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ntinuation
of the Book of Acts
—Living
in the Divine History
within Human History
사도행전은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신성한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계시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나타남인
교회를
확산하고 건축하기 위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하나님이 되었다
— 행 1:8, 14, 2:14상, 4:10-20, 31-32,
5:20, 38-39, 13:1-4, 26:16-19, 28:31.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첫 번째로
복음을 선포하였을 때,
외적인 인간 역사 속에 있는
내재적인 신성한 역사를
계시해 주는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 행 2:17-21, 욜 1:1-4, 2:28-32.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신성한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영원의 시대로부터
계속 나아가서’
(미 5:2)
시간의 다리를 건너
영원 미래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인데
(시 90: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단체적인 나타남과
완전한 영광스럽게 됨을 위해
모든 민족들이
사모하는 분(학 2:7)으로서
그분의 선민 안으로
분배되시기 위한 것이다.
요엘서는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시고 복합되신
영의 쏟아부어짐에 대해
말하는데,
이 영은
오순절날에
쏟아부어지셨다.
이 영은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위한,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시자
그리스도의 실재화이시다
— 욜 2:28-29, 행 2:1-4,
16-21, 딤전 3:15-16.
사도행전은
결말이 없는
책인데,
이는 이 책이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신성한 역사로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 행 28:31.
주님은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
(요 5:17)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탄의 반역과
사람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계속 일해 오셨고,
주님 또한
일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기록이다.
사도행전 28장 이후에도
하나님의 많은 그릇들이
그분의 일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그분의 일은
계속되고 있으며
멈추지 않았다.
그분의 일은
왕국이 임할 때까지,
심지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전진하시며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또한 이것을 믿는다면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심지어
새 예루살렘이 되어서도
그분의 노예들은
제사장들로서
그분을 섬길 것이다
— 계 22:3, 비교 행 13:36상.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번식과 번성과 확산을 위해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전파하시는 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긴 기간 동안
계속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증가와 번식과 번성과 확산을 위한
이러한 복음 전파의 일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
많은 아들들(롬 8:29)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며,
이러한 많은 아들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고
그분의 몸(롬 12:5)으로
조성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수행하고
그분의 영원한 뜻을
이룬다.
이것은
사도행전 뒤에 나오는
스물한 권의 서신서들과
요한계시록에서
상세하게 계시된다.
하나님은
단체적이며 빛나는
한 그릇,
곧 증거를 지닌
한 그릇을
찾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자녀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인식하는 데로
이끌려야 하고
몸의 생활을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쓸모가 없고
결코 그분의 목표를
성취할 수 없다
— 롬 12:1-5, 고전 12:12, 계 1:10-12.
심지어 이기는 이들의
증거가 유지되는 것도
교회 전체를 위한 것이다.
이기는 이들은
그 일을 하며,
그 유익은
교회 전체가
받는다
— 계 12:5-9, 2:7, 11, 17, 26-28,
3:3, 5, 12, 20-21.
이기는 이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있지 않다.
그들은
교회의 터 위에
서 있으며,
그들이
그곳에 있는 것은
교회 전체가
온전하게 되도록
이끌기 위한 것이다.
심지어 이기는 이들의
승리도
단체적인 승리이다
— 비교 빌 1:19.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의 연속으로서
여전히
확장되고 번성하고 있다
— 행 6:7, 12:24, 19:20.
사도행전 6장 7절에서
‘확장되다(‘자라다’—원문 직역)’라는 말은
생명의 성장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는 생명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속에
씨로서 뿌려져
자라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증가하시기 위한 것,
즉 하나님께서
자라시기 위한 것이다
— 막 4:14, 골 2:19.
사도행전 12장 24절에서
‘번성하다’라는 말은
인수 면에서
그리스도의 증가를
가리킨다.
사실상
제자들의 번성은
말씀의 확장에
달려 있다.
새로운 제자들이
‘주님께 더해져’
그리스도의 일부분,
곧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된다
— 행 5:14, 11:24, 롬 15:16.
우리는
새로운 믿는 이들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머물러 있으라.”
라고 격려해야 한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주님께 신실하고,
주님을
굳게 붙잡으며,
주님과의
긴밀한 교통 가운데
사는 것이다
— 행 11:23.
사도행전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받으며,
주님의 이름
곧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말함으로써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신성한 역사 안에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신약 희년에 관한
요엘서의 예언과
그 성취에는
두 방면이 있다.
하나님 편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서
그분의 영을
쏟아부어 주신 것이고,
우리 편에서는
모든 것을 성취하시고
모든 것에 도달하시고
모든 것을 획득하신
승천하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 행 2:16-18, 21, 욜 2:28-29, 32상.
인간 역사 가운데 있는
우리의 신성한 역사는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려,
그리스도의 충만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역사이다
— 롬 10:12-13,
엡 3:8, 19, 1:22-23.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황금과 같은
신성한 역사 안에
우리 자신을
계속 있게 한다.
