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생활함으로써 영적 전쟁을 하고, 그리스도의 복사판과 배필이 됨

Fighting the Spiritual Warfare
through Living in Christ’s Ascension
as the New Creation
in Resurrection
to Become
Christ’s Duplication and Counterpart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 아 4:4.

목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사람의 의지를 상징한다.
주님은
우리의 의지가
복종하는 것을
매우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신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의지(다윗의 망대와 같은 목),
방어하는 능력(용사들의 방패)이 가득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우리에게 복종하는 의지,
곧 산비탈에 누운 염소 떼같이
굴복된 의지가 있다면,
우리의 의지는
공격에 대비하여
온갖 종류의 무기들을 갖춘
다윗의 망대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자신의 타고난 의지에서
나왔고,
이제 자신의 부활한 의지로
서 있으면서
원수에게 대항한다.

우리의 의지가 굴복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변화될 것이다.

가장 먼저
우리의 의지가
굴복되어야 한다.
이럴 때
우리의 의지는
부활 안에서
강해질 것이며,
영적 전쟁을 위한 무기고인
다윗의 망대와 같이
될 것이다.

영적 전쟁을 위한 무기들은
우리의 굴복되고 부활한 의지 안에
보관된다.

원수의 화살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방패들은
주님을 추구하는 이의
굴복되고 부활한 의지라는
망대 안에
보관된다.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 아 4:8.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체험은
추구하는 이를
그리스도의 승천 안으로 이끌었고,
이제 그녀는
그리스도의 승천이라는
산꼭대기에 있으며,
이 승천 안에
살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십자가 안에 머물도록
그분의 연인을
부르신 것처럼,
그분의 승천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도록
그분의 연인을
부르신다
— 아 2:14.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부인 그분의 연인에게
그분과 함께,
진리(아마나)의 가장 높은 곳이자
싸움을 통해 얻은 그리스도의 승리
(‘부드러운 갑옷’을 의미하는 스닐과
‘파멸’을의미하는 헤르몬)의
가장 높은 곳인
그분의 승천(레바논)에서부터,
그리고 그분의 원수들이 있는
하늘에 속한 장소들(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부터
내려다보라고
요청하신다
— 아 4:8.

그리스도의 연인이
승천 안에 살 때,
그녀와 그리스도는
한 가지 상태
곧 승천의 상태 안에 살면서
한 쌍이 된다.
그들은
생명과 본성에서 똑같으며,
서로 완전히 어울린다.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그리스도의 승리가 있다.
원수가 패배 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 싸움이 없으며,
우리는
부드러운 갑옷을 입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승리를 누린다.
기도의 위치는
승천, 곧 하늘에 속한 위치이다.

그리스도의
변화된 신부는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삶으로써,
그리스도 혼자만의
누림을 위한
동산이 된다
— 아 4:12-16.

그리스도의
이기는 연인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될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녀는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곱지만,
원수에게는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준다
— 아 6:4, 10.

그리스도의 연인은
주님 앞에
어여쁘고 고우며,
하늘에 속한 성처럼
견고하고,
성소처럼
청명하다.
동시에 그녀는
원수와 세상 앞에
그녀의 승리의 영광을
나타낸다
— 아 6:4.

무기들은
전투하는 군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올린 깃발은
승리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승리한 군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 출 17:15.

깃발은
싸울 준비가 되었음을
가리키며,
또한 승리가
이미 쟁취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하다
— 사59:19.

휘장 안에 있는 생활은
주님 앞에서의 생활일 뿐 아니라,
원수 앞에서의 생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연인들이
싸우는 본성을
가지지 않은 채
하늘에 속한 아름다움만을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기는 연인은
소망으로 가득한
장래를 가지고
절대적으로 하늘에 속한 삶을
가질 뿐 아니라,
끊임없이 승리를 거두는
승리자이다.

그리스도의 연인들은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동시에 두려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믿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고
(have lost their loveliness;
그들의 사랑스러움을 잃었고)
원수 앞에서
더 이상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their terribleness;
그들의 무서움을 [잃었다])
— 아 6:4, 10.

하나님의 건축물은
언제나 군대이다.
우리가
주님께
성(城)이(a city; 한 도시가) 될 때
원수에게는
군대가 된다
— 아 6:4.

건축은
영적 전쟁과
분리할 수 없다.
건축이 있는 곳마다
전투가 있다
— 느 4:1-23.

건축이 있는 곳에
항상 싸움이 있으며,
건축은 언제나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온다
— 마 16:18-19.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완결이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연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도의 상태는
군대인 성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두렵게 하는 군대는
주님의 이기는 이들이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두렵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아 6:4, 10.

사탄은
오직 한 종류의 사람들만
무서워하는데, 바로
자신의 혼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 계 12:11.

