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우주에서 유일한 복은 삼일 하나님이며, 이 복은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도록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통해 우리 안으로 임하여 우리의 누림이 된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그분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어 자신을 표현할 집을 얻으시려는 그분의 가정 행정인데, 이 집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그분의 영원한 계획이며, 하나님의 신성한 분배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수단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분배는 믿는 이들을 신화(神化)하여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를 준비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끌어 오기 위한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심으로 그분 자신을 ‘사람화’하셨고, 그런 다음 생명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화’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가지신 의도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그분 자신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이다.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목표는 매일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시는 것이다.
민수기 6장 22절부터 27절까지에서 우리는 제사장들의 축복의 본을 본다. 이 복은 구약의 복도 아니고 신약의 복도 아니다. 오히려 이 복은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복이며,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이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아버지와 관련된다 ― 민 6:24.
아버지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온갖 방면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비교 엡 1:3). 아버지는 또한 그분의 능력 안에서 온갖 방면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그분의 이름 안에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셨다(요 17:11). 이것은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 안에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이다. 이어서 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삼일 하나님의 분배 안에 지켜지고 완전히 악한 자 밖에 있는 그러한 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아들과 관련된다 ― 민 6:25.
누가복음 1장 78절에서, 주 예수님께서 곧 태어나려 하실 때 사가랴는 “돋는 해가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임하여”라고 신언하였다. ‘돋는 해’는 신성한 삼일성 중에서 아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육체 되심이 빛을 비추는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민수기 6장 25절에서 ‘얼굴’이라는 단어는 임재를 의미한다. 우리를 비추는 얼굴을 가지신 아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임재이시다.
민수기 6장 25절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요점이 함께 더해질 때,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4, 16, 17절의 말씀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육체 되심은 그분의 임재의 비춤이었으며, 이러한 비춤과 함께 은혜가 있었다. 이 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 은혜는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이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그 영과 관련된다 ― 민 6:26.
얼굴은 사람의 임재를 의미하고, 표정은 사람의 표현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에게 밝은 표정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확증하고 보증하고 약속하며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얼굴로 오셨으며, 성령은 하나님의 표정으로 오신다. 우리가 성령을 슬프시게 하면 그분의 표정은 어두워질 것이지만(엡 4:30),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면 성령은 우리에 대해 기뻐하실 것이며, 밝은 표정을 지으시면서 우리에게 확증하시고 보증하시고 보장하시고 약속하시며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있는 복은 민수기 6장 22절부터 27절까지에 있는 복과 동일하다. 이 복은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복이며,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이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생명의 원천이시자 빛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다 ― 민 6:24.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집의 기름진 것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 민 6:25.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기쁨의 강이신 성령의 교통이다 ― 민 6:26.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생명이 되신 주님 자신이고(요 1:17, 고전 15:10),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며(요일 4:8, 16), 그 영의 교통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그 영 자신이다 ― 고후 13:14.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서 주님의 은혜가 먼저 언급된 것은 이 책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 그리스도의 은혜를 순환시키시고 전달하시는 성령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 안에서 공급이 되신다.
교회생활 전체가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달려 있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계시된 것과 같이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삼일성의 흐름이 곧 우리의 영적 맥박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축복에서 삼일 하나님은 사람들의 누림을 위해 사람들에게 오신다. 바울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람들 안으로 이끌었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은 한 면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사랑과 은혜와 교통이신 하나님을 그들 안으로 이끌어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삼일 하나님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사랑과 은혜와 교통은 우리의 누림을 위해 계시는 하나님의 세 단계이다. 곧 사랑은 안에 있는 것이고, 은혜는 사랑이 표현된 것이며, 교통은 은혜를 우리 안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근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원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영의 교통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삼일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그분의 신성한 미덕들을 체험하고 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신성한 계시는 신학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비밀스럽고 놀라운 신성한 삼일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 자신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가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 한 축복에서 가리키듯이,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이제부터 영원토록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께 참여하고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며 소유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과정을 거치시고 내적으로 순환하시는 삼일 하나님을 반드시 매일 누리며 이러한 삼일 하나님을 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주의 유일한 복이신 그분을 다른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여 예수님의 증거, 곧 예수님의 단체적인 표현을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새 예루살렘 안에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이 있다. 이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고’, ‘강의 이쪽과 저쪽에는 생명나무가 있었다’ ― 계 22:1-2상.
영원 안에서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 곧 어린양-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보좌에서 우리의 공급과 만족을 위해 생명나무와 함께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등이신 어린양은 빛이신 하나님으로 빛을 비춤으로써, 신성한 빛의 표현인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성을 밝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양과, 생명수로 상징되시는 그 영이신 삼일 하나님은 영원토록 그분 자신을 (보좌의 권위로 암시되고 있는) 그분의 머리의 권위 아래서 그분께서 구속하신 이들에게 분배하신다.
새 예루살렘의 길은 순금이고(계 21:21), 생명수의 강은 새 예루살렘의 길 가운데로 흐른다(22:1). 금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성한 생명이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의 일상생활을 위한 유일한 길인 신성한 본성 안에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본다.
