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일종의 예표로서 신약의 믿는 이들을 예표하며, 따라서 교회를 예표한다.
유다는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갔다. 따라서 포로 된 데서 돌아온 이들은 하나님께 신실해야 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을 이루시고 우리를 그분의 경륜 안으로 이끄시는 데 신실하시다.
신실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실 수 없고 거스르실 수도 없다.
신실함이라는 미덕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실 때, 그분은 우리가 되시고 우리는 신실함이라는 그분의 미덕에 있어서 그분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실 수 없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으로 조성된 우리도 우리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들을 맡은 청지기들로서 신실하게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하나님께 신실할 것이다. 우리의 존재 곧 우리의 조성은 우리가 신실하지 않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신실하다는 것 곧 신뢰할 만하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청지기 직분을 완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아마겟돈에서의 전투를 위해 오실 때 모든 주인의 주님이시자 모든 왕의 왕이실 것이고, 그분과 함께하는 이기는 이들은 ‘부름받고 선택받은 신실한 사람들’일 것이다.
바빌론에 포로 된 데서 좋은 땅으로 돌아온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께 순종하며, 여호와께 경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피조물과의 관계를 함축하며,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 있는 분이실 뿐 아니라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분이시다.
‘여호와’의 의미는 ‘나는 -이다’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영원한 분, 곧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히 계실 분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여호와만이 ‘-이다’이신 분이시다.
유일하게 존재하시는 이분은 위대한 ‘-이다’이시다. 동사 ‘-이다(to be)’는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고 우리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이다’, 곧 참으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는 -이다’이시다. 오직 그분만이 존재하신다.
‘여호와’는 존재와 성취와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이다.
여호와는 영원히 존재하시고 동사 ‘-이다’의 실재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루실 것이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성취의 단계에 있다. 우리는 여호와 곧 위대한 ‘나는 -이다’이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좋은 땅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분열에서 교회의 터, 곧 하나라는 터로 돌아오는 것을 상징한다.
교회의 지방적인 터는 기본적으로,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실행되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일한 하나이다.
신약의 신성한 계시에 따르면, 교회의 터는 세 가지 핵심 요소로 구성된다.
교회의 터를 구성하는 첫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유일한 하나이다. 이것은 ‘그 영의 하나’(엡 4:3)라고 불리며,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이 하나를 위해 기도하셨다.
교회의 터의 둘째 요소는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인데, 각 지방에 있는 교회는 이 유일한 터 안에 세워지고 존재한다.
교회의 터의 셋째 요소는 하나(oneness)의 영의 실재, 곧 신성한 삼일성의 살아 있는 실재이신 그 영의 실재이다.
교회의 터는 내재적으로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
좋은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씨에 관하여 하신 약속은 믿었지만, 좋은 땅에 관하여 하신 약속을 믿는 데에는 믿음이 부족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화하여 주시기 위해서 그와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분 자신의 약속을 확증하셔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약속의 언약이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약은 이 언약의 연속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죽음을 당한 세 종류의 가축은 우리를 위하여 인성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살아 있는 새 두 마리는 신성 안에서 살아 계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암송아지는 화목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고, 암염소는 속죄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며, 숫양은 번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다.
성경의 예표에서, 산비둘기는 고난당하는 삶을 상징하고, 어린 집비둘기는 믿는 삶 곧 믿음의 삶을 상징한다. 이 두 가지는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지니신 두 가지 특징이다.
숫자 2는 증거를 나타내므로, 살아 있는 새 두 마리는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증거를 나타낸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기도를 해야 하고, 또한 우리 개인의 영적인 지경이 넓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갈망을 표현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우주 안에는 세 가지 뜻, 곧 신성한 뜻과 사탄의 뜻과 사람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뜻이 그분께 연결되기를 원하시며, 또한 사람이 그분과 하나 됨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기쁨을 위해 기도로 그분의 뜻을 표현하고 그분께 다시 반향하기를 원하신다.
기도의 참된 의미는 다음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어떤 일을 하기를 의도하신다.
하나님은 그 영을 통해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계시하시어 그분의 뜻을 알게 하신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그분의 뜻을 그분께 다시 들려드려 반향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일을 성취하신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에 반향하는 기도만이 어떤 영적인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기도를 하기를 배워야 한다.
야베스는 하나님을 부르며 그의 지경을 넓혀 주시기를 구했다. 야베스의 기도에서 좋은 땅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은 좋은 땅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얻고 누리는 것이 확대되는 것을 상징한다.
역대기하 20장 15절부터 22절까지에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함으로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역대기하 20장 15절에서 여호와는 여호사밧왕에게 “이 큰 무리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도 마라. 싸움은 너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17절 상반절에서는 “너희는 이 전투에서 싸울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아주 큰 소리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며 찬양하기 시작하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시어 원수들을 치게 하시니, 원수들이 패배하였다.
찬양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수행하는 가장 높은 일이다.
성도의 영적 생활의 가장 높은 표현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찬양을 통해 솟아오른다.
찬양하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주님을 접촉하는 것이다.
영적인 승리는 전쟁에 달려 있지 않고 찬양에 달려 있다.
교회생활과 우리의 개인 생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완결된 찬양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체험하고 누린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속 하나님께 찬양의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한다.
“오, 주 저의 하나님! 저는 온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 영원히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렵니다.” ― 시 8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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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찬양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수행하는 가장 높은 일이다. 성도의 영적 생활의 가장 높은 표현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주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곳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다’(시 22:3). 하나님의 이름과 심지어 그분 자신도 찬양을 통해 높아지신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찬양을 통해 솟아오른다. 찬양하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주님을 접촉하는 것이다. 찬양할 때 우리는 시련 위에 있게 된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억누르려고 할수록 주님 앞에서 우리는 더욱 일어나서 “주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찬양의 희생 제물보다 더 사람을 무르익고 성숙하게 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성령의 징계를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할 뿐 아니라 성령의 징계를 찬양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에게 분명하고 영광스러운 문이 열릴 것이다.