이 역사는
에노스로부터 시작하여
(창 4:26),
구약과 신약을 거쳐 계속되며
(욥 12:4, 창 12:8, 26:25, 신 4:7, 삿 15:18,
삼상 12:18, 시 116:4, 13, 17, 80:18, 88:9,
왕상 18:24, 사 12:4, 애 3:55, 57, 시 99:6, 사 55:6,
욘 1:6, 왕하 5:11, 사 41:25, 행 2:21, 7:59,
9:14, 21, 22:16, 롬 10:12-13, 고전 1:2, 딤후 2:22),
성경에 있는
마지막 기도로
끝을 맺는다
(계 22:20).
신성한 역사 안에
사는 동안
우리는
인간 역사 안에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겪는다.
그 이름,
곧 사람은
멸시했지만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하신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멸시를 받는 것은
참된 영예이다
— 행 4:18-20, 29-31, 5:41-42, 9:13-16,
고후 6:4, 11:23, 골 1:24-25.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함으로써
인간 역사 안에서
신성한 역사를
수행한다.
이 이름은
주님의
인격과 일에 있어서
그분의 존재 전체를
표현한다
— 행 9:27, 빌 2:9-11,
살전 2:2, 고후 4:5.
사도행전은
한 몸으로서
살고 움직이고 행동함으로써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신성한 역사 안에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계시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몸 안에서,
몸을 통해서,
몸을 위해서
한다.
주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계속해서 이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살고 행동하고 행하고 일하시는데,
이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분 자신을
그들 안에
나누어 주셨기 때문이다
— 요 12:24.
사복음서는
우리에게
머리의 그림을
제시해 주고,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몸을
보여 준다.
사도행전은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그 영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몸
곧 그분의 재생산과 복사판인
교회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다
— 행 1:14, 2:14상, 42,
9:4-5, 28:13-15.
사도행전은
그들 자신을
거절하고
또 다른 생명,
곧 신성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삶으로써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신성한 역사 안에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계시한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단체적인 생활이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이다.
사도행전 5장 20절에 나오는
‘이 생명’이 가리키는 생명은
유대 지도자들의
박해와 협박과 투옥을
이겨 낸 생명이며,
베드로가
전파하고 공급하고 살아 낸
신성한 생명이다.
베드로의 생활과 일을 통하여
신성한 생명이
그의 상황에서
매우 실지적이고도 현실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천사까지도
그것을
보고 지적했다.
바울은
그의 영 안에 계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예수님의 영
(그의 사람의 영과
한 영으로 연합되신
신성하신 영)에 의해
그리스도를 살고
하나님을 섬겼다.
그는
휘장 안에서
(실지적인 지성소인
그의 영 안에서)
그리고 진영
(종교의 인간적인 조직) 밖에서
살았다
— 행 16:6-7, 17:16, 19:21,
롬 8:16, 딤후 4:22, 고전 6:17,
롬 1:9, 빌 3:3, 히 6:19-20, 13:13.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신성한 역사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인간 생명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께
열려 있는 그릇들이 되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받아들이며,
주님으로 충만하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 행 9:15, 고후 4:7,
롬 9:21, 23, 비교 왕하 4:1-6.
사도행전은
기도와 말씀의 사역을
꾸준히 함으로써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신성한 역사 안에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계시한다.
이것은
하늘에서의 사역을
수행하시는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와 협력하는
사도들의 사역 안에서
사는 것이다
— 행 6:4, 히 7:25, 8:1-2.
기도에 의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위에 있는 것들에 두고,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의
반향이 된다.
우리는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며,
사람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기도를 의지한다
— 행 9:11, 13:1-4, 골 3:1-3, 4:2,
엡 6:18, 단 6:10, 9:2-3,
고전 2:13, 고후 3:16.
우리는
말씀의 사역에 의해
하늘에 속한
생명과 능력이신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 안으로
나누어 준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부양(扶養)받아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그들의 하늘에 속한 생활로서
살도록 하려는 것이다
— 롬 15:16, 비교 사 50:4-5.
사도행전은
시편 68편에서
보여 주는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신성한 역사 안에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계시한다.
시편 68편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의
중심이시고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활동들의
실재이심을
보여 준다
— 시 68:1, 24.
우리는
생명을 분배하시고
쏟아부어지신
영이신,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을
매일 누려야 한다
— 시 68:11-13, 행 2:46-47, 5:42,
16:5, 20:31, 28:30-31.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운송과 확산을 위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바닷가’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오순절날에
모두가 갈릴리 사람들인
적어도 백이십 척의
복음의 ‘선박들’이
복음을 확산하기 위하여
‘바닷가’에서
출항하였다
— 시 68:27, 창 49:13, 행 2: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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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사도행전의 연속 —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신성한 역사 안에서 삶”
6일
히 8:1-2
… 우리에게
이러한 대제사장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들에서
위엄 있는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은
거룩한 곳들의 사역자,
바로 참장막의 사역자이십니다.
그 장막은
주님께서 세우신 것이며,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롬 15:16
이 은혜로
나는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자,
곧 하나님의 복음에 수고하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역자는
제사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사람이다.
