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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몸의 공급과 몸의 지체들과 몸의 제한

The Supply of the Body,
the Members of the Body,
and the Limitation of the Body
그 몸의 그 공급,
그 몸의 그 지체들,
또 그 몸의 그 제한

몸의 공급은
복합된 관유,
곧 바르는 거룩한 기름으로
예표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이다
― 빌 1:19-21상, 출 30:23-25.

복합되신 영은
몸 안에
그리고 몸을 위해
계시며,
몸을 건축하는
제사장의 봉사를 위해
계신다
― 출 30:26-31, 롬 15:16, 벧전 2:5, 9.

시편 133편에 따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한없이 즐거운
일인
형제들이
하나 안에 함께 거하는 것이
보배로운 복합된 관유에
비유된다
― 엡 4:3.

우리는
지체들의
중보 기도와 교통에 의해
그 영의 공급을 받는다.

우리가
메마르고
전진할 길이 없을 때,
그 상황을 돌파하려면
먼저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다른 형제자매들이 필요하다
― 빌 1:19, 살전 5:25, 욥 42:8-10.

우리는
몸을 건축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안으로 넣는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의 공급이신
생명 주시는 영을 받아들여,
우리 자신을
먹일 뿐 아니라
우리가 돌보고 있는
모든 이들을 먹여야 한다
― 눅 11:1-13.

우리는
몸의 공급이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몸과 교통할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 살전 3:8, 고전 10:16하, 요일 1:3.

우리가
몸 안에 사는 한,
우리는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
몸의 공급을
받을 것이다.

빛을 보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소
곧 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 시 73:16-17, 마 5:14, 계 1:20.

온몸은
지체들이
서로 의존함으로써
건축된다
― 고전 16:18, 엡 4:16.

몸 안에는
독립이나 개인주의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체들이고,
지체들은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 고전 12:27, 롬 12:5, 엡 5:30.

모든 믿는 이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한 지체도
없어서는 안 된다
― 고전 12:15, 21, 롬 12:3.

“우리가 참으로
몸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를 본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두 번째로 구원받은 것과
같을 것이다.”
(워치만 니 전집, 44권,
특별 집회, 메시지 및 대화 기록(4), 98쪽)
― 요 1:50-51, 딤전 3:15.

자신이
몸의 지체인 것을
본 이들은
분명히 몸을
귀히 여기고
다른 지체들을
존중할 것이다
― 고전 12:23-24, 빌 2:29,
고전 16:18, 삿 9:9.

어디든지
몸에 대한 계시가
있는 곳에는
몸을 의식하는 것이 있고,
어디든지
몸을 의식하는 것이
있는 곳에는
개인주의적인 생각과 행동이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가
몸을 알기 원한다면,
우리의 죄악된 생명과
타고난 생명에서
구출되어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개인주의적인 생명에서도
구출되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세상과 대립되시고,
그 영께서
육체와 대립되시며,
주님께서
마귀와 대립되시듯이
몸 또한
개인과 대립된다.

우리는
머리에게서 독립할 수 없듯이
몸에게서도 독립할 수 없다.

개인주의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몸의 원수는
자아,
곧 독립적인 ‘나’이다
― 마 16:21-26.

우리가
몸 안에서
건축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아를
유죄 판결하고
부인하고
거절하며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몸,
곧 형제자매들을
의지해야 한다
― 출 17:11-13, 행 9:25, 고후 11:33.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몸의 다른 지체는 알 것이고,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몸의 다른 지체는 볼 것이며,
내가 할 수 없는 무언가를
몸의 다른 지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동료 지체들의 도움을
거절한다면
그리스도의 도움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 고전 12:12.

개인주의적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조만간 말라 버릴 것이다.

몸의 지체로서
우리는
다른 지체가
우리를 제한하도록
허락해야 하며,
우리의 분량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몸이
자라고
발전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구 조건은
우리가
자신의 분량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 엡 4:7, 16.

머리는
몸 안에서
우리를
특별한 위치에 두시고,
우리에게
특별한 기능을
지정해 주신다
― 고전 12:18.

