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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본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함

Knowing and Experiencing
Christ as the Pattern
그 본이신 그리스도를
앎과 또 체험함

우리가
본이신 그리스도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을 품어야 한다
― 빌 2:5.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으로
취해야 하며,
우리 안에
‘이 생각을 품기 위해’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한다
― 빌 2:3-5.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이 생각’이란
3절에 있는
‘여기는 것’과
4절에 있는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가리킨다.

생각을 낮추는 것은
(빌 2:3)
이기적인 야심과
헛된 영광
둘 다와 대조된다.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타고난 겸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겸허이다
(8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낮추셨을 때,
이러한 생각,
이러한 사고(思考)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 빌 2:7-8.

‘이 생각’을 가지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
곧 그분의
부드러운 내적 느낌과 생각에서
그분과 하나 되어야 한다
― 빌 1:8.

그리스도의 생각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이 생각이
살아 있는 어떤 것임을
의미한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생각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격은
그분의 생각 안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 빌 2:5, 고전 2:16.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는
그분을
본으로 알아야 한다
― 빌 2:5-9.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9절까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이 본이
우리 안으로
주입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본은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셨으며
또한 하나님에 의해
높아지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하나님-사람 구주이다
― 빌 2:6-9.

주님은 비록
하나님과 동등하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을,
붙잡고 놓지 않아야 할
보배로 여기지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은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이 소유하신 것
곧 하나님의 모습을
내려놓으셨다
― 빌 2:6-7상.

주님은
육체가 되실 때에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바꾸지 않으셨다.

그분은 다만
외적인 표현을
하나님의 모습에서
노예의 모습으로
바꾸셨다.

주님은
‘사람들과 같은 모양’이 되셨다
― 빌 2:7하-8상.

‘하나님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신격의
내적인 실재를 의미하며,
‘사람들과 같은 모양’은
그분의 인성의
외적인 겉모양을 가리킨다
― 빌 2:6-7.

그분은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한 사람으로 나타나셨지만,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내적으로
신격의 실재를 가지셨다
― 요 1:1, 14, 18, 3:16, 롬 8:3.

그리스도는
인성의 상태 안으로 들어오셨고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다
― 빌 2:8상.

그리스도는
순종하시어
죽으심으로써,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자신을 낮추셨다
― 빌 2:8하.

자신을 낮추신 것은
자신을 비우신 것보다
더 전진된 단계였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신 것은
그분께서
자신을 비우신 것을
나타낸다
― 빌 2:7-8.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낮추신 것의
절정이었다.

아들은
권위에 복종하는 것의 대표로서
기꺼이 자신을 비우심으로
창조된 사람이 되셨다
― 빌 2:6-8.

주 예수님은
복종의 길에
죽기까지
그분 자신을 복종시키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 사 50:7, 눅 9:51, 막 10:31-34.

주님은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
― 히 5:8.

(1)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죽어야 한다고 정하셨고,
그리스도는 순종하셨다
― 빌 2:8.

(2) 그리스도는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이러한 순종을 배우셨다.

온 일생 동안
복종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복종의
생명을 주셨다.
믿는 이의 순종은
그리스도를
순종의 본으로
취한 결과이다
― 빌 2:8, 골 3:4.

주님은
자신을
극도로 낮추셨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셨고,
그분께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 빌 2:9.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들 가운데에는,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
― 빌 2:3-8.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는
객관적인 분이실 뿐 아니라,
주관적이며
체험적인 분이시다.
본을 세우셨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본이신 분께서
지금
내주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신다
― 빌 2:5, 12-13.

우리의 생활을 위한
내적인 본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원칙은
비록 우리가
가장 높은 표준이나
가장 높은 위치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붙잡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빌 2:3-6.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의 방면,
특히 그분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을
붙잡고 놓지 않아야 할
보배로 여기지 않으신 방면에서
그리스도를 살
필요가 있다
― 빌 1:20-21상, 2:6.

우리 안에는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는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은 결코
무언가를
붙잡고 놓지 않아야 할
보배로 여기지 않으며,
언제나 기꺼이
지위와 직함을
내려놓는다
― 빌 2:3-6.

우리는
우리의 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 본은
우리 안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다
― 고전 1:23상, 2:2, 갈 2:20, 3:1, 6:14.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까지에 나오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신
여러 단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
완전히 살아 나타난 것의
여러 면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
완전하고 절대적인 방식으로
살아 나타난 것이었다
― 빌 2:8.

