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Man
as the Corporate Warrior of God
with Christ
as the Constituents
of the Whole Armor of God
에베소서 5장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갈망을
만족시켜 드리는
신부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것임을
계시하고,
6장은
새사람인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권익을 위해
전쟁을 치르는
단체적인 전투원으로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한 것임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한다.)
에베소서 5장과 6장에서
우리는
신부이자 전투원인 교회를
본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도
우리는
교회의 이 두 방면을
가진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과 8절에서
우리는
신부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것을
보며,
그다음의 14절에서는
주님을 따라
전쟁터로 가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것을
본다.
이 절들은
신부의 결혼 예복이
신부가 하나님의 군대로서
그분의 원수와 싸울 때 입는
제복이 될 것임을
가리킨다.
신부로서 교회는
사랑과 빛이
필요하고,
전투원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가
필요하다.
에베소서 6장 10절부터 20절까지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단체적인 전투원인 교회,
곧 한 새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전투 장비의
구성 요소들이심을
계시한다.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강한 권능 안에서
굳세게 되어야 합니다.
마귀의 계략에 대항해
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십시오.”
— 엡 6:10-11.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굳세게 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 안에서는
영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오직
주님 안에서와
그분의 강한 권능 안에서만
싸울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는
몸의 어떤 개별적인 지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체적인 전투원인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개인들로서가 아니라,
몸 안에서
영적 전쟁을 해야 한다.
에베소서 2장에서
우리는
하늘들의 영역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고,
4장과 5장에서는
이 땅에서
그분의 몸 안에서
행하며,
그런 다음 6장에서는
하늘들의 영역 안에서
그분의 능력 안에
서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앉는 것은
그분께서 성취하신 모든 것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분의 몸 안에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분의 능력 안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에게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
“그런즉 서서,
진리를
여러분의 허리띠로 두르고”
— 엡 6:14상.
에베소서 6장 14절에서
‘진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실재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곧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에게
실재가 되시고
체험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는 사실상
우리가 살아 나타낸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가
허리에 두르는 진리는
사실상 우리가
체험한 그리스도이다.
바울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본과
같아졌기 때문에,
바울은
모든 반대와
적대적인 환경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의의 가슴받이를
착용하고”
— 엡 6:14하, 고전 1:30, 렘 23:6.
의의 가슴받이이신
그리스도는
가슴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양심을
보호하신다.
우리를 비난하는 자인
사탄에게 대항해 싸울 때,
우리에게는
피로 정결하게 된 양심,
곧 아무런 거리낌 없는 양심이
필요하다.
“그 형제들은
어린양의 피(로)
… 그를 이겼으며”
(계 12:11).
사탄의 비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나는
나의 온전함에 의해서나
심지어 거리낌 없는
양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비난하는 자인
사탄을 이긴다.
나는
의의 가슴받이로
사탄의 비난들로부터
보호받는다.”
“화평의 복음의
견고한 기초를
신발로 삼아
발에 신고”
— 엡6:15.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고,
사람들 사이에도
화평을 이루셨다.
이 화평은
우리의 복음이 되었다.
이 화평의 복음은
견고한 기초로 세워졌고,
이 견고한 기초는
우리 발에 신을 수 있게
예비된 것이다.
우리는
화평 안에
서 있음으로써
영적 전쟁을 수행한다.
우리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평이나
우리와 다른 믿는 이들 사이의 화평을
잃는다면
싸울 입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그 방패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엡 6:16,
불화살은
사탄의
유혹, 제안, 의심,
질문, 거짓말, 공격 등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화살을
꺼 버리기 위해
믿음의 방패를
잡아야 한다.
우리는
굴복되고 부활한 의지로
우리의 믿음의 영을 사용함으로,
주님의 나타나심이
마귀에게서 나온 일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영을 사용함으로,
주님의 죽음이
사탄을 멸망시켰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영을 사용함으로,
주님의 부활이
사탄을 부끄럽게 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영을 사용함으로,
주님의 승천이
사탄의 권세를 초월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실재이시고
살아 계시며
현존하시고
언제나 유용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선하시다.
그분께는
우리를 징벌하거나 해치거나
우리에게 손실을 겪도록 하시려는
의도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고
항상 그분의 말씀에
신실하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셔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는
우리의 실수조차도
선을 이루어 낸다.
“구원의 투구(를)
… 받아들이십시오.”
— 엡 6:17상.
