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혼이라는 광야 안에 있는 성막인 교회생활에서, 좋은 땅의 실재로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전인 교회생활로 전진하기를 열망하신다.
성막과 성전은 교회의 두 방면을 예표한다.
열왕기상 8장 1절부터 11절까지는 성막이 성전에 하나로 합쳐진 것을 보여 준다. 성막은 광야를 옮겨 다니던 이동 가능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건축물의 전신인 데 비해, 성전은 예표에 있어서 하나님의 건축물의 최종 완결이다.
성막의 확대인 성전은 교회가 강해지고 안정된 것을 상징하고, 성전 안의 기구가 새롭게 되고 확대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성도들의 체험이 새롭게 되고 확대된 것을 상징한다. 성전의 크기와 성전 안에 있는 지성소의 크기는 성막과 그 안에 있는 지성소의 크기의 두 배였다. 더욱이 궤를 제외한 기구들과 집기들의 크기와 수도 그분의 확대된 표현을 위하여 크게 증가되었다.
성막은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혹은 여러 지방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예표하는 데 비해,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인 교회를 상징한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하나님의 경륜의 영광스러운 목표인 몸의 실재 안으로 우리를 이끄는 귀중한 절차이다.
유일한 사역은 하나님의 유일한 증거를 위해 있고, 하나님의 유일한 증거 곧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실현된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묘사된 몸은 한 지방에 있는 교회가 가져야 할 증거이다. 이 증거는 바로 몸의 증거이다. 오늘날 각 지방에 있는 교회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표현하는 증거여야 한다.
교회는 하나(oneness)의 증거를 위해 존재한다. 우리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를 언급할 때, 우리의 강조점은 교회에 있는 것이지 ‘지방’에 있지 않다. 교회가 소유한 생명은 하나(oneness)의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의 증거가 하나님의 최종적인 회복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것,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그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의 기능 발휘를 회복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이 건축의 일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생명나무로 체험하고 누림으로써 수행된다.
생명의 원칙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고(요 2:1-11), 생명의 목적은 하나님의 집 곧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12-22절). 그래서 주님은 “여러분이 이 성전을 허십시오.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다시 세울 것입니다.”(19절)라고 선포하셨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곧 그분의 물질적인 몸이 십자가에서 허물어짐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과 죄악을 짊어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속하시고 의롭다 하셨으며,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의 물질적인 몸을 허문 것은 또한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인 마귀를 멸망시킨 것이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옛 창조물과 옛사람과 육체와 사탄과 죄와 죄들과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후에는 온 우주가 깨끗하게 되었다.
주님의 물질적인 몸이 허물어지고 주님께서 삼 일 만에 다시 일어나신 것은 또한 그분께서 한 알의 밀로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불인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그분의 많은 믿는 이들 안으로 해방하시고 분배하시어 그분의 많은 믿는 이들을 하나님의 재생산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분의 물질적인 몸은 그분의 단체적이고 비밀한 몸으로 증가되었는데, 이 몸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성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인 교회이다.
‘거할 곳이 많습니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에 많은 지체가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해방하는 죽음에 의해 산출된 많은 밀알들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분배하는 부활에 의해 산출된 그리스도의 비밀한 몸의 많은 거할 곳들로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의 능력으로 부활 생명을 나타내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극도로 사랑하는 이들이 되어야만 한다.
다윗과 솔로몬은 하나님의 건축을 위하여 두 방면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다윗은 육체가 되신 때부터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시고 고난들을 받으시며 죽으실 때까지(구유부터 십자가까지)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솔로몬은 부활하시어 영광 안에 계시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시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그분께서 보좌에 앉으심과 이 땅에 있는 그분의 왕국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두 번째로 오심을 포함함)를 예표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건축하신다.
다윗은 젊어서부터 고난을 받았는데, 그는 고난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재료들을 마련하였고 합당한 터를 얻었으며 건축자인 솔로몬과 모든 조력자를 예비하였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재료들을 풍부하게 준비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시기 위해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공급하시는 것에 대한 예표이다.
다윗이 고난(대상 22:1, 14) 곧 시련 가운데 싸움에서 승리하여 준비를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시련 가운데 사탄과 그의 어둠에 속한 세력과 맞서 싸우는 삶을 사시면서 승리하시어(마 4:4, 7, 10) 하나님의 교회 건축을 위한 풍성한 공급을 준비하신 것에 대한 예표이다.
다윗이 받은 성전의 모형은 ‘하나님의 영으로 받은 모든 모형’(대상 28:12)이었다. “다윗이 말하였다. ‘이 모든 것 곧 모형의 모든 방면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쓰시어 나에게 분명히 알려 주신 것이다.’ ”(대상 28:19, 비교 고후 3:3).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은 이 모형에 따른 것이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 체계를 세운 것(대상 6:31-48, 23-26장)은 신약에서 그 영께서 교회 봉사의 질서를 세우신 것(고전 12:4-27)과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지체가 지켜야 할 그분의 몸 안에서의 질서를 세우신 것에 대한 예표이다.
교회의 청사진은 부활의 영, 곧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생명 주시고 복합되시고 내주하시는 영이다.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부활의 영 안에서 생활할 때, 다윗의 도안에 따라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것의 실재가 (그리스도의 하나님-사람의 생활과 죽음과 부활의 모든 성분과 함께)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
솔로몬의 이름은 ‘평화’라는 뜻이다. 이것은 교회가 소음이 조금도 없는 화평 가운데 ‘안식의 사람’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건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전 건축을 위해 사용된 각각의 돌은 원칙상 이미 산에서 떠 내져 손질된 것이었다. 따라서 망치나 도끼나 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성전은 조용한 가운데 건축되었다.
