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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생명수이신 그 영을 마시기 위해 반석을 향해 말하고 생명수이신 그 영께서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흐르시도록 우물을 팜

Speaking to the Rock
to Drink of the Spirit
as the Water of Life
and Digging the Well
to Allow the Spirit
as the Water of Life
to Flow Freely
within Us
그 바위에게 말하여
생명의 그 물이신
그 영께로부터 마심과
또 그 우물을 파서
생명의 그 물이신
그 영께서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흐르시도록
허락해 드림

반석을 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하며 온전한
그림이다
― 출 17:6.

이 예표에서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지팡이는
율법의 힘과 권위를 나타낸다.

따라서 반석을 친 것이
모세의 지팡이였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이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 갈 2:19-20상, 3:13.

살아 있는 영적인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에 의해
매 맞으심으로써,
부활 안에서
생명수가
그분에게서 흘러나와,
그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이 마시도록
그들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 출 17:6, 고전 10:4.

그리스도는
우리를 낳는 반석이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힘과
피난처와 숨을 곳과
보호와 덮개와
안전이 되는
반석이시다
― 신 32:18, 삼하 22:47,
시 95:1, 62:7, 94:22, 사 32:2.

피와 물은
십자가에서
창에 찔린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왔다.
피는
우리의 법리적인 구속을 위한 것으로서
죄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고,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는
우리의 유기적인 구원을 위한 것으로서
죄의 권능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 창 2:21-22, 요 19:34, 슥 13:1,
시 36:8-9, 계 21:6, 찬송가 731장 1절.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은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이다.

부활은
이전에
죽음에 넣어졌지만
지금은
다시 살아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부활은 또한
죽음을 통과한
무언가로부터 솟아나는
생명을 의미한다.

매 맞은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은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라는
주요 단계들이
성취된 후에야
비로소 솟아났다.
따라서 출애굽기 17장 6절은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암시하는
심오한 절이다.

우리가
마시고
흘려 보낼 수 있는
생수이신 그 영은,
주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후에야,
즉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 들어가신 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요 7:37-39, 눅 24:26.

사실상
생명수, 곧 흐르는 물이
부활이다.
부활은
삼일 하나님,
곧 근원이신 아버지와
과정이신 아들과
흐름이신 그 영이다
― 요 5:26, 11:25.

생명수의 근원은
하나님과
어린양, 곧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보좌이다.
그러므로 생명수는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하여
흘러나오시는
삼일 하나님이다
― 계 22:1.

생명수의 흐름은
영원부터
보좌에서 시작되어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
계속되었고
(요 4:10, 14, 19:34),
지금은
부활 안에서
계속 흐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신성한 생명의
모든 풍성을
공급하고 있다
(계 22:1-2).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의 흐름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고전 12:13)과
그리스도의 신부의 준비(계 19:7)를
위한 것이며,
둘 다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결될 것이다
(계 21:9-10, 엡 5:23, 28-30).

요한복음 4장 14절 하반절은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는 원천으로서,
아들은 샘으로서,
그 영은 흐르는 강으로서
영원한 생명의 총체인
새 예루살렘을
산출하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삼일 하나님 전체가
매 맞은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와
하나님의 백성이
마실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연관되셨다.
하나님(아버지)은
반석 위에 서 계셨고,
반석은
그리스도(아들)였으며,
반석에서 나온
생수는
삼일 하나님의
궁극적인 흘러나옴이신,
마실 수 있도록
흘러나오시는
그 영을 상징한다
― 출17:6, 고전 10:4, 요 7:37-39.

우리는
부활 안에서
한 영을 마실 때
몸의 지체들이 되고,
몸으로 건축되며,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된다
― 고전 12:13, 계 22:17.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서
생수를 받기 위해
우리는 다만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향해
말하면’ 된다
― 민 20:8.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영께서도 이미
주어지셨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가 없다.
즉 생수가 흐르도록
다시 반석을 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는
오직 한 번만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한다
― 히 7:27, 9:26-28상.

지팡이를 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분과 동일시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매 맞으신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을 동일시할 때,
즉 우리가
매 맞은 그리스도이신
그분과 하나 될 때,
신성한 생명이
생수처럼
우리에게서
흘러 나간다
― 출 17:6, 요 7:38,
아 2:8-9, 14, 빌 3:10.

반석을 향해 말하는 것은
매 맞은 반석이신
그리스도께
직접 말하는 것이며,
그 영께서 이미 주어지신
사실에 근거하여
생명의 영을 주시도록
그분께 요청하는 것이다
― 요 4:10, 찬송가 202장.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고,
우리에게
그 영을 주시도록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께 요청할 때,
우리는
생명의 넘치는 공급이신
살아 계신 영을
받을 것이다 ― 빌 1:19.

모세는 다만
반석을 향해
물을 내라고
말해야 했다
(민 20:8).
우리가
오늘날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다툼을 처리한다면,
교회생활은
영광스러울 것이다.

