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ne Trinity
as Revealed in Numbers
민수기 안에
계시되는 것과 같은
그 신성하신 삼일
‘삼일 하나님’은 주로
신성한 인격이신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며,
‘신성한 삼일성’은 주로
신격의 주된 속성,
곧 하나님께서
삼일(三一)이신 것을
가리킨다
― 마 28:19, 계 1:4-5.
성경 전체의 구조는
신성한 삼일성으로
되어 있다
― 창 1:26, 출 3:14-15,
민 6:24-26, 사 6:8, 마 28:19,
고후 13:14, 엡 3:14-17, 계 1:4-5.
우리가
기도의 영을 가지고
우리의 시간과 힘을 들여
우리의 온 존재를 사용함으로써,
거룩한 말씀에 계시된
신성한 삼일성에 대해
완전하고 철저하게
연구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 마 28:19, 계 1:4-5.
비록 성경이
많은 명확한 가르침들을
담고 있지만,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직접적인 가르침이나 교리는
전혀 담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신성한 삼일성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신성하고 영적인 사실들에 대한
많은 서술들 안에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 엡 3:14-17, 4:3-6.
성경에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교리들이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은
신성한 삼일성이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심으로
우리가
그분께 동참하고
그분을 체험하며
누리게 하려는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것은 또한
마태복음 28장 19절과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을 통해
충분히 입증된다.
성경에서
신성한 삼일성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암시하거나
함축하고 있는 것은
모두
우리가
삼일 하나님께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요 14:19-20, 23,
엡 4:3-6, 계 1:4-5.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말씀의 어느 한 부분을
연구할 때마다,
우리는
교리적인 가르침을
찾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이러한 부분이
우리가
어떻게
삼일 하나님께
참여하고
삼일 하나님을
누리며
체험하는지를
알도록 해 주기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 엡 1:3-7, 13-14.
성경 전체의 계시에 따르면,
신성한 삼일성은
하나님의
분배를 위한 것이다
― 고후 13:14.
삼일 하나님의 분배보다는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강한 의도를 가지신
하나님의 갈망은
그분 자신을
그분의 선민 안으로
그들의
생명과
생명 공급과
모든 것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 롬 8:2, 10-11.
신성한 삼일성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신성한 분배를
수행하실 길이
없을 것이다
― 엡 3:14-17.
신약은
신성한 삼일성의 셋 모두가
우리 안에 계심을
계시해 준다
― 엡 4:6, 요 14:20, 23, 롬 8:10-11,
고후 13:5, 골 1:27, 빌 2:13.
신성한 삼일성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본이다
― 마 28:19, 살전 5:23.
우리 안에는
전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과
협력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 고후 13:14.
신성한 삼일성의
셋 가운데에는
조화가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높이기를
기뻐하시고,
아들은 기꺼이
아버지께 복종하시며,
그 영은
아들에 관해
증언하신다
― 마 3:17, 17:5, 12:28,
빌 2:5-11, 요 16:13-15.
세 부분으로 된 존재인
우리는
내주하시는 신성한 삼일성과
협력해야 한다
― 요 14:16-20, 23.
결국 우리의 전 존재,
곧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은
신성한 삼일성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우리가
내주하시는 신성한 삼일성과
협력한 결과로
그분은
영광스럽게 되시고
표현되시며
나타나실 것이다
― 살전 5:23, 살후 1:10, 12.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신성한 삼일성과
연합되는 생활이다
― 고후 13:14, 엡 3:14-17, 4:4-6.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하나님은
신성한 생명(요 3:15)과
십자가(골 1:20)와
그 영(롬 8:11)과
말씀(렘 15:16, 요 6:63),
이 네 가지 도구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신성한 삼일성과
연합되게 하신다.
우리는 항상
신성한 생명 안에서,
십자가와 말씀을 통하여
그 영과 교통해야 한다
― 고후 13:14, 롬 8:11, 골 3:16.
겉으로 보기에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계수하는 것과
그들이
광야에서
여행하는 것에 관한
기록이지만,
사실상 이러한 기록의
구조는
신성한 삼일성으로
되어 있다
― 민 1:1, 6:13-16, 7:1, 11-17,
9:15-18, 21, 20:6-8.
신성한 삼일성이 없다면
민수기의 기록은
공허할 것이다.
민수기의 기록의
내재적인 실재는
신성한 삼일성이다.
민수기 1장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육체 되심을
본다.
민수기 1장에서
삼일 하나님의
육체 되심을
보기 위해서는
궤가 있는
성막의 문제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성막 안에는
궤가 있었고,
궤 안에는
율법이 있었으며,
이 율법은
‘증거판’이라 불렸다
― 민 17:4, 10.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증언하고
보여 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사실상 중심이실지라도,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 자신만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금이 입혀진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궤 안에 계신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
나무와 금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진
한 실체인
궤는
신성과 함께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궤를 가진
성막의 그림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서
육체 되심을 통해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것을
본다.
성막의 널빤지들의 개수인
48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48은
6 곱하기 8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부활(8) 안에 있는
사람(6)을
상징한다.
