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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생명의 사역을 위하여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이 됨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우리는 생명나무를 먹는 사람들일 뿐 아니라 이 나무의 가지들이기도 하며, 결국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인 작은 생명나무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생산이 되려면,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서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다시 태어나고, 그런 다음 우리의 혼 안에서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점차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요구된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풍성이 우리 안으로 분배되고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는 것과 관련된 하나의 과정에 의해 그리스도의 재생산이 된다.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이 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 속에 형상을 이루시며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는 분으로 체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생산이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영의 넘치는 공급에 의해 그리스도를 살 것이다.

창세기 2장 9절에서 생명나무는 유일한 것이었지만, 생명나무가 우리 안에 심어지고 우리 안에 자라나 우리를 작은 생명나무가 되게 하고 있다.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으로서 우리는 생명의 사역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이자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영원한 생명을 체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생명을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공급할 수 있다.

생명을 공급하는 것은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우리가 넘치는 여분의 생명을 갖고 있을 때, 이렇게 비축된 것으로 다른 이들에게 공급할 수 있다.

교회 안의 봉사는 생명을 공급하는 봉사, 곧 다른 이들에게 신성한 생명을 공급하는 봉사이다.

우리는 이 중점에 인상을 받고 우리의 봉사가 그분의 생명의 출구가 될 수 있도록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공급해 주는 생명은 그 영 안에 있고, 그 영은 우리의 영과 연합되셨으며, 하나님의 생명은 연합된 영 안에 위치해 있고 이 영 안에 거하며 이 영 안에서 자란다.

우리가 성도들에게 생명을 공급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리의 영을 해방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성한 생명이 우리의 연합된 영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이 해방될 수 없다면, 신성한 생명은 해방될 길이 없다.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으로서 살고자 한다면, 생명을 공급할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얻기 원하시는 봉사는 일을 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고 생명을 공급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께 연결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우리 안에 있는 입지를 그리스도께 드려서 우리를 채우시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그분의 생명과 본성과 선호와 성향이 우리의 생명과 본성과 선호와 성향이 된다.

생명을 공급하는 것은 생명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봉사는 하나님께서 흘러나오셔서 다른 이들에게 신성한 생명을 공급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내용이고 하나님의 흘러나옴이다. 하나님의 내용은 하나님의 존재이고, 하나님의 흘러나옴은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생명이 우리의 영에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겉사람이 처리받고 파쇄되어야 한다.

우리의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는다면, 신성한 생명이 순수하게 흐를 수 없다.

신성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혼이 굴복되게 해야 하고, 우리의 영이 모든 일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이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생명을 해방하는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야 한다. 이것은 맞은 반석으로 예표되신, 맞으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우리가 맞은 반석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 신성한 생명이 생수처럼 우리에게서 흘러 나간다.

생수가 우리 안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간 생명, 곧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반드시 맞아야 한다.

우리가 맞으신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인간 생명이 맞음으로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이 생수로 흘러나왔듯이, 우리도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맞음으로 생명수의 흐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죽음 곧 음부의 문들이 교회를 공격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속한 것의 특징은 생명이고, 사탄에게 속한 것의 특징은 죽음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모두 생명이고, 사탄에게서 나온 것은 모두 죽음이다.

교회에 대해 사탄이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가 사탄의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죽음뿐만 아니라 교회의 다른 지체들 안에 있는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다.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으로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체험해야 하며, 영원한 생명이 흐를 수 있는 통로가 됨으로써 이 생명을 다른 이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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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마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건축할 것이니, 음부의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요 11:25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빌 1:25 나는 여러분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내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속 남아 있어야 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에덴동산 이후로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은 계속해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의 특징은 생명이고, 사탄에게 속한 모든 것의 특징은 죽음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 하나님도 계신다. 그리스도와 다른 모든 이들의 큰 차이점은 다른 모든 이들은 죽었지만 그분은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죽음은 그분을 만질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을 멸망시키신 하나님은 이제 같은 목적을 위해 교회를 사용하신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의 그릇으로서, 살아나신 그분의 아들의 생명을 나타내고 사람들을 이끌어 이 생명을 알게 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교회가 받는 공격이 어느 방향에서 올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우리는 공격이 ‘음부의 문들’, 다시 말해서 죽음의 문들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 대해 사탄이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가 죄짓는 것에 대항하는 것이나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대항하는 것이나 사탄의 어떤 직접적인 공격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탄의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5장 14절부터 17절까지에서 요한의 의도는 우리에게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죽음뿐만 아니라 교회의 다른 지체들 안에 있는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삼키며 다른 지체들 안에 있는 죽음도 삼킨다.