(하늘에 있는)
참장막의 사역자이신
그리스도는
하늘을
(이것은 장소일 뿐 아니라
생명의 상태임)
우리 안으로
공급하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사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늘에 속한
생명과 능력을 가지고
이 땅에서
하늘에 속한 삶을
살게 하신다
(히 8:2).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이 되어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봉사였고,
그가
복음을 전파하여
얻은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었다.
… 그들은
속된 것에서
따로 분리되어
하나님의 본성과 요소로
적셔졌기 때문에,
위치적으로나 기질적으로 모두
거룩하게 되었다
(롬 6:19).
그렇게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키시고
분별시키시어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롬 15:16),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고,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인
하늘에 앉아 있다.
… 우리는
하늘에 있는 것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추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고,
그분 안에서
행해야 한다
(골 3:1).
하늘은
그리스도와 연결되며
또한 교회와 연결된다.
위에 있는 것들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께 속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살고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를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골 3:1).
스불론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운송과 확산을 위한
복음 전하는 이들의
‘바닷가’가 되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으로
전파되어야 할
모든 것을 성취하신 후,
오순절날에
모두가 갈릴리 사람들인
(행 2:7, 13:31)
적어도 백이십 척의
복음의 ‘선박들’이
복음을 확산하기 위하여
‘바닷가’에서 출항하였다
(시 68:27).
창세기 49장 21절에 따르면
… 납달리는
풀어놓은 암사슴이며,
아름다운 말을 한다.
납달리는
풀어놓은 암사슴으로
상징되듯이
(시 22편 표제, 아 2:8-9),
부활하시어
죽음에서 해방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아름다운 말을 하시는
(마 28:18-20)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성경의 예표에서,
스불론과 납달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성취된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는
기쁜 소식을
확산하고 퍼뜨리는
한 무리를
형성한다.
스불론 사람들과 납달리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고
(마 4:12-17, 행 1:11),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확산되고 전파되고 퍼져 나갔다
(시 68:27).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
장막을 지었지만,
그는 여전히
사도였다.
… 장막을 짓는 일이든
진료를 보는 일이든,
이 모든 것은
그들로
사도가 되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도가 되기 위해
한 일이었다.
장막을 짓지 않았다면
바울은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이 요점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많은 때
하나님께서
바울이
어떤 일을 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그가
더욱 사도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돈을 벌지 않는 것이나
돈을 버는 것이나
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동역자가
직업을 버려서
경제적인 수입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의
천연적인 잘못된 인식이다.
그렇지 않다.
동역자란 바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한 가지 갈망과 목적과 웅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목적이
동일하다면,
그들의 손으로
어떤 일을 하든지 관계없이,
그들은 모두
주님 안에서
동역자들이다.
5일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모욕당할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
행 9:27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님을 보았고,
또 주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으며,
다마스쿠스에서
그가
얼마나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사람들이
모욕했지만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모욕받는 것은
참으로 존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욕받은 사람들은
그 이름을 위해
모욕당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로
여겨진 것을
기뻐했다
(행 5:41).
그 이름은
주 예수님의
인격과 일에 있어서
그분의 존재 전체를
표현한다.
‘예수님의 이름에’란
‘주님의 전 존재의
범위와 요소 안에’를
의미한다
(빌 2:10).
사도행전은
사복음서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사도행전은
복음서들에
포함되어야 하는데,
이는
이 다섯 권의 책들이 모두
우주적인 사람에 대한
온전한 그림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복음서는
우리에게
머리의 그림을
제시해 주고,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몸을
보여 준다.
엄밀히 말해서
사도행전은
단지 사도들의 행적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 영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들과
모든 믿는 이들,
곧 교회의 행적은
교회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행적이다.
사복음서에는
나사렛 사람이신
예수님,
곧 신성한 생명에 의해
신성한 방식으로 사신
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동일한 신성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방식으로 사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다.
… 게다가 이 수천 명의 사람들은
스스로가 아닌
한 분의 놀라운 인격으로
살고 행하고 움직이고 일하였다.
주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도
이 땅 위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 안에서
계속해서
살고 행하고 움직이고 일하셨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그들 안으로
분배하셨기 때문이다.
… 원래 그분은
한 분 예수님,
한 분 그리스도이셨으나
이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재생산되셨다.
원래 그분은
한 알의 밀이셨으나
이제 그분은
많은 밀알들,
대량 복사판,
대량 재생산이
되셨다
(요 12:24).
우리도 모두
이 대량 재생산의
일부이다.
사도행전은
자신 안에서
홀로 행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닌
그분의
재생산과 복사판,
곧 우주적인 사람의 몸인
교회 안에서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행적을
담고 있다.
이 우주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엡 1:23).
따라서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일부이며
심지어 그리스도 자신이다.
사도행전 5장 20절에서
이 생명은
유대 지도자들의
박해와 협박과 투옥을 이겨 낸
생명이며,
베드로가
전파하고 공급하고 살아 낸
신성한 생명이다.