주님께 다룸을 받지 않은 (쉬지 않고 말하고, 말을 잘 듣지 않으며, 이처럼 생각이 새롭게 되지 않은) 형제가 장로가 된다면, 교회는 망치나 도끼나 쇠 연장이 내는 소음으로 가득할 것이다. 어떤 성도들이 다른 이의 기도를 묻어 버리려고 기도하면서 서로 싸우는 것은 일종의 ‘소음’일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이 비평하고 판단하며 논쟁하고 반대하는 것을 들을 때, 물러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즉 우리의 영 안으로 피해 들어가고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성전은 조용한 가운데 건축된다.
궤가 안치된 후에, 다윗이 여호와의 집에서 찬양하는 봉사를 맡긴 이들은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집을 건축할 때까지 회막 앞에서 찬양으로 섬겼다.
우리는 ‘왕과 함께 거주하며 왕을 위해 일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그분을 누린다. 그럴 때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건축해 넣으시어 우리를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 있는 기둥들이 되도록 온전하게 하신다.
우리는 (참솔로몬이시자 더 큰 솔로몬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부활의 능력으로, 그리고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부활하게 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누림으로써, (참다윗이시자 더 큰 다윗이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과 기도의 사람이신 그분의 하나님-사람의 생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참성전이자 더 큰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의 생각과 길보다 높다. 우리는 자신의 길과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 돌아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 안에서 그분을 누리는 길을 취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관념을 바꾸어,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시기를 갈망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열매 맺는 것은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말씀을 공급하는 것은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은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기는 이들이 되도록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비결은 생명나무이신 하나님을 누리는 길을 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유일한 갈망은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인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곧 그리스도 안에서(요 2:19-22), 교회 안에서(딤전 3:15, 고전 3:16-17, 고후 6:16), 우리의 영 안에서(엡 2:22), 궁극적으로 새 예루살렘 안에서(계 21:22) 여호와께서 좋으시다는 것을 맛보고 깨닫는다(시 34:8).
우리는 하나님의 처소인 그분의 집, 그분의 성전, 그분의 영광이 거하고 머무르며 나타나는 곳을 사랑해야 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여 온 한 가지 / 그것을 구하리니 / 내 평생에 / 여호와의 집에 거주하며 /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 그분의 성전에서 여쭙는 것이라네.”(시 27:4) 여호와의 집은 아버지의 나타나심과 만족과 안식을 위한 확대되고 우주적인,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합병체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는 ‘위치를 정하신 하나님’을 우리를 적시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하나님의 기쁨의 강으로, 우리에게 음식을 주고 빛을 비추는 생명의 원천과 빛으로 누린다.
“저는 하나님의 제단으로, / 저의 큰 기쁨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렵니다. / 오, 하나님, 저의 하나님! / 저는 수금 타며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 시 43:4.
하나님의 집 곧 그분의 성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 곧 하나님의 임재의 구원을 누리며(시 42:5), 그 결과 그분은 우리 얼굴의 구원이 되실 수 있다(11절).
“주님의 집에 거주하는 이들은 복이 있으니 / 그들이 늘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셀라 / 주님께 힘을 얻고 / 그 마음에 시온을 향한 대로가 있는 이는 복이 있습니다.” ― 시 84:4-5.
“영원무궁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렵니다.” ― 시 145:2하.
“내가 사는 동안 여호와를 찬양하며 / 내가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라.” ― 시 146:2.
“주님은 거룩하신 분, /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이십니다.” ― 시 22:3.
“예수님을 통하여 계속 하나님께 찬양의 희생 제물, 곧 그분의 이름을 시인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립시다.” ― 히 13:15, 빌 2:11.
Hits: 39
7 replies on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하여 성막인 교회생활에서 성전인 교회생활로 주님과 함께 전진함”
6일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관념을 바꾸어, 하나님께서 오직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것만을 갈망하신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일체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얼마나 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누렸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 비결을 배워야 한다. 언제나 한 가지 일, 즉 자주 우리의 내적 존재를 돌이켜서 하나님 자신을 누리기를 배우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을 누리고 흡수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 심지어 자녀의 병을 잊어버릴지라도 그분은 잊어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때, 그분은 오히려 상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너의 ‘나사로’가 병든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너의 이런 기도를 듣지 않겠다. 네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가겠지만, 억지로 나더러 가라고 하지 마라. 나는 그가 죽은 후에야 가겠다. 단지 죽을 뿐 아니라 장사되고 냄새가 나야 가겠다.” 주님은 항상 이렇게 하신다. 주님의 의도는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유일한 의도는 우리가 그분을 흡수하고 누리기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먼저 삼십 분이나 한 시간 정도 주님을 접촉하고,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과 교통하고,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 당신은 너무나 사랑스러우십니다. 당신은 저의 구주이시자 만인의 구주이십니다. 당신께 나아와 당신을 누리고 흡수합니다. 당신의 얼굴빛 안에 살고 당신의 집에 거하렵니다.” 복음 전파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구변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 등을 전혀 상관하지 말라. 우리가 내적으로 이렇게 주님 자신을 흡수하고 주님 자신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우리의 교수님을 만나러 간다면, 이럴 때 말하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흡수한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말씀하실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한 말은 바로 우리가 흡수한 주님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복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여호와 앞에 있으면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그분을 계속 흡수하기만 했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올 때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그의 얼굴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왜 그의 얼굴이 빛났는가? 하나님은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다만 사십 일 동안 주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분과 교통하고 그분을 흡수했을 뿐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완전히 주님으로 점유되었다.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그는 완전히 하나님을 흡수했고 하나님으로 채워졌다. 그 결과 그의 얼굴이 빛났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보였을 때,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놀라운 점이다. 우리가 능력을 구할수록 능력은 우리를 떠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능력에 관해 잊어버리고 대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흡수하며 누린다면, 우리는 능력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능력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나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주님을 누리기 위해서라기보다 인도를 받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제가 이곳에 가야 합니까, 아니면 저곳에 가야 합니까?” 그들이 기도하는 동안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질문들이 맴돈다. 사실상 그들은 주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고 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도를 마치고서 선택지를 놓고 고려한 다음 어떤 선택지가 주님의 뜻과 인도에 따른 것인지를 결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오, 만일 우리가 주님과 교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주님 자신을 접촉하고 흡수하며 누리라.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이 지름길이며 빠른 길이다. 우리가 이렇게 그분을 흡수하고 충분히 누릴 때, 그분의 임재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그분의 임재가 바로 그분의 인도이다.