구원의 투구는
악한 자가
우리 안으로 쏘는
부정적인 생각들에 대하여
우리의 생각, 곧 우리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투구, 그러한 덮개가
하나님의 구원이다.
사탄은
두려움, 위협,
근심, 걱정,
그 밖에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사상들을
우리의 생각 속에
주입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가
취해서 착용할 수 있는
덮개이다.
이러한 구원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다.
“그 영의 검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영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 엡 6:17하.
하나님께서 주신
전투 장비에 속한
여섯 가지 항목 중에서
그 영의 검만이 유일하게
우리 밖의 원수와
우리 안의 대적자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검으로
우리 밖의 원수와
우리 안의 주관적인 대적자를
산산조각 낸다.
그 영이시며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존재 안에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패배시키고 죽이는
공격 무기인
검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는 동안에 결국에는
최악의 적인 자아가
죽음에 넘겨질 것이다.
(성경 안의 항상 있는 말씀인)
‘로고스’가
우리에게
(그 영의 현재의, 즉각적인, 살아 있는, 개인적인 말씀하심인)
‘레마’가 될 때,
이 ‘레마’는
대적자를
산산조각 내는
검이된다.
우리가
죽이는 능력을 가진
말씀을 더 많이 받아들일수록,
우리 속에 있는
교만과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이 더욱더
죽음에 넘겨진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에 의해
내적인 대적자가
죽임당한다.
에베소서 5장에서
말씀은
영양 공급을 위한 것으로서
신부를
아름답게 하는 결과를 낳고
(26-27절),
6장에서
말씀은
죽이기 위한 것으로서
교회가
영적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17-18절).
“항상 영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힘을 다해
늘 깨어 있으며,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 엡 6:18.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전투 장비의
일곱 번째 항목으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도는
다른 항목들을
적용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전투 장비이신
그리스도를 적용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바로 기도에 의해
전투 장비가
우리에게
실지적으로 유용하게 된다.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하는데,
이것은 기도가
전쟁, 전투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탄, 이 두 편은
서로에게 적대적이며,
제삼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들로 구성된다.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탄에 대항해 싸우려면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한다.
이렇게 꾸준히 힘쓰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온 세상의 흐름이
하나님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쓰려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기도 생활에 관해
주님께 서원해야만 한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저는
이 문제에 대해
필사적입니다.
제가
기도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
주님,
저를
기도의 영 안에
지켜 주소서.
제가
이것을 잊어버리거나 간과할지라도,
저는
당신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실 것임을
압니다.
기도에 대해서
저에게
거듭거듭 상기시켜 주소서.”
기도에 꾸준히 힘쓰는 것에는
많은 유익이 있다.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위에 있는 것들에 둘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기도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긍휼을 받고 은혜를 얻어
때맞추어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길이다(히 4:16).
우리가
기도함으로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
은혜는
우리 안에서 흐르고
우리를 공급하는
강이 될 것이다
— 찬송가 557장.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할수록
주님과의 하나를
더 많이 체험하게 되고,
주님의 임재를
더욱더 누리게 되며,
주님과
더 많은 교통을 갖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보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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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새사람은 하나님의 완전한 전투 장비의 구성 요소들이신 그리스도로 장비된 하나님의 단체적인 전투원임”
6일
엡 6:17-18
… 그 영의 검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영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항상 영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힘을 다해
늘 깨어 있으며,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골 4:2
기도에
꾸준히 힘쓰고,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그 영이시며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원수를 패배시키고 죽이는
공격 무기인
검을 주신다.
영적 전쟁에서
우리는
객관적인 원수뿐만 아니라
더욱 주관적인 대적자까지도
처리해야 한다.
사탄은
우리 외부에 있는
원수일 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대적자이기도 하다.
… 밖으로부터 오는
원수의 공격은
안으로부터 오는
대적자의 공격만큼
심각하지 않다.
이런 내적인 대적자를
처리하려면
말씀의
죽이는 능력을
체험해야 한다.
물론 원수는
우리 밖에 있지만,
그의 요소들은
바로 우리 존재 속에 있다.
…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적은
자아이다.
자아는
최악의 적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객관적인 원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아 곧 우리 자신의 내적 존재에 의해서
유혹을 받는다.
자아가
가장 큰 원수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죽이는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우리는
한편에서는
영양 공급을 받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어떤 요소들이
죽임을 당한다.
