보았다. 그런데 라헬이 죽을 때에 야곱은 손실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지어 이 손실조차도 이득을 산출하였는데, 바로 베냐민이었다. 37장에서 야곱은 또 다른 손실, 즉 요셉을 잃는 손실을 겪었다. 이 장에서 야곱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이 시점부터 계속 야곱은 하나씩 하나씩 잇달아 잃게 되었다. 47장에서 마침내 그는 생명의 충만을 얻었다. 우리가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고 생명이 우리에게서 넘칠 때, 이 생명은 다른 사람들 안으로 넘쳐흘러 들어갈 것이다. 이 넘쳐흐름이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27장에서 빼앗는 사람을 보고, 37장에서 변화된 사람을 보며, 47장에서 성숙한 사람을 본다. 야곱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그를 치셨을 때에 시작되었고(32:25), 변화의 과정이 비교적 완성된 때인 37장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37장에서 야곱은 여전히 생명의 충만인 성숙에 이르지 못했다. 야곱은 성숙되기 위해 마지막 단계의 다룸들인 헤브론에서의 다룸들을 체험해야 했다.

헤브론에서 야곱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생활했다. 야곱은 요셉을 잃어버린 후에 모든 장애물에서 해방되었고 주님을 향하여 완전히 열렸다. 의심할 것 없이 야곱은 매일 요셉에 대해 생각했다. 야곱은 요셉이 나쁜 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이 결론이 확증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야곱은 아마 자신이 요셉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야곱을 하나님께로 밀어붙였으며 하나님께 열려 있게 했다. 이 모든 세월 동안 야곱은 하늘을 향해 열린 항아리였고, 하늘에 속한 비가 계속해서 야곱 안으로 내리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야곱은 매일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으로써 신성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우리를 점유하고 있는 것들은 생명의 성장을 방해한다. 그러나 야곱이 요셉이 이집트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야곱을 점유하고 있던 모든 것이 비워져 있었다. 그의 속사람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라헬은 죽었고,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떠나 있었으며, 야곱은 완전히 비워져 있었다. 야곱은 좋은 소식을 받았을 때 그것으로 인해 흥분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비워져 있었다. 사실 야곱의 마음은 오히려 무덤덤하기까지 했다(창 45:26). 요셉에 대한 소식을 받았을 때 야곱은 변화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으로 완전히 채워져 있었다. 그는 성숙하게 되었다.

우리가 야곱처럼 바뀌고 난 뒤에, 하나님은 우리를 채운 모든 것을 비워 내시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여러 사람과 일과 사건을 사용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채워지도록 우리의 용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다.

야곱의 체험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의 변화와 성숙을 위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임을 본다. 어떤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우리가 변화되고 성숙되는 것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2일

히 6: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인 말씀에 머물지 말고, 성숙에 이르도록 전진합시다. …

마 5:48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온전하게 되십시오.

요 10:10 …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성숙’이란 단어의 의미는 ‘종점’이다. 이 단어는 유기체를 묘사할 때 ‘완전함’, ‘충분히 성장함’, ‘원숙’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여러 차례 사용되는데, 믿는 이들이 거듭났을 때 받은 하나님의 생명이 완전히 자라고 성숙하고 온전해진 것을 가리킨다. 성숙이라는 말은 우리가 거듭났을 때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지만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이 생명 안에서 완전함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고 성숙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변화의 마지막 단계는 성숙이다. 성숙은 생명의 충만을 의미한다. 사람이 성숙될 때 그에게는 생명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

변화는 생명의 신진대사적인 바뀜이다. 그러므로 변화는 충만함의 문제가 아니라 바뀜의 문제이다. 오직 변화를 통해서만 우리는 성숙에 이를 수 있다. 우리에게는 타고난 생명이 있지만 이 생명은 하나님의 경륜에 합당하지 않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은 대치될 필요는 없지만, 신진대사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우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타고난 사람의 생명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람의 생명은 본성에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럴 때 신성한 생명이 변화된 사람의 생명과 연합되어 하나가 될 것이다.