5일
성전 건축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도안이고, 그다음은 헌신이다. 성전 건축을 위해 사용된 각각의 돌은 원칙상 이미 산에서 떠 내져 손질된 것이었다(왕상 5:15-18, 6:7). 미리 떠 내지고 다듬어진 돌들을 하나씩 쌓아 올릴 때 건축은 완성된다. 다시 도끼질하거나 망치질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망치나 도끼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성전은 조용한 가운데 건축되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에서 건축되고 기능을 나타낼 수 있으려면, 반드시 하나님께 다룸을 받아야 한다. 어떤 형제가 나이가 보다 많고, 일정 수준의 지식과 재능을 가졌고, 도덕성을 갖추고 평판이 좋다고 해서 장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좋은 돌일 수는 있겠지만, 그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하나님께 다룸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이 장로가 된다면, 교회 안에는 망치나 도끼가 내는 소음으로 가득할 것이다. 만일 어떤 교회 안에 소음이 없다면, 이 교회는 매우 강하고 건강한 것이다.
원칙적으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떠 내진 돌이어야 한다. 만일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다른 그리스도인 단체에서 온 형제가 교회 안에 들어와 함부로 비평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할 때, 책임 형제는 소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 만일 다투기를 좋아하는 그 형제가 말한 후 모두가 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닫는다면, 그의 목소리는 분명 짧은 시간 안에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형제가 말한 후에 어떤 사람이 거기에 반응한다면, 말은 갈수록 더 많아질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께 충분히 파쇄되지 않고 깊은 공과들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거나 비평하는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은 즉시 흥분하여 목에 힘줄을 세우고 반박하면서 그들과 싸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참되게 공과를 배운 사람이라면, 결코 다른 사람과 변론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즉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것이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기꺼이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그는 힘을 다해 그가 배운 것을 그 영의 인도를 따라 그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속으로 다른 사람들이 오직 변론하고 반대하며 비평하려고만 하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즉시 하고자 하는 말들을 거두고 잠잠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참으로 공과를 배운 사람이다. 즉, 그는 이미 산에서 도끼와 망치로 떠 내져 손질된 것이다.
모든 교회 봉사에서 우리는 다만 찬양과 감사와 노래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하는 합당한 소리이다. 우리는 간혹 주님의 상 집회에서 누군가가 일어나서 다른 사람의 기도를 뒤집어엎는 기도를 하는 것을 듣게 될 때가 있다. 이것은 그 교회에 참된 건축이 없음을 보여 준다. 교회 건축에는 삐거덕거리는 소음이 없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이 비평하고 판단하며 반대하는 것을 들을 때, 물러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즉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서 잠잠히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소리가 나지 않을 때가 다른 사람에게서도 소리가 나지 않을 때이고, 우리에게서 소리가 날 때가 다른 사람의 소리가 우리보다 더 크게 울릴 때이다. 성전에서는 망치로 치는 소리나 때리는 소리가 나서는 안 된다. 성전은 조용한 가운데 건축된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철저한 공과를 배워야 한다.
성전 건축, 즉 교회 건축을 위해 우리는 반드시 부활 안에서 생활해야 하고, 헌신된 생활을 해야 하며, 하나님께 다룸을 받아야 한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전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렸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손에 복종했으며, 하나님의 다룸을 받아들였다.
4일
이스라엘에 많은 왕이 있었지만, 매우 합당하게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왕은 다윗과 솔로몬 두 왕밖에 없다. 다윗은 부활 전에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다윗은 젊어서부터 고난을 받았고, 싸우는 왕으로서 대적을 패배시키고 땅을 얻었으며,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재료들을 마련했다(대상 18:7-11, 22:2-5, 14-16). 솔로몬은 부활 안에서 승리한 왕으로서 평안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건축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왕상 5:2-5, 마 16:18).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교회의 합당한 청사진을 계시하셨다. 이것은 성전의 예표와 일치한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도안은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에게 계시되었다. 성전 건축을 위한 도안이 다윗에게 계시되었다 할지라도, 그 도안의 집행은 솔로몬의 손을 통해서 수행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교회의 청사진을 계시하셨고, 이제는 부활 안에서 교회의 청사진을 우리 안에서 집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우리는 계시를 보고, 사도행전 2장에서는 그 계시에 따른 집행을 본다. 계시하시는 분은 다윗으로 예표되신 그리스도이시고, 집행하시는 분은 솔로몬으로 예표되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각 사람은 모두 자아를 거절하고 부활의 영 안에서 생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규율 때문에 연장한 이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말미암아 복종해야 한다. 또한 교리에 근거해서 연장한 이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 안에서 복종해야 한다. 교회 형제자매들로서 우리는 마땅히 장로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두신 권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법을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의 영 안에서 생활하지 않고 그저 교리에 따라 행하기만 한다면, 별 유익이 없을 것이다. 다윗이 본 계시를 솔로몬이 집행했다.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교회에 관한 계시는 부활의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의 청사진은 전적으로 부활의 영께 달려 있다. 교회의 청사진은 간단히 말해서 부활의 영이다. 우리가 부활의 영 안에서 생활할 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것의 실재가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 즉, 성전 건축을 위한 다윗의 도안의 실재가 우리 안에서 집행된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어려움은 우리에게 다윗의 도안은 있지만 솔로몬의 집행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에게 계시와 교리는 있으나 부활의 영의 표현은 많지 않다.
