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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변절과 산당, 그리고 하나라는 진정한 터의 회복

여로보암의 변절은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한 예표로 볼 수 있다.

변절은 하나님의 길을 떠나 다른 길을 취하여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구실로 자신을 위해 일들을 하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변절은 다음의 다섯 가지로 이루어진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우상) 둘을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어 자기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경배하지 못하도록 미혹시킴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의 하나가 유지되도록 거룩한 땅에 오직 하나의 유일한 경배의 중심지가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깨뜨렸다.

여로보암은 산당에 신전을 짓고 레위 지파가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들을 임명하였다.

여로보암은 유다에서 지내는 명절과 비슷하게 자신이 마음대로 정한 달인 여덟째 달의 열닷샛날을 명절로 정하였다.

여로보암은 벧엘에 있는 제단에서 자신이 만든 송아지 앞에 희생 제물을 바치고, 산당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을 벧엘에 두었다.

여로보암은 제사장이 아니면서도 제단으로 올라갔다.

여로보암의 변절은 심각한 죄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온 집안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파멸하였으며, 이스라엘이 포로로 사로잡혀 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의 ‘여로보암들’에 의해 세워진 경배의 중심지들은 사실상 야심의 중심지들이다.

기독교 안에 있는 분열들은 이기심과 야심에서 비롯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만족시킬 제국을 갖고자 하는 야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한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 안의 모든 참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었지만, 타락한 기독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몇몇 믿는 이들을 임명하는 체계를 세워, 그들을 성직자 계층으로 만들고 나머지 믿는 이들은 평신도로 남겨 놓았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혐오하고 버려야 하는 변절에 속한 실행이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변절로 가득하기 때문에, 주님은 회복 곧 생명과 진리의 회복이 필요하시다.

생명의 공급과 진리의 계시는 변절과 교회의 하락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사도들이 사용한 해독제들이다.

모든 것을 포함한 진정한 하나를 회복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산당을 헐어 버려야 한다.

산당은 이방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들을 숭배하던 장소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려고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민족들의 모든 산당을 파괴하라고 명령하셨다.

산당을 세우는 것은 결국 분열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산당들에 내재된 의미는 분열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하나를 보존하시기 위해,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곳으로 오라고 요구하셨다. 산당들은 이 유일한 곳을 대신하고 대치하는 곳이었다.

열왕기상에서 두 왕, 곧 솔로몬과 여로보암이 산당들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는데, 솔로몬은 정욕에 빠져 그렇게 했고, 여로보암은 야심 때문에 그렇게 했다.

산당은 높이 솟은 곳으로서, 일반적인 수준보다 높은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산당이 어떤 것을 높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원칙적으로, 기독교에 있는 모든 산당, 곧 모든 분열은 그리스도 아닌 어떤 것을 높이고 칭송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솔로몬과 여로보암의 통치 아래서 산당들이 세워진 것에 관한 기록은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솔로몬과 여로보암이 지은 산당들은 하나라는 터를 심각하게 손상했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산당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수준에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

모든 산당은 비록 그곳에서 진정한 희생 제물들이 드려진다 할지라도, 하나라는 터에 손상을 입힌다.

산당을 헐어 버리는 것은 장소와 형상과 이름이라는 세 가지 주요 항목을 포함했다.

영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반드시 교회 외의 모든 장소와 그리스도의 이름 외의 모든 이름을 없애 버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문화, 기질, 성미, 습관, 타고난 특성, 선호, 종교적인 배경과 그 영향력 등, 진정한 하나를 손상하는 모든 것을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골로새서 3장 11절에 있는 말씀을 이루려면 우리는 다른 모든 장소를 철저히 헐어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회가 아닌 모든 것을 반드시 헐어 버려야 한다.

우리는 다만 교회생활 안에서 좋은 땅의 풍성이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교회생활은 기꺼이 산당을 헐어 버리고자 하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약하게 되었다.

우리의 인간 생활과 문화에는 헐어 버려야 할 장소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반드시 그런 장소들을 모두 헐어 버린 다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장소인 교회로 와야 한다.

헐어 버려야 할 모든 장소에는 바쳐진 기념 기둥이나 상징물이나 형상이 있다. 우리의 성격이나 기질 속에도 반드시 헐어 버려야 할 그러한 기념 기둥들이나 상징물들이나 형상들이 있을 수 있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셔야 한다.

기독교계 전반에 걸친 변절과 산당과 분열 때문에 하나라는 진정한 터의 회복이 필요하다.

신약의 신성한 계시에 따르면, 교회의 터 곧 하나라는 진정한 터는 세 가지 핵심 요소들로 구성된다.

교회의 터를 구성하는 첫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유일한 하나이다.

이 하나는 ‘그 영의 하나’라고 불린다.

이 하나는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셨던 하나, 곧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이 연합된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이 생명의 영에 의해 신성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거듭났을 때, 이 하나가 그들의 영 안으로 분배되었다.

교회의 터의 둘째 요소는 한 지방에 있는 교회가 세워지고 존재하는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이다.

교회의 터의 셋째 요소는 한 지방에 있는 교회의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 위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유일한 하나를 표현하는, 하나(oneness)의 영의 실재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살아 있는 실재이신 실재의 영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가 실지적이고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이 영을 통해 교회의 터가 율법적으로가 아니라 생명의 방식으로 적용된다.

이 영에 의해 교회의 진정한 터가 삼일 하나님과 연결된다.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인 교회는 나누어지지 않고 나누어질 수 없다. 이 유일한 몸은 여러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삼일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듯이 신성한 하나 안에서, 그리고 신성한 본성과 요소와 본질과 표현과 기능과 증거 안에서 표현된다.

