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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부흥된 생활을 하고 목양하는 수고를 함으로써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함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하려면, 우리는 부흥된 생활 곧 매일 새로워지는 생활을 함으로써(고후 4:16-18) 우리의 승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새롭게 됨이 매일 아침 신선해져야 한다.

날마다 새로운 출발을 가지려면 우리는 아침 일찍 주님을 누려야 한다.

매일 아침 우리는 우리의 해이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떠오르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하며, 그럴 때 새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주님과 교통해야 하며, “주님, 새로운 시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날이 저의 생애에 기념이 될 만한 날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아침마다 부흥되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갖기 위해, 매일 아침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신 것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드려야 한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해야 할 뿐 아니라, 달콤한 방식으로 깊은 속에서부터 이렇게 해야 한다.

매일 아침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취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사신 분이시자 우리가 그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이다.

부흥된 생활을 하기 위해 우리는 극도로 주님을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가장 충만하게 누리고 얻는 것을 하루의 목표로 삼아 그분을 향해 사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제단과 천막의 생활을 하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결과로 우리는 헌신을 하게 되며 제단을 쌓게 된다. 제단은 우리의 온 존재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분께 경배하기 위한 것이다. 제단을 쌓는 것은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을 위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이시며, 우리의 생활의 의미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뜻한다.

천막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와 체류자로서 더 좋은 고향을 찾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건축하신 성인 새 예루살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날마다 새롭게 부흥되는 것은 매일 신선하게 변화되는 것이다. 평생 이렇게 변화되는 상태로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생명 안에서 성장하여 성숙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네 가지 항목을 통해 날마다 새로워지는데, 그것은 십자가(고후 4:10-12, 16-18), 우리를 신성한 생명으로 재조정하시고 다시 만드시고 개조하시는 성령(딛 3:5), 우리의 연합된 영(엡 4:23),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엡 5:26)이다.

우리는 새로움 안에서 주님의 상에 나아와야 한다(마 26:29). 주님은 절대로 낡은 상을 받지 않으신다. 우리는 “죄송합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새롭게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매일 아침 주님의 새로운 자비를 얻어 그분에 의해 새로워지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고, 우리가 통과한 고난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하려면,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승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귀결되는 교회인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기 위해 그분의 어린양들을 먹이고 그분의 양들을 목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시기 위한 그분의 사역에서 보여 주신 본에 따라 사람들을 목양해야 한다.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과 구주의 목양하고 찾는 영이 없는 것이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며(그들을 행복하게 하고, 즐겁고 편안한 느낌을 갖게 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서 사람들을 보양해야 한다(세 단계의 사역 안에 계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먹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사마리아를 거쳐 가시다가 의도적으로 우회하여 수가라는 동네에 가셔야 했는데, 그것은 부도덕한 한 여인을 얻으시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그녀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심으로써 그녀를 보살피셨는데, 이것은 생명수의 강이신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으로 그녀를 보양하시기 위해서였다.

죄가 없는 분이신 주님은 간음한 여인을 유죄판결 하지 않으시고, 법리적으로 그녀의 죄들을 용서하시고 유기적으로 그녀를 죄들에서 해방하심으로써 그녀를 보살피셨다(요 8:1-11, 32, 36).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 첫 번째로 구원하신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은 강도였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주님은 세리장인 한 사람을 방문하여 얻으시려고 여리고에 가셨으며, 이러한 주님의 복음 전파는 일종의 목양이었다(눅 19:1-10). 주님은 또한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심으로써 그들의 부모들을 보살피셨다.

금등잔대들인 교회들을 돌보시는 데 있어서, 승천하신 주님은 ‘거니시는 그리스도’이시고 ‘말씀하시는 영’이시다. 교회들 가운데를 거니심으로써 그분은 각 교회의 상태를 알게 되시고, 그런 후에 그분께서 보신 것에 따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교회들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그분의 이기는 이들이 되게 하시려는 목표를 위해 그들을 신진대사적으로 또 유기적으로 변화시키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기 위해 젖을 먹이는 어머니와 권유하는 아버지처럼 성도들을 목양한 사도 바울의 본에 따라 사람들을 목양해야 한다.

바울은 ‘대중 앞에서나 이 집 저 집에서’(행 20:20) 에베소의 성도들을 가르치고, 삼 년 동안 눈물로 성도들 각 사람을 훈계하며(31, 19절), 하나님의 모든 의결을 그들에게 선포함으로써(27절) 그들을 목양했다.

바울은 믿는 이들에게 친밀한 관심을 가졌고(고후 7:2-7, 몬 7, 12), 연약한 사람들을 얻을 수 있기 위해 그들의 수준에까지 내려갔다.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그가 가진 것, 곧 그의 소유물을 기쁘게 소비하고, 그의 존재, 곧 그 자신까지도 기쁘게 소비하고자 했다(고후 12:15). 그는 전제물로서, 곧 포도주를 생산하는 분이신 그리스도와 하나인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하였다.

바울은 그 영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했으며, 그 결과 그 영을 공급함으로 사람을 존귀하게 할 수 있었다.

바울은 그의 가르침에서 교회가 사람들을 양육하는 가정이고, 사람들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병원이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온전하게 하는 학교임을 시사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무엇이 되든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이 사랑이라는 것을 계시했다. 즉 사랑이 이긴다는 것을 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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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행 20:28 성령께서 여러분을 온 양 떼의 감독들로 세우셨으니,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온 양 떼를 위해 스스로 조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 오신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십시오.