교회는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몸의 지체들이 된 이들과 같이 생활한다. 몸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체들이며, 함께 지체들이 된 다른 이들과 같이 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 자신의 필요를 돌볼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함께 지체들이 된 이들의 필요도 돌본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이기며, 또한 우리의 형제들 안에 있는 죽음을 이긴다. 특히 그것은 약하거나 문제 있는 지체들 안에 있는 죽음을 이긴다.

약함은 죽음과 관계되며, 문제는 죽음에서 생긴다. 교회생활 안에 문제가 있다면,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이들 가운데 죽음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죽음을 이기고 삼키는 영원한 생명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좀 더 강하고 함께 지체 된 이가 좀 더 약하다면, 우리는 더 약한 이에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공급해 줌으로써 그의 안에 있는 죽음을 삼키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요한일서 5장 14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우리가 이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서 흘러나와 다른 사람들 안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하는 생명의 통로가 될 수 있다. 16절은 이것을 말한다. 이 절에서 구하는 사람은 또한 죄를 짓는 형제에게 생명을 주는 사람이다. 이것은 구하는 사람이 기도 대상자에게 생명을 준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은 이렇게 구하는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과 하나 되며, 주님과의 한 영 안에서 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 주시는 영께서 기도 대상자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서 생명을 나눠 주는 문제이다.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은 참되고 실지적이다. 한 면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다른 면에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혹은 우리를 통하여 흘러나와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통로가 되는 체험은 깊은 것이다. 이것은 피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흘러 들어가게 하는 통로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 안에서 깊어야 하고, 주님의 마음 안에 있음으로써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정도까지 주님 안으로 들어갔다면, 우리 가까이에 있는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한 주님의 뜻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형제의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그를 위해 어떻게 기도할지를 알 것이다.

5일

출 17:6 이제 내가 거기 호렙에 있는 반석 위에서 네 앞에 서겠다. 너는 그 반석을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물이 나와 백성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요 19:34 군인들 중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 피와 물이 나왔다.

요 7:38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서 말한 대로 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사도들의 일은 죽음이 그들 안에서 활동하게 함으로써 믿는 이들 안에서 생명이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이렇게 죽음이 활동한 결과는 놀라운데, 바로 다른 이들 안에 생명이 있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생명이 다른 이들 안에서 운행하도록 죽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는 것이 일하는 것이다. 주님께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어떤 일을 성취해 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분께는 우리가 죽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죽는다면, 생명은 다른 이들 안에서 운행할 것이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은 곧 우리를 죽음에 넣는 것이다.

사도들은 위대한 사람을 따르는 이들이 아니었고, 나사렛의 예수님이라는 작은 사람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높아지기보다는 항상 죽음을 당함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이 그들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했다.

어쩌면 여러분은 내게, 어떻게 해야 몸에 생명을 공급하도록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많은 일을 하려고 결심하지 말고, 뒤로 물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하지도 말고,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는 길에서 단순히 십자가가 운행하도록 하라. 오직 말씀을 전하거나 일을 함으로써만 섬기는 사람들은 어느 날 활동이나 말하는 것이 금지되면, 자신에게 사역이 없어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의 사역의 분량은 여러분이 활동하는 정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합니다.” 이것은 몸의 불변하는 원칙이며, 이것에는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몸 안에 생명의 증가를 가져오도록 특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여러분을 이끄셔서 통과하게 하신 것은 자연히 생명의 증가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수를 흘려 보내려면, 우리는 또한 맞으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어야 한다. 맞은 반석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육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맞으셨다. 우리는 맞으신 이분과 동일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생수가 우리 안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간 생명, 곧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반드시 맞아야 함을 뜻한다. 우리가 맞으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동일시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인간 생명이 맞음으로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이 생수로 흘러나왔듯이, 우리도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맞음으로 생명수의 흐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맞을 때 우리에게서 신성한 생명이 흘러나올 것이다.