… 의심과 미움과 시기와 교만과 이기심이
…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에 의해
…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우리가
죽이는 능력을 가진
말씀을 취하면 취할수록,
더욱더 우리의 교만과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써
내적인 대적자가
죽임을 당한다.
한 차례 말씀을 기도로 읽은 후에,
우리는
우리를 공격하고 있던 대적자가
사라졌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영적 전쟁을 위한 교전지는
우리 속에 있다.
특별히 그것은
우리의 생각 안에 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말씀은
영양 공급을 위한 것으로서
신부를 아름답게 하는
결과를 낳고,
6장에서
말씀은
죽이기 위한 것으로서
단체적인 전투원인 교회가
영적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성경 안의 항상 있는 말씀인
‘로고스’가
즉각적인 말씀하심인
‘레마’가 될 때,
이 ‘레마’는
그 영이 될 것이다.
그 영이 된
이 ‘레마’는
대적자를 산산조각 내는
검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는
여섯 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진다.
기도는
일곱번째 항목으로
간주될 수 있다.
기도는
다른 항목들을 적용하는
유일하고 중요하고 필수적인 수단으로서,
전투 장비를
실지적으로 유용하게 한다.
골로새서 4장 2절에 있는
바울의 말에 따르면,
…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하는데,
이것은 기도가
전쟁, 전투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탄, 이 두 편은
서로에게 적대적이다.
비록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맹렬한 전쟁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는 것이지만,
여기에 제삼자가 개입된다.
이 제삼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들로 구성되며,
그들이 사실상
전쟁의 결과를 결정할 것이다.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탄에게 대항해 싸우려면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한다.
이렇게 꾸준히 힘쓰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온 세상의 흐름이
하나님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것은
타락한 우주 안에 있는
흐름과 추세에
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저는
이 문제에 대해
필사적입니다.
제가
기도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
주님,
저를
기도의 영 안에
지켜 주소서.
제가
이것을 잊어버리거나 간과할지라도,
저는
당신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실 것임을
압니다.
기도에 대해서
저에게
거듭거듭 상기시켜 주소서.”
이러한 종류의 기도는
주님께 드리는
일종의 서원으로
간주될 수 있다.
기도에
꾸준히 힘쓰는 것에는
많은 유익이 있다.
기도에 의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위에 있는 것들에 둘 수 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며
은혜의 보좌에 가까이 나아간다.
…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할수록
주님과의 하나를
더 많이 체험하게 되고,
주님의 임재를
더욱더 누리게 되며,
주님과
더 많은 교통을
가지게 된다.
얼마나 놀라운 보상인가!
5일
엡 6:16-17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 구원의 투구(를)
… 받아들이십시오.
그 영은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막 11:2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제 우리는
믿음의 방패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확실히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나 힘,
우리의 공로나 미덕을
믿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실재이시고
살아 계시며
현존하시고
언제나 유용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믿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하나님과 그분의 마음을 모두
알아야 한다.
…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우리가
어떤 종류의 고통을 겪는다 해도,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선하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는
우리를 징벌하거나 해치거나
우리에게 손실을 겪도록 하시려는
의도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마음을
믿는 것에 더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변할지라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야고보서 1장 17절은
하나님께는
회전함으로 생기는
그림자도 없으시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분은
거짓말하실 수 없고
항상 그분의 말씀에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실 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더욱 넘치도록
해 주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
라고 선포한다.
우리의 믿음의
또 하나의 방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셔야 한다.
하나님은
더 많이 말씀하실수록,
자신의 말을
이루셔야 할
책임이
더 많아지신다.
우리는
그분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
당신은
말씀하셨고,
당신의 기록된 말씀이
제 손에 있습니다.
주님,
당신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이루셔야 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자!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뜻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목적이 있는 하나님이시므로
뜻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뜻은
언제나 긍정적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닥친다 해도
우리는
자신의 행복이나 환경을
주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환경은
변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주권적이신 분이시므로
결코 실수하실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는
우리의 실수조차도
선을 이루어 낸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가 실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고의로 잘못을 범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틀렸을 때에는
회개해야 한다.
… 그리고
잘못과 결점에 대해
회개한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탄의 불화살은
우리를
손상할 수 없을 것이다.
… 불화살은
사탄의
유혹, 제안, 의심,
질문, 거짓말, 공격 등이다.
… 모든 유혹은
속임수이며
거짓 약속이다.
