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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복

The Eternal Blessing
of the Triune God
그 삼일 하나님의
그 영원한 축복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복은
삼일 하나님이며,
이 복은
신성한 존재가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서
우리 안으로
분배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다
― 전 1:2, 3:11.

에베소서 1장은
삼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변화된
백성에게
복을 주시어,
그리스도의 몸
곧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인
교회를 산출하시는지를
보여 준다.

그분은
아버지 안에서
(엡 1:3-6),
아들 안에서
(7-12절),
그 영 안에서
(13-14절)
우리를 축복하신다.

결국 하나님의 선민에게
복이 되시는
신성한 삼일성의
이러한 흐름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산물이
있게 된다.
이러한 복된 흐름의 산물은
그리스도의 몸
곧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인
교회이다
(엡 1:22-23).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의 흐름이신
신성한 삼일성께서
하나님의 온 존재를
그분의 선민 안으로
분배하신 것의
총체적인 산물이다.

성경 전체의 기록의
완결인 새 예루살렘은
신성한 삼일성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께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백성과 연합하시어
그들의 영원한 복이
되신 것이다.
이러한 복은
민수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복의 궁극적인 성취이다
― 계 21:12, 14, 22:1-2.

민수기 6장
22절부터 27절까지에서
우리는
제사장들이
축복하는 것의
전형을 본다.
이 축복은
구약의 축복이나
신약의 축복이라기보다는,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이다.
이 축복은 바로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우리의 누림을 위해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는
아버지와 관련된다
― 민 6:24.

아버지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온갖 방면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엡 1:3).
아버지는 또한
그분의 능력 안에서
온갖 방면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다
(요 17:11, 15).

주님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분의 이름 안에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요 17:11).
이것은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 안에
우리를
지켜 주시기 위한 것이다.
이어서 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15절).

우리는
절대적으로
삼일 하나님의 분배 안에
지켜지고
완전히
악한 자 밖에 있는
그러한 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는
아들과 관련된다
― 민 6:25.

누가복음 1장 78절에서,
주 예수님이
곧 태어나려 하실 때
사가랴는
“돋는 해가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임하여”
라고 신언하였다.
‘돋는 해’는
신성한 삼일성 중에서
아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육체 되심이
빛을 비추는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 마 4:16, 요 8:12.

민수기 6장 25절에서
‘얼굴’이라는 단어는
임재를 의미한다.
우리를 비추시는
얼굴을 가지신
아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임재이시다
― 벧후 1:16-18, 마 17:1-2.

민수기 6장 25절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요점이
함께 더해질 때,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4, 16, 17절의 말씀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육체 되심은
그분의 임재의
비춤이었으며,
이러한 비춤과 함께
은혜가 있었다.
이 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 은혜는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이다
― 고후 13:14.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는
성령과 관련된다
― 민 6:26.

얼굴은
사람의 임재를 의미하고,
표정은
그 사람의 표현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에게
밝은 표정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확증하고, 보증하며,
약속하고, 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얼굴로서 오셨고,
성령은
하나님의 표정으로서 오신다.
우리가
성령을 슬프시게 하면
그분의 표정은
어두워질 것이고
(엡 4:30),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면
성령은
우리에 대해
기뻐하실 것이며,
또한 밝은 표정을 지으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확증하시고 보증하시고
보장하시고 약속하시고
주실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 있는
축복은
사실상
민수기 6장
23절부터 27절까지에 있는
축복과 동일하다.

사도 바울의 축복에서,
삼일 하나님은
사람들의 누림을 위해
사람들에게 오신다.
바울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람들 안으로 이끌었다.

한 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끄는 것이며,
또 다른 면에서는
하나님을
사랑과 은혜와 교통으로
사람들 안으로 이끌어서
그들이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사랑과 은혜와 교통은
우리의 누림을 위한
하나님의 세 단계이다.
사랑은
내적인 것이고,
은혜는
사랑이 표현된 것이며,
교통은
은혜를
우리 안으로
전달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근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원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영의 교통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삼일 하나님과
그분의 신성한 미덕들을
체험하고 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신성한 계시는
신학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비밀스럽고 놀라운
신성한 삼일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 자신을
그분의 선민 안으로
분배하시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가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
한 축복에서 가리키듯이,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이제부터 영원토록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께
참여하고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며 소유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과정을 거치시고
내적으로 순환하시는
삼일 하나님을 반드시
매일 누리며
이러한 삼일 하나님을
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우주의 유일한 복이신
그분을
다른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여,
예수님의 증거
곧 예수님의 단체적인 표현을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 고후 13:14, 갈 3:14, 창 12:2,
빌 1:25, 계 1:2, 9-12.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실망하면서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해 아래 있는
모든 것과
심지어 영적인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아무것도
실재가 아니며
심지어 교회생활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실재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느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로
돌이켜야만 한다.
그분은
우리의
참된 복이시며 몫이시다.
그분을
복으로 가지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그분의 얼굴
곧 그분의 임재를 가지고,
매일 그분을
은혜로 누리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우리는
고난을 겪을수록
은혜이신 그분을
더 많이 누린다.
우리에게
미소를 짓고
보증하며
확증하는
그분의 표정을
가지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또한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해,
그분과 함께
평안을 가지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이것이
우리의 복이신
삼일 하나님이다.
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란다!”
― 민수기 라이프 스타디,
11장,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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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복”