성경 전체의 기록의 최종 완성인 새 예루살렘은 신성한 삼일성―아버지와 아들과 영―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께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백성과 연결되시고 연합되시고 합병되시어 그들의 영원한 복이 되신 것이다. 이러한 복은 민수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복의 궁극적인 성취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실망하면서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해 아래 있는 모든 것과 심지어 영적인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허무 중의 허무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실재가 아니며 심지어 교회생활 안에 있는 것도 실재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느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로 돌이켜야만 한다. 그분은 우리의 참된 복과 몫이시다. 그분을 복으로 갖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그분의 얼굴 곧 그분의 임재를 갖고, 매일 그분을 은혜로 누리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우리는 고난을 겪을수록 은혜이신 그분을 더 많이 누린다. 우리에게 미소 짓고 보증하며 확증하는 그분의 표정을 갖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또한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해, 그분과 함께 평안을 갖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이것이 우리의 복이신 삼일 하나님이다. 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란다!” ― 민수기 라이프 스타디, 11장,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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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어린양은 새 예루살렘에서 중심이시며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신다. 어린양은 또한 등이시다(계 21:23). 구속하시는 어린양께서 빛을 비추는 등이시다. 우리를 구속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 빛을 비추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그분의 구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 또한 그분의 구속이 없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빛 비추시는 것을 체험할 수 없다.
우리가 빛과 구속하는 피를 체험하는 목표와 결과는 우리가 주님의 권위 아래로 이끌리는 것이다. 구속하시는 이분과, 이분 안에 계시는 빛이신 하나님은 보좌 위에 계신다(계 22:1). … 아내와 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의 관계에서 둘 중 누구도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 아래 있지 않고 둘 모두가 스스로 머리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만일 우리가 주님께 나아간다면, 주님은 우리 안에서 빛을 비추시는 분이 되실 것이고, 우리는 빛 안으로 이끌릴 것이다. 그러면 우리 둘 모두는 우리가 이기적이고 천연적이며 혼적이고 심지어 육체에 속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우리 각자가 자신이 옳다고 느낀다 할지라도, 일단 주님께서 빛을 비추시면 우리는 우리 둘 다 철저히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빛 안으로 이끌릴 때 우리의 참된 상태를 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자동으로 주님의 구속을 적용할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또한 구속하시는 분이실 것이다. 만일 아내와 내가 모두 주님을 실지로 적용한다면, 우리 둘 다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가 우리의 가정생활에 있을 것이고,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참된 교회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체험에서 그리스도께서 보좌 위에 계실 때, 우리에게 생명수의 강의 흐름이 있다. 생명수의 강은 보좌에서 흘러나온다(계 22:1). 우리가 보좌 위에 계시는 중심이신 그리스도의 빛 비추심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리스도의 통치를 실지적으로 체험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모든 충만과 신성한 생명의 풍성을 체험할 것이다. 살아 있는 흐름이 우리 안에 항상 있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우리는 생명나무를 갖는다. 생명나무는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이다(계 22:2). 생명나무는 강 양쪽에서 자라며 열두 번 열매를 맺는데 달마다 열매를 맺는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흐름이 있을 때 우리가 풍성하고 신선한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에게 이러한 흐름이 있다면, 우리는 또한 성의 모든 지체와 교통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흐름은 우리를 성의 모든 부분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 성에는 오직 하나의 길만 있고, 이 길에 의해 우리는 성의 모든 부분에 도달할 수 있다. 이 길이 교통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통은 흐름과 함께한다. 나는 날마다 어떤 형제와 함께 봉사하면서 심지어 그와 함께 생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명수의 강을 누리지 않는다면, 나는 그와 교통할 수 없고 그도 나와 교통할 수 없다. 어떤 외적인 접촉은 가능하겠지만, 내적으로 서로를 접촉하려면 흐름이 필요하다.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 그분을 접촉해야 한다. 그분은 등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비추실 것이고 하나님의 빛 안으로 이끄실 것이다. 그분은 어린양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고, 그분의 구속을 우리에게 한 번 더 적용하실 것이다. 그분은 보좌 위에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머리의 권위와 지배 권위를 깨닫게 하실 것이고,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게 하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님을 체험한 결과는 놀라운 흐름이다. 놀라운 흐름은 풍성한 생명 공급과 신성한 길과 영적인 교통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흐를 것이다.
5일
신성한 삼일성을 완전히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에 참여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신성한 삼일성이 신학의 교리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근원이고,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과정이다. 사랑이 흘러나올 때 은혜가 된다. 그다음 성령의 교통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전달, 곧 은혜의 교제이다. 사랑은 아버지 하나님이고, 사랑의 넘쳐흐름인 은혜는 아들 그리스도이며, 교통은 은혜이신 아들의 존재와 사랑이신 아버지의 존재를 전달하시는 성령의 전달이다. 성령은 우리의 존재 안으로 신성한 풍성을 전달하시며, 이 전달이 교통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처럼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시는 신성한 삼일성을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운행하심은 매우 조용하지만 매우 활발하고 효력이 있다. 전기는 조용하게 흐르지만 매우 활발하고 효력이 있다. 전기의 흐름은 전기의 운행이다.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랑과 은혜와 교통은 우리 안에서 일종의 흐름을 형성한다. 이 흐름이 신성한 삼일성의 순환이다.
신성한 삼일성에는 근원이 있고 과정이 있으며 흐름이 있다. 이 순환의 근원과 원천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순환의 과정과 넘쳐흐름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표현하시고 전달하신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근원인 아버지의 사랑에서 나온다. 흐름은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교통과 전달과 순환이신 성령이다.
