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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성도들에게 할당된 몫, 곧 그들의 누림을 위한 그들의 신성한 유업이심

The All-inclusive Christ
Being the Allotted Portion
of the Saints,
according to God’s choice,
as Their Divine Inheritance
for Their Enjoyment
하나님의 선택에 따르는,
그 성도들의 할당된 그 몫,
곧 그들의 누림을 위한
그들의 신성한 상속 재산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그리스도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는
좋은 땅으로 예표되시며,
이 땅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 신 8:9.

성도들에게 할당된
몫이신 그리스도(골 1:12)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좋은 땅 가나안을
그들의 유업으로 할당받은 것처럼
(수 14:1),
성도들이 받은
유산의 한 몫을 가리킨다.

신약의 믿는 이들이 받은
유업은
물질적인 땅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얻은
유업의 보증이시다
― 엡 1:14.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할당된 몫,
곧 우리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신성한 유업이시다
― 행 26:18하.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의 모든 백성을
목표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좋은 땅 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여정을 마친 후에야
그 목표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믿는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이미 그 목표 안에 있다
― 롬 6:3, 갈 3:27, 고전 1:30, 골 2:6.

좋은 땅은
오늘날 모든 것을 포함한 영이신
그리스도이다
(골2:6, 갈 3:14).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시면서
(딤후 4:22, 롬 8:16)
우리의 누림이 되신다.
이 영을 따라
행하는 것(롬8:4, 갈 5:16)이
신약의 중심이며 중점이다.

골로새서 2장
6절과 7절은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께서
비옥한 토양,
곧 우리가
뿌리를 내렸고
요소들을 흡수하여
자랄 수 있도록 하는
토양이심을
계시한다
― 고전 3:6, 9, 골 2:19.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렸다면
자연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할 것이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활동하고
움직이고 존재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유일한 길은
말씀 안에서
많은 기도와 함께
주님을 접촉하고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아래로 성장한 다음에
위로 열매를 맺는다
― 엡 5:26, 6:17-18, 사 37:3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건축되어
그리스도를 살아 나타낼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살아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표현인
교회 생활을
산출할 것이다
― 골 2:6-7.

매일 아침 우리는
주님을 흡수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십 분의 시간을 들이는 것도 좋지만,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새날의 시작에
삼십 분의 시간을 들여
주님을 누리는 것이다.
이렇게
아침에 시간을 들여
주님을 접촉하고
온종일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을 접촉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토양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우리 안으로 흡수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시간을 들여
모든 것을 포함한
땅이신 주님을
누려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비옥한 토양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요소들을
우리 안으로 흡수함으로,
우리의 체험에서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될 것이다
― 골 2:10상, 4:2.

우리가
토양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흡수하려면
부드러운 새 뿌리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낡아지게 두어서는 안 되며,
매일
신선하고 새로워지게 해야 한다
― 고후 4:16, 신 34:7, 눅 11:34-36,
행 3:19-20, 시 16:11.

우리는
우리의
상황과 상태와
실패와 약함을
잊어버리고
단순히 시간을 들여
주님을 흡수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인
그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그분 안에서
건축될 수 있다
― 눅 8:13, 마 14:22-23, 6:6.

민수기는
좋은 땅을 나누는 일을
미리 안배하는 것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풍성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함께 나누는 것에 대한
예표이다
― 민 32:1-42, 33:50-36:13.

좋은 땅은
두 바다(지중해와 사해)와
하나의 강(요단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두 바다와 강은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한다
― 민 34:2-3, 6, 12.

이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그분의 죽음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은
그분의 죽음의
범위와 영역 안에
있어야 한다
― 빌 3:7-11.