원수는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두려워한다
— 창 35:1-5.

원수는
하나님의 성으로 건축된
교회로 인해
두려워 떤다
— 느 6:15-16, 시 102:12-16.

귀신들과 악한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창조하신
한 새사람을 두려워한다
— 엡 2:15-16, 골 2:14-15.

사탄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even if they number in the thousands;
그들의 수가 수천이라 할지라도)
개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무서워하지 않지만
(is not afraid of …, but;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곧 사탄과 그의 왕국에 대항해 싸우는
단체적인 전투원은
두려워한다
(is terrified of; 무서워한다, 겁먹는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결혼 날에
오랫동안 하나님의 원수에게 맞서
전쟁을 치러 온 이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이미 악한 자를 이긴
이기는 이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 계19:7-9, 11-16.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와
싸우려고 오실 때,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로서
오실 것이며,
사람의 아들이신 그분은
그분과 어울리고 그분을 보완할
짝이 필요하실 것이다.
이 짝이 곧
그분의 신부일 것이다
— 계 14:14, 19:7-9.

결국,
이기는 이들은
한 신부가 되어
단체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혼할 것이다.
이러한 결혼식 후에
이 신부는
남편인 그리스도 곁에서
함께 싸우는
군대가 되어,
적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패배시킬 것이다
— 계 19:11-16.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성숙에 이른 것을
보실 때
그분은
신부와 결혼하실 것이며,
그런 다음
신부와 함께 오셔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를
패배시키시고
인간 정부를
끝내실 것이다
— 단 2:34-35, 44-45.

그리스도의 신부를 구성하는
이기는 이들은
하나님의 모든 원수에게 대항해
전투를 하며
그들을 패배시킨다
— 계 2:7, 11, 17, 26, 3:5, 12, 21.

이기는 이들은
내적인 대적자이자
가장 힘든 적인
자아에 대항해 싸우고,
그 영 곧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자아를 죽인다
— 엡 6:17-18.

이기는 이들은
적그리스도의 원칙과
적그리스도의 특징들을
거절하고 물리친다
— 요일 2:18, 22, 요이 7, 살후 2:3-12.

이기는 이들은
다른 가르침들에 대항해
선한 싸움을 싸우고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한다
— 딤전 1:3-4, 6:3-5, 12, 20-21, 딤후 2:3-4.

이기는 이들은
죽음에 대항하는
생명의 전쟁에 참여하며,
죽음에 대해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린다.

이기는 이들은
파괴적인 사탄의 혼돈을
정복하고
건설적인 신성한 경륜 안에서
승리한다.
현재의 혼돈에서 구출되는 대신에
그들은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은혜이신,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에 의해
혼돈을 정복한다
— 딤후 1:9, 15, 2:1, 17-18, 4:22.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성숙하게 된
그리스도의 연인은
술람미가 되는데,
이것은
그녀가
그리스도와 결혼하기 위해
그리스도께 어울리는
그리스도의 재생산과 복사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신격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불신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도가
우리와 하나 되시고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임을
반복해서 말한다
— 계21:2, 22:17상, 비교 히 4:2.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술람미는
춤추는 두 진영 혹은 두 군대(히브리어로 ‘마하나임’)에
비유된다.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들, 곧 하나님의 두 군대를
본 후에,
그가 있던 장소를
마하나임이라고 명명했고,
그의 아내들과 자녀들과 소유물을
‘두 군대’로 나누었다
— 아 6:13, 창 32:1-2.

영적인 의미에 따르면,
이 두 군대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원칙에 따라
넉넉히 이긴다는 것,
곧 ‘대승을 거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강한 증거이다
— 롬 8:37, 12:5.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강한 이들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다만 연약한 이들,
더 약한 이들,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분과 하나인 한 백성,
곧 땋은 머리털(아 1:10상)로 상징되듯이
그분께 복종하며,
구슬꿰미로 장식된 목(10하절)으로 상징되듯이
유연한 의지로
그분께 순종하는
한 백성이 필요하시다.

이기는 이들이 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은
주님을 의지하는
더 약한 이들일 것이다
— 엡 3:8, 계 3:8, 갈 2:20.

우리가
신성한 계시의 최고봉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지를 고려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우리를
긍휼과 존귀와 영광의 그릇들이 되게 하시는,
사랑과 능력과 긍휼이신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Hits: 0

7 replies on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생활함으로써 영적 전쟁을 하고, 그리스도의 복사판과 배필이 됨”

6일

아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창 32:2
야곱은
그들을 보고 말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영이로구나.”
그리하여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
이 네 가지 항목에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똑같이 되지만,
그분들의 신격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신격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불신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우리와 하나 되시고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임을
반복해서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아가에서
그와 같은 높은 이상을
본 후,
우리는
“누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이것에 답변하기 위해
우리는
6장 13절에 대한
추가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이 절은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라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술람미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두 진영, 혹은 두 군대와 같았다.
이 두 군대는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춤추고 있다.