적어도 신약의 두 절이 변화의 문제를 밝혀 준다. 로마서 12장 2절은 “여러분은 이 시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오직 여러분은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되어”라고 말한다. 이 절에서 ‘변화되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도 나타난다. 이 두 절에서 ‘변화되다’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우리에게 신진대사적인 바뀜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인 개선이나 바뀜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본성과 생명에서 내적인 바뀜이 필요하다.

구원받을 때 우리는 의롭게 되고 죄들이 용서받을 뿐 아니라 또한 거듭난다. 거듭날 때, 새로운 생명인 신성한 생명이 우리의 영 안으로 더해진다. 우리가 거듭난 때부터 이 생명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변화시키고 있다. 신성한 생명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바꾸면서 더욱더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된다. 그러므로 변화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이 바뀜이 충만함이라는 지점에 이를 때 성숙의 때가 올 것이다. 성숙은 우리 자신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의 충만함을 얻을 때까지 신성한 생명을 거듭해서 우리 안으로 분배받는 문제이다.

변화되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바뀌는 것이지만, 성숙되는 것은 우리를 바꾸는 신성한 생명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창세기 37장부터 45장까지는 야곱의 성숙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이 과정은 37장 1절에서 시작되어 45장 28절까지 계속된다. 아마 야곱은 그의 온 일생 가운데서 이 아홉 장에서 고통당한 만큼 고통당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 장들은 참으로 야곱이 고통받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장들에서 우리는 야곱이 그의 일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받은 다룸들을 본다. 이 장들에서 야곱이 겪은 고난은 그의 개인적인 느낌을 깊이 만졌다. 이 장들 이후 야곱은 더 이상 다룸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야곱은 완전히 성숙했고, 신성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했다.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숙이 필요하다. 오직 성숙한 생명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닐 수 있고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할 수 있다.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닐 수 없었고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할 수 없었다. 야곱은 변화되기는 하였지만 아직 성숙되지는 않았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 것은 야곱이 성숙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곱을 주권적으로 그분의 손 아래 두심으로써 야곱이 성숙되게 하셨다.

신언노트 2023 04 16

생명이 자라
성숙에 이름으로써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함
성숙에 이르도록
생명 안에서 자람에 의해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들을 준비함

주님께서 오시려면
우리가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지연시킬 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빨리 성숙할수록
주님께서 수확하실 때가
더 앞당겨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먹음으로
성장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더 먹고
더 성장할수록
그분의 다시 오심은
더 앞당겨질 것이다.
단지 “주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라고
선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곡식이 익기 전에는
농부가 수확할 수 없는 것처럼,
많은 믿는 이들이 성숙하기 전까지는
주 예수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을 먹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께서 오시기를
오래 참으며 기다리는 동안,
참된 농부이신 주님도
밭의 첫 열매와 곡식인 우리가
생명 안에서 성숙하기를
인내하시며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생명 안에서 성숙해야
우리가 오래 참고
그분께서 인내하시는 기간이
단축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께 심판받을 것을
예비하기 위해
생명의 성숙을
추구해야 한다.

야고보서 5장 7절에서
야고보는
농부가
오래 참으면서
땅의 귀중한 열매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을
예시로 사용한다.
주 예수님은 사실상
참된 농부,
유일한 농부이시다.
우리가
그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참된 농부이신 그분은
우리가 성숙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주님,
속히 돌아오십시오.”라고
기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더 빨리 성숙하여라.
너희가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희가 성숙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너희가 성숙해야만
내가 돌아가는 것이
앞당겨질 수 있다.”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것을
우리가 진지하게 기다린다면,
생명이 자라
성숙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완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보고 있다.
즉, 우리의 영적 상태나
영적 성장과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어느 날
주님께서
갑자기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으며,
그분께서 오시는 것이
그들의 성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ㅇ주님의 다시 오심에 관하여
붙잡고 있는
관념 때문에
주님의 오심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 5장 7절에 언급된
농부의 예시는
농부가
밭에서
곡식이 익도록 자라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따르면,
주님도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밭에 있는 곡식이 익을 때
그분은 다시 오실 것이다.
이 곡식은
주님께서
그분 자신을 씨로 뿌리신 것의
결과이자 산물일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을
씨로 뿌리신 것은
주님께서 첫 번째 오셨을 때
성취되었고,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곡식이 익는 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재촉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려면,
우리는
오래 참고 인내하며
생명이 성장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오래 참고
고난을 인내하려면,
우리는
생명이 성장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오, 주 예수님,
더 빨리 돌아오십시오.
주님,
당신은
제가 생명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십니까?
저는
어제보다 오늘 더 빨리
자라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자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께
빨리 오시기를 구합니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다시 오심에 관해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
우리의 생명이 성장하는 것과
관계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생명의 성장이라는
조건을 충족한다면,
주님께서
더 빨리 돌아오실 조건도
충족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 성장해야 하고,
생명이 성장하려면 또한
오래 참고 인내하기를
훈련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합당한 길이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서에서
농부가 오래 참으면서
땅의 귀중한 열매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을
예시로 사용한다.