6일

민 6:24-26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고후 13: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민수기 6장
23절부터 26절까지의 축복과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의 축복은
모두
외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축복은
뛰어난 직업, 좋은 집,
수준 높은 교육, 좋은 가정생활의
문제가 아니다.
더 나아가서
이 축복은
교회 안에서 가지는
어떠한 종류의 지위와도
관련이 없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실망하면서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해 아래 있는
모든 것과
심지어 영적인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아무것도
실재가 아니며
심지어 교회생활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실재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느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로
돌이켜야만 한다.
그분은
우리의
참된 복이시며 몫이시다.
그분을
복으로 가지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그분의 얼굴
곧 그분의 임재를
가지고,
매일 그분을
은혜로 누리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우리는
고난을 겪을수록
은혜이신 그분을
더 많이 누린다.
우리에게
미소를 짓고
보증하며
확증하는
그분의 표정을
가지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또한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해,
그분과 함께
평안을 가지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이것이
우리의 복이신
삼일 하나님이다.
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란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생명이 되신
주님 자신이다.
…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다.
… 그 영의 교통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그 영 자신이다.
이들은
분리된 셋이 아니라
하나의 세 방면이다.
이것은 마치
주님과 하나님과 성령께서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나누어지지 않고
나눌 수도 없는
동일한 한 하나님의
세 위격들’
(필립 쉐프)
이신 것과 같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서
주님의 은혜가
먼저 언급된 것은
이 책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1:12, 4:15, 6:1,
8:1, 9, 9:8, 14, 12:9).
빗나가고 혼돈되었지만
위로를 받고 회복된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세 가지 미덕
―사랑, 은혜, 교통―을 지닌
신성한 속성과
세 신성한 위격
―아버지, 아들, 영―을 지니신
삼일 하나님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사도는
한 문장 안에서
이 신성하고 보배로운 것들을
모두 사용하여,
사랑이 가득하고
친밀한
그의 서신을 끝맺었다.

이 절은
신격의 삼일성이
조직 신학의
교리적인 이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 안으로
삼일성을 지니신
하나님 자신을
분배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성경에서 삼일성은 결코
단지 하나의 교리로서
계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과 관련하여,
특히 그분께서 창조하신 사람,
더 특별하게는
그분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백성과 관련하여
계시되거나 언급된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그분의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주라고
분부하셨다
(마 28:19).
즉 그분은
제자들에게
믿는 이들을
삼일 하나님 안으로,
곧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과하여
부활 안으로 들어가신,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연결 안으로
이끌도록
분부하셨다.
이러한 유기적인 연결에 근거하여,
사도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이 신성한 서신의 결론에서
고린도 사람들이
아들의 은혜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
그 영의 교통을 통해
찬송받으실 신성한 삼일성에
참여하도록
그들을 축복하였다.

그러므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신격의 삼일성에 관한
신성한 계시는 분명히
신학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비밀스럽고 놀라운
삼일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 자신을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가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 한
축복에서 가리키듯이,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이제부터 영원토록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께 참여하고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며 소유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아멘
(고후 13:14).

 

5일

고후 13: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요이 3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안이
진리와 사랑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있는
축복은
사실상
민수기 6장
23절부터 27절까지에 있는
축복과 동일하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주님 자신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며,
그 영의 교통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전달해 주시는
그 영 자신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서
사도 바울도
축복의 전형을
보여 준다.
… 우리는
제사장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을
사람들에게로 이끈다.
사도는
하나님과 함께
사람들에게 나아간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은혜로운 방문을 본다.
사도 바울의 축복에서,
삼일 하나님은
사람들의 누림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오신다.
사람들은
성령의 교통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린다.
사랑과 은혜와 교통은
분리된 세 가지가 아니다.
그것들은
한 가지의
세 방면, 혹은 세 단계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누림을 위한
하나님의 세 단계이다.
사랑은
내적인 것이고,
은혜는
사랑이 표현된 것이며,
교통은
은혜를
우리 안으로
전달해 주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
이 사랑이
표현될 때
그것이 은혜이며,
은혜는
교통을 통해
전달된다.
내가
어떤 형제를 사랑하지만
이 사랑은
내 안에 있다.
그것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가?
나는
그에게
성경을 선물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성경은
내가
이 형제를 향해
내 안에 품고 있는
사랑의 표현인
은혜를 나타낸다.
그에게
이 은혜를
전하기 위해
나는
실지로
그 성경을
그에게
건네주어야 한다.
이것이 교통이다.

구약에 있는
축복에 대한
기본 사상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오는
사도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 뿐 아니라
하나님을
그들 안으로
이끈다.
제사장들이 축복하는
구약의 방식과
사도들이 축복하는
신약의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신약의 축복은
더 높고
더 깊다.
한 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끄는 것이며,
또 다른 면에서는
하나님을
사랑과 은혜와 교통으로
그들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축복이라는 말에
익숙하다.
한 찬송은 심지어
“네가 받은 축복들
세어 보라
하나하나
그 이름 붙여 보라”
라고 말한다.
의심할 것 없이,
이 찬송에서 표현된
축복의 관념은
축복이
좋은 아내와 자녀와
교육과 승진과
집과 자동차를
받는 것이다.
이 찬송에 의하면,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하나하나 세어 보아야 할
축복들이다.
삼십오 년도 훨씬 전에
나는
그해를 보내는
마지막 몇 시간 동안
이 찬송가를 불렀다.
나는
몇몇 사람들을
함께 모아서
“금년에 받은 축복들을
하나하나 세어 봅시다.”
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축복은
이것과는 크게 다르다.
제사장이 축복하는
구약의 방식과
사도들이 축복하는
신약의 방식에 의하면,
합당한 축복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고
하나님을
은혜와 사랑과 교통으로
사람들 안으로
이끌어,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삼일 하나님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은
삼일 하나님을
누리는 문제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근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원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영의 교통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께서
하나님과 함께
주님을
전달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삼일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령―과
그분의 신성한 미덕들을
체험하고 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고후 13:14).