우리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일이나 체험이나 누림을
간증할 때,
반드시 분량 안에서
즉 어떤 제한 안에서
간증해야 한다.

우리는
일이 확산되기를
기대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제한 아래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한계 없이 확산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 고후 10:13-15.

우리가
그 영을 따라
일을 확산한다면,
항상 어떤 제한이
있을 것이다
― 고전 2:12-14.

내적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어느 정도까지만
일을 확산하고자 하신다는
의식을 가질 것이다.
어떤 지점을 넘어서
일을 확산할 때,
우리는
내적으로
평안을 가지지 못한다.

외적으로,
환경 안에서
주님은
어떤 일들을
일으키셔서
일의 확산을
제한하실 수 있다.
환경이
우리가
특정한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 롬 15:24.

바울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분량에 따라
움직이고 행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재어 주시고
측량해 주신
한계 안에
머물러야 한다
― 고후 10:13.

교회의 봉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만큼만
측량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지나치게 뻗어 나가지
말아야 한다
― 롬 12:3-4, 6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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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롬 12:4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고전 12:18-20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분께서 뜻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각각
몸 안에 두셨습니다.
모두가 한 지체라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우리 각 개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생명을
몸에게 공급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능을 발휘할 때,
반드시 질서를 따라야 하며
규율이 있어야 한다.
몸 안의 질서는
성장과 사역에 있어서
중요하다.
… 집회에서
… 우리는
믿음의 분량대로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말해야 한다.
말할 때
우리는
분량을 넘는 말이 있는지,
말이 너무 길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 우리가 참으로
머리의 권위 아래 올 때,
머리는
몸 안에서
우리를
특별한 위치에 두시고,
우리에게
특별한 기능을
지정해 주신다.

우리는 결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배운 것을
간증할 때,
그 간증은
어떤 제한이나 분량을
넘지 말아야 한다.
고린도후서 10장 13절에서
말하는
분량은
하나님에 의해
제한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이나 체험을
우리의 분량에 맞게
할당하셨다.
더 나아가
그분은
누림도
우리에게 꼭 맞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일이나 체험이나 누림을
간증할 때,
반드시 분량 안에서
즉 어떤 제한 안에서
간증해야 한다.

고린도후서 10장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
우리는 비록
우리가
주님의 일이 확산되기를
기대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제한 아래
있는 법을
배워야 함을 본다.
우리는
한계 없이 확산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 종류의 확산은
분명 제한을 받으며
그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체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그 영을 따라
일을 확산한다면 항상
어떤 제한이
있게 되리라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내적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어느 정도까지만
일을 확산하고자 하신다는
의식을 가질 것이다.
더욱이 외적으로
환경 안에서
주님은
어떤 일들을 일으키셔서
일의 확산을
제한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지점을 넘어서
일을 확산할 때,
우리는 내적으로
평안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외적으로
환경은
우리가
특정한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주님은 특히
청년들을 제한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신다.
만일 청년들에게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주님은
그분을 섬기도록
그들을 분발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분발할 때,
주님은
그들을
제한하실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런 종류의 제한을
좋아하지 않는다.
…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처음에는
우리를 빠르게 하셨다가
나중에는
느리게 하시고,
처음에는
우리를 높이셨다가
나중에는
낮추신다.
우리가 내려갈 때
그분은
우리를
올리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높이 올라가면
그분은
우리를
훨씬 더 낮추실 것이다.
… 많은 청년들은
하나님께서
올렸다 내렸다 하시는 것을
참지 못한다.
몇 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 후에
그들은
그만두기를 원한다.
…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위에 있는 것도
항상 아래에 있는 것도
원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밤낮이 바뀌는
자연의 순환도
이것의 증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은 곳으로 이끄는
많은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어떤 청년들은
그들의 결혼 생활에 의해
밑으로 내려간다.
어떤 형제는
결혼하기 전에는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독수리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놀랍고 영광스러운
교회생활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교회생활은 더 이상
그에게
영광스럽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이렇게
활발한 형제를
잠잠하게 하기 위해
그의 결혼을
사용하신다.
많은 경우에
이런 형제들은
결혼 후
긴 기간 동안
아래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비록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활발하지는 않지만
다시 올라간다.
이것은
진보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교회의 봉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만큼만
측량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지나치게 뻗어 나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와
우리에게 허락된 영역을
알고,
거기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영역 안으로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바울과 같이
우리는
우리의 한계,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분량에 따라
움직이고 행해야 한다.