우리 안에는 두 개의 순환이 있다. 한 순환은 우리 육신 안에서 피가 순환하는 것이고, 다른 순환은 우리의 영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께서 순환하시는 것이다. 이 두 순환 중 어느 하나가 없다면, 우리는 육신적으로 죽든 혹은 영적으로 죽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우리에게 이런 내적이고도 영적인 순환을 상세하게 묘사해 준다. 이 순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우리에게 공급을 준다. 이것은 전기의 흐름이 도시 전체의 동력 공급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오래전에 뉴욕시에 전기의 흐름이 일정 시간 동안 끊겼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뉴욕시의 모든 생활이 멈추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예시이다. 우리는 교회생활 전체가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달려 있음을 보아야 한다. 교회생활 전체는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그 영의 교통이 우리의 영 안에서 전류처럼 흐르는 것에 달려 있다.
많은 때 내가 말씀을 공급하며 전하는 동안, 나에게는 신성한 전류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내적인 느낌이 있다. 내 안에서 흐름이 멈추면, 나에게는 말할 것이 없다. 우리가 말할 때 그 영을 놓친다면, 우리의 말함은 공허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우리 안의 흐름이 끊어진다면, 우리가 듣는 것도 공허할 것이다. 우리는 흐름 안에서 말하고 흐름 안에서 들어야 한다. 이 흐름은 성령의 전달이고, 이 전달은 삼일 하나님의 사랑의 넘쳐흐름인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해 주는 교통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계시된 것과 같이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삼일성의 흐름이 곧 우리의 영적 맥박이다.
4일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의 이 삼중 축복은 삼일 하나님과 연관된다. 왜냐하면 이 절에서 우리는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을 얻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도 우리는 삼중의 축복, 즉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분이 민수기 6장 끝에서 선포한 축복을 받는다. 이 삼중 축복에서 삼일 하나님이 암시된다.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까지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아버지와 관련된 복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아들과 관련된 복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그 영과 관련된 복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레위인 제사장들은 틀림없이 이 축복을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의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다.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까지에서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누림이 없는 축복이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서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축복만이 아니다. 우리는 삼일의 신격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하나님을 소유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실상 사랑은 하나님이고 은혜는 그리스도이며 교통은 성령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은혜이신 아들 하나님과 교통이신 영 하나님을 소유한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단지 그분에게서 혹은 그분에 의해 받은 축복만이 아니다.
신약에서 참된 축복은 삼일 하나님 자신이다. 이 축복은 삼중으로서, 은혜와 사랑과 교통의 축복이다. 근원인 사랑과 과정인 은혜와 전달인 교통으로서의 삼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달하시어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과 누림이 되신다. 이제 우리는 실지적으로 온종일 삼일 하나님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신약의 축복이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생명이 되신 주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다. 그 영의 교통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그 영 자신이다. 이들은 분리된 셋이 아니라 하나의 세 방면이다. 이것은 마치 주님과 하나님과 성령께서 분리된 세 하나님이 아니라 ‘나누어지지 않고 나눌 수도 없는 동일한 한 하나님의 세 위격들’(필립 샤프)인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은 근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원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영의 교통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께서 주님과 하나님의 전달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삼일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그분의 신성한 미덕들을 체험하고 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서 주님의 은혜가 먼저 언급된 것은 이 책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빗나가고 혼돈되었지만 격려를 받고 회복된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세 가지 미덕들―사랑, 은혜, 교통―을 지닌 신성한 속성과 세 신성한 위격들―아버지, 아들, 영―을 지니신 삼일 하나님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사도는 한 문장 안에서 이 신성하고 보배로운 것들을 모두 사용하여, 사랑이 가득하고 친밀한 그의 서신을 끝맺었다.
3일
민수기 6장의 복의 세 번째 부분은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26절)라고 말한다. 이 복에서 우리는 얼굴과 밝은 표정을 본다. 이 둘에는 차이가 있다. 얼굴은 사람의 임재를 의미하고, 표정은 사람의 표현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에게 밝은 표정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확증하고 보증하고 약속하며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얼굴로 오셨으며, 성령은 하나님의 표정으로 오신다. 에베소서 4장 30절은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다. 우리가 성령을 슬프시게 하면 그분의 표정은 어두워질 것이지만,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면 성령은 우리에 대해 기뻐하실 것이며, 밝은 표정을 지으시면서 우리에게 확증하시고 보증하시고 보장하시고 약속하시며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아버지는 복을 주시고 아들은 비추시며 성령은 밝은 표정을 하신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분배되실 때,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얼굴을 갖고 또한 그분의 표정을 갖는다. 그분은 우리를 기뻐하시면서 우리에게 보증하시고 확증하시며 보장하시고 약속하시며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삼일 하나님 안에 지켜지고, 삼일 하나님은 우리의 은혜가 되시며, 우리는 평안을 가진다.
민수기 6장 23절부터 26절까지에는 물질적인 복에 관한 언급이 없다. 이 절들에서 주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을 좋은 땅으로 이끄실 것이고, 그들 각 사람에게 그 땅을 몫으로 주실 것이며, 그들을 기근에서 지켜 주시고 그들에게 비를 내려 주실 것이며, 그들을 원수들에게서 지켜 주실 것이고, 그들을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여기서의 복은 그러한 종류의 복이 아니다.