좋은 땅이
그 땅의 양편 경계를 이루는
물 사이에
솟아 있는 땅이라는 것은
그 땅이
들려 올려지고,
높이 올려진 땅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분은
부활 안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고
(요 20:22),
우리는
그분의 승천 안에서
그분의 풍성을 누린다
(엡 2:6, 골 3:1-4).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으려고 요구한 것(민 32:1-5, 33)은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가장 좋은 것을 받으려고 한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의 땅은
동쪽에서 오는
이방인 침략자들에게 점령된
이스라엘 땅 중에
첫 번째 부분이 되었다
(대상 5:25-26).
중간에 머무르고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약간의 축복에 만족하는 이들은
쉽게 원수에게 사로잡힐 것이다.

영적인 일들에서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그 일들을
주님의 손에 맡기고
주님께서
그분의 선택에 따라
하시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 찬송가 650장, 창 13:5-18.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요구한 땅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도
도달할 수 있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것은
옛사람을
처리하지 않고
장사하지 않는 것을
상징한다
(수 3:16-4:12).
우리는 오직
옛사람을
처리하고 장사한 뒤에라야
(롬 6:3-6)
우리의 누림을 위한
좋은 땅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소유할
위치를 가지게 된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에게
주어진 땅
(민 32:33),
곧 그들의 선택에 따른 땅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도
도달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사실상 가나안 좋은 땅의
일부가 아니었다
(민 34:14-15, 35:14).
이것은
예표에 있어서
그 땅이
그리스도의 죽음 밖에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여호와와 이스라엘에 대해 가진
의무(민 32:22)는
그들이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그 땅의 몫을
가지고자 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1-5절).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한
의무에 얽매이지 않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선택을
버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 스스로의 선택은
그리스도의 죽음 밖에
있는 것과 같고,
따라서 풍성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누림과
아무 관련이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부활과 승천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서
하늘에 속하고 높아진 분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없다
― 갈 2:20, 빌 3:10-11, 골 3:1-4.

‘요단강 동쪽 땅’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목표에
도달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표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승천의 위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유업,
곧 그리스도의
풍성의 영광을
받은 것은 아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는
그들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그들 자신의 누림을
너무나 많이 관심했으며,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이나 목표,
하나님의 왕국이나
하나님의 증거를
관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이나 평안이나 축복이나
물질적인 것들만
관심하고
기꺼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할 수 없고
또한 그분의
목표와 왕국과 증거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최선(最善)을
차선(次善)으로
대체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약속을 허락했으며
(민 32:16-19, 33),
그들이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싸우러 가서
그 땅을 정복하여
그들의 의무에서 벗어난다면
요단강 동쪽 땅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22절).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을 대표했다.
많은 때에
하나님은
이와 같은 약속들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신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요단강 동쪽 땅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축복과 돌봄 아래 있기를
원한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의
선택으로 인하여
그들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권리를 잃게 되었다
(민 32:18-19, 33).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편안함과 안락함을
갈급해한다면,
즉 우리 자신만을 관심하고,
중간에 멈추며,
주님을 추구하는 문제에서
우리의 권리들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권리들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한 권리들에 대한
어떤 보상도 없을 것임을
가리킨다.
이것은
영원한 손실이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
우리가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여
계속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표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분의 충만을
누린다면,
우리는
장래에
지극히 풍성하고도 특별한
누림을 가지게 될 것이다
― 빌 3:14.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몫으로 정하셨지만,
우리는 반드시
우리 내부에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을 쫓아냄으로써
하나님의 정하심과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깨뜨려야 하며,
우리 안에
우상숭배를 위한
어떤 여지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민 33:50-53, 요일 5:21).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건축물이자 왕국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를
참되게 누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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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plies on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성도들에게 할당된 몫, 곧 그들의 누림을 위한 그들의 신성한 유업이심”

신언노트2, 2019 09 22
하나님의 선택에 따르는,
그 성도들의 할당된 그 몫,

곧 그들의 누림을 위한
그들의 신성한 상속 재산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그리스도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의 모든 백성을

목표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좋은 땅 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여정을 마친 후에야
그 목표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믿는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이미 그 목표 안에 있다.