진정한 하나, 곧 하나님의 본성에 따른 하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포괄적인 하나로서 긍정적인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하나가 회복될 때 영적인 모든 풍성과 긍정적인 모든 것이 함께 회복되는데, 이것은 그러한 것들이 다 하나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모든 것과 영적인 모든 풍성은 하나라는 진정한 터 위에 있는 우리의 것이다.

진정한 하나는 부분적인 하나가 아니다. 이것은 크고 완전하고 포괄적인 하나, 곧 전체적인 하나이다.

이러한 하나는 에베소서 4장 3절부터 6절까지에 계시된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 주 그리스도,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그 영을 포함한다.

모든 것을 포함한 하나는 우리를 모든 긍정적인 미덕들과 속성들에 들어가게 한다.

우리는 산당을 헐어 버리는 것과 모든 것을 포함한 진정한 하나를 회복하고 보존하는 것과 관련된 이상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이러한 하나를 알고 체험하고 누리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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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변절과 산당, 그리고 하나라는 진정한 터의 회복”

6일

시 133:1 보라, 형제들이 연합하여 거하는 것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시133:3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아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으니 영원한 생명이라.

시 23:6 제 평생에 선과 자애가 분명 저를 따르리니 저는 여호와의 집에 평생토록 거주하렵니다.

진정한 하나, 곧 기독교가 상실했던 하나가 회복된 것에 대하여 주님께 얼마나 감사를 드리는지! 이 하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즉 모든 긍정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이와 반대로 분열은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하나’로 돌아올 때 경건하고 하늘에 속하고 영적인 모든 것들이 돌아온다. 한 면으로 우리는 아직 매우 부족하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다른 한 면으로 우리는 주님의 풍성이 분명 그분의 회복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음을 간증할 수 있다. 하나라는 유일한 터가 여기에 있고, 모든 영적인 풍성이 이 터에 포함되어 있다. 경건한 모든 것과 영적인 모든 풍성은 하나라는 터 위에 있는 우리의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 들어온 후 우리 속에 경건함과 거룩함과 영성에 대한 열망이 자연히 일어났다. 우리가 합당한 터인 하나라는 터 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투명하게 열린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라는 터 위에 내려진 주님의 축복 때문이다. 하나라는 터의 회복이 있는 그곳에 주님의 증거 또한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증거와 관계되는 모든 것, 곧 제단과 제물들과 성전과 명절과 풍성한 누림이 돌아왔다. 바빌론에서는 경건한 것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장소인 예루살렘에 있었다. 비록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약하고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주님의 증거가 바빌론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거룩함이나 승리나 영성은 이스라엘 자손이 노력을 기울인 결과가 아니었다. 이러한 미덕들은 그들이 단지 성전과 지성소와 언약궤에 대해 올발랐기 때문에 그들의 것이 되었다. 그들이 성전에 대해 올바름으로써 ‘하나’ 안에 머무를 때는 거룩해지거나 승리하거나 영적이 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미덕들을 지녔다. 거룩하고 영적이고 승리하려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합당한 ‘하나’ 안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를 모든 긍정적인 속성들과 미덕들에 이를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이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 안에 있을 때 생명 안에 있고, 모든 긍정적인 속성들과 미덕들을 누린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점점 향상된다. 그러나 분열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또다시 악이 들어오는 길이 열린다.

이 ‘하나’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분의 본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행사에 있어서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요소와 하나의 본질을 본다.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우리는 한 하나님과 한 단체적인 사람을 본다. 그분의 선택에 있어서도 한 하나님과 한 사람이 있다. 더욱이 교회 안에는 한 영과 한 새사람이 있다. 결국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의 보좌, 하나의 길, 하나의 강, 하나의 나무라는 특징을 지닌 한 성 안에 유일한 삼일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하나’는 부분적인 ‘하나’가 아니다. 이것은 크고 완전하고 포괄적인 하나, 곧 전체적인 ‘하나’이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하나’에 대한 이상에 깊은 인상을 받기 바란다. 만일 우리가 그 전체적인 ‘하나’에 대한 이상을 본다면, 모든 분열의 세균이 죽음을 당할 것이고, 우리는 각종 분열에서 구출될 것이다.

5일

엡 4:3-4 화평의 매는 띠로 그 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십시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름을 받았을 때 한 소망 안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 17:21 그들이 모두 하나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도록 하여 주십시오.

교회의 터는 세 가지 핵심 요소들로 구성된다.

첫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유일한 하나인데, 이 하나는 ‘그 영의 하나’(엡 4:3)라고 불린다. 이것은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셨던 하나, 곧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이 연합된 하나이다. 이 하나는 아버지의 인격을 지칭하는 아버지의 이름 안에 있는데(요 17:6, 11), 아버지의 이름 안에는 아버지의 생명이 있다. 심지어 이 하나는 삼일 하나님 안에서 진리인 그분의 거룩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됨을 통한 것이다(요 17:14-21). 이 하나는 최종적으로 신성한 영광 안에서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요 17:22-24).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이 생명의 영에 의해 신성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거듭났을 때, 이러한 하나가 그들의 영 안으로 분배되었다.