‘두 군대’라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마하나임’이다.
이것은
평범한 말이 아니며,
구약의 창세기 32장 2절에 나오는
역사적인 이름이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피해 도망쳐 갔던
외삼촌 라반과는
더 이상 함께 머물 수 없게 되자,
그의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 야곱은
에서가
아직도 그를 죽이려고 한다는
두려움을 안고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동안
그에게는
강한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
단지 연약한 이들,
즉 여자들과 어린이들뿐이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날 것을 예상하면서
매우 두려워했다.
야곱이
길을 떠나서 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야곱은
“이들은
하나님의 진영이로구나.”
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그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다.
(창 32:1-2)

야곱은
하나님의 두 군대를
본 후에
기이한 일을
행했다.
즉 그의 아내들과 자녀들과 나머지 소유물을
두 무리, 혹은 ‘두 군대’로
나눈 것이다.
그는 만약
그의 형 에서가
한 무리를 치면
다른 한 무리는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부터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가득하다.
이 두 무리는 단지
하나님의 단수(單數)의 군대가 아니라
‘두 군대’이다.
이것은
우리가
정복자들 그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강한 증거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거인들’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다만
연약한 이들,
더 약한 이들,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원하신다.
그들은
그분의 군대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전쟁이
그들의 손안에 있지 않고
그분의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과 하나인 한 백성,
곧 땋은 머리털(아 1:10상)로 상징되듯이
그분께 복종하며,
구슬꿰미로 장식된 목(10하절)으로 상징되듯이
유연한 의지로
그분께 순종하는 한 백성이
필요하시다.

아가에 있는
계시의 고봉에
도달하는 길을
살펴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은
강했기 때문에
그것을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모든 성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이보다
더 작은 이라고 말했다
(엡 3:8).
그는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고후 11:29)
라고 말했다.
… 로마서 9장 16절에서
바울은
“이것은
원하는 사람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달음질하는 사람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달음질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할 수 없다.
달음질할 수 있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또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갈 2:20상)
라고 말했다.

스스로 강한 이들은
모두 자격이 없을 것이다.
… 주님을 의지하는
… 더 약한 이들이
이기는 이들이 될
자격이 있다고
여겨질 것이다.
… 요한계시록 3장 8절에서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있는 이들이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 이 두 군대가
야곱의 아내들과 자녀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기억하라.
결국 그들 중 누구도
에서와 맞서
싸우지 않았다.
바로 하나님께서
에서의 태도를 바꾸심으로써
그에게 맞서
싸우셨다.

 

신언노트, 2018 07 22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 아 4:4.

목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사람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지가
 복종하는 것을
 매우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십니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의지(다윗의 망대와 같은 목),
 방어하는 능력(용사들의 방패)이 가득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복종하는 의지,
 곧 산비탈에 누운 염소 떼같이
 굴복된 의지가 있다면,
 우리의 의지는
 공격에 대비하여
 온갖 종류의 무기들을 갖춘
 다윗의 망대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자신의 타고난 의지에서
 나왔고,
 이제 자신의 부활한 의지로
 서 있으면서
 원수에게 대항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굴복될수록
 우리는
 더욱더 변화될 것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의 의지가
 굴복되어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의지는
 부활 안에서
 강해질 것이며,
 영적 전쟁을 위한 무기고인
 다윗의 망대와 같이
 될 것입니다.

영적 전쟁을 위한 무기들은
 우리의 굴복되고 부활한 의지 안에
 보관됩니다.

원수의 화살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방패들은
 주님을 추구하는 이의
 굴복되고 부활한 의지라는
 망대 안에
 보관됩니다.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 아 4:8.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체험은
 추구하는 이를
 그리스도의 승천 안으로 이끌었고,
 이제 그녀는
 그리스도의 승천이라는
 산꼭대기에 있으며,
 이 승천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십자가 안에 머물도록
 그분의 연인을
 부르신 것처럼,
 그분의 승천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도록
 그분의 연인을
 부르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부인 그분의 연인에게
 그분과 함께,
 진리(아마나)의 가장 높은 곳이자
 싸움을 통해 얻은 그리스도의 승리
 (‘부드러운 갑옷’을 의미하는 스닐과
 ‘파멸’을의미하는 헤르몬)의
 가장 높은 곳인
 그분의 승천(레바논)에서부터,
 그리고 그분의 원수들이 있는
 하늘에 속한 장소들(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부터
 내려다보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연인이
 승천 안에 살 때,
 그녀와 그리스도는
 한 가지 상태
 곧 승천의 상태 안에 살면서
 한 쌍이 됩니다.
그들은
 생명과 본성에서 똑같으며,
 서로 완전히 어울립니다.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그리스도의 승리가 있습니다.
원수가 패배 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 싸움이 없으며,
 우리는
 부드러운 갑옷을 입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승리를 누립니다.
기도의 위치는
 승천, 곧 하늘에 속한 위치입니다.