우리는 단지 교리만 붙잡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안에 계시는 부활의 영이신 주님께 우리를 파쇄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우리는 교리를 단지 기록된 지침으로만 삼아서는 안 되고, 성경적 근거를 단지 안전장치로만 삼아서도 안 된다. 성경에 계시된 예표들에서 우리는 다윗에게 계시된 도안을 반드시 솔로몬이 집행해야 함을 볼 수 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계시는 오직 부활의 영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부활의 영 안에서 생활할 때, 주님을 섬기는 일에서나 교회 안에서 논쟁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영적인 실재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성령의 권위에 복종하고자 한다면, 논쟁을 시작하려는 순간 곧바로 우리의 자아와 육체를 인식할 것이고, 기꺼이 성령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 주님, 저는 논쟁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틀렸으므로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이것은 기쁘지 않은 일처럼 보이지만, 이 시점에서 교회의 청사진이 우리 안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다윗이 받은 계시를 집행하는 것이다.
3일
요한복음 2장에는 첫째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례(1-11절)가 있고, 이어서 성전을 다루는 사례(12-22절)가 있다. 성전을 다룬 것이 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꾼 것 뒤에 나오는가? 이것은 생명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생명은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 있다. 성전을 다룬 사례에서 우리는 생명의 목표이며 목적인 하나님의 집의 건축을 본다.
주 예수님은 그분의 대적자들에게 그들이 이 성전을 헐면 그분께서 삼 일 만에 다시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2:19). 주님은 “여러분은 나를 죽게 하고 나의 몸을 십자가에서 죽일 것이지만, 나는 삼 일 만에 다시 세울 것입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예수님의 물질적인 몸은 십자가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헐렸다. 그리스도는 육체가 되셨을 때 물질적인 몸을 입으셨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우리는 그분의 물질적인 몸이 장막이었음을 분명하게 본다. 요한복음 2장에 따르면, 그분의 물질적인 몸은 또한 성전이었다. 사탄은 예수님의 물질적인 몸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몸을 헐어 버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사탄은 유대인들을 통해 십자가에서 그분의 몸을 헐었다.
사탄이 십자가에서 주님의 물질적인 몸을 헐어 버린 후, 그분의 몸은 무덤 안에 놓였고 거기서 안식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일어나셨을 때 친히 그분의 죽고 장사된 몸을 세우셨다. 십자가에서 헐린 예수님의 몸은 작고 약했으나,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은 광대하고 능력이 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성전인 그분의 몸은 훨씬 더 큰 규모로 일으켜 세워졌다. 원수가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헐어 버린 몸은 단지 예수님의 몸뿐이었지만, 주님은 부활 안에서 그분 자신의 몸을 세우셨을 뿐 아니라 믿음으로 그분과 합한 모든 이들을 일으키셨다.
일단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가 손상되고 헐린다고 해도, 우리는 부활 안에서 그 교회가 이전보다 더 확대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주 예수님은 항상 원수보다 우세하시다. 사탄이 하는 일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라. 많은 때 우리는 너무 절박하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평안하라. 사탄의 활동을 무서워하지 말라. 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아셨을 때, “오, 아버지, 이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십시오. 아버지, 저를 구원하시고 보호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나를 죽이기 위해 전력을 다하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죽인 뒤에 나는 증가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누구도 주님의 목적을 좌절시킬 수 없다. 원수가 애를 쓸수록 그는 주님께 어떤 것을 하실 수 있는 기회를 더욱더 제공할 뿐이다.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항상 부활 안에 있다. 주님께서 ‘삼 일 만에’ 성전을 세우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부활 안에서 그것을 세우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유대인들처럼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기적들이 무엇인지 보여 달라면서 우리에게 도전한다. 우리는 기적들을 행하려고 하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우리 자신을 죽음에 넘겨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나타나실 것이다. 이것이 교회를 건축하는 데 필요한 기적이며 표적이다. 교회를 건축하는 유일한 표적은 부활 안에 있는 생명이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삼 일’ 안에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부활의 과정 가운데서 그분의 몸을 건축하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몸의 대부분이 이미 세워졌지만, 주님의 몸의 어떤 지체들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은 지금도 부활의 과정 안에 있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오직 일부분만 변화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일부분만 부활했음을 의미한다. 주님은 변화의 과정을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에게 일하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도 부활의 과정 안에 있다. 오늘날 교회는 여전히 ‘삼 일’이라는 부활의 과정 안에 있다.
2일
우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의 목표에 도달하시기 위한 절차일 뿐이다.
에베소서 1장 22절과 23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며,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여러분처럼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귀히 여긴다. 그러나 내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귀히 여기는 것은 어떤 목적 때문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나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이끄는 절차이다. 우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 있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으로 인도되고 이끌릴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처소와 관련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한 면으로 그것은 땅 위에 있고 일시적이며 이동하는 성막으로 예표되었다. 성막은 백성이 여행하는 것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성막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성막은 이 땅 위에 있는 교회 혹은 여러 지방에 있는 교회를 예표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인 곳에는 교회가 있고, 따로따로 흩어져 있으면 교회가 없다. 이것이 성막 방면의 교회이다.
성전은 성막과 달리 왕국을 위해 건축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의 중심이었다. 성전은 유일하고 영원하며 견고했다. 나라는 정치적으로 나뉠 수 있어도 성전은 나뉠 수 없고 오직 하나만 있을 수 있다. 한 면으로 교회는 여러 지방에 나타나며, 또 한 면으로 교회의 영적 실재는 한 몸이고 유일하며 영원하다.
사역이 해야 할 일은 교회가 마땅히 지녀야 할 증거를 회복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복이다.