 

5일

고전 12:14-15
몸은
한 지체만이 아니라
많은 지체입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기 때문에
몸에 속하지 않았다.”
라고 말한다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고전 12:21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라고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몸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를 본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두 번째로 구원받은 것과
같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4절부터 36절까지는
지체로서
우리가
가지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잘못된 생각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나는 무엇 무엇이 아니다.
그러므로 몸에 속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이다
(15절).
이것은
다른 사람의 일을 부러워하여
자신을 경시하는 것이다.
둘째는,
“나는 당신이 필요하지 않다.”
라는 생각이다
(21절).
이 사람은
교만하여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경시한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모두
몸을 손상한다.

우리는 모두
몸의 의식을 갖고
다른 지체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 안에
살아야 한다.
어디든지
몸에 대한
계시가 있는 곳에는
몸을 의식하는 것이 있고,
어디든지 몸을
의식하는 것이 있는 곳에는
개인주의적인 생각과 행동이
자동적으로 제거된다.

아담의 생명은
단독적이고 독립적인 생명이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생명을 가졌을지라도,
그들 가운데는
교통이 없다.
…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개개인은
다 없어졌다.
우리가
몸의 생명을
알기 원한다면,
우리의
죄악된 생명과
타고난 생명에서
구출되어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개인주의적인 생명에서도
구출되어야 한다.
개인주의적인 것은
그 무엇도 영원히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모든 요소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자아에 대한
이상을 보는 것은
몸과 많은 관계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다.
회복은 결국
이 중요한 문제,
곧 몸의 건축에
이를 것이다.
몸의 원수는
자아이다.
몸에 대한
가장 큰 문제와
가장 큰 좌절과 반대도
자아이다.
자아가 있다면
몸은 없다.
몸이 있다면
자아는 없다.
몸이 건축되기 위해
자아, 곧 독립적인 혼은
반드시 처리되어야 한다.
자아는
독립적인 ‘나’이다.
독립적일 때
우리는
자아 안에 있고,
몸은
사라지며,
화평은
없어진다.

우리는
몸 안에서
건축되어야 하지만,
이 건축의 장애물은
주님의 처리를 받아야 할
우리 안에 있는
마지막 한 가지인
우리의 자아이다.
우리가
몸 안에서
건축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자아를
유죄 판결하고
부인하고
거절하며
버려야 한다.
매일 자아는
모든 일에서
부인되어야 한다.
자아가 부인될 때
비로소 몸을
가지게 될 것이고
몸의 참된 지체가
있게 될 것이다.

자아는
독립적이기 때문에
몸의 건축에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몸,
곧 형제자매들을
의지해야 한다.
형제자매들에게서 독립적일 때
우리는
자아,
곧 독립적인 혼 안에
있게 된다.
오늘 우리가
몸에게서 독립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것이다.
… 우리의 체험을 살펴보면,
우리는
형제자매들에게서 독립적이고
분리되어 있을 때,
하나님에게서도 독립적이고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만일 우리가
단지 믿는 이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라면,
우리는 반드시
다른 지체의 제한을
받아야 한다.
… 우리 각 사람이
자신의 분량을 알고
또한 이 분량을
넘어서지 않는 것은
몸의 성장에서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지체에게
보호가 될 뿐 아니라,
또한 각 지체에게
제한이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에 불과하므로
몸의 제한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길을 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우리는
다른 형제자매들과 섞이기를
배워야 한다.