그리스도의
 변화된 신부는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삶으로써,
 그리스도 혼자만의
 누림을 위한
 동산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이기는 연인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될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녀는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곱지만,
 원수에게는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주님 앞에
 어여쁘고 고우며,
 하늘에 속한 성처럼
 견고하고,
 성소처럼
 청명합니다.
동시에 그녀는
 원수와 세상 앞에
 그녀의 승리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무기들은
 전투하는 군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올린 깃발은
 승리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승리한 군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깃발은
 싸울 준비가 되었음을
 가리키며,
 또한 승리가
 이미 쟁취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휘장 안에 있는 생활은
 주님 앞에서의 생활일 뿐 아니라,
 원수 앞에서의 생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연인들이
 싸우는 본성을
 가지지 않은 채
 하늘에 속한 아름다움만을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기는 연인은
 소망으로 가득한
 장래를 가지고
 절대적으로 하늘에 속한 삶을
 가질 뿐 아니라,
 끊임없이 승리를 거두는
 승리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연인들은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동시에 두려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믿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그들의 사랑스러움을 잃었고
 원수 앞에서
 그들의 무서움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건축물은
 언제나 군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한 도시가(a city; 성(城)이) 될 때
 원수에게는
 군대가 됩니다.

건축은
 영적 전쟁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건축이 있는 곳마다
 전투가 있습니다.

건축이 있는 곳에
 항상 싸움이 있으며,
건축은 언제나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완결입니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연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도의 상태는
 군대인 성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두렵게 하는 군대는
 주님의 이기는 이들이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두렵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탄은
 오직 한 종류의 사람들만
 무서워하는데, 바로
 자신의 혼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원수는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두려워합니다.

원수는
 하나님의 성으로 건축된
 교회로 인해
 두려워 떱니다.

귀신들과 악한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창조하신
 한 새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사탄은
 그들의 수가 수천이라 할지라도
 개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곧 사탄과 그의 왕국에 대항해 싸우는
 단체적인 전투원은
 두려워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결혼 날에
 오랫동안 하나님의 원수에게 맞서
 전쟁을 치러 온 이들과
 결혼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이미 악한 자를 이긴
 이기는 이들과
 결혼하실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와
 싸우려고 오실 때,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로서
 오실 것이며,
 사람의 아들이신 그분은
 그분과 어울리고 그분을 보완할
 짝이 필요하실 것입니다.
이 짝이 곧
 그분의 신부일 것입니다.

결국,
이기는 이들은
 한 신부가 되어
 단체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혼할 것입니다.
이러한 결혼식 후에
 이 신부는
 남편인 그리스도 곁에서
 함께 싸우는
 군대가 되어,
 적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패배시킬 것입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성숙에 이른 것을
 보실 때
 그분은
 신부와 결혼하실 것이며,
그런 다음
 신부와 함께 오셔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를
 패배시키시고
 인간 정부를
 끝내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를 구성하는
 이기는 이들은
 하나님의 모든 원수에게 대항해
 전투를 하며
 그들을 패배시킵니다.

이기는 이들은
 내적인 대적자이자
 가장 힘든 적인
 자아에 대항해 싸우고,
 그 영 곧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자아를 죽입니다.

이기는 이들은
 적그리스도의 원칙과
 적그리스도의 특징들을
 거절하고 물리칩니다.

이기는 이들은
 다른 가르침들에 대항해
 선한 싸움을 싸우고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합니다.

이기는 이들은
 죽음에 대항하는
 생명의 전투에 교전하며,
 생명 안에서
 죽음 위에
 다스립니다.

이기는 이들은
 파괴적인 사탄의 혼돈을
 정복하고
 건설적인 신성한 경륜 안에서
 승리합니다.
현재의 혼돈에서 구출되는 대신에
 그들은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은혜이신,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에 의해
 혼돈을 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성숙하게 된
 그리스도의 연인은
 술람미가 되는데,
이것은
 그녀가
 그리스도와 결혼하기 위해
 그리스도께 어울리는
 그리스도의 재생산과 복사판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격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불신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도가
 우리와 하나 되시고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임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술람미는
 두 진영 혹은 두 군대(히브리어로 ‘마하나임’)의 춤에
 비유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들, 곧 하나님의 두 군대들을
 본 후에,
 그가 있던 장소를
 마하나임이라고 명명했고,
 그의 아내들과 자녀들과 소유물을
 ‘두 군대들’로 나누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 따르면,
 이 두 군대는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원칙에 따라
 넉넉히 이긴다는 것,
 곧 ‘대승을 거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강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강한 이들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만 연약한 이들,
 더 약한 이들,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과 하나인 한 백성,
 곧 땋은 머리카락으로 상징되는
 그분께 복종하는 한 백성,
 보석들의 목걸이를 가진 목으로 상징되는
 유연한 의지로
 그분께 순종하는
 한 백성을 필요로 하십니다.