48은 또한
12 곱하기 4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4가 의미하는)
피조물 안에 계신
(3 곱하기 4인
숫자 12에 포함된)
삼일 하나님을
상징한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보며,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삼일 하나님을
본다.
궤가 있는
성막에 관한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단지 하늘들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
그리고 그분의 체현인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것을
본다
― 골 2:9.
육체 되심을 통해
한 사람으로 체현되신
삼일 하나님은
확대되시고
증가되시고
확장되셨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확대와 확장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인
성막이 되셨다
― 요 1:1, 1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만
계셨을 때에는
누구도
그분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확대가 없으면
누구도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제 성막으로 확대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처이실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장소이시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할 수 있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의 삶의 의미가
되신다
― 요 11:25, 14:6, 요일 5:11-12.
그분은
우리의 생명으로서
(골 3:4)
우리의 삶의 의미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증거가
되신다.
즉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그분을 살고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을 나타내며,
자연스럽게 그분은
우리의 중심이 되신다.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한 처소로
확대되셨는데,
하나님은
이 처소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이 처소 안으로 들어간다
― 요 1:14.
하나님은
거처를 가지고 계시고,
우리도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과 만나며
하나님과 연합될 수 있도록
해 주는
한 장소를
가지고 있다
― 요 14:20, 15:4-5, 고전 6:17.
신성한 삼일성은
나실인의 분별에서도
계시된다
― 민 6:13-16.
신성한 삼일성이
나실인의 분별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제물들,
곧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과 소제물을 통해
나타난다
― 민 6:11-12, 14-17.
나실인은
회막의 입구로
이끌렸다
― 민 6:13.
회막은
하나님의 거처이자
그분의 백성이
모이는 장소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회막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을
누리도록 하는
기반과 영역이시다.
신성한 칭호인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나타내고,
또한 삼일성을
나타낸다
― 출 3:14.
나실인의 분별은
예표에 있어서
나실인이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성한 삼일성은
성막의 기능과
제물들에서
계시된다
― 민 7:1, 11-17.
성막과 제단의
기능의 시작은
신성한 삼일성과
관련된다.
성막의 기능과
제물들은
민수기 7장에서
제단 봉헌을 위한
제물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봉헌은
성막과
그 모든 기구들,
그리고 제단과
그 모든 집기들이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를 통해
기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 7:1).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이
신성한 삼일성의
풍성을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신성한 삼일성은
성막을 덮는
구름과 불에서
계시된다
― 민 9:15-18, 21.
성막을 덮은
구름과 불은
신성한 삼일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머물든지
혹은 여행을 하든지
언제나 줄곧
신성한 삼일성의
풍성을
누리기 위한 것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백성이
머물러 있을 때나
여행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신성한 삼일성으로서
그들과 함께하였다.
신성한 삼일성은
매 맞은 반석에서
계시된다
― 민 20:6-8.
반석은
하나님의 백성을
따라다니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고전 10:4),
물은
생명의 영을 예표한다
(요 7:38-39, 계 22:1-2).
민수기 20장에서
매 맞은 반석은
신성한 삼일성이
여행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따라다니시면서
그들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심으로
그들이
신성한 생명의
풍성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 요일 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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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민수기에 계시된 신성한 삼일성”
6일
민 9:15-17
… 구름이
성막 곧 증거막을
덮었다.
… 그 구름은
항상 그렇게 있었다.
그 구름은
낮에는
성막을 덮었고,
밤에는
불의 모양이었다.
구름이
천막 위로
떠오를 때면
그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은
진군하였고,
구름이 내려앉으면
그곳에
이스라엘 자손은
진을 쳤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
이 세 권의 책은
한 기록이다.
이 기록의 첫 번째 부분인
출애굽기는
성막을 강조한다.
두 번째 부분인
레위기는
제사장 체계를 강조한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인
민수기는
성막과 제단의 기능
및 제사장 체계의 봉사를
강조한다.
성막과 제단은
출애굽기 마지막 장에서
세워졌지만,
그 기능은
민수기 7 에서
제단 봉헌을 위한
제물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봉헌은
성막과
그 모든 기구들,
그리고 제단과
그 모든 집기들이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를 통해
기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모든 세대에 걸쳐
언제나
신성한 삼일성의
풍성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성막과 제단의
기능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신성한 삼일성과
관련되어 있었다.
구름은
낮에 계신 그 영을,
불은
밤에 계신 그 영을
예표한다.
성막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거처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여호와는
삼일 하나님이시다.
성막을 덮은
구름과 불은
신성한 삼일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머물든지
혹은 여행을 하든지
언제나 줄곧
신성한 삼일성의
풍성을
누리기 위한 것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백성이
머물러 있을 때나
여행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신성한 삼일성으로서
그들과 함께하였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객관적이시지만,
삼일성은
항상
주관적이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할 때,
그분은 삼일성이시다.
삼일성은
신격에 관한
교리적인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리기 위한 것이다.
