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안에서 가장 높은 이름, 곧 가장 위대한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이다.
주님은 자신을 비우셔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시고 자신을 극도로 낮추셨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셨다.
이렇게 높아지심으로 주님은 각각의 모든 이름들 위에 있는, 즉 일컬어지는 각각의 모든 이름들보다 훨씬 위에 있는 그 이름을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때로부터, 역사상 주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높은 이름은 결코 없었다.
그 이름은 주 예수님의 인격과 일에 있어서 그분께서 무엇이신지의 총합의 표현이다(그분의 존재 전체를 표현한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는 사실상 ‘주님 자신 안에서’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이름이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맡기셨고, 우리가 그분의 이름에 참여하며, 주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그분의 이름 안에서 하는 모든 일을 주님께서 기꺼이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하나이며,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것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님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은 그분의 인격 안에, 그분 자신 안에 있는 것이며, 그분의 온 존재의 영역과 요소 안에 있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은 주님에 의해 살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요한복음에 계시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은 신성한 삼일성과 관련된다.
요한복음 5장 43절은 아들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고 말하고, 14장 26절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다고 말한다(각주 참고). 이 두 절에서 신성한 삼일성이 계시된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는 것은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과 하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으며,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하셨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안에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이셨고 아버지에 의해 사셨으며,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일하셨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고,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그 영을 보내셨다.
그 영께서 아버지에 의해 아들의 이름 안에서 보내어지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그 영을 보내신 분이시라는 것을 암시한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그 영을 보내셨다.
아들께서 아버지에게서 그 영을 보내신 것과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신 것은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모두 그 영을 보내신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교회 안의 봉사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해야 한다.
이름은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하는 것은 그분의 인격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일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기본적인 방면이다.
우리는 우리 일상생활의 평범한 일들을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봉사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하는 것이 요구된다.
우리의 봉사는 반드시 주님에 의해 시작되고 주님의 갈망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교회 건축을 위한 봉사는 생명을 공급하는 봉사, 곧 다른 이들에게 신성한 생명을 공급해 주는 봉사이다.
교회 봉사는 생명을 공급하는 것인데, 이는 교회 봉사가 생명의 봉사이기 때문이다.
봉사하는 이들로서 우리는 생명을 공급할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말, 곧 우리의 모든 말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어야 한다.
어떤 나쁜 말도 우리의 입 밖에 내지 말고, 참된 말을 하고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말만 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하여 심판 날에 낱낱이 진술해야 할 것입니다.” ― 마 12:36.
무익한 말은 소용없는 말, 효과가 없는 말이며, 긍정적인 기능이 없고, 쓸모없고, 유익이 없고, 열매가 없는 헛된 말이다.
무익한 말은 장황한 말, 어울리지 않는 말, 필요 없는 말, 잡담하는 말이다.
그러한 말을 한 사람들은 심판 날에 그 모든 말에 대하여 낱낱이 진술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준다.
믿는 이들이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함을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지 못한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의 연결 안에서 살고 있고, 주님과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도록 허락해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기도하신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서 주 예수님은 주님 안에 사는 이들이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한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기도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하는 모든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똑같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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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지 못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주님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여 혹은 주님의 공로에 의지하여 기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해야 함을 분명히 말한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연결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를 모든 기도 끝에 사용해야 하는 하나의 어구나 형식으로 결코 생각하지 말라. ‘주님의 이름 안에서’를 붙인다고 해서 반드시 실재가 있는 것은 아니며, 그것을 붙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재의 문제이다. 진정으로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과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의 기도는 바로 주님께서 구하시는 것이며, 그는 둘이 하나가 되는 정도로 주님과 연합되었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는 이들인 우리가 주님과의 연결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기도하신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기도했을 때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했다고 말할 수 없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단지 우리의 기도였고,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 끝에 우리는 “오, 하나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실상 우리 스스로 기도하였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실재 안에 있고자 한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주님도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서 주 예수님은 주님 안에 사는 이들이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한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것이든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공과를 배운다면, 우리는 기도하고자 하는 열 가지 사항 중에서 오직 두 가지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나머지 여덟 가지는 주님의 뜻이 아니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실 수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하는 모든 참된 기도는 확실히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거의 같은 것임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똑같다. 우리가 주님 안에 살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은 주님의 생활이다. 이러한 사람이 여전히 주님 밖에 있는 목표나 의향을 가질 수 있겠는가? 물론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기도에 관계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성경의 모든 절들 중 요한복음에 있는 이 말씀보다 더 방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여기에서 주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15:7)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의미에서 이 약속은 참으로 방대한 것이다. 그러나 실지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기도는 또한 매우 좁은 것이다. 왜냐하면 14장부터 16장까지에 언급된 기도는 주님 안에 있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한 면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한 면으로 그러한 기도는 주님의 이름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신 안에 있을 때 우리에게 여러 갈망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우리가 돌이켜서 주님의 이름 안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우리의 갈망이 제한되고 우리가 그저 구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5일
우리의 대화는 다른 이들을 부패시키는 나쁜 말이 되지 않고, 반대로 그들을 건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은혜는 우리의 누림과 공급이신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말은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전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른 이들을 건축하는 말은 언제나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이신 그리스도를 공급한다.