우리가 맞으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지 않고 말한다면, 우리의 말함만이 아니라 심지어 찬양과 기도도 천연적일 것이다. 우리는 실질적이고 실지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타고난 생명이 맞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맞았다. 만일 우리가 맞으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면, 생명수는 타고난 방식이 아닌 순수하고 혼합이 없는 방식으로 흐를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거나 찬양하거나 간증할 때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성한 생명의 순수한 흐름일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분과 동일시될 때, 우리의 타고난 인간 생명은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하나님의 생명, 곧 신성하고 영원한 생명일 것이다. 이 생명은 생명수이다. 우리가 맞으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면,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순수할 것이다. 신성한 생명과 타고난 생명이 혼합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말함으로써, 또한 맞으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됨으로써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주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강들을 얻게 될 것이다. 생수의 강들이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올 것이다.

4일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 가고 있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고후 4:12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순수하게 흐르려면, 우리는 반드시 파쇄되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라는 말은 파쇄되는 체험을 가리킨다. 파쇄된 이들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는 신성한 생명이 흘러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표현되시는 것이 생명이 우리에게서 흘러 나가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12절에 언급된, 죽음이 우리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곧 죽이는 것이다. 죽음이 활동하는 것은 우리가 파쇄되는 것이다. 우리가 파쇄될수록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에게서 더 흘러 나갈 것이다.

파쇄된 형제는 생명을 공급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교리적으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실행해야 한다. 생명의 영은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신다. 그러나 우리 사람의 영 외에도 우리에게는 혼과 몸이 있다. 우리의 혼과 몸은 우리의 영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이 우리의 영에서 해방되어 나오려면, 우리의 혼과 몸이 반드시 처리되고 파쇄되어야 한다. 몸은 문제를 많이 일으키지 않지만, 우리의 혼은 큰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구성된 혼의 일들은 다루기가 어렵다. 혼은 영을 에워싸고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영이 해방되려면 반드시 우리의 혼이 처리받고 파쇄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신성한 생명이 순수하게 흐를 수 없다.

우리가 혼이 처리되고 파쇄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으며,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여전히 기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처리되고, 정복되고, 우리의 영에 복종하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들은 파쇄된 것이다. 자신의 영을 해방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정복한다. 그의 혼의 세 부분은 그의 영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의 영의 지배를 받게 한다.

어떤 형제들은 어떤 일에 직면할 때, 그들의 영이 아닌 생각이 먼저 반응한다. 어떤 자매들은 그들의 영이 아닌 감정이 먼저 반응한다. 어떤 성도들은 그들의 영이 아닌 의지가 먼저 반응한다. 먼저 반응하는 부분이 우리의 존재를 지배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이 먼저 반응하게 할 때, 생각은 정복된다. 우리의 생각이 먼저 반응할 때, 우리의 영은 뒤로 밀린다. 우리의 영이 해방될 때, 우리의 생각은 처리되고 파쇄되며 우리의 영의 다스림 아래 복종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해방될 수 있다.

영을 해방하는 법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기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사용한다. 어떤 자매들은 슬픈 일을 들을 때, 그들의 감정은 굴레를 씌우지 않은 말처럼 제멋대로 날뛴다. 그들이 생명을 흘러 나가게 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그들의 거친 감정을 억누르고, 그들의 영을 사용하여 상황을 감지해야 한다. 강한 의지를 가진 형제는 자신이 결정한 것을 바꾸기가 어렵다. 그러한 형제는 자신의 강한 의지를 표현할 때 하나님을 대표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상황을 마주할 때, 우리에게서 생명이 흘러 나갈 것이다.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부터 해방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과 교통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우리의 혼이 굴복되게 해야 하며, 우리의 영이 모든 일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장로들이든 집사들이든, 심방이나 복음 전파에 관련된 이들이든,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을 사용하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정복하기를 배움으로써 우리의 영으로 일들을 접촉해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은 우리가 합당하게 행하는 데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을 사용하는 데 달려 있다.

3일

요 15:4-5 내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나도 여러분 안에 거하겠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여러분도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들입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떠나서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봉사가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는 우리의 봉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봉사에 있어서 충분하든 충분하지 않든, 우리의 초점은 어떤 것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고 생명을 공급하는 데 있다.