유다 왕국은 여호사밧이 통치하던 시기에 쇠망하고 있었다. 매우 약했고 모든 것이 휘청거리는 상태였다. 유다 사람들은 완전히 절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패배가 확실하다고 느꼈다. 여호사밧은 부흥된 왕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했다. 그는 노래하는 이들을 세워 여호와께 노래하며 찬양하게 했다(대하 20:21). 그는 또한 노래하는 이들이 거룩한 의복을 입고 군대 앞에서 나아가면서 여호와께 찬양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며 찬양하기 시작하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시어 …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산 주민을 치게 하시니…”(22절). ‘사람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며 찬양하기 시작하자’라는 말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며 찬양하는 바로 그 순간에’라는 뜻이다. 찬양만큼 주님의 손을 속히 움직이게 하는 것이 없다.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매일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찬양하기만 해도 많은 일에서 이길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승리가 전쟁에 달려 있지 않고 찬양에 달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기도뿐 아니라 찬양으로도 사탄을 이긴다. 역대기하 20장에 의하면, 저쪽에는 군대가 있고 이쪽에는 찬송을 부르는 이들이 있다. 이쪽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진 이들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이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 많은 이가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 그들은 자주 시험을 받는다. 여호사밧처럼 그들은 어려움에 갇혀 있다. 저쪽은 너무나 강하지만 이쪽은 너무나 약하다. 그들의 문제는 너무나 엄청나서 그들의 역량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이럴 때 그들은 자신의 문제만을 주목하기가 쉽다. 사람은 시험받을수록 더 쉽게 자신이 처해 있는 어려움에 얽매인다. 이때가 가장 큰 시험의 때이다. 사람은 시험받을수록 점점 더 자신과 환경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시험을 받을수록 더욱 주님을 신뢰한다. 그들은 시험을 받을수록 더욱 주님을 찬양하기를 배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보지 않고 주님만 보기를 배워야 한다. 고개를 들고 주님께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말씀드리라. 큰 소리로 하는 찬양,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 상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찬양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찬양의 희생 제물이다. 찬양의 희생 제물이 하나님께 올라갈 때, 원수 사탄은 그 찬양에 의해 패배당한다. 하나님 앞에서 찬양의 희생 제물은 매우 효능이 있다. 여러분의 지극히 높은 찬양이 하나님을 향하여 솟구쳐 나오게 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분명 견디어 내고 이기게 될 것이다. 찬양할 때, 여러분은 승리의 길이 여러분의 눈앞에 활짝 열리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5일
역대기상 4장 10절에서 우리는 한 유다 자손이 드린 특별한 기도를 본다. “야베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오, 주님께서 저에게 복을 넘치게 주시고 저의 지경을 넓혀 주시며,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하시고 주님께서 저를 악에서 지키시어 제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 하나님은 야베스의 간구를 이루어 주셨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러한 기도, 즉 하나님께서 좋은 땅에 대한 누림의 지경을 넓혀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의 지경을 넓혀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를 하기 바란다.
하나님의 일의 한 가지 주된 원칙은 사람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기도로 그분께 협력하기를 원하신다.
여러 해 전에 기도에 경험이 많은 어떤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는 모든 영적인 일이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첫째 단계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기를 의도하신다. 즉 하나님의 뜻이 있다. 둘째 단계에서 하나님은 그 영을 통해 그분의 자녀들에게 그분의 뜻을 계시하시어 그분의 뜻과 계획과 갈망과 열망을 알게 하신다. 셋째 단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를 통해 그분의 뜻을 그분께 다시 들려드린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에 반향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조화를 이룬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말해 낼 것이다. 그 결과, 넷째 단계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성취하실 것이다.
우리는 셋째 단계,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 다시 들려드리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가치 있는 기도는 모두 다시 들려드리는 기도이다. 우리의 기도가 단지 우리의 계획과 소망을 이루는 것만 위한다면, 영적인 영역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에 반향하는 기도만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에 의해 통제받는다. 하나님은 기꺼이 많은 일을 하고자 하시지만, 그분의 백성이 기도하지 않을 때 그분은 그 일들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기 전에 반드시 사람이 그분께 동의할 때까지 기다리셔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의 큰 원칙이고, 성경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원칙들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 그러므로 지금 우주에는 세 가지 의지가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의지이고, 두 번째는 사탄의 의지이며, 세 번째는 사람의 의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사탄을 속히 멸망시키지 않으실까?”라고 말하며 궁금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람이 그분과 합하여 사탄을 처리하기 원하신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고, 사탄에게는 사탄의 의지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사람의 의지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지가 그분과 합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홀로 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께 협력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이 땅에 있는 교회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하려고 하실 때, 첫째로 그분의 뜻을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넣어 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뜻에 기도로 반향한 후에야 무언가를 성취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절차를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은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께 반향하는 의지를 원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우리 없이 하신다면, 우리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의 각 부분이 이루어지려면 그것을 수행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뜻이 그분의 뜻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말해 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가 하나의 일임을 본다. 이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왜냐하면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말해 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말해 내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에서 나온 기도는 모두 쓸모없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기도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그런 다음 우리는 기도를 통해 그분의 뜻을 다시 들려드린다. 하나님의 마음에 따른 기도는 다 하나님의 뜻을 출발점으로 하며, 사람은 단지 전달하고 반향하는 기관일 뿐이다. 우리에게서 시작된 기도는 영적인 가치가 없다.