교회의 터의 둘째 요소는 한 지방에 있는 교회가 세워지고 존재하는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이다. 신약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인 우주적인 교회의 표현으로서 각 도시에 있음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 8:1), 안디옥에 있는 교회(행 13:1),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롬 16:1), 고린도에 있는 교회(고전 1:2) 그리고 아시아의 일곱 도시에 있는 일곱 교회(계 1:4, 11)를 본다. 한 교회가 그 안에 존재하는 각 도시는 그 교회의 경계이며, 그 교회의 지방적인 터이다. 이처럼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는 여러 교파들이 서로 분열된 것처럼, 교회가 서로 다른 터가 되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문제들에 의해 분열되지 않도록 지켜 준다.

교회의 터의 셋째 요소는 한 지방에 있는 교회의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 위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유일한 하나를 표현하는, 하나(oneness)의 영의 실재이다. 그 영의 실재는 신성한 삼일성의 살아 있는 실재이다(요일 5:6, 요 16:13). 바로 이 영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가 실지적이고 살아 있는 것이 된다. 또한 이 영을 통해 지방이라는 터가 율법적으로가 아니라 생명의 방식으로 적용된다. 또한 이 영에 의해 교회의 진정한 터가 삼일 하나님과 연결된다(엡 4:3-6).

위에서 정의한 교회의 터는 실행에 있어서 지방적으로나 우주적으로 어떠한 분열도 없이 교회의 참된 하나를 지켜 준다(엡 4:3).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인 하나님의 교회는 그 존재와 기능을 위해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필요하다. 각 지방에 교회들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실행에 있어서 존재하거나 그 기능을 수행할 길이 없어진다. 사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많은 지방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한 몸의 많은 표현들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많은 표현들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존재할 수 있지만, 표현되기 위해서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되어야 한다.

한 지방에 있는 교회의 건축은 지방적으로 그 교회 자체를 건축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고전 14:3), 우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엡 4:12). 사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의 건축이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이다. 왜냐하면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표현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의 건축이 없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실지적으로 건축될 수 있겠는가?

4일

롬 15:4 전에 기록된 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기록된 것인데, 그것은 인내를 통하여 그리고 성경이 주는 격려를 통하여 우리가 소망을 갖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골 3:11 거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자와 무할례자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솔로몬과 여로보암의 통치 아래서 산당들이 세워진 것에 관한 기록은 그저 역사적인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 기록은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솔로몬과 여로보암에 관한 기록은 오늘날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롬 15:4).

오늘날의 기독교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모든 분열은 어떤 것을 높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 연구가 무언가를 높이는 것이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서로 분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말씀을 기도로 읽기가 매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지 모른다. 그러나 집회에서 말씀을 기도로 읽기를 주장함으로써 그것을 높여서는 안 된다. 만일 여러분이 말씀을 기도로 읽기를 높인다면, 그것조차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특히 청년들은 주 예수님 외에 어떤 것도 높이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주 예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산당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수준에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

솔로몬과 여로보암이 지은 산당들은 하나라는 터를 심각하게 손상했다. 만일 이 ‘산당들’이라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면, 구약은 그것을 반복해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선택하신 장소에서 드린 경배와 제물과 향만이 진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모든 산당은 비록 그곳에서 진정한 희생 제물들이 드려진다 할지라도, 하나라는 터에 손상을 입힌다. 그런 ‘산당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정욕과 야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이용된다.

이방 백성들이 우상에 경배했던 모든 장소는 ‘높은 산이든 언덕이든 무성한 나무 아래든’(신 12:2) 그 모든 곳을 없애 버려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기념 기둥들을 깨뜨리며, 그들의 아세라상을 불태우고, 그들의 신상들을 찍어 버려야 했다. 더욱이 그들은 우상들의 이름을 그곳에서 없애 버려야 했다. 처리해야 할 주된 세 가지 것은 장소와 형상과 이름이었다. 이것은 좋은 땅에서 이방 신에 경배하던 모든 경배의 중심지가 철저히 제거되어야 했음을 계시한다.

하나라는 터는 한 도시에 한 교회보다 더 깊고 더 풍성하고 더 높고 더 충만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이 우주 가운데 오직 한 곳을 선택하셨으며, 그곳이 교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께서 선택하신 그곳으로 갈 것을 요구하신다. 영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반드시 교회 외의 모든 장소와 그리스도의 이름 외의 모든 이름을 없애 버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문화와 종교적인 배경을 없애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아마 여러분은 어느 특정 교파의 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깨뜨려야 하는 것들은 우리의 기질과 성미와 습관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한 새사람의 하나를 손상하는 모든 것을 없애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회가 곧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곳이다. 골로새서 3장 11절에 있는 말씀을 이루려면 우리는 다른 모든 장소를 철저히 헐어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회가 아닌 모든 것을 반드시 헐어 버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만 교회생활 안에서 좋은 땅의 풍성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누릴 때, 주님의 집에 심길 것이고 자랄 것이며 번성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을 하는 합당한 길이다. 이것이 곧 하나라는 터이다.

3일

신 12:2 여러분은 여러분이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을 섬겨 온 곳은 높은 산이든 언덕이든 무성한 나무 아래든 그 모든 곳을 완전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골 1:18 또한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그분 자신께서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겼던 장소들을 헐어 버렸다. 그리고 비록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졌지만, 결국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헐어 버렸던 그것들이 다시 돌아왔다. 산당들(왕상 11:6-8, 12:31)과 무성한 나무들과 기념 기둥들과 아세라상들과 우상의 이름들이 다시 나타났다. 사실 하나님의 갈망을 따라서 하나라는 터 위에 성전을 건축했던 바로 그 솔로몬이 앞장서서 또다시 산당들을 세웠다. 솔로몬은 모세가 백성에게 헐어 버리라고 명령했던 바로 그 산당들을 다시 세웠다. 이 산당들은 음행 및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었다. 솔로몬이 산당들을 세운 것은 특히 그가 정욕에 빠진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가 산당들을 세운 것은 ‘자신의 모든 이방인 아내’를 위한 것이었다(11:8).

