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 엡 6:24.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하나님과 그분의 원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교회생활을 하려면,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이신 주님에 대한 누림은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한다.
에베소서 1장 4절에서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사랑과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다음에 우리도 또한 이 신성한 사랑에 감동되어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상태와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 적셔져서, 그분의 존재와 똑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
에베소서 3장 17절에 따르면 우리는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을 수 있으며, 19절에 따르면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경작지인 우리는 성장하기 위하여 뿌리를 내려야 하고, 하나님의 건축물인 우리는 건축되기 위하여 터를 잡아야 한다.
에베소서 4장 15절과 16절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는 것과 몸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을 계시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고, 이 사랑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또 함께 몸의 지체 된 사람들을 사랑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내적인 실질이다. 에베소서의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내적인 실질 안으로 이끌려 사랑이신 하나님을 누리고 또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분의 임재를 누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합당한 교회생활을 하려면,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바울의 글들에서 ‘부패하지 않는’이라는 말의 쓰임에 따르면, 이 말은 주로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가리킨다. 천연적인 모든 것은 부패하지만, 하나님과 신성한 생명과 부활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부패하지 않는다.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옛 창조물 안에서가 아니라 새 창조물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거듭나고 새롭게 된 영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에베소서에 계시된 부패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 따라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시고, 몸의 요소이시며, 실재와 은혜와 평안과 사랑과 빛이시고, 한 새사람의 조성 성분이신 주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 모든 방면은,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 포함하여 에베소서에서 계시해 주고 가르치고 있는 것들과 관련된다.
에베소서는 교회를 산출하기 위한 삼일 하나님의 분배에 관하여,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이루셨는지에 관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하늘들의 영역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것에 관하여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부패하지 않는 것들이며, 따라서 우리가 이 모든 것 안에서 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부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타고난 사랑이 아니라 부활 안에 있는 사랑, 곧 하나님 자신의 신성한 본질인 사랑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 신성한 생명,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어떠하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 교회에 관하여 에베소서에 계시된 신성하고 영적이고 하늘에 속하고 부패하지 않는 모든 것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의 마지막에 있는 축복은 장차 일어날 문제의 징조를 보여 준다. 요한계시록 2장 2절부터 5절까지에서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에 나타난 것처럼,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사랑이 쇠퇴하려 하고 있었다.
에베소서 6장 24절에 있는 결론의 말은 은혜가 함께하기 위한 조건을 추가로 제시하는데, 그것은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은혜가 더 이상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에베소서는 은혜와 사랑의 관계를 강조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은혜를 받고 누리고자 한다면, 사랑이라는 한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 실패했다. 바로 이러한 실패가 역대로 교회가 실패했던 주된 이유이다.
진정한 신약의 사역은 항상 우리를 분발시켜 첫째가는 사랑으로 주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며, 우리를 강화하여 단순하게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게 한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포함하여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은 사도 바울의 약혼시키는 사역을 버리고 떠났다. 약 이십육 년 후에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들은 그들의 첫째가는 사랑을 버렸고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누림을 잃어버렸으며, 그 결과 주님의 증거를 상실했다.
에베소서에서 교회에 대한 계시에는 두 가지 주된 방면이 있다. 첫째 방면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사역의 일이고, 둘째 방면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은 우리가 교회생활에 부합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많은 영적인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사역의 일을 함으로써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나 은사 있는 사람들이 직접 몸을 유기적으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체가 온전하게 되어 은사 있는 사람들이 기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직접 몸을 유기적으로 건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은 아래와 같은 범주의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일들로 구성된다.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삼일 하나님 안으로 이끎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려야 한다.
우리는 가정 집회에서 새로운 믿는 이들을 목양하여 그들을 양육하고 그들이 자라도록 도움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룹 집회에서 성도들을 온전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유기적으로 건축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유기적인 건축을 위하여 성도들이 교회 집회에서 한 사람씩 신언하도록, 즉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인 봉사이며, 또한 신약의 복음의 제사장 체계의 유기적인 봉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봉사에서 우리는 온갖 지혜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수고하고 분투한 사도 바울과 같아야 한다.
우리는 에베소서의 각 장에 밝혀진 대로 교회생활에 부합하는 영적인 체험들 안에서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1장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것을 밝혀 준다. 2장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밝혀 준다. 3장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이 우리의 누림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되는 것을 밝혀 준다. 4장은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것을 밝혀 준다. 5장은 우리가 영 안에서 충만해지는 것과, 이를 위해 시와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 우리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시를 읊는 것을 밝혀 준다. 6장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굳세어지고 하나님의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는 것을 밝혀 준다.