민수기 20장
6절부터 8절까지는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팡이를 들고,
… 그들의 눈앞에서
저 반석을 향해
물을 내라고
말하여라.”
라고 말한다.
이 절들에서
영광은
표현되신 하나님이고,
여호와는
삼일 하나님이시다.
그 반석은
하나님의 백성을
따라다니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고전 10:4하).
… 오늘날
그 영이신 그리스도는
어디에서나
우리를
따라다니신다.
물은
생명의 영을 예표한다
(고전 10:4상, 요 7:38-39).
이 물은
출애굽기 17장에서
매 맞은 반석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민수기 20장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있는
바울의 말에 따르면,
그 반석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여행하는 내내
그들을 따라다니면서
물을 냄으로써
그들의 갈증을
해소했음에 틀림없다.
매 맞은 반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생수이신
그 영은
곧 삼일 하나님의 흘러나오심이고,
이 흐름의 산물이
성경 전체의 결론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과 2절에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고
그 양편에
생명나무가 자라는데,
이 생명수의 강은
삼일 하나님의 흘러나옴이다.
이것은
위대한 항목이다.
민수기 20장에 있는
매 맞은 반석은
신성한 삼일성이
여행 중인 하나님의 백성을
따라다니시면서
그들이
신성한 생명의 풍성을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민수기에 있는
다섯 사례,
곧 나실인의 분별,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주신
삼중 축복,
성막과 제물들의 기능,
성막을 덮고 있는
구름과 불,
매 맞은 반석을
살펴보았다.
이 모든 것은
삼일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나실인으로서의 헌신을 위해
신성한 삼일성이
필요하다.
삼일성은
우리에 대한
신성한 축복의
구조이자 내용이다.
우리에게는
성막과 제단의
기능 발휘를 위한
삼일성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와 함께 머물고,
우리와 함께 여행하며,
우리를 안내하는
하나님의 임재인
삼일성이 필요하다.
아울러 우리에게는
생수의 근원으로서
항상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 줄
삼일성이 필요하다.
5일
민 6:13
자신을 분별하는 날들이
다 찼을 때에
나실인과 관련된 법은
이러하다.
먼저 그 사람을
회막 입구로
데려와야 한다.
민 6:17
또 숫양을
여호와에게
화목제물로 바치되,
무교병 한 광주리와
함께 바쳐야 한다.
제사장은 또한
그에 딸린
소제물과 전제물도
함께 바쳐야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장이 될 것을
정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태어나면서
제사장 직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기를
갈망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문이 닫힌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또한
나실인의 원칙을
세워 놓으셨기 때문이다.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들은
나실인으로
자원할 수 있었다.
사무엘은 나실인이었다.
그는
제사장으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나실인이 됨으로써
결국 제사장으로서
행하고 섬겼다
(삼상 1-3장).
아론 가문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았지만
나실인들은
자원한 사람들이었다.
이 두 가지 원칙은
오늘날 교회생활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한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이고
(엡 1:4),
다른 면에서
우리가
제사장들로서
섬기기 위해서는
나실인으로서
자원해야 한다.
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을
알고 있지만,
실지적인 봉사에 있어서는
우리가 선택받은 것에 대해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교회생활에서 봉사할 때,
주로
자원할 필요성을
의식하게 된다.
주 예수님은
참된 나실인이셨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로서
우리는
자원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은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드리고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분별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나실인이 된다는 것은
자원해서
자신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
나는
삼일성이
나실인의 분별과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
나실인의 분별에는
여러 제물들이 필요했다.
즉 번제물, 속죄제물, 화목제물,
기름을 바르고 기름과 섞인
여러 종류의 과자로 된
소제물이 필요했다.
이 네 종류의 제물이
나실인을 분별하는 데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민수기 6장 13절에서
회막은
하나님의 거처이자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장소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출애굽기와 레위기 전체에서
삼일성을 누리는 것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는
삼일성을 누리는 곳이
바로 회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결코
회막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을
누리도록 하는
기반이자 영역이시기 때문이다.
구약은 거의 언제나
‘여호와께 제물을 드린다’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민 6:14).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
라는 표현은
아주 드물게 사용한다.
신성한 칭호인
‘여호와’는
구약에서
두 가지 주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칭호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나타내고,
또한 삼일성을
나타낸다.
우리는 출애굽기 3장 6절에서
여호와께서
“나는
…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다.
여호와는
그분 자신을
세 세대의 하나님,
곧 삼중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을
함축한다.
따라서 민수기 6장에 있는
나실인의 분별에서
여호와는
삼일 하나님이시다.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에서
제사장들이 헌신할 때는
번제물과 속죄제물과
화목제물과 소제물이 있었지만
전제물은 없었다.
그러나
나실인이 분별될 때에는
전제물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면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지만,
하나님께
즐거움을 드리려면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나실인의 분별은
예표에 있어서
나실인이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나실인으로 섬기는 것을
시작하기 전에도,
그는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분별했을 때
삼일성의 풍성에
참여했다.