이기는 이들이 될
 자격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주님을 의존하는
 더 약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성한 계시의 최고봉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지를 고려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우리를
 긍휼과 존귀와 영광의 그릇들로 만드시는,
 사랑과 능력과 긍휼이신
 주님을 의존해야 합니다.

 

5일

계 19:7-8
우리가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시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결혼 날이
다가왔고,
그분의 아내도
자신을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되었는데,
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입니다.”

계 19:11
또 나는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보십시오,
흰색 말이 있고,
신실하시고 참되시다고 불리시는 분께서
그 위에 타셨는데,
그분은
의로 심판하시고 전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와
싸우려고 오실 때
사람의 아들로서 오실 것이며,
사람의 아들이신 그분은
그분과 어울리고
그분을 보완할
짝이 필요하실 것이다.
이 짝이
곧 그분의 신부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얻으시고
교회와 결혼하신 후에
치는 돌로서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신부를 얻지 못하신다면
홀로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에 맞서
싸우셔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군대를 가지실 것이고,
이 군대는
그분의 신부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결혼 날에
오랫동안 하나님의 원수에게 맞서
전쟁을 치러 온 이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는
이미 악한 자인 마귀를 이긴
이기는 이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계 12:11).
하나님의 뜨인 돌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이기는 이들,
곧 단체적인 그리스도는
거대한 인간 형상으로 상징된
적그리스도와 열 왕들(계 19:11-21)을
치실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단체적인 그리스도는
거대한 형상을
발가락부터 머리까지
산산이 부서뜨릴 것이다
(단 2:35).
다시 말하면,
단체적인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그분과 갓 결혼한 이기는 이들로 구성된 신부—는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로서 와서
인간 정부를
산산이 깨뜨릴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는
인간 정부를
없애 버릴 것이다.

나는
신부에게
성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스도는
성숙하지 않은 신부와
결혼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직 우리가
성숙에 이를 때만이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분의 신부로
취하실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가 아직
성숙에 이르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그분의 신부로 드려지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다.
그래서 성숙하는 것이
긴급히 필요하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성숙에 이른 것을 보실 때,
그분은
신부인 우리와
결혼하실 것이며,
그런 다음
그분의 군대인
신부와 함께 오셔서
인간 정부를
부서뜨리실 것이다.

우리는
다른 것들로
그리스도를 대치한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원칙 안에서
일상생활을 한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하며,
문화나 종교나
윤리나 천연적인 관념이
그리스도를 대치하도록
허락한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님,
모든 대치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출하시고
건져 내소서.
주님,
우리를
당신의 기름 바름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도
적그리스도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름 바름을 대적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
우리는
기름 바름 안에서,
기름 바름을 통하여,
기름 바름에 의해
살고 행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의
움직이심과 일하심과 적셔 주심에 의해
살고 행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계시이며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의 부담이다.

믿음과 함께
우리는
선한 양심,
곧 거리낌 없는 양심을
가져야 한다
(행 24:16).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생활을 지켜 주는
안전장치이다.
믿음과 선한 양심은
함께한다.
우리의 양심 안에
거리낌이 있을 때마다
구멍이 생기며,
우리의 믿음은
새어 나가 버린다.
어려움이 있는
교회 안에서
분열적인 가르침에 대항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믿음과 함께하는
선한 양심이 필요하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여성형이며,
이제 이기는 이들이
그리스도와 똑같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모든 이기는 이들은 분명히
하나님과 하나이며
그리스도이다.
술람미는
한 시골 소녀였다.
이제 솔로몬의 배필로서
그녀는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
생명과 본성과
표현과 기능에서
솔로몬과 똑같이 되었다.

 

4일

아 6:10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주는
여자가 누구인가

엡 6:11
마귀의 계략에 대항해
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십시오.

믿는 이들은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동시에 두려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믿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고
원수와 세상 앞에서
더 이상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사람들이 참으로
우리를 두려워하는가?
성경은 자주
주님의 두려움에 대해
말한다.
주님께서
두려움을 주시는 것은
그분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승리한다면,
많은 때에
대적이 도망치고
세상이 물러나는 것을
볼 것이다.