 

4일

민 6:26-27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내 이름을
이스라엘 자손 위에 두면,
내가 직접
그들에게 복을 주겠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분 안에서
구속의 날에 이르도록
도장 찍혔습니다.

이 축복의 셋째 부분은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민 6:26)
라고 말한다.
민수기 6장의 축복에는
얼굴과 표정,
이 두 가지가 있지만,
이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얼굴은
사람의 임재를 의미하고,
표정은
그 사람의 표현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에게
밝은 표정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확증하고, 보증하며,
약속하고, 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얼굴로서 오셨고,
성령은
하나님의 표정으로서 오신다.
에베소서 4장 30절은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한다.
우리가
성령을 슬프시게 하면
그분의 표정은
어두워질 것이고,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면
성령은
우리에 대해
기뻐하실 것이며,
또한 밝은 표정을 지으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확증하시고 보증하시고
보장하시고 약속하시고
주실 것이다.

아버지는
복을 주시고
아들은
비추시며
성령은
밝은 표정을 하신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분배되실 때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얼굴을 가지며
또한 그분의 표정을 가진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기뻐하실 것이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확증하시고 보증하시고
보장하시고 약속하시고
주실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삼일 하나님 안에
지켜지고,
삼일 하나님은
매일
우리에게
은혜가 되시며,
우리는
평안을 가진다.

민수기 6장
23절부터 26절까지에는
물질적인 복에 관한
언급이 없다.
이 절들에서
주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을
좋은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그들 각자에게
그 땅의 몫을
주실 것이며,
그들을
기근에서
지켜 주실 것이고
비를 주실 것이며,
원수들로부터
그들을
지켜 주실 것이고,
그들을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여기에 언급된 복은
그러한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민수기 6장에 있는
복은 무엇인가?
이 복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삼일 하나님의
인격이다.
아버지 안에서
우리는
복을 받으며
삼일 하나님 안에
지켜진다.
아들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얻으며
은혜이신 그분을 누린다.
성령 안에서
우리 위에는
하나님의
밝은 표정이 있으며,
우리는
밤낮으로
평안을 누린다.

축복의 셋째 부분은
영 하나님의 표정과
그분의 평안과
관계있다.
우리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것은 틀림없이
삼일성의 셋째이신
그 영의
은혜로운 일이다.
오늘날
그 영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밝은 표정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며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그분은
우리의 환경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
곧 우리의 마음과 영과
심지어 우리의 생각 안에서
평안을 주신다.
그 영 안에서,
그 영을 통하여,
그 영과 더불어
우리는
평안을 누린다.
다른 사람들은
마음과 생각과
영과 환경 안에서
괴로움을 당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괴로움을 당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평안을 가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축복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누림 안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민수기 6장에 있는
삼중 축복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축복하는 것의
전형이다.
이것은
합당한 축복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그분의 얼굴빛 안으로,
그분의 빛나는 표정 안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고
평안을 얻게 하는 것임을
계시한다.
이것은 확실히
참된 축복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얼마나 기이한가!

축복의 셋째 부분은
그 영의 축복인데,
그 영은
우리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즉 그 영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이시며,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신다.
신성한 삼일성의 축복은 주로
물질적인 것들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나타나시며,
우리에게 보이시는
삼일 하나님과 관계된다.

 

3일

민 6:25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요 1:14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니,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였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에게서 온
독생자의 영광이었다.

민수기 6장 25절에 나오는
축복의 둘째 부분은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민 6:25)
라고 말한다.
누가복음 1장 78절에서,
주 예수님이
곧 태어나려 하실 때
사가랴는
“돋는 해가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임하여”
라고 신언하였다.
‘돋는 해’는
신성한 삼일성 중에서
아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육체 되심이
빛을 비추는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얼굴을 보았고
그분의 영광을 주목했다
(요1:14).
그리고 그분은
계속해서
우리 위에
빛을 비추고 계신다.
그분은
가시는 곳마다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비추는
큰 빛이셨다
(마 4:16).
이것은
그분께서
세상의 빛이셨기 때문이다
(요 8:12).

민수기 6장 25절에서
‘얼굴’이라는 단어는
임재를 의미한다.
우리를 비추시는
얼굴을 가지신
아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임재이시다.
하나님과
그분의 임재는
볼 수 없으나,
육체 되심을 통해
그분은
비추는 해가 되셨다.
이 비추는 해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임재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볼 수 있는 것이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빛을 비추었다.
변형의 산에서
주님의 몇몇 제자들은
영광 가운데 계신
그분을 보았다
(벧후 1:16-18, 마 17:1-2).