교회는 사회와 다르다. 교회 안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일을 잘했는가에 있지 않고 생명이 공급되었는가에 있다. 교회가 생명을 공급하지 않고 일만 주의한다면, 그 본성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사회가 될 것이다. 성도들은 이 중점을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나는 우리가 봉사를 대충 해도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봉사가 아무렇게나 되지 않도록, 반드시 주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며 봉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봉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생명 공급을 받는 그러한 방식으로 봉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봉사가 그분의 생명의 출구가 될 수 있도록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우리는 실수에서 구출받기를 원하지만, 그러한 구출의 초점은 성공적인 일을 하는 데 있지 않고 생명을 흘려 내보내는 데 있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공급해 주는 생명은 그 영 안에 있다. 이것은 그 영께서 하나님의 생명의 거처이심을 의미한다. 로마서 8장 2절에서 그 영은 ‘생명의 영’으로 언급된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영 안에 있으므로, 그 영은 생명의 영이시다. 게다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그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의 사상이나 조망이나 의견 안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 영 안에 있고,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 거한다. 신성한 생명은 두 영, 곧 우리 사람의 영과 연합되신 그 영 안에 있다. 처음에 신성한 생명은 그 영 안에만 있었지만, 이제 신성한 생명은 우리의 영 안에도 거한다. 성경 해설가들은 로마서 8장에 있는 영이 명확하게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람의 영을 말하는 것인지를 결정하기 어려워한다. 그것은 두 영이 함께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8장에서 그 영과 사람의 영은 한 영이 되었다.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은 둘 다 영이므로 본성에 있어서 비슷하다. 그 영은 우리 사람의 영과 연합되셨으며,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의 연합된 영 안에 위치해 있고 이 영 안에 거하며 이 영 안에서 자란다. 따라서 우리가 성도들에게 생명을 공급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리의 영을 해방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성한 생명이 우리의 연합된 영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이 해방될 수 없다면, 신성한 생명은 해방될 길이 없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그분이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들이라고 말씀하신다. 포도나무를 떠나서 가지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포도나무의 가지들은 열매를 맺기 위해 거기에 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생명을 공급하는 것, 즉 포도나무의 생명의 공급을 해방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과 관련된 우리의 기능이다. 오늘날 주님은 사람들이 그분의 재료가 되기를 원치 않으시며, 또 사람의 재능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오직 사람들이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으로 충만되며 그분의 생명의 공급을 해방하는 것을 필요로 하신다. 이것은 참으로 포도나무의 가지들이 포도나무의 진액으로 충만되어 포도나무의 생명의 공급을 해방하는 것과 같다. 포도나무의 가지들은 어떤 것을 하는 법은 알지 못하지만, 포도나무 안에 거하면서 포도나무의 생명을 공급받고 가지들인 그들을 통하여 포도나무의 생명을 흘려 내보낸다.

이것이 교회 봉사이다. 교회 봉사는 위대한 일이 아니고, 엄청난 성취를 이루는 큰 사업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급하고 흘려 내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결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우리 안에 있는 입지를 그리스도께 드려서 그분께서 우리를 채우실 것을 요구한다. 그럴 때 그분의 생명과 본성과 선호와 성향이 우리의 생명과 본성과 선호와 성향이 된다. 달리 말해서 그분의 모든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신언노트, 2022 07 31

요한일서 5장 16절은
다른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말하는
유일한 성경 말씀이다.
생명을 준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내가 그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한다는 뜻이다.
그는
생명이 부족하여
죄를 지었다.
우리에게
주 예수님이 부족할 때
우리는 죄를 짓게 된다.
오직 한 인격만
죄를 이길 수 있으며,
그분은
주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성질을 낼 때
그것은
우리에게
주 예수님이 부족하다는
표시이다.
우리에게는
책망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책망은
우리에게 있는
그리스도의 양을
감소시킬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이
더해지시는 것이지
감소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안으로 분배되시는
그분이
더 많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은
여러분에게
주 예수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는가?
왜 여러분은
아내나 남편을
함부로 대하는가?
왜 여러분은
결심한 대로
행할 수 없었는가?
여러분에게
주 예수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책망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아내를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때때로 그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사랑은
상태가 더 나빠지게 하고
손상을 입힐지도 모른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효능이 있으시다.
오직 생명만이
도움이 된다.
우리 남편들은
아내에게 반드시
생명을 공급해야 한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남편을 제압하려는
의도가 있을지 모른다.
남편들이 책망하기를 좋아하듯
아내들은 제압하기를 좋아한다.
여러분은
남편을 제압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가
여러분 위에 있도록
창조하셨다.
남편을 제압하고자 하는
노력을 그만두라.
남편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분이
그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한 몫을
공급해야만 한다.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그리스도가
더 많이 필요하다.
오직 그분만이
구원하신다.