산당을 세우는 것은 결국 분열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산당들에 내재된 의미는 분열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의 백성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경배하도록 하나 안에 보존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하나를 보존하시기 위해,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곳으로 오라고 요구하셨다. 그러나 산당들은 이 유일한 곳을 대신하고 대치하는 곳이었다. 이것은 분열이 하나를 대치함을 의미한다. 유일한 장소인 예루살렘은 하나를 의미하는 반면에, 산당들은 분열을 의미한다. 온갖 형태의 악하고 가증한 일들이 산당들을 세운 것과 관련되었던 것처럼, 신약에서 온갖 형태의 악은 분열과 관련된다.

열왕기상의 기록에 따르면, 두 왕 곧 선한 왕인 솔로몬과 악한 왕인 여로보암은 산당들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솔로몬의 경우에는 산당들을 세운 것이 정욕에 빠진 것과 관련되었다. 솔로몬은 수많은 아내와 후궁을 거느렸다. 솔로몬은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산당들을 세웠다. 그의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여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다’(왕상 11:4). 여로보암의 경우에는 산당들을 세운 것이 야심과 관련되었다(왕상 12:26-32). 여로보암은 자신의 제국을 고수하기를 원했다. 여로보암은 백성이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가면, 왕국이 다윗의 집으로 되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여 ‘산당들의 집을 지었다’(왕상 12:31). 그러므로 여로보암이 산당들을 세울 결심을 한 원인은 그의 야심이었다. 얼마나 끔찍한 악이 산당들과 연관되어 있는가! 산당들은 정욕과 야심과 우상숭배와 연관되어 있었다. 산당들은 분열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의 분열이 이 악한 것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분열이 정욕과 야심과 우상숭배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분열이 옳지 않은 것이고 성경적인 것이 아니므로 분열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 분열은 정욕과 야심과 우상숭배와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산당은 높이 솟은 곳으로서, 일반적인 수준보다 높은 어떤 것임을 기억하라. 이것은 산당이 어떤 것을 높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원칙적으로, 기독교에 있는 모든 산당, 곧 모든 분열은 그리스도 아닌 어떤 것을 높이고 칭송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높아진 것들이 악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들은 매우 좋은 것일 수 있으며, 성경 연구나 성경 강의와 같은 것까지도 포함할지 모른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분명 좋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 연구가 분열과 관련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성경 연구를 위한 모임까지도 산당이 되고, 그리스도 대신 다른 것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2일

계 1:6 우리를 왕국이 되게 하시어 그분 자신의 하나님, 곧 그분 자신의 아버지를 섬기는 제사장들이 되게 하신 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히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계 2:6 그러나 너에게 다음과 같은 것이 있는데, 곧 네가 니골라당의 일을 미워하는 것이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이스라엘 나라는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여로보암은 북부의 왕이 되었고, 르호보암은 남부의 왕이 되었다. 이렇게 나라가 분열되자 우상숭배가 들어왔다. 여로보암은 분열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벧엘과 단에 우상을 세웠다(왕상 12:29).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국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또 하나의 경배의 중심지를 세웠다(26-27절).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자신의 왕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여로보암은 경쟁하려는 의도로 경배의 또 다른 중심지에 우상들을 세웠다. 이 절들은 이 우상들의 근원이 그의 야심이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우리는 이 원칙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는 상황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안에 있는 분열들은 이기심과 야심에서 비롯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제국을 갖고자 하는 야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은 유일한 장소, 즉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이었다. 지성소가 있는 성전, 곧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이 있는 곳이 이 장소에 세워졌다. 그런데도 야심이 있고 이기적이며 자기만을 관심하는 사람이었던 여로보암은 또 다른 경배의 중심지를 세웠다. 그러한 경배의 중심지는 사실상 여로보암의 야심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독교의 많은 인도자들이 경배의 중심지들을 세웠다. 그러한 중심지들은 겉으로는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 중심지들은 자신의 제국을 소유하려는 사람의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매우 참된 의미에서 많은 기독교 단체의 창설자들은 오늘날의 여로보암들이다. 이와 같은 오늘날의 ‘여로보암들’에 의해 세워진 경배의 중심지들은 사실상 야심의 중심지들이다. 이런 이유로 그러한 곳들에서 ‘우상들’이 발견될 수 있다.

열왕기상 12장 26절부터 30절까지에 나타난 원칙에 의하면, 많은 기독교 단체에는 사람을 매혹하고 붙들기 위해 세워진 ‘우상들’이 있다. 이런 ‘우상들’은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시나이산에서의 아론의 사례에 따라 여로보암은 두 개의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에게 그 금송아지들이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신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어떻게 그 우상들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만큼 그렇게 눈이 멀 수 있었는지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도 그곳에 있었다면, 아마 여로보암을 따랐을 것이고 그와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가 처한 상황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늘에 속한 빛 비춤 아래 있다면, 너무나 많은 기독교 단체들 안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들’이 세워져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 ‘우상들’은 사람들을 그 단체들로 이끌어 들인 다음, 그 단체들 안에 붙들어 놓는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의도하신 것은 그분의 모든 백성이 직접 그분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되는 것이었다. 출애굽기 19장 6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제사장 왕국이 되도록 정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제사장들이 되기를 원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금송아지를 숭배했기 때문에(출 32:1-6) 제사장 직분을 잃어버렸고, 하나님께 신실했던 레위 지파만 온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로 선택되었다(출 32:25-29, 신 33:8-10).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중간 계급이 있게 되었다. 이것은 유대교 안에서 강력한 제도가 되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에 따라 원래의 의도로 돌아오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를 제사장들이 되게 하셨다(계 1:6, 5:10, 벧전 2:5, 9). 그러나 초대 교회의 끝 무렵에, 심지어 1세기에 니골라당이 중간 계급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경륜을 손상했다. 이것이 모든 믿는 이의 보편적인 제사장 직분을 손상한다. 합당한 교회생활 안에는 성직자도 평신도도 있어서는 안 되며 모든 믿는 이가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어야 한다. 중간 계급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보편적인 제사장 직분을 파괴하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미워하신다.