주 예수님은 사실상
참된 농부,
유일한 농부이시다.

우리가
주님께서 오시기를
오래 참으며 기다리는 동안,
참된 농부이신 주님도
밭의 첫 열매와 곡식인 우리가
생명 안에서 성숙하기를
인내하시며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주님,
속히 돌아오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주님은
“너희가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희가 성숙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너희가 성숙해야만
내가 돌아가는 것이
앞당겨질 수 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헬라어에서
‘성숙’이란 단어의 의미는
‘종점’이다.
이 단어는
유기체를 묘사할 때
‘완전함’, ‘충분히 성장함’, ‘원숙’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여러 차례 사용되는데,
믿는 이들이 거듭났을 때 받은
하나님의 생명이
완전히 자라고 성숙하고 온전해진 것을
가리킨다.
성숙이라는 말은
우리가 거듭났을 때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지만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이 생명 안에서
완전함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고 성숙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변형의 마지막 단계는
성숙이다.
성숙은
생명의 충만을 의미한다.
사람이 성숙될 때
그에게는
생명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

변형은
생명 안에서의 신진대사적인 한 변화이다.
그러므로 변형은
충만함의 한 문제가 아니라
변화의 한 문제이다.
오직 변형을 통해서만
우리가
성숙에 이를 수 있다.
우리에게는
타고난 생명이 있지만
이 생명은
하나님의 경륜에 합당하지 않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은
대치될 필요는 없지만,
신진대사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우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타고난 사람의 생명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람의 생명은
본성에서 변형되어야 한다.
그럴 때 그 신성한 생명이
그 변형된 사람의 생명과 섞여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적어도 신약의 두 절이
변화의 문제를 밝혀 준다.
로마서 12장 2절은
“여러분은
이 시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오직 여러분은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되어”라고 말한다.
이 절에서
‘변화되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도 나타난다.
이 두 절에서
‘변화되다’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우리에게 신진대사적인 바뀜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인 개선이나 바뀜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본성과 생명에서
내적인 바뀜이 필요하다.

구원받을 때 우리는
의롭게 되고
죄들이 용서받을 뿐 아니라
또한 거듭난다.
거듭날 때,
새로운 생명인 신성한 생명이
우리의 영 안으로 더해진다.
우리가 거듭난 때부터
이 생명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변화시키고 있다.
신성한 생명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바꾸면서
더욱더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된다.
그러므로 변화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이 바뀜이
충만함이라는 지점에 이를 때
성숙의 때가 올 것이다.
성숙은
우리 자신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의 충만함을 얻을 때까지
신성한 생명을
거듭해서 우리 안으로 분배받는 문제이다.

변화되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바뀌는 것이지만,
성숙되는 것은
우리를 바꾸는 신성한 생명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다.
창세기 37장부터 45장까지는
야곱의 성숙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이 과정은
37장 1절에서 시작되어
45장 28절까지 계속된다.
아마 야곱은
그의 온 일생 가운데서
이 아홉 장에서 고통당한 만큼
고통당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 장들은 참으로
야곱이 고통받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장들에서 우리는
야곱이
그의 일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받은
다룸들을 본다.
이 장들에서 야곱이 겪은 고난은
그의 개인적인 느낌을
깊이 만졌다.
이 장들 이후 야곱은
더 이상 다룸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야곱은
완전히 성숙했고,
신성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했다.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숙이 필요하다.
오직 성숙한 생명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닐 수 있고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할 수 있다.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닐 수 없었고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할 수 없었다.
야곱은 변화되기는 하였지만
아직 성숙되지는 않았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 것은
야곱이 성숙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곱을 주권적으로
그분의 손 아래 두심으로써
야곱이 성숙되게 하셨다.