 

4일

고전 12:12
왜냐하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가 한 몸인 것같이,
그리스도도
그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각 사람이
서로 지체들입니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두 방면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는
나사렛 사람 예수님인
개인적인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에 교회를 더한
단체적인 그리스도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가 한 몸인 것같이,
그리스도도
그와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는
고린도전서 12장 12절은
그리스도의 두 번째 방면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 이외의 것은
그 무엇도
교회가 아니다.
한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오직 한 가지만이
교회의 일부분인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단체적인 그리스도이며,
교회 가운데에는
오직 그리스도만 있다.
우리가
떡 떼는 집회에서 떼는
떡의 그 부분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부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더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산출된 것이다.
…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
구성체이다.
교회는
단체적인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개인적이지만,
지체가 되는 것은
단체적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만,
지체가 되는 것은
몸을 위한 것이다.
성경에는
많은 대조적인 말이 있다.
예를 들면,
깨끗함과 더러움,
거룩함과 속됨,
승리와 패배,
성령과 육체,
왕국과 세상,
그리스도와 사탄,
영광과 수치 등이다.
이런 것들은
서로 대조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몸’과 ‘개인’은
서로 대조된다.
아버지와 세상이 대립되고,
성령과 육체가 대립되며,
주님과 마귀가 대립되듯이,
몸은 개인과 대조된다.
사람이 일단
그리스도의 몸을 보게 되면,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더 이상 자신을 위하지 않고
몸을 위하게 된다.
우리가
구원받아
개인주의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몸 안에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리가 아니라
영역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가르침이 아니라
생명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몸에 대한
진리를 가르치지만
몸의
생명을 아는 사람이 적다.
그리스도의 몸은
또 하나의
전혀 다른 영역 안에 있는
체험이다.
우리가
로마서를 이해할 수 있지만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에베소서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계시를 보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알고
그리스도의 몸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계시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다만
하나의 지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교만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보는 것에 달려 있다.
자신이
몸의 지체인 것을
본 이들은
분명히 몸을
귀히 여기고
다른 지체를
존중할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자신의 좋은 점만
보지 않으며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길 것이다.

우리 사람의 몸을
생각해 보자.
사람의 몸의 지체는
개별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
몸이
한 손이나 한 발을 의존해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몸이
한 지체를 잃는다면,
그 몸은
온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다.
모든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한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한 실재이다.
교회생활도 역시
한 실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같다’고
말하지 않고,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말한다.
몸 밖에 있는 것은
우리 몸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우리 몸에
옷을 입힐 수 있지만,
옷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되게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서 나온
타고난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신다
(골 3:11).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아는 것을
좌절시킨다.
죄는
그리스도를 보는 것을
방해하고,
타고난 생명은
그리스도의 몸을 보는 것을
방해한다.

 

3일

시 73:16-17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살전 3:8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님 안에 굳게 선다면,
이제
우리가 살 것입니다.

한 사람이
나에게
“저의 최근 생활은
예전만 못합니다.
… 예전의 기쁨이
사라지고
예전의 원동력도
없어진 것 같습니다.
왜 저의 생활은
예전만 못할까요?”
라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그 원인은
당신이
개인적인 생활을
너무 오랫동안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몸의 생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한 지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지체들의 공급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자연히 그는
몸의 공급을
받을 수 없다.
다른 지체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지체는
하나도 없다.
다른 지체에게서 벗어나
단독으로
생활할 수 있는 지체는
하나도 없다.