민수기 20장 8절에 나오는
반석은
생수이신
생명의 영께서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시도록
하나님에 의해
매 맞으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반면,
21장 16절부터 18절까지에 나오는
우물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 요 4:11-12, 14.

우물을 파는 것(민 21:18)은
우리 마음,
즉 우리의
양심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 있는
장애물인
‘흙’을 파내어
생수이신
그 영께서
우리 안에서
솟아올라
자유롭게 흐르시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서
생수가
자유롭게 흐르도록
우리는
주님께 가서
‘파내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 속에는
파내야 할
많은 ‘흙’이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유죄 판결하시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많은 것들을
파내야 한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주님 자신만을 추구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 마 5:8.

한 면에서
많은 사람들은
주님과
그분의 길을
추구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그들은
주님 자신 이외의 것들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복잡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할지 모른다.
우리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목표와 목적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우리의
가족, 직장,
학위, 장래에 대한 염려 등
얼마나 많은 목표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영께서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흐르시는 것을
체험하려면,
우리의 양심이 반드시
처리받고
순수하게 되어야 한다
― 히9:14, 10:22, 딤전 1:5, 19,
벧전 3:16, 21, 요일 1:7.

우리가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거절하고
행하지 않을 때,
이것은
우리의 양심에서
죄목이 된다.
이러한 죄목들이
우리가 파내야 하는
흙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께 거듭 나아가
그분의 임재 안에서
파내져야 한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반드시
모든 흙을
파내야 한다.

거리낌이 없는 양심은
어떤 거리낌이나 비난이
조금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
― 행 24:16.

우리는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흙을 파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 롬 12:2, 엡 4:23, 롬 8:6, 고후 10:4-5.

거듭난 많은 사람들이
유행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
그들은
현시대에 따라
옷을 입는다.

거듭난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돈을 사용한다.
그들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께
그들 안에서 일하실 수 있는
더 많은 입지를 드린 후에야,
그들은
돈을 쓰는 방식에서
변화될 것이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학업과 학위에 대해
세상의 다른 젊은이들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생각이
새로워지고 있다면,
그들은
학업을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학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주님의 관점을
가질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매일 하는
많은 상상들로 인해
눈멀게 되었다.
수북이 쌓인 흙은 단지
많은 생각과 상상과 꿈이다.
생수가
자유롭게 흐를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것들을
반드시 파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 안에 있는
흙을 파내야 한다.
주님께
절대적이고도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환경 안에서
주권적으로 안배하신 것에
복종하지 않는다
― 빌4:11-13.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주님께 매우 복종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환경들 안에 두실 때
우리는 드러난다.

주님의 주권으로
겪게 되는
많은 체험들과 환경들은 다만
우리를
빛 가운데서 드러내어
우리의 의지가
얼마나 완고한지를
알게 한다.

의지는
완전히 복종적이어야 한다.
단지 복종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하는 모든 결정이
그리스도의 표현이 될 것이다
― 눅 22:42, 약 4:7, 빌 2:13.

의지로부터
흙을 파낸 후에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처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감정적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점유된다.
즉 우리는
우리 감정의
속박과 통제 아래에
있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통제 아래서
우리의 사랑을
조절해야 하고,
주님의 기쁨에 따라
우리의 감정을 사용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 마 10:37-39, 빌 1:8.

우리는 모두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따라
우리의 감정을 처리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미워하고 사랑하든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든지,
주님의 허락하에
그분의 즐거움에 따라
그렇게 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의 감정이
주님의 다스림 아래서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따라
지켜진다면,
우리의 감정은
영으로 적셔지고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직업과
‘우리의’ 장래와
‘우리의’ 환경에 대해
잊어버려야 하며,
오직 주님의 임재만을 추구하고
주님께
우리를
그분의 빛 안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빛을 따라
우리의
마음과 양심과
생각과 의지와
감정 안에 있는
흙을 파낼 수 있다
― 사 2:5, 눅 11:34-36, 요일 1:5, 7, 9.

이렇게 파내는 것은 오직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는
개인적인 시간에
기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며,
그분의 내적 인도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더 많이 흙을 파낼수록,
생수가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흐르면서
우리를
더욱더 살아 있게 하고
강화되게 하며
승리하게 할 것이고,
이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생명이
더욱더 자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찬송가 201장을 부르며
이 찬송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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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생명수이신 그 영을 마시기 위해 반석을 향해 말하고 생명수이신 그 영께서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흐르시도록 우물을 팜”

신언노트, 2019 09 01

그 바위에게 말하여
생명의 그 물이신
그 영께로부터 마심과
또 그 우물을 파서
생명의 그 물이신
그 영께서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흐르시도록
허락해 드림

반석을 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하며 온전한
 그림이다
― 출 17:6.

이 예표에서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지팡이는
 율법의 힘과 권위를 나타낸다.

따라서 반석을 친 것이
 모세의 지팡이였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이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였다는 것을
 상징한다
― 갈 2:19-20상, 3:13.