그리스도를 살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의 본이신
그분을 산다
― 빌 1:21상, 고전 2:2.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는
부활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 빌 3:10상, 엡 1:19-22.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생활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활 안으로 이끄실 것이다
― 빌 3:10-11.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일상생활의 본으로
삼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높아지신다
― 빌 2:5, 1:19-21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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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빌 2: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어,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사실상
부활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부활 능력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뒤따른다.
3장 10절에 따르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기를 열망했다.
…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높인 능력을
부활 능력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할 때
부활 능력을 알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도 안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들 가운데에는,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한 생명은
경쟁과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생명과는 완전히 반대된다.
교회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우리의 본으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경쟁과 헛된 영광을 구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제삼의 길은 없다.
…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여
그동안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생활을 해 왔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교회생활을
돌이켜 본다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우리의 본으로
삼지 않았을 때마다
헛된 영광을 위해 경쟁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빌립보의 성도들이
헛된 영광을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 없었다.
바울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을 사는 것을
매우 관심했다.
… 이 생명은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우리의 본으로 삼는 것은
부활의 문을 열어
우리를
부활 능력 안으로 인도한다.
하나님의 높이심은 결코
경쟁이나 헛된 영광을 구하는
생활에 의해 오지 않는다.
헛된 영광을 구할수록
우리의 상황은
점점 더 부끄럽게 될 것이다.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전혀 영광이 아니며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다른 사람과 경쟁할 때,
그 결과는 절대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생활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이다.

나는 오늘날
교회생활 가운데 있는
어떤 성도도
자신을 위해
영광을 구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빌립보 성도들 사이에 있었던
헛된 영광을 위한 경쟁이
오늘날
많은 지방에 있는
교회들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러므로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바울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다.
…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을 살 때,
우리는
부활 능력 안으로 인도되며
이 부활 능력이
우리를 높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
부활 능력,
하나님의 높이심에 관한 말씀을
영광을 얻기 위한 기반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외의
다른 무언가에서
참된 영광을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영광도
구하지 말라.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
저는 오직
당신만을 원합니다.
저는
어떤 높아짐이나
어떤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우리의 본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부활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 부활 능력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실 뿐 아니라
부활 능력이시다.

성도들은 자주
자신의 약함을 호소한다.
언제든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우리의 본으로
삼지 않을 때
우리는 약하다.
만약 우리가
가정생활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교회생활에서
약하다면,
이것은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 능력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시이다.
… 부활 능력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다.
빌립보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기대는
그들이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을 삶으로
부활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수년 동안
교회생활을 해 오면서
나는
헛된 영광을 위해 경쟁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많이 보았다.
예외 없이
그러한 경쟁에 가담했던
모든 사람들은
다 아래로 내려갔다.
교회생활 가운데서
경쟁하는 것은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뱀을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경쟁을 두려워해야 한다.

 

5일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제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생명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생명입니다.

고전 2:2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겸손하셨던 것처럼
겸손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우리는 서로
자신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길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거나 겨루면서
어떤 일을 할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표현되지 않지만,
우리가 서로
자신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길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공급을 누린다.
본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서부터
살아 나타내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시다.
우리 안에는
결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항상 자신을 비우고
더 낮은 곳에 처하며
자신을 낮추는
생명이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러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주님은
일곱 단계로 낮아지셨다.
그것은
(1) 자신을 비우심,
(2) 노예의 모습을 가지심,
(3) 사람들과 같은 모양이 되심,
(4) 자신을 낮추심,
(5) 순종하심,
(6) 죽기까지 순종하심,
(7)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이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까지에 제시된
본은 이제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다.
이 생명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신
일곱 단계는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의 여러 방면들이다.
그리스도는
신격의 표현을 가지고 계셨지만
이 표현을 제쳐 놓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신격의 실재를
제쳐 놓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더 높은 모습인
하나님의 모습을
제쳐 놓으시고,
훨씬 낮은 모습인
노예의 모습을
취하셨다.
이런 식으로
그분은
자신을 비우셨다.
분명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의 표시였다.
그리고 사람이 되시어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신 후에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
완전하고도
절대적으로
살아 나타난 것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살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이러한 생명을
자동적으로 살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의 본이신
그분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참으로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는 생명이다.
이 생명은 결코
무언가를
붙잡고 놓지 않아야 할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반대로 이 생명은
언제나 기꺼이
지위와 직함을
내려놓는다.