… 우리가
아침에 일어날 때
사탄은 자주
우리에게
제안해 온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 안에 있지 않으면,
마귀의 제안들을
막아 주는
덮개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구원의 투구(를)
… 받아들이십시오.”
라고 말한다.
구원의 투구는
악한 자가
우리 안으로
쏘는
부정적인 생각들에 대하여
우리의 생각, 곧 우리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투구, 그러한 덮개가
하나님의 구원이다.
사탄은
두려움, 위협,
근심, 걱정,
그 밖에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사상들을
우리의 생각 속에 주입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가
취해서 착용할 수 있는
덮개이다.
이러한 구원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사탄의 불화살은
생각을 통해
우리에게 날아온다.
그러므로 우리의 양심이
의의 가슴받이를
필요로 하고
우리의 의지가
믿음의 방패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은
구원의 투구를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는
진리와 의와
화평과 믿음,
그리고 구원이
필요하다.
의는
화평을 가져오고,
화평은
우리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그런 다음
믿음은
구원을 가져온다.
구원의 투구와
믿음의 방패를
분리하지 말라.
방패는
우리 존재의 전면(前面)을 보호하고,
투구는
머리를 보호한다.
방패와 투구는 함께
기능을 발휘한다.
4일
엡 6:15-16
화평의 복음의
견고한 기초를
신발로 삼아
발에 신고,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그 방패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5절은
“화평의 복음의
견고한 기초를
신발로 삼아
발에 신고”
라고 말한다.
전쟁에서
강하게 서 있기 위해
우리의 발은 반드시
신발을 신어야 한다.
이것은
길을 걷거나
경주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싸우기 위한 것이다.
‘화평의 복음의
견고한 기초’
라는 표현은
화평의 복음이
세워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고,
사람들 사이에도
화평을 이루셨다.
그리고 이 화평은
우리의 복음이 되었다.
이 화평의 복음은
견고한 기초로
세워졌고,
이 견고한 기초는
우리의 발에
신을 수 있게
예비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영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서 있을 수 있도록
견고한 기초를
가지게 된다.
그러한 견고한 기초를 위한 화평 또한
그리스도이다.
여기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나
죄들을 용서함의 복음이 아니며,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의 복음도 아니다.
여기의 복음은
화평의 복음이다.
에베소서 2장 15절과 16절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화평을 이루심으로써,
이방인들이
유대인 믿는 이들을
접촉할 수 있게 되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화평이
기쁜 소식과 좋은 소식,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17절은
그리스도께서
화평의 복음을 전하셨다고
말한다.
우리도 또한
이 화평을
복음으로 전해야 한다.
에베소서 6장 15절에서 말한
화평의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고,
이방인 믿는 이들을
유대인 믿는 이들과 하나되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평이다.
이 화평이
우리의 복음이다.
이 화평은
준비되고 예비되었다.
다시 말하면,
견고한 기초로
세워졌다.
이 견고한 기초는
우리가 서기 위한
안전한 발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화평은
견고한 발판이며
견고한 기초이다.
우리가
악한 권세자들과 싸우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평이
우리의 발을 위한
견고한 기초이다.
영적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의 발은 반드시
이 견고한 기초를
신발로 삼아
신어야 한다.
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는 것이다.
우리는
능히 서서
원수의 공격에
대항해야 한다.
패배한 사람들은
뛰겠지만
승리한 사람은
서 있을 것이다.
원수와 씨름할 때
우리는
사탄이 달아나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사탄에 대해 승리했을 때조차도
사탄은
우리와 계속 싸우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능히 서 있는 것이
필요하다.
영적 전쟁은
권투 경기가 아니라
씨름 경기이다.
우리가
원수와 씨름하려면
견고한 발판이
필요하다.
보통 화평은
전쟁과 반대된다.
화평이 있을 때는
싸우지 않으며,
싸울 때는
화평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화평을 가지고,
화평 안에서 싸운다.
우리는
화평 안에 서 있음으로써
싸운다.
만일 우리가
우리와 하나님,
우리와 다른 믿는 이들 사이에서
화평을 잃는다면,
우리는
싸울 입지를 잃는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또한 성도들과
하나 되게 하시는
화평이시다.
이 화평은
우리를
원수에게 대항하여
굳게 서 있도록
할 수 있는
견고한 기초이다.