그렇다면 민수기 6장의 복은 무엇인가? 이 복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위격으로 계신 삼일 하나님이다. 아버지 안에서 우리는 복을 받고 삼일 하나님 안에 지켜진다. 아들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갖고 그분을 은혜로 누린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표정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는 밤낮으로 평안을 누린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 이 절의 복은 사실상 민수기 6장 23절부터 26절까지의 복과 같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생명이 되신 주님 자신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며, 그 영의 교통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그 영 자신이다.
민수기 6장 23절부터 26절까지의 복과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의 복은 모두 외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복은 뛰어난 직업이나 좋은 집이나 고등 교육이나 좋은 가정생활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이 복은 교회 안에서 어떤 종류의 지위를 갖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실망하면서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해 아래 있는 모든 것과 심지어 영적인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허무 중의 허무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실재가 아니며 심지어 교회생활 안에 있는 것도 실재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느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로 돌이켜야만 한다. 그분은 우리의 참된 복과 몫이시다. 그분을 복으로 갖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그분의 얼굴 곧 그분의 임재를 갖고, 매일 그분을 은혜로 누리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우리는 고난을 겪을수록 은혜이신 그분을 더 많이 누린다. 우리에게 미소 짓고 보증하며 확증하는 그분의 표정을 갖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또한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해, 그분과 함께 평안을 갖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이것이 우리의 복이신 삼일 하나님이다. 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란다!
2일
민수기 6장의 축복에서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24절)는 아버지와 관련되고,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25절)는 아들과 관련되며,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26절)는 성령과 관련된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아들은 우리에게 비추시며, 성령은 우리에게 밝은 표정을 하신다. 그 결과 우리는 지켜지고, 은혜를 받으며, 평안을 가진다.
민수기 6장의 복은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복이며, 이 복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복이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선물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객관적으로만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단계적으로 조금씩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내가 주님께 어떤 복을 받았는지를 여러분이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내가 주님께 받은 유일한 복은 나의 삼일 하나님입니다. 나의 삼일 하나님께서 나의 복이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버지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온갖 방면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아버지는 또한 그분의 능력 안에서 온갖 방면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다.
민수기 6장 24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요한복음 17장 11절에서 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그분의 이름 안에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이것은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 안에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이다. 삼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고 계실 때, 우리는 분배하시는 분 안에 지켜진다. 이어서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우리가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 안에 지켜질 때, 원수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 안에 지켜지고 완전히 악한 자 밖에 있는 그러한 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민 6:25). 누가복음 1장 78절에서, 주 예수님께서 곧 태어나려 하실 때 사가랴는 “돋는 해가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임하여”라고 신언하였다. ‘돋는 해’는 신성한 삼일성 중에서 아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육체 되심이 빛을 비추는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육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얼굴을 보았고 그분의 영광을 보았으며(요 1:14), 그분은 끊임없이 우리를 비추고 계신다. 그분은 가시는 곳마다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을 비추는 큰 빛이셨다(마 4:16). 왜냐하면 그분께서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이다(요 8:12).
우리를 비추는 얼굴을 가지신 아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임재이시다. 하나님과 그분의 임재는 볼 수 없으나 그분의 육체 되심을 통하여 그분은 비추는 해가 되셨다. 이 비추는 해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임재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비추고 있다. 변형의 산에서 주님의 제자들 중 몇몇은 영광 안에 계신 주님을 보았다.
민수기 6장 25절은 또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요점이 함께 더해질 때,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4, 16, 17절의 말씀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육체 되심은 그분의 임재의 비춤이었다. 이러한 비춤과 함께 은혜가 있었다.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니, 은혜…가 충만하였다.”(14절)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심지어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가 되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가 되신다는 의미이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며(고후 13:14상), 이 은혜는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을 때 은혜를 얻는다. 삼일 하나님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날마다 우리는 은혜이신 그분을 누린다.
신언노트, 2022 12 25
삼일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성취하도록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통해
우리 안으로 임하는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복
삼일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신성한 삼일의
우리 안으로의 신성한 분배함을 통한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
성경 육십육 권의 계시 전체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신성한 삼일께서는
하나님의 분배를 위해,
즉 하나님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나누어 주기 위해
계신다.
하나님의 강한 의도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갈망은
하나님 자신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생명과 생명 공급과 모든 것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배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분께서는
삼일이셔야 한다.
기원이신 아버지께서는
원천이시고,
표현이신 아들께서는
샘이시며,
전달이신 그 영께서는
흐름이시다.
흐름이신 그 영께서는
삼일 하나님의
도달과 적용이시며,
삼일 하나님 자신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나누어 주신다.
예레미야서 2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생수의 원천이라고
언급하신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이들 안에서
샘솟아 올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샘물이시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에서
그 영께서는
생명수의 흐름과 강이시다.
이 과정,
이 샘은
하나의 흐름을 가져오는데,
이 흐름은 바로
삼일 하나님의 도달과 적용이신
그 영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고 나누어 주시기 위해
삼일이심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목표가
매일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시는 것임을
보아야 한다.
비록 우리 안에
자아라는 요소가
너무 많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들여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연합시키신다.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위대한 기적이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는,
기적적으로 우주가 존재하는 것도
헛된 것이다.
하나님 없이는
모든 것이
‘허무 중의 허무이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실재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복이시다.