… 베드로의
생활과 일을 통하여
신성한 생명이
그의 상황에서
매우 실지적이고도 현실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천사까지도
그것을
보고 지적했다
(행 5:20).
히브리서 13장 13절에서
‘진영’은
인간의 조직,
특히 유대교의 조직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성 밖, 곧 진영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스도께서
진영 밖에서
배척당하시고 고난받으셨으므로
우리는
진영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주 예수님은
히브리서 6장 20절에
언급된 것과 같이
하늘들,
즉 휘장 안에 있는 지성소로
들어가셨다.
그분께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는
하늘에 속한
항구가 있는데,
이제 우리는
영 안에서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히 10:19).
주님은
자신의 피를 통하여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셔서
(히 9:12)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을
여셨고,
우리가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하늘들에서 영광을 얻으신
그분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다
(히 10:19-20).
또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그분의 몸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좁은 길이
열렸으며,
우리는
진영 밖으로 나아가서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는
그분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히 13:13).
4일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확장되고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으며,
수많은 제사장들도
이 믿음에
순종하였다.
행 12:24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확장되고 번성하였다.
행 5:14
믿는 이들이 더욱더
주님께 더해져
남자들과 여자들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
사도행전 6장 7절에서
‘확장되다’라는 말은
생명의 성장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속에
뿌려진 씨처럼
자라는
생명의 문제라는 것을
가리킨다
(막 4:14).
사도행전 11장 23절에서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머물러 있는 것’은
지속적으로
주님께 신실하고,
주님을
굳게 붙잡으며,
주님과의
긴밀한 교통 가운데
사는 것이다
(행 11:23).
로마서 15장 16절에 따르면,
바울은
구원받은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희생 제물로
드렸다.
믿지 않는
모든 죄인들은
아담 안에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이
주님을
영접할 때,
그들은
아담에게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갈 때,
그는
그리스도의
일부가 된다.
믿지 않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질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증가가 된다.
복음을 전파하며
구원받은 죄인들을
하나님께 드릴 때,
나는
그리스도를,
곧 개인적인 그리스도가 아닌
단체적인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드린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은
황소와 염소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 희생 제물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희생 제물들을
기뻐하셨다.
오늘날
신약 시대에서
우리의 일은
복음을 전파하여
죄인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일부로
여기신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라고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서
하나님께
드려졌다.
신약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요엘서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서,
… 오순절날에
베드로가
처음으로
언급했다.
이렇게
예언이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
하나님의 신약 희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을
경륜적으로
부어 주신 것과
관련된다.
하나님의
신약 희년에 관한
요엘서의 예언과
그 성취에는
두 방면이 있다.
하나님 편에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서
그분의 영을
쏟아부어 주신 것이고,
우리 편에서는
모든 것을 성취하시고
모든 것에 도달하시고
모든 것을 획득하신
승천하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인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성취하시고 도달하시고 획득하신
모든 것에
참여하고
누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고전 1:2).
이것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의
주요 실행으로서,
우리의 완전한 구원을 위해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롬 10:10-13).
초기의 믿는 이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각처에서 실행했다
(고전 1:2).
… 디모데후서 2장 2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한
말을 통하여,
초기에
주님을 추구하던
모든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실행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의심할 것 없이
바울은
이것을 실행한 사람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이것을 행하여
자기처럼
주님을
누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약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실행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창세기 4장 26절에서
인류의 셋째 세대인
에노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욥(욥 12:4, 27:10),
아브라함(창 12:8, 13:4, 21:33),
이삭(창 26:25),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신 4:7),
삼손(삿 15:18, 16:28),
사무엘(삼상 12:18, 시 99:6),
다윗(삼하 22:4, 7, 대상 16:8, 21:26, … 시 17:6)과
… 그 밖의 사람들(시 99:6)을 통해
지속되었고,
그들 모두가
구약 시대에
이것을 실행했다.
이사야도 또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분을 부르라고
당부했다
(사 55:6).
…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바로 그분의 명령이고
(시 50:15, 렘 29:12)
그분의 갈망이다
(시 91:15, 습 3:9, 슥 13:9).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원천에서
기쁘게 물을 마시는
길이고
(사 12:3-4),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즉 즐겁게 그분을 누리는
길이다
(욥 27:10).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매일
그분을
불러야 한다
(시 88:9).
3일
롬 8:29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각 사람이 서로
지체들입니다.
사도행전은 사실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더해지도록
열려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번식과 번성과 확산을 위해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전파하시는
성령의 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긴 기간 동안
계속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번식과 번성과 확산을 위한
이러한 복음 전파의 일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
많은 아들들(롬 8:29)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며,
이러한 많은 아들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고
그분의 몸(12:5)으로 조성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수행하고
그분의 영원한 뜻을
이룬다.
이것은
사도행전 뒤에 나오는
스물한 권의 서신서들과
요한계시록에
상세하게 계시된다.
그리스도의
번식과 번성을 통해
산출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표현되시는
영역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스리시는
영역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이 된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번식과 번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생명에서부터
자라 나오고,
또 하나님의 생명에서부터
확산된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확산에 대한
기록이며,
또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기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이
곧 그리스도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널리 전파된 복음은
바로 복음이신 그리스도(행 5:42),
곧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그것은 또한
복음인 하나님의 왕국(행 8:12),
곧 하나님의 왕국 복음이다.