고후 12:15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은 나의 소유물을 더더욱 기쁘게 소비하고, 나 자신까지도 다 소비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아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약하지만 자신은 약하지 않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즉 우리는 자신이 강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린도전서 9장 22절에서 바울은 “약한 사람들을 얻기 위하여 약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약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약한 사람의 수준에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픈 이들에게 우리는 아픈 사람의 수준에까지 내려간다. 이것이 사람들을 방문하여 목양하는 길이다. 바울은 또한 “누가 걸려 넘어지면 나 자신도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29)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락하여 넘어진 모든 사람 때문에 슬퍼하고 분개하여 애가 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는 선한 목자로서의 바울의 본을 보여 준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의 장로들과 말할 때 자신이 ‘대중 앞에서나 이 집 저 집에서’(20절) 그들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그의 모든 수고에 더하여 그는 여전히 성도들의 가정을 이 집 저 집 방문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였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선포하였고(20절) 하나님의 모든 의결을 그들에게 선포하였다(27절). 사도 바울이 한 온전하게 하는 일은 얼마나 놀라운가!

바울은 거듭거듭 성도들의 각 가정에 다시 가서 그들을 권유하며 눈물로 그들을 훈계했다. 사도는 동정과 눈물로 가득한 말을 해야 한다. 사도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는 법을 배우라. 사도행전 20장 1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모든 겸손과 많은 눈물로 노예로서 주님을 섬겼다고 말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자신이 쉬지 않고 성도들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했다고 말한다. 사도는 자신의 목양 아래 있는 사랑스러운 이들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의결에 관한 모든 것을 눈물로 말한다. 사도는 대중 앞에서 말할 뿐 아니라 또한 성도들의 가정들을 방문한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마지막 절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라는 것을 계시한다(31하절). 어떻게 장로가 될 수 있는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다. 어떻게 동역자가 될 수 있는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목양하는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다. 사랑은 신언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가장 뛰어난 길이다. 사랑은 우리가 무엇이 되든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이다.

교회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경찰서나 심판하는 법원이 아니라 믿는 이들을 양육하는 가정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들에게 더 많은 양육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교회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사랑이 있는 가정이다. 또한 교회는 병든 이들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병원이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이해력이 부족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을 가르치고 온전하게 하는 학교이다. 교회가 가정이자 병원이자 학교이기 때문에, 동역자들과 장로들은 주님과 하나 되어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을 양육하고 치료하며 회복시키고 가르쳐야 한다.

사랑은 덮어 주고 건축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무엇이 되든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이다.

나는 우리가 목양에 관한 이러한 부담을 받아들임으로 우리 가운데 진정한 부흥이 있기를 바란다. 모든 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놀라운 목양에 참여한다면 회복 안에 큰 부흥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많이 말하고 가르쳤지만 목양이 아주 부족했다. 목양과 가르침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움직이기 위한 두 발과 같다. 우리의 목양은 항상 가르침과 함께해야 하고, 우리의 가르침은 항상 목양과 함께해야 한다.

5일

요 21:15-16 그들이 아침을 먹고 나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여, 이 사람들보다 그대가 나를 더 사랑하십니까?” 그가 예수님께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먹이십시오.”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 그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여, 그대가 나를 사랑하십니까?” 그가 예수님께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목양하십시오.”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과 구주의 목양하고 찾는 영이 없는 것이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알지만, 열매가 거의 없다. 주님은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게 됩니다.”(마 12:33)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어떤 열매도 없는 나무이다. 우리에게 열매가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과 아들의 목양하고 찾는 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목양하고 찾기보다는 유죄판결 하고 통제한다. 우리에게는 사랑과 목양이 부족하다. 우리는 학개가 말한 것처럼(학 1:5) 우리의 길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방법은 옳지 않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죄인들을 목양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첫 번째 복음 전파자이신 그리스도는 목양하심으로 그분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그분은 세리장인 한 사람을 방문하시려고 여리고에 가셨다(눅 19:1-10). 그분의 갈망은 한 사람을 얻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그분의 복음 전파는 일종의 목양이었다.

요한복음 4장은 주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거쳐 가셔야만 했다.”(4절)라고 말한다. 그분은 이전에 남편 다섯이 있었던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을 접촉하시려고 주요 도로에서 벗어나 야곱의 우물에서 가까운 수가로 우회하셨다. 주님은 그녀가 야곱의 우물에 올 것을 미리 아셨다. 야곱의 우물은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그리스도는 샘솟아 올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물의 원천이시다(14하절). 우리는 단 한 사람을 얻기 위해 일부러 수가로 우회하신 주님의 본을 배워야 한다.

한 사람을 얻기 위해 삼 년을 들이는 것은 가치가 있다. 우리가 삼 년을 들여 지속적으로 한 사람을 방문한다면 그를 얻게 될 것이다. 십이 년 후에는 우리를 따라 교회 집회에 오는 새로운 네 사람이 있을 것이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교회들을 보양하시기 위해 신성 안에서 그분의 가슴의 금띠로 상징된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 등잔대들인 교회들을 돌보신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그리스도께서 등잔대들을 돌보시는 것을 계시한다. 한 면으로 그분은 교회 등불의 심지를 정돈하시는데, 일곱 교회에게 보내신 일곱 서신에 언급된 모든 잘못과 부족과 실패와 결점을 잘라 내신다. 인성 안에서 그리스도는 정돈하는 일을 가장 능숙하게 하심으로써 교회들을 소중히 보살피신다.

그리스도는 또한 ‘힘 있는 띠’인 신성을 지니신 대제사장으로서, 세 단계로 된 충만한 사역 안에 계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이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보양하신다.

그리스도는 교회들이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하며, 그분에 의해 일곱 배로 강화됨으로써 이기는 이들이 되도록 신성 안에서 교회들을 보양하신다.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인성 안에서 그분은 쉽게 우리의 연약한 느낌을 공감하신다. 그분은 인성 안에서 우리를 소중히 보살피고 계신다. 동시에, 신성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인격의 모든 긍정적인 방면으로 우리를 보양하고 계신다. 그분은 회복 안에서 두 방식으로 교회들을 돌보고 계신다. 인성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소중히 보살피셔서 합당하게 만드시고, 기쁘고 즐겁고 편안하게 해 주신다. 신성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보양하셔서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함으로 그분의 이기는 이들이 되어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도록 하신다.