살아 있는 영적인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에 의해
 매 맞으심으로써,
부활 안에서
 생명수가
 그분에게서 흘러나와,
그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이 마시도록
 그들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 출 17:6, 고전 10:4.

그리스도는
 우리를 낳는 반석이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힘과
 피난처와 숨을 곳과
 보호와 덮개와
 안전이 되는
 반석이시다
― 신 32:18, 삼하 22:47,
시 95:1, 62:7, 94:22, 사 32:2.

피와 물은
 십자가에서
 창에 찔린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왔다.
피는
 우리의 법리적인 구속을 위한 것으로서
 죄의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고,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는
 우리의 유기적인 구원을 위한 것으로서
 죄의 권능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 창 2:21-22, 요 19:34, 슥 13:1,
시 36:8-9, 계 21:6, 찬송가 731장 1절.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은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이다.

부활은
 이전에
 죽음에 넣어졌지만
 지금은
 다시 살아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부활은 또한
 죽음을 통과한
 무언가로부터 솟아나는
 생명을 의미한다.

매 맞은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은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라는
 주요 단계들이
 성취된 후에야
 비로소 솟아났다.
따라서 출애굽기 17장 6절은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암시하는
 심오한 절이다.

우리가
 마시고
 흘려 보낼 수 있는
 생수이신 그 영은,
주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후에야,
즉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 들어가신 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요 7:37-39, 눅 24:26.

사실상
 생명수, 곧 흐르는 물이
 부활이다.
부활은
 삼일 하나님,
곧 근원이신 아버지와
 과정이신 아들과
 흐름이신 그 영이다
― 요 5:26, 11:25.

생명수의 근원은
 하나님과
 어린양, 곧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보좌이다.
그러므로 생명수는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하여
 흘러나오시는
 삼일 하나님이다
― 계 22:1.

생명수의 흐름은
 영원부터
 보좌에서 시작되어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
 계속되었고
(요 4:10, 14, 19:34),
지금은
 부활 안에서
 계속 흐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신성한 생명의
 모든 풍성을
 공급하고 있다
(계 22:1-2).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의 흐름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고전 12:13)과
 그리스도의 신부의 준비(계 19:7)를
 위한 것이며,
둘 다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결될 것이다
(계 21:9-10, 엡 5:23, 28-30).

요한복음 4장 14절 하반절은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는 원천으로서,
아들은 샘으로서,
그 영은 흐르는 강으로서
 영원한 생명의 총체인
 새 예루살렘을
 산출하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삼일 하나님 전체가
 매 맞은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와
 하나님의 백성이
 마실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연관되셨다.
하나님(아버지)은
 반석 위에 서 계셨고,
반석은
 그리스도(아들)였으며,
반석에서 나온
 생수는
 삼일 하나님의
 궁극적인 흘러나옴이신,
마실 수 있도록
 흘러나오시는
 그 영을 상징한다
― 출17:6, 고전 10:4, 요 7:37-39.

우리는
 부활 안에서
 한 영을 마실 때
 몸의 지체들이 되고,
몸으로 건축되며,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된다
― 고전 12:13, 계 22:17.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서
 생수를 받기 위해
 우리는 다만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향해
 말하면’ 된다
― 민 20:8.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그 영께서도 이미
 주어지셨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가 없다.
즉 생수가 흐르도록
 다시 반석을 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는
 오직 한 번만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한다
― 히 7:27, 9:26-28상.

지팡이를 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분과 동일시되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매 맞으신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을 동일시할 때,
즉 우리가
 매 맞은 그리스도이신
 그분과 하나 될 때,
신성한 생명이
 생수처럼
 우리에게서
 흘러 나간다
― 출 17:6, 요 7:38,
아 2:8-9, 14, 빌 3:10.

반석을 향해 말하는 것은
 매 맞은 반석이신
 그리스도께
 직접 말하는 것이며,
그 영께서 이미 주어지신
 사실에 근거하여
 생명의 영을 주시도록
 그분께 요청하는 것이다
― 요 4:10, 찬송가 202장.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고,
우리에게
 그 영을 주시도록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께 요청할 때,
우리는
 생명의 넘치는 공급이신
 살아 계신 영을
 받을 것이다 ― 빌 1:19.

모세는 다만
 반석을 향해
 물을 내라고
 말해야 했다
(민 20:8).
우리가
 오늘날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다툼을 처리한다면,
교회생활은
 영광스러울 것이다.

민수기 20장 8절에 나오는
 반석은
 생수이신
 생명의 영께서
 우리 안으로
 흘러 들어오시도록
 하나님에 의해
 매 맞으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반면,
21장 16절부터 18절까지에 나오는
 우물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 요 4:11-12, 14.

우물을 파는 것(민 21:18)은
 우리 마음,
즉 우리의
 양심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에 있는
 장애물인
‘흙’을 파내어
 생수이신
 그 영께서
 우리 안에서
 솟아올라
 자유롭게 흐르시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서
 생수가
 자유롭게 흐르도록
 우리는
 주님께 가서
‘파내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 속에는
 파내야 할
 많은 ‘흙’이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유죄 판결하시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많은 것들을
 파내야 한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주님 자신만을 추구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 마 5:8.