좋은 땅은

오늘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영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의 누림이 되신다.

이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이

신약의 중심이며 중점이다.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유일한 길은

말씀 안에서

많은 기도와 함께

주님을 접촉하고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우리는
주님을 흡수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십 분의 시간을 들이는 것도 좋지만,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새날의 시작에
삼십 분의 시간을 들여
주님을 누리는 것이다.

이렇게
아침에
시간을 들여
주님을 접촉하고

온종일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을 접촉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토양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우리 안으로 흡수할 것이다.

우리가
토양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흡수하려면

부드러운 새 뿌리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낡아지게 두어서는 안 되며,

매일
신선하고 새로워지게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과 상태와
실패들과 약함들을
잊어버리고

단순히 시간을 들여
주님을 흡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몸,
곧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을
건축함을 위하여

우리가
그분 안에서.그분으로
건축될 수 있습니다.

좋은 땅은

두 바다(지중해와 사해)와
하나의 강(요단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두 바다와 강은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그분의 죽음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은

그분의 죽음의
범위와 영역 안에
있어야 한다.

좋은 땅이
그 땅의 양편 경계를 이루는
물 사이에
솟아 있는 땅이라는 것은

그 땅이
들려 올려지고,
높이 올려진 땅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분은
부활 안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고,

우리는
그분의 승천 안에서
그분의 풍성을 누린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으려고 요구한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가장 좋은 것을 받으려고 한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중간에 머무르고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약간의 축복에 만족하는 이들은

쉽게 원수에게 사로잡힐 것이다.

영적인 일들에서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그 일들을
주님의 손에 맡기고

주님께서
그분의 선택에 따라
하시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에게
주어진 땅,

곧 그들의 선택에 따른 땅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도
도달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사실상 가나안 좋은 땅의
일부가 아니었다.

이것은
예표에 있어서

그 땅이
그리스도의 죽음 밖에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 스스로의 선택은

그리스도의 죽음 밖에
있는 것과 같고,

따라서 풍성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누림과
아무 관련이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부활과 승천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서

하늘에 속하고 높아지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없다.

‘요단강 동쪽 땅’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목표에
도달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표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승천의 위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유업.그 부유한 상속 재산,
곧 그리스도의
풍성의 영광을.그 부의 그 영광을
받은 것은 아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는

그들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그들 자신의 누림을
너무나 많이 관심했으며,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이나 목표,
하나님의 왕국이나
하나님의 증거를
관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이나 평안이나 축복이나
물질적인 것들만
관심하고

기꺼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할 수 없고

또한 그분의
목표와 왕국과 증거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최선(最善)을.the best.그 가장 좋은 것을
차선(次善)으로.the second best.그 두번째로 좋은 것으로
대체하지.대신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요단강 동쪽 땅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축복과 돌봄 아래 있기를
원한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의
선택으로 인하여

그들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권리를 잃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편안함과 안락함을
갈급해한다면.lust.열망한다면,

즉 우리 자신만을 관심하고,

중간에.halfway.도중에.불완전하게 멈추며,

주님을 추구함의 그 문제 안에서
우리의 권리들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권리들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한 권리들에 대한
어떤 보상도.compensation.벌충도.메움도 없을 것임을

가리킨다.

이것은
영원한 손실이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
우리가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표 안으로
지속적으로.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서

그분의 충만을
누린다면,

우리는
그 장래에

지극히 풍성하고도.부유하고 특별한
누림을 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몫으로 정하셨지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의.other than.이외인.가 아닌
우리 안에 있는
각각의 모든 것들을 쫓아냄으로써.몰아냄에 의하여

하나님의 정하심과
협력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깨뜨려야.파괴해야 하며,

우리 안에
우상들의 숭배를 위한
어떤 여지도.ground.땅을.영역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오직 그 때에만.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분의 건축물과 또 그분의 왕국인
그 교회를 위하여.for.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진짜 누림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언노트, 2019 09 22
하나님의 선택에 따르는,
그 성도들의 할당된 그 몫,
곧 그들의 누림을 위한
그들의 신성한 상속 재산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그리스도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는
좋은 땅으로 예표되시며,
이 땅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 신 8:9.