성숙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속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갔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 안으로 태어나셨다.
이제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도록
우리 안에서 살고 계시며,
우리가 성숙할 때
우리 속에
그분의 형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우리의 변형과 또 성숙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성숙은
용량이 증가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난을 주시는 것을
허락해 드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용량이
증가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환경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안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안배가 바로
성령의 징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안배를
한 번 피한다면,
우리의 용량이
증가될 기회를
한 번 놓치게 된다.
고난을 거친 믿는 이는 결코
전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고난을 통과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생명의 성숙이
성령의 징계를 받은 것의 총합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은
생명이 성숙한
한 사람을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수년에 걸쳐
남모르게 매일 받아 온,
축적된 성령의 징계는
볼 수 없다.

창세기 27장에서 우리는
빼앗는 사람을 본다.
야곱의 아버지, 형, 삼촌 등
야곱을 접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손해를 보는 사람이 되었다.
반대로 야곱은 항상
이득을 보았다.
그런데 라헬이 죽을 때에
야곱은
손실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지어 이 손실조차도
이득을 산출하였는데,
바로 베냐민이었다.
37장에서 야곱은
또 다른 손실,
즉 요셉을 잃는
손실을 겪었다.
이 장에서 야곱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이 시점부터 계속
야곱은
하나씩 하나씩
잇달아 잃게 되었다.
47장에서 마침내 그는
생명의 충만을 얻었다.
우리가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고
생명이
우리에게서 넘칠 때,
이 생명은
다른 사람들 안으로
넘쳐흘러 들어갈 것이다.
이 넘쳐흐름이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27장에서 한 빼앗는 사람을 보고,
37장에서 한 변형된 남자를 보며,
47장에서 한 성숙한 사람을 본다.
야곱의 변형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그를 치셨을 때에 시작되었고,
변화의 과정이 비교적 완성된 때인
37장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37장에서 야곱은 여전히
생명의 충만인
성숙에 이르지 못했다.
야곱은 성숙되기 위해
마지막 단계의 다룸들인
헤브론에서의 다룸들을
체험해야 했다.

헤브론에서 야곱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생활했다.
야곱은
요셉을 잃어버린 후에
모든 장애물에서 해방되었고
주님을 향하여
완전히 열렸다.
의심할 것 없이 야곱은
매일 요셉에 대해 생각했다.
야곱은
요셉이 나쁜 짐승에게 잡아먹혔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이 결론이 확증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야곱은 아마
자신이 요셉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야곱을 하나님께로 밀어붙였으며
하나님께 열려 있게 했다.
이 모든 세월 동안 야곱은
하늘을 향해 열린 항아리였고,
하늘에 속한 비가 계속해서
야곱 안으로 내리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야곱은 매일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으로써
신성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우리를 점유하고 있는 것들은
생명의 성장을 방해한다.
그러나 야곱이
요셉이 이집트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야곱을 점유하고 있던
모든 것이 비워져 있었다.
그의 속사람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라헬은 죽었고,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떠나 있었으며,
야곱은 완전히 비워져 있었다.
야곱은
좋은 소식을 받았을 때
그것으로 인해
흥분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비워져 있었다.
사실 야곱의 마음은 오히려
무덤덤하기까지(냉정하기까지) 했다.
요셉에 대한
소식을 받았을 때
야곱은
변화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으로
완전히 채워져 있었다.
그는 성숙하게 되었다.

우리가
야곱처럼 바뀌고 난(변화된) 뒤에,
하나님은
우리를 채운
모든 것을 비워 내시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여러 사람과 일과 사건을
사용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채워지도록
우리의 용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다.

야곱의 체험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의 변형과 성숙을 위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임을
본다.
어떤 것도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우리가 변화되고 성숙되는 것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성숙은
용량이 증가하는 문제이다.