4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씨에 관한 그분의 약속을 반복하셨을 뿐 아니라 땅에 관한 그분의 약속도 반복하셨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씨에 관하여 하신 약속을 믿었다. 창세기 15장 7절에서 하나님은 확실하게 땅에 관한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땅에 관하여 하신 약속을 믿는 데에는 믿음이 부족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땅에 관하여 하신 약속을 믿기 어려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와 언약을 맺어야만 하셨다. 창세기 15장 9절부터 21절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분의 약속을 확증하셨음을 본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암송아지 한 마리와 암염소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창 15:9). 이런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갈라지고 죽음을 당한 세 가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육체가 되신 분으로서 이 땅에서 인성 안에서 사셨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가 되신 분이시다(요 1:14, 29). 그러므로 창세기 15장에 있는 세 가축은 우리를 위하여 인성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상징함에 틀림없다.
암송아지는 화목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다(레 3:1). 하나님께서 그분께 부름받은 이들과 언약을 맺으시기 위해서는 먼저 화목제물이 필요했다. 그리스도께서 그 화목제물이셨다. 암염소는 우리의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하나님께 부름받은 이들인 우리는 얼마나 선한지와 상관없이 여전히 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화목제물에 이어서 속죄제물이 필요하다. 할렐루야,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 우리의 암염소, 곧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애셨다. 그다음으로 번제물이 필요했는데, 번제물은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해야 함을 상징한다(레 1:10).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그분께 부름받은 이와 언약을 맺으실 때 통과해 가신 모든 제물이셨다.
죽이지 않은 새 두 마리는 부활하시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레 14:6-7). 부활하신 이 그리스도는 주로 신성 안에 계신다. 왜냐하면 성경의 예표에 따르면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하기 때문이다(요 1:32). 그러므로 가축은 인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새들은 신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5장의 새들은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여전히 하늘에 계신 분이시며(요 3:13), 또한 전에도 살아 계셨고 지금도 살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땅을 걸어가신 사람으로서 죽음을 당하셨지만, 지금은 하늘들에 오르시어 하늘에 속한 분으로서 살아 계신다. 그분은 인성 안에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로 바쳐지셨고, 또한 신성 안에서 우리를 위해 살아 계신다.
성경의 예표에서, 산비둘기는 고난당하는 삶을 상징하고, 어린 집비둘기는 믿는 삶 곧 믿음의 삶을 상징한다. 땅에 사시는 동안, 주 예수님은 항상 고난당하셨고 또한 믿으셨다. 그분은 고난당하는 삶의 방면에서는 산비둘기이셨고, 믿는 삶의 방면에서는 집비둘기이셨다.
새는 두 마리였는데, 숫자 2는 증거를 의미하고 또한 증거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행 5:32). 살아 있는 새 두 마리는 부활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나타낸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주 예수님은 “나는 … 살아 있는 이이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보아라, 영원토록 살아 있으며 …”(17-18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영원토록 살아 계신 것이 그분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증거는 항상 살아 있는 문제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가 살아 있지 않다면, 예수님의 증거도 없는 것이다. 살아 있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살아 계신 예수님의 증거가 된다.
3일
교회의 지방적인 터는 기본적으로,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실행되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일한 하나이다. 온 우주에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한 몸이 있고, 각 지방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다. 이러한 유일한 하나가 교회생활의 기본 요소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는 그 영의 하나(엡 4:3)이므로, 한 지방에 있는 교회에서 실행하는 하나는 반드시 그 영의 움직임 안에 있어야 하며 그 영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영 또한 교회의 터의 기본 요소이시다. 이뿐만 아니라, 한 지방에 있는 교회는 그 지방과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지 교회가 속한 지방 또한 교회의 터의 필수 요소이다. 그러므로 한 지방에서 교회가 세워지는 교회의 터는 반드시 그 영에 의해 집행되는 하나와 그 지방에 의해 보호되는 하나로 구성되어야 하며, 그러한 하나 안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신약의 신성한 계시에 따르면, 교회의 터는 세 가지 핵심 요소로 구성된다.
교회의 터를 구성하는 첫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유일한 하나이다. 이것은 ‘그 영의 하나’(엡 4:3)라고 불린다.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이 하나를 위해 기도하셨다. 이것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의 연합의 하나이다. 이 하나는 아버지의 인격을 지칭하는 아버지의 이름 안에 있는데(요 17:6, 11), 아버지의 이름 안에는 아버지의 생명이 있다. 심지어 이 하나는 진리인 그분의 거룩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됨을 통해 삼일 하나님 안에 있다(요 17:14-21). 이 하나는 최종적으로 삼일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신성한 영광 안에 있다(요 17:22-24). 이러한 하나는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이 신성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생명의 영에 의해 거듭났을 때 그들의 영 안으로 분배되었다.
교회의 터의 둘째 요소는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인데, 각 지방에 있는 교회는 이 유일한 터 안에 세워지고 존재한다. 신약은 각 지방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인 우주적인 교회의 표현으로서 각 도시에 있음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행 8:1), 안디옥에 있는 교회(행 13:1),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롬 16:1), 고린도에 있는 교회(고전 1:2), 아시아의 일곱 도시에 있는 일곱 교회(계 1:4, 11)를 본다. 각 도시는 한 교회가 존재하는 경계로서, 그 교회의 지방적인 터이다. 이처럼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는, 침례교나 장로교나 루터교나 감리교나 성공회 같은 여러 교파들이 서로 분열된 것처럼, 교회가 서로 다른 터가 되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항목에 의해 분열되지 않도록 지켜 준다.