그러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온 땅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때까지(계 11:15)
계속되고 전진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장은
교회를
금등잔대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단순히
교회가 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금등잔대라고
말씀하신다.
교회가
금에 불과하다면
결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다.
왜 하나님은
교회를
금등잔대라고
말씀하셨는가?
왜냐하면 금등잔대는
빛을 발하며
밝게 비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빛을 발하는 그릇,
증거를 지닌 그릇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태초에
교회가
등잔대가 되도록
정하셨다.
어떤 개인이 아닌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등잔대이다.
단지 교회가
금인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
빛을 비추고
하나님을 위한
증거가 되어야만
교회가
등잔대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존재한다.
금이 아닌 것은
교회가 아니며,
등잔대가 아닌 것도
교회가 아니다.
안에 생명이 없는 것도
교회가 아니며,
안에 증거가 없는 것도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시고
무엇을 얻으려고 하시는지를
보아야 하며,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증거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교회가
금등잔대가
될 수 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일은
계속 전진하며,
하나님은 여전히
그릇을 얻기를
원하신다.
오늘날
하나님의 그릇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가지기로
정하셨던 것과
동일한 그릇이다.
이 그릇은 바로
교회이며
어떤 한 개인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중에서
이기는 이들이
나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이기는 이들이
교회 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기는 이들의
증거도
단체 전체를 위해
유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개개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기는 이들은
그들 자신을
비범하고
다른 이들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고
다른 이들을
한쪽에 제쳐 두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기는 이들은
교회 전체를 위해
일한다.
그들은
그 일을 하며,
그 유익은
교회 전체가
얻는다.
이기는 이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있지 않다.
그들은
교회의 터 위에
서 있으며,
그들이
그곳에 있는 것은
교회 전체가
온전하게 되도록
이끌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터 위에
서 있으며,
교회를 위해
그 위치에
계속 서 있다.
심지어 이기는 이들의
승리도
단체적인 승리이다.
2일
행 28:30-31
바울은
만 이 년 동안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가르쳤다.
성경에는
그 내용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나머지 육십오 권은 모두
그 내용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직 끝났다고 말할 수 없는
한 권의 책이 있다.
그 한 권의 책이 바로
사도행전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28장까지를 읽고서
이상함을
느끼게 된다.
왜 이렇게
중단되었는가?
우리는
사도행전 28장까지를 읽으면
이 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책이 아직
결말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도행전은
결말이 없는
책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1세기의 사도들의
행전은 이미 끝났지만,
사도행전 전체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우리 모두는 여전히
사도행전을 보고 있다.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다.
주님은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
(요 5:17)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사탄의 반역과
사람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계속 일해 오셨고,
주님 또한
일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은
무엇인가?
사도행전은
바울의 일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베드로나 요한의 일을
기록한 것도 아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기록이다.
누가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28장 이후에는
일하지 않으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가 사도행전 28장 이후에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도행전에는
결말이 없다.
사도행전 28장 이후에도
하나님의 많은 그릇들이
그분의 일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그분의 일은
계속되고 있으며
멈추지 않았다.
바울이
로마에서
이 년간 일한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바울의 일생을
볼 때,
그는
로마에서 살았고
후에 그곳에서 순교했지만
이러한 일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았다.
베드로와 바울과 요한,
이 세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사도행전이 이미 끝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증거는
결코 끝날 수 없는 것이다.
… 28장 이후의 일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세기에
일이
절정에 이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은
사천 년 동안
계속 일해 오셨다.
… 1세기가
하나님의 일의
끝이 아니고,
16세기가
하나님의 일의
끝이 아니며,
심지어 지난 세기도
하나님의 일의
끝이 아니다.
그분의 일은
왕국이
임할 때까지,
심지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전진하시며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또한 이것을 믿는다면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사람은 항상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가 처한 때가
교회가
가장 나쁜 상황에 있는 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 때에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고,
존 웨슬리 때에도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틴 루터 때가
놀라운 시대였다고 생각하며,
또한 존 웨슬리 때도
놀라운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이 있던 때가
놀라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으로
오십 년이 더 지나면
사람들은
우리가 있던 때가
놀라운 시대였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멈출까 봐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
… 하나님은 계속
전진하신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계속
전진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전진하실 때마다 항상
어떤 그릇들을
찾으신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은
어떤 그릇들을
찾으셨다.
마르틴 루터 때에도
하나님은
한 그릇을
찾으셨고,
존 웨슬리 때에도
하나님은
한 그릇을
찾으셨다.
영적 부흥이
있었을 때마다
하나님은 항상
어떤 그릇들을
찾으셨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의 그릇은
어디에 있는가?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사람이 계속
하나님과 동역하고 있는가?
누가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겠는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정하셨던
동일한 그릇을
오늘날에도
원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 그릇은
교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얻기 원하시는 그릇은
개인적인 그릇이 아니라
단체적인 그릇이다.