생명의 성숙은
성령의 징계를 받은 것의 총합이다.

다른 사람들은
생명이 성숙한
한 사람을 보겠지만,
그 사람이
수년에 걸쳐
남모르게 매일 받아 온,
축적된 성령의 징계는
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셔서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가지는 것임을
안다.
성숙하는 것은
주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숙하는 것은 또한
구원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형되는 것을
의미한다.
천연적이기만 했던 우리 안에는 원래
주님의 생명과 본성과 형상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구원을 통해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더하셨다.
우리가
구원받고 거듭난 이후로
주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계속 더하셔서
우리가
그분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게 하셨다.
즉, 우리가 구원받은 때부터
주님은
우리 안에서 계속 일하심으로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가질 수 있게 하셨다.
주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우리 안으로
완전히 일해 넣으시고
우리 안에서부터
완전히 표현되실 때,
우리는
생명 안에서 성숙할 것이다.

서신서들에서
우리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확실히
주님을 믿었음을 본다.
그들은
죄들을 용서받았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지만,
여전히 그들 자신으로 말미암아 살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의지하기보다는
그들 자신을 너무나 많이 의지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나의 자녀인 여러분, …
나는 다시
여러분을 위하여
해산하는 진통을 겪습니다.”
(갈 4:19)라고 말했다.
왜 바울은 다시
그들을 위하여
해산하는 진통을
겪어야 했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분 자신을
우리와 섞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 안에서 자라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구원의 최종 목적은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과 섞임으로써,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가
성숙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믿는 이들의
생명이 자라고 성숙하여
결국 그들이
그리스도와 똑같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러한 구원을 성취하시는가?
먼저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들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으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 안에 사신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살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라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자라고
형상을 이루며
성숙하려고 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다.
자라서 성숙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명으로 사신다는 뜻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형상을 이루실 때까지
계속해서 자라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완전히 형상을 이루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숙할 것이다.

자라지 않고
성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단한 음식 같은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어린아이 단계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의 히브리 믿는 이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더 깊은 말씀의 계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지혜는 오직
충분히 성장한 사람에게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곧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할
필요가 있다.

우리 믿는 이들은
거듭난 후에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더 이상 갓난아기는 아닐지라도
여전히 어린아이일 수 있고,
쉽게 온갖 가르침의 바람에 밀려다니거나
파도에 요동할 수 있으며,
오류의 체계에 빠지게 하는
간교한 술수에
속임당하거나 이끌릴 수 있고,
사탄에게 기만당할 수 있다.
긍정적인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을 알기 위해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
부정적인 면에서
우리는
사탄에게 기만당하지 않기 위해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

우리가
신성한 아들의 자격에 있어서
성숙하고
성년이 된 아들들이 되려면,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거듭난 이후로
주님은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계속
일해 오셨다.

주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우리 안으로
완전히 일해 넣으시고
우리를 통해
완전히 표현되실 때,
우리는
생명 안에서 성숙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절부터 15절까지에서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하기를
추구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 일에서 바울은 결코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고
항상 추구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함으로써
푯대와 표적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얻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하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이 인도하고 돌보는
믿는 이들에게
그의 추구를
본으로 삼아
자신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을 추구하고
그리스도를 충만히 얻음으로써
자라고 성숙하게 되라고
권유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우리 가운데
(비교적) 충분히 성장한 많은 이들이
이것을
생각하고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마태복음 5장 48절의 시작에 있는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이 절이 앞의 성경 본문인
17절부터 47절까지의 결론임을
가리킨다.
17절부터 47절까지에서
주님은
천국 헌법 중에서
새 생명에 속한
율법을 반포하셨고,
그 결론인 48절에서는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생명 안에서)
우리도
온전하게 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생명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은
생명이 자라고 성숙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서 나서
우리 아버지의 생명을 가진
자녀들이기 때문에,
주님은
새 생명에 속한
천국의 율법의 결론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신 것이다.
이 생명은
우리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우리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명령은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에 근거한 것이며,
또한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에 의해 성취된다.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은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생명 안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자
우리에 대한 주님의 기대이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의 갈망에
주의를 기울이고
주님의 명령을 지키며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의 생명에 의해
자라고 성숙하게 됨으로써
삼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야 한다.