에베소서에 있는 모든 영적인 체험들에 대한 열쇠는 부축하는 은혜를 공급받기 위해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생활, 부흥된 생활, 지속적으로 이기는 생활,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는 기적적이면서도 정상적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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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엡 6:24)라고 말하며 에베소서를 결론짓는다. 우리는 우리의 혼 안에 머무르면서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지만, 우리의 혼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도록 허락해 드릴 때, 우리는 부패함 없이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혼 안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감정 안에서 너무 뜨겁기 때문에 어떤 일에 반응하거나 어떤 일을 제안할 때 감정을 억제하거나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쉽게 마음이 상하거나 교회에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킴으로써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러한 종류의 사랑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한다.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교회생활에 합당한 것들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실 수 있도록 반드시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을 것이며,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차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엡 3:19상).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지만, 우리는 그 사랑을 체험으로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단체적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19하절). 이것은 우리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표현이 되는 정도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신성한 생명 안에서의 이러한 영적인 체험들은 우리를 교회생활에 합당하게 만든다.
에베소서에 계시된 모든 영적인 체험들의 비결은 마지막 절에 있다. 에베소서 6장 24절에 따르면, 은혜가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의 근원이다. 3장에 따르면, 은혜는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우리에게 공급하므로 측량할 수 없이 크다(2, 8절). 이렇게 부축하는 은혜를 체험하는 열쇠는 16절에 있다. 그 절에서 사도는 우리가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기를 기도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속사람 안에 있을 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존재와 그분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을 우리 안에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자리 잡으실 때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분의 은혜의 모든 풍성을 주신다. 이렇게 부축하는 은혜로 우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며, 하나님의 걸작품으로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행하고, 옛사람을 벗어 버리며, 새사람을 입고, 영 안에서 충만해지며, 굳세어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할 수 있다.
거듭남은 기적적이면서도 정상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처럼 되는 것도 기적적이면서도 매우 정상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순히 아버지께서 우리를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기를 기도함으로써 그것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베소서에 언급된 모든 것을 이렇게 기적적이면서도 정상적인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기적적이면서도 정상적인 방식으로 매일 아침 부흥될 수 있고, 온종일 같은 방식으로 거듭해서 부흥될 수 있다. 우리에게 죄가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즉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에게 죄가 있습니다.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즉시 우리는 깨끗하게 될 것이고 부흥될 것이다. 즉시 부흥되기 위해 우리는 여러 날 동안 기도하지 않아도 되지만, 주님께 다만 간단한 말로 기도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고, 영을 따라 행하며,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다. 그럴 때 집회에 오면 넘쳐흐를 것이다. 즉, 우리의 속사람에게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 7:38). 이것이 바로 교회생활, 부흥된 생활, 지속적으로 이기는 생활,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는 길이다.
5일
에베소서에서 교회에 대한 계시에는 두 가지 주된 방면이 있다. 첫째 방면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사역의 일이고, 둘째 방면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은 우리가 교회생활에 부합하고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많은 영적인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회중이나 모임의 건축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교회의 건축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바울은 유기적인 몸의 건축, 곧 생명이 충만한 몸(1:23)의 건축에 대해 말한다.
모든 은사들, 곧 사도와 신언자와 복음 전파자와 목자 및 교사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하려고,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고 주어졌다. 은사들은 지체들이 크거나 작거나, 강하거나 약하거나, 나이가 많거나 어린지를 상관하지 않고 모든 지체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우리는 자신이 너무 작거나 약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믿는 이가 중요하고 몸의 지체로서 필요하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나 은사 있는 사람들이 직접 몸을 유기적으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체가 직접 몸을 유기적으로 건축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부패하는 것들 안에 있는지 부패하지 않는 것들 안에 있는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하여 새로운 믿는 이들을 목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느 날 우리는 주님 앞에 설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사랑했는지에 관해 결산을 할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믿는 이들을 목양하는 법과 같은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힘쓰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주님을 누리고 주님에게서 공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을 더욱더 누린다. 마찬가지로, 집회에서 말할 때 우리는 기쁨이 넘치게 되고 심지어 우리의 죽을 몸도 소생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직접 건축하는 일을 함으로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지(엡 6:24)의 여부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 다른 많은 것들이 부패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은 부패하지 않는다. 이러한 몸의 건축에는 세 가지 주요 범주의 일이 있다. 이 세 가지 주요 범주의 일은 복음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삼일 하나님 안으로 이끄는 것, 가정 집회에서 새로운 믿는 이들을 목양하는 것,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 종류의 수고의 결과는 영원히 남을 것이고, 결코 부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부패함 없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약의 복음의 제사장 체계의 유기적인 봉사(벧전 2:5, 9)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그들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을 포함한다(롬 15:16). 그것에 이어서, 믿는 이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과 그들의 성장을 돕는 것이 있다. 또한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들이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 곧 유기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것이 있다(엡 4:11-16).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도들이 교회의 유기적인 건축을 위하여 신언하도록, 즉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온갖 지혜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수고하고 분투한 사도 바울과 같아야 한다(골 1:28-29).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인 봉사이다. 이러한 봉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고, 제사장 체계 안에 있다. 모든 사람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모든 사람이 믿는 이들에게 자양분을 주며, 모든 사람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사람이 신언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 모두는 충분히 성장한 단계에 이를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은 건축될 것이다.