4일

딛 3:5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긍휼에 따라 새로 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함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엡 4:23 또한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엡 5:26 이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말씀 안에 있는 씻는 물로 교회를 깨끗이 하여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가 새로워지는 것을 도우시려고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 첫 번째로 예비하신 것은 십자가 곧 예수님의 죽음이다. 고린도후서 4장에 따르면, 바울은 항상 주님의 죽음 곧 십자가의 죽임 아래 있었다.

두 번째로 예비하신 것은 성령이다.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계신다. 성령께서 하시는 주된 일은 먼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고, 그런 다음 우리를 매일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신진대사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새로운 공급을 매일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소유한 것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께서 세 번째로 예비하시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의 연합된 영, 곧 신성한 영과 연합된 우리 사람의 영이다. 성령은 우리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고 우리 사람의 영 안에서 일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에베소서 4장 23절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영은 우리가 새롭게 되는 곳이다. 우리의 연합된 영은 우리의 생각 안으로 확장되어 우리의 생각의 영이 된다. 우리는 이러한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변화된다.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에 유의한다면 고난을 덜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사를 통하여 볼 때 많은 영적인 사람들의 체험은 정반대였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통과한 고난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는 피난처가 있다. 이 피난처는 우리의 영이다. 우리는 생각에서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떠한 공격을 받을지라도 보호받고 숨겨지며 감추어질 것이다.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는 새롭게 된다.

십자가와 성령과 우리의 영에 더해서, 우리는 거룩한 말씀을 가지고 있다. 몸의 머리이신 분은 말씀 안에 있는 씻는 물로 그분의 몸인 교회를 깨끗이 하신다(엡 5:26). 나는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하는 로마서 8장 4절에 대해 생각할 때 씻음을 받는다. 우리 모두는 매일 말씀 안에 있는 물로 씻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말씀에 나아올 때, 어떤 장이나 절이든 말씀은 우리를 씻을 것이다. 말씀 안에는 우리를 씻는 물이 있다. ‘씻음’은 ‘새롭게 함’과 동의어이다. 십자가, 성령, 우리의 연합된 영, 거룩한 말씀이라는 네 가지 항목들로 우리는 새롭게 될 수 있다.

주님의 상(床)에 올 때마다 우리는 새롭게 되어야 한다. 주 예수님은 상을 세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여러분과 함께 새것을 마시는 그날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습니다.”(마 26:29) 주님은 여기에서 하나의 원칙을 세우셨다. 주님께서 세우신 상은 새로운 것이었고, 주님께서 그분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받으실 상도 새로운 것일 것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를 낡아지게 하는 원인과 요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상에 올 때 가장 먼저 철저히 자백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은 무엇이든지 자백하고 처리해야 한다. 우리를 낡아지게 만드는 또 다른 것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항상 사람들을 용서하고, 항상 용서를 구하기를 힘쓰라. 다른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우리를 낡아지게 하는 원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배우자에게 이렇게 말하기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미안해요. 나를 용서해 주세요.” 우리는 이러한 교통이 날마다 우리의 체험이 되어서 나날이 새로워지는 실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3일

창 12:7-8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씨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그는 그곳을 떠나 벧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옮겨 가서, … 그는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제단과 천막의 생활이다. 제단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천막은 세상을 향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제단을 쌓고 천막에서 살기를 요구하신다. 제단과 천막은 연결된 것이고,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창세기 12장 7절에서 우리는 제단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근거한 것임을 본다. 어느 누구도 먼저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릴 수 없다. 헌신은 사람이 권면하고 재촉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신다면, 누구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원하여 제단에 바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때, 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헌신이 일어난다. 우리가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뵙고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접촉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솔하게 접촉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사람이 일단 하나님을 접촉하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 수 없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우리 안에 무궁무진한 능력을 가져오고, 한 사람의 인생의 전 노정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능력은 하나님을 보는 것에 달려 있다. 오! 우리가 주님을 섬기려고 결심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제단을 쌓으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제단이 산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실 때 제단이 세워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자,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았다. 그가 쌓은 제단은 속죄제물이 아닌 번제물을 바치는 제단이었다. 속죄제물은 구속받기 위한 것이지만, 번제물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한 것이다. 이 제단은 우리를 위한 주 예수님의 대속하는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제단은 바로 로마서 12장 1절에 언급된 제단과 같다.

제단의 결과는 천막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기 전에는 천막을 언급하지 않는다.

천막은 움직이는 것이지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제단을 통해 우리를 처리하시고, 천막을 통해 우리의 소유를 처리하신다. 아브라함은 제단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면 그 이후로 그에게는 옷이나 소유가 전혀 없었는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소와 양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 밖의 많은 것들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천막에 거주하는 사람이었다. 제단에서 불태우지 않은 것은 오직 천막 안에만 보관할 수 있었다. 제단을 통과하여 우리가 사용하도록 남겨진 것은 오직 천막 안에만 둘 수 있다.

우리가 헌신의 중요성을 보고 제단과 천막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구한다!

이러한 매일의 부흥은 변화를 가져온다. 로마서 12장 2절은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되어”라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은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게서 비롯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변화가 주님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가 그분을 바라볼수록 우리는 더욱더 주님의 영광을 반사하게 되고,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른 단계의 영광에 이르러 더욱더 주님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된다. 이러한 변화는 주 영에게서 비롯된다. 부흥뿐 아니라 변화도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새롭게 부흥되는 것은 매일 신선하게 변화되는 것이다. 평생 이렇게 변화되는 상태로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생명 안에서 성장하여 성숙에 이를 것이다. 이런 종류의 부흥과 새로워짐과 변화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2일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 가고 있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잠 4:18 그러나 의인들의 길은 여명의 빛 같아 점점 더 밝게 빛나 한낮에 이른다.