우리가
온 우주를 얻어도
하나님을 놓친다면,
우리는
가장 가련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복이시며,
이 복은
그분께서
그분의 신성한 삼일,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서
우리 안으로
신성한 존재를 분배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다.
에베소서 1장은
삼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신성한 삼일 안에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변화된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가를
보여 준다.
이 장은 주로
하나님께서
신성한 삼일 안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세 단계에 관한 장이다.
즉 어떻게 하나님께서
아버지 안에서,
아들 안에서,
그 영 안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지에 관한 장이다.
결국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에게
복이 되시는
신성한 삼일의
그러한 흐름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있다.
이처럼 복된 흐름에서 산출된 것이
바로 교회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신성한 삼일이
한 흐름으로서
하나님의 온 존재를
그분께 선택받은 백성 안으로
분배하신 것의
총체적인 결과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는 열두 문과,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는 열두 기초가 있다.
더 나아가 생명나무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다.
이 ‘열둘’ 가운데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복으로서
감추어져 계시고,
심지어 연합되어 계신다.
온 성경의 최종 완성인
새 예루살렘은
신성한 삼일,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12’라는 숫자에서 보여 주듯이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변화된 백성과
연합하시어
그들의 복이 되신 것이다.
이 복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복은
민수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복의
궁극적인 성취이다.
오직 새 예루살렘이 올 때에만
이 복이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온 우주에서 유일한 복은
삼일 하나님이며,
이 복은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도록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통해
우리 안으로 임하여
우리의 누림이 된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그분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어
자신을 표현할
집을 얻으시려는
그분의 가정 행정인데,
이 집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그분의 영원한 계획이며,
하나님의 신성한 분배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수단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분배는
믿는 이들을 신화(神化)하여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를 준비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끌어 오기 위한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그분 자신을 ‘사람화’하셨고,
그런 다음
생명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화’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가지신 의도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그분의 신성한 삼일 안에서
그분 자신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이다.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목표는
매일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시는 것이다.
민수기 6장의 축복에서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는
아버지와 관련되고,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는
아들과 관련되며,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는
성령과 관련된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아들께서는
우리에게 비추시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밝은 표정을 하신다.
그 결과 우리는
지켜지고,
은혜를 받으며,
평안을 가진다.
민수기 6장의 복은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복이며,
이 복은
신성한 삼일 안에서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복이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선물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객관적으로만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단계적으로
조금씩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내가
주님께
어떤 복을 받았는지를
여러분이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내가
주님께 받은
유일한 복은
나의 삼일 하나님입니다.
나의 삼일 하나님께서
나의 복이십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온갖 방면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아버지께서는 또한
그분의 능력 안에서
온갖 방면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다.
민수기 6장 24절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요한복음 17장 11절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분의 이름 안에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이것은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 안에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이다.
삼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고 계실 때,
우리는
분배하시는 분 안에
지켜진다.
이어서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셨다.
우리가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 안에
지켜질 때,
원수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 안에 지켜지고
완전히 악한 자 밖에 있는
그러한 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
(민 6:25).
누가복음 1장 78절에서,
주 예수님께서
곧 태어나려 하실 때
사가랴는
“돋는 해가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임하여”
라고 신언하였다.
‘돋는 해’는
신성한 삼일 중에서
아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육체 되심이
빛을 비추는 방식으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육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얼굴을 보았고
그분의 영광을 보았으며,
그분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비추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을 비추는
큰 빛이셨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비추는
얼굴을 가지신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임재이시다.
하나님과 그분의 임재는
볼 수 없으나
그분의 육체 되심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비추는 해가 되셨다.
이 비추는 해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임재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비추고 있다.
변형의 산에서
주님의 제자들 중 몇몇은
영광 안에 계시는
주님을 보았다.
민수기 6장 25절은 또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요점이
함께 더해질 때,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4, 16, 17절의 말씀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육체 되심은
그분의 임재의 비춤이었다.
이러한 비춤과 함께
은혜가 있었다.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니,
은혜…가 충만하였다.”
(14절)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심지어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가 되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가 되신다는
의미이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이 은혜는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을 때
은혜를 얻는다.
삼일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날마다 우리는
은혜이신 그분을
누린다.
민수기 6장
22절부터 27절까지에서
우리는
제사장들의 축복의
본을 본다.
이 복은
구약의 복도 아니고
신약의 복도 아니다.
오히려 이 복은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복이며,
신성한 삼일 안에서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삼일 하나님이다.
민수기 6장의 복의
세 번째 부분은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26절)라고 말한다.
이 복에서 우리는
얼굴과
밝은 표정을
본다.
이 둘에는
차이가 있다.
얼굴은
사람의 임재를 의미하고,
표정은
사람의 표현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에게
밝은 표정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확증하고 보증하고 약속하며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얼굴로 오셨으며,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표정으로 오신다.
에베소서 4장 30절은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한다.
우리가
성령을
슬프시게 하면
그분의 표정은
어두워질 것이지만,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면
성령께서는
우리에 대해
기뻐하실 것이며,
밝은 표정을 지으시면서
우리에게
확증하시고 보증하시고
보장하시고 약속하시며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복을 주시고
아들께서는
비추시며
성령께서는
밝은 표정을 하신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분배되실 때,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얼굴을 가지고
또한 그분의 표정을 가진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면서
우리에게
보증하시고 확증하시며
보장하시고 약속하시며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삼일 하나님 안에 지켜지고,
삼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은혜가 되시며,
우리는
평안을 가진다.