한 면에서
 많은 사람들은
 주님과
 그분의 길을
 추구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그들은
 주님 자신 이외의 것들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복잡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할지 모른다.
우리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목표와 목적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우리의
 가족, 직장,
학위, 장래에 대한 염려 등
 얼마나 많은 목표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영께서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흐르시는 것을
 체험하려면,
우리의 양심이 반드시
 처리받고
 순수하게 되어야 한다
― 히9:14, 10:22, 딤전 1:5, 19,
벧전 3:16, 21, 요일 1:7.

우리가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거절하고
 행하지 않을 때,
이것은
 우리의 양심에서
 죄목이 된다.
이러한 죄목들이
 우리가 파내야 하는
 흙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께 거듭 나아가
 그분의 임재 안에서
 파내져야 한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반드시
 모든 흙을
 파내야 한다.

거리낌이 없는 양심은
 어떤 거리낌이나 비난이
 조금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
― 행 24:16.

우리는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흙을 파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 롬 12:2, 엡 4:23, 롬 8:6, 고후 10:4-5.

거듭난 많은 사람들이
 유행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
그들은
 현시대에 따라
 옷을 입는다.

거듭난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돈을 사용한다.
그들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께
 그들 안에서 일하실 수 있는
 더 많은 입지를 드린 후에야,
그들은
 돈을 쓰는 방식에서
 변화될 것이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학업과 학위에 대해
 세상의 다른 젊은이들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생각이
 새로워지고 있다면,
그들은
 학업을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학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주님의 관점을
 가질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매일 하는
 많은 상상들로 인해
 눈멀게 되었다.
수북이 쌓인 흙은 단지
 많은 생각과 상상과 꿈이다.
생수가
 자유롭게 흐를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것들을
 반드시 파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 안에 있는
 흙을 파내야 한다.
주님께
 절대적이고도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환경 안에서
 주권적으로 안배하신 것에
 복종하지 않는다
― 빌4:11-13.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주님께 매우 복종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환경들 안에 두실 때
 우리는 드러난다.

주님의 주권으로
 겪게 되는
 많은 체험들과 환경들은 다만
 우리를
 빛 가운데서 드러내어
 우리의 의지가
 얼마나 완고한지를
 알게 한다.

의지는
 완전히 복종적이어야 한다.
단지 복종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하는 모든 결정이
 그리스도의 표현이 될 것이다
― 눅 22:42, 약 4:7, 빌 2:13.

의지로부터
 흙을 파낸 후에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처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감정적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점유된다.
즉 우리는
 우리 감정의
 속박과 통제 아래에
 있게 된다.

우리는
 주님의 통제 아래서
 우리의 사랑을
 조절해야 하고,
주님의 기쁨에 따라
 우리의 감정을 사용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 마 10:37-39, 빌 1:8.

우리는 모두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따라
 우리의 감정을 처리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미워하고 사랑하든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든지,
주님의 허락하에
 그분의 즐거움에 따라
 그렇게 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의 감정이
 주님의 다스림 아래서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따라
 지켜진다면,
우리의 감정은
 영으로 적셔지고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직업과
‘우리의’ 장래와
‘우리의’ 환경에 대해
 잊어버려야 하며,
오직 주님의 임재만을 추구하고
 주님께
 우리를
 그분의 빛 안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빛을 따라
 우리의
 마음과 양심과
 생각과 의지와
 감정 안에 있는
 흙을 파낼 수 있다
― 사 2:5, 눅 11:34-36, 요일 1:5, 7, 9.

이렇게 파내는 것은 오직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는
 개인적인 시간에
 기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며,
그분의 내적 인도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더 많이 흙을 파낼수록,
생수가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흐르면서
 우리를
 더욱더 살아 있게 하고
 강화되게 하며
 승리하게 할 것이고,
이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생명이
 더욱더 자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찬송가 201장을 부르며
 이 찬송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다.

 

6일

요일 1:7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안에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안에서 행하면,
우리는 서로
교통을 갖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온갖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요일 1:9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파내야 할
많은 층들이 있다.
우리에게는
양심의 층과
마음의 층과
생각의 층이 있다.
이 생각의 층에는
많은 흙이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상상을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밤에 자면서
꿈을 꿀 뿐 아니라
깨어 있는 낮에도 여전히
꿈을 꾼다.
우리의 모든 상상들은
다양한 꿈들이다.
… 사탄은 단지
상상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을
눈멀게 한다.
… 때때로 여러분이
한 메시지를
듣고 있는 동안에,
나는
여러분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 여러분의 생각은
달나라로 여행 갔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속으로는
우주 공간에 있는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다.
메시지가 전해지는 동안에
여러분은
목소리를 듣고 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여러분의 생각이
상상들로 인해
눈이 먼 것이다.