기독교가
왜 그렇게 하락했는가?
그 한 가지 이유는
권고하는 사람은 많지만
생명을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손상된 상황을
무엇이 보수할 수 있는가?
오직 생명을 주는
보수하는 사역뿐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공급하기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지 말라.
그 어떤 방법도
생명을 공급하는 방법보다
낫지 않다.

여러분 자신이
주님께로 향해야 한다.
“주님,
제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의 형제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는
생명 공급이 필요합니다.
그는
생명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저도
그렇습니다.
주님,
저도
생명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먼저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더 많은 생명이
저에게 필요합니다.
저는
더 많은 생명을
가져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너무나 부담을 받아,
더 많은 생명을
간구하기 위해
금식하고
잠을 줄일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공급받으리라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여러분 자신에게
공급이 있을 때
다른 이들에게
공급할 수 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그것이
그 형제나 자매에게
생명이 부족하다는
강한 표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를 돕기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여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풍성한 공급을 얻을 때까지
기도하고 금식하며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이 공급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공급할 수 있다.
이것이
이 하락한 기독교의 시대에
교회생활 안에서
전진하는 방법이다.

요한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공급해야 하는
이 생명이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강조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분은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요일 5:20)
우리의 필요는
더 큰 몫의
주 예수님을
가지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공급할
여분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여분은
지식이나 교리의 여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분을 가리킨다.

우리의 봉사가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는
우리의 봉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봉사에 있어서
충분하든 충분하지 않든,
우리의 초점은
어떤 것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고
생명을 공급하는 데 있다.

우리는
우리의 봉사가
아무렇게나 되지 않도록,
반드시 주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며
봉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봉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생명 공급을 받는
그러한 방식으로
봉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봉사가
그분의 생명의 출구가
될 수 있도록
주님을 앙망해야 한다.
우리는
실수에서 구출받기를 원하지만,
그러한 구출의 초점은
성공적인 일을 하는 데 있지 않고
생명을 흘려 내보내는 데 있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공급해 주는
생명은
그 영 안에 있다.
이것은
그 영께서
하나님의 생명의 거처이심을
의미한다.
로마서 8장 2절에서
그 영은
‘생명의 영’으로
언급된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영 안에 있으므로,
그 영은
생명의 영이시다.
게다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그분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의
사상이나 조망이나 의견 안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 영 안에 있고,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 거한다.
신성한 생명은
두 영,
곧 우리 사람의 영과 연합되신
그 영 안에 있다.
처음에
신성한 생명은
그 영 안에만 있었지만,
이제 신성한 생명은
우리의 영 안에도 거한다.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은
둘 다 영이므로
본성에 있어서
비슷하다.
그 영은
우리 사람의 영과 연합되셨으며,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의 연합된 영 안에 위치해 있고
이 영 안에 거하며
이 영 안에서 자란다.
따라서 우리가
성도들에게
생명을 공급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리의 영을
해방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성한 생명이
우리의 연합된 영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이
해방될 수 없다면,
신성한 생명은
해방될 길이 없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그분이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들이라고
말씀하신다.
포도나무를 떠나서
가지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포도나무의 가지들은
열매를 맺기 위해
거기에 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생명을 공급하는 것,
즉 포도나무의 생명의
공급을 해방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과 관련된
우리의 기능이다.
오늘날 주님은
사람들이
그분의 재료가 되기를
원치 않으시며,
또 사람의 재능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오직 사람들이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으로 충만되며
그분의 생명의
공급을 해방하는 것을
필요로 하신다.
이것은 참으로 포도나무의 가지들이
포도나무의 진액으로 충만되어
포도나무의 생명의
공급을 해방하는 것과 같다.
포도나무의 가지들은
어떤 것을 하는 법은
알지 못하지만,
포도나무 안에 거하면서
포도나무의 생명을 공급받고
가지들인 그들을 통하여
포도나무의 생명을
흘려 내보낸다.

이것이
교회 봉사이다.
교회 봉사는
위대한 일이 아니고,
엄청난 성취를 이루는
큰 사업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급하고
흘려 내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결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우리 안에 있는 입지를
그리스도께 드려서
그분께서
우리를 채우실 것을
요구한다.
그럴 때
그분의
생명과 본성과 선호와 성향이
우리의
생명과 본성과 선호와 성향이 된다.
달리 말해서
그분의 모든 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순수하게 흐르려면,
우리는 반드시
파쇄되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라는 말은
파쇄되는 체험을
가리킨다.
파쇄된 이들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는
신성한 생명이
흘러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표현되시는 것이
생명이
우리에게서 흘러 나가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12절에 언급된,
죽음이 우리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곧 죽이는 것이다.
죽음이 활동하는 것은
우리가 파쇄되는 것이다.
우리가 파쇄될수록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에게서
더 흘러 나갈 것이다.