영적 생명이 성숙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이 생명이 계속 자라는 것이다.
믿는 이는
거듭나자마자
영적으로 갓난아기가 된다.
믿는 이는
순전한 젖과 같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영적 생명에 있어서
믿는 이는
한 면으로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다른 한 면으로
하나님의 농장에서 경작되는
식물과 같다.
믿는 이가
사람이든 식물과 같든
자라야 성숙할 수 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라는 것이
충분히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사랑 안에서 붙잡고,
모든 일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람으로써
영적 생명이 자란다.
그리스도를
참된 것으로 취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이러한 종류의 성장 또한
우리가
충분히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은
성숙한 사람으로 자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충만은
그리스도의 표현이 되는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킨다.
신장의 분량을
간단히 말하면
바로 신장이다.
이 신장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자라서 도달한
그리스도의 신장이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자라고 성숙한 것의
최종적이고도 충만한 결과이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변화됨으로
우리는
그분의 본질의 형상과
같아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성숙됨으로
우리는
그분의 신장의 분량과
같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한 면으로
우리에게는 그분의 형상이 있고,
다른 한 면으로
그분의 신장이 있다.

신약의 용법에 따르면,
‘성숙’이라는 단어는
믿는 이들이 거듭났을 때 받은
하나님의 생명이
완전히 자라고 성숙하고 온전해진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라고 성숙하기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함으로써,
즉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를 극도로 누리기 위해
그리스도를
가장 충만하게 누리고 얻기를
추구함으로써,
성숙에 이르도록
계속 나아가고 전진해야 한다.

영적 생명이
성숙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신성한 생명이
계속 자라는 것이다.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한 것의
궁극적인 결과로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된다.
곧 성숙한 사람으로 자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된다.

우리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공급하며
그들이
주님을 받아들이도록
도울 때,
우리의 목표는
그들이 단지
불 못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유죄판결에서
구원받게 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체험하는 것만도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그들 안으로 공급함으로,
결국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드려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표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우리와 대화하는
모든 사람 안으로
그리스도가 주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분배하는 것이
우리의 복음 전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리려면
그리스도를
성도들의 몫으로
그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우리가 공급하는 그리스도는 분명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이시자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과 전부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완전한 방식으로 체험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사는 것을
체험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가
그리스도에 의해 살도록
도와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자라게 하고
그리스도를 산출한다면,
사람들을 접촉할 때
자연스럽게
그들 안으로
그리스도를 주입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과 인격으로 취할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더욱더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좋은 땅으로 누리고
그리스도께 수고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체험하고 사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주입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 안으로
그리스도의 풍성을 공급함으로써
그들이
자라고 성숙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가 직접
성도들의 몫이신
그리스도를
더 많이 체험해야 한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리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는
교회 건축을 위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공급해야 한다.
나는 여행할 때,
모든 이에게
매우 좋은 형제자매로 여겨지지만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풍성이 부족한 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해지고자 하는
열망을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는
그리스도의 풍성에 관해서는 가난하면서
겉보기에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
교회 건축을 위하여
저를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채워 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
곧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를 공급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지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과 교통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날마다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체험하는지를
간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그 영 안에 있다.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그 영께서
실제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매일 우리는
주님과 한 영이어야 하고
그분께서 우리와 하나이신 것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점점 더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서
우리가 주님과 한 영임을
체험해야 한다.
이것이
교리나 이론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의 실지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어야 한다.

나는
나의 사역을 두고
자주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제가 말할 때
당신과 한 영이 되도록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제가 말할 때
당신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께서 저와 한 영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을 공급할 때
당신과 한 영이 되기를
구합니다.”
이 사역의 영향력은 전부
주님과 이렇게 하나 되는 것에서
나온다.

바울의 사역의 목표는
한 새사람을 위해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
곧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골로새서 1장 28절에서
‘충분히 성장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또한
‘온전한’, ‘완전한’, 혹은 ‘성숙한’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바울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분배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함으로
온전하고 완전하게 되어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그리스도는
우리 안으로
더 들어오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더 들어오실수록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더 들어간다.
바로 이러한 순환에 의해
우리는
생명이 자란다.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과 교통하는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그들 안으로 공급함으로,
그들이
생명이 성숙하여
그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드려지게 하는 것이다.