신언노트, 2022 10 16

변절과 산당, 그리고 하나라는 진정한 터의 회복
변절(배교), 그 산당들, 또 하나임의 진짜 땅의 회복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어
자기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경배하지 못하도록
미혹시켰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매년 세 차례
예루살렘에서
함께 모이도록
정하셨다.
여로보암은
열 지파가
하나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으로 가면
자기들의 합법적인 왕에게로
되돌아갈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까지 여행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말을 하면서,
경배의 중심지 두 곳을
세웠다.
오늘날의 교파들 또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데
편리라는 핑계를
사용하고 있다.
여로보암의 변절은
이스라엘 자손의
합일과 하나가 유지되도록
거룩한 땅에
오직 하나의 유일한 경배의 중심지가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깨뜨렸다.
이것은
커다란 죄가 되었고,
이 때문에
백성이
우상들을 숭배하게 되었다.

변절은
하나님을 따르는
올바른 궤도에서
빗나간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마귀적인 방식을
취하려는 구실로
하나님의 경배를
사용할 때마다
그 사람은
변절에 빠지게 된다.
비록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명목상
하나님께 경배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사실
우상에 경배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여로보암이
우상들을 세우면서
“이스라엘이여!
… 여러분의 신들을 보십시오!”
라고 말했을 때
하였던 일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여로보암은 마치
“이것이
여러분이 경배해야 할
하나님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지로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금송아지였다.
그러므로 변절은
거짓되고 마귀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변절로 가득하다.
변절이
만연해 있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이 사실상
우상들에 경배하고 있다.

여로보암은
산당에
신전을 짓고
레위 지파가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들을 임명하였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가
제사장이 되도록 정하셨지만,
여로보암은
일반 백성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여로보암은
유다에서 지내는
명절과 비슷하게
자신이 마음대로 정한 달인
여덟째 달의
열닷샛날을
명절로 정하였다.
그는
백성에게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여로보암은
벧엘에 있는 제단에서
자신이 만든 송아지 앞에
희생 제물을 바치고,
산당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을
벧엘에 두었다.

변절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명절을 정하고,
제사장이 아니면서도
제단으로 올라가
향을 피웠다.

여로보암의 변절에 관한
위의 다섯 가지 항목은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한
예표로 볼 수 있다.

열왕기상 13장
1절부터 3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이
벧엘에 만들어 놓은
제단을 심판하신 것에 대한
기록이다.
이 심판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수행하였다.
그런 다음에
이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신언자에게 속아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길을 취했고,
사자에게 찢겼다.

열왕기상 14장
1절부터 18절까지에는
여로보암의 비극적인 최후에 관한
아히야의 예언이 있다.
여로보암은
아들인 아비야에 관하여
좋은 소식을 얻고자
아내를 변장시켜
실로에 있는
신언자 아히야에게 보냈다.
그러나 신언자 아히야는
좋은 소식을 주지 않았고,
변절이라는
여로보암의 악행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집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마치 똥을 치워 버리듯
그 집을 치워 버리실 것이라고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말해 주었다.

여로보암의 생애는
하나님의 엄중한 벌로
끝이 났다.

이스라엘 나라는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여로보암은
북부의 왕이 되었고,
르호보암은
남부의 왕이 되었다.
이렇게
나라가 분열되자
우상숭배가 들어왔다.
여로보암은
분열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벧엘과 단에
우상을 세웠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국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또 하나의 경배의 중심지를
세웠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자신의 왕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여로보암은
경쟁하려는 의도로
경배의 또 다른 중심지에
우상들을 세웠다.
이 절들은
이 우상들의 근원이
그의 야심이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우리는
이 원칙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는
상황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안에 있는
분열들은
이기심과 야심에서
비롯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제국을 갖고자 하는
야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한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은
유일한 장소,
즉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산이었다.
지성소가 있는
성전,
곧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이 있는 곳이
이 장소에
세워졌다.
그런데도
야심이 있고
이기적이며
자기만을 관심하는 사람이었던
여로보암은
또 다른 경배의 중심지를
세웠다.
그러한 경배의 중심지는 사실상
여로보암의 야심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독교의 많은 인도자들이
경배의 중심지들을 세웠다.
그러한 중심지들은
겉으로는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그 중심지들은
자신의 제국을 소유하려는
사람의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매우 참된 의미에서
많은 기독교 단체의 창설자들은
오늘날의 여로보암들이다.
이와 같은
오늘날의 ‘여로보암들’에 의해 세워진
경배의 중심지들은 사실상
야심의 중심지들이다.
이런 이유로
그러한 곳들에서
‘우상들’이
발견될 수 있다.