교회의 터의 셋째 요소는 하나(oneness)의 영의 실재이다. 하나의 영의 실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의 유일한 터인 지방이라는 터 위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유일한 하나를 표현한다. 간단히 말해서 교회의 터의 셋째 요소는 신성한 삼일성의 살아 있는 실재이신(요일 5:6, 요 16:13) 그 영의 실재이다. 바로 이 영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가 실재가 되고 살아 있게 된다. 또한 이 영을 통해 지방이라는 터가 율법적으로가 아니라 생명 안에서 적용된다. 또한 교회의 참된 터가 삼일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도 이 영에 의해서이다.
2일
‘하나님’은 일반적인 이름이고 ‘여호와’는 친근한 이름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과 관련되고 ‘여호와’는 그분의 사랑과 관련된다. ‘하나님’은 창조와 관련되고 ‘여호와’는 그분의 친근함과 관련된다. 창세기 1장은 창조를 다루기 때문에 ‘여호와’를 언급하지 않는다. 비록 1장에서 사람이 언급되지만, 이것은 창조와 능력과 관련된다. 2장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친근하시고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2장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언급된다. 2장에서 ‘여호와’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2장에 언급된 여호와께서 바로 1장에 언급된 하나님이심을 증명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 있는 분이실 뿐 아니라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분이시다.
엘 샷다이가 공급과 약속에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인 것처럼, 여호와는 존재와 성취와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이다. 여호와이신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자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약속이 성취된 것을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히 11:13). 그들의 체험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분이셨으나 여호와는 아니셨다. 그들에게 그분은 약속하는 하나님이셨으나 성취하는 하나님은 아니셨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6장 1절부터 8절까지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을 때, 모세에게 좋은 땅에 관해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러 오셨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13절과 14절에서 사백 년 후에야 좋은 땅에 관한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것을 알려 주셨다. 사백 년이 다 찼을 때 모세는 팔십 세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성취될 것임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려면, 그분은 반드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셔야 한다.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셔야 한다. 특별한 의미에서, 동사 ‘-이다(to be)’는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된다. 이 동사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기본 구성 요소이다. 이 우주 안에 그분만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약속하는 분으로서 엘 샷다이이시지만,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는 분으로서는 여호와 곧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분 자신을 제외한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신다. 여호와로서 하나님은 다만 존재하신다.
약 사천 년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좋은 땅에 관하여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자신에게는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아직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항상 존재하실 것이기 때문에 약속을 성취하시는 데 실패하실 수 없다. 이 우주 안에 존재하시는 분이 계신다. 이분은 바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여호와는 그분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성취의 단계에 있다. 성취의 단계는 구약에서뿐 아니라 신약에서 하신 약속의 성취를 모두 포함한다. 신약의 약속 중 한 가지는 “내가 내 교회를 건축할 것이니”(마 16:18)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성취되고 있다.
젊은이들이여, 이 메시지에서의 나의 부담은 특별히 여러분과 관련된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주님의 회복에 신실한 것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 앞에 기나긴 노정이 있다는 것과, 많은 시험과 시련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엘 샷다이이실 뿐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간증하고 싶다. 나는 나의 말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는 영원히 존재하시고 동사 ‘-이다’의 실재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루실 것이다. 시험과 시련과 어려움에 직면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 당신은 존재하십니다. 저의 문제들은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영원히 존재하실 것입니다.”
신언노트, 2023 01 29
바빌론에 포로 된 데서
돌아온 후
좋은 땅에서의 생활의
핵심적인 방면들
바빌론 안에서의 포로 상태에서부터
되돌아온 후에
그 좋은 땅에서 삶의
중대한 방면들
하나님은 확실히
최고의 저자이시다.
하나님은
성경의 전반부 삼십구 권을 기록하셨을 때
그림들을 사용하셨다.
그 그림들은
구약에 있는
예표들과 상징들과 그림자들이다.
예를 들어, 아담은
‘오실 분의 예표’이다(롬 5:14).
몇몇 예표들은
예언이기도 하다.
구약에 있는 가장 큰 예표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로서,
이들은
오늘날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예표한다.
따라서,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가올 일들을 상징하는
커다란 예표이다.
고린도전서 1장 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통 안으로 부름받았습니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신실하시지만,
우리에게
큰 집이나 보수가 좋은 직업을
제공하시는 데 있어서는
신실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지를 돌보시는 데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천연적인 이해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을 겪도록
허락하실 때,
우리를
우상들에서 돌아서게 하여
그분 자신께로 되돌려 놓으려는
그분의 목적에 신실하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평안과 안전과 건강과 소유가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가져가심으로써
우리가
생수의 원천이신 그분을
마실 수 있게 하시는 데에 신실하시다.
우리의 집이나 소유가
우리에게 우상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그러한 것들을 마신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러한 우상들을 처리하고
우리가
그분을 마시게 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경륜 안으로 이끄시는 데
신실하시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시고 먹고
누리고 흡수하고
동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증가되셔서
그분의 경륜을 이루신다.
하나님을
생수의 원천으로 마시는 대신,
이스라엘은
그들의 우상들을 마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빌론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이러한 우상들을 처리하셨고,
예루살렘을 파괴하셨으며,
심지어 그들에게
우상이 된 성전을
헐어 버리기까지 하셨다.
우리는
자신이
이스라엘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을 이루시는 데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의 우상들을 처리하셔서
우리가
그분을 마시게 하신다.
우리 모두는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마셔서
우리 안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동화시켜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증가되셔서
그분의 배필을 통해
그분의 표현을 얻으심으로
그분의 경륜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지만,
우리는
신실하지도 않고
순결하지도 않으며
많은 다른 남편에게 간다.
하나님을 저버린 후,
우리는
약간의 긍휼과 은혜를 받고서
회개하며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우리가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는 동안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치게 회개하고 운다면,
우리의 회개조차도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한 후,
우리는
생수를 마시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일에
그분께 감사드리며,
그분을 누리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으시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여기에서’는
‘청지기 직분인
분배하는 사역에서’를 의미한다.