마태복음 13장 43절에서 이기는 이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빛나는 해에 비유된다. 해는 매일 아침 새롭게 떠오른다. 이기는 이들이 되려면, 해와 같이 우리 또한 매일 아침 일어나 주님에 의해 부흥되어야 한다. 우리는 해를 따라 매일 아침 부흥되고 새로운 시작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길은 여명의 빛 같아 점점 더 밝게 빛나 한낮에 이른다. 나는 고린도후서 4장 16절의 ‘나날이’라는 바울의 표현을 좋아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단지 하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이것은 매일매일 우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흥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제 아침에 부흥되었을지 모르지만, 오늘 아침에 또 한 번 부흥되는 것이 필요하고, 내일 또다시 부흥되는 것이 필요하다. 매년 우리에게는 나날이 새로워지기 위해 삼백육십오 번의 부흥이 필요하다.

매일 우리는 새롭게 되는 것이 필요하고, 이렇게 새롭게 됨으로써 나날이 신선해져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적 생명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깥의 행동이나 표현이 새롭게 되는 것과 반대된다. 하나님은 매일 해가 떠오를 때 새로운 시작이 있고 신선하게 새로워지는 자연법칙을 세우셨다. 같은 법칙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적용된다. 매일 아침 우리는 우리의 해이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떠오르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하며, 그럴 때 새로워질 수 있다.

이것을 위해 우리 모두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 한다. 일찍 일어날 때 그리스도인은 엄청난 혜택을 얻는다. 매일 아침 해 뜰 때가 우리가 일어나서 주님과 교통을 가져야 할 때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새로운 시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날이 저의 생애에 기념이 될 만한 날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한 면에서 우리는 이렇게 신선한 헌신을 하며 주님 앞에서 기다린다. 다른 한 면에서 우리는 주님에게서 신선한 은택과 빛 비춤을 받는다. 이 모든 신선함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부흥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아침마다 부흥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바울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되는 것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난다. 나는 이것이 우리 가운데 합당하게 실행되기를 바란다. 모든 동역자들과 장로들은 모든 곳에서 이러한 나팔을 불어서 모든 성도들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수 있도록 일깨워야 한다.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주님을 합당한 방식으로 접촉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리 바쁘다 해도,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다 해도 주님을 접촉하기 전에 그것들을 제쳐 두어야 한다.

주님과의 이러한 접촉은 되도록이면 삼십 분은 되어야 한다. 최소한 십오 분 동안은 주님을 접촉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레위기 6장 12절은 우리에게 “제사장은 아침마다 제단 위에 장작을 불 피우고, 그 (제단) 위에 번제물을 가지런히 놓은 다음”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갖기 위해, 매일 아침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신 것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해야 할 뿐 아니라, 달콤한 방식으로 깊은 속에서부터 이렇게 해야 한다. 아침의 십오 분은 주로 기도하고 간청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말씀드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주님을 직접 접촉하는 시간이다. 이런 이유로, 이 시간을 보내는 가장 좋은 길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방식으로 주님의 말씀 몇 절을 기도로 읽음으로 주님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과 신선한 부흥을 갖게 될 것이다.

신언노트, 2023 04 30

부흥된 생활을 하고
목양하는 수고를 함으로써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함
한 부흥된 생활과
또 목양함의 한 수고를
가짐에 의하여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들을 준비함

우리에게
주님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부터 우리는
매일 부흥되어
이기는 생활을 하고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며
모든 시간을 구속하여
사람들을 접촉하는 데
힘써야 한다.
성도들을
한 명 한 명 돌보라.
한 번에
너무 많은 사람을 접촉하기를
바라지 말라.
가장 효과적인 길은
느리지만
확실한 길이다.

우리가
하루에 한 사람을 접촉한다면,
일 년에 삼백육십오 명을
접촉하게 될 것이다.
어떤 교회에
세 명의 장로가 있는데
그들이 매일
사람들을 접촉한다면,
일 년 동안 그들은
모든 성도들을
여러 번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많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다.
오늘날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이러한 형제자매들을 접촉하여
사랑 안에서
관심하며 돌보아야 하고,
이들을
돕고 목양하는 데
분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과
모든 시간을 드려
사람들을
접촉하고 목양하는
이 문제를
회복해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에베소서 4장
12절부터 16절까지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인 건축과
고린도전서 14장 26절에서 볼 수 있는
상호적인 집회가
우리 가운데서
실현되고 실행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그 기반이 되는,
날마다 부흥되고
날마다 이기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또한
우리의 승리를 유지하기 위해
주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생활과 일이 필요하다.
우리가
부흥된 생활을
하지 않거나
목양하는 데
수고하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승리를 유지하는
다른 길은 없다.
우리의 승리를 유지해 주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생활과 일이다.
우리에게는
이 두 방면이
모두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전쟁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패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겼다.
우리는
승리의 위치에서 싸우고
승리를 유지하기 위해 싸운다.
승리는 이미
우리 손에 있다.
에베소서에 언급된 전쟁은
이기는 이의 전쟁이다.
우리는
싸움을 통해
이기는 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둘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탄이 어떻게
우리를 유혹하는가?
사탄은
우리가
우리의 위치와 승리를
잊어버리게 한다.
그는
우리를 눈멀게 하여
우리의 승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그의 계략을 받아들인다면,
승리가
멀리 있고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승리가 완전하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일생 전체가
이 승리에 포함될 정도로
이 승리는 완전하다!
이것을
우리가 믿을 때 즉시
이기게 된다.
사탄은 패배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겼다.
사탄은
우리가 얻은 승리를
훔쳐 가려고 한다.
우리가 승리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사탄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일로
사탄의 일에 맞서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나타나심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사탄을 대적한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께서 성취하신 일 위에
서 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는
이기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일단 우리가
이기려고 하는 생각을
아주 조금이라도 한다면,
우리의 위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다.
이기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자신이 이미
이겼다는 것을 알고
대적하는 사람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은 확실히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하려면,
우리는
부흥된 생활
곧 매일 새로워지는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의 승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새롭게 됨이
매일 아침
신선해져야 한다.