우리의 생각 안에
많은 흙이 있는데
어떻게 우리 안에 있는
생수의 흐름이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 우리의 생각에 있는
흙더미는 단지
많은 생각과 상상과 꿈들이다.
생수가
자유롭게 흐를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것들을
반드시 파내야 한다.

의지 역시
많은 흙을 담고 있다.
주님께
절대적이고도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우리의 의지는
더 복종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주권 아래
이루어진 안배에
복종하지 않은 적이
얼마나 많은지!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매우 복종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환경 안에 두실 때
우리는 드러난다.
보이지 않는 주님께
복종하기는 쉽지만,
보이는 사람들에게
복종하기는 어렵다.
여러분은
“저는
주님께 복종합니다.
주님께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
라고 말한다.
그렇다.
여기에
큰 ‘그러나’가 있다.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교회 안의 성도들에게는
복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주님은
여러분의 의지를
파쇄하시기 위하여
여러분을 특별히
여러분이 있는 지방의
교회 안에 넣으셨다.

‘만일 내 남편이
저러한 사랑스러운 형제가
될 수만 있다면,
난 기쁘게
남편에게 복종할 텐데.’
얼마나 자주
자매들이
이렇게 생각하는지!
… 주님은
여러분에게 꼭 맞는
남편을 주셨다.
그 사람이야말로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남편인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꿈꾸던
남편을
얻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폭로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주권으로
겪게 되는
많은 체험들과 환경들은 다만
우리를
빛 가운데 드러내어,
우리의 의지가
얼마나 완고한지를
알게 한다.
… 생수가
우리 안에 흐르도록 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파내어져야 한다.
생수가 흐르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며,
파내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는
자신을 파내야 한다.

의지로부터
흙을 파낸 후에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처리할
필요가 있다.
… 우리가
감정적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점유된다.
즉 우리는
우리의
감정의 속박과 통제 아래에
있게 된다.
… 우리는 아주 쉽게
이것을 좋아하고
저것을 싫어한다.
… 우리의 의지를 바꾸기는
그다지 쉽지 않지만
감정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의 감정은
날씨보다 훨씬 더 변덕스럽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직업과
‘우리의’ 장래와
‘우리의’ 환경에 대해
잊어버려야 하며,
오직 주님의 임재만을
추구하고
주님께
우리를
그분의 빛 안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양심과 마음과
생각과 의지와
감정 속의
흙을 파내기 위해
주님의 빛을 따르라.
우리가
흙을 파내면 파낼수록
우리는
더욱더 살아날 것이다.
… 우리는
생수의 흐름,
즉 우리 속에서
자유롭게 흐르는
생명의 교통을
유지해야 한다.
생수가
우리 속에
자유롭게 흐를 때
승리가 온다.
그러한 흐름에 의해서
모든 문제는
저절로,
심지어는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해결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며,
그분의 내적 인도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인도에 따라
자백하며
우리 속에 있는
모든 흙을
파내야 한다.
… 때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할
필요가 있지만,
파내는 기도는
은밀히 할 때
훨씬 더 효과가 있다.
주님과
더욱더 은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 필요하다.
우리는
양심과 마음과
생각과 의지와
감정 속에 있는
모든 흙을
기도로 파내야 한다.

 

5일

행 24:16
이 때문에
나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하여
항상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마 5:8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
바로 이 순간에도
아직 우리가
주님께 자백하지 않은
죄목(罪目)에 대한
어떤 비난들이
우리의 양심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비난들이 바로
파내야 할 흙이다.
우리가
속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양심 안에
비난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양심 안에
어떤 비난들이 있는가?
여러분은 반드시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오직 여러분만 알고 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여러분 안에 있음을
알고 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옳지 않을 때
비난은 계속된다.
여러분이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으려고 할 때,
이것은
여러분의 양심에
비난거리가 된다.
그럴 때 여러분은
왜 자신이
매여 있고
자유가 없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주님의 요구가 있지만
여러분이
그것에 응하려고
하지 않아서,
그것이 즉시
여러분의 양심에
비난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양심은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거리낌이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그 영께서
우리 안에 자유롭게 흐르시는 것을
체험하려면,
우리의 양심이 반드시
먼저 처리받고
순수하게 되어야 한다.
그 흙은
우리가
매일 몇 차례씩
주님께 나아감으로써만
파낼 수 있다.
나는
우리가
이 한 주 동안 거듭거듭
주님께 나아가기를
제안한다.
심지어 거리를 걷고 있는 동안에도
몇 번이고
주님께 나아가라.
우리는
영 안에 계신
주님께 나아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우리의 양심을
파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모든 흙을
파내야 한다.