성도들에게 할당된
몫이신 그리스도(골 1:12)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좋은 땅 가나안을
그들의 유업으로 할당받은 것처럼
(수 14:1),
성도들이 받은
유산의 한 몫을 가리킨다.

신약의 믿는 이들이 받은
유업은
물질적인 땅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얻은
유업의 보증이시다
― 엡 1:14.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할당된 몫,
곧 우리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신성한 유업이시다
― 행 26:18하.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의 모든 백성을

목표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좋은 땅 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여정을 마친 후에야
그 목표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믿는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이미 그 목표 안에 있다
― 롬 6:3, 갈 3:27, 고전 1:30, 골 2:6.

좋은 땅은
오늘날 모든 것을 포함한 영이신
그리스도이다
(골2:6, 갈 3:14).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거하시면서
(딤후 4:22, 롬 8:16)
우리의 누림이 되신다.

이 영을 따라
행하는 것(롬8:4, 갈 5:16)이
신약의 중심이며 중점이다.

골로새서 2장
6절과 7절은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께서
비옥한 토양,
곧 우리가
뿌리를 내렸고
요소들을 흡수하여
자랄 수 있도록 하는
토양이심을
계시한다
― 고전 3:6, 9, 골 2:19.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렸다면
자연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할 것이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활동하고
움직이고 존재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유일한 길은

말씀 안에서
많은 기도와 함께
주님을 접촉하고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아래로 성장한 다음에
위로 열매를 맺는다
― 엡 5:26, 6:17-18, 사 37:3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건축되어
그리스도를 살아 나타낼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살아 나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표현인
교회 생활을
산출할 것이다
― 골 2:6-7.

매일 아침 우리는
주님을 흡수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십 분의 시간을 들이는 것도 좋지만,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새날의 시작에
삼십 분의 시간을 들여
주님을 누리는 것이다.

이렇게
아침에
시간을 들여
주님을 접촉하고
온종일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을 접촉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토양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우리 안으로 흡수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시간을 들여
모든 것을 포함한
땅이신 주님을
누려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비옥한 토양이신
그리스도의 모든 요소들을
우리 안으로 흡수함으로,
우리의 체험에서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될 것이다
― 골 2:10상, 4:2.

우리가
토양이신 그리스도의
풍성을 흡수하려면
부드러운 새 뿌리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낡아지게 두어서는 안 되며,
매일
신선하고 새로워지게 해야 한다
― 고후 4:16, 신 34:7, 눅 11:34-36,
행 3:19-20, 시 16:11.

우리는
우리의
상황과 상태와
실패들과 약함들을
잊어버리고

단순히 시간을 들여
주님을 흡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몸,
곧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을
건축함을 위하여

우리가
그분 안에서.그분으로
건축될 수 있습니다
― 눅 8:13, 마 14:22-23, 6:6.

민수기는
좋은 땅을 나누는 일을
미리 안배하는 것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풍성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함께 나누는 것에 대한
예표이다
― 민 32:1-42, 33:50-36:13.

좋은 땅은
두 바다(지중해와 사해)와
하나의 강(요단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두 바다와 강은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한다
― 민 34:2-3, 6, 12.

이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그분의 죽음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은
그분의 죽음의
범위와 영역 안에
있어야 한다
― 빌 3:7-11.