4일
바울이 에베소서 6장 24절에서 한 말은 장차 일어날 문제의 징조를 보여 준다. 요한계시록 2장 2절부터 5절까지에서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에 나타난 것처럼,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사랑이 쇠퇴하려 하고 있었다. 따라서 에베소서 6장 24절에 있는 결론의 말은 은혜가 함께하기 위한 조건을 추가로 제시하는데, 그것은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그들의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실 것이었다(5절). 등잔대의 빛은 생명(생명은 곧 은혜임)의 빛이다. 이 생명의 빛이 주님에 의해 옮겨지는 것은 그들이 첫째가는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의 빛, 곧 은혜의 빛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첫째가는 사랑을 회복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 두 절에서 우리는 에베소의 성도들에 대한 주님의 느낌을 볼 수 있다. 주님은 그분을 향한 그들의 사랑에 관심을 기울이신다. 이런 이유로, 사도는 그의 서신서에서 거듭 ‘사랑 안에서’라고 말한다. 또한 같은 이유로 사도는 끝맺는 축복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은혜가 더 이상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은혜이신 주님을 누린다. 에베소서에 계시된 주요 요점 가운데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 곧 그리스도의 아내라는 것이다. 몸의 방면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는 것이고, 아내의 방면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강조하고, 또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 서신의 수신자인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 실패했다. 바로 이러한 실패가 역대로 교회가 실패한 근본 원인과 주된 이유이다(계 2-3장).
바울은 현명했기 때문에, 교리에 관해 유대교도들과 다투지 않았다. 그 대신에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한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는 그들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방식은 얼마나 놀라운가!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 있는 바울의 말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며 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는 때때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진다. 우리가 메시지를 몇 쪽 읽고 나면, 우리 안에는 주 예수님을 향한 부드러운 느낌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분께서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고 귀하신지를 다시금 새롭게 깨닫는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의 신학적이고도 교리적인 생각은 복잡해서 삼일성이나 그 영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태론에 대해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사역이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라이프 스타디》의 어느 한 메시지의 일부를 읽고 나면, 다시 한번 신랑이신 주 예수님께서 사랑스러우시고 귀하시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오, 주 예수님. 사랑스러운 신랑이시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사역과 당신의 회복으로 인하여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한다. 유대교도들은 의문을 일으키지만, 진정한 사역은 우리의 신랑이신 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의 유대교도들은 믿는 이들을 흔들어서, 주 예수님을 단순하게 사랑하는 데서 멀어지게 하려고 힘을 다한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모세의 율법과 신언자들에게서 돌이켜서 우리의 관심을 주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려지려고 약혼했음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스러우신 주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남편이시고, 저는 그분의 처녀의 일부입니다. 저는 교리나 신학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저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해 주는 사역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분은 제가 사랑하는 유쾌하고 소중한 분이십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3일
에베소서 6장 24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썩지 않으신다고 말하며,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서는 주님께서 죽음을 무효화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밝히셨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 안에서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이 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50-53절).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새 창조물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옛 창조물에 속한 모든 것은 썩는다. 이것은 로마서 8장으로 입증되는데, 이 장에서 우리는 창조물 자신이 썩음의 노예 상태에서 탄식하고 있음을 본다(21-22절). 옛 창조물에 속한 모든 것이 썩고 있다. 오직 새 창조물만이 썩지 않는다.
에베소서 6장 24절은 에베소서 전체에 대한 총결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패하지 않으시고, 교회가 부패하지 않으며, 1장부터 6장까지에 언급된 그리스도와 교회와 관련된 모든 긍정적인 항목들이 부패하지 않을 것들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부패하지 않을 것들 안에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옛 창조물이 아닌 새 창조물 안에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의 자격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신 것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아들의 구속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그 영의 도장 찍음과 보증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에 따라, 성도들 가운데 있는 그분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에 따라, 그리스도를 만물 위의 머리가 되게 하시어 교회에게 주신 그분의 지극히 큰 능력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살리고 부활하게 하고 하늘에 앉힌 그리스도의 부활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많은 때 우리는 부패하는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한다. 우리는 주님을 타고난 방식으로, 곧 옛 창조물에 속한 방식으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새 창조물 안에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어떤 기독교 단체들은 돈을 더 많이 모금하기 위해서, 돈을 많이 낸 순서대로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했다. 이것은 부패함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재물을 드리는 것에서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마 6:3). 왕국 백성으로서 우리의 의로운 행실은 가능한 한 은밀해야 한다(마 6:4, 6, 18). 우리는 오로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서 우리의 영 안에서 행하는 것이, 사람의 영광을 탐내는 우리의 육체로 말미암아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왕국 백성은 그들의 영을 따라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으로 산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행을 공공연하게 하지 않고 은밀한 가운데 해야 한다.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것은 비밀하고 감추어진 신성한 생명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 마태복음 6장 4절에서 주님은 “그대의 구제를 은밀한 가운데 하십시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그대의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이 새 창조물 안에 있는 것이다. 때때로 어떤 형제는 자신을 자랑하거나 드러내고 싶어서 간증한다. 그의 간증에 ‘아멘’이 많을 때, 그는 영광스럽게 느낀다. 이것은 옛 창조물 안에 있는 것이므로, 부패함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는 간증할 때 반드시 십자가에 머물러야 한다. 간증할 때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 만일 우리가 자신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부패함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거듭나고, 새롭게 되고, 그분께서 내주하시는 영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육체 안에서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은 부패하는 것이다.