추구하는 이는
성이 될 때
또한 군대가 된다.
우리는
앞에서
열 번째 상징이
마지막 상징이라고 말했지만,
또한 열한 번째 상징이 있다.
그것은
군대이다.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주는구나”
(아 6:4).
왜 내가
열 번째가 마지막이라고
말하면서도
아직 열한 번째가 있다고
말하는가?
그 이유는
열 번째가
열한 번째이고
열한 번째가
열 번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께
성이 될 때
원수에게는
군대가 된다.
그것은
지난번처럼
단지 병기고가 아니다
(아 4:4).
병기고는
방어용이지만
군대는
공세를 취한다.
그것은
단지 왕국을 방어하는 문제가 아니라
왕국을 위해 싸우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녀는
주님께
너무나도 아름다우며,
심지어 예루살렘같이 곱다.
그러나 원수에 대해서
그녀는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준다.
우리 모두는
깃발을 세운 군대가
승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안다.
그녀에게는
세워진 깃발이 있다.
이것은
그녀가
이미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원수에게
그처럼 두려움을 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방어전을 위한
병기고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추구하는 이는
큰 승리를 거두고
개선 행진을 하는
군대가 되었다.
이 절에서
‘군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복수형이므로,
어떤 번역본들은
그녀가
큰 무리, 대규모의 부대들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한 부대가 아니라
깃발을 든
많은 부대들이다.
그녀는
승리의 깃발들을 든 부대들,
곧 그처럼 뛰어난
싸우는 군대가 되었다.
우리는
영적 전쟁과 건축을
결코 분리할 수 없다.
건축이 있는 곳마다
전투가 있다.
우리 모두는
느헤미야기에 있는
기록을 기억한다.
곧 백성들이
한 손으로는
건축하는 일을 하고,
다른 한 손에는
전투를 대비해
병기를 잡은 것이다
(느 4:17).
그들은
건축하는 동시에
싸웠다.
건축이 있는 곳에
항상 싸움이 있으며,
건축은 언제나
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완결이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연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도의 상태는
군대인 성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군대인 성(城)이다.

에스겔서 37장 2절부터 10절까지에서
우리는
같은 것을
읽게 된다.
모든 마른 뼈들은
생기가 불어 넣어진 후에
살아나
하나님의 거처로
건축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군대로 편성되었다.
건축물은 언제나
군대이다.
원수가 없다면
성을 건축할
필요가 없다.
인류 역사에서
성이 생겨난 것은
원수의 공격이 있기 때문이었다.
성은
하나님의 거처이고,
또한 원수에 대해 싸우는
군대이다.

교회는
몸과 새사람과
신부와 가족과
왕국과 거처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원수에게 대항해 싸우는
전투원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은
그러한 교회를
무서워한다.
사탄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개인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
몸의 방면과
여러 다른 방면을 가진
교회로서
함께 모일 때마다
사탄은 두려워 떤다.
이러한 일곱 방면을 가진
교회에 의해
그리스도는
표현되시고,
아버지는
안식을 얻으시며,
원수는
패배당한다.
우리 모두는
교회가
개인의 거룩함이나
영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상을 보기 바란다.
그와 반대로
교회는
몸과 새사람과
신부와 가족이자,
왕국과 거처와 전투원으로
함께 건축되는 문제이다.
그러한 교회인 우리는
대적을 패배시키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수 있는
길을 예비한다.

 

3일

아 4:12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아 6: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주는구나

그리스도의
변화된 신부는
그녀의 생명의 성장과
생명의 변화를 위해,
부활 안의 새 창조물로서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성으로
성숙하게 되어
다음의 네 가지가 된다.
곧 그리스도를 만족하게 하는 동산,
보호 시설을 갖춘 하나님의 거처,
우주적으로 빛나는 천체,
위엄 있는 군대
곧 단체적인 이기는 이인
술람미가 된다.
여기에
동산이 잠겨 있고
덮인 우물과
봉해진 샘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내밀한 누림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추구하는 믿는 이들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그리스도만을 위한
무언가 내밀하고 감추어지고 덮여 있고 봉해진 것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아가 6장 4절에서
사랑하는 분이
연인을 칭송하신 것은
그녀가
하늘에 속한 성소와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이 된 것이
그녀가
원수들을 이긴 것에
근거한 것임을
가리킨다.
오직 이기는 이가 되어야만
우리는
휘장 안에서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이기는 연인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거처가 될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녀는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곱지만,
원수에게는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준다.
깃발은
싸울 준비가 되었음을 가리키며,
또한 승리가 이미 쟁취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하다.
두려움을 주는 군대는
주님의 이기는 이들이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두렵게 한다는 것을
… 의미한다.
이 군대는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싸우며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기는 이들이 된다.
결국 이기는 이들은
한 신부가 되어
단체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혼할 것이다.
이러한 결혼식 후에
이 신부는
남편인 그리스도 곁에서
함께 싸우는 군대가 되어
적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을
패배시킬 것이다.