파쇄된 형제는
생명을 공급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교리적으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실행해야 한다.
생명의 영은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신다.
그러나 우리 사람의
영 외에도
우리에게는
혼과 몸이 있다.
우리의 혼과 몸은
우리의 영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이
우리의 영에서
해방되어 나오려면,
우리의 혼과 몸이 반드시
처리되고
파쇄되어야 한다.
몸은
문제를 많이 일으키지 않지만,
우리의 혼은
큰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구성된
혼의 일들은
다루기가 어렵다.
혼은
영을 에워싸고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영이
해방되려면 반드시
우리의 혼이
처리받고
파쇄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신성한 생명이
순수하게 흐를 수 없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여전히 기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처리되고,
정복되고,
우리의 영에
복종하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들은
파쇄된 것이다.
자신의 영을
해방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정복한다.
그의 혼의 세 부분은
그의 영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의 영의 지배를 받게 한다.

먼저 반응하는 부분이
우리의 존재를
지배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이 먼저
반응하게 할 때,
생각은 정복된다.
우리의 생각이 먼저
반응할 때,
우리의 영은
뒤로 밀린다.
우리의 영이 해방될 때,
우리의 생각은
처리되고 파쇄되며
우리의 영의 다스림 아래
복종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해방될 수 있다.

영을 해방하는 법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생명을
흘러 나가게 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그들의 거친 감정을 억누르고,
그들의 영을 사용하여
상황을 감지해야 한다.
강한 의지를 가진 형제는
자신이 결정한 것을
바꾸기가 어렵다.
그러한 형제는
자신의 강한 의지를 표현할 때
하나님을 대표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상황을 마주할 때,
우리에게서
생명이
흘러 나갈 것이다.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부터 해방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과 교통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우리의 혼이
굴복되게 해야 하며,
우리의 영이
모든 일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을
사용하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정복하기를
배움으로써
우리의 영으로
일들을 접촉해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은
우리가
합당하게 행하는 데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을 사용하는 데
달려 있다.

사도들의 일은
죽음이
그들 안에서
활동하게 함으로써
믿는 이들 안에서
생명이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이렇게
죽음이 활동한 결과는 놀라운데,
바로 다른 이들 안에
생명이 있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생명이
다른 이들 안에서 운행하도록
죽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는 것이
일하는 것이다.
주님께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어떤 일을
성취해 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분께는
우리가
죽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죽는다면,
생명은
다른 이들 안에서
운행할 것이다.
우리는
죽음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은
곧 우리를
죽음에 넣는 것이다.

사도들은
위대한 사람을 따르는
이들이 아니었고,
나사렛의 예수님이라는
작은 사람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높아지기보다는
항상 죽음을 당함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이
그들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했다.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는 길에서 단순히
십자가가
운행하도록 하라.

여러분의 사역의 분량은
여러분이 활동하는 정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합니다.”
이것은
몸의 불변하는 원칙이며,
이것에는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몸 안에
생명의 증가를 가져오도록
특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여러분을 이끄셔서
통과하게 하신 것은
자연히 생명의 증가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수를 흘려 보내려면,
우리는 또한
맞으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어야 한다.
맞은 반석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육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맞으셨다.
우리는
맞으신 이분과
동일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생수가
우리 안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간 생명,
곧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반드시
맞아야 함을
뜻한다.
우리가
맞으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동일시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인간 생명이
맞음으로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이
생수로 흘러나왔듯이,
우리도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맞음으로
생명수의 흐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맞을 때
우리에게서
신성한 생명이
흘러나올 것이다.

우리가
맞으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지 않고
말한다면,
우리의 말함만이 아니라
심지어 찬양과 기도도
천연적일 것이다.
우리는
실질적이고
실지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타고난 생명이
맞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우리의 타고난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맞았다.
만일 우리가
맞으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면,
생명수는
타고난 방식이 아닌
순수하고
혼합이 없는 방식으로
흐를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거나
찬양하거나
간증할 때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성한 생명의
순수한 흐름일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분과 동일시될 때,
우리의 타고난
인간 생명은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하나님의 생명,
곧 신성하고 영원한
생명일 것이다.
이 생명은
생명수이다.
우리가
맞으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면,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은
순수할 것이다.
신성한 생명과
타고난 생명이
혼합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말함으로써,
또한 맞으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됨으로써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주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강들을 얻게 될 것이다.
생수의 강들이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올 것이다.