로마서 12장 3절은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이상으로
자신을
더 높게 생각하지 말고”
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을
높게 평가하고
다른 사람은
우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지체를
경시하거나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다 실패하여 넘어질지라도
자신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험이 찾아왔을 때,
그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실패하고 넘어졌다.
대체로
자신을 높게 평가하고
다른 지체를 경시하는 사람은
머지않아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각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 없이
살 수 없으므로,
더욱 다른 지체들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눈과 귀와 손과 발은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머리가 그리스도이고
몸도 그리스도이다.
각 지체가 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일부분이다.
만일 내가
몸 안에서
다른 지체의 도움을
거절한다면,
곧 그리스도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그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머리에게서
독립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몸에게서도
독립할 수 없다.
개인주의는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몸 안에 있는
다른 지체는 알 수 있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몸 안에 있는
다른 지체는 볼 수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몸 안에 있는
다른 지체는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필요를
몸 안에 있는
다른 지체들에게서
공급받아야 한다.
나는 반드시 계속해서
몸의 교통을
적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몸이 바로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려진
가장 엄중한 징계는 바로
교통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이것은
가장 엄중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각각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분리되어도
잘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를
몸의 지체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떠나서는
전진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공급이
실재임을
보아야 하며,
몸 안에 살고
몸 안에서 공급받기를
배워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등잔대가
성소 안에 있었다.
그래서
사람이
빛을 보려면
성소에 들어가야 했다.
신약 시대에는
교회가 바로
성소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빛을 보려면 반드시
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빛은
자주
교회 집회 안에서,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특별하게 비춘다.
이 빛은
개인이 얻는 빛보다
훨씬 더 강하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소는 바로
교회이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빛도
교회 가운데 있다.
사람은 오직
교회 안에 와야
빛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은 다
그분의 몸 안에 있다.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은
머지않아 모두
메마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몸 안에 사는 한,
우리는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
몸의 공급을 받을 것이다.
지체로서
우리 모두는
몸의 공급을
귀하게 여기고
각 지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몸 안에서,
곧 몸의 공급 안에서
살기를
배워야 한다.

 

2일

눅 11: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에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도록 하시며,
왕국이
오게 하시며,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눅 11:13
여러분이 악할지라도
좋은 선물을
자녀에게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메마르고
전진할 길이 없을 때,
그 상황을 돌파하려면
먼저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다른 형제자매들이 필요하다.
언젠가 나는
백칠십육 일 동안 병을 앓았다.
나는 혼자서 매일
병의 치료를 위해 기도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기력이 다했을 때,
나는
평소에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형제를 청해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부탁했다.
기이하게도 나는
그의 중보 기도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단기간에
나의 상태가 나아졌다.
… 그리스도의 몸의 공급은
실재이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이 분투한다 해도
많은 일들을
당신 혼자서 해결할 길이 없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몸 안에 놓으면
기이하게도 즉시 해결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의 공급이다.
…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인
우리 역시
다른 지체들을 통해
공급을 얻는다.
그러므로 다른 지체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누가복음 11장
1절부터 13절까지에서
우리는
기도에 관한
사람-구주의 가르침을 본다.
이 부분을
주의 깊게 거듭해서 읽는다면,
우리는
기도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
주님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를 구했다.
그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에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도록 하시며,
왕국이
오게 하시며,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니
우리의 죄들도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하십시오.”
(눅 11:2-4)
… 우리가 거듭해서
이렇게 기도할 때,
결국 우리는 분명히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다만
그분과 함께
그분의 풍성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도록
기도해야 하며,
그런 다음
하나님 안에 있는 이들로서
하나님과 그분의 풍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결점에 대해
세부적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니
우리의 죄들도
용서하여 주시고”
라고 하는 기도는
포괄적이다.
이렇게 기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기도를 통해
더욱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 공급을 받을 것이다.

생명 공급은
누가복음 11장
11절부터 13절까지에
암시되어 있다.
“여러분 중에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습니까?
또 아들이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습니까?
여러분이 악할지라도
좋은 선물을
자녀에게 줄 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여기서 생선과 달걀과 성령은
생명 공급을 암시한다.
5절에서는
떡이
생명 공급을 암시한다.
떡을 포함한다면,
생명 공급을 암시하는
네 가지 항목이 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우리의 공급으로서
그분의 풍성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분 안에 머물 때
우리는
그분의 풍성,
곧 그분의 영 안에 체현된
풍성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성령을
떡과 생선과 달걀로 상징된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먹을 뿐 아니라
우리가 돌보고 있는
모든 이들을 먹일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한 지체에 불과하며,
다른 지체들이 없다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몸 안에 있는 각 지체는
다른 지체와 연합해야
한 몸이 된다.
몸 안에 있는 각 지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나누어질 수 없다.
지체와 지체는 반드시
서로 공급하고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지체들이 살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단독적인 생활을 한다면,
그는 머지않아 약해지고
메마르게 될 것이다.
… 만일 우리가
주님을 따라서
전진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몸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공급을
알아야 하고,
또한 그 공급을
적용해야 한다.
온몸은
몸의 지체들이
서로 의지하는 것을 통해
건축된다.