날마다
새로운 출발을 가지려면
우리는 아침 일찍
주님을 누려야 한다.

매일 아침 우리는
우리의 해이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떠오르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하며,
그럴 때
새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주님과 교통해야 하며,
“주님,
새로운 시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날이
저의 생애에
기념이 될 만한 날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아침마다 부흥되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가지기 위해,
매일 아침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신 것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드려야 한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해야 할 뿐 아니라,
달콤한 방식으로
깊은 속에서부터
이렇게 해야 한다.

매일 아침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취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사신 분이시자
우리가
그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취하는 것이다.

부흥된 생활을 하기 위해
우리는
극도로 주님을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가장 충만하게 누리고
얻는 것을
하루의 목표로 삼아
그분을 향해 사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13장 43절에서
이기는 이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빛나는
해에 비유된다.
해는
매일 아침
새롭게 떠오른다.
이기는 이들이 되려면,
해와 같이
우리 또한
매일 아침 일어나
주님에 의해
부흥되어야 한다.
우리는
해를 따라
매일 아침
부흥되고
새로운 시작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길은
여명의 빛 같아
점점 더 밝게 빛나
한낮에 이른다.
나는 고린도후서 4장 16절의
‘나날이’라는 바울의 표현을
좋아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단지 하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이것은
매일매일
우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흥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제 아침에
부흥되었을지 모르지만,
오늘 아침에 또 한 번
부흥되는 것이 필요하고,
내일 또다시
부흥되는 것이 필요하다.
매년 우리에게는
나날이 새로워지기 위해
삼백육십오 번의 부흥이 필요하다.

매일 우리는
새롭게 되는 것이 필요하고,
이렇게 새롭게 됨으로써
나날이 신선해져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적 생명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깥의 행동이나 표현이
새롭게 되는 것과 반대된다.
하나님은
매일 해가 떠오를 때
새로운 시작이 있고
신선하게 새로워지는
자연법칙을 세우셨다.
같은 법칙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적용된다.
매일 아침 우리는
우리의 해이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떠오르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하며,
그럴 때
새로워질 수 있다.

이것을 위해
우리 모두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 한다.
일찍 일어날 때
그리스도인은
엄청난 혜택을 얻는다.
매일 아침 해 뜰 때가
우리가
일어나서
주님과 교통을 가져야 할 때이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새로운 시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날이
저의 생애에
기념이 될 만한 날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한 면에서 우리는
이렇게 신선한 헌신을 하며
주님 앞에서 기다린다.
다른 한 면에서
우리는
주님에게서
신선한 은택과 빛 비춤을
받는다.
이 모든 신선함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부흥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아침마다 부흥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바울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되는 것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난다.
나는
이것이
우리 가운데
합당하게 실행되기를
바란다.
모든 동역자들과 장로들은
모든 곳에서
이러한 나팔을 불어서
모든 성도들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수 있도록
일깨워야 한다.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주님을
합당한 방식으로
접촉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리 바쁘다 해도,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다 해도
주님을 접촉하기 전에
그것들을
제쳐 두어야 한다.

주님과의 이러한 접촉은
되도록이면
삼십 분은 되어야 한다.
최소한 십오 분 동안은
주님을 접촉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레위기 6장 12절은
우리에게
“제사장은
아침마다
제단 위에
장작을 불 피우고,
그 (제단) 위에
번제물을
가지런히 놓은 다음”
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가지기 위해,
매일 아침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신 것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매일
이렇게 해야 할 뿐 아니라,
달콤한 방식으로
깊은 속에서부터
이렇게 해야 한다.
아침의 십오 분은 주로
기도하고 간청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말씀드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주님을 직접 접촉하는 시간이다.
이런 이유로,
이 시간을 보내는
가장 좋은 길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방식으로
주님의 말씀 몇 절을
기도로 읽음으로
주님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새로운 시작과
신선한 부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제단과 천막의 생활이다.
제단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천막은
세상을 향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제단을 쌓고
천막에서 살기를
요구하신다.
제단과 천막은
연결된 것이고,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창세기 12장 7절에서
우리는
제단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근거한 것임을 본다.
어느 누구도 먼저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릴 수 없다.
헌신은
사람이 권면하고 재촉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신다면,
누구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원하여
제단에 바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때,
그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헌신이 일어난다.
여러분이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뵙고
또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접촉한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볍게(쉽게, 재빠르게, 경솔하게)
접촉될 수 없는
어떤 분이시다!
일단 한 사람이
하나님을 접촉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을 위해(스스로,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우리 안에
무궁무진한 능력을 가져오고,
한 사람의 인생의
전 노정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그 능력은
그가 하나님을 보는 것에
달려 있다.
오! 우리가
주님을 섬기려고
결심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제단을 쌓으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제단이 산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실 때
제단이 세워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자,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았다.
그가 쌓은 제단은
속죄제물이 아닌
번제물을 바치는 제단이었다.
속죄제물은
구속받기 위한 것이지만,
번제물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한 것이다.
이 제단은
우리를 위한
주 예수님의 대속하는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제단은 바로
로마서 12장 1절에 언급된
제단과 같다.

제단의 결과는
천막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기 전에는
천막을 언급하지 않는다.

천막은
움직이는 것이지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제단을 통해
우리를 처리하시고,
천막을 통해
우리의 소유를 처리하신다.
아브라함은
제단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면 그 이후로
그에게는
옷이나 소유가
전혀 없었는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소와 양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 밖의 많은 것들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천막에 거주하는 사람이었다.
제단에서 불태우지 않은 것은
오직 천막 안에만
보관할 수 있었다.
제단을 통과하여
우리가 사용하도록 남겨진 것은
오직 천막 안에만
둘 수 있다.