로마서 12장 1절에 있는
권유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민수기 6장에 있는
나실인의 분별에 관한
예표들은
신성한 삼일성이
우리의 헌신과
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4일
요 1:1
태초에
말씀께서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요 1:14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니,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였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에게서 온
독생자의 영광이었다.
민수기 1장에 묘사된
그림은
삼일 하나님께서
육체 되심을 통해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사시고
거하시는 것에서부터
육체 되심의 최종 완결인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신약 전체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민수기 1장에서는
삼일 하나님의
육체 되심을
보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장에서
삼일 하나님의
육체 되심을
보기 위해서는
궤가 있는
성막의 문제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성막 안에는
궤가 있었고,
궤 안에는
율법이 있었으며,
이 율법은
‘증거판’이라 불리었다
(민 17:4, 10).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증언하고
보여 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증거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실상
중심이신 하나님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지
하나님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금이 입혀진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궤 안에 계신
하나님이 있다.
나무와 금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진
한 실체인
궤는
신성과 함께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육체 되심’이라는 용어가
민수기 1장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그것에 대한
그림이 있다.
궤를 가진
성막의 그림에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께서
육체 되심을 통해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것을
본다.
성막은
마흔여덟 개의
널빤지들로 지어졌다.
첫째,
숫자 48은
6 곱하기 8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부활(8) 안에 있는
사람(6)을 상징한다.
둘째,
48은 또한
12 곱하기 4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4가 의미하는)
피조물 안에 계신
(3 곱하기 4인
숫자 12에 포함된)
삼일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삼일 하나님께서
육체 되심을 통해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서 우리는
삼일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보며,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삼일 하나님을
본다.
민수기 1장은
육체 되심부터
새 예루살렘에 이르는
신약의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것은 사실상
육체 되심으로 시작하여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교회의 역사의
요약이다.
성경의 예표에 따르면,
민수기부터 말라기서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를
묘사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우리를 격려하는
매우 좋은 일들과
우리를 낙담하게 하는
매우 나쁜 일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민수기에 있는 그림에서
하나님은
중심에 계신다.
즉 하나님은
궤 안에,
그리스도 안에
계신다.
하나님은 더 이상 단지
하늘들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
그분의 체현인
한 사람 안에 계신다.
하나님의 체현이신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골 2:9).
이러한 사람은
두 가지 요소,
곧 금의 요소와
나무의 요소로
조성된 분이시다.
그분은
‘금-나무’인 사람,
곧 ‘하나님-사람’이시다.
이제 이 놀라우신 분,
곧 육체 되심을 통해
한 사람으로 체현되신
삼일 하나님은
확대되시고
증가되시고
확장되셨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확대와 확장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인
성막이 되셨다.
그러한 성막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만
계셨을 때에는
누구도
그분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확대가 없으면
누구도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성막으로 확대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처이실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장소이시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할 수 있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의 삶의 의미가 되신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으로서
우리의 삶의 의미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증거가 되신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그리고 모든 방향에서
그분을 살고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을 나타내며,
자연스럽게 그분은
우리의 중심이 되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우리의 증거와
우리의 중심이시다.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한 처소로
확대되셨는데,
하나님은
이 처소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이 처소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확대된 이 몸 안에서
하나님은
거처를 가지고 계시고,
우리도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과 만나며
심지어 하나님과 연합될 수 있도록
해 주는
한 장소를
가지고 있다.
3일
살전 5:23
그리고 평안의 하나님께서
직접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하셔서,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나무랄 데 없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 14: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의 말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서로 거처를 정할 것입니다.
사람은
몸과 혼과 영의
세 부분으로 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삼일성으로
간주할 수 있다.
신성한 삼일성과는 달리
인간적인 삼일성 안에는
항상 다툼이 있다.
우리의 몸,
곧 육체는
신성한 영과 연합된
우리의 영과 싸우면서
원하는 대로
하려고 한다
(갈 5:17).
육체는 또한
우리의 생각과 싸운다
(롬 7:23).
육체는 또한
옳은 것을 행하고자 하는
논리적인 혼과 싸운다.
… 우리의 혼이
선을 행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의 악한 육체 안에 있는
죄는
우리의 혼에 대항하여
일어선다
(18-21절).
우리 안에는 또한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시는
주 예수님께서 계신다
(딤후 4:22).
그러므로 우리에게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육체에 대해
항상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시고,
혼을 향해서도
대부분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전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과
협력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신성한 삼일성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본이다.
신성한 삼일성 사이에는
전혀 다툼이 없다.
아버지는
아들을 높이기를
기뻐하시고,
아들은 기꺼이
아버지께 복종하시며,
성령은 기꺼이
아들에 관하여 증언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인간적인 삼일성은
이와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이 구원자는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신
신성한 삼일성이시다.
구원받은 후에
우리의 인간적인 삼일성은
내주하시는 신성한 삼일성에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 결국 우리의 전 존재,
곧 영과 혼과 몸이
신성한 삼일성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우리가
내주하시는 삼일성과
이렇게 협력한 결과로
그분은
영광스럽게 되시고
표현되시며
나타나실 것이다.