에덴동산 이후로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은
계속해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의
특징은 생명이고,
사탄에게 속한 모든 것의
특징은 죽음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
하나님도 계신다.
그리스도와 다른 모든 이들의
큰 차이점은
다른 모든 이들은 죽었지만
그분은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죽음은
그분을 만질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을 멸망시키신
하나님은 이제
같은 목적을 위해
교회를 사용하신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생명의
그릇으로서,
살아나신 그분의 아들의
생명을 나타내고
사람들을 이끌어
이 생명을 알게 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교회가 받는 공격이
어느 방향에서 올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우리는
공격이
‘음부의 문들’,
다시 말해서 죽음의 문들에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 대해
사탄이
가장 크게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가
죄짓는 것에
대항하는 것이나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대항하는 것이나
사탄의 어떤 직접적인 공격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사탄의 죽음의 세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삼키며
다른 지체들 안에 있는
죽음도 삼킨다.

교회는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몸의 지체들이 된 이들과
같이 생활한다.
몸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체들이며,
함께 지체들이 된
다른 이들과 같이 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 자신의 필요를
돌볼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함께 지체들이 된
이들의 필요도
돌본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이기며,
또한 우리의 형제들 안에 있는
죽음을 이긴다.
특히 그것은
약하거나
문제 있는
지체들 안에 있는
죽음을 이긴다.

약함은
죽음과 관계되며,
문제는
죽음에서 생긴다.
교회생활 안에
문제가 있다면,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이들 가운데
죽음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죽음을
이기고
삼키는
영원한 생명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좀 더 강하고
함께 지체 된 이가
좀 더 약하다면,
우리는
더 약한 이에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공급해 줌으로써
그의 안에 있는
죽음을 삼키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요한일서 5장
14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우리가
이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서 흘러나와
다른 사람들 안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하는
생명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이렇게 구하는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과 하나 되며,
주님과의 한 영 안에서 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 주시는 영께서
기도 대상자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서
생명을 나눠 주는
문제이다.

우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은
참되고
실지적이다.
한 면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다른 면에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혹은 우리를 통하여
흘러나와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통로가 되는
체험은
깊은 것이다.
이것은
피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흘러 들어가게 하는
통로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 안에서
깊어야 하고,
주님의 마음 안에
있음으로써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정도까지
주님 안으로
들어갔다면,
우리 가까이에 있는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한
주님의 뜻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형제의 상황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알기 때문에
그를 위해
어떻게 기도할지를
알 것이다.

2일

요일 5:11-12 그 증언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며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요일 5:16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짓는 것을 보거든 그분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가 그 형제…에게 생명을 줄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6절은 다른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말하는 유일한 성경 말씀이다. 생명을 준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내가 그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한다는 뜻이다. 그는 생명이 부족하여 죄를 지었다. 우리에게 주 예수님이 부족할 때 우리는 죄를 짓게 된다. 오직 한 인격만 죄를 이길 수 있으며, 그분은 주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성질을 낼 때 그것은 우리에게 주 예수님이 부족하다는 표시이다. 우리에게는 책망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책망은 우리에게 있는 그리스도의 양을 감소시킬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이 더해지시는 것이지 감소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안으로 분배되시는 그분이 더 많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은 여러분에게 주 예수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는가? 왜 여러분은 아내나 남편을 함부로 대하는가? 왜 여러분은 결심한 대로 행할 수 없었는가? 여러분에게 주 예수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책망하지 말라. 그렇게 하면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아내를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때때로 그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사랑은 상태가 더 나빠지게 하고 손상을 입힐지도 모른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효능이 있으시다. 오직 생명만이 도움이 된다. 우리 남편들은 아내에게 반드시 생명을 공급해야 한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남편을 제압하려는 의도가 있을지 모른다. 남편들이 책망하기를 좋아하듯 아내들은 제압하기를 좋아한다. 여러분은 남편을 제압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가 여러분 위에 있도록 창조하셨다. 남편을 제압하고자 하는 노력을 그만두라. 남편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분이 그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한 몫을 공급해야만 한다.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그리스도가 더 많이 필요하다. 오직 그분만이 구원하신다.