민수기 6장 25절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요점이
함께 더해질 때,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4, 16, 17절의
말씀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육체 되심은
그분의 임재의
비춤이었으며,
이러한 비춤과 함께
은혜가 있었다.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니,
은혜…가 충만하였다.”
(요 1:14)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심지어 우리에게
은혜가 되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계속
우리에게
은혜가 되신다는 뜻이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고후 13:14상),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질 때
은혜를 가진다.
삼일 하나님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는
날마다
은혜이신 그분을
누린다.

민수기 6장에서
여호와께서
이 삼중 축복의
각 부분에 한 번씩,
세 차례
언급되시기 때문에,
여호와는
신성한 삼일성이시다.
축복의 첫째 부분,
곧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24절)는
삼일성의 첫째이신
아버지를 암시한다.
둘째 부분,
곧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25절)는
삼일성의 둘째이신
아들을 암시한다.
‘얼굴’은
임재를 의미한다.
‘비추시고’는
빛을 함축하고 있고
무언가가 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는
은혜를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삼중 축복의
둘째 부분에서
여호와는
우리에게 오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지켜 주시는 것보다
더 주관적이고 체험적이다.
삼일성의 셋째이신
성령을 암시하는,
여호와의 삼중 축복의
셋째 부분에서
여호와는
우리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얼굴(25절)은
사람의 임재를 의미하고,
표정(26절)은
그 사람의 표현을 의미한다.
표정은
얼굴보다
더 특별하고 친밀한 것이며,
대체로 사랑과 긍휼과 인자와 같은
그러한 즐거운 표현을
하기 위한 것이다.

민수기 6장
24절부터 27절까지에는
삼일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지키신다.
육체가 되신
아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비춤이시고
은혜를 가져오신다
(요 1:14, 16-17).
그 영은
하나님의
친밀하면서도 즐거운
임재이시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
신약의 서신서들의 여러 곳은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안이 있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
(롬 1:7, 고전 1:3, 벧후 1:2, 계 1:5).
은혜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하나님이고,
평안은
우리가 하나님을 누린
결과이다.
은혜는
그리스도이고
(고후 13:14상, 고전 15:10, 갈 2:20),
평안은
그 영이다
(롬 14:17).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표정,
그리스도와 그 영,
은혜와 평안은
모두
비슷하게 연관되어 있다.
민수기 6장의
삼중 축복에서
삼일성은
매우 특별하게
계시되어 있다.

 

2일

민 6:23-24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며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요 17:15
나는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6장에 있는
축복은
구약의 축복이나
신약의 축복이라기보다는,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이다.
이 축복은 바로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우리의 누림을 위해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이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라는 말씀은
여호와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선물을 하나 주는 것과 같은
객관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그분 자신을
한 단계씩,
조금조금씩
우리에게 주신다.
만일 여러분이
내게
주님께 받은
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유일한 복은
나의 삼일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나의 복이십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버지를 언급하면서
민수기 6장 24절은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온갖 방면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엡 1:3).
그리고 아버지는 또한
그분의 능력 안에서
온갖 방면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다
(요 17:11, 15).

축복하시는 분이
우리를 지키신다.
민수기 6장 24절에서
‘지키다’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요한복음 17장 11절에서
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그분의 이름 안에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이것은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 안에
우리를
지켜 주시기 위한 것이다.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동안에,
우리는
분배하시는 분 안에
지켜진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주 예수님은
계속하여
아버지께서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우리가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 안에
지켜질 때
원수의 손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삼일 하나님의 분배 안에
지켜지고
완전히
악한 자 밖에 있는
그러한 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아들을 믿는 이들은
여전히 세상에 있다.
신성한 삼일성이
하나이시듯이,
그들은
하나 될 수 있도록,
즉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도록
지켜져야 한다.
아들은
거룩하신 아버지께
믿는 이들을
그렇게 지키시기를
기도하셨다
(요 17:11).

아버지의 이름 안에
지켜진다는 것은
그분의 생명에 의해
지켜지는 것인데,
왜냐하면 오직
아버지에게서 나서
아버지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만이
아버지의 이름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생명을
주셨다
(요 17:2).
그러므로 그들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
지켜짐으로써
그 이름을
함께 누리며,
또 그들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하나이다.
이 하나 되는 것의
첫 번째 방면,
즉 믿는 이들의 건축의
첫 번째 방면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며,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에 의해
하나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 되는 것의 방면에서,
아버지의 생명으로 난
믿는 이들은
아버지의 이름,
곧 아버지 자신을
그들이 하나 되는
요인으로 누린다
(요 17:11).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놓여 있다
(요일 5:19).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악한 자의 손에서
지켜져야 하며,
악한 자에게서
구출되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마 6:13, 요 17:15).

요한복음 17장 11절은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안에
그들을 지키시어,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한다.
이 절에서 말하는
하나는
… 신성한 이름에
속한 것이다.
성경에서,
특히 요한복음에서
이름은
인격을 가리킨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은 사실상
아버지 자신이다.
… 17장 11절에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
지켜진다는 것은
아버지의 활동을 통해
아버지의 인격 안에
지켜지는 것이다.
오늘날 아버지는
… 활발하게
그분의 집인
교회를
건축하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격 안에서
살고 행해서는 안 되며,
아버지의 인격 안에서
살고 행하며 일해야 한다.