아가 6장 4절에서 이제
주님은
믿는 이들이
하늘에, 곧 성소 안에 있는 것으로
보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휘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주님은 일찍이
그녀의 어여쁨과 고움을
말씀하신 적이 있으나,
여기서의 그녀의 어여쁨과 고움은
이전보다 좀 더 구체적이다.

‘디르사’는
왕궁이 있는 곳이다
(왕상 14:17).
‘예루살렘’은
위대한 왕이 있는 성이다.
디르사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인
하늘에 속한 성소를
상징하고,
예루살렘은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주님은
성소 안에서
우리의 하늘에 속한 본성과 생명을
살펴보고 계신다.
그 예루살렘 안에는
곱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그 디르사 안에는
어여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이 두 가지 모두가
하나님의 새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믿는 이들은
장래에 있을
성소의 어여쁨과 고움을
이미 전시하고 있다.

무기들은
전투하는 군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올린 깃발은
승리한 군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만일 전쟁에서 진다면
풀이 죽고 기가 꺾여
깃발을 내릴 것이다.
깃발을 펼치는 것은
승리의 영광을
의미한다.
… 그리스도의 연인은
주님 앞에
어여쁘고 고우며,
하늘에 속한 성처럼
견고하고,
성소처럼
청명하다.
동시에 그녀는
원수와 세상 앞에
그녀의 승리의 영광을
나타낸다.
휘장 안에 있는 생활은
주님 앞에서의 생활일 뿐 아니라,
원수 앞에서의 생활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거하는 하늘을
원수가 와서
공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이
싸우는 본성을
가지지 않은 채
하늘에 속한 아름다움만을
소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하늘에 속한 전쟁은
주님 앞에서
결코 약해진 적이 없다.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주는구나”
(아 6:4).
그녀는
소망으로 가득한
장래를 가지고
절대적으로
하늘에 속한 삶을
가질 뿐 아니라,
끊임없이
승리를 거두는
승리자이다.
그녀는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두려움을 준다’.
그녀는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다.
여러분은
그녀가 누구인지
아는가?
여러분은
그녀를
보았는가?

 

2일

아 2:14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 4:8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부인
그분의 연인에게
그분과 함께,
진리(아마나)의 가장 높은 곳이자
싸움을 통해 얻은
그리스도의 승리(스닐과 헤르몬)의
가장 높은 곳인
그분의 승천(레바논)에서부터,
그리고 그분의 원수들이 있는
하늘에 속한 장소들(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부터
내려다보라고
요청하신다.
… 그리스도의 연인이
승천 안에 살 때,
그녀와 그리스도는
한 가지 상태
곧 승천의 상태 안에 살면서
한 쌍이 된다.
그리스도는
신성하시고 인간적이시며,
그분의 변화된 연인은
인간적이며 신성하다.
그들은
생명과 본성에서 똑같으며,
서로 완전히 어울린다.

그리스도의 연인은
그분의 달콤한 죽음과
향기로운 부활을
체험한 후,
동이 트고
그림자들이 물러가기 전까지,
곧 그녀가 사랑하는 분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그리스도의 달콤한 죽음(몰약의 산)과
그분의 향기로운 부활(유향의 언덕) 안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아4:6).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분의 달콤한 죽음도
우리에게 있는데,
이는 그분과 그분의 죽음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그리스도와 분리되고 동떨어진 것으로서
체험할 수 없다.

아가 2장 14절에서
주님은
바위틈과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서
그분과 함께 있도록
그녀를
부르셨다.
이제 4장 8절에서
주님은
몰약의 산과 유향의 언덕에
머물러 있지 말고
그분의 승천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있도록
그녀를 다시 부르신다.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는
실재, 승리, 원수의 파멸이라는
적극적인 봉우리들이 있다.
‘아마나’는
진리 곧 실재를
의미한다.
이것은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완전한 구속을 이루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복합되시고
생명을 주시고
일곱 배로 강화되신
영의 진리 혹은 실재이다.
이 실재들은
삼일 하나님의
세 위격이다.
‘스닐’은
부드러운 갑옷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전쟁이 끝났고
승리를 쟁취했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딱딱한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사탄은
패배한 원수이다.
그가
이미 패배했으므로
(히 2:14, 골 2:15)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제
부드러운 갑옷을 입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승리를
누린다.
‘헤르몬’은
파멸을 의미한다.
승천 안에서
대적은
파멸했다.