열왕기상 12장
26절부터 30절까지에
나타난 원칙에 의하면,
많은 기독교 단체에는
사람을
매혹하고
붙들기 위해
세워진
‘우상들’이 있다.
이런 ‘우상들’은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시나이산에서의
아론의 사례에 따라
여로보암은
두 개의 금송아지를 만들고
백성에게
그 금송아지들이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신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어떻게
그 우상들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만큼
그렇게 눈이 멀 수 있었는지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도
그곳에 있었다면,
아마 여로보암을 따랐을 것이고
그와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가 처한
상황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늘에 속한 빛 비춤 아래 있다면,
너무나 많은 기독교 단체들 안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들’이 세워져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 ‘우상들’은
사람들을
그 단체들로
이끌어 들인 다음,
그 단체들 안에
붙들어 놓는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의도하신 것은
그분의 모든 백성이
직접 그분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되는 것이었다.
출애굽기 19장 6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제사장 왕국이 되도록
정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두
제사장들이 되기를
원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금송아지를 숭배했기 때문에
제사장 직분을 잃어버렸고,
하나님께 신실했던
레위 지파만
온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로 선택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중간 계급이
있게 되었다.
이것은
유대교 안에서
강력한 제도가 되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에 따라
원래의 의도로 돌아오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를
제사장들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끝 무렵에,
심지어 1세기에
니골라당이
중간 계급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경륜을 손상했다.
이것이
모든 믿는 이의
보편적인 제사장 직분을
손상한다.
합당한 교회생활 안에는
성직자도
평신도도
있어서는 안 되며
모든 믿는 이가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어야 한다.
중간 계급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보편적인 제사장 직분을
파괴하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미워하신다.

이스라엘 자손은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겼던
장소들을 헐어 버렸다.
그리고 비록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졌지만,
결국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헐어 버렸던
그것들이
다시 돌아왔다.
산당들과
무성한 나무들과
기념 기둥들과
아세라상들과
우상의 이름들이
다시 나타났다.
사실 하나님의 갈망을 따라서
하나라는 터 위에
성전을 건축했던
바로 그 솔로몬이
앞장서서 또다시
산당들을 세웠다.
솔로몬은
모세가
백성에게
헐어 버리라고 명령했던
바로 그 산당들을
다시 세웠다.
이 산당들은
음행
및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었다.
솔로몬이
산당들을 세운 것은
특히 그가
정욕에 빠진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가
산당들을 세운 것은
‘자신의
모든 이방인 아내’를 위한 것이었다.

산당을 세우는 것은 결국
분열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산당들에 내재된 의미는
분열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의 백성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경배하도록
하나 안에 보존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하나를
보존하시기 위해,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곳으로 오라고
요구하셨다.
그러나 산당들은
이 유일한 곳을
대신하고
대치하는 곳이었다.
이것은
분열이
하나를 대치함을
의미한다.
유일한 장소인
예루살렘은
하나를 의미하는 반면에,
산당들은
분열을 의미한다.
온갖 형태의
악하고 가증한 일들이
산당들을 세운 것과 관련되었던 것처럼,
신약에서
온갖 형태의 악은
분열과 관련된다.

열왕기상의 기록에 따르면,
두 왕
곧 선한 왕인 솔로몬과
악한 왕인 여로보암은
산당들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솔로몬의 경우에는
산당들을 세운 것이
정욕에 빠진 것과 관련되었다.
솔로몬은
수많은 아내와 후궁을
거느렸다.
솔로몬은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산당들을 세웠다.
그의 아내들이
‘그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여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다’.
여로보암의 경우에는
산당들을 세운 것이
야심과 관련되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제국을
고수하기를 원했다.
여로보암은
백성이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가면,
왕국이
다윗의 집으로 되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여
‘산당들의 집을 지었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이
산당들을 세울 결심을 한
원인은
그의 야심이었다.
얼마나 끔찍한 악이
산당들과 연관되어 있는가!
산당들은
정욕과 야심과 우상숭배와
연관되어 있었다.
산당들은
분열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의 분열이
이 악한 것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분열이
정욕과 야심과 우상숭배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분열이
옳지 않은 것이고
성경적인 것이 아니므로
분열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
분열은
정욕과 야심과 우상숭배와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산당은
높이 솟은 곳으로서,
일반적인 수준보다 높은
어떤 것임을 기억하라.
이것은
산당이
어떤 것을 높이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원칙적으로,
기독교에 있는
모든 산당,
곧 모든 분열은
그리스도 아닌
어떤 것을 높이고
칭송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높아진 것들이
악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들은
매우 좋은 것일 수 있으며,
성경 연구나
성경 강의와 같은 것까지도
포함할지 모른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분명 좋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 연구가
분열과 관련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성경 연구를 위한 모임까지도
산당이 되고,
그리스도 대신
다른 것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솔로몬과 여로보암의 통치 아래서
산당들이 세워진 것에 관한 기록은
그저 역사적인 사실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 기록은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솔로몬과 여로보암에 관한 기록은
오늘날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모든 분열은
어떤 것을 높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성경 연구가
무언가를 높이는 것이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서로 분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말씀을 기도로 읽기가
매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지 모른다.
그러나 집회에서
말씀을 기도로 읽기를 주장함으로써
그것을 높여서는 안 된다.
만일 여러분이
말씀을 기도로 읽기를 높인다면,
그것조차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특히 청년들은
주 예수님 외에
어떤 것도 높이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주 예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산당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수준에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

솔로몬과 여로보암이 지은 산당들은
하나라는 터를
심각하게 손상했다.
만일 이 ‘산당들’이라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면,
구약은
그것을
반복해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선택하신
장소에서 드린
경배와 제물과 향만이
진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모든 산당은 비록
그곳에서
진정한 희생 제물들이
드려진다 할지라도,
하나라는 터에
손상을 입힌다.
그런 ‘산당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정욕과 야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이용된다.