비록 우리가
우리의 혼으로
선택하고
결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혼으로만 행해서는 안 된다.
아들은
어떤 일들을 행하실 때,
자신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으셨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셨다.
동일하게 우리의 혼은
혼의 뜻을 따라
행해서는 안 되며
영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후의
우리의 생활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신성한 삼일성이
세 부분으로 된
우리의 존재에
더해지셨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신성한 삼일성과
교환한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연합되었고
또 연합되고 있다.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인간적인 삼일성,
곧 몸과 혼과 영이
신성한 삼일성과
완전히 연합되는 것이다.
이 두 삼일성이
하나로
완전히 연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신성한 삼일성과
연합되는 생활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하나님은
신성한 생명과
십자가와
그 영과
말씀,
이 네 가지 도구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신성한 삼일성과
연합되게 하신다.
이것이
주님께서 준비하신
신성한 공급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신성한 생명 안에서,
십자가와 말씀을 통하여
그 영과 교통해야 한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
매일
거룩한 말씀에
자신을 연결시켜야 하고,
십자가의 처리를
받아들여야 하며,
그 영과
하나 되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계수하는 것과
그들이
광야에서
여행하는 것에 관한
기록이지만,
사실상 이러한 기록의
구조는
신성한 삼일성으로
되어 있다.
… 민수기의 기록의
내재적인 실재는
신성한 삼일성이며,
이 신성한 삼일성은
나실인의 분별,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주신
삼중 축복,
성막과 제물들의 기능,
여행 중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
그들이
하나님을 따를 때
그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반석으로 계시된다.
이것은
삼일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계시한다.
신성한 삼일성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한
길이고,
그분을 섬기기 위한
길이며,
생명을 공급받기 위한
길이다.
2일
마 28:19
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을
나의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주고,
고후 13: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는
삼일성에 관한
가르침이나 교리가 없지만
하나의 영적인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믿는 이들을
삼일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 안으로
침례를 받는 것은
그분께 참여하고
그분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신약 용어 연구
(Word Studies
in the New Testament)〉에서
빈센트(M. R. Vincent)는
“거룩한 삼일성의
이름 안으로
침례를 준다는 것은
그분과의
영적이고 비밀한 연합을
나타낸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삼일성이
가르침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 삼일성,
곧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을
언급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삼일성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 대신
삼일 하나님을 언급하는
방식으로 볼 때,
이 절은
우리가
삼일 하나님을
사랑과 은혜와 교통으로
누려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랑은
근원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일치한다.
은혜는
표현과 과정으로서
아들 하나님과 일치한다.
은혜와 사랑은
영 하나님의
도달하심과 교통을 통해
우리 안으로 전달된다.
이것이 곧
삼일 하나님을
사랑과 은혜와 교통으로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누리기 위한
분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신성한 삼일성을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암시하거나
함축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가르침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삼일 하나님께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이것이
우리 안으로
깊이 각인될
필요가 있다.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말씀의 어느 한 부분을
연구할 때마다,
우리는
교리적인 가르침을
찾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이러한 부분이
우리가
어떻게
삼일 하나님께
참여하고
삼일 하나님을
누리며
체험하는지를
알도록 해 주기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 육십육 권의
계시 전체에 따르면,
신격의 삼일성은
하나님의
분배를 위한 것이다.
강한 의도를 가지신
하나님의 갈망은
그분 자신을
그분의 선민 안으로
그들의
생명과
생명 공급과
모든 것으로
분배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기 위해서,
즉 이러한 분배를
수행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삼일(三一)이셔야 한다.
삼일성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신성한 분배를
수행하실 길이 없다.
그러므로 그분의 삼일성은
절대적으로
신성한 분배를 위한 것이다.
신성한 삼일성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첫 번째 절은
창세기 1장 26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려고 하실 때,
(사도행전 2장 23절에 나오는
의결처럼)
틀림없이
신격의 의결이
있었을 것이다.
그 회의에서
삼일 하나님은
이렇게 대화하셨다.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듭시다.
… 통치하게 합시다.”
이것은
어떤 회의에서의 대화와
매우 흡사하게 들린다.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실 때에는
‘우리’라는 말이 언급된
회의나 대화가 없었다.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가리킨다.
신성한 삼일성이
처음 언급된 절은
신성한 분배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장차
그분 자신을
사람 안으로
분배하시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그분 자신의 모양에 따라
만드셨다.
아버지의 체현이신
아들은 여전히
우리 밖에 계셨다.
그분은
믿는 이들 안에
거하시기 위해
그 영이
되셔야 했다.
우리에게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아들의 실재화이신
그 영이 계시므로,
우리는
아버지의
체현과
우리의 목적이신
아버지도
소유하고 있다.
실지로,
우리의 목적이신
아버지는
우리 안에 계시는데,
그 이유는
목적이신 분께서
아들 안에 체현되시고
아들은
내주하시는 영으로
우리에게
실재화되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 영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들도 있으며,
우리에게
아들이 있다면
아버지도 있다.
따라서
신성한 삼일성의 셋이
우리 안에 계신다.