2일
에베소서 4장에서는 ‘사랑 안에서’라는 구가 세 번 사용된다. 2절은 “모든 일에 겸허하고 온유함으로 또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지며”라고 말한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지는 것은 몸의 하나(3-4절)를 위한 것이다. 우리의 타고난 인성에는 다른 사람, 특별히 말썽 많은 사람들을 짊어질 능력이 없다.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을 짊어지는 것은 단지 참는 것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성도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호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처음에 교회생활 안에 들어와서 신혼의 기간을 체험한다. 이러한 기간은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짊어지는 것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보통 빨리 끝난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하는 말로 의도치 않게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부정적인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이것을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교회생활 안에 남아 있으려면 우리는 괴로움을 당하고 비판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사도 바울조차도 그가 돌본 교회의 성도들에게 비판받았다(고후 12:16). 사랑 안에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짊어질 수 있는 이들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신성한 사랑 안에 있으면서 이러한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관심하지 않고 그러한 비판을 빨리 지나칠 것이다. 서로를 짊어지는 길은 사랑 안에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에서 ‘사랑 안에서’를 사용한 다음 절은 “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4장 15절이다. 참된 것을 붙잡는 것은 무엇이든지 실재인 것과 참인 것을 붙잡는 것이다. 에베소서에 따르면, 참이고 실재인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이다. 그러므로 참된 것을 붙잡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붙잡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신성한 사랑으로 주님과 그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사랑은 부패하지 않을 수 있다.
에베소서 4장 16절은 “그분으로부터 온몸은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입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몸의 모든 지체들은 몸을 자라게 하여 몸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될 수 있게 한다. 교회가 단지 회중이나 모임으로서 건축되지 않고 몸으로서 유기적으로 건축되려면, 우리 모두는 반드시 사랑 안에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은 신성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모든 지체들을 포함한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한다.
에베소서 5장 2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시어, 달콤한 향기가 나는 예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행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 사랑은 타고난 사람의 사랑이 아닌 신성한 사랑이다. 우리는 신성한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한다. 즉 신성한 사랑 안에서 살고 행동하며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신성한 사랑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바울은 이 서신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엡 6:24)라는 축복으로 결론짓는다. 우리는 거친 방식이나 이기적인 갈망이나 타고난 선한 의도로 주님을 사랑해서는 안 되며,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고,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게 되며, 몸의 하나를 위해 서로를 짊어지고, 참된 것 곧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를 붙잡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표현을 위한 하나의 유기체인 몸 안에서 연결되고 짜이며 함께 건축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신성한 사랑 안에서 행하고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 안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면 부패함 없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언노트, 2022 11 13
부패함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
썩지 않음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
은혜는
주님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고
하나님과 그분의 원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교회생활을 하려면,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이신 주님에 대한
누림은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은혜이신 주님을 누린다.
합당한 교회생활을 하려면,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반드시
부패하지 않고
죽지 않으며
사멸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사랑은
참되고
진실하다.
에베소서 1장 4절에서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사랑과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랑 안에서,
그러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다음에 우리도 또한
이 신성한 사랑에 감동되어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상태와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 적셔져서,
그분의 존재와 똑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
이러한 사랑,
곧 상호적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이 사랑을
그분께 돌려드린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 안에서
변형되어 가고 있으며,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
에베소서에서
처음으로
‘사랑 안에서’가 언급된 곳은
1장 4절이며,
이 절의 ‘사랑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도록
우리를 선택하신 것을
수식하거나,
5절에 언급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정하신 것을
수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어
흠이 없게 하시도록
그분께
모든 기회를 드림으로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과 동역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태에 있어야 함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강력하시지만
우리가
합당한 상태에서
그분과 동역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결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실 수 없다.