빌립보서 2장에서
우리는
부활 능력을 누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본다.
우리는
부활 능력을 체험할 수 있도록
2장 5절부터 8절까지에서
볼 수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우리의 본으로
취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부활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부활 생명은
그리스도를
이 우주에서
가장 높은 곳에까지 높였다
(빌 2:9).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의 본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분을 높인
부활 능력을 체험하는 것은
둘 다
끝이 없는 것이다.
매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경쟁과 헛된 영광을 구하는
생활을 하기보다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높인
부활 능력 안으로
들어간다.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생활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이다.
이러한 생활은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살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활 능력 안으로
이끄실 것이고,
이 능력 안에서
우리는 높아질 것이다.
… 우리는 반드시
주님의 증거를 위해
굳게 서야 하지만,
우리 자신을 위해
어떤 입장이나 직함이나 지위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요구를 하는 것은
결코 우리를
부활 능력 안으로
이끌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우리의 본으로
취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높이심을
체험하는 곳인
부활 능력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영광을 추구하기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추구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을 체험할 것이다.

 

4일

빌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나에게 있어서
죽음은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간 생활의 방면,
특히 그분께서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을
붙잡고 놓지 않아야 할
보배로 여기지 않으신 방면에서
그분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붙잡으려고 하지 않으셨으며,
기꺼이 하나님의 모습을
제쳐 두고
노예의 모습을
입음으로써
자신을 비우셨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자신을 비우신
그리스도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 우리는
가진 것들을 붙잡는 대신에
이러한 것들을 제쳐 두고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계속적인 구원을 위한
본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이 구원을 위한
표준도 있다.
이 본은
육체 되심부터
십자가에서의 죽음까지의
그리스도의 체험을 포함하고,
이 표준은
부활부터
높아지심까지의
그리스도의 체험을 포함한다.
매일 우리는
이러한 본과 표준을 가진
구원을 누려야 한다.

가령 어떤 형제가
아내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다고 하자.
그가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받는 길은
자신의 머리의 권위를
주장하거나
아내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왕으로,
아내를 신하로
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그는
아내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에베소서 5장 22절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머리의 위치,
즉 ‘남편의 위치’를
붙잡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을
붙잡을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머리의 위치를 가진 사람이
그것을 제쳐 놓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그 형제가
주님의 계속적인 구원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물론 그 형제는
하나님의
내적인 운행하심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까지는
13절에 있는
하나님의 운행하심보다
먼저 나온다.
물론 하나님은
그 형제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안에서 운행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까지에 있는
본에 따라
기꺼이 자신을 비우고
머리의 위치를
제쳐 놓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결혼한 형제는
자신의 머리의 위치를 붙잡고
그것을 제쳐 놓기를 거절한다.
이것은
불평과 따짐을
야기할 것이며
씁쓸한 말다툼을
일으킬 것이다.
여기서 그 형제는
주 예수님을 접촉하며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
당신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을
붙잡지 않으셨고,
저는
저의 머리의 위치를
붙잡지 않습니다.
또한 저는
남편으로서의 위치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은혜로운 긍휼로
저는
저의 머리의 위치를
제쳐 놓습니다.”
단순히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구원의
첫 번째 단계를 체험한다.
이제 그는
자신을 낮추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춤으로써
안식을 체험하는 데에
이르러야 한다.
그는
자신의 머리의 위치를 무시하는
자기 아내에 대해
분함을 느끼는 대신에
아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이것이
육체 되심부터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이르는
계속적인 구원의
본을 체험하는 것이다.
만일 그 형제가
이것을 체험한다면
하나님께서 임하시어
그를
일으키시고
높이실 것이다.
그럴 때 그 형제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구원의
표준을 또한 체험할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아내는
남편을 힘들게 했다는
사실로 인해
겸손해지고
괴로워할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하는 대신에
자신을 비웠고
자신을 낮추었다.
바로 이때 그녀는,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 인해
그가 높아졌고
보좌에 앉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본과 표준이 있는
계속적인 구원을 체험했다.