 

신언노트, 2019 03 10

그 삼일 하나님의
그 영원한 축복

그 전체의 우주 안에서
 그 유일한 축복은
 그 삼일 하나님이시고,
또 이 축복은
 그분의 신성하신 삼일 안에서
 ―그 아버지, 그 아들, 또 그 성령 안에서
 우리 안으로의
 그 신성하신 존재의
 그 분배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옵니다:

에베소서 1장은
 어떻게
 그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하신 삼일 안에서
 선택받고, 구속받고, 또 변형된
 그분의 백성을
 축복하셔서,
그리스도의 그 몸,
 곧 모든 것들 안에서
 모든 것들을 가득 채우시는
 그 한 분의 그 충만인
 그 교회의
 결과로 끝나는지에 관한
 (of how … issuing in;
 결과가 되는지의)
 한 기록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분은
 그 아버지 안에서,
 그 아들 안에서,
 또 그 영 안에서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게의
 그 축복이신
 그 신성하신 삼일의
 그러한 한 흐름때문에,
 한 유출이
 (an issue; 한 결과가)
 있고,
또 이 축복받은 흐름의
 그 유출은
 그리스도의 그 몸,
 곧 모든 것들 안에서
 모든 것들을 가득 채우시는
 그 한 분의 그 충만인
 그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인
 그 교회는
 하나님께서 무엇이신
 모든 것들을
 (all that God is;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을)
 그분의 선택된 백성 안으로
 분배하시는
 한 흐름이신
 그 신성하신 삼일의
 총체적인(total; 전체의) 그 유출입니다.

성경의 그 전체 기록의
 그 완결로서,
그 새 예루살렘은
 그들의 영원한 축복으로서
 그분의 선택된, 구속된, 거듭나게 된,
 변형된, 또 영광스럽게 된
 백성과 섞이시는
 그분의 신성하신 삼일
 ―그 아버지, 그 아들, 또 그 영―
 안에 계시는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그러한 영원한 축복은
 민수기 6장 안에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to; …에게의)
 하나님의 축복의
 그 궁극적인 성취입니다.

민수기 6장
 22절부터 27절까지 안에서
 우리는
 그 제사장들에 의한
 축복의
 한 본을
 (a pattern;
 한 본보기를[모범을, 원형을])
 봅니다;
이 축복은
 구약의 한 축복도
 또한 신약의 한 축복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삼일 하나님의
 그 영원한 축복이며,
이는
 (which; 그 영원한 축복은)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우리 안으로
 그분의 신성하신 삼일 안에서
 그분 자신을 분배하시는
 그 삼일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를 축복하시고
 또 여러분을 지키십니다”
 (민 6:24)는
 그 아버지께 속한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can be ascribed to;
 …께 있다고 여겨질 수
 […께 돌려질 수]
 있습니다):

그 아버지께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각각의 모든 측면으로
 (in every aspect;
 모든 방향[양상, 모양, 모습] 안에서)
 또 각각의 모든 방식으로
 (in every way;
 어떤 길에서나, 각 방향 안에서, 모든 방법으로)
 우리에게
 축복하시고,
또 그분께서
 그분의 능력 안에서
 각각의 모든 측면으로
 또 각각의 모든 방식으로
 우리를
 지키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아버지께서
 그분의 이름 안에서
 우리를 지키시기를(would keep)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배하시는 그 삼일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went on to …;
 계속[앞으로] 나아가서)
 그 아버지께서
 그 악한 한 존재로부터
 (from the evil one;
 그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삼일 하나님의
 그 분배하심 안에
 절대적으로
 또 그 악한 존재 밖에
 전적으로
 (altogether; 완전히)
 지켜짐의
 그 축복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정말 축복입니다
 (what a blessing;
 참으로 한 축복입니다, 어떠한 축복입니까)!

“여호와께서
 너희를
 축복하신다”는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그분 자신을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형제에게
 한 선물을 주는
 한 형제같이
 단지 한 객관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계단계로
 (step by step;
 한 걸음 한 걸음, 한 걸음씩,
 점차로, 점진적으로, 단계적으로)
 또 조금조금씩
 (little by little;
 조금씩, 천천히, 서서히, 점점, 차츰),
 그분의 삼일 안에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주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나에게
 내가
 주님께로부터
 무슨 축복을
 받았냐고
 물었다면,
나는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유일한 축복은
 나의 삼일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삼일 하나님께서
 나의 축복이십니다.”
 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 위에
 그분의 얼굴을
 빛나게 만드시고
 (make … shine;
 빛나게 하시고)
 또 여러분에게
 은혜로우십니다”
 (민 6:25)는
 그 아들께 속한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78절 안에서,
 주 예수님께서
 막 태어나려고 하셨을 때,
 사가랴가
 신언하였습니다,
“그 돋는 해가
 (The rising sun;
 그 떠오르는[솟아오르는] 해가)
 높은 곳에서부터(from on high)
 우리를
 방문할 것입니다
 (will visit;
 찾아올 것입니다)”;
그 돋는 해는
 그 신성하신 삼일 안에 계시는
 그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빛을 비추는 한 방식 안에서
 우리에게
 그분 자신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육체 되심을
 함축합니다
 (implies;
 넌지시 뜻합니다, 암시합니다, 의미합니다).

민수기 6장 25절 안에 있는
 그 단어 ‘얼굴’은
 임재를 의미합니다;
그분의 얼굴이
 우리 위에 빛 비추시는
 그 한 분으로서,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는
 (invisible;
 볼 수 없으신, 눈에 띄지 않으시는
 무형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의
 보이시는
 (visible;
 눈으로 볼 수 있으신, 가시적이신,
 알아볼 수 있으신, 뚜렷하신)
 그 임재이십니다.