거룩하게 되고
온전하게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 안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 안에 머물 때,
우리의 상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모든 면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흠이 없게 만드시도록
그분께
최고의 기회와
충분한 기회를 드리는
사랑의 상태가
된다.
신성한 사랑은 결코
부패하지 않을 것이므로,
주님을
이러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
곧 신성한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와 합병된
신성한 생명으로 조성되어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로
“주님,
저는
전적으로 부패함이 없는
한 상태와 상황 안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 자신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즉 주님의
계획과 선한 기쁨과
갈망과 경륜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 안에서’가
다음으로 언급된 곳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
라고 말하는
에베소서 3장 17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작지요,
하나님의 건축물이다.
하나님의 경작지인 우리는
성장하기 위하여
뿌리를 내려야 하고,
하나님의 건축물인 우리는
건축되기 위하여
터를 잡아야 한다.
믿는 이들이
생명의 성장을 위하여
뿌리를 내리고
건축을 위하여
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사랑의 상태 안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신성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의 상태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
사랑 안에 있게 된다.
우리의 체험이
확증해 주듯이,
우리가
이러한 사랑의 상태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성장과 건축을 위하여
깊이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게 된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시고
터를 잡으시도록
우리가
그분께
기회를 드리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타고난 경향에 따라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는
그분의 선한 기쁨에 따라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회개해야 하고,
또한 “주님,
제가
저의 선호에 따라서가 아니라
당신,
당신의 마음의 갈망,
또 당신의 계획에 따라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에서는
‘사랑 안에서’라는 구가
세 번 사용된다.
2절은
“모든 일에
겸허하고
온유함으로
또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지며”
라고 말한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지는 것은
몸의 하나를 위한 것이다.
우리의 타고난 인성에는
다른 사람,
특별히 말썽 많은 사람들을
짊어질 능력이 없다.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을 짊어지는 것은
단지 참는 것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성도들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호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처음에
교회생활 안에 들어와서
신혼의 기간을 체험한다.
이러한 기간은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짊어지는 것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보통 빨리 끝난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하는 말로
의도치 않게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부정적인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이것을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교회생활 안에
남아 있으려면
우리는
괴로움을 당하고
비판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사도 바울조차도
그가 돌본
교회의 성도들에게
비판받았다.
사랑 안에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짊어질 수 있는 이들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신성한 사랑 안에 있으면서
이러한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관심하지 않고
그러한 비판을
빨리 지나칠 것이다.
서로를 짊어지는 길은
사랑 안에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에서
‘사랑 안에서’를 사용한
다음 절은
“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4장 15절이다.
참된 것을 붙잡는 것은
무엇이든지
실재인 것과
참인 것을
붙잡는 것이다.
에베소서에 따르면,
참이고
실재인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이다.
그러므로 참된 것을 붙잡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붙잡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신성한 사랑으로
주님과
그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사랑은
부패하지 않을 수 있다.
에베소서 4장 16절은
“그분으로부터
온몸은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입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몸의 모든 지체들은
몸을
자라게 하여
몸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될 수 있게 한다.
교회가 단지
회중이나 모임으로서 건축되지 않고
몸으로서 유기적으로 건축되려면,
우리 모두는 반드시
사랑 안에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은
신성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모든 지체들을 포함한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한다.
에베소서 5장 2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시어,
달콤한 향기가 나는
예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행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이 사랑은
타고난 사람의 사랑이 아닌
신성한 사랑이다.
우리는
신성한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한다.
즉 신성한 사랑 안에서
살고
행동하며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신성한 사랑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바울은
이 서신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엡 6:24)라는 축복으로
결론짓는다.
우리는
거친 방식이나
이기적인 갈망이나
타고난 선한 의도로
주님을 사랑해서는 안 되며,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며,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게 되며,
몸의 하나를 위해
서로를 짊어지고,
참된 것
곧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를
붙잡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표현을 위한
하나의 유기체인
몸 안에서
연결되고
짜이며
함께 건축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신성한 사랑 안에서
행하고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 안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면
부패함 없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5절과 16절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는 것과
몸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을
계시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되고,
이 사랑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또 함께 몸의 지체 된 사람들을
사랑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내적인 실질이다.
에베소서의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내적인 실질 안으로
이끌려
사랑이신 하나님을 누리고
또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분의 임재를 누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6장 24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썩지 않으신다고
말하며,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서는
주님께서
죽음을 무효화하셨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빛으로 가져오셨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 안에서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이 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썩지 않음 안에서(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새 창조물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옛 창조물에 속한
모든 것은 썩는다.
이것은
로마서 8장으로 입증되는데,
이 장에서
우리는
창조물 자신이
썩음의 노예 상태에서
탄식하고 있음을
본다.
옛 창조물에 속한
모든 것이 썩고 있다.
오직 새 창조물만이
썩지 않는다.