빌립보서 2장에 따라
주 예수님을 따르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는
신성한 본을 따르거나
하나님의 표준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신 것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자!
주 예수님 안에서
육체가 되신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신다.
이 하나님은
무한한 하나님이시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영원한 하나님은
육체 되심을 통해 오셔서
주 예수님 안에서 사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본으로 만드셨고,
신성한 표준에 따라
그분을 높이셨다.
이제
이 동일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운행하고 계신다.
… 하나님께서
내 안에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이제
‘하나님-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참된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따라서
살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3일

빌 2:8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순종하시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히 5:8
그분은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이 땅에 오셨을 때
주님은
신성 안에 있는
그분의
영광과 능력과
지위와 형상을
다 비우셨다.
그래서 당시
계시가 없는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만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주님은 자원하여
신격 안에서
아들이 되실 것을
선택하셨고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아버지께서
나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요 14:28하)
라고 말씀하셨다.
아들의 위치는
우리 주님께서
스스로 선택하신 것이다.
신격 안에는
완전한 조화와 동등함이 있지만,
아버지는
머리가 되시고
아들은
복종의 위치에
기꺼이 안배되셨다.
하나님은
권위의 대표가 되시고
아들은
복종의 대표가 되셨다.

우리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복종은 간단하다.
다만 겸손하기만 하면
복종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복종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주님의 복종은
천지의 창조보다
더 어렵다.
복종하기 위해
주님은
그분의 신격의 모든
영광과 능력과
지위와 형상을
비워야 하셨고,
또한 노예의 모습을
입어야 하셨다.
그래야만 비로소
복종의 조건을
얻으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복종은
하나님의 아들이
창시하신 것이다.

본래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영광을 가지셨다.
그러나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한 면으로는
권위를 버리셨고
다른 한 면으로는
복종을 취하셨다.
그분은 기꺼이
노예가 되시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사람이 되셨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은 또한
자기를 낮추어
기꺼이 순종하셨다.
신격 안에 있는
순종은
온 우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이다.
그분은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이 죽음은
고통의 죽음이자
수치의 죽음이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분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셨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칙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내가 왜
복종해야 합니까?”
혹은
“나도 형제요
당신도 형제인데,
왜 내가
당신에게 복종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다.
사실 누구도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오직 주님만이
이렇게 질문할
자격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고,
그분 안에는
그러한 생각조차도 없으셨다.
하나님의 권위가
완전한 권위이듯이,
그리스도는
복종, 완전한 복종을
대표하신다.

히브리서 5장 8절은
주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한다.
고난은
그분께
순종을 가져다주었다.
고난을 당하고도
순종할 수 있을 때
참된 복종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유용성은
고난을 받았는지에 있지 않고,
고난 중에서
순종을 배웠는지에 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만이
유용한 사람이다.
마음이 부드럽지 않은 사람에게는
항상 고난이 따른다.
우리의 길은
고난을 많이 받는 길이다.
안락을 탐하고
누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쓸모가 없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고난 중에
순종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순종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기 때문이다.

구원은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또한 복종도 가져다준다.
만일 사람이
기쁨만을 위한다면
그가 얻은 체험은
풍성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복종하는 사람만이
구원의 풍성함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구원의 성질을
바꾸어 놓게 된다.
주 예수님은
순종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같이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에 복종하기를
기대하며
우리를 구원하셨다.
온 일생 동안
복종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복종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만지기만 한다면
복종은
아주 용이할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뜻도
쉽게 깨닫게 될 것이다.

 

2일

빌 2:6-7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을,
붙잡고 놓지 않아야 할
보배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셔서,
노예의 모습을 가지시어,
사람들과 같은 모양이 되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매우 높은 위치를 가지셨다.
… 그리스도는
그분의 높은 위치를 버리시고
사람의 모습을 취하셨을 뿐 아니라
노예의 모습을 취하셨다.
사람들에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그분은
자신을 낮추시고 순종하시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
그러한 분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우리의 본이시다.
우리 자신을 위해
지위나 직함을 추구하는 대신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의
본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이
우리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낮추신
이러한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표현을 가진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비록
하나님과 동등하셨지만,
이러한 동등함을 내려놓고
사람의 모습을 취하심으로
자신을 비우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되심을 통해서
사람이 되셨음을
가리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심으로
자신을 낮추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사람이셨을 때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는 지점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이것이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이다.