우리가
헌신의 중요성을 보고
제단과 천막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구한다!

이러한 매일의 부흥은
변화를 가져온다.
로마서 12장 2절은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되어”
라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은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게서 비롯됩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변화가
주님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가
그분을 바라볼수록
우리는 더욱더
주님의 영광을
반사하게 되고,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른 단계의 영광에 이르러
더욱더 주님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형된다.
이 변형은
주 영께로부터 있다.
단지 한 부흥뿐 아니라
또한 한 변형도 있다.
그러므로 매일 다시 새롭게 되는
한 부흥을 가지는 것은
매일 신선한
한 변형을 가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전 생애 동안
이 변형 안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주님의 생명 안에서 성장할 것이고
결국 우리는
성숙하게 된다.
이런 종류의
부흥, 다시 새롭게 됨, 또 변형이
오늘날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제단과 또 그 천막의
생활을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결과로
우리는
헌신을 하게 되며
제단을 쌓게 된다.
제단은
우리의 온 존재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분께 경배하기 위한 것이다.
제단을 쌓는 것은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을 위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이시며,
우리의 생활의 의미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 천막의 생활을 사는 것은
우리가
그 땅 위에 있는
이방인들과 또 체류자들이고
더 좋은 한 나라를(조국을, 고향을)
찾고 있으며,
또 하나님에 의해 건축된 그 도시,
곧 그 새 예루살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우리의 선포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로워지는 것을
도우시려고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
첫 번째로 예비하신 것은
십자가
곧 예수님의 죽음이다.
고린도후서 4장에 따르면,
바울은 항상
주님의 죽음
곧 십자가의 죽임 아래 있었다.

두 번째로 예비하신 것은
성령이다.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계신다.
성령께서 하시는 주된 일은
먼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고,
그런 다음 우리를
매일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신진대사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새로운 공급을
매일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새롭게 하시는 성령을
소유한 것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께서
세 번째로 예비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의 섞인 영,
곧 신성한 영과 섞인
우리 사람의 영이다.
성령은
우리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고
우리 사람의 영 안에서 일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에베소서 4장 23절은
우리가
우리의 생각의 영 안에서
다시 새롭게 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영은
우리가 그 다시 새롭게 됨을
받아들이는 그 곳이다.
우리의 섞인 영은
우리의 생각 안으로 확장되어
우리의 생각의 영이 된다.
우리가
우리의 변형을 위하여
다시 새롭게 되는 것은
그러한 한 영 안에서이다
(in such a spirit).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에 유의한다면
고난을 덜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사를 통하여 볼 때
많은 영적인 사람들의 체험은
정반대였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 다시 새롭게 됨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통과한 고난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는
피난처가 있다.
이 피난처는
우리의 영이다.
우리는
생각에서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떠한 공격을 받을지라도
보호받고 숨겨지며 감추어질 것이다.
우리가 다시 새롭게 될 것은
우리의 영 안에서이다.

십자가와 성령과 우리의 영에 더해서,
우리는
거룩한 말씀을 가지고 있다.
몸의 머리이신 분은
말씀 안에 있는 씻는 물로
그분의 몸인 교회를
깨끗이 하신다.
나는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을 말하는
로마서 8장 4절에 대해 생각할 때
씻음을 받는다.
우리 모두는 매일
말씀 안에 있는 물로
씻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말씀에 나아올 때,
어떤 장이나 절이든
말씀은
우리를 씻을 것이다.
말씀 안에는
우리를 씻는
물이 있다.
‘씻음’은
‘다시 새롭게 함’과
동의어이다.
십자가, 성령,
우리의 연합된 영, 거룩한 말씀이라는
네 가지 항목들로
우리는
그 다시 새롭게 됨을
받아들일 수 있다.

주님의 상(床)에 올 때마다
우리는
다시 새롭게 됨을
필요로 한다.
주 예수님은
상을 세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여러분과 함께
새것을 마시는 그날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습니다.”
(마 26:29)
주님은 여기에서
하나의 원칙을 세우셨다.
주님께서 세우신 상은
새로운 것이었고,
주님께서
그분의 아버지의 왕국에서 받으실 상도
새로운 것일 것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를 낡아지게 하는
원인과 요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상에 올 때
가장 먼저
철저히 자백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은 무엇이든지
자백하고 처리해야 한다.
우리를 낡아지게 만드는
또 다른 것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항상 사람들을 용서하고,
항상 용서를 구하기를 힘쓰라.
다른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우리를 낡아지게 하는 원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배우자에게
이렇게 말하기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미안해요.
나를 용서해 주세요.”
우리는
이 교통이
날마다
우리의 체험이 되어서
우리가
나날이 다시 새로워짐의
그 실재 안으로
더 많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네 가지 항목들을 통해
날마다 다시 새로워지는데,
이는
그 십자가,
우리를
그 신성한 생명으로
재조정하시고(수리하시고)
다시 만드시고(새로 만드시고)
개조하시는(고치시는)
성령,
우리의 섞인 영,
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다.

우리는
새로움 안에서
주님의 상에
나아올 필요가 있다.
주님은 절대로
낡은 상을 취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죄송합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을
배움에 의해
다시 새롭게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매일 아침
주님의 새로운 자비를(연민들을) 받아들여
우리가
그분의 다시 새롭게 하심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고,
우리가 통과한 고난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과
구주의 목양하고 찾는 영이 없는 것이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알지만,
열매가 거의 없다.
주님은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게 됩니다.”
(마 12:33)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어떤 열매도 없는 나무이다.
우리에게
열매가 없는 것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과
아들의 목양하고 찾는 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목양하고 찾기보다는
유죄판결 하고 통제한다.
우리에게는
사랑과 목양이 부족하다.
우리는
학개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길들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숙고해야만) 한다.
우리의 방법은
옳지 않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죄인들을 목양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첫 번째 복음 전파자이신
그리스도는
목양하심으로
그분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그분은
세리장인 한 사람을
방문하시려고
여리고에 가셨다.
그분의 갈망은
한 사람을 얻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그분의 복음 전파는
일종의 목양이었다.