우리가 오늘날 하고 있는 일은 평범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의 길은 곧 교회의 길이며, 이 길에서 우리는 주제넘게 행동하거나 부주의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묘사된 몸은 한 지방에 있는 교회가 가져야 할 증거이다. 이 증거는 바로 몸의 증거이다. 이 몸 안에서는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라고 말할 수 없고, 머리가 발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고전 12:21), 모든 부분이 반드시 협력해야 한다. 오늘날 각 지방에 있는 교회는 반드시 이 몸의 실재를 표현하는 증거여야 한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는 반드시 어떤 지방에서 표현되는 실행적이고 실지적인 몸이어야 한다.
오늘날 이 땅에서 교회는 하나이며, 교회 사람들은 세상에서 분별된 사람들이다. 교회의 정상적인 상황 가운데서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모두 자신을 헌신하며, 모든 물건을 공용한다. 이러한 합당한 생활 가운데 에베소서 4장에 열거된 사도와 신언자와 복음 전파자와 목자 및 교사라는 은사들이 산출된다. 이 은사 받은 사람들은 비록 각지에 흩어져 있지만, 여전히 한 교회 안에 함께 있다. 이것은 전류가 오직 하나이지만 여전히 각처로 전달되는 것과 같다. 비록 다양한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지방의 범위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교회 자체는 여전히 하나이다. 교회는 하나(oneness)의 증거를 위해 존재한다. 교회가 소유한 생명은 하나(oneness)의 생명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교회들은 서로 간에 마땅히 하나여야 한다. 비록 고린도와 에베소 및 다른 곳에서 교회가 나타났지만, 그들은 모두 한 교회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태이다.
신언노트, 2022 09 11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을 위하여
성막 교회생활로부터
성전 교회생활로
주님과 함께 계속 감
우리는
그리스도를
유월절로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이집트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이집트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나와 이제
광야에 있으면서
계시를 받고
성막을 건축하며
만나를 누리고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건축물인
성막을 가지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지만
성막은
견고함이 부족했다.
성막은
기초가 없어서
이동하기에 편리했다.
성막을 건축할 때는
돌이 아닌
나무만 사용되었다.
우리는
혼의 광야에서
떠돌아다니며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누리지만,
견고한 기초도 없이 떠도는
교회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광대한 땅
곧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이 가득한 땅에서
거닐고 있는가?
교회생활이
성전처럼
견고하게 건축되었는가?
우리 안에는
교회생활 안에서
이미 경험한 것보다 더 높은
무언가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다.
우리가 느끼는 불만족은
참으로 우리의 불만족이 아니라
주님의 불만족이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은
좋은 땅 안에서
‘성전 교회생활’을 가지기를
갈망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광야에서 이끌어 내셔서
좋은 땅 안으로,
혼에서 이끌어 내셔서
영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하신다!
한 면에서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 있는 것이
기쁘다.
다른 면에서
우리는
더 풍성한 어떤 것을
갈망한다.
우리는 참으로
‘성막 교회생활’ 안에
궤를 가지고 있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인
좋은 땅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땅에서
성전을 건축할 수 있다.
우리는
성막보다
성전이
더 크고
더 안정적이며
더 무게가 있었다는 것을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성전 안에 있는 기구들도
새롭게 되었고
그 치수가 커졌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제단과
물두멍과
임재의 떡 상과
금등잔대와
분향단이
모두 다시 만들어졌고,
대부분
그 치수가 커졌다.
성막에서
제단은
그 너비와 길이가
오 규빗이었고
높이는
삼 규빗이었지만,
성전에서는
제단의 너비와 길이가
이십 규빗이었고
높이는
십 규빗이었다.
성막에는
하나의 금등잔대만 있었지만,
성전에는
열 개의 금등잔대가 있었다.
성막에는
하나의 임재의 떡 상과
하나의 물두멍이 있었지만,
성전에는
열 개의 임재의 떡 상과
열 개의 물두멍이 있었다.
십자가와 성령에 대한
우리의 체험,
우리의
생명과
빛과
기쁘게 받아들여짐과
달콤함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반드시
새로워지고
깊어지며
확대되어야 한다.
성전의 확대는
교회가 강해지는 것을
상징하며,
성전의 기구들이
새로워지고 확대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성도들의 체험이
새로워지고 확대되는 것을
상징한다.
이 그림은
우리의 영적인 체험이 반드시
교회의 신장과 어울려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제단의 크기
(즉 십자가에 대한 체험)도 반드시
같은 비율로
증가해야 한다.
복음 전파도
더 큰 충격력이 있어야
사람들이 들어올 때
큰 가책을 받고
구원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는 이들의 헌신도 또한
증가해야 한다.
놋 물두멍도
확대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빛 비춤과
성령의 씻음이 반드시
더 강해지고
더 자주 발생하며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 공급과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임재의 떡 상과 금등잔대도 반드시
확대되어야 한다.
또한 금향단
(즉 우리와 하나님의 교통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체험)도 반드시
강해지고
증가하며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동일하시지만
교회는 반드시
점차적으로
강해지고 확대되어야 하며,
성도들의 영적인 체험도 반드시
점차적으로
새로워지고 확대되어야 한다.
우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의 목표에
도달하시기 위한
절차일 뿐이다.
에베소서 1장
22절과 23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며,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여러분처럼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귀히 여긴다.
그러나 내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귀히 여기는 것은
어떤 목적 때문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나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이끄는
절차이다.
우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 있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으로
인도되고
이끌릴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처소와 관련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한 면으로 그것은
땅 위에 있고
일시적이며
이동하는
성막으로 예표되었다.
성막은
백성이 여행하는 것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성막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성막은
이 땅 위에 있는 교회
혹은 여러 지방에 있는 교회를
예표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인 곳에는
교회가 있고,
따로따로 흩어져 있으면
교회가 없다.
이것이
성막 방면의 교회이다.
성전은
성막과 달리
왕국을 위해 건축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의 중심이었다.
성전은
유일하고
영원하며
견고했다.
나라는
정치적으로 나뉠 수 있어도
성전은
나뉠 수 없고
오직 하나만
있을 수 있다.