신언노트, 2019 03 03
민수기 안에
계시되는 것과 같은
그 신성하신 삼일
‘그 삼일 하나님’은 주로
하나님 그분 자신,
곧 그 신성하신 인격을
가리킵니다:
‘그 신성하신 삼일’은 주로
하나님의 삼일(三一)이심을
가리키는데,
이는(which)
그 신격의(of the Godhead)
그 주요한 속성입니다.
한 전체로서,
성경은
그 신성하신 삼일로
구성됩니다
(is constructed;
세워집니다, 건설됩니다).
우리가
기도의 한 영을 가지고,
우리의 시간과
또 에너지를(energy; 힘을, 활기를)
써서(to spend; 소비해서),
우리의 전 존재를
훈련하여
(to exercise;
연습하여, 행사하여, 작용시켜, 써서, 구사하여)
그 거룩한 말씀 안에
계시되는 것과 같이(as; … 대로)
그 신성하신 삼일에 관한
철저하고 또 완전한
한 공부를
(a … study;
한 연구를[조사를, 검토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성경이(the Bible)
많은 명백한(explicit; 분명한)
가르침들을
포함하지만,
성경은(the Scriptures)
그 신성하신 삼일에 관한
어떤 직접적인
가르침이나 또는 교리도
(doctrine; 원칙도, 주의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 신성하신 삼일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신성하고 또 영적인 사실들에 관한
많은 서술들 안에
(in many narrations;
많은 이야기들에)
간접적으로 나타내질 뿐입니다
(is only indicated;
오직 넌지시 알려질[시사될] 뿐입니다).
성경이
그 신성하신 삼일에 관한
교리들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은
그 신성하신 삼일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시고
(work Himself into us;
… 차츰 넣으시고, 서서히 섞으시고)
그 결과(so that)
우리가
그분을
함께할 수 있고(partake of),
체험할 수 있으며,
또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강하게 간접적으로 나타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8장 19절과
또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의하여
완전히 증명됩니다.
성경 안에 있는
그 신성하신 삼일에 관한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각각의 모든
언급(mention; 거론),
가리킴(indication; 지적, 암시, 간접적으로 나타냄),
또는 함축은(implication; 암시는, 내포된 뜻은)
우리의
그 삼일 하나님 안에의
참여를 위하여 있습니다
(is for our participation;
함께함[함께 나눔]을 위합니다).
우리가
그 신성하신 삼일에 관한
그 말씀의 한 부분을
공부할 때는 언제든지,
우리는
교리적인 가르침을
찾는 것에
(to look for;
구하는 것에, 기대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아야 하고
오직 이 부분이
어떻게
그 삼일 하나님 안에
참여하고(함께하고),
(삼일 하나님을) 누리며,
또 체험하는지를
우리가 아는 것을 위하여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성경의 그 전체 계시에 따라,
그 신성하신 삼일은
하나님의 분배하심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 삼일 하나님의
그 분배하심보다는
오히려 그 신성하신 삼일의
그것을(그 분배하심을)
언급하는 것이
(to refer to …;
가리켜 말하는 것이, 인용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분의 강한 의도를 가진
하나님의 갈망은
그분 자신을
그분의 선택된 백성 안으로
그들의 생명,
그들의 생명 공급,
또 그들의 각각의 모든 것들로(as)
분배하시는 것입니다.
그 신성하신 삼일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분배하심을
수행하실 길을
가지시지 못할 것입니다.
신약은
그 신성하신 삼일의
셋 모두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계시합니다.
그 신성하신 삼일은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의
그 본입니다
(the model;
그 본보기[모범, 원형]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 전투 때문에,
우리는
그 신성하신 삼일과
협력하는 것을
(to cooperate;
협동[협조]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신성하신 삼일의
그 셋 사이에는
(among; 가운데에, 중에는)
조화가 있습니다.
그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높이시는 것에
(to exalt;
칭찬[찬양, 격상]하셔서)
기쁘게 되시고,
그 아들께서는 기꺼이
그분 자신을
그 아버지께
복종시키시며,
또 그 영께서는
그 아들에 관하여
증언하십니다.
우리의
세 부분으로 된
존재를 가지고(with; …로)
우리는
내주하시는 그 신성하신 삼일과
협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전 존재
―영, 혼, 또 몸―는
그 신성하신 삼일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내주하시는 그 신성하신 삼일과의
협력은
그분을(of) 영광스럽게 함,
그분의 표현,
또 그분의 나타나심의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will result in).
그리스도인의 그 생활은
우리의
그 신성하신 삼일과의
섞임의
한 생활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신성하신 삼일과
섞으시기 위한
네 도구들을
사용하십니다:
그 신성한 생명,
그 십자가,
그 영,
또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 십자가를 통하여
또 그 말씀을 통하여
그 신성한 생명 안에서
그 영과
교통을 가져야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의
수를 세는 것과
또 그들의
그 황무지 안에서의
여정에 관한
(of … journey;
여행[이동]의)
한 기록입니다;
사실은,
그러한 한 기록은
그 신성하신 삼일로(with)
구조화됩니다
(is structured;
구성[조직]됩니다):
그 신성하신 삼일이 없이는,
민수기 안에 있는 그 기록은
공허할 것입니다
(would be empty;
비어 있는[무의미한] 것입니다);
민수기 안에 있는 그 기록의
내재적인
(intrinsic; 고유한, 본질적인)
그 실재는
그 신성하신 삼일이십니다.