휴거를 위해 준비되려면
우리는
생명 안에서의 성숙을
필요로 한다.

휴거는
생명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의
완결 단계로서
우리 몸의 변형,
우리 몸의 구속이다.

우리가 받아들인
신성한 생명의 요구와
주님을 향한
우리의 강렬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생활을 추구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주님의 임재 앞으로 휴거되기를
소망한다.

성숙하게 되는 것은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준비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 안에서 자라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는
휴거되도록
성숙되어 있을 것이다.

성숙의 표시에는
다음의 항목이 포함된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신성한 생명으로
가득 채워짐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림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음

이해하는 데 있어서
충분히 성장함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온전하게 됨

몸을 보고,
몸을 알며,
몸 안에서 몸을 위해 살고,
몸을 돌보며,
몸을 존중함

1일

계 14:4 … 그들은 …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로 드려지도록 사람들 가운데서 사 온 이들입니다.

약 5:7 그러므로 형제님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오래 참으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면서, 땅의 귀중한 열매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주님께서 오시려면 우리가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지연시킬 것이다.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빨리 성숙할수록 주님께서 수확하실 때가 더 앞당겨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먹음으로 성장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더 먹고 더 성장할수록 그분의 다시 오심은 더 앞당겨질 것이다. 단지 “주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라고 선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곡식이 익기 전에는 농부가 수확할 수 없는 것처럼, 많은 믿는 이들이 성숙하기 전까지는 주 예수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을 먹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께서 오시기를 오래 참으며 기다리는 동안, 참된 농부이신 주님(마 13:3)도 밭의 첫 열매와 곡식인 우리가 생명 안에서 성숙하기를 인내하시며 기다리고 계신다(계 14:4, 14-15). 우리가 생명 안에서 성숙해야 우리가 오래 참고 그분께서 인내하시는 기간이 단축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께 심판받을 것을 예비하기 위해 생명의 성숙을 추구해야 한다.

야고보서 5장 7절에서 야고보는 농부가 오래 참으면서 땅의 귀중한 열매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을 예시로 사용한다. 주 예수님은 사실상 참된 농부, 유일한 농부이시다. 우리가 그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참된 농부이신 그분은 우리가 성숙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주님, 속히 돌아오십시오.”라고 기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더 빨리 성숙하여라. 너희가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희가 성숙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 너희가 성숙해야만 내가 돌아가는 것이 앞당겨질 수 있다.”

주님께서 돌아오시는 것을 우리가 진지하게 기다린다면, 생명이 자라 성숙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인식을 갖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완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보고 있다. 즉, 우리의 영적 상태나 영적 성장과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어느 날 주님께서 갑자기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으며, 그분께서 오시는 것이 그들의 성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에 관하여 붙잡고 있는 관념 때문에 주님의 오심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 5장 7절에 언급된 농부의 예시는 농부가 밭에서 곡식이 익도록 자라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따르면, 주님도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밭에 있는 곡식이 익을 때 그분은 다시 오실 것이다. 이 곡식은 주님께서 그분 자신을 씨로 뿌리신 것의 결과이자 산물일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을 씨로 뿌리신 것은 주님께서 첫 번째 오셨을 때 성취되었고,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곡식이 익는 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재촉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려면, 우리는 오래 참고 인내하며 생명이 성장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오래 참고 고난을 인내하려면, 우리는 생명이 성장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이다. “오, 주 예수님, 더 빨리 돌아오십시오. 주님, 당신은 제가 생명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십니까? 저는 어제보다 오늘 더 빨리 자라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자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께 빨리 오시기를 구합니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다시 오심에 관해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 우리의 생명이 성장하는 것과 관계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생명의 성장이라는 조건을 충족한다면, 주님께서 더 빨리 돌아오실 조건도 충족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 성장해야 하고, 생명이 성장하려면 또한 오래 참고 인내하기를 훈련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합당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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