우리는
몸의 생활을
해야 한다.
… 이것을 위해
우리는
타고난 생명을
거절하며,
하나님 앞에서
깊이 처리받고
심판받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순종을
배워야 하고,
또한 교통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릇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신언노트, 2018 11 04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그 대행자로서
(as the acting God;
그 행동하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역사 안에 있는
그 신성한 역사 안에서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계시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corporate; 한 몸 안에[한 몸으로] 결합된)
표현인
그 교회의
확산과(spreading; 퍼짐과) 건축을 위하여
생명 안에서,
본성 안에서,
표현 안에서,
또 기능 안에서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신격 안에서는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그 복음의 첫 번째 선포 안에서,
그는
요엘서에서부터
인용하였는데,
이는
그 외적인, 곧 사람의 역사 안에 있는
그 내적인(intrinsic; 본질적인, 고유한),
곧 신성한 역사를
계시합니다.
사람의 그 역사 안에 있는
그 신성한 역사는
영원 미래 안으로
(시 90:2)
시간의 다리를 지나서
그리스도의
“영원의 날들에서부터
… 앞으로 감들(goings forth; 출발함들, 밖으로 나감들)”이고
(미 5:2)
이는
그분께서
그분의 단체적인 나타나심과
또 그분의 완전히 영화롭게 함을 위하여
그 모든 나라들의(nations; 민족들의)
소망으로서
(as the Desire; 희망으로서, 갈망으로서)
(학 2:7)
그분의
선택된 사람들 안으로
분배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요엘은
과정을 거치셨고
완결되셨으며
복합적인
그 영의
쏟아져 나옴에(outpouring; 쏟아부어짐에) 관하여
말하는데,
이분은
그 오순절날에
쏟아져 나오셨습니다
(was poured out; 쏟아부어지셨습니다);
이 영은
그 완결되신 삼일하나님이시고
또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위한
그리스도의 실재화이십니다.
사도행전은
한 종결이(an ending; 한 결말이) 없는
한 책인데
이는 이 책이
사람의 역사 안에 있는
그 신성한 역사로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고,
그리고(and; 그래서) 나도 또한
일하고 있습니다.”
(요 5: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반역과
사람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일해 오셨고,
주님 또한
일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일의
한 기록입니다;
사도행전 28장 이후에
많은 하나님의 그릇들이
여전히 그분의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일은
계속되고 있고
또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일은
왕국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전진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결코 멈추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또 이것을 믿는다면(believe in)
우리는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 새 예루살렘으로서
(even as …; 그 새 예루살렘 그대로),
그분의 노예들은
제사장들로서
그분을
섬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을 통하여
그분의
번식(propagation; 증식, 전달),
증식(multiplication; 증가, 번식),
또 확산(spread; 퍼짐, 전파)을 위해
그리스도를 전파함 안에 있는
그 성령의 일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고
또 한 긴 기간의 시간 동안
계속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가, 번식, 증식, 또 확산을 위한
그러한 한 복음 전파의 일은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의 산출을 위한
하나님의 신약 경륜에 따라 있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수행함과(carrying out)
또 그분의 영원한 뜻을
성취함을(fulfillment) 위한
그분의 몸을
구성하게(constitute; 조성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을 뒤따르는,
그 스물하나의 서신서들과
그 계시록에서
상세하게 계시됩니다.
하나님께서
단체적인, 빛나는 한 그릇을,
곧 증거의 한 그릇을
추구하시기(is after; 찾으시기) 때문에,
그분의 아이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아는 데까지
이끌려져야만 하고
또 그 몸 생활을
사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otherwise; 그 외에는),
그들은
그분의 손 안에서
쓸모 없고
또 그분의 목표를
결코 성취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이기는 이들의
증거까지도(testimony; 증언까지도)
그 전체 교회를 위하여
유지됩니다
(is maintained; 지켜집니다, 계속 관리됩니다);
그들이 그 일을 하고,
또 그 전체 교회가
그 유익을 받아들입니다.
그 이기는 이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하여(for themselves;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교회의 터 위에
서 있고,
또 그들이
거기에 있어서
그 전체 교회를
온전함으로(to perfection)
이끕니다;
심지어 그 이기는 이들의
승리들까지도
단체적인 승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의 연속으로서
여전히
자라고 있고
(is … growing; 성장하고 있고, 증가하고 있고)
또 크게 증가되고 있습니다
(being multiplied; 증식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7절에 있는
‘자랐다(Grew)’는
생명 안에서의 성장을
언급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증가,
곧 하나님의 성장을 위하여
사람의 마음 안으로 뿌려진
한 씨로서 자라는
생명의
한 문제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12장 24절에 있는
‘크게 증가했다(Multiplied)’는
수들에 있어서의
(in numbers; 인수 면에서)
그리스도의 증가를
언급합니다;
사실상,
그 제자들의 큰 증가는
그 말씀의 성장에
의존합니다.
새 제자들이
“주님께 더해져서”
그리스도의 부분들,
곧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됩니다.