요한복음 4장은
주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거쳐
가셔야만 했다.”
(4절)라고 말한다.
그분은
이전에 남편 다섯이 있었던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을 접촉하시려고
주요 도로에서 벗어나
야곱의 우물에서 가까운
수가로 우회하셨다.
주님은
그녀가
야곱의 우물에 올 것을
미리 아셨다.
야곱의 우물은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그리스도는
샘솟아 올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물의 원천이시다.
우리는
단 한 사람을 얻기 위해
일부러 수가로 우회하신
주님의 본을
배워야 한다.

한 사람을 얻기 위해
삼 년을 들이는 것은
가치가 있다.
우리가
삼 년을 들여
지속적으로 한 사람을 방문한다면
그를 얻게 될 것이다.
십이 년 후에는
우리를 따라
교회 집회에 오는
새로운 네 사람이
있을 것이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교회들을 보양하시기 위해
신성 안에서
그분의 가슴의 금띠로 상징된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
등잔대들인 교회들을
돌보신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그리스도께서
등잔대들을 돌보시는 것을
계시한다.
한 면으로 그분은
교회 등불의 심지를
정돈하시는데,
일곱 교회에게 보내신
일곱 서신에 언급된
모든 잘못과 부족과
실패와 결점을
잘라 내신다.
인성 안에서
그리스도는
정돈하는 일을
가장 능숙하게 하심으로써
교회들을 소중히 보살피신다.

그리스도는 또한
‘힘 있는 띠’인
신성을 지니신
대제사장으로서,
세 단계로 된
충만한 사역 안에 계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이신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보양하신다.

그리스도는
교회들이
그분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하며,
그분에 의해
일곱 배로 강화됨으로써
이기는 이들이 되도록
신성 안에서
교회들을 보양하신다.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인성 안에서
그분은 쉽게
우리의 연약한 느낌을 공감하신다.
그분은
인성 안에서
우리를 소중히 보살피고 계신다.
동시에, 신성 안에서
그분은
그분의 인격의(위격의)
모든 긍정적인 방면으로
우리를 보양하고 계신다.
그분은
회복 안에서
두 방식으로
교회들을 돌보고 계신다.
인성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소중히 보살피셔서
합당하게 만드시고,
기쁘고 즐겁고 편안하게 해 주신다.
신성 안에서
그분은
우리를 보양하셔서
우리가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고 성숙함으로
그분의 이기는 이들이 되어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도록 하신다.

주님의 오심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하려면,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승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귀결되는
교회인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기 위해
그분의 어린양들을 먹이고
그분의 양들을 목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시기 위한
그분의 사역에서 보여 주신
본에 따라
사람들을 목양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사람들을 보살펴야 하며
(그들을
행복하게 하고,
즐겁고 편안한 느낌을 가지게 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서
사람들을 보양해야 한다
(세 단계의 사역 안에 계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먹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사마리아를 거쳐 가시다가
의도적으로 우회하여
수가라는 동네에 가셔야 했는데,
그것은
부도덕한 한 여인을
얻으시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그녀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심으로써
그녀를 보살피셨는데,
이것은
생명수의 강이신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으로
그녀를 보양하시기 위해서였다.

죄가 없는 분이신 주님은
간음한 여인을
유죄판결 하지 않으시고,
법리적으로(사법적으로, 재판에 의해)
그녀의 죄들을 용서하시고
유기적으로
그녀를 죄들에서 해방하심으로써
그녀를 보살피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
첫 번째로 구원하신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은
강도였다는 것도 또한
의미심장하다.

주님은
세리장인 한 사람을
방문하여 얻으시려고
여리고에 가셨으며,
이러한 주님의 복음 전파는
일종의 목양이었다.
주님은 또한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심으로써
그들의 부모들을 보살피셨다.

금등잔대들인 교회들을
돌보시는 데 있어서,
승천하신 주님은
‘거니시는 그리스도’이시고
‘말씀하시는 영’이시다.
교회들 가운데를 거니심으로써
그분은
각 교회의 상태를 알게 되시고,
그런 후에
그분께서 보신 것에 따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교회들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그분의 이기는 이들이 되게 하시려는
목표를 위해
그들을
신진대사적으로
또 유기적으로
변형시키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약하지만
자신은 약하지 않다는
태도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즉 우리는 자신이
강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린도전서 9장 22절에서
바울은
“약한 사람들을 얻기 위하여
약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약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약한 사람의 수준에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픈 이들에게
우리는
아픈 사람의 수준에까지 내려간다.
이것이
사람들을
방문하여 목양하는 길이다.
바울은 또한
“누가 걸려 넘어지면
나 자신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고후 11:29)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락하여 넘어진 모든 사람 때문에
슬퍼하고 분개하여
애가 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는
선한 목자로서의 바울의 본을
보여 준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의 장로들과 말할 때
자신이
‘대중 앞에서나
이 집 저 집에서’
그들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그의 모든 수고에 더하여
그는 여전히
성도들의 가정을
이 집 저 집 방문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였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선포하였고
하나님의 모든 의결을
그들에게 선포하였다.
사도 바울이 한
온전하게 하는 일은
얼마나 놀라운가!