이방 백성들이
우상에 경배했던
모든 장소는
‘높은 산이든
언덕이든
무성한 나무 아래든’
그 모든 곳을
없애 버려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기념 기둥들을 깨뜨리며,
그들의 아세라상을 불태우고,
그들의 신상들을 찍어 버려야 했다.
더욱이 그들은
우상들의 이름을
그곳에서
없애 버려야 했다.
처리해야 할
주된 세 가지 것은
장소와 형상과 이름이었다.
이것은
좋은 땅에서
이방 신에 경배하던
모든 경배의 중심지가
철저히 제거되어야 했음을
계시한다.

하나라는 터는
[한 도시에 한 교회보다]
더 깊고
더 풍성하고
더 높고
더 충만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이 우주 가운데
오직 한 곳을 선택하셨으며,
그곳이 교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께서 선택하신
그곳으로 갈 것을
요구하신다.
영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반드시
교회 외의 모든 장소와
그리스도의 이름 외의 모든 이름을
없애 버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문화와
종교적인 배경을
없애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아마 여러분은
어느 특정 교파의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깨뜨려야 하는 것들은
우리의
기질과 성미와 습관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한 새사람의 하나를
손상하는 모든 것을
없애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회가
곧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곳이다.
골로새서 3장 11절에 있는
말씀을 이루려면
우리는
다른 모든 장소를
철저히 헐어 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회가 아닌
모든 것을
반드시 헐어 버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만
교회생활 안에서
좋은 땅의 풍성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시는(함께)
그리스도를 누릴 때,
주님의 집에
심길 것이고
자랄 것이며
번성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을 하는
합당한 길이다.
이것이 곧
하나라는 터이다.

교회의 터는
세 가지 핵심 요소들로
구성된다.

첫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유일한 하나인데,
이 하나는
‘그 영의 하나’라고
불린다.
이것은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셨던
하나,
곧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이
연합된 하나이다.
이 하나는
아버지의 인격을 지칭하는
아버지의 이름 안에 있는데,
아버지의 이름 안에는
아버지의 생명이 있다.
심지어 이 하나는
삼일 하나님 안에서
진리인
그분의 거룩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됨을 통한 것이다.
이 하나는
최종적으로
신성한 영광 안에서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이
신성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로)
생명의 영에 의해
거듭났을 때,
이러한 하나가
그들의 영 안으로
분배되었다.

교회의 터의
둘째 요소는
한 지방에 있는 교회가
세워지고 존재하는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이다.
신약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인
우주적인 교회의 표현으로서
각 도시에 있음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안디옥에 있는 교회,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
고린도에 있는 교회
그리고 아시아의 일곱 도시들에 있는
일곱 교회들을
본다.
한 교회가 그 안에 존재하는
각 도시는
그 교회의 경계이며,
그 교회의 지방적인 터이다.
이처럼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는
여러 교파들이
서로 분열된 것처럼,
교회가
서로 다른 터가 되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문제들에 의해
분열되지 않도록
지켜 준다.

교회의 터의
셋째 요소는
한 지방에 있는 교회의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 위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유일한 하나를 표현하는,
하나임의
그 영의
그 실재이다
(그 실재인
그 영의
하나임이다).
그 영의 실재는
신성한 삼일성의
살아 있는 실재이다.
바로 이 영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가
실재하고
살아 있게
된다.
또한 이 영을 통해
지방이라는 터가
율법적으로가 아니라
생명의 방식으로
적용된다.
또한 이 영에 의해
교회의 진정한 터가
삼일 하나님과
연결된다.

위에서 정의한
교회의 터는
실행에 있어서
지방적으로나
우주적으로
어떠한 분열도 없이
교회의 참된 하나를
지켜 준다.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인
하나님의 교회는
그 존재와 기능을 위해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필요하다.
각 지방에
교회들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실행에 있어서
존재하거나
그 기능을 수행할
길이 없어진다.
사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많은 지방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한 몸의
많은 표현들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많은 표현들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존재할 수 있지만,
표현되기 위해서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되어야 한다.

한 지방에 있는 교회의
건축은
지방적으로
그 교회 자체를
건축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우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의 건축이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이다.
왜냐하면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표현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의 건축이 없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실지적으로 건축될 수 있겠는가?

진정한 하나,
곧 기독교가 상실했던
하나가 회복된 것에 대하여
주님께
얼마나 감사를 드리는지!
이 하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즉 모든 긍정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이와 반대로
분열은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하나’로 돌아올 때
경건하고
하늘에 속하며
영적인 모든 것들이
돌아온다.
한 면으로
우리는
아직 매우 부족하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다른 한 면으로
우리는
주님의 풍성이 분명
그분의 회복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음을
간증할 수 있다.
하나라는
유일한 터가
여기에 있고,
모든 영적인 풍성이
이 터에
포함되어 있다.
경건한 모든 것과
영적인 모든 풍성은
하나라는 터 위에 있는
우리의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 들어온 후
우리 속에
경건함과
거룩함과
영성에 대한
열망이
자연히 일어났다.
우리가
합당한 터인
하나라는 터 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투명하게 열린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라는 터 위에 내려진
주님의 축복 때문이다.
하나라는 터의
회복이 있는 그곳에
주님의 증거 또한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증거와 관계되는 모든 것,
곧 제단과 제물들과
성전과 명절과
풍성한 누림이
돌아왔다.
바빌론에서는
경건한 것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장소인
예루살렘에 있었다.
비록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약하고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주님의 증거가
바빌론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거룩함이나 승리나 영성은
이스라엘 자손이
노력을 기울인
결과가 아니었다.
이러한 미덕들은
그들이 단지
성전과 지성소와 언약궤에 대해
올발랐기 때문에
그들의 것이 되었다.
그들이
성전에 대해 올바름으로써
‘하나’ 안에 머무를 때는
거룩해지거나
승리하거나
영적이 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미덕들을 지녔다.
거룩하고 영적이고 승리하려면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합당한 ‘하나’ 안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를
모든 긍정적인 속성들과 미덕들에
이를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이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 안에 있을 때
생명 안에 있고,
모든 긍정적인 속성들과 미덕들을
누린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상태는
점점 향상된다.
그러나 분열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또다시
악이 들어오는
길이 열린다.