에베소서 6장 16절은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그 방패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허리에 두르는
진리와
양심을 덮는
의와
우리의 발이 서기 위한
화평과
우리 전 존재를 보호해 주는
믿음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진리이신 하나님에 의해 산다면
의를 갖게 되며,
의로부터
화평이 올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있을 때
우리는
악한 자의 불화살을
막아 주는
방패인 믿음을
쉽게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시다.
전쟁터에서
굳게 서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전투 장비의
네 가지 항목들로
무장해야 한다.
믿음의 방패는
입는 것이 아니고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손으로 잡는 것이다.
믿음은
진리와 의와 화평 뒤에 온다.
… 이 믿음은
불화살,
곧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준다.
신언 노트, 2018 07 08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강한 힘 안에서
권능이 주어져야 합니다.
마귀의 책략들에 대항해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 갑옷을
입으십시오.”
— 엡 6:10-11.
우리가
주님 안에서
능력이 주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들 안에서는
영적 전투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 안에서와
그분의 강한 힘 안에서만
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는
몸의 어떤 개별적인 지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체적인 전사인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들로서가 아니라,
몸 안에서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그런즉 서십시오,
진리로
여러분의 허리를 묶으십시오”
— 엡 6:14상.
에베소서 6장 14절에서
‘진리’는
우리의 생활 안에서
실재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곧 우리의 생활 안에서
우리에 의해
실재가 되시고
체험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는 사실상
우리에 의해 살아 나타내지신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묶이는(매이는) 진리는
사실상 우리가
체험하는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의 본과
같은 형상이 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모든 반대와
적대적인 환경들에
직면하는(…을 받아들이는)
힘을 가졌습니다.
“의의 가슴받이를
입으십시오”
— 엡 6:14하, 고전 1:30, 렘 23:6.
의의 가슴받이이신(흉판이신)
그리스도는
가슴으로 나타내지는
우리의 양심을
덮으십니다.
우리의 비난자인(고소자인)
사탄에게 대항해 싸울 때,
우리에게는
피로 정결하게 된 양심,
곧 아무런 거리낌 없는 양심이
필요합니다.
“그 형제들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또 그들의 증언의 말 때문에
그를 이겼으며”
(계 12:11).
사탄의 비난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반드시
“나는
나의 온전함에 의해서나
심지어 거리낌 없는
한 양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어린양의 피에 의해
사탄, 그 비난자를 이깁니다;
나는
의의 가슴받이로
그의 비난들에 대항하여
지켜집니다(방어됩니다).”
라고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화평 안에
서 있음으로써
영적인 전투를 벌입니다.
우리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평안이나
우리와 다른 믿는 이들 사이의 평안을
잃는다면
전투하기 위한(싸우는)
그 서 있음을(서 있는 장소를, 지위를, 지속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반드시
참되시고(is real; 실재하시고, 생생하시고)
살아 계시며
임재하시고(present; 현존하시고, 여기 계시고)
유용하신(available; 이용할 수 있으신, 유효하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have faith in God; 하나님 안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good; 좋다, 만족할 만하다, 충분하다, 기쁘다, 적절하다, 유익하다,
유능하다, 친절하다, 진짜이다, 강하다, 안전하다, 훌륭하다).
그분은
우리를 혼내 주거나(punish; 처벌하거나, 징벌하거나)
우리를 다치게 하거나(injure; 상하게 하거나, 해치거나)
우리가 손해를 입게 하시려는
(cause us to suffer loss; 실패의 고통을 겪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사탄은
두려움(fear; 우려, 공포), 위협들(threats; 위험들),
골칫거리들(worries), 걱정거리들(anxieties),
그 밖에 우리를 약화시키는 생각들을(thoughts; 의견들을)
우리의 생각 안으로(into our mind; 우리의 머리 안으로)
주입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이 모든 것들에 대항하여 집어올리는(take up against; 반대하여 취하는)
덮개입니다.
이러한 구원은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전투 장비에 속한
여섯 가지 항목 중에서
그 영의 검만이 유일하게
우리 밖의 원수와(enemy; 적, 반대자)
우리 안의 대적자를(adversary; 상대방, 적수)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검으로
우리 밖의 원수와
우리 안의 주관적인 대적자를
산산조각 냅니다.
그 영이시며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존재 안에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패배시키고 죽이는
공격 무기인
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는 동안에 결국에는
최악의 적인(foe; 상대, 적수, 반대자, 원수)
자아가
죽음에 넘겨질 것입니다.