이 분배하는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지기들이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형제회와 함께 있었을 때,
결코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청지기로서 신실했다고
언급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일종의 예표로서
신약의 믿는 이들을 예표하며,
따라서 교회를 예표한다.
유다는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갔다.
따라서 포로 된 데서 돌아온 이들은
하나님께 신실해야 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을 이루시고
우리를
그분의 경륜 안으로 이끄시는 데
신실하시다.
신실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실 수 없고
거스르실 수도 없다.
신실함이라는
미덕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실 때,
그분은
우리가 되시고
우리는
신실함이라는
그분의 미덕에 있어서
그분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실 수 없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으로 조성된
우리도
우리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들을 맡은
청지기들로서
신실하게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틀림없이
하나님께 신실할 것이다.
우리의 존재
곧 우리의 조성은
우리가 신실하지 않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신실하다는 것
곧 신뢰할 만하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청지기 직분을 완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아마겟돈에서의 전투를 위해 오실 때
모든 주인의 주님이시자
모든 왕의 왕이실 것이고,
그분과 함께하는
이기는 이들은
‘부름받고 선택받은
신실한 사람들’일 것이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이름이고
‘여호와’는
친근한 이름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능력과 관련되고
‘여호와’는
그분의 사랑과 관련된다.
‘하나님’은
창조와 관련되고
‘여호와’는
그분의 친근함과 관련된다.
창세기 1장은
창조를 다루기 때문에
‘여호와’를 언급하지 않는다.
비록 1장에서
사람이 언급되지만,
이것은
창조와 능력과 관련된다.
2장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친근하시고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2장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언급된다.
2장에서
‘여호와’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2장에 언급된 여호와께서 바로
1장에 언급된 하나님이심을
증명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 있는 분이실 뿐 아니라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분이시다.
엘 샷다이가
공급과 약속에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인 것처럼,
여호와는
존재와 성취와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이다.
여호와이신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자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약속이 성취된 것을
누리지 못하고 죽었다.
그들의 체험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분이셨으나
여호와는 아니셨다.
그들에게
그분은
약속하는 하나님이셨으나
성취하는 하나님은 아니셨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6장
1절부터 8절까지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을 때,
모세에게
좋은 땅에 관해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러 오셨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13절과 14절에서
사백 년 후에야
좋은 땅에 관한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것을
알려 주셨다.
사백 년이 다 찼을 때
모세는 팔십 세였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성취될 것임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려면,
그분은 반드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셔야 한다.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셔야 한다.
특별한 의미에서,
동사 ‘-이다(to be)’는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된다.
이 동사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기본 구성 요소이다.
이 우주 안에
그분만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약속하는 분으로서
엘 샷다이이시지만,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는 분으로서는
여호와
곧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분 자신을 제외한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히 존재하신다.
여호와로서 하나님은 다만
존재하신다.
약 사천 년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좋은 땅에 관하여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자신에게는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아직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항상 존재하실 것이기 때문에
약속을 성취하시는 데
실패하실 수 없다.
이 우주 안에
존재하시는 분이 계신다.
이분께서 바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여호와는
그분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성취의 단계에 있다.
성취의 단계는
구약에서뿐 아니라
신약에서 하신
약속의 성취를 모두 포함한다.
신약의 약속 중 한 가지는
“내가
내 교회를 건축할 것이니”
(마 16:18)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성취되고 있다.
젊은이들이여,
이 메시지에서의 나의 부담은 특별히
여러분과 관련된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주님의 회복에 신실한 것으로 인해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 앞에
기나긴 노정이 있다는 것과,
많은 시험과 시련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엘 샷다이이실 뿐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간증하고 싶다.
나는
나의 말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는
영원히 존재하시고
동사 ‘-이다’의
실재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루실 것이다.
시험과 시련과 어려움에
직면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
당신은 존재하십니다.
저의 문제들은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영원히
존재하실 것입니다.”
바빌론에 포로 된 데서
좋은 땅으로 돌아온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께 순종하며,
여호와께 경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피조물과의
관계를 함축하며,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 있는 분이실 뿐 아니라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분이시다.
‘여호와’의 의미는
‘나는 -이다’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영원한 분,
곧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영원히 계실 분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여호와만이
‘-이다’이신 분이시다.
유일하게 존재하시는 이분은
위대한 ‘-이다’이시다.
동사 ‘-이다(to be)’는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고
우리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이다’,
곧 참으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는 -이다’이시다.
오직 그분만이
존재하신다.
‘여호와’는
존재와 성취와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이다.
여호와는
영원히 존재하시고
동사 ‘-이다’의 실재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 다
이루실 것이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성취의 단계에 있다.
우리는
여호와
곧 위대한 ‘나는 -이다’이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다.
교회의 지방적인 터는
기본적으로,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실행되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일한 하나이다.
온 우주에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한 몸이 있고,
각 지방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가 있다.
이러한 유일한 하나가
교회생활의 기본 요소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는
그 영의 하나이므로,
한 지방에 있는 교회에서 실행하는
하나는 반드시
그 영의 움직임 안에 있어야 하며
그 영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영 또한
교회의 터의
기본 요소이시다.
이뿐만 아니라,
한 지방에 있는 교회는
그 지방과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지 교회가 속한 지방 또한
교회의 터의 필수 요소이다.
그러므로 한 지방에서 교회가 세워지는
교회의 터는 반드시
그 영에 의해 집행되는 하나와
그 지방에 의해 보호되는 하나로
구성되어야 하며,
그러한 하나 안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신약의 신성한 계시에 따르면,
교회의 터는
세 가지 핵심 요소로
구성된다.
교회의 터를 구성하는
첫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유일한 하나이다.