 

신언노트, 2019 04 28

그 몸의 그 공급,
 그 몸의 그 지체들,
 또 그 몸의 그 제한

그 몸의 그 공급은
 그 복합적인 연고
 (ointment; 관유),
 곧 그 거룩한 바르는 기름에 의하여
 예표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의
 그 풍부한
 (the bountiful;
 아낌없이 주는[너그러운] 그)
 공급입니다:

그 복합적인 영께서
 그 몸 안에
 또 (그 몸을) 위하여
 또 그 몸을 건축하는
 제사장의 그 봉사를 위하여
 계십니다.

시편 133편에 따라,
 하나임 안에 함께 거주하는
 형제들의
 그 측량할 수 없는
 (the inestimable;
 많아서 헤아릴 수 없는 그)
 좋음과
 또 헤아릴 수 없는
 (incaculable;
 셈할 수 없이 많은)
 즐거움이
그 복합적인 귀중한 연고에
 비유됩니다.

우리는
 그 지체들의
 그 중보 기도와
 (the intercession;
 남을 위한 기도와[간청과])
 또 교통에 의하여
 (by … fellowship)
 그 영의 그 공급을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메마르고
 (dry;
 건조하고, 고갈되고, 결실이 없고)
 계속하여 갈
 길을 가지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가 통과할 수 있기 전에
 (before we can get through;
 … 도달할[끝낼, 이겨서 나아갈] 수 있기 전에)
 우리를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다른 형제들과 또 자매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 안으로 기도하여
 (to pray ourselves into God
 우리 스스로[우리가 직접] 기도하여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 안으로 넣는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의 공급이신
 생명 주시는 그 영을
 받아들여서
그 몸의 건축함을 위하여
 우리 자신들과
 또 우리의 돌봄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먹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몸의 그 공급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끊임없이
 그 몸의 그 교통을
 활용해야만 합니다
 (must … avail ourselves of;
 그 몸의 그 교통에서
 우리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게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 몸 안에 사는 한,
우리는
 우리의 상태가
 어떻든지 상관없이,
 그 몸의 그 공급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빛을 보기 원한다면,
그는
 그 교회,
 곧 그 성소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 전체의 몸이
 그 지체들 사이의
 그 상호 의존을 통하여
 건축됩니다.

그 몸 안에
 독립이나
 (independence;
 자립이나, 자주나, 독립심이나)
 또는 개인주의가
 (individualism;
 개성이, 독자성이, 이기주의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지체들이고,
또 지체들은
 그 몸으로부터의
 분리 안에서
 (in detachment;
 이탈 안에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믿는 이마다
 (Every believer;
 각각의 모든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그 몸의
 한 지체이고,
또 각각의 지체마다
 (every member)
 없어서는 안 됩니다
 (indispensable;
 필수적입니다, 절대로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참으로
 그 몸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를
 본다면
 (see; 안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두 번째로
 (a second time; 다시)
 구원받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비밀”,
 워치만 니 전집, 44권,
 특별 집회, 메시지 및 대화 기록(4), 98쪽).

그들이
 그 몸의 지체들이라는 것을
 보는(see; 아는) 사람들은
확실히
 (surely;
 분명히, 반드시)
 그 몸을
 소중히 여길 것이고
 (will … treasure)
 그 다른 지체들을
 존중할 것입니다.

몸-계시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몸-의식이 있고,
또 몸-의식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개인주의적인
 (individualistic; 이기주의적인)
 생각과 행동이
 배제됩니다
 (are ruled out;
 제외[제거]됩니다, 불가능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몸을 아는 것을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 많은(sinful) 생명과
 또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서부터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개인주의적인 생명에서부터의
 구출을
 (deliverance;
 구조를, 구제를, 해방을)
 필요로 합니다.