(성경 안에 있는 항상 있는 말씀인)
‘로고스’가
우리에게
(그 영의 현재의, 즉각적인, 살아 있는, 개인적인 말씀하심인)
‘레마’가 될 때,
이 ‘레마’는
대적자를
산산조각 내는
검이 됩니다.
우리가
죽이는 능력을 가진
말씀을 더 많이 받아들일수록,
우리 속에 있는
교만과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이 더욱더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가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에 의해
내적인 대적자가
죽임당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말씀은
영양 공급을 위한 것으로서
신부를
아름답게 하는 결과를 낳고
(26-27절),
6장에서
말씀은
죽이기 위한 것으로서
교회가
영적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합니다
(to engage in spiritual warfare;
영적 전투에 교전할 수 있게 합니다)
(17-18절).
기도는
하나님의 전투 장비이신
그리스도를 적용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바로 기도에 의해
전투 장비가
우리에게
실지적으로 유용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하는데
(need to persevere; 기도를 인내하여 계속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기도가
전쟁, 전투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탄, 이 두 편은
서로에게 적대적이며,
제삼자는(the third party; 그 세 번째 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탄에 대항해 싸우려면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꾸준히 힘쓰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온 세상의 흐름이
하나님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because the course of the whole world
is away from God;
그 온 세상의 추세가[방향이, 노정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꾸준히 힘쓰려고 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기도 생활에 관해
주님께 서원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주님,
저는
이 문제에 대해
필사적입니다.
제가
기도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may have a prayer life;
한 기도의 생활을 가지도록)
제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
주님,
저를
기도의 영 안에
지켜 주소서.
제가
이것을 잊어버리거나
간과할지라도(if … neglect; 태만하더라도),
저는
당신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실 것임을
압니다.
기도에 관하여
저에게
거듭거듭 상기시켜 주소서
(remind … again and again; 다시 또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기도에 꾸준히 힘쓰는 것에는
많은 유익이(many benefits; 많은 혜택들이)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각을
위에 있는 것들에 둘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도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긍휼을 받고 은혜를 얻어
때맞추어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to meet our timely need;
우리의 시의적절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길입니다(히 4:16).
우리가
기도함으로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
은혜는
우리 안에서 흐르고
우리를 공급하는
하나의 강이 될 것입니다
— 찬송가 557장.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할수록
주님과 하나임을(being one with the Lord)
더 많이 체험하게 되고,
주님의 임재를
더 많이 누리게 되며,
주님과
더 많이 교통을 가지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보상입니까!
3일
엡 6:14
그런즉 서서,
진리를
여러분의 허리띠로 두르고,
의의 가슴받이를
착용하고,
계 12:11
그 형제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로
그를 이겼으며,
그들은 또한
죽기까지
자기들의 혼 생명을
사랑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완전한 전투 장비를
구성하는
처음 세 항목인
허리띠와 가슴받이와 신발에 의해서
우리는
능히 설 수 있다.
이 세 항목들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잡고,
구원의 투구와
그 영의 검을
받아들여야 한다.
… 검만이
공격용 무기이고,
전투 장비의
다른 모든 항목들은
방어를 위한 것이다.
먼저 허리띠와 가슴받이와 신발을
살펴보기로 하자.
허리에 띠를 두르는 것은
우리 전 존재를
강화한다.
우리의 전 존재는
진리로
강화되어야 한다.
이렇게 강화되는 것은
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기 위한 것이다.
에베소서 4장에서
‘진리’라는 단어가 사용된
용례에 따르면(15, 21, 24, 25절),
6장 14절에서
진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실재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곧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에게
실재가 되시고
체험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가
살아 나타낸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러한 진리,
그러한 실재가
영적 전쟁을 위해
우리의 전 존재를
강화하는
허리띠이다.
… 그러한 진리를
우리의 허리띠로 두를 때
우리는
서 있기 위해
강화된다.
그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진리를
그들의 허리띠로
두르고 있다.
이 사람들은
공격과 반대에
능히 직면할 수 있다.
그들은 진리를
허리띠로 두르고 있기 때문에
원수 앞에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생활과 행함 가운데서
표현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허리에 두를
띠를 갖지 못할 것이고
원수에게 대항하여 서 있을
힘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반대나 논란에 직면할
힘이 없을 것이다.
영적 전쟁을 위해
우리가
허리에 두르는
진리는 사실상
우리가 체험한 그리스도이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바울은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라고 말한다.
바울이
살아 나타낸
이 그리스도가
그의 진리의 허리띠였다.