이것은
‘그 영의 하나’
(엡 4:3)라고 불린다.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이 하나를 위해
기도하셨다.
이것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의
연합의 하나이다.
이 하나는
아버지의 인격을 지칭하는
아버지의 이름 안에 있는데,
아버지의 이름 안에는
아버지의 생명이 있다.
심지어 이 하나는
진리인 그분의 거룩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됨을 통해
삼일 하나님 안에 있다.
이 하나는
최종적으로
삼일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신성한 영광 안에 있다.
이러한 하나는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이
신성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생명의 영에 의해 거듭났을 때
그들의 영 안으로
분배되었다.
교회의 터의
둘째 요소는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인데,
각 지방에 있는 교회는
이 유일한 터 안에
세워지고 존재한다.
신약은
각 지방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인
우주적인 교회의 표현으로서
각 도시에 있음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안디옥에 있는 교회,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
고린도에 있는 교회,
아시아의 일곱 도시에 있는 일곱 교회를
본다.
각 도시는
한 교회가 존재하는 경계로서,
그 교회의
지방적인 터이다.
이처럼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는,
침례교나 장로교나
루터교나 감리교나 성공회 같은
여러 교파들이
서로 분열된 것처럼,
교회가
서로 다른 터가 되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항목에 의해
분열되지 않도록
지켜 준다.
교회의 터의
셋째 요소는
하나임(oneness)의 영의 실재이다.
하나의 영의 실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의
유일한 터인
지방이라는 터 위에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유일한 하나를 표현한다.
간단히 말해서
교회의 터의
셋째 요소는
신성한 삼일의
살아 있는 실재이신
그 영의 실재이다.
바로 이 영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가
실재가 되고
살아 있게 된다.
또한 이 영을 통해
지방이라는 터가
율법적으로가 아니라
생명 안에서 적용된다.
또한 교회의 참된 터가
삼일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도
이 영에 의해서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좋은 땅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분열에서
교회의 터,
곧 하나라는 터로
돌아오는 것을
상징한다.
교회의 지방적인 터는
기본적으로,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실행되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일한 하나이다.
신약의 신성한 계시에 따르면,
교회의 터는
세 가지 핵심 요소로 구성된다.
교회의 터를 구성하는
첫째 요소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의
유일한 하나이다.
이것은
‘그 영의 하나’라고 불리며,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이 하나를 위해
기도하셨다.
교회의 터의
둘째 요소는
지방이라는 유일한 터인데,
각 지방에 있는 교회는
이 유일한 터 안에
세워지고 존재한다.
교회의 터의
셋째 요소는
하나임(oneness)의 영의 실재,
곧 신성한 삼일의
살아 있는 실재이신
그 영의 실재이다.
교회의 터는
내재적으로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씨에 관한
그분의 약속을
반복하셨을 뿐 아니라
땅에 관한
그분의 약속도
반복하셨다.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씨에 관하여 하신
약속을 믿었다.
창세기 15장 7절에서
하나님은 확실하게
땅에 관한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땅에 관하여 하신
약속을 믿는 데에는
믿음이 부족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땅에 관하여 하신
약속을 믿기 어려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와
언약을 맺어야만 하셨다.
창세기 15장
9절부터 21절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분의 약속을 확증하셨음을
본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암송아지 한 마리와
암염소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갈라지고 죽음을 당한
세 가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육체가 되신 분으로서
이 땅에서
인성 안에서 사셨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가 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창세기 15장에 있는
세 가축은
우리를 위하여
인성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상징함에 틀림없다.
암송아지는
화목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께 부름받은 이들과
언약을 맺으시기 위해서는 먼저
화목제물이 필요했다.
그리스도께서
그 화목제물이셨다.
암염소는
우리의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하나님께 부름받은 이들인
우리는
얼마나 선한지와 상관없이
여전히 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화목제물에 이어서
속죄제물이 필요하다.
할렐루야,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
우리의 암염소,
곧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애셨다.
그다음으로
번제물이 필요했는데,
번제물은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해야 함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그분께 부름받은 이와
언약을 맺으실 때
통과해 가신
모든 제물이셨다.
죽이지 않은
새 두 마리는
부활하시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부활하신 이 그리스도는 주로
신성 안에 계신다.
왜냐하면 성경의 예표에 따르면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축은
인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새들은
신성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5장의 새들은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여전히 하늘에 계신 분이시며,
또한 전에도 살아 계셨고
지금도 살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땅을 걸어가신
사람으로서 죽음을 당하셨지만,
지금은
하늘들에 오르시어
하늘에 속한 분으로서
살아 계신다.
그분은
인성 안에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로 바쳐지셨고,
또한 신성 안에서
우리를 위해
살아 계신다.
성경의 예표에서,
산비둘기는
고난당하는 삶을 상징하고,
어린 집비둘기는
믿는 삶
곧 믿음의 삶을 상징한다.
땅에 사시는 동안,
주 예수님은 항상
고난당하셨고
또한 믿으셨다.
그분은
고난당하는 삶의 방면에서는
산비둘기이셨고,
믿는 삶의 방면에서는
집비둘기이셨다.
새는
두 마리였는데,
숫자 2는
증거를 의미하고
또한 증거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 있는 새 두 마리는
부활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나타낸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주 예수님은
“나는
… 살아 있는 이이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보아라,
영원토록 살아 있으며 …”
(17-18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영원토록 살아 계신 것이
그분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증거는
항상 살아 있는 문제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가
살아 있지 않다면,
예수님의 증거도 없는 것이다.
살아 있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살아 계신 예수님의
증거가 된다.