양심의 비난들을
처리한 이후에,
우리는
주님께서
유죄 판결하시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많은 것들을
파내야 한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주님 자신만을 추구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 면에서
많은 사람들은
주님과
그분의 길을 추구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그들은
주님 자신 이외의
너무나 많은 것들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
그럴 때
그들의 마음은
복잡하고
자유롭지 못하며
순수하지도 못하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파내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여러분은
“어떤 것들을 파낼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물어볼지 모른다.
아마 그 첫째 가는 것들 중의 하나는
우리의 장래와
주님의 인도에 대한
염려일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일로 인해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
장래는
우리의 손에 있지 않고
주님의 손에 있다.
사실상 우리에게는
어떤 장래도
있어서는 안 된다.
주님 자신만이
우리의 유일한 장래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끈끈한지’
잘 모른다.
수년 전에
파리를 잡는 데
‘끈끈이 종이’가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매우 끈끈했다.
무엇이든지
닿기만 하면
달라붙었다.
우리의 마음은
이 끈끈이 종이처럼
매우 끈끈하다.
무엇이든지
마음에 닿기만 하면
착 달라붙는다.
이런 것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주님만 위해 살고 있고
우리의 가정과 직장을 포기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인도를 구하고 있지만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잊어버려야 한다.
양심에서
흙을 파내기는 쉽지만
마음에서
흙을 파내기는
그다지 쉽지 않다.
우리는
매우 많은 일들에서
자신에게 너무나 관대하여,
마음을 엄격하게 파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의 양심에서
비난들을 파내기는 쉽지만,
우리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들을 파내기는
그다지 쉽지 않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들에
달라붙어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우리가
선한 양심과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5:8)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우리는
‘복잡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추구하고 있다.
우리 마음의
목적과 목표는
순수하지 않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얼마나 많은 목표들이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가족은
어떻게 될까?
직장은?
학위는?
올해는 어떻게 지내고,
내년은 또 어떻게 지내지?”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많은 일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형제자매들이여,
이 모든 흙이
우리 속에서
생수의 흐름을
막고 있다.
그것들을
파내야 한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한
그날 이후로
그분은
솟아나는 생수의 우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제는
우리의 양심과 마음에
너무나 많은
흙이 있다는 것이다.

 

4일

민 21:16-18
… 브엘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백성을 모아라.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겠다.”
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우물이
있는 곳이다.
… 이스라엘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우물아,
솟아라!
우물을 향해
노래하여라!
이 우물은
인도자들이 팠고,
백성 가운데 귀인들이
지휘봉과 지팡이로
판 것이라네.” …

민수기 20장 8절과
출애굽기 17장 5절과 6절에 있는
반석은
하나님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매 맞으심으로),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완결되신 영인
생수를
우리 안으로 흘려 보내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에 반해
브엘의 우물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요 4:11-12, 14).
우물을 파는 것(민 21:18)은
우리 마음,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양심 안에 있는
장애물인
‘흙’을 파내어,
생수이신 그 영께서
우리 안에서
솟아올라
자유롭게 흐르시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 21:16).

이스라엘 자손이
물을 마시는 것에 관한
네 번째 사례는
민수기 21장 16절부터 18절까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우물을 뜻하는
브엘이란 곳에
도착했다.
브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한 우물에 이르렀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우물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분은
갈라진 반석이실 뿐 아니라
우물이시기도 하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주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마신다면
우리는
안에서
원천 혹은 우물을
가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 밖에 있는
반석이시며,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우물이시다.
우리의 밖에 있는
반석이신 그분은
매 맞을 필요가 있으시다.
우리 안에 있는
우물이신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우리가
파내어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다시 매 맞으실
필요가 없지만,
우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 존재에서
샘솟아 오르실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파내어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내적 존재 안에는
그리스도의 흐름을 방해하는
많은 흙이 있다.
이 모든 흙은
파내어져야 한다.

민수기 21장 18절은
“이 우물은
인도자들이 팠고,
백성 가운데 귀인들이
지휘봉과 지팡이로
판 것이라네.”
라고 말한다.
지휘봉은
통치자의 손에 있는
막대기로서
권위와 관련된다.
시편 23편은
지팡이가
안내를 위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4절).
이같이
지휘봉은
권위를 위한 것이고,
지팡이는
안내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권위 아래서
그분의 안내에 따라
파야 한다.

인도자들과
백성 가운데 귀인들은 일반적으로
우물을 파는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우물을 파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민수기 21장은
인도자들과
백성 가운데 귀인들이
브엘에서
우물을 팠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항상 샘솟는 우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고자 한다면,
모든 인도하는 이들은
주님의 권위 아래서
그분의 안내에 따라
흙을 파내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교회들 안에서
항상 생수를 솟아나게 하는
우물을 가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도자들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귀인들이
지휘봉과 지팡이로
우물을 팠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속 부분들에
영의 흐름을
가질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민수기 20장에서
…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매 맞은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나왔다
(고전 10:4).
그리고 21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판
우물에서
물이 솟구쳐 나왔다
(16-18절).
그러므로 동일한 책의
두 장에,
먼저는
생수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매 맞아야 했던
반석이 있고,
그다음에는
물이 솟아오르도록
파내야 했던
우물이 있다.