이 그리스도는
바울의 매일의 행함에서
표현되고 나타난
하나님이시다.
바울의 일상생활은
그리스도의 본과
같아졌기 때문에,
바울은
모든 반대와
적대적인 환경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바울은
진리를
허리띠로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설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의의 가슴받이는
가슴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양심을
보호한다.
사탄은
우리를 비난하는 자이다.
사탄에게 대항해 싸울 때
우리에게는
거리낌 없는 양심이
필요하다.
우리의 양심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느낄지라도,
우리는
의의 가슴받이로
양심을 덮어야 한다.
의(義)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 대해
올바른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약간의 문제라도 있다면
사탄은
우리를 비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양심에
구멍이 생겨서
그것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담대함이
모두 새어 나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의 비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의의 덮개가
필요하다.
그러한 의는
바로 그리스도이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은
“그 형제들은
어린양의 피(로)
… 그를 이겼으며”
라고 말한다.
어린양의 피로
덮이는 것은 주로
의의 가슴받이를
착용하는 것이다.
의는
피 안에 있고
피로 덮는 것이
바로 가슴받이이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체험적으로
그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둠의 권세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려고 할 때마다
사탄은
비난을 통해
우리의 양심을
매우 예민하게 만든다.
이러한 느낌들은 사실상
양심이 민감한 것이 아니라
사탄이 비난한 결과이다.
우리는 즉시
이렇게 반응해야 한다.
“나는
나의 온전함에 의해서나
심지어 거리낌 없는 양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비난하는 자인
사탄을 이긴다.
나는 의의 가슴받이로
사탄의 비난들로부터
보호받는다.”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
체험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피를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피를 떠나서
우리를 덮으실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피의 씻음 아래에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
2일
엡 6:10-11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강한 권능 안에서
굳세게 되어야 합니다.
마귀의 계략에 대항해
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십시오.
엡 6:1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악한 날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모든 것을 다 처리한 후에도
서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절부터 6장 9절까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교회의
적극적인 방면에 관한
계시를 완성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대적을
처리하기 위한
소극적인 방면에서
여전히 다루어야 할 것이
남아 있다.
처음 다섯 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는
적극적인 방면에서
여러 방식으로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6장에서 우리는
소극적인 방면에서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를 패배시키는
전투원인 교회를
볼 수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를
착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성취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의 갈망이
만족되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도
반드시 패배당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교회는
전투원이 되어야 한다.
아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추구하는 이가
주님의 임재를 누릴 때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에 따라
은혜에 의해 행하고,
사랑과 빛 안에서 살며,
사탄의 의지를
정복하기 위해
싸운다.
우리의 행함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고,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만족시켜 드리기 위한 것이며,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원수를
패배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것들을 위해
반드시 교회는
새사람과 신부와 전투원이
되어야 한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서
‘굳세게 되어야 합니다.
(empowered; 능력이[권한이] 주어져야 합니다)’
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1장 19절에 있는
능력(power)이란 말과
어근이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를 처리하고
어둠의 악한 세력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려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고,
공중에 있는
모든 악한 영들을 초월하여
하늘에 앉힌
지극히 큰 능력으로
굳세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굳세게 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사탄과 그의 악한 왕국에 대항하여
영적 전쟁을 할 때,
우리 자신 안에서는
싸울 수 없고
오직 주님 안에서만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자신 안에 있을 때마다
우리는
패배하게 된다.
‘굳세게 되어야 합니다.’
라는 명령은
우리의 의지를
행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우리가
영적 전쟁을 위해
굳세게 되려면
우리의 의지를
반드시 강하게 하고
행사해야 한다.
우리는
해파리같이
의지가 약하거나
흔들리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사실상
가장 분명하게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의지를 가진 이들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굳세게 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 안에서는
영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오직
주님 안에서와
그분의 강한 권능
(the might of … strength; 강함의 힘, 강한 힘)
안에서만
싸울 수 있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서
바울은
‘강한 권능’과
‘굳세게 됨’을
언급하고 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고
그분을
만물 위의 머리가 되게 한
그 능력에 의해
굳세게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강한 권능을
알게 된다.
영적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능력뿐 아니라
하나님의 전투 장비도
필요하다.
우리의 무기는
쓸모없지만,
하나님의 전투 장비,
하나님의 완전한 전투 장비는
매우 유용하다.
하나님의
완전한 전투 장비는
몸의
어떤 개별적인 지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위한 것이다.