자신을 낮추신 것은
자신을 비우신 것보다
더 전진된 단계였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신 것은
그분께서
자신을 비우신 것을
나타낸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낮추신 것의
절정이었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였다
(신 21:22-23).
이방인들이 볼 때
그것은
범죄자들이나 노예들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였다
(마 27:16-17, 20-23).
그러므로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히 12:2).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을
우리의 본으로 알아야 한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1절까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본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이 본에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하며,
심지어 이 본이
우리 안으로
주입되게 해야 한다.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분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실지라도
그분은
‘오히려 자신을 비우셔서,
노예의 모습을 가지시어,
사람들과 같은 모양이 되셨’다
(빌 2:7).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을
내려놓으시고
자신을 비우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분께서 단지
하나님의 외적인 표현을
제쳐 놓으셨음을
의미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셨을지라도
노예의 모습을 가지시어
사람들과 같은 모양이 되시고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다.
그 결과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외양을 가지셨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신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을 비우셨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시고
순종하시어
죽기까지 하셨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구주로서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둘 다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자신을 비우셨고
또한 자신을 낮추셨다.
따라서 우리는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8절까지에 따라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빌립보서 2장 9절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어”
라고 말한다.
이 절은
하나님께서 임하시어
그리스도를 높이셨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신 것은
단지 그분께서
땅의 낮은 곳에서부터
삼층천으로 올라가신 것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그분의 인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신 것을
의미한다.
육체 되심 이전에
그리스도는
인성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육체 되심을 통하여
그분은
인성을 입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이 인성을
십자가로 가져가셨으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그분의 피를 흘리셨다.
부활 후에 그분은
하늘로 높아지셨으며,
그분의 인성을 가지고
영광 안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셨다.
이제 그분은
우리의 본이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본은
자신을 비우시고
자신을 낮추셨으며
또한 하나님에 의해
높아지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하나님-사람 구주이다.

 

신언노트, 2019 07 14

그 본이신 그리스도를
앎과 또 체험함

만약 우리가
 그 본이신 그리스도를
 알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그 생각이
 우리 안에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으로 취할
 필요가 있고,
우리 자신들을 열어
 우리 안에
 “이 생각이 있게 할”
 (to “let this mind” be)
 필요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안에 있는
 ‘이 (생각)은’
 3절 안에 있는
 그 ‘여김’과
 4절 안에 있는
 그 ‘귀하게 여김’을
 언급합니다.

생각의 겸허는
 (Lowliness of mind;
 생각의 겸손은[비천함은, 낮음은,
 초라함은], 생각을 낮추는 것은)
이기적인 야심과
 또 헛된 영광
 (vainglory;
 허영심, 자만, 허식, 과시)
 둘 다와
 대조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타고난 겸허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그 겸허입니다.

이 종류의 생각,
 곧 이 종류의 생각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때(when)
 그분께서
 그분 자신을 비우셨으며
 또 그분 자신을 겸허하게 하셨습니다
 (humbled; 낮추셨습니다).

‘이 생각’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내적인 부분들 안에서,
 곧 그분의 부드러운, 곧 내적인 느낌과
 또 그분의 생각하심 안에서
 그분과 하나인 것을
 (to be one with Christ;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의 그 생각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이 생각이
 살아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그 생각은
 그리스도 그분 자신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그 인격이
 그분의 생각 안에서
 나타내지기 때문입니다
 (is manifested;
 표현되기[분명하게 되기,
 명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분을
 그 본으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9절까지 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 본으로
 제시합니다
 (presents;
 보여 줍니다, 나타냅니다, 줍니다, 소개합니다)
우리는
 이 본이
 우리 안으로
 주입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그 생활의
 그 본은
 그 하나님-사람 구주이시고,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을 비우셨고
 또 그분 자신을 낮추셨으며
또 그분께서는
 하나님에 의하여
 높여지셨고
 (has been exalted)
 또 영광스럽게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셨지만
 (Although … was equal with;
 … 동일하셨기는 하나[같으셨을지라도]),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움켜잡히고
 (to be grasped;
 꽉 잡히고, 단단히 붙잡히고)
 또 계속 유지되는
 (to be … retained;
 보유되는, 간직될)
 한 보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을 비우셨고,
 자신이 소유하셨던 무엇
 ―하나님의 그 모습을
 (the form;
 그 형태를[모양을, 외관을])
 제쳐두셨습니다
 (laying aside;
 제쳐놓으셨습니다,
 옆으로 비켜[한쪽으로] 놓으셨습니다).