이 ‘하나임’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께서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임’은
그분의 본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행사에 있어서
하나의 근원과
하나의 요소와
하나의 본질을
본다.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우리는
한 하나님과
한 단체적인 사람을
본다.
그분의 선택에 있어서도
한 하나님과
한 사람이
있다.
더욱이 교회 안에는
한 영과
한 새사람이
있다.
결국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의 보좌,
하나의 길,
하나의 강,
하나의 나무라는
특징을 지닌
한 성 안에
유일한 삼일 하나님께서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하나임’은
부분적인 ‘하나임’이 아니다.
이것은
크고
완전하며
포괄적인
하나,
곧 전체 안에 있는
‘하나임’이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하나임’에 대한 이상에
깊은 인상을 받기 바란다.
만일 우리가
그 전체적인 ‘하나임’에 대한
이상을 본다면,
모든 분열의 세균이
죽임을 당할 것이고,
우리는
각종 분열에서
구출될 것이다.

우리는
산당을 헐어 버리는 것과
모든 것을 포함한
진정한 하나를
회복하고
보존하는 것과 관련된
이상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이러한 하나를
알고
체험하며
누리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1일

신 12:5-7 오직 여러분은 여호와 여러분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두시려고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선택하실 곳인 그분의 처소를 찾아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번제물과 희생 제물…을 그곳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거기서 여호와 여러분의 하나님 앞에 먹어야 하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집안 식구는 여호와 여러분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손대는 모든 일에 복 주신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어 자기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경배하지 못하도록 미혹시켰다(왕상 12:25-30).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매년 세 차례 예루살렘에서 함께 모이도록 정하셨다. 여로보암은 열 지파가 하나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으로 가면 자기들의 합법적인 왕에게로 되돌아갈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까지 여행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말을 하면서, 경배의 중심지 두 곳을 세웠다. 오늘날의 교파들 또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데 편리라는 핑계를 사용하고 있다. 여로보암의 변절은 이스라엘 자손의 합일과 하나가 유지되도록 거룩한 땅에 오직 하나의 유일한 경배의 중심지가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깨뜨렸다(신 12:2-18). 이것은 커다란 죄가 되었고, 이 때문에 백성이 우상들을 숭배하게 되었다.

변절은 하나님을 따르는 올바른 궤도에서 빗나간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마귀적인 방식을 취하려는 구실로 하나님의 경배를 사용할 때마다 그 사람은 변절에 빠지게 된다. 비록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명목상 하나님께 경배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사실 우상에 경배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여로보암이 우상들을 세우면서 “이스라엘이여! … 여러분의 신들을 보십시오!”(왕상 12:28)라고 말했을 때 하였던 일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여로보암은 마치 “이것이 여러분이 경배해야 할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지로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금송아지였다. 그러므로 변절은 거짓되고 마귀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변절로 가득하다. 변절이 만연해 있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이 사실상 우상들에 경배하고 있다.

여로보암은 산당에 신전을 짓고 레위 지파가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들을 임명하였다(왕상 12:31). 하나님은 레위 지파가 제사장이 되도록 정하셨지만, 여로보암은 일반 백성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여로보암은 유다에서 지내는 명절과 비슷하게 자신이 마음대로 정한 달인 여덟째 달의 열닷샛날을 명절로 정하였다(왕상 12:32상). 그는 백성에게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여로보암은 벧엘에 있는 제단에서 자신이 만든 송아지 앞에 희생 제물을 바치고, 산당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을 벧엘에 두었다.

변절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명절을 정하고, 제사장이 아니면서도 제단으로 올라가 향을 피웠다.

여로보암의 변절에 관한 위의 다섯 가지 항목은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한 예표로 볼 수 있다.

열왕기상 13장 1절부터 3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이 벧엘에 만들어 놓은 제단을 심판하신 것에 대한 기록이다. 이 심판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수행하였다(1-10절). 그런 다음에 이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신언자에게 속아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길을 취했고, 사자에게 찢겼다(11-32절).

열왕기상 14장 1절부터 18절까지에는 여로보암의 비극적인 최후에 관한 아히야의 예언이 있다. 여로보암은 아들인 아비야에 관하여 좋은 소식을 얻고자 아내를 변장시켜 실로에 있는 신언자 아히야에게 보냈다(1-5절). 그러나 신언자 아히야는 좋은 소식을 주지 않았고, 변절이라는 여로보암의 악행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집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마치 똥을 치워 버리듯 그 집을 치워 버리실 것이라고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말해 주었다(6-18절).

여로보암의 생애는 하나님의 엄중한 벌로 끝이 났다(왕상 14:19-20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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