오늘날
믿는 이들의 문제는
반석에 있지 않고
우물에 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그분의 일을
이미 완성하셨고
결국에는 우리 안에
흐르는 생수가 되셨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수의 우물이신
그리스도는
또 다른 문제이며,
우리가 현재 파내는 과정과
많은 관계가 있다.

나는
… 영적 생명의 흐름
또는 생수의 샘이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흐르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 속에는
파내야 할
많은 흙이 있다.
여러분은
“이러한 흙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양심과 감정과
의지와 생각 안에 있는
흙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파내야 할
많은 흙이 있으며,
심지어 우리의 영 안에도
처리해야 할
많은 흙이 있다.

 

3일

요 4:14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원천이 되어
샘솟아 올라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입니다.”

민 20:8
“너는
지팡이를 들고,
너의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불러 모아라.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서
저 반석을 향해
물을 내라고
말하여라. …

삼일 하나님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세 단계로 흐르신다.
요한복음 4장 14절 하반절에서
원천이 샘솟아 오르는 것은
원천이 나타난 것이다.
그런 다음에
강이 흐른다.
아버지는 원천이시고,
아들은 샘이시며,
그 영은 강이시다.

이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실’ 것이다.
‘…에 이르다(into)’로 번역된
헬라어 전치사는
그 의미가 풍성하다.
여기에서 이 전치사는
종착지에 대해 말한다.
영원한 생명은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의
종착지이다.
우리 안에 있는 원천은
샘솟아 올라
강이 되어
종착지에 이른다.
이 종착지는
영원한 생명이다.
새 예루살렘은
신성하고 영원한 생명의
총체이다.
영원한 생명은 결국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입니다.”라는
말은
“새 예루살렘에 이를 것입니다.”를
의미한다.
우리가
새 예루살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신성한 새 예루살렘에 이르도록
흐르는 무언가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는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있다.
원천은 나타나고,
샘은 솟아오르며,
이 솟아오름은
흐르는 강이 되어
새 예루살렘에 이른다.

모세는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들었고,
아론과 함께
회중을
반석 앞에
불러 모았다
(민 20:9-10상).
그리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이 반역자들이여,
이제 들으시오.
우리가
그대들을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해야겠소?”
(10하절)
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후에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그 반석을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쏟아져 나왔고,
회중과
그들의 가축이
그 물을 마셨다
(11절).
모세는
말과 행동에 있어서
그릇되었다.
분명히 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화를 냈으며
성질을 내기까지 했을 것이다.
화가 나서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을 때마다
우리는
실수하기가 쉽다.
그럴 때 우리는
모세처럼
잘못 말하고
잘못 행할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필수품에 대한 문제로
하나님을 성가시게 했을 때
그분은
마음이 상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에게
탐욕이 있었을 때
그분은
마음이 상하셨다.
민수기 20장에서
백성들은
물이 없었기 때문에
다투었다.
물은
필수품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화내지 않으셨다.
사실상 그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것은
그분의 책임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화가 나서
반석을
그릇된 방식으로
두 번 침으로써
하나님을 거룩하시게 하지 못했다.
화를 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을
그분의 백성에게
합당하게 대표하지 못했다.
반석을 두 번 쳤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행사에 있어서
하나님을 잘못 대표했다.
그러므로 모세와 그의 형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좋은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민 20:12-13, 24, 27:12-14).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잘못된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
…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거룩한 본성을
따라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의 말과 행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하게 될 것이고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신성한 경륜
모두를 손상했다.
그는
하나님을 잘못 대표하였고,
하나님의 경륜의
원칙들을 깨뜨렸다.
비록 그가
하나님과 친밀했고
하나님의 친구로 여겨졌을지라도,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좋은 땅에 들어갈
권리를 상실했다.

민수기 20장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와 다투려고 할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 이스라엘 백성이
… 모세와 다툰 후에,
모세는
주님께 가서
“주님,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의
필요에 대하여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어야 했다.
… 모세는 … 다만
반석을 향해
물을 내라고
말했어야 했다.
우리가
오늘날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다툼을 처리한다면,
교회 생활은
영광스러울 것이다.

 

2일

요 7:37-39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시어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에게로 와서
마시십시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서 말한 대로
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받을
그 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

부활은
이전에
죽음에 넣어졌지만
지금은
다시 살아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부활은 또한
죽음을 통과한
무언가로부터 솟아나는
생명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17장에 있는
생수는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왔다.
… 성경에서
이 반석은
하나님의 구속과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분의 죽음을
나타낸다.
매 맞은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은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 후에
흘러나왔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이러한 주요 단계들이
성취된 후에야
흘러나왔다.
성경은
우리에게
반석이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준다
(고전 10:4).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반석이 되실 수 있었는가?
이것은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을
함축한다.
반석이 되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육체가 되셔서
얼마의 기간동안
사람들 가운데서
사셔야 했다.
결국,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에 의해
매 맞으셨다.
따라서 출애굽기 17장 6절은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암시하는
심오한 절이다.