그분의 육체되심 안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did not alter;
 변경하지[고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오직 그 외적인 표현을,
 하나님의 그 모습에서부터
 한 노예의 그 모습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changed; 바꾸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의 그 겉모양 안으로” 되셨습니다
 (became “in the likeness of men”;
 “사람들을 닮게”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모습’은
 그리스도의 신격의
 (of Christ’s deity;
 그리스도의 신성의)
 그 내적인 실재를
 함축합니다
 (implies;
 내포[포함, 시사]합니다,
 넌지시 뜻합니다[비칩니다]);
‘사람들의 그 겉모양’은
 그분의 인성의
 그 외적인 나타남을
 (the outward appearance;
 그 외적인 겉모습을[외관을, 모양을])
 나타냅니다
 (denotes;
 뜻합니다, 의미합니다).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한 사람으로서
 나타나셨지만,
하나님으로서,
 그분께서는
 내적으로
 신격의 그 실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성의 그 상태 안으로
 들어오셨고,
또 그분께서
 한 사람인 형태 안에서
 (in fashion as a man;
 한 사람으로서의 양식[방식]으로)
 알려지셨습니다
 (was found;
 발견되셨습니다, 여겨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
 ―한 십자가의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게 되심에 의하여
 그분 자신을
 겸허하게 하셨습니다
 (humbled; 낮추셨습니다):

그분 자신을 겸허하게 하심은
 그분 자신을 비우심 안에서
 더 나아간 한 걸음이었습니다
 (a further step;
 더 이상의[먼, 떨어진]
 한 단계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스스로를 겸허하게 하심은
 그분의
 스스로를 비우심을
 나타냈습니다
 (manifested;
 명백하게 했습니다, 증명했습니다).

한 십자가의
 (of a cross; …에서의)
 그 죽으심은
 그리스도의 겸허의
 (of … humiliation;
 굴복의, 수치의)
 그 절정이었습니다
 (the climax;
 그 최고조였습니다).

그 아들께서
 기꺼이 그분 자신을 비우셨고
 (emptied … to …; 비우셔서)
 권위에의 굴복의
 그 대표인
 (as the representation;
 그 표현[표시, 그림, 초상]으로서)
 한 창조된 사람이 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정하셔서
 (set … to; 고정하셨고)
 굴복의 그 길에
 그분 자신을 복종시키셨는데,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였습니다.

“그분께서 한 아들이셨지만(a Son),”
 주님께서는
 “그분께서 고통을 겪으신
 그것들에서부터
 (from the things; 그 일들로부터)
 순종을
 (obedience;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히 5:8):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한다고
 정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순종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의 고통을 겪음을 통하여
 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주님,
 그분은(who)
 그분의 생애 동안 내내
 (throughout His life)
 굴복하셨고
 (was submissive; 순종적이셨고),
우리에게
 그분의
 굴복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한 믿는 이의 순종은
 그리스도를
 순종의 한 본으로 취함의
 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극도로
 그분 자신을
 겸허하게 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가장 높은 그 봉우리로
 (to the highest peak;
 그 정상으로[정점으로, 최고점으로])
 높이셨고
또 그분 위에
 “각각의 모든 이름들보다 위에 있는
 (is above …; …보다 뛰어난)
 그 이름”을 주셨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들 가운데에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할
 한 긴급한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객관적이실 뿐 아니라
 또한 주관적이시며
 또 체험적이십니다;
그 본을 세우셨고
 (set up; 수립하셨고)
 또 그분 자신께서 그 본이신
 그 한 분께서
그 내주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 안에서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is … operating;
 움직이고[운행하고, 효력이 나타나고,
 작용하고, 영향을 끼치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활함을 위한
 그 내적인 본이신
 그리스도의
 그 원칙은
우리가
 그 가장 높은 표준
 또는 그 가장 높은 지위를
 (position;
 위치를, 자리를, 신분을, 입장을, 처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움켜잡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should not grasp;
 꽉 쥐지[붙잡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함 안에서,
특히 그분의
 그분 자신을 비우심과
 또 그분 자신을 낮추심 안에서
또 그분의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한 보물로
 움켜잡지 않으심 안에서
그리스도를 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비우고
 (self-emptying)
 또 스스로를 겸허하게 하는
 한 생명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결코
 어떤 것을
 한 보물로
 붙잡으려고 하지 않고
 (never grasps at something;
 잡으려 달려들지 않고, 움켜잡지 않고)
오직 항상 기꺼이
 지위와
 또 칭호를
 (title;
 직함을, 경칭을)
 제쳐둡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고
 (have; 모시고),
또 이 본은
 우리 안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생명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까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겸허의
 그 단계들은
한 충만한 방식으로
 (in a full way;
 가득 찬 한 방식 안에서, 완전히)
 살아 나타내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생명의 측면들입니다
 (aspects; 양상[모양들, 모습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은
충만하고 또 절대적인 한 방식으로
 살아 나타내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생명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한 생명의
 (a … life; 한 생활의)
 그 본이신
 그 한 분을(the One) 삽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한 생명을 삶에 의하여,
우리는
 부활의 그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땅 위에 있는
 그 가장 높은 생명은
 (life; 생활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한 생명을 살 때는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활 안으로
 데려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의
 그 풍부한 공급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Him;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생명으로 취하여
 우리의 매일의 생활의
 그 본이 되실 때
 (as … to be the pattern;
 … 그 본이 되시도록 … 취할 때)
그분께서는
 (Christ;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매일의 생활 안에서
 높여지십니다.