교회는
단체적인 전투원이며
믿는 이들은 함께
이 유일한 전투원을
구성한다.
오직 단체적인 전투원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전투 장비를
입을 수 있고,
개인적인 믿는 이는
그것을 입을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개인들로서가 아니라
몸 안에서
영적 전쟁을
해야 한다.
우리는
‘대항해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투 장비를
입어야 한다(엡 6:11).
에베소서 6장에서
‘서다’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2장에서 우리는
하늘들의 영역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으며(6절),
4장과 5장에서는
이 땅에서
그분의 몸 안에서
행한다(4:1, 17, 5:2, 8, 15).
그런 다음 6장에서
우리는
하늘들의 영역 안에
그분의 능력으로
서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앉는 것은
그분께서 성취하신
모든 것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분의 몸 안에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분의 능력으로
서 있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와 싸우고
… 마귀의 계략들
… 곧 마귀의 악한 계획들에 대항해
서는 것이다.
1일
계 19:7-8
우리가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시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결혼 날이
다가왔고,
그분의 아내도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되었는데,
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입니다.
계 19:14
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흰색 말을 타고서
그분을 따랐습니다.
에베소서 5장과 6장에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더 깊은 두 가지 방면들,
곧 그리스도의 갈망을
만족시키는
신부와
하나님의 원수를
패배시키는
전투원을 본다.
신부로서 교회는
사랑과 빛이
필요하고,
전투원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가
필요하다.
에베소서에서 다루어진
교회의 열두 가지 방면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방면들은
새사람과 신부와 전투원이다.
새사람은
몸의 방면을 포함하고,
몸은
충만과 거처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처음 열 가지 방면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는
새사람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삼일 하나님은
영원 과거에,
영원 미래를 위해
계획하신 것을
성취하기 위해
이 새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이
새사람으로 완성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갈망은
여전히 만족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원수도
여전히 패배당해야 한다.
한 면으로
교회는
성장과 기능과 합당한 일상생활을
필요로 하는
새사람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께 드려지기 위해
아름답게 단장된
신부여야 한다.
신부인 교회에게는
규례들이나 교리나 옛사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유기적이며
(that are organic;
조직적이며, 기질적이며, 생성 발전하며, 생체 조직을 침범하며)
교회의 아름다움을 망치는(ruin)
점들과 주름들과 결함들이다.
그러한 결함들이 없으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요소를
유기적으로
자신 안으로
일해 넣어지게 함으로써
거룩하게 되고,
순수하게 되고,
보양받고,
보살핌 받아야 한다.
이 요소는
점들과 주름들을
사라지게 할 것이며,
그리스도께
드려지기 위해
신부를
아름답게 할 것이다.
결국에는
이 신진대사적인 변화의 과정을 통해
교회는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에베소서 6장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전투원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몸과
하나님께서 거주하시기 위한
거처와
하나님의 경륜을
완성하기 위한
새사람이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를
패배시키는
전투원 곧 군인이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따르면,
교회는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신부인 동시에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원수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전투원이다.
주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먼저
그분의 신부를
맞이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신부를 맞이하신 후에,
그분과
이기는 이들은
원수를 대항하는
싸움에 참여할 것이다.
19장 11절에 따르면,
주님은
흰색 말을 타실 것이며,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은
하늘에 속한 군대들이
흰색 말을 타신
그분을 따를 것이다(14절).
17장 14절 말씀 역시
이것을 언급한다.
“그들이
어린양과 싸울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양께서
그들을 이기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주인의 주님이시고
모든 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어린양과 함께 있는 사람들,
곧 부름받고 선택받은
신실한 사람들도
그들을 이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과 8절에서
우리는
신부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것을 보며,
그다음의 14절에서는
주님을 따라
전쟁터로 가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은 것을 본다.
이 절들은
신부의
결혼 예복이
신부가
하나님의 군대로서
그분의 원수와 싸울 때
입는
제복이 될 것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결혼 예복을 입는 것은
또한 제복을 입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과 6장에서
우리는
신부이자 전투원인
교회를 본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도
우리는
교회의 이 두 방면을
가진다.
교회인 우리는 다만
몸과
하나님의 거처와
하나님의 왕국과
하나님의 가족과
새사람일 뿐 아니라,
신부와
전투원이기도 하다.
신부로서 우리는
점이나 주름이 없이
아름다워야 하며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한다.
전투원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를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