민수기의 1장 안에서
우리는
그 삼일 하나님의
그 육체 되심을
봅니다:
민수기 1장 안에서
그 삼일 하나님의
그 육체 되심을
보기 위해서,
우리는
그 궤를 가지는
그 성막의
그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성막 안에
그 궤가 있었고,
또 그 궤 안에
그 율법이 있었으며,
이는(which)
‘그 증거
(the Testimony;
그 증언, 그 증거판)’라고
불렸습니다.
그 율법은
그것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증언하기,
곧 보여 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실상
그 중심이시더라도,
우리는
단지 그분 자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금으로 덮어씌워진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한 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요소들,
곧 나무와 또 금의
하나의 실체인
(one entity;
하나의 실재물인[독립체인]),
그 궤는,
그분의 신성과 함께
(with; …을 가지시는)
그분의 인성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 궤를 가지는
그 성막의
그 그림 안에서,
우리는
그 삼일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셨고
(incarnated to be;
육체가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에
(among; 사이에, 중에)
사시는
한 사람이 되신 것을
봅니다.
그 성막의 그 널빤지들의
그 수는―48은―
의미심장합니다
(significant;
함축성이 있습니다, 중대합니다):
48은
6 곱하기 8로
구성되는데,
이는
부활(8) 안에 있는
사람(6)을
의미합니다
(signifies; 나타냅니다).
48은 또한
12 곱하기 4로
구성되는데,
이는
그분의 피조물(4) 안에 계시는
(3 곱하기 4로 구성되는,
그 숫자 12 안에
포함되시는
[contained; 담기시는])
삼일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 그림 안에서
우리는
그 삼일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보며,
또 사람들 가운데에 거하시는
그 삼일 하나님을 봅니다.
그 궤를 가지는
그 성막의
이 그림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오직 그 하늘들 안에만
계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봅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땅 위에,
곧 그분의 체현이신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봅니다.
육체가 되셨고
한 사람으로서
체현되신
그 삼일 하나님께서
확장되셨고,
증가하셨으며,
또 확대되셨습니다;
그분의 확장과 또 확대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성막,
곧 하나님의 거처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만
계셨을 때,
한 사람도(no one)
그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확장이 없이는
한 사람도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no … could; 없습니다).
이제,
한 성막으로의
그분의 확장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거처이실 뿐 아니라,
또한
거기에서(where)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 장소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생활의(life; 삶의)
그 의미가
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이시고
(is our life to be …;
생명이셔서)
우리의 생활의
그 의미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우리의 증거이십니다;
우리는
각각의 모든 측면들 안에서
그분을 살고,
그분을 표현하며,
또 그분을 보여 주고
(show;
제시하고, 증명하고, 드러내고),
또 자연스럽게
(spontaneously;
자발적으로, 자동적으로, 저절로)
그분께서
우리의 중심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곧 그 삼일 하나님의 그 체현께서,
한 거처 안으로
확대되셨고
그 안에(in which)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며
또 그 안으로(into which)
우리가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한 거처를 가지고 계시고,
또 우리도
거기에서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과 만나며,
또 하나님과 섞일 수 있는
한 장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신성하신 삼일은
그 나실인의
그 분별 안에서
계시됩니다:
그 신성하신 삼일께서
그 나실인의
그 분별과
관련되었다는
그 사실은
그 제물들
―그 번제물,
그 속죄제물,
그 화목제물,
또 그 소제물에 의하여
가리켜집니다.
그 나실인은
그 회막의 그 입구로
데려가졌습니다:
그 회막은
하나님의 그 거처와
또 그분의 백성의
그 모이는 장소이신
그리스도를
언급합니다.
그 회막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그 신성한 삼일을
누림을 위한
그 근거와
(the ground;
그 땅과[장소와, 장과, 터와, 영역과, 입장과,
견지와, 이유와, 기초와, 기반과, 근저와])
또 그 영역이십니다
(the sphere;
그 범위[분야, 지위, 구]이십니다).
그 신성한 칭호 ‘여호와’는
하나님의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denotes; 의미하고),
또 그것은
그 삼일을
나타냅니다.
그 나실인의 그 분별이
있었던 것은
예표 안에서
그가
그 신성한 삼일의
그 신성한 분배하심 안에
참여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so that … might).
그 신성하신 삼일께서
그 성막과
또 그 제물들의
그 기능 안에
계시되십니다:
그 성막과 또 제단의
그 기능의 그 시작은
그 신성하신 삼일을
관련시킵니다
(involve;
수반합니다, 포함합니다, 참여시킵니다).