좋은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라는
말씀을 들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씨에 관하여 하신
약속은 믿었지만,
좋은 땅에 관하여 하신
약속을 믿는 데에는
믿음이 부족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화하여 주시기 위해서
그와
언약을 맺으심으로써
그분 자신의 약속을
확증하셔야만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약속의 언약이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약은
이 언약의 연속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죽음을 당한
세 종류의 가축은
우리를 위하여
인성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살아 있는
새 두 마리는
신성 안에서
살아 계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암송아지는
화목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고,
암염소는
속죄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며,
숫양은
번제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다.
성경의 예표에서,
산비둘기는
고난당하는 삶을 상징하고,
어린 집비둘기는
믿는 삶
곧 믿음의 삶을 상징한다.
이 두 가지는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지니신
두 가지 특징이다.
숫자 2는
증거를 나타내므로,
살아 있는 새 두 마리는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증거를
나타낸다.
역대기상 4장 10절에서
우리는
한 유다 자손이 드린
특별한 기도를 본다.
“야베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오, 주님께서
저에게
복을 넘치게 주시고
저의 지경을 넓혀 주시며,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하시고
주님께서
저를
악에서 지키시어
제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
하나님은
야베스의 간구를
이루어 주셨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러한 기도,
즉 하나님께서
좋은 땅에 대한 누림의 지경을
넓혀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의 지경을
넓혀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를
하기 바란다.
하나님의 일의
한 가지 주된 원칙은
사람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기도로
그분께 협력하기를
원하신다.
여러 해 전에
기도에 경험이 많은
어떤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는
모든 영적인 일이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첫째 단계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기를
의도하신다.
즉 하나님의 뜻이 있다.
둘째 단계에서
하나님은
그 영을 통해
그분의 자녀들에게
그분의 뜻을 계시하시어
그분의
뜻과 계획과
갈망과 열망을
알게 하신다.
셋째 단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를 통해
그분의 뜻을
그분께
다시 들려드린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에
반향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조화를 이룬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말해 낼 것이다.
그 결과,
넷째 단계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성취하실 것이다.
우리는
셋째 단계,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 다시 들려드리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가치 있는 기도는 모두
다시 들려드리는 기도이다.
우리의 기도가 단지
우리의 계획과 소망을
이루는 것만 위한다면,
영적인 영역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에
반향하는 기도만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에 의해 통제받는다.
하나님은 기꺼이
많은 일을 하고자 하시지만,
그분의 백성이
기도하지 않을 때
그분은
그 일들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기 전에 반드시
사람이
그분께
동의할 때까지
기다리셔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의
큰 원칙이고,
성경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원칙들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
그러므로 지금
우주에는
세 가지 의지가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의지이고,
두 번째는
사탄의 의지이며,
세 번째는
사람의 의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사탄을
속히 멸망시키지 않으실까?”
라고 말하며
궁금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람이
그분과 합하여
사탄을 처리하기
원하신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고,
사탄에게는
사탄의 의지가 있으며,
사람에게는
사람의 의지가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지가
그분과 합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홀로 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께 협력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이 땅에 있는
교회의 책임이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하려고 하실 때,
첫째로
그분의 뜻을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넣어 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뜻에
기도로 반향한 후에야
무언가를 성취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절차를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은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께 반향하는
의지를 원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우리 없이 하신다면,
우리는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의
각 부분이 이루어지려면
그것을 수행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뜻이
그분의 뜻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말해 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도가
하나의 일임을 본다.
이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왜냐하면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말해 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말해 내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에서 나온 기도는 모두
쓸모없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기도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그런 다음
우리는
기도를 통해
그분의 뜻을
다시 들려드린다.
하나님의 마음에 따른 기도는 다
하나님의 뜻을
출발점으로 하며,
사람은 단지
전달하고 반향하는
기관일 뿐이다.
우리에게서 시작된 기도는
영적인 가치가 없다.
그리스도 안의 믿는 이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기도를 해야 하고,
또한 우리 개인의
영적인 지경이 넓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갈망을 표현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우주 안에는
세 가지 뜻,
곧 신성한 뜻과
사탄의 뜻과
사람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뜻이
그분께 연결되기를
원하시며,
또한 사람이
그분과 하나 됨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기쁨을 위해
기도로
그분의 뜻을 표현하고
그분께 다시 반향하기를
원하신다.
기도의 참된 의미는
다음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어떤 일을 하기를
의도하신다.
하나님은
그 영을 통해
우리에게
그분의 뜻을 계시하셔서
그분의 뜻을
알게 하신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그분의 뜻을
그분께
다시 들려드려
반향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일을 성취하신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에
반향하는 기도만이
어떤 영적인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기도를 하기를
배워야 한다.
야베스는
하나님을 부르며
그의 지경을 넓혀 주시기를
구했다.
야베스의 기도에서
좋은 땅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은
좋은 땅의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얻고 누리는 것이
확대되는 것을
상징한다.
찬양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수행하는
가장 높은 일이다.
성도의 영적 생활의
가장 높은 표현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주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곳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좌정하신다’
(시 22:3).
하나님의 이름과
심지어 그분 자신도
찬양을 통해 높아지신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찬양을 통해
솟아오른다.
찬양하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주님을 접촉하는 것이다.
찬양할 때
우리는
시련 위에 있게 된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억누르려고 할수록
주님 앞에서
우리는 더욱
일어나서
“주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찬양합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찬양의 희생 제물보다 더
사람을
무르익고 성숙하게 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성령의 징계를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할 뿐 아니라
성령의 징계를 찬양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에게
분명하고 영광스러운
문이 열릴 것이다.
유다 왕국은
여호사밧이 통치하던 시기에
쇠망하고 있었다.
매우 약했고
모든 것이 휘청거리는 상태였다.
유다 사람들은 완전히
절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패배가 확실하다고
느꼈다.
여호사밧은
부흥된 왕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했다.