민수기 6장 25절은
 우리 위에
 그분의 얼굴을
 빛나게 만드시는
 여호와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은혜로우신
 여호와에 관하여
 말합니다;
함께 더해지는(added; 더해진)
 이 두 요점들이
 요한복음 1장
 14, 16-17절과
 동일합니다
 (equal;
 같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육체 되심은
 그분의 임재의
 그 빛 비춤이었고,
또 이 빛 비춤과 함께
 (along with; …에 따라[덧붙여])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 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이고,
이는(which)
 사실상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십니다.

민수기 6장 안에서
 여호와께서
 세 차례
 ―그 삼중 축복의
 각 부분 안에
 한 번씩―
 언급되시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 신성하신 삼일이십니다.
그 축복의 그 첫째 부분,
 곧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또 여러분을
 지키십니다”
 (24절)는,
 그 아버지,
 곧 그 삼일의 그 첫째를
 함축합니다.
그 둘째 부분,
 곧 “여호와께서
 그분의 얼굴을
 여러분 위에
 빛나게 만드시고
 또 여러분에게
 은혜로우십니다”
 (25절)는
 그 아들,
 곧 그 삼일의 그 둘째를
 함축합니다.
‘얼굴’은
 그 임재를 나타냅니다.
‘빛나게’는
 빛을 함축하고
 또 어떤 것이(something)
 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로우십니다’는
 “은혜를 주신다”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그 삼중의 축복의
 그 둘째 부분 안에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이는(which)
 여호와의
 우리를 축복하심과
 또 지키심보다
 더 주관적이고 또 체험적입니다.
여호와의 삼중의 축복의
 그 셋째 부분 안에서,
 이는(which; 그 셋째 부분은)
 그 성령,
 곧 그 삼일의 셋째를
 함축하고,
여호와께서
 우리 위에
 그분의
 좋은 안색을
 (countenance;
 표정을, 안색을, 침착을,
 지지를, 격려를, 찬성을)
 들어 올리시고
 (lift up;
 위로 드시고)
 또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그 얼굴은
 그 사람의 그 임재를
 나타내고,
또 그 표정은
 (countenance; 그 좋은 안색은)
 그 사람의 그 표현을
 나타냅니다.
그 표정은
 더 많이(more; 더)
 특별하고
 (particular;
 특정하고, 독특하고, 개별적이고, 상세하고)
 또 친밀하며
 (intimate;
 사적이며, 개인적이며, 상세하며, 깊으며),
 또 주로
 사랑, 긍휼, 또 인자와 같은
 즐거운 표현들을 위하여
 있습니다.

(민수기 6장)
 24절부터 27절은
 그 삼일 하나님의
 그 축복입니다.
그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고
 지키십니다.
그 아들,
 그분께서는(who)
 육체가 되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임재의
 그 빛 비춤이시고
 (the shining;
 그 빛남이시고)
 또 은혜를 가져오십니다.
그 영께서는
 하나님의
 친밀한,
 곧 즐거운
 (pleasant;
 기분 좋은, 상냥한, 정다운, 명랑한)
 임재이시고
또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몇몇의 신약 서신서들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또 평안이”
 라고 말합니다
 (롬 1:7, 고전 1:3, 벧후 1:2, 계 1:5).
은혜는
 우리의 누림을 위한
 하나님이시고,
또 평안은
 우리의
 하나님을 누림의
 그 결과입니다.
은혜는
 그리스도이시고,
또 평안은
 그 영이십니다
 (롬 14:17).
하나님의 얼굴과
 또 하나님의 표정,
 그리스도와
 또 그 영,
 은혜와
 또 평안은
 모두 유사하게 관련됩니다.
그 삼일은
 민수기 6장 안에 있는
 그 삼중의 축복 안에서
 독특하게
 (uniquely;
 유례없이, 특유한 형태로[방법으로],
 고유한 방식으로, 유일무이하게)
 밝혀집니다
 (is … unveiled;
 덮개가 벗겨집니다, 계시됩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 위에
 그분의
 좋은 안색을
 들어 올리시고
 또 여러분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민 6:26)는
 그 영께 속한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 얼굴은
 그 사람의 그 임재를
 나타내고(denotes),
또 그 표정은
 그 사람의 그 표현을
 나타냅니다;
한 사람 위에
 여러분의
 좋은 안색을
 들어 올리는 것은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각각의 모든 것들을
 확인해 주고
 (confirm;
 공식화하고, 확정하고),
 보장하며
 (assure;
 보증하며, 확실하게 하며, 장담하며),
 약속하고,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그 얼굴로서
 오셨고,
또 그 성령께서
 하나님의 그 표정으로서
 오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분을 슬프시게 한다면,
 그분의 표정은
 떨어질 것이지만
 (will drop;
 갑자기 쓰러질[상처를 입고 쓰러질,
 털썩 주저앉을, 가라앉을, 하락할, 내려갈,
 약해질, 사라질, 어두워질, 후퇴할] 것이지만),
만약 우리가
 그분께 순종한다면
 (obey Him;
 그분께서 시키시는 대로 한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만족하실 것이며,
또 그분께서
 그분의 좋은 안색을
 들어 올리셔서
 각각의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확인해 주실 것이고,
 우리에게 보장하실 것이며,
 우리에게 보증하실 것이고
 (will … guarantee;
 보증인이 되실 것이고, 보증[장담, 약속]하실 것이고),
 우리에게 약속하실 것이며,
 또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요약하면,
 축복은
 하나님의 그 임재 안으로,
 곧 하나님에 대한(of)
 바로 그 누림 안으로
 사람들을 데려감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6장 안에 있는
 그 삼중의 축복은
 구약 안에 있는
 그 제사장들에 의한 축복의
 그 본입니다(the pattern).
이 본은
 그 진정한 축복이
 (the proper blessing;
 그 적절한[제대로 된, 본래의, 고유의] 축복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그 임재 안으로,
 그분의 얼굴의
 그 빛 안으로,
 또 그분의 표정의
 그 빛 비춤 안으로
 데려가서
그 결과(that)
 그들이
 그분의 은혜 안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may participate; 함께할 수 있게 하고)
 또 평안을
 가질 수 있게 함을
 계시합니다.
이것은
 확실히
 그 진정한 축복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How wonderful;
정말[참으로] 놀랍습니다)!
얼마나 기이합니까!