요한복음 7장
38절과 39절에 따르면,
생수의 강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계된다.
여기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후,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안으로 들어가신 후에야,
생수이신 그 영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본다.
39절에서 언급하는
영광스럽게 됨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신 것을
가리킨다.
누가복음 24장 26절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그분의 영광 안으로 들어가셨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그분은
부활하셨을 때
영광스럽게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신 후에
생수가 흐른다.
생수의 강들이신 그 영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통과하시고
부활 안으로 들어가신 후에야
믿는 이들에게
체험되실 수 있었다.

생명수는
부활 안에 있으므로
이 생명수는
승리에 차고
의기양양하다.
그것은
모든 부정적인 것을
초월한다.

사실상 물 자체가
부활이다.
이것은
흐르는 물로 상징되시는 그 영께서
부활이심을
의미한다.
부활은
삼일 하나님,
곧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과정이신 아들 그리스도와
흐름이신 그 영이다.
… 우리는
이 물을 마실수록
더욱더 우리의 천연적인 상태에서 나와
곤란과 어려움에 대해
승리를 거둔다.
이 생수는
세상으로부터,
온갖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우리를 구출한다.

생명수이신
생명 주시는 영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온다
(계 22:1).
한 면에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다른 한 면에서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 또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는
우리에게
신성한 생명의
풍성을 전달한다.
이것은
생명나무가
생명수 안에서 자란다는
사실로 암시된다
(계 22:2).
신성한 생명의 풍성이
생명수의 흐름 안에서 전달되므로,
이 물을 마실 때마다
우리는
이 풍성을 받는다.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의 흐름은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고전 12:13).
우리는 모두
동일한 영,
… 곧 부활 안에 있는
한 영을 마시고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몸의 지체들이 되게 하며,
우리를
몸으로 건축한다.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의 흐름은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따르면,
그 영과 신부가 와서
생명수를 마시라고
외친다.
… 신부가 마시는
물은 그 영이다.
그 영을 마심으로 말미암아
신부는
그 영과 하나 된다.
… 우리가 매일
생수를 마신다면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준비될 것이다.

 

1일

출 17:6
이제 내가
거기 호렙에 있는
반석 위에서
네 앞에 서겠다.
너는
그 반석을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물이 나와
백성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

고전 10:4
모두
똑같은 영적인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르는
영적인 반석에서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고수씨를 갈기는
다소 쉽지만
반석을 갈라지도록 치기는
어렵다.
절구로 만나를 빻는 것과
거대한 반석을 갈라지게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주님은
모세에게
그의 지팡이를 사용하여
그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으며,
“거기에서 물이 나와
백성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출 17:6)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로
반석을 쳤다는
사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의 예표에서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고
지팡이는
율법의 힘과 권위를 나타낸다.
물론 반석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지팡이로
반석을 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에 의해
매 맞으셨음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눈에
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셨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처음 세 시간 동안
사람의 손 아래서
고통을 당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세 시간 동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율법의 힘으로
매 맞으시어
고통을 당하셨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석이심을
말한다.
신명기 32장 18절은
하나님을
우리를 낳은
반석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우리의 반석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가리킨다.
이 반석은
낳는 반석이며
생명이 충만한 반석이다.
사무엘기하 22장 47절과
시편 95편 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심을
본다.
더 나아가
이 반석은
우리의 힘이며
(시 62:7)
우리의 피난처이다
(시 94:22).
이 반석은
우리의
숨을 곳이고,
보호이며,
덮개이고,
안전이다.
이사야서 32장 2절은
주님을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피곤하고 곤비할 때,
우리는
이 바위가 주는
그늘 아래서
휴식하며
신선함을 얻을 수 있다.
메마른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고 있던
이 바위는
그들로 하여금
생수를 마실 수 있게 하기 위해
매 맞았다.

매 맞은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그 영을 예표한다.
요한복음 7장
37절과 38절은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시어 외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에게로 와서
마시십시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서 말한 대로
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
라고 말한다.
이것은
장막절 끝 날에
말씀하신 것이다.
39절은 계속해서
“이것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받을
그 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흐르는 물이
그 영을 상징함을
분명히 가리킨다.

여러 해 전에,
나는
고대에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막절을 기념할 때
반석을 두었다고 말하는
기사를 읽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반석 위에
물이 흐르게 했는데,
이것은
유대인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동안
매 맞은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을 마셨던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바위 근처에는 또한
천막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조상들이
천막에 살며
광야에서 방황했지만,
매 맞은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나와
그들의 갈증을
해결해 주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주님께서 서시어
목마른 사람들에게
그분께 와서 마시라고
외치셨을 때,
바로 이러한 그림이
그것의 배경으로
있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19장 34절은
흐르는 물을 언급하는
또 다른 절이다.
이 절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군인들 중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 피와 물이 나왔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매 맞은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온
물로 예시된 것이었다.

피는
구속을 위한 것이고,
물은
생명을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생수가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기 위해
살아 있는 반석이신 그리스도는
율법의 힘에 의해
세게 맞으셔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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