에베소서 6장 24절은
에베소서 전체에 대한
전체적인 결론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패하지 않으시고,
교회가
부패하지 않으며,
1장부터 6장까지에 언급된
그리스도와 교회와 관련된
모든 긍정적인 항목들이
부패하지 않는 항목들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썩지 않는 것들 안에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옛 창조물이 아닌
새 창조물 안에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의 자격에 이르도록
미리 정하신 것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아들의 구속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그 영의
도장 찍음과
보증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에 따라,
성도들 가운데 있는
그분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에 따라,
그리스도를
만물 위의
머리가 되게 하시어
교회에게 주신
그분의
지극히 큰 능력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살아 있게 했고
부활하게 했으며
하늘에 앉게 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많은 때
우리는
썩음의 방식(길) 안에서
주님을 사랑한다.
우리는
주님을
타고난 방식으로,
곧 옛 창조물의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아야 하고,
오직
새 창조물 안에서
주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 모임들은
돈을 마련하기 원했고,
준 사람들의 명단을 내놓았으며,
가장 많이 내는 사람들이
그 명단의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썩음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는 것에 있어서
썩지 않음 안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왕국 백성으로서
우리의 의로운 행실은
가능한 한 은밀해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늘에 속한 다스림 아래서
우리의 영 안에서 행하는 것이,
사람의 영광을 탐내는
우리의 육체에 의해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왕국 백성은
그들의 영을 따라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으로
산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행을
공공연하게 하지 않고
은밀한 가운데 해야 한다.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것은
비밀하고 감추어진
신성한 생명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
마태복음 6장 4절에서
주님은
“그대의 구제를
은밀한 가운데 하십시오.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그대의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자신의
과시 또는 전시를
만들지 않음의
방식으로
일들을 하는 것이
새 창조물 안에 있는 것이다.
때때로 어떤 형제가
간증을 할 때,
그는
그가
과시나 전시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간증한다.
그의 간증함이
많은 아멘들을 얻을 때,
그가
영광스럽게 느낀다.
그것이
그 옛 창조물 안에 있기 때문에,
이것은
썩음 안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는
간증할 때 반드시
십자가에 머물러야 한다.
간증할 때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
만일 우리가
자신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썩음 안에서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썩지 않음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거듭났고,
새롭게 되었으며,
내주된
영 안에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육체 안에서
어떤 것이든 한다면,
그것은
썩음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시고,
몸의 요소이시며,
실재와 은혜와
평안과 사랑과
빛이시고,
한 새사람의 조성 성분이신
주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 모든 방면은,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 포함하여
에베소서에서
계시해 주고
가르치고 있는 것들과
관련된다.
에베소서는
교회를 산출하기 위한
삼일 하나님의 분배에 관하여,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이루셨는지에 관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하늘들의 영역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것에 관하여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부패하지 않는 것들이며,
따라서 우리가
이 모든 것 안에서
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부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타고난 사랑이 아니라
부활 안에 있는 사랑,
곧 하나님 자신의
신성한 본질인 사랑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
신성한 생명,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어떠하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
교회에 관하여 에베소서에 계시된
신성하고 영적이고
하늘에 속하고 부패하지 않는
모든 것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바울이
에베소서 6장 24절에서 한 말은
장차 일어날 문제의
징조를 보여 준다.
요한계시록 2장
2절부터 5절까지에서
주님께서 책망하신 것에
나타난 것처럼,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사랑이 쇠퇴하려 하고 있었다.
따라서 에베소서 6장 24절에 있는
결론의 말은
은혜가 함께하기 위한
조건을 추가로 제시하는데,
그것은
썩지 않음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는
그들의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실 것이었다.
등잔대의 빛은
생명의 빛이며
생명은 곧 은혜이다.
이 생명의 빛이
주님에 의해
옮겨지는 것은
그들이
첫째가는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의 빛,
곧 은혜의 빛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첫째가는 사랑을
회복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 두 절에서
우리는
에베소의 성도들에 대한
주님의 느낌을
볼 수 있다.
주님은
그분을 향한
그들의 사랑에
관심을 기울이신다.
이런 이유로,
사도는
그의 서신서에서 거듭
‘사랑 안에서’라고
말한다.
또한 같은 이유로
사도는
끝맺는 축복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은혜가 더 이상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은혜이신 주님을 누린다.
에베소서에 계시된
주요 요점 가운데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
곧 그리스도의 아내라는 것이다.
몸의 방면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는 것이고,
아내의 방면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강조하고,
또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 서신의 수신자인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
실패했다.
바로 이러한 실패가
역대로 교회가 실패한
근본 원인과
주된 이유이다.
바울은
현명했기 때문에,
교리에 관해
유대교도들과 다투지 않았다.