그 아버지께서
 그 세상에 대비하여 계시고
 (is versus …;
 … 대對하여 계시고, 대조되시고, 반대하시고),
그 영께서
 그 육체에 대비하여 계시며,
또 그 주님께서
 그 마귀에 대비하여 계시는 것과 똑같이(Just as),
또한 그 몸도
 그 개인에(individual) 대비하여 있습니다.

우리가
 그 머리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는 것과 똑같이,
우리가
 그 몸에서부터도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개인주의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in the sight of God)
 혐오스럽습니다
 (hateful;
 가증스럽습니다, 불쾌합니다):

그 몸의 그 적은
 그 자아,
 곧 그 독립적인 ‘나는(I; 내가, 나, 자아)’,
 곧 그 독립적인 ‘나를(me; 나에게)’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몸 안에서
 건축되려고 한다면,
그 자아가 반드시
 유죄 판결되어야만 하고,
 부인되어야만 하며(… denied),
 거절되어야만 하고(… rejected),
 또 포기되어야만 합니다
 (must be … renounced;
 버려져야만[부정{부인}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위에뿐 아니라
 또한 그 몸 위에,
 곧 그 형제들과 또 자매들 위에
 의존해야만 합니다
 (should be dependent;
 의지해야만[종속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을,
 그 몸의 한 다른 지체가
 (another member;
 또 하나의[제2의, 다른] 지체가)
 알 것입니다(will know);
내가 볼 수 없는 무엇을,
 그 몸의 한 다른 지체가
 볼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무엇을,
 그 몸의 한 다른 지체가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동료 지체들의
 그 도움을
 거절한다면(refuse),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도움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are refusing;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만간
 (Sooner or later; 머잖아)
 개인주의적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말라 버릴 것입니다
 (will dry up;
 바싹 마를[{공급이} 고갈될, 바닥날,
 약해질, {갑자기} 침묵할] 것입니다).

그 몸의 그 지체들로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들이
 그 다른 지체들에 의하여
 제한받는 것을
 허락해야만 하고,
우리의 분량을
 (measure;
 치수를, 크기를, 양을,
 정도를, 척도를, 기준을)
 넘어서 가지 말아야만 합니다
 (must …, not going beyond;
 넘지[넘어서지, 초과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 몸의
 그 성장과 또 발달을 위한
 한 기본적인 요구는
 (a basic requirement;
 한 기초적인 필요조건은)
우리가
 우리의 분량을 인식하고
 (recognize;
 알아보고, 알고, 인정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머리께서
 그 몸 안에 있는
 우리의 특별한 장소 안에
 우리를 두시고
또 우리를
 우리의 특별한 기능에
 주목하게 하십니다
 (points us to our special function;
 …을 향하게 하십니다[가리키십니다],
 우리에게 …을 강조[지적, 지목]하십니다,
 우리에게 …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
 체험,
 또는 주님을 누림에 관하여
 한 간증을 할(give) 때,
우리는 반드시
 분량 안에서,
 즉, 한 특정한(a certain) 한계 안에서
 간증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 일이 확산되는 것을(to spread)
 기대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어떻게
 하나님의 제한 아래에 있는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분량 밖에 있는(without measure)
 한 확산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영을 따라
 그 일을 확산한다면,
항상 한 특정한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내적으로,
 주님께서
 오직 한 특정한 정도까지
 그 일을 확산하시는 것을
 의도하신다는
 그 의식을
 우리가 가질 것입니다
 (shall; 가져야 합니다);
내적으로,
 한 특정한 지점을 넘어서
 그 일을 확산하는
 그 평안을
 우리가
 가지지 못합니다.

외적으로,
 그 환경 안에서,
주님께서
 특정한 일들이
 그 일의 그 확산을
 제한하도록
 야기하실 수 있습니다;
그 환경이
 우리로 하여금
 한 특별한
 (particular;
 독특한, 특정한, 개별적인, 까다로운)
 경계선을
 넘어서 가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같이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측량하셨는지에 따라
 (… how much … has measured;
 측정하셨는지에[분량을 재셨는지에] 따라,
 평가[판단]하셨는지에 따라)
 움직이고 또 행동해야만 하며,
하나님의
 자를 대고 줄을 그으심
 (ruling;
 판결하심, 통치하심),
 곧 하나님의
 측량하심의
 그 한계들 안에
 머물러야만 합니다.