민수기 6장
23절부터 26절까지에는
물질적인 복에 관한
언급이 없다.
이 절들에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들을
좋은 땅으로 이끄실 것이고,
그들 각 사람에게
그 땅을
몫으로 주실 것이며,
그들을
기근에서 지켜 주시고
그들에게
비를 내려 주실 것이며,
그들을
원수들에게서 지켜 주실 것이고,
그들을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여기서의 복은 그러한 종류의 복이 아니다.
그렇다면 민수기 6장의
축복은 무엇인가?
이 축복은
그 아버지로서의,
그 아들로서의,
또 그 영으로서의
그 위격(인격) 안에 계시는
그 삼일 하나님이다.
아버지 안에서
우리는
복을 받고
삼일 하나님 안에 지켜진다.
아들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지고
그분을
은혜로 누린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표정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는
밤낮으로
평안을 누린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
이 절의 복은 사실상
민수기 6장
23절부터 26절까지의
복과 같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생명이 되신
주님 자신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며,
그 영의 교통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그 영 자신이다.
민수기 6장
23절부터 26절까지의 복과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의 복은 모두
외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복은
뛰어난 직업이나
좋은 집이나
고등 교육이나
좋은 가정생활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이 복은
교회 안에서
어떤 종류의 지위를 가지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실망하면서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해 아래 있는 모든 것과
심지어 영적인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허무 중의 허무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실재가 아니며
심지어 교회생활 안에 있는 것도
실재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느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로
돌이켜야만 한다.
그분은
우리의 참된 복과 몫이시다.
그분을
복으로 가지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그분의 얼굴
곧 그분의 임재를 가지고,
매일 그분을
은혜로 누리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우리는
고난을 겪을수록
은혜이신 그분을
더 많이 누린다.
우리에게
미소 짓고 보증하며 확증하는
그분의 표정을 가지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또한 그분 안에서,
그분 곁에서(의해),
그분과 함께
평안을 가지는 것은
어떠한 축복인가!
이것이
우리의 복이신
삼일 하나님이다.
오,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란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의
이 삼중 축복은
삼일 하나님과 연관된다.
왜냐하면 이 절에서
우리가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을
얻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도
우리는
삼중의 축복,
즉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분이
민수기 6장 끝에서 선포한
축복을 받는다.
이 삼중 축복에서
삼일 하나님이 암시된다.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까지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아버지와 관련된
복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아들과 관련된
복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그 영과 관련된
복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레위인 제사장들은 틀림없이
이 축복을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의 축복과는
비교할 수 없다.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까지에서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누림이 없는 축복이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서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축복만이 아니다.
우리는
삼일의 신격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하나님을 소유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실상
사랑은 하나님이고
은혜는 그리스도이며
교통은 성령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은혜이신 아들 하나님과
교통이신 영 하나님을
소유한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단지
그분에게서
혹은 그분에 의해
받은 축복만이 아니다.
신약에서
참된 축복은
삼일 하나님 자신이다.
이 축복은
삼중으로서,
은혜와 사랑과 교통의
축복이다.
근원인 사랑과
과정인 은혜와
전달인 교통으로서의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달하시어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과 누림이
되신다.
이제 우리는
실지적으로 온종일
삼일 하나님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신약의 축복이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우리에게 생명이신
주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다.
그 영의 교통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그 영 자신이다.
이들은
분리된 세 문제들(사안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것의 세 방면들이다.
이것은 마치
주님과 하나님과 성령께서
분리되신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오직 ‘나누어지지 않고
나눌 수도 없는
동일하신 한 하나님의
세 위격들’
(필립 샤프)이신 것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이
근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원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표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영의 교통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께서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그 전달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삼일 하나님―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그분의 신성한 미덕들을
체험하고
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서
주님의 은혜가
먼저 언급된 것은
이 책이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빗나가고 혼돈되었지만
격려를 받고 회복된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세 가지 미덕들
―사랑, 은혜, 교통―을 지닌
신성한 속성과
세 신성한 위격들
―아버지, 아들, 영―을 지니신
삼일 하나님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사도는
한 문장 안에서
이 신성하고 보배로운 것들을
모두 사용하여,
사랑이 가득하고 친밀한
그의 서신을
끝맺었다.
신성한 삼일을
완전히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에
참여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신성한 삼일이
신학의 교리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근원이고,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과정이다.
사랑이 흘러나올 때
은혜가 된다.
그다음 성령의 교통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전달,
곧 은혜의 교제이다.
사랑은
아버지 하나님이고,
사랑의 넘쳐흐름인 은혜는
아들 그리스도이며,
교통은
은혜이신 아들의 존재와
사랑이신 아버지의 존재를
전달하시는
성령의 전달이다.
성령은
우리의 존재 안으로
신성한 풍성을 전달하시며,
이 전달이
교통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처럼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시는
신성한 삼일을
소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고(일하시고, 운행하시고) 계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움직이심은
매우 조용하지만
매우 활발하고
효력이 있다.
전기는
조용하게 흐르지만
매우 활발하고
효력이 있다.
전기의 흐름은
그 전기의 움직임이다.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랑과 은혜와 교통은
우리 안에서
일종의 흐름을 형성한다.
이 흐름이 신성한 삼일성의 순환이다.