 

1일

빌 2:3-5
어떤 일도
이기적인 야심으로
하지 말고,
헛된 영광을 위해
하지 말며,
오직 생각을 낮추어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각자
자기의 장점만
귀하게 여기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장점도
귀하게 여기십시오.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여러 중점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중점은
5절에서 발견되는데,
이 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을 품으십시오.’를
직역하면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이 있게 하십시오.’
라고 번역할 수 있음―역자 주)
이 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되”
라고 말하는
골로새서 3장 16절과
비슷하다.
어떤 것이
우리 안에 거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씀은
인격화되었다.
여기서 말씀은
하나의 인격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인격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이 생각이
살아 있는 어떤 것임을
의미한다.
이 표현을
“그리스도의 생각을
취하십시오.”
또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소유하십시오.”
라고 번역한다면,
이 절의 합당한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생각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게 하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생각,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특별한 생각이
우리 안에 있게 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빌립보서의 주제가
‘그리스도를 체험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은 먼저
1장에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모든 것을 포함한
넘치는 공급이 필요하다고
말해 준다.
더욱이 이 넘치는 공급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살기 위한 수단은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이다.
그다음에 2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에 관해
또 다른 중점을 다룬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한
두 번째 수단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살아 있는 생각을
우리 안에
있게 하는 것이다.
우주 안에는
살아 있는 생각,
곧 바울이
‘이 생각’이라고 칭하는
생각이 있다.
이 살아 있는 생각은
우리가
자신을 열고
우리 안에
거하게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방하기 위한
본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요점은
우리가 체험하는
그리스도께서
매우 실지적이고도
유용하시다는 것이다.
특히 그분의 생각은
매우 살아 있고
활동적이다.

바울은
그의 글에서
때때로
그리스도의 온유와
그리스도의 관대를
언급한다
(고후 10:1).
그렇지만 온유와 관대는
인격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의 생각은
인격에 비유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유나 관대가
우리 안에 거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생각을
우리 안에
있게 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실지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그분의 생각 안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반드시
실지적인 그리스도를
취해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시고,
그분의 생각도
살아 있으며
우리가
그분께 열기를
기다린다.
우리는
이 생각이
우리 안에 있도록
반드시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한다.

일단 우리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우리 안에
있게 한다면,
이 생각은
우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에베소서 4장 23절은
우리가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하고,
로마서 12장 2절은
“생각이 새로워짐으로
변화되어”
라고 말한다.
새로워진 생각,
영을 가진 생각은
그리스도의 생각이
내주하는 생각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생각은
변화시키는 생각,
새롭게 하는 생각이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각을 품는 것은
우리가
변화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단지
외적으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생각을
우리 안에
있게 하여
내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게
해야 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연합된 생명,
곧 신성과 인성이 연합된
생명을 살 것이다.

그리스도는
빌립보서 2장에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으로
계시되신다.
이 하나님-사람께서
사시는 생명은
연합된 생명이다.
그것은
교환된 생명이 아니고
둘이
하나로 연합된 생명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의 모습으로
살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노예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다.
이분이 바로
인성 안에서
노예의 모습을 갖고
사람의 형태로 사신
하나님이셨다.
… 그분은
삼십삼 년 반 동안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다.
그분의 생활이
그분의 일이었다.
빌립보서 3장 9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갈망했다.
2장에서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양으로 발견되셨는데,
3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갈망했다.
이것은
그의 생활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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