한 면으로 교회는
여러 지방에 나타나며,
또 한 면으로
교회의 영적 실재는
한 몸이고
유일하며
영원하다.
사역이
해야 할 일은
교회가
마땅히 지녀야 할
증거를
회복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복이다.
우리가 오늘날
하고 있는 일은
평범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의 길은
곧 교회의 길이며,
이 길에서
우리는
주제넘게 행동하거나
부주의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묘사된
몸은
한 지방에 있는 교회가
가져야 할
증거이다.
이 증거는 바로
몸의 증거이다.
이 몸 안에서는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라고 말할 수 없고,
머리가
발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라고 말할 수 없으며,
모든 부분이 반드시
협력해야 한다.
오늘날
각 지방에 있는 교회는 반드시
이 몸의 실재를 표현하는
증거여야 한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는 반드시
어떤 지방에서 표현되는
실행적이고
실지적인
몸이어야 한다.
오늘날
이 땅에서
교회는
하나이며,
교회 사람들은
세상에서 분별된 사람들이다.
교회의 정상적인 상황 가운데서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모두 자신을 헌신하며,
모든 물건을 공용한다.
이러한 합당한 생활 가운데
에베소서 4장에 열거된
사도와
신언자와
복음 전파자와
목자 및 교사라는
은사들이 산출된다.
이 은사 받은 사람들은 비록
각지에 흩어져 있지만,
여전히 한 교회 안에
함께 있다.
이것은
전류가
오직 하나이지만
여전히 각처로
전달되는 것과 같다.
비록 다양한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지방의 범위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교회 자체는
여전히 하나이다.
교회는
하나(oneness)의 증거를 위해
존재한다.
교회가 소유한
생명은
하나(oneness)의 생명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교회들은
서로 간에
마땅히 하나여야 한다.
비록 고린도와 에베소 및 다른 곳에서
교회가 나타났지만,
그들은 모두
한 교회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태이다.
요한복음 2장에는
첫째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례가 있고,
이어서
성전을 다루는
사례가 있다.
성전을 다룬 것이
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꾼 것
뒤에 나오는가?
이것은
생명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생명은
하나님의 건축을 위해 있다.
성전을 다룬 사례에서
우리는
생명의
목표이며 목적인
하나님의 집의 건축을 본다.
주 예수님은
그분의 대적자들에게
그들이
이 성전을 헐면
그분께서
삼 일 만에
다시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여러분은
나를
죽게 하고
나의 몸을
십자가에서 죽일 것이지만,
나는
삼 일 만에
다시 세울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예수님의
물질적인 몸은
십자가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헐렸다.
그리스도는
육체가 되셨을 때
물질적인 몸을 입으셨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우리는
그분의 물질적인 몸이
장막이었음을
분명하게 본다.
요한복음 2장에 따르면,
그분의
물질적인 몸은 또한
성전이었다.
사탄은
예수님의 물질적인 몸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몸을
헐어 버리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사탄은
유대인들을 통해
십자가에서
그분의 몸을 헐었다.
사탄이
십자가에서
주님의
물질적인 몸을
헐어 버린 후,
그분의 몸은
무덤 안에 놓였고
거기서 안식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일어나셨을 때 친히
그분의 죽고 장사된 몸을
세우셨다.
십자가에서 헐린
예수님의 몸은
작고 약했으나,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은
광대하고 능력이 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성전인
그분의 몸은
훨씬 더 큰 규모로
일으켜 세워졌다.
원수가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헐어 버린
몸은
단지 예수님의 몸뿐이었지만,
주님은
부활 안에서
그분 자신의 몸을
세우셨을 뿐 아니라
믿음으로
그분과 합한
모든 이들을
일으키셨다.
일단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가
손상되고 헐린다고 해도,
우리는
부활 안에서
그 교회가
이전보다 더 확대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주 예수님은 항상
원수보다 우세하시다.
사탄이 하는 일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라.
많은 때 우리는
너무 절박하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평안하라.
사탄의 활동을
무서워하지 말라.
누구도
주님의 목적을
좌절시킬 수 없다.
원수가
애를 쓸수록
그는
주님께
어떤 것을 하실 수 있는
기회를 더욱더 제공할 뿐이다.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항상
부활 안에 있다.
주님께서
‘삼 일 만에’
성전을 세우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부활 안에서
그것을 세우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유대인들처럼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기적들이
무엇인지 보여 달라면서
우리에게 도전한다.
우리는
기적들을 행하려고 하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우리 자신을
죽음에 넘겨야 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나타나실 것이다.
이것이
교회를 건축하는 데 필요한
기적이며 표적이다.
교회를 건축하는
유일한 표적은
부활 안에 있는
생명이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삼 일’ 안에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부활의 과정 가운데서
그분의 몸을 건축하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몸의 대부분이
이미 세워졌지만,
주님의 몸의 어떤 지체들은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은
지금도 부활의 과정 안에 있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오직 일부분만 변화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일부분만 부활했음을
의미한다.
주님은
변화의 과정을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에게
일하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도
부활의 과정 안에 있다.
오늘날 교회는 여전히
‘삼 일’이라는
부활의 과정 안에 있다.
이스라엘에
많은 왕이 있었지만,
매우 합당하게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왕은
다윗과 솔로몬
두 왕밖에 없다.
다윗은
부활 전에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다윗은
젊어서부터 고난을 받았고,
싸우는 왕으로서
대적을 패배시키고
땅을 얻었으며,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재료들을 마련했다.
솔로몬은
부활 안에서
승리한 왕으로서
평안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건축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교회의 합당한 청사진을
계시하셨다.
이것은
성전의 예표와
일치한다.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도안은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에게 계시되었다.