기독교가 왜 그렇게 하락했는가? 그 한 가지 이유는 권고하는 사람은 많지만 생명을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손상된 상황을 무엇이 보수할 수 있는가? 오직 생명을 주는 보수하는 사역뿐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공급하기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지 말라. 그 어떤 방법도 생명을 공급하는 방법보다 낫지 않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생명이 부족한데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지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여러분에게는 정말로 생명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서 권면하거나 책망하지 말라. 상대방에게 가지도 말라. 여러분 자신이 주님께로 향해야 한다. “주님, 제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의 형제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는 생명 공급이 필요합니다. 그는 생명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저도 그렇습니다. 주님, 저도 생명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먼저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더 많은 생명이 저에게 필요합니다. 저는 더 많은 생명을 가져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너무나 부담을 받아, 더 많은 생명을 간구하기 위해 금식하고 잠을 줄일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공급받으리라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여러분 자신에게 공급이 있을 때 다른 이들에게 공급할 수 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그것이 그 형제나 자매에게 생명이 부족하다는 강한 표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를 돕기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여분의 생명을 갖고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풍성한 공급을 얻을 때까지 기도하고 금식하며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이 공급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공급할 수 있다. 이것이 이 하락한 기독교의 시대에 교회생활 안에서 전진하는 방법이다.

요한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공급해야 하는 이 생명이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강조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분은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요일 5:20) 우리의 필요는 더 큰 몫의 주 예수님을 갖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공급할 여분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여분은 지식이나 교리의 여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분을 가리킨다.

1일

벧전 2:21 여러분은 이것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또한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여러분이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주셨습니다.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갈 4:19 나의 자녀인 여러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나는 다시 여러분을 위하여 해산하는 진통을 겪습니다.

나무를 자라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주된 방법이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씨를 뿌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복숭아씨를 뿌린다면 복숭아나무가 자라날 것이다. 두 번째는 복숭아나무 묘목을 땅에 심는 것이다. 이 묘목은 자라서 복숭아나무가 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축소판인 한 나무를 자라게 하시려고 우리의 영 안에 그분 자신을 생명의 씨로 뿌리셨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창세기 2장 9절에서 생명나무는 유일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생명나무는 우리 모두 안에서 자라나 우리 각 사람을 작은 생명나무가 되게 한다. 작은 생명나무들인 우리는 자랄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분 자신을 생명의 씨로 뿌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인 우리 모두는 거듭나게 되었다. 그날부터 생명나무의 싹이 나오게 되었다.

우리는 씨 뿌리는 이와 심는 이가 되어 공허한 많은 죄인들 안으로 그리스도를 뿌리고 심을 필요가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가 없는 많은 죄인들이 있다. 만일 아직도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가 아니거나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실지로는 아닌 몇몇 친한 친구들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러한 친구들은 그들 속에 공허한 느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 땅에서의 그들의 삶이 공허하며 허무 중의 허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만일 그들이 “주 예수님, 저는 더 이상 공허한 채로 있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을 취하기 원합니다. 당신을 받아들이기 원합니다.”라고 기도한다면, 즉시 그들은 씨나 묘목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하게 될 것이다. 때로 그들은 작은 씨이실 뿐 아니라 그들의 존재 안으로 심긴 커다란 묘목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됨을 느낄 것이다. 그들은 행복할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더 이상 공허하지 않고 이제 자신 안에 무언가, 즉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서 언급된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직역하면, 학생들이 글씨를 배울 때 밑에 놓고 글자를 따라 쓰는 습자첩(習字帖)이다. ‘본’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글씨 쓰기를 가르칠 때 사용하는 그러한 원본을 가리킨다.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삶을 습자첩으로 우리 앞에 두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분의 삶을 본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안다. 우리는 그분을 모방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방이 아니라 재생산이 되는 것이다. 외적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이시다. 내적으로 그분은 우리의 인격으로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 속에 그분의 형상을 이루어 가시며,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원본의 재생산, 곧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이 된다.

그분은 많은 복사본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원본인 습자첩이시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풍성과 관련된 어떤 과정을 체험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재생산과 그리스도의 복사본이 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이 완성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생산이 될 것이다. 어떤 믿는 이가 안에서부터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을 본다면, 이것은 그런 믿는 이가 본이신 그리스도의 재생산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 방식은 그리스도가 재생산된 것이다.

믿는 이들의 본이신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을 재생산하시는 데 사용되는 원본이시다.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면 우리에게 체험이 필요하다. 체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를 누릴 때,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복사본이 되게 하는 영적 재생산의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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