그 교회 봉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그렇게 많이
 (only so much;
 오직 그만큼)
 측량해 덜어 내셨다는 것을
 (that … has measured out;
 재서 때어내셨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고,
또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너무 잡아 늘리지 말아야만 합니다
 (should not overstretch;
 지나치게 펼치지[뻗지, 과장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1일

시 133:1-2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빌 1:19
왜냐하면
여러분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이러한 일이 결국에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편에서
믿는 이들이
하나 안에
함께 거하는 것이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배로운 관유와,
시온의 산들에 내리는
한없이 즐거운
헤르몬의 이슬에
비유된다.

관유는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한 것이다.
‘몸’에서 분리되거나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관유를 체험할 수 없다.
시편 133편에 있는
그림에 따르면,
관유는
머리 위에 있다.
그리고 관유는
수염으로 퍼져 나가서
옷깃까지 내려간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관유를 체험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 만일 우리가
교회와 하나라면,
가정에서도 혼자
주님을
합당하게 접촉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교회와 분리되어 있다면,
우리가
주님을 접촉하는 상황은
아주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기름 바름은
개인적인 지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머리와 ‘몸’을 위한 것이며,
심지어 ‘몸’을 가진
머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1장 19절에서
‘여러분의 간구’라는 말은
몸의 공급을 가리킨다.
외적인 상황에 따르면
바울은
감옥에 있었지만,
사실상 그는
몸 안에 있었다.
감옥은
그를
몸으로부터 격리하거나
몸의 공급으로부터 끊을 수 없었다.
바울은
자신이
몸 안에 있고,
몸의 지체들이
그를
공급하고 지지하고
그와 함께 서 있다는
분명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1장 19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의 간구를
먼저 언급한 후에
그 영의 넘치는 공급에 대해
언급했다.
… 바울이
몸의 공급을
그 영의 넘치는 공급 앞에
언급한 것은
그 영이
몸 위에 있기 때문이다.
관유가
아론의 머리 위에 부어져
몸에 흐르는 것에 대해 말하는
시편 133편은
이것을 설명해 준다.
시편 133편은
관유,
즉 복합되신 영의
넘치는 공급이
몸 위에 있다는
사실을 묘사해 준다.
바울은
자신이
몸 전체가 아니라
단지 몸의 한 지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의 지체로서
그는
몸의 공급이 필요했다.
만일 몸이
그를 공급하려고 한다면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이
몸을 통하여
그에게 올 것이다.

우리는 간혹
어떤 형제에게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우리는
그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해도,
이 기도는
효과가 적을 수 있다.
이처럼 효과가 적은 이유는
기도할 때
우리가
몸과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몸과 떨어져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기도는 심지어
메마르게 되고
우리의 중보 기도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기름 바름은
우리 개개인 위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몸 위에
임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30장에 따르면,
복합적인 관유는
성막과 제사장들에게
바르기 위한 것이다.
복합되신 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몸,
곧 하나님의 성막과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
곧 제사장 직분을
위한 것임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몸과 제사장 봉사에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영의 넘치는 공급을 얻기란
대단히 어렵다.

바울은
몸 안에 살았다.
그는
놀라운 사도였지만
여전히
성도들의 기도와 간구가 필요했다.
이것은
바울이
몸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더욱이 바울은 또한
제사장 직분에 참여했다.
그가
몸 안에,
곧 성막 안에 있었고
제사장 직분,
곧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는
몸 위에 임하는
관유의 흐름을
받을 수 있는
합당한 위치에 있었다.

만일 우리가
교회와 하나이고
제사장 봉사 안에 머문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의
풍성한 기름 바름을
누릴 것이다.
심지어 조금 기도하거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심지어 “아멘”이라고 말하기만 해도,
우리는
이 기름 바름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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