신성한 삼일에는(삼일과 함께)
그 근원, 그 과정, 그 흐름이 있다.
이 순환의 근원과 원천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순환의 과정과 넘쳐흐름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표현하시고 전달하신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근원인 아버지의 사랑에서
나온다.
흐름은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교통과 전달과 순환이신
성령이다.
우리 안에는
두 개의 순환들이 있다.
한 순환은
우리 육신 안에서
피가 순환하는 것이고,
다른 순환은
우리의 영 안에서
그 신성하신 삼일께서
순환하시는 것이다.
이 두 순환 중
어느 하나가 없다면,
우리는
육신적으로든
혹은 영적으로든
죽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우리에게
이런 내적이고도 영적인 순환을
상세하게 묘사해 준다.
이 순환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우리에게
공급을 준다.
이것은
전기의 흐름이
도시 전체의
동력 공급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오래전에 뉴욕시에
전기의 흐름이
일정 시간 동안 끊겼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뉴욕시의 모든 생활이
멈추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예시이다.
우리는
교회생활 전체가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달려 있음을
보아야 한다.
교회생활 전체는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그 영의 교통이
우리의 영 안에서
전류처럼 흐르는 것에
달려 있다.
많은 때 내가
말씀을
공급하며 전하는 동안,
나에게는
신성한 전류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내적인 느낌이 있다.
내 안에서
흐름이 멈추면,
나에게는
말할 것이 없다.
우리가 말할 때
그 영을 놓친다면,
우리의 말함은
공허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우리 안의
흐름이 끊어진다면,
우리가 듣는 것도
공허할 것이다.
우리는
흐름 안에서 말하고
흐름 안에서 들어야 한다.
이 흐름은
성령의 전달이고,
이 전달은
삼일 하나님의 사랑의 넘쳐흐름인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해 주는 교통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계시된 것과 같이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삼일의 흐름이
곧 우리의 영적인 맥박이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시고
그대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라는 말씀은
생명의 원천이시자 빛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다
― 민 6:24.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그분의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집의 기름진 것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 민 6:25.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밝은 표정을 하시고
그대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기쁨의 강이신
성령의 교통이다
― 민 6:26.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생명이 되신
주님 자신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이며,
그 영의 교통은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그 영 자신이다.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
그리스도의 은혜를
순환시키시고 전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 안에서
공급이 되신다.
교회생활 전체가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달려 있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축복에서
삼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누림을 위해
사람들에게 오신다.
바울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람들 안으로 이끌었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은
한 면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사랑과 은혜와 교통이신 하나님을
그들 안으로 이끌어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삼일 하나님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사랑과 은혜와 교통은
우리의 누림을 위해 계시는
하나님의 세 단계이다.
곧 사랑은
안에 있는 것이고,
은혜는
사랑이 표현된 것이며,
교통은
은혜를
우리 안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신성한 계시는
신학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비밀스럽고 놀라운
신성한 삼일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 자신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가
고린도의 믿는 이들에게 한
축복에서 가리키듯이,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이제부터 영원토록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께 참여하고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며
소유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과정을 거치셨고
내적으로 순환하고 계시는
삼일 하나님을
날마다 누리며
또 삼일 하나님으로
축복받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주의 유일한 축복이신
그분을
다른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여
예수님의 증거,
곧 예수님의 단체적인 표현을 얻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양은
새 예루살렘에서
중심이시며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신다.
어린양은 또한
등이시다.
구속하시는 어린양께서
빛을 비추는 등이시다.
우리를 구속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는 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
빛을 비추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그분의 구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
또한 그분의 구속이 없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빛 비추시는 것을
체험할 수 없다.
우리가
빛과 구속하는 피를 체험하는
목표와 결과는
우리가
주님의 권위 아래로
이끌리는 것이다.
구속하시는 이분과,
이분 안에 계시는 빛이신 하나님께서
왕좌 위에 계신다.
아내와 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의 관계에서
둘 중 누구도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 아래 있지 않고
둘 모두가 스스로
머리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만일 우리가
주님께 나아간다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빛을 비추시는 분이 되실 것이고,
우리는
빛 안으로 이끌릴 것이다.
그러면 우리 둘 모두는
우리가 이기적이고 천연적이며
혼적이고 심지어 육체에 속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비록 우리 각자가
자신이 옳다고 느낀다 할지라도,
일단 주님께서
빛을 비추시면
우리는
우리 둘 다
철저히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빛 안으로 이끌릴 때
우리의 참된 상태를
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자동으로
주님의 구속을
적용할 것이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또한 구속하시는 분이실 것이다.
만일 아내와 내가 모두
주님을 실지로 적용한다면,
우리 둘 다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머리의 권위가
우리의 가정생활에 있을 것이고,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참된 교회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체험에서
그리스도께서
왕좌 위에 계실 때,
우리에게
생명수의 강의 흐름이 있다.
생명수의 강은
왕좌에서 흘러나온다.
우리가
왕좌 위에 계시는 중심이신
그리스도의 빛 비추심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리스도의 통치를
실지적으로 체험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모든 충만과
신성한 생명의 풍성을
체험할 것이다.
살아 있는 흐름이
우리 안에
항상 있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우리는
생명나무를 가진다.
생명나무는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이다.