그 대신에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한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는
그들을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방식은
얼마나 놀라운가!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 있는
바울의 말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키며
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는 때때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진다.
우리가
메시지를 몇 쪽 읽고 나면,
우리 안에는
주 예수님을 향한
부드러운 느낌이 일어나고,
우리는
그분께서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고 귀하신지를
다시금 새롭게 깨닫는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의
신학적이고도 교리적인 생각은
복잡해서
삼일성이나
그 영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태론에 대해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사역이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라이프 스타디》의
어느 한 메시지의 일부를
읽고 나면,
다시 한번
신랑이신 주 예수님께서
사랑스러우시고
귀하시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오, 주 예수님.
사랑스러운 신랑이시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사역과
당신의 회복으로 인하여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말한다.
유대교도들은
의문을 일으키지만,
진정한 사역은
우리의 신랑이신
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오늘날의 유대교도들은
믿는 이들을 흔들어서,
주 예수님을 단순하게 사랑하는 데서
멀어지게 하려고
힘을 다한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모세의 율법과 신언자들에게서 돌이켜서
우리의 관심을
주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순수한 한 처녀로 드려지려고
약혼했음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스러우신 주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남편이시고,
저는
그분의 처녀의 일부입니다.
저는
교리나 신학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저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해 주는
사역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분은
제가 사랑하는
유쾌하고 소중한 분이십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에베소서는
은혜와 사랑의 관계를
강조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은혜를
받아들이고
또 누리기
원한다면,
한 가지 조건,
곧 사랑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
실패했다.
바로 이러한 실패가
역대로
교회가 실패했던
주된 이유이다.
진정한 신약의 사역은 항상
우리를 분발시켜
그 첫번째 사랑으로
(첫째가는 사랑으로)
주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며,
우리를 강화하여
그 단순함 안에서
(단순하게)
우리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게 한다.
에베소서에서
교회에 대한 계시에는
두 가지 주된 방면이 있다.
첫째 방면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사역의 일이고,
둘째 방면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은
우리가
교회생활에 부합하고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많은 영적인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회중이나 모임의 건축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교회의 건축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바울은
유기적인 몸의 건축,
곧 생명이 충만한
몸의 건축에 대해
말한다.
모든 은사들,
곧 사도와 신언자와
복음 전파자와 목자 및 교사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하려고,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고
주어졌다.
은사들은
지체들이
크거나 작거나,
강하거나 약하거나,
나이가 많거나 어린지를
상관하지 않고
모든 지체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우리는
자신이
너무 작거나 약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믿는 이가 중요하고
몸의 지체로서 필요하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나
은사 있는 사람들이 직접
몸을 유기적으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체가 직접
몸을 유기적으로 건축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부패하는 것들 안에 있는지
부패하지 않는 것들 안에 있는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하여
새로운 믿는 이들을
목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느 날 우리는
주님 앞에 설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사랑했는지에 관해
결산을 할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믿는 이들을
목양하는 법과 같은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힘쓰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주님을 누리고
주님에게서 공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을 더욱더 누린다.
마찬가지로,
집회에서 말할 때
우리는 기쁨이 넘치게 되고
심지어 우리의 죽을 몸도 소생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직접
건축하는 일을 함으로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지의 여부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
다른 많은 것들이 부패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은
부패하지 않는다.
이러한 몸의 건축에는
세 가지 주요 범주의 일이 있다.
이 세 가지 주요 범주의 일은
복음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삼일 하나님 안으로 이끄는 것,
가정 집회에서
새로운 믿는 이들을
목양하는 것,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 종류의 수고의 결과는
영원히 남을 것이고,
결코 부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부패함 없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약의 복음의 제사장 체계의
유기적인 봉사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그들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에 이어서,
믿는 이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과
그들의 성장을
돕는 것이 있다.
또한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들이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
곧 유기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것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도들이
교회의 유기적인 건축을 위하여
신언하도록,
즉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온갖 지혜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성장한 사람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수고하고 분투한
사도 바울과 같아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인 봉사이다.
이러한 봉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고,
제사장 체계 안에 있다.
모든 사람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모든 사람이
믿는 이들에게
자양분을 주며,
모든 사람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사람이
신언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 모두가
충분히 성장한 단계에
이를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될 것이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엡 6:24)라고 말하며
에베소서를 결론짓는다.
우리는
우리의 혼 안에 머무르면서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지만,
우리의 혼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도록
허락해 드릴 때,
우리는
부패함 없이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혼 안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감정 안에서
너무 뜨겁기 때문에
어떤 일에 반응하거나
어떤 일을 제안할 때
감정을
억제하거나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쉽게
마음이 상하거나
교회에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킴으로써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러한 종류의 사랑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한다.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교회생활에 합당한 것들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실 수 있도록
반드시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을 것이며,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차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지만,
우리는
그 사랑을
체험으로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단체적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표현이 되는 정도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신성한 생명 안에서의
이러한 영적인 체험들은
우리를
교회생활에 합당하게 만든다.