좋은 땅이
그 땅의 양편 경계를 이루는
물 사이에
솟아 있는 땅이라는 것은

그 땅이
들려 올려지고,
높이 올려진 땅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분은
부활 안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고
(요 20:22),
우리는
그분의 승천 안에서
그분의 풍성을 누린다
(엡 2:6, 골 3:1-4).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으려고 요구한 것(민 32:1-5, 33)은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가장 좋은 것을 받으려고 한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들의 땅은
동쪽에서 오는
이방인 침략자들에게 점령된
이스라엘 땅 중에
첫 번째 부분이 되었다
(대상 5:25-26).

중간에 머무르고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약간의 축복에 만족하는 이들은

쉽게 원수에게 사로잡힐 것이다.

영적인 일들에서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그 일들을
주님의 손에 맡기고

주님께서
그분의 선택에 따라
하시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 찬송가 650장, 창 13:5-18.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요구한 땅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도
도달할 수 있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것은
옛사람을
처리하지 않고
장사하지 않는 것을
상징한다
(수 3:16-4:12).

우리는 오직
옛사람을
처리하고 장사한 뒤에라야
(롬 6:3-6)

우리의 누림을 위한
좋은 땅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소유할 위치를
가지게 된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에게
주어진 땅
(민 32:33),
곧 그들의 선택에 따른 땅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도
도달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사실상 가나안 좋은 땅의
일부가 아니었다
(민 34:14-15, 35:14).

이것은
예표에 있어서
그 땅이
그리스도의 죽음 밖에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여호와와 이스라엘에 대해 가진
의무(민 32:22)는

그들이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그 땅의 몫을
가지고자 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1-5절).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 대한
의무에 얽매이지 않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선택을
버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 스스로의 선택은

그리스도의 죽음 밖에
있는 것과 같고,

따라서 풍성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누림과
아무 관련이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부활과 승천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서

하늘에 속하고 높아진 분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없다
― 갈 2:20, 빌 3:10-11, 골 3:1-4.

‘요단강 동쪽 땅’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영적인 목표에
도달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표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승천의 위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유업,
곧 그리스도의
풍성의 영광을
받은 것은 아니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는

그들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그들 자신의 누림을
너무나 많이 관심했으며,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이나 목표,
하나님의 왕국이나
하나님의 증거를
관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이나 평안이나 축복이나
물질적인 것들만
관심하고

기꺼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할 수 없고
또한 그분의
목표와 왕국과 증거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최선(最善)을.the best
차선(次善)으로.the second best
대체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약속을 허락했으며
(민 32:16-19, 33),

그들이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싸우러 가서
그 땅을 정복하여
그들의 의무에서 벗어난다면

요단강 동쪽 땅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22절).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을 대표했다.

많은 때에
하나님은
이와 같은 약속들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신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요단강 동쪽 땅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축복과 돌봄 아래 있기를
원한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의
선택으로 인하여

그들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권리를 잃게 되었다
(민 32:18-19, 33).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편안함과 안락함을
갈급해한다면,

즉 우리 자신만을 관심하고,

중간에.halfway.도중에.불완전하게 멈추며,

주님을 추구함의 그 문제 안에서
우리의 권리들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권리들을
회복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한 권리들에 대한
어떤 보상도.compensation.벌충도.메움도 없을 것임을
가리킨다.

이것은
영원한 손실이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
우리가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표 안으로
지속적으로.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서

그분의 충만을
누린다면,

우리는
그 장래에

지극히 풍성하고도.부유하고 특별한
누림을 가질 것입니다
― 빌 3:14.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누림을 위한
우리의 몫으로 정하셨지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의.other than.이외인.가 아닌

우리 안에 있는
각각의 모든 것들을 쫓아냄으로써.몰아냄에 의하여

하나님의 정하심과
협력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우상들을
깨뜨려야.파괴해야 하며,

우리 안에
우상들의 숭배를 위한
어떤 여지도.ground.땅을.영역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민 33:50-53, 요일 5:21).

오직 그 때에만.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분의 건축물과 또 그분의 왕국인
그 교회를 위하여.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참되게 누릴 수 있게 된다.진짜 누림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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