생명나무는
강 양쪽에서 자라며
열두 번 열매를 맺는데
달마다 열매를 맺는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흐름이 있을 때
우리가
풍성하고 신선한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이 흐름을 가진다면,
우리는 또한
그 도시의 모든 지체들과
교통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 흐름이
우리를
그 도시의 각각의 모든 부분듵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는
오직 하나의 길만 있고,
이 길에 의해
우리가
그 도시의 각각의 모든 부분들에
도달할 수 있다.
이 길이
교통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통은
흐름과 함께한다.
나는 날마다
어떤 형제와 함께 봉사하면서
심지어 그와 함께 생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명수의 그 강을
누리고 있지 않는 한,
내가
그와 교통할 수 없고
그도
나와 교통할 수 없다.
어떤 외적인 접촉은
가능하더라도,
내적으로 서로 접촉하려면
그 흐름의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
그분을 접촉해야 한다.
그분께서
그 등이시다.
그분께서
우리를 비추실 것이고
하나님의 빛 안으로
이끄실 것이다.
그분께서
어린양이시다.
그분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고,
그분의 구속을
우리에게
한 번 더
적용하실 것이다.
그분께서
그 왕좌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
우리가
그분의 머리의 권위와 지배 권위를
깨닫게 하실 것이고,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게 하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님을 체험한 결과는
놀라운 흐름이다.
놀라운 흐름은
풍성한 생명 공급과
신성한 길과
영적인 교통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흐를 것이다.
새 예루살렘 안에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이 있다.
이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왕좌에서
흘러나오고’,
‘강의 이쪽과 저쪽에는
생명나무가 있었다’
― 계 22:1-2상.
영원 안에서
그 왕좌에 앉아 계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 어린양-하나님,
곧 우리의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왕좌로부터
우리의 공급과 또 만족을 위해
생명나무를 따라
생명수의 강이 나온다.
그 등이신 어린양께서
빛이신 하나님으로
빛을 비춤으로써,
신성한 빛의 표현인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성을
밝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어린양과,
생명수로 상징되시는 그 영이신
삼일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그분 자신을
(왕좌의 권위로 암시되고 있는)
그분의 머리의 권위 아래서
그분께서 구속하신 이들에게
분배하신다.
새 예루살렘의 길은
순금이고,
생명수의 강은
새 예루살렘의
길 가운데로 흐른다.
금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성한 생명이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의 일상생활을 위한
유일한 길인
신성한 본성 안에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본다.
성경 전체의 기록의
최종 완성인
새 예루살렘은
신성한 삼일
―아버지와 아들과 영―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께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백성과
연결되시고 연합되시고 합병되시어
그들의 영원한 복이 되신 것이다.
이러한 복은
민수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복의
궁극적인 성취이다.
1일
성경 육십육 권의 계시 전체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신 신성한 삼일성은 하나님의 분배를 위해, 즉 하나님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나누어 주기 위해 계신다. 하나님의 강한 의도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갈망은 하나님 자신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생명과 생명 공급과 모든 것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배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분은 삼일이셔야 한다.
기원이신 아버지는 원천이시고, 표현이신 아들은 샘이시며, 전달이신 그 영은 흐름이시다. 흐름이신 그 영은 삼일 하나님의 도달과 적용이시며, 삼일 하나님 자신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나누어 주신다. 예레미야서 2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생수의 원천이라고 언급하신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 안에서 샘솟아 올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샘물이시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에서 그 영은 생명수의 흐름과 강이시다. 이 과정, 이 샘은 하나의 흐름을 가져오는데, 이 흐름은 바로 삼일 하나님의 도달과 적용이신 그 영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시고 나누어 주시기 위해 삼일이심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목표가 매일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시는 것임을 보아야 한다. 비록 우리 안에 자아라는 요소가 너무 많을지라도, 하나님은 시간을 들여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연합시키신다.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복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위대한 기적이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는, 기적적으로 우주가 존재하는 것도 헛된 것이다. 하나님 없이는 모든 것이 ‘허무 중의 허무이다’(전 1:2).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실재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복이시다. 우리가 온 우주를 얻어도 하나님을 놓친다면, 우리는 가장 가련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복이시며, 이 복은 그분께서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서 우리 안으로 신성한 존재를 분배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다.
에베소서 1장은 삼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변화된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가를 보여 준다. 이 장은 주로 하나님께서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세 단계에 관한 장이다. 즉 어떻게 하나님께서 아버지 안에서(3-6절), 아들 안에서(7-12절), 그 영 안에서(13-14절)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지에 관한 장이다. 결국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에게 복이 되시는 신성한 삼일성의 그러한 흐름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있다. 이처럼 복된 흐름에서 산출된 것이 바로 교회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다(22-23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신성한 삼일성이 한 흐름으로서 하나님의 온 존재를 그분께 선택받은 백성 안으로 분배하신 것의 총체적인 결과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는 열두 문(계 21:12)과,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는 열두 기초가 있다(14절). 더 나아가 생명나무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다(22:2). 이 ‘열둘’ 가운데 삼일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복으로서 감추어져 계시고, 심지어 연합되어 계신다.
온 성경의 최종 완성인 새 예루살렘은 신성한 삼일성,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12’라는 숫자에서 보여 주듯이 그분께 선택받고 구속받고 변화된 백성과 연합하시어 그들의 복이 되신 것이다. 이 복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복은 민수기 6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복의 궁극적인 성취이다. 오직 새 예루살렘이 올 때에만 이 복이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