그 성막과 또 그 제물들의
그 기능은
민수기 7장 안에서
그 제단의
그 봉헌을 위한
(for the dedication;
그 헌납[헌정, 헌신, 바침]을 위한)
그 제물들과 함께
시작하였습니다.
이 봉헌은
그것의
모든 기구들을(furnishings; 설비들을) 가지는
그 성막과,
또 그것의
모든 도구들을(utensils; 기구들을) 가지는
그 제단이
그 신성하신 삼일의
그 분배하심을 통하여
기능 안으로 두어지게 하여
(to be put into function;
기능하게 하여)
그 결과(so that)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이
그 신성하신 삼일의
그 부요함을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신성하신 삼일께서
그 성막을 덮는
그 구름과 또 그 불 안에
계시되십니다:
그 성막을 덮는
그 구름과 또 그 불은
그 신성하신 삼일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머물거나
또는 여행을 하기 위하여
(to journey;
여정에 따라 [장거리를] 이동하도록)
계시고
그 결과(so that)
그들이
줄곧
(all the time; 내내, 아주 자주))
또 내내
(and all the way; 시종, 완전히)
그 신성하신 삼일의
그 부요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남아 있었을 때
(When … remained;
머물렀을 때)
또 그들이
여행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그 신성하신 삼일로(as; …로서)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신성하신 삼일께서
매 맞은 그 반석 안에
(in the smitten rock;
세게 맞은 그 바위로)
계시되십니다:
그 반석은
하나님의 백성을
뒤따르시는
(following; 따라가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또 그 물은
생명의 그 영을
예표합니다.
민수기 20장 안에 있는
매 맞은 그 반석은
그 신성하신 삼일께서
그들의 여정 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뒤따르시고
(follows … to;
뒤따르셔서)
그들의 목마름을
해소하시고
그 결과(so that)
그들이
그 신성한 생명의
그 부요함을
누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1일
계 1:4-5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합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께서,
또 그분의 보좌 앞에 계신
일곱 영께서,
또 신실한 증인이시자
죽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신 분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안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분 자신의 피로
우리를
우리의 죄들에서
해방시켜 주셨을 뿐 아니라,
신성한 삼일성은
우리 하나님의
최고의 신성한 속성이다.
하나님의 인격에 관한
과거의 신학 연구에서
‘삼일(Triune)’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거룩한(Holy)’이라는 단어가
형용사인 것처럼
‘삼일’ 역시
형용사이다.
삼일 하나님은
삼일성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계신다.
…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삼일성 역시
하나님의 속성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에 나오는
은혜와 사랑과 교통은
삼일 하나님의 속성들이지만,
우리 하나님의 최고의 속성은
삼일성이다.
그분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말이다.
우리는 특별히
그분께서
그분의 삼일성을
분배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삼일성이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교통과 거룩함 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최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삼일
곧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아니시라면,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실 길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교통은
신성한 삼일성에 관해
성경에 있는,
특히 신약에 있는
많은 절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이해하며 적용해야 하는지를
깨닫도록
여러분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체적으로
신성한 삼일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커다란 주제이다.
나는
계속해서
우리가
그분께 신실하다면,
이 문제에 관해
보다 많은 빛이
우리에게 임하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정확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성경이
삼일성에 관해
실지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연구하려면,
우리의 온 존재를
집중하고,
우리의 생각과 영 모두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면밀하고도 철저한
연구로부터 얻은 결론은
하나의 표준이 되며,
우리는
이 표준으로
교부들과 공의회들과 신조들에 속한
가르침들을 포함한,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평가할 수 있다.
주님의 회복은
진리의 회복이다.
마르틴 루터를 통해
주님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관한
진리를 회복하셨다.
신성한 삼일성이라는
핵심적인 진리는
지난 1900년 동안
토론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우리가
기도의 영을 가지고
우리의 시간과 힘을 들여,
거룩한 말씀에 계시된
신성한 삼일성에 대해
완전하고 철저하게
연구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오직
성경이 말하는 것만을
관심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반론하는 영으로
‘거룩한 말씀에 계시된’
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
전통적인 가르침들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닌,
진리를 공급함으로써
잘못된 가르침들에 대해
성도들에게
예방 접종하기 위해서 있다.
성경은
로마서 3장부터 5장까지에 있는
의롭게 됨에 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같은
그러한 명시적인 가르침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신성한 삼일성에 관한
직접적인 가르침이나 교리는
전혀 담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삼일성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신성하고 영적인 사실들에 대한
많은 서술들 안에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1절은
… 삼일성을 나타낸다.
비록 이 절이
삼일성에 관한
어떤 가르침이나 교리를
담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서술이
하나님께서 삼일이심을
분명히 가리킨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지난 1900년의 기간을 통해
많은 위대한 학자들이
주로 삼일성을,
하나님의 위격
즉 그분의 신격에 관해
알려 주는
가르침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성경에
삼일성에 관한
교리들이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은
삼일성이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심으로
우리가
그분께 동참하고
그분을 체험하며
누리게 하려는 것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28장 19절과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는데,
이 두 절은
성경에서
삼일성에 관한
가장 좋은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