우리는
그 새 믿는 이들이
“마음의 목적을 가지고
(with purpose of heart;
마음의 의지와 함께, 굳센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남아 있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지속적으로 신실하고,
그분께
착 달라붙어 있으며,
또 그분과의 친밀한 교통 안에
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이름을
부름,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겪음,
또 주님의 이름,
곧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말함에 의하여
사람의 역사 안에 있는
그 신성한 역사 안에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의 신약 희년에 관한
요엘의 예언과
그것의 성취는
두 측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그분께서는
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서
그분의 영을
쏟아부으셨습니다;
우리의 편에서,
우리는
그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분은
모든 것들을 성취하셨고,
모든 것들에 도달하셨으며,
또 모든 것들을 얻으셨습니다:
사람의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의 신성한 역사는
그리스도의 충만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불러서
그리스도의
부유함을(riches; 부를, 풍부를)
누리는
한 역사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름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금으로 된
(golden; 금같이 귀중한),
곧 신성한
역사 안에서
우리 자신들을
계속 있게 하는데
(keep; 지키는데, 유지하는데),
이는(—)
에녹으로(에녹과 함께)
시작하고,
그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지속되며,
또 그 성경 안에 있는
마지막 기도로(맨 끝의 기도와 함께)
결말짓는
(concludes; 마치는)
한 역사입니다.
우리가
그 신성한 역사 안에서
살고 있을 때(As …; 살고 있으므로),
우리는
사람의 그 역사 안에서
주님의 이름 때문에
(on behalf of …;
이름을 위하여, 이름을 대표하여)
고통을 겪습니다;
그 이름(the Name),
곧 사람이 치욕을 주었지만
(man-dishonored;
명예를 더럽혔지만)
하나님께서 영예롭게 하신
(God-honored;
… 영광을 베푸신, 존중하신, 귀히 여기신)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수치를 당하는 것은
(to be dishonored;
치욕을 받는 것은)
한 참된 영예입니다
(a real honor;
하나의 진정한 명예[훈장]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in the name of Jesus;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말함으로써
사람의 역사 안에서
그 신성한 역사를 수행합니다;
이 이름은
주님의(His; 그분의)
인격과 일 안에서
그분께서(the Lord; 주님께서)
무엇이신지의(of what; [그분의] 어떠하심의)
총계의(of the sum total; 전체의, 모든 것의)
표현입니다.
사도행전은
한 몸으로서
살고,
움직이며,
또 행동함으로써
(by …; 행동함에 의하여)
사람의 역사 안에 있는
그 신성한 역사 안에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계시합니다:
그들은
그 몸 안에서,
그 몸을 통하여,
또 그 몸을 위하여
각각의 모든 것들을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또 승천하셨던 다음에
(After …; 승천하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계속하여
수천의 사람들 안에서
(in thousands of people;
수천 명의 사람들로)
땅 위에서
살고, 행동하며, 걷고, 또 일하셨는데
이는 그분께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나누어 주셨기(imparted;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복음서는
우리에게
그 머리의(of the Head)
한 그림을 주고,
또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그 몸을(the Body)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은
사실상(actually; 사실은, 실제로는, 참으로)
그분의 몸,
곧 그분의 재생산과 복제인(duplication)
그 교회 안에서의
그 영에 의한
그리스도의
행동들입니다(the acts).
사도행전은
그들 자신들을
거절하고
다른 생명
—그 신성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삶으로써
사람의 역사 안에 있는
그 신성한 역사 안에서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계시합니다;
그리스도의
이 단체적인 삶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입니다:
사도행전 5장 20절 안에 있는
‘이 생명’에 의해
가리켜지는
생명은
베드로에 의해
전해지고(preached; 전파되고, 역설되고),
사역되며(ministered; 공급되며),
살아 내진
그 신성한 생명이고,
이는
그 유대인(Jewish;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박해, 위협함, 또 투옥을(imprisonmen; 감금을)
이겼습니다;
베드로의
생활과(life; 생명과) 일은
그 신성한 생명을
그의 상황 안에서
정말
현실적이고
(so real; 매우 생생하고)
또 현존하게
(and present; 당장 쓰일 수 있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 천사조차
그것을 보았으며
또 그것을 지적해 냈습니다
(pointed … out; 언급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영 안에 계신
예수님의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영
(그의 사람의 영과
한 영으로
섞이신
그 신성하신 영)에 의해
[by the all-inclusive Spirit of Jesus;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예수님의 영으로]
그리스도를 살았고
또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그 휘장[장막] 안에서
(그 실용적인
[practical; 유용한, 실제의, 실지적인]
지성소인
그의 영 안에서)
또 그 진영
(종교의 인간적인 조직) 밖에서
살았습니다.