성전 건축을 위한
도안이
다윗에게
계시되었다 할지라도,
그 도안의 집행은
솔로몬의 손을 통해서
수행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교회의 청사진을
계시하셨고,
이제는
부활 안에서
교회의 청사진을
우리 안에서
집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우리는
계시를 보고,
사도행전 2장에서는
그 계시에 따른
집행을 본다.
계시하시는 분은
다윗으로 예표되신
그리스도이시고,
집행하시는 분은
솔로몬으로 예표되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각 사람은 모두
자아를 거절하고
부활의 영 안에서
생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규율 때문에
연장한 이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말미암아
복종해야 한다.
또한 교리에 근거해서
연장한 이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 안에서
복종해야 한다.
교회 형제자매들로서
우리는 마땅히
장로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두신
권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법을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의 영 안에서
생활하지 않고
그저 교리에 따라
행하기만 한다면,
별 유익이 없을 것이다.
다윗이 본 계시를
솔로몬이 집행했다.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교회에 관한 계시는
부활의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의 청사진은 전적으로
부활의 영께 달려 있다.
교회의 청사진은
간단히 말해서
부활의 영이다.
우리가
부활의 영 안에서 생활할 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것의
실재가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
즉, 성전 건축을 위한
다윗의 도안의 실재가
우리 안에서 집행된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어려움은
우리에게
다윗의 도안은 있지만
솔로몬의 집행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에게
계시와 교리는
있으나
부활의 영의 표현은
많지 않다.
우리는 단지
교리만 붙잡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안에 계시는
부활의 영이신
주님께
우리를 파쇄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우리는
교리를
단지 기록된 지침으로만
삼아서는 안 되고,
성경적 근거를
단지 안전장치로만
삼아서도 안 된다.
성경에 계시된 예표들에서
우리는
다윗에게 계시된 도안을 반드시
솔로몬이 집행해야 함을
볼 수 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계시는
오직 부활의 영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가
부활의 영 안에서
생활할 때,
주님을 섬기는 일에서나
교회 안에서
논쟁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영적인 실재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성령의 권위에 복종하고자 한다면,
논쟁을 시작하려는 순간 곧바로
우리의 자아와 육체를
인식할 것이고,
기꺼이
성령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 주님,
저는 논쟁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틀렸으므로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이것은
기쁘지 않은 일처럼 보이지만,
이 시점에서
교회의 청사진이
우리 안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다윗이 받은
계시를 집행하는 것이다.
성전 건축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도안이고,
그다음은
헌신이다.
성전 건축을 위해 사용된
각각의 돌은 원칙상
이미 산에서 떠 내져
손질된 것이었다.
미리 떠 내지고
다듬어진
돌들을
하나씩 쌓아 올릴 때
건축은 완성된다.
다시 도끼질하거나
망치질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망치나 도끼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성전은
조용한 가운데
건축되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에서
건축되고
기능을 나타낼 수 있으려면,
반드시 하나님께
다룸을 받아야 한다.
어떤 형제가
나이가 보다 많고,
일정 수준의
지식과 재능을 가졌고,
도덕성을 갖추고
평판이 좋다고 해서
장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좋은 돌일 수는 있겠지만,
그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하나님께
다룸을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이
장로가 된다면,
교회 안에는
망치나 도끼가 내는
소음으로 가득할 것이다.
만일 어떤 교회 안에
소음이 없다면,
이 교회는
매우 강하고 건강한 것이다.
원칙적으로
교회에서 봉사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떠 내진 돌이어야 한다.
만일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다른 그리스도인 단체에서 온
형제가
교회 안에 들어와
함부로 비평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할 때,
책임 형제는
소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
만일 다투기를 좋아하는
그 형제가 말한 후
모두가
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닫는다면,
그의 목소리는 분명
짧은 시간 안에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형제가 말한 후에
어떤 사람이
거기에 반응한다면,
말은
갈수록 더 많아질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께
충분히 파쇄되지 않고
깊은 공과들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거나 비평하는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은
즉시 흥분하여
목에 힘줄을 세우고
반박하면서
그들과 싸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참되게 공과를 배운 사람이라면,
결코 다른 사람과
변론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즉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것이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기꺼이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그는
힘을 다해
그가 배운 것을
그 영의 인도를 따라
그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속으로
다른 사람들이 오직
변론하고
반대하며
비평하려고만 하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즉시
하고자 하는 말들을 거두고
잠잠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참으로 공과를 배운 사람이다.
즉, 그는 이미
산에서
도끼와 망치로
떠 내져
손질된 것이다.
모든 교회 봉사에서
우리는 다만
찬양과 감사와 노래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하는
합당한 소리이다.
우리는 간혹
주님의 상 집회에서
누군가가 일어나서
다른 사람의 기도를 뒤집어엎는
기도를 하는 것을
듣게 될 때가 있다.
이것은
그 교회에
참된 건축이 없음을
보여 준다.
교회 건축에는
삐거덕거리는 소음이
없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이
비평하고
판단하며
반대하는 것을
들을 때,
물러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즉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서
잠잠히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소리가 나지 않을 때가
다른 사람에게서도
소리가 나지 않을 때이고,
우리에게서
소리가 날 때가
다른 사람의 소리가
우리보다 더 크게
울릴 때이다.
성전에서는
망치로 치는 소리나
때리는 소리가
나서는 안 된다.
성전은
조용한 가운데
건축된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철저한 공과를
배워야 한다.
성전 건축,
즉 교회 건축을 위해
우리는 반드시
부활 안에서
생활해야 하고,
헌신된
생활을 해야 하며,
하나님께
다룸을 받아야 한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전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렸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손에
복종했으며,
하나님의 다룸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관념을 바꾸어,
하나님께서 오직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것만을
갈망하신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일체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얼마나 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누렸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 비결을
배워야 한다.
언제나
한 가지 일,
즉 자주
우리의 내적 존재를 돌이켜서
하나님 자신을 누리기를
배우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을
누리고
흡수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모든 것,
심지어 자녀의 병을 잊어버릴지라도
그분은
잊어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때,
그분은 오히려
상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나는
너의 ‘나사로’가 병든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너의 이런 기도를
듣지 않겠다.