그리스도께
사탄은
패배한 원수이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성가신 자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6장은
우리가
악한 자와 싸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사자 굴과 표범 산으로 상징된
하늘들의 영역에서
내려다보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엡6:12).
여기에
사탄과 그의 부하들이 있다.
여기서
믿는 이들은
주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강한 권능 안에서
굳세게 되고
(6:10),
하나님의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고
(11하, 13상절),
마귀의 계략에 대항하여
서고
(11상절),
구원의 투구와
그 영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받아들이고
(17절),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과
복음의 확산을 위해
(18하-20절)
항상 영 안에서 기도함으로써
(18상절)
사탄과 그의 어둠의 세력에 맞서
싸운다
(12절).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 사는
생활의 실재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은
부활하신
생명 주시는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승천 안에 사는 것은
승천의 상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새 창조물로서
승천 안에 살
필요가 있다.
… 승천과 하나님의 새 창조물과 부활은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상태 안에
계실 뿐 아니라
또한 생명 주시는 영의 상태로도
계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포함한
생명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 영이 계신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바로 이 영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린다.

 

1일

아 4: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아 4:4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성경에서
머리털은 항상
의지와 관련된 것을
가리킨다.
흩어졌던 그녀의
모든 뜻이
열을 지어
한데 모아져,
그 모습이
산에 있는
염소 떼와 같다
(아 4:1).
염소 떼 중 일부는
산기슭에 있고,
일부는
더 높은 지점에 있다.

염소들은
흩어져 있지 않고
모여 있다.
그 염소들은
평지에 있지 않고
산비탈에 있으면서
복종의 그림을
보여 준다.
이것은
준마에서
가마로 진보하면서
추구하는 이의
모든 뜻이
다룸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뜻들은
굴복되었고,
한데 모아져
열을 이루어
복종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아가는
사랑뿐 아니라
의지의 복종에 대해서도
말한다.
완전하고 충분하고 철저하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지가 굴복되어야 한다.
우리의 의지가
굴복될수록
우리는
더 많이
변화될 것이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의지를
붙잡고 있다.
우리의 관념이
바뀌었고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졌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가
굴복되어야 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완고하다.
형제들뿐 아니라
자매들도 그러하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에 있지 않다.
우리는 분명
주님을 사랑한다.
나는
과거 수개월 동안
주님께서
“주 예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음성을
많이 들으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음성에 대한 대답으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나도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너의 의지는
어떠하냐?”
우리의 관념이
바뀌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의지가 굴복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 의지가 굴복될 때에
우리는
성숙에 이를 수 있다.

주님은
추구하는 여인의 목을
다윗의 망대에
비유하셨다
(아 4:4).
우리는
머리털이
우리의 의지를
상징한다는 것을
보았고,
우리의 목도 역시
우리의 의지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교 사 3:16).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반역적인 사람들은
목이 곧은, 곧 뻣뻣한 백성이라고
불린다
(출 32:9, 행 7:51).
따라서 우리는
산에 있는
염소 떼는
의지가 굴복된 것을
보여 주는 그림이고,
다윗의 망대는
그녀의 의지가
부활 안에서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 주는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의지가
굴복되어야 하고,
그런 다음에
그것은
부활 안에서
강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타고난 의지는
다룸을 받아야 하며,
그런 후에
우리는
부활한 의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굴복된
의지는 마치
산비탈에 서 있는
염소 떼와 같지만,
부활한 의지는 틀림없이
병기고로 건축된
다윗의 망대와 같을 것이다.
병기고는
싸우기 위한 무기들을
보관해 두는 곳이다.

우리는
단지 서서
원수의 모든 공격에
맞서기만 하면 된다.
원수의 화살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방패들이
이 망대 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망대는
주님을 추구하는 이의
굴복되고 부활한
의지이다.
이것이
참된 생명의 성숙이다.

굴복되지 않은 의지는
한 면으로는 완고하고
다른 한 면으로는 유약하다.
원수가
올 때,
완고하고 굴복되지 않은 의지는
항상 무조건적으로 항복한다.
… 그러나 우리가
… 복종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 원수가 올 때
우리의 의지는
원수의 공격에 맞서는
온갖 종류의 무기를
보관하고 있는
다윗의 망대와 같을 것이다.

아가 3장에서
추구하는 이의
성숙의 비결은
그녀의 의지가
완전히 굴복되고 부활한 데에 있다.
여덟 가지 상징 중에서
첫 번째 상징은
의지가 가장 강하지만,
마지막 상징은
전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준마는
굉장히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지만,
가마나 면류관은
전혀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타고난 의지에서
나와서
이제 부활한 의지 안에서
원수에게 맞서 서 있다.
그녀는
영적 전쟁을 위하여
병기고로 건축된
다윗의 망대와 같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