바울은 거듭거듭
성도들의 각 가정에 다시 가서
그들을 권유하며
눈물로 그들을 훈계했다.
사도는
동정과 눈물로 가득한
말을 해야 한다.
사도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는 법을 배우라.
사도행전 20장 1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모든 겸손과 많은 눈물로
노예로서 주님을 섬겼다고
말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자신이
쉬지 않고
성도들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했다고
말한다.
사도는
자신의 목양 아래 있는
사랑스러운 이들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의결에 관한 모든 것을
눈물로 말한다.
사도는
대중 앞에서 말할 뿐 아니라
또한 성도들의 가정들을 방문한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마지막 절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어떻게
장로가 될 수 있는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다.
어떻게
동역자가 될 수 있는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다.
어떻게
사람들을 목양하는가?
사랑이
가장 뛰어난 길이다.
사랑은
신언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가장 뛰어난 길이다.
사랑은
우리가
무엇이 되든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이다.

교회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경찰서나
심판하는 법원이 아니라
믿는 이들을
양육하는 가정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상태가 나빠질수록
그들에게 더 많은 양육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교회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사랑이 있는 가정이다.
또한 교회는
병든 이들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병원이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이해력이 부족하고
배우지 못한 이들을
가르치고
온전하게 하는
학교이다.
교회가
가정이자 병원이자 학교이기 때문에,
동역자들과 장로들은
주님과 하나 되어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을
양육하고 치료하며
회복시키고 가르쳐야 한다.

사랑은
덮어 주고
건축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무엇이 되든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이다.

나는
우리가
목양에 관한
이러한 부담을 받아들임으로
우리 가운데
진정한 부흥이 있기를
바란다.
모든 교회가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놀라운 목양에 참여한다면
회복 안에
큰 부흥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많이 말하고 가르쳤지만
목양이 아주 부족했다.
목양과 가르침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움직이기 위한
두 발과 같다.
우리의 목양은 항상
가르침과 함께해야 하고,
우리의 가르침은 항상
목양과 함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기 위해
젖을 먹이는 어머니와
권유하는 아버지처럼
성도들을 목양한
사도 바울의 본에 따라
사람들을 목양해야 한다.

바울은
‘대중 앞에서나
이 집 저 집에서’
에베소의 성도들을 가르치고,
삼 년 동안 눈물로
성도들 각 사람을 훈계하며,
하나님의 모든 의결을
그들에게 선포함으로써
그들을 목양했다.

바울은
믿는 이들에게
친밀한 관심을 가졌고,
연약한 사람들을
얻을 수 있기 위해
그들의 수준에까지 내려갔다.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그가 가진 것,
곧 그의 소유물을
기쁘게 소비하고,
그의 존재,
곧 그 자신까지도
기쁘게 소비하고자 했다.
그는
전제물로서,
곧 포도주를 생산하는 분이신
그리스도와 하나인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하였다.

바울은
그 영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했으며,
그 결과 그 영을 공급함으로
사람을 존귀하게 할 수 있었다.

바울은
그의 가르침에서
교회가
사람들을 양육하는 가정이고,
사람들을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병원이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온전하게 하는 학교임을
시사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무엇이 되든
무엇을 하든
가장 뛰어난 길이
사랑이라는 것을
계시했다.
즉 사랑이 이긴다는 것을
계시했다.

1일

엡 4:12 이것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엡 4:16 … 온몸은 …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고전 14:26 … 각 사람이 찬송시를 가지고 있고, 가르침을 가지고 있고, 계시를 가지고 있고,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고, 통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건축을 위하여 하십시오.

우리에게 주님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부터 우리는 매일 부흥되어 이기는 생활을 하고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며 모든 시간을 구속하여 사람들을 접촉하는 데 힘써야 한다. 성도들을 한 명 한 명 돌보라. 한 번에 너무 많은 사람을 접촉하기를 바라지 말라. 가장 효과적인 길은 느리지만 확실한 길이다.

우리가 하루에 한 사람을 접촉한다면, 일 년에 삼백육십오 명을 접촉하게 될 것이다. 어떤 교회에 세 명의 장로가 있는데 그들이 매일 사람들을 접촉한다면, 일 년 동안 그들은 모든 성도들을 여러 번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많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다. 오늘날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이러한 형제자매들을 접촉하여 사랑 안에서 관심하며 돌보아야 하고, 이들을 돕고 목양하는 데 분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과 모든 시간을 드려 사람들을 접촉하고 목양하는 이 문제를 회복해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에베소서 4장 12절부터 16절까지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인 건축과 고린도전서 14장 26절에서 볼 수 있는 상호적인 집회가 우리 가운데서 실현되고 실행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그 기반이 되는, 날마다 부흥되고 날마다 이기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또한 우리의 승리를 유지하기 위해 주님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생활과 일이 필요하다. 우리가 부흥된 생활을 하지 않거나 목양하는 데 수고하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이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승리를 유지하는 다른 길은 없다. 우리의 승리를 유지해 주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생활과 일이다. 우리에게는 이 두 방면이 모두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전쟁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패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겼다. 우리는 승리의 위치에서 싸우고 승리를 유지하기 위해 싸운다. 승리는 이미 우리 손에 있다. 에베소서에 언급된 전쟁은 이기는 이의 전쟁이다. 우리는 싸움을 통해 이기는 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둘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탄은 어떻게 우리를 유혹하는가? 사탄은 우리가 우리의 위치와 승리를 잊어버리게 한다. 그는 우리를 눈멀게 하여 우리의 승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그의 계략을 받아들인다면, 승리가 멀리 있고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승리가 완전하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일생 전체가 이 승리에 포함될 정도로 이 승리는 완전하다! 이것을 우리가 믿을 때 즉시 이기게 된다. 사탄은 패배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겼다. 사탄은 우리가 얻은 승리를 훔쳐 가려고 한다. 우리가 승리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사탄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일로 사탄의 일에 맞서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나타나심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사탄을 대적한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께서 성취하신 일 위에 서 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는 이기려고 할 필요가 없다. 일단 우리가 이기려고 하는 생각을 아주 조금이라도 한다면, 우리의 위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다. 이기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자신이 이미 이겼다는 것을 알고 대적하는 사람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은 확실히 계시가 필요하다. 우리는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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