에베소서에 계시된
모든 영적인 체험들의 비결은
마지막 절에 있다.
에베소서 6장 24절에 따르면,
은혜가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의
근원이다.
3장에 따르면,
은혜는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우리에게 공급하므로
측량할 수 없이 크다.
이렇게 부축하는 은혜를
체험하는 열쇠는
16절에 있다.
그 절에서 사도는
우리가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기를
기도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속사람 안에 있을 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존재와
그분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을
우리 안에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자리 잡으실 때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분의 은혜의 모든 풍성을 주신다.
이렇게 부축하는 은혜로
우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며,
하나님의 걸작품으로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행하고,
옛사람을 벗어 버리며,
새사람을 입고,
영 안에서 충만해지며,
굳세어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할 수 있다.
거듭남은
기적적이지만,
그것은
정상적인(일반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룩하게 되는 것,
곧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도
기적적이지만,
그것은 매우 정상적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우리를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집을 지으시기를
간단히(그저, 단순히)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베소서에 언급된
모든 것들을
기적적이지만
정상적인
이 방식으로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기적적이지만
정상적인 방식으로
매일 아침 부흥될 수 있고,
같은 방식으로
온종일 거듭해서
부흥될 수 있다.
우리에게
죄가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즉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는 죄가 많습니다.
저의 모든 죄 많음을
용서해 주시고
주님의 귀중한 피로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즉시 우리는
깨끗하게 될 것이고
부흥될 것이다.
즉각적으로 부흥되기 위해
우리는
여러 날 동안
기도할 필요가 없고,
오직 주님께
한 짧은 말을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고,
영을 따라 행하며,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다.
그럴 때 집회에 오면
넘쳐흐를 것이다.
즉, 우리의 속사람에게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에베소서에 있는
모든 영적인 체험들에 대한
열쇠는
부축하는 은혜를
공급받기 위해
속사람에 이르도록
강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생활,
부흥된 생활,
지속적으로 이기는 생활,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는
기적적이면서도
정상적인
길이다.
1일
은혜는 주님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고 하나님과 그분의 원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교회생활을 하려면,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이신 주님에 대한 누림은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은혜이신 주님을 누린다(엡 6:24). 합당한 교회생활을 하려면, 부패함 없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반드시 부패하지 않고 죽지 않으며 사멸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사랑은 참되고 진실하다.
에베소서 1장 4절에서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사랑과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랑 안에서, 그러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다음에 우리도 또한 이 신성한 사랑에 감동되어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상태와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으로 적셔져서, 그분의 존재와 똑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 이러한 사랑, 곧 상호적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이 사랑을 그분께 돌려드린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 안에서 변화되어 가고 있으며, 하나님으로 적셔지고 있다.
에베소서에서 처음으로 ‘사랑 안에서’가 언급된 곳은 1장 4절이며, 이 절의 ‘사랑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도록 우리를 선택하신 것을 수식하거나, 5절에 언급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정하신 것을 수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어 흠이 없게 하시도록 그분께 모든 기회를 드림으로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과 동역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태에 있어야 함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강력하시지만 우리가 합당한 상태에서 그분과 동역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결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실 수 없다. 거룩하게 되고 온전하게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 안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 안에 머물 때, 우리의 상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모든 면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흠이 없게 만드시도록 그분께 최고의 기회와 충분한 기회를 드리는 사랑의 상태가 된다.
신성한 사랑은 결코 부패하지 않을 것이므로, 주님을 이러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부패함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 곧 신성한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와 합병된 신성한 생명으로 조성되어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로 “주님, 저는 전적으로 부패함이 없는 상태나 상황 가운데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 자신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즉 주님의 계획과 선한 기쁨과 갈망과 경륜에 따라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 안에서’가 다음으로 언급된 곳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라고 말하는 에베소서 3장 17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작지요, 하나님의 건축물이다(고전 3:9). 하나님의 경작지인 우리는 성장하기 위하여 뿌리를 내려야 하고, 하나님의 건축물인 우리는 건축되기 위하여 터를 잡아야 한다. 믿는 이들이 생명의 성장을 위하여 뿌리를 내리고 건축을 위하여 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사랑의 상태 안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신성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랑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의 상태 안에 있다는 의미에서 사랑 안에 있게 된다. 우리의 체험이 확증해 주듯이, 우리가 이러한 사랑의 상태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성장과 건축을 위하여 깊이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게 된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시고 터를 잡으시도록 우리가 그분께 기회를 드리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타고난 경향에 따라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는 그분의 선한 기쁨에 따라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회개해야 하고, 또한 “주님, 제가 저의 선호에 따라서가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마음의 갈망과 계획에 따라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