… 그 신성한 삼일의
 이 축복은 주로
 물질적인 것들과(to; …에)
 관련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로
 우리에게 은혜로우신,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또 우리에게 보여지시는
 그 삼일 하나님과(to; …께)
 관련됩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와
 또 하나님의
 그 사랑과
 또 그 성령의
 그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그 축복은
 사실상
 민수기 6장
 23절부터 27절까지 안에 있는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사도 바울의
 그 축복 안에서,
 그 삼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누림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오십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그 임재 안으로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not only brought)
 또한 하나님을
 그들 안으로
 모셔 왔습니다
 (but also brought).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
 그들을
 하나님의 그 임재 안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을
 그들 안으로
 사랑, 은혜, 또 교통으로(as),
 모셔 와서
 그 결과(so that)
 그들이
 그 삼일 하나님
 ―그 아버지, 그 아들, 또 그 영을
 누릴 수 있게 합니다.

사랑, 은혜, 또 교통은
 우리의 누림을 위한
 하나님의 세 단계들입니다
 ―사랑은
 내부에(within; 안에) 있고,
 은혜는
 표현되는 사랑이며,
 또 교통은
 우리 안으로의
 은혜의 전달입니다
 (transmission; 전파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그 근원인데(source),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원이시기(origin)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 은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그 과정인데,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그 표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 영의 그 교통은
 하나님의 그 사랑과 함께한
 (with; …을 가지는)
 주님의 그 은혜의
 그 분배인데
 그분들의(Their)
 신성한 미덕들과 함께
 (with; …을 가지고),
 그 삼일 하나님
 ―그 아버지, 그 아들, 또 그 영을
 우리가
 체험함과 또 누림을
 위합니다.

구약 안에서
 축복에 관한
 그 기본적인 생각은
 (thought; 사상은, 견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데려옴의
 그것입니다.
하지만 신약 안에서는
 그 사도가,
 하나님과 함께 오고
 (coming; 오면서, 와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그 임재 안으로
 데려왔을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하나님을
 그들 안으로
 모셔 왔습니다.
그 제사장들에 의한 축복의
 구약의 본과
 (pattern; 본보기와, 모범과, 원형과)
 또 사도들에 의한 축복의
 신약의 본 사이에
 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신약의 축복은
 훨씬
 (much; 많이, 정말, 매우, 대단히)
 더 높고
 또 더 깊습니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
 그들을
 하나님의 그 임재 안으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그들 안으로
 사랑, 은혜, 또 교통으로(as)
 모셔 오는 것입니다.

… 그 제사장들에 의한 축복의
 구약의 본과
 또 그 사도들에 의한 축복의
 신약의 본에 따라,
그 진정한(proper; 적절한) 축복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그 임재 안으로
 데려오고
하나님을
 그들 안으로
 은혜, 사랑, 또 교통으로(as)
 모셔 와서
그 결과(that)
 그들이
 그 삼일 하나님,
 곧 그 아버지, 그 아들, 또 그 영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그 삼일 하나님을 누림의
 한 문제입니다.

그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그 신성하신 삼일에 관한
 그 신성한 계시는
신학적인 연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비밀스러우시고 또 놀라우신
 신성하신 삼일 안에 계시는
 (in … Divine Trinity;
 신성하신 삼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 자신을
 그분의 선택된 백성 안으로
 분배하시는지
 이해함을 위하여
 (for the apprehending;
 깨달음을 위하여, 파악하기 위하여)
 있고,
이는(that)
 그분의
 선택받고 또 구속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그 사도의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의
 축복에 의하여
 가리켜지는 것과 같이,
 지금
 또 영원히
 과정을 거치신
 그 삼일 하나님 안에 참여하고
 (participate in;
 …을 함께하고),
 (그분을)
 체험하며,
 누리고,
 또 소유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과정을 거치시고
 내부에(inner; 안에)
 순환하시는
 (circulating;
 도시는, 퍼지시는, 돌아다니시는,
 순회하시는, 유포하시는, 유통하시는)
 그 삼일 하나님을
 매일매일
 누리고
 또 (그 삼일 하나님으로[with])
 축복받아야만 하며
그 결과(so that)
 우리가
 그분을
 그 우주의
 그 유일한 축복으로(as)
 다른 사람들 안으로
 분배할 수 있고
(이는)
 예수님의 그 증거,
 곧 예수님의 단체적인 그 표현을
 가지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의
 그 성취를 위합니다.