그는
노래하는 이들을 세워
여호와께
노래하며 찬양하게 했다.
그는 또한
노래하는 이들이
거룩한 의복을 입고
군대 앞에서 나아가면서
여호와께 찬양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며 찬양하기 시작하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시어
…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산 주민을
치게 하시니…”
(22절).
‘사람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며 찬양하기 시작하자’
라는 말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며 찬양하는
바로 그 순간에’
라는 뜻이다.
찬양만큼
주님의 손을
속히 움직이게 하는 것이 없다.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매일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찬양하기만 해도
많은 일에서
이길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승리가
전쟁에 달려 있지 않고
찬양에 달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기도뿐 아니라
찬양으로도
사탄을 이긴다.
역대기하 20장에 의하면,
저쪽에는
군대가 있고
이쪽에는
찬송을 부르는 이들이 있다.
이쪽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진 이들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이들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
많은 이가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
그들은 자주
시험을 받는다.
여호사밧처럼
그들은
어려움에 갇혀 있다.
저쪽은
너무나 강하지만
이쪽은
너무나 약하다.
그들의 문제는
너무나 엄청나서
그들의 역량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이럴 때 그들은
자신의 문제만을
주목하기가 쉽다.
사람은
시험받을수록 더 쉽게
자신이 처해 있는
어려움에 얽매인다.
이때가
가장 큰 시험의 때이다.
사람은
시험받을수록 점점 더
자신과 환경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시험을 받을수록 더욱
주님을 신뢰한다.
그들은
시험을 받을수록 더욱
주님을 찬양하기를
배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보지 않고
주님만 보기를
배워야 한다.
고개를 들고
주님께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을 찬양합니다!”
라고 말씀드리라.
큰 소리로 하는 찬양,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
상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찬양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찬양의 희생 제물이다.
찬양의 희생 제물이
하나님께 올라갈 때,
원수 사탄은
그 찬양에 의해
패배당한다.
하나님 앞에서
찬양의 희생 제물은
매우 효능이 있다.
여러분의
지극히 높은 찬양이
하나님을 향하여
솟구쳐 나오게 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분명
견디어 내고
이기게 될 것이다.
찬양할 때,
여러분은
승리의 길이
여러분의 눈앞에
활짝 열리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역대기하 20장
15절부터 22절까지에서
우리는
주님을 찬양함으로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역대기하 20장 15절에서
여호와는
여호사밧왕에게
“이 큰 무리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도 마라.
싸움은
너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으며,
17절 상반절에서는
“너희는
이 전투에서
싸울 것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다.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아주 큰 소리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며 찬양하기 시작하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셔서
원수들을 치게 하시니,
원수들이 패배하였다.
찬양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수행하는
가장 높은 일이다.
성도의 영적 생활의
가장 높은 표현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찬양을 통해
솟아오른다.
찬양하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주님을 접촉하는 것이다.
영적인 승리는
전쟁에 달려 있지 않고
찬양에 달려 있다.
교회생활과
우리의 개인 생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완결된 찬양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체험하고 누린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속
하나님께
찬양의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한다.
“오, 주
저의 하나님!
저는
온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 영원히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렵니다.”
― 시 86:12.
1일
하나님은 확실히 최고의 저자이시다. 하나님은 성경의 전반부 삼십구 권을 기록하셨을 때 그림들을 사용하셨다. 그 그림들은 구약에 있는 예표들과 상징들과 그림자들이다. 예를 들어, 아담은 ‘오실 분의 예표’이다(롬 5:14). 몇몇 예표들은 예언이기도 하다. 구약에 있는 가장 큰 예표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로서, 이들은 오늘날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예표한다. 따라서,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가올 일들을 상징하는 커다란 예표이다.
고린도전서 1장 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통 안으로 부름받았습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신실하시지만, 우리에게 큰 집이나 보수가 좋은 직업을 제공하시는 데 있어서는 신실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지를 돌보시는 데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천연적인 이해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환난을 겪도록 허락하실 때, 우리를 우상들에서 돌아서게 하여 그분 자신께로 되돌려 놓으려는 그분의 목적에 신실하시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평안과 안전과 건강과 소유가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가져가심으로써 우리가 생수의 원천이신 그분을 마실 수 있게 하시는 데에 신실하시다. 우리의 집이나 소유가 우리에게 우상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그러한 것들을 마신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러한 우상들을 처리하고 우리가 그분을 마시게 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경륜 안으로 이끄시는 데 신실하시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시고 먹고 누리고 흡수하고 동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증가되시어 그분의 경륜을 이루신다.
하나님을 생수의 원천으로 마시는 대신, 이스라엘은 그들의 우상들을 마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빌론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이러한 우상들을 처리하셨고, 예루살렘을 파괴하셨으며, 심지어 그들에게 우상이 된 성전을 헐어 버리기까지 하셨다. 우리는 자신이 이스라엘보다 낫지 않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을 이루시는 데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의 우상들을 처리하셔서 우리가 그분을 마시게 하신다. 우리 모두는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마셔서 우리 안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동화시켜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증가되셔서 그분의 배필을 통해 그분의 표현을 얻으심으로 그분의 경륜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지만, 우리는 신실하지도 않고 순결하지도 않으며 많은 다른 남편에게 간다. 하나님을 저버린 후, 우리는 약간의 긍휼과 은혜를 받고서 회개하며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우리가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는 동안 하나님은 기뻐하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치게 회개하고 운다면, 우리의 회개조차도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한 후, 우리는 생수를 마시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일에 그분께 감사드리며, 그분을 누리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으시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여기에서’는 ‘청지기 직분인 분배하는 사역에서’를 의미한다. 이 분배하는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지기들이 신실한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형제회와 함께 있었을 때, 결코 자신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청지기로서 신실했다고 언급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