사람의 역사 안에 있는
그 신성한 역사 안에서
또 우리의
사람의 생명 안에 있는
그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께 열려 있는,
그분을 사랑하는,
그분을 받아들이는,
그분으로 채워지는,
또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각각의 모든 것들이
되시고
또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각각의 모든 것들을
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letting;
하시도록 허용하는, 하시게 해 드리는)
그릇들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기도 안에서
(in prayer; 기도로)
또 그 말씀의 사역 안에서
(in the ministry of the word;
그 말씀의 봉사로[직무로])
변함없이(steadfastly; 확고하게)
계속함으로써
사람의 역사 안에 있는
그 신성한 역사 안에서
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계시합니다;
이것은
그분의
하늘에 속한 사역 안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와의
공동 작용 안에 있는
(in coordination;
합동 안에 있는, 조화로, …와 협력하는)
그 사도의 사역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기도에 의하여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위에 있는 것들 위에
고정하고
(set; 놓고, 굳히고, 맞추고, 붙이고, 정하고,
배치하고, 바로잡고, 세우고, 향하게 하고)
또 그 하늘들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한 반영이
(reflection; 반사가, 반향이, 꼭 닮은 모습이)
됩니다;
우리는
기도에 의존하여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며,
사람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말씀의 사역에 의하여,
우리가
그 하늘에 속한
생명과 능력으로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 안으로
나누어 주고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유함으로
(riches; 부로, 풍성으로)
지탱되어
(may be sustained;
계속 살아가게 되어, 뒷받침되어,
격려받아, 부양[扶養]받아)
땅 위에서
그들의
하늘에 속한
생명이신(life; 생활로서)
그리스도를
삽니다.
사도행전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계시하는데
이들은
시편 68편에서 보여지는
사람의 역사 안에 있는
그 신성한 역사 안에서
살고,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 땅 위에서
하나님의
움직이심의
중심이시고
또 그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활동들의
실재이심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또 쏟아져 나오신(outpoured; 쏟아부어지신)
그 영이신
과정을 거치셨고
또 완결되신
그 삼일 하나님을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을 전함 안에서
그 수송과 확산을 위한
그 복음 전하는 이들의
“물가(shore; 기슭, 해안, 바닷가)”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주할(dwell; 살)
필요가 있습니다;
오순절날에
그들 모두가 갈릴리 사람들이었던,
적어도 백이십 (척)의 복음 “배들”이
그 복음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to spread; 퍼뜨리기 위해)
그 물가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1일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요엘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사람의 역사와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를
본다.
… 우리는
사람에게는
역사가 있지만
하나님께는
역사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우주 가운데에는
두 가지 역사가 있는데,
그것은 곧
인간 역사인
사람의 역사와
신성한 역사인
하나님의 역사이다.
우리는
사람의 역사를
호두나무 열매의
껍질에,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그 껍질 속에 있는
알맹이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외적이고 물질적인 껍질을
보기는 쉽지만,
껍질 속에 있는
알맹이를 보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면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신성한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일종의 내재적인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 두 역사,
곧 물질적인 인간 역사와
비밀한 신성한 역사에 대한
분명한 조망이
있어야 한다.
… 인간 역사
곧 세상의 역사는
외적인 것이다.
신성한 역사
곧 인류 안에 계시고
인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내적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인류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의
신성한 비밀에
속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인간 역사 안에서
태어났지만
신성한 역사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 만일 우리의 삶이
이 세상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인간 역사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 안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신성한 역사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교회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의 나타남과 관련해서
요엘서는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시고
복합되신
영,
곧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능,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능력으로
복합되신
하나님의 영의
쏟아부어짐에 관하여
말한다.
… 이분은 바로
오순절날에
쏟아부어지신
성령이시고
(행 2:1-4, 16-21),
이 영은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위한,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시자
그리스도의 실재화이시다.
그리스도의 나타남은
그분의 육체 되심으로
시작되었고
그 영의 쏟아부어지심으로
확증되고 강화되었는데,
이것은
그 영의
쏟아부어지심을 통해
개인적인 그리스도께서
단체적인 그리스도(고전 12:12-13),
곧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자
경건의 큰 비밀인
교회(딤전 3:15-16)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나타남인
교회는
영광스러운 복원의 날,
곧 천년왕국 시대를
이끌어 올 것이며
(욜 3:16-21),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는
더 완전한 방식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또한 이 복원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가장 완전하게 나타나시는 것으로
완결될 것이다
(계 21:1-2).
오순절날 이후로
땅 위에
삼일 하나님을
내적으로는
그들의 생명으로 소유하고
외적으로는
그들의 권위로 소유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어 왔다.
… 이러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이상이 있다면,
살아 있고 영향력 있는
믿음을 가지기가
쉬울 것이다.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할 때에는,
우리가
몸 안에
있고
몸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위해
머리이신 주님이
성취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몫으로
요구할
지위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요구할 수가 있다.
사도행전 28장 26절과 27절에서
영 하나님은
(이사야서 6장 9절과 10절에 있는)
이 말씀을
사도를 통해
마음이 굳은 사람들에게
다시 반복하셨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모든 움직임에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이
은혜의 하나님께
불순종했음을
가리킨다.
그 후
하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번식을 통해
그분의 왕국을
확산함으로
교회들을 건축하는
그분의 신약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셨다
(행 2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