“때때로
 (Sometimes; 가끔)
 우리가
 우리의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될 수 있고
 또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 해 아래
 어떤 것도
 또 심지어
 그 영적인 분야(field; 싸움터) 안에 있는
 어떤 것도
 공허함들 중의 공허함인 것처럼
 (vanity of vanities;
 무의미한 것들 중의 무의미한 것인 듯이,
 헛되고 헛된 것처럼)
 우리에게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that nothing is real;
 실질적이지[현실적이지] 않다고,
 참되지 않다고, 실감 나지 않는다고),
 심지어 교회생활 안에서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this way;
 이렇게, 이쪽으로)
 느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우리는
 그 삼일 하나님께
 (to; …을 향하여)
 돌이켜야만 합니다
 (should turn to;
 돌아서야만[마음을 돌려야만]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재하는
 (real;
 참된, 진짜의)
 축복과
 또 몫이십니다
 (portion;
 분여(分與) 재산[상속분]이십니다).
그분을
 그 축복으로(as)
 가지는 것이
 어떠한 한 축복입니까!
그분의 얼굴,
 곧 그분의 임재를 가지고,
또 매일 그분을
 은혜로 누리는 것이
 어떠한 한 축복입니까!
더 많이
 우리가
 고통을 겪을수록,
더 많이
 우리가
 그분을
 은혜로(as)
 누립니다.
우리 위에
 웃으시고
 (smiling; 미소 지으시고),
 우리에게
 보장하시며(assuring us),
 또 우리에게
 확인해 주시는
 그분의 좋은 안색을
 (His countenance;
 그분의 표정을)
 가지는 것이
 어떠한 한 축복입니까!
또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하여,
 또 그분과 함께
 (with …; 그분으로)
 평안을 가지는 것이
 어떠한 한 축복입니까!
이분께서(This; 이는)
 우리의 축복이신
 그 삼일 하나님이십니다.
오, 그리스도의 그 은혜,
 하나님의 그 사랑,
 또 그 성령의 그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1일

엡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들의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영적인 축복으로
우리를 축복하셨습니다.

엡 1:22-23
또 하나님은
…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시어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입니다.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나실인의 서원에 관한
기록 후에
주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의 방식으로
그분의 백성에게
축복하는 말을
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는
삼일 하나님이시다.
삼일 하나님이신 그분은
그분의 신성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신다.
하나님께서
삼일이 아니시라면,
그분의 선민 안으로
그분 자신을
그들의 복으로
분배하실 수 없다.
복은 바로
그분의 선민 안으로 분배되신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그분의 선민을
축복하고자 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선민은
그분의 축복에 부합하는
수준에까지
올라갈 필요가 있다.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공허하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을 떠난다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조차 공허하다.
우주의 존재가
놀라운 기적이지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기적인 우주의 존재도
공허하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모든 것이
‘헛되며 헛되다’
(전 1:2).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실재이시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복이시다.
… 역사는
많은 부와 물질적인 것들을
얻었으나,
결국 하나님 없이는
모든 것이 공허함을 깨달은
사람들의 예들로
가득하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복이시며,
이 복은
신성한 존재가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서
우리 안으로
분배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영원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해 아래
그 무엇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는,
대대로 운행하는
신성하게 심어진
목적의식”
(확대역 성경)
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영을 지으셔서
사람이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담게 하셨다.
… 게다가 하나님은
영원,
곧 영원한 어떤 것에 대한
열망을
사람의 마음 속에 두시어
영원하신 분이신
하나님을 찾게 하셨다.
따라서 일시적인 것들은 결코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고,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목적의식을
만족시킬 수 있다
(고후 4:18, 아 1:4, 전 3:11).

에베소서 1장은
삼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변화된
사람들을 축복하시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 장은 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세 단계,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버지 안에서(3-6절),
아들 안에서(7-12절),
그 영 안에서(13-14절)
우리를 축복하시는지에 대해
말한다.
결국 하나님의 선민에게
복이 되는
신성한 삼일성의
이러한 흐름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산물이
있게 된다.
이러한 복된 흐름의 산물은
그리스도의 몸
곧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인
교회이다
(22-23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의 흐름이신
신성한 삼일성께서
하나님의 온 존재를
그분의 선민 안으로
분배하신 것의
총체적인 산물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 곧 총체이다.

민수기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또한
계수(計數)의 책이다.
… 새 예루살렘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는
열두 문(계 21:12)과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는
열두 기초석이 있다(14절).
더 나아가
생명나무는
열두 번의 열매를 맺는다
(22:2).
여러 번 나오는
‘12’라는 숫자 안에는
하나님의 선민의 축복이신
삼일 하나님이
감추어져 있고,
심지어 연합해 계신다.

성경 전체의 기록의
완결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매우 특별하고 주관적인 복이신
삼일 하나님이다.
성경 전체의 기록의
완결에 따르면
새 예루살렘은
12라는 수가
보여 주듯이,
신성한 삼일성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께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백성과 연합하시어
그들의 영원한 복이
되신 것이다.
이 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복은
민수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복의
궁극적인 성취이다.
오직 새 예루살렘이 올 때에야
이 복이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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