네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가겠지만,
억지로
나더러
가라고 하지 마라.
나는
그가 죽은 후에야
가겠다.
단지 죽을 뿐 아니라
장사되고
냄새가 나야
가겠다.”
주님은 항상
이렇게 하신다.
주님의 의도는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유일한 의도는
우리가
그분을
흡수하고
누리기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먼저 삼십 분이나 한 시간 정도
주님을 접촉하고,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과 교통하고,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
당신은
너무나 사랑스러우십니다.
당신은
저의 구주이시자
만인의 구주이십니다.
당신께 나아와
당신을
누리고
흡수합니다.
당신의 얼굴빛 안에 살고
당신의 집에 거하렵니다.”
복음 전파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구변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말라.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 등을
전혀 상관하지 말라.
우리가
내적으로 이렇게
주님 자신을 흡수하고
주님 자신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우리의 교수님을
만나러 간다면,
이럴 때
말하는 이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흡수한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말씀하실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한 말은 바로
우리가 흡수한
주님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복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여호와 앞에 있으면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그분을
계속 흡수하기만 했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올 때
별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그의 얼굴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왜 그의 얼굴이
빛났는가?
하나님은
그를 위해
어떤 일을
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다만
사십 일 동안
주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분과 교통하고
그분을 흡수했을 뿐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완전히
주님으로 점유되었다.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그는
완전히
하나님을 흡수했고
하나님으로 채워졌다.
그 결과
그의 얼굴이
빛났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보였을 때,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놀라운 점이다.
우리가
능력을 구할수록
능력은
우리를 떠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능력에 관해
잊어버리고
대신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흡수하며
누린다면,
우리는
능력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능력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나는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주님을 누리기 위해서라기보다
인도를 받기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제가
이곳에 가야 합니까,
아니면 저곳에 가야 합니까?”
그들이
기도하는 동안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질문들이 맴돈다.
사실상 그들은
주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고
일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도를 마치고서
선택지를 놓고
고려한 다음
어떤 선택지가
주님의 뜻과 인도에 따른 것인지를
결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오, 만일 우리가
주님과 교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이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주님 자신을
접촉하고
흡수하며
누리라.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이것이
지름길이며
빠른 길이다.
우리가
이렇게
그분을
흡수하고
충분히 누릴 때,
그분의 임재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그분의 임재가 바로
그분의 인도이다.
1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유월절로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이집트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이집트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나와 이제 광야에 있으면서 계시를 받고 성막을 건축하며 만나를 누리고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건축물인 성막을 갖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지만 성막은 견고함이 부족했다. 성막은 기초가 없어서 이동하기에 편리했다. 성막을 건축할 때는 돌이 아닌 나무만 사용되었다. 우리는 혼의 광야에서 떠돌아다니며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누리지만, 견고한 기초도 없이 떠도는 교회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광대한 땅 곧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이 가득한 땅에서 거닐고 있는가? 교회생활이 성전처럼 견고하게 건축되었는가?
우리 안에는 교회생활 안에서 이미 경험한 것보다 더 높은 무언가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다. 우리가 느끼는 불만족은 참으로 우리의 불만족이 아니라 주님의 불만족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은 좋은 땅 안에서 ‘성전 교회생활’을 갖기를 갈망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광야에서 이끌어 내셔서 좋은 땅 안으로, 혼에서 이끌어 내셔서 영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하신다!
한 면에서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 있는 것이 기쁘다. 다른 면에서 우리는 더 풍성한 어떤 것을 갈망한다. 우리는 참으로 ‘성막 교회생활’ 안에 궤를 가지고 있다. 이것에 의해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인 좋은 땅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땅에서 성전을 건축할 수 있다.
우리는 성막보다 성전이 더 크고 더 안정적이며 더 무게가 있었다는 것을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성전 안에 있는 기구들도 새롭게 되었고 그 치수가 커졌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제단과 물두멍과 임재의 떡 상과 금등잔대와 분향단이 모두 다시 만들어졌고, 대부분 그 치수가 커졌다. 성막에서 제단은 그 너비와 길이가 오 규빗이었고 높이는 삼 규빗이었지만, 성전에서는 제단의 너비와 길이가 이십 규빗이었고 높이는 십 규빗이었다. 성막에는 하나의 금등잔대만 있었지만, 성전에는 열 개의 금등잔대가 있었다. 성막에는 하나의 임재의 떡 상과 하나의 물두멍이 있었지만, 성전에는 열 개의 임재의 떡 상과 열 개의 물두멍이 있었다.
십자가와 성령에 대한 우리의 체험, 우리의 생명과 빛과 기쁘게 받아들여짐과 달콤함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반드시 새로워지고 깊어지며 확대되어야 한다. 성전의 확대는 교회가 강해지는 것을 상징하며, 성전의 기구들이 새로워지고 확대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성도들의 체험이 새로워지고 확대되는 것을 상징한다.
이 그림은 우리의 영적인 체험이 반드시 교회의 신장과 어울려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제단의 크기(즉 십자가에 대한 체험)도 반드시 같은 비율로 증가해야 한다. 복음 전파도 더 큰 충격력이 있어야 사람들이 들어올 때 큰 가책을 받고 구원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는 이들의 헌신도 또한 증가해야 한다. 놋 물두멍도 확대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빛 비춤과 성령의 씻음이 반드시 더 강해지고 더 자주 발생하며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 공급과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임재의 떡 상과 금등잔대도 반드시 확대되어야 한다. 또한 금향단(즉 우리와 하나님의 교통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체험)도 반드시 강해지고 증가하며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동일하시지만 교회는 반드시 점차적으로 강해지고 확대되어야 하며, 성도들의 영적인 체험도 반드시 점차적으로 새로워지고 확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