사도는 에베소서 4장 17절부터 32절까지의 권유에서 은혜와 실재를 그 기본 요소로 삼았다. 사도는 예수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우리가 은혜와 실재가 충만한 생활을 하기 원했다.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지신 하나님이고, 실재는 우리에게 실재가 되도록 우리에게 계시되신 하나님이다. 우리가 실재를 살고 말할 때에 실재이신 하나님을 표현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누림을 위한 은혜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된다.
무익한 말은 소용없는 말, 효과가 없는 말이며, 긍정적인 기능이 없고, 쓸모없고, 유익이 없고, 열매가 없는 헛된 말이다. 이러한 말을 한 사람들은 심판 날에 그 말들을 낱낱이 진술해야 할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각각의 악한 말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많이 진술해야 하겠는가!
마태복음 12장 36절은 ‘모든 더러운 말’에 대해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모독하는 말’에 대해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악한 말’에 대해 말하는가? 아니다. 이 절은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해 말한다. 무익한 말은 장황한 말, 어울리지 않는 말, 필요 없는 말, 잡담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하여 심판 날에 낱낱이 진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한 말로 여러분이 의롭다는 판결을 받고, 여러분이 한 말로 여러분이 죄 있다는 판결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36-37절)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모독하는 말이 심각할 뿐 아니라 느슨한 말도 심각한 것임을 보아야 한다. 더러운 말을 하는 것뿐 아니라 무익한 말을 하는 것도 심각한 일이다. 우리는 어떤 물건이나 죄는 갚을 방법이 있지만 무익한 말은 배상할 길이 없음을 보아야 한다. 무익한 말로 사람에게 득죄한 것은 배상할 길이 없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자백할 수 있고, 우리가 한 말을 철회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 속에 이미 들어간 말은 회수할 수 없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배상할 수 있지만 무익한 말로 남에게 득죄한 것은 배상할 방법이 없다. 이러한 죄는 주님 앞에서 계산된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하여 심판 날에 낱낱이 진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한 말로 여러분이 의롭다는 판결을 받고, 여러분이 한 말로 여러분이 죄 있다는 판결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익한 말이 생명이 새어 나가는 구멍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입을 지키려면 먼저 마음을 처리해야 한다. 주님은 “왜냐하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마 12:34)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에 무엇이 있기 때문에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다면 언젠가는 말하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 가서 말할 것이며, 이 집에서 말하지 않으면 저 집에 가서 말할 것이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배우려면 마음부터 처리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결코 입을 합당하게 처리할 수 없다. 마음에 각양각색의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많은 것들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에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익한 말을 처리하려면 먼저 마음을 처리해야 한다.
4일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봉사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해야 한다. 에베소서 5장 20절은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감사하라고 말하고, 골로새서 3장 17절은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하라고 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여러 방면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지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이것이 한 방면이다. 우리는 다만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또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에 규제받아야 한다. 이것이 다른 한 방면이다. 모든 일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기본적인 방면이다. 또한 규제의 방면이 있다. 심지어 주 예수님의 이름의 영역 안에도 규제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규제받아야 한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행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인 사람들이 있음을 온 우주에 상기시킨다. 천사들은 이 사실을 존중하며, 모든 귀신들은 이 사실을 두려워한다. 귀신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이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이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포는 큰 의미가 있다.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 안에서 행하지 않는다면 패배할 것이다. 우리는 이발소에 가거나 물건을 사러 가는 일상생활의 평범한 일들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미 패배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집회에 갈 때에는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말하고 일들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가정과 일상생활의 일 가운데서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행하는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단지 하나의 종교적인 형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골로새서 3장 17절은 우리가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의 건축은 믿는 이들이 생명 안에서 자라는 데 달려 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은 “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믿는 이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자아에서 구출됨으로써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증가되시게 하는 것이다. 이 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분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부족하고 우리가 많은 문제에서 그분 밖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모든 일에서’라는 어구는 특별히 두 항목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 생각 속의 활동과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이다. 마태복음 12장 34절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구원받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들의 생각과 말에 있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지 않았다.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은 자아에서 구출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말에 있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지 않고 그 영의 제한과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이용당할 것이고 교회의 건축에 있어서 문제가 될 것이다.
3일
요한복음 5장 43절에서는 아들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고, 14장 26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다. 이 두 개의 짧은 절에서 신성한 삼일성이 계시된다. 신약에서 아들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고 말할 때, 이것은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신약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다고 말할 때,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과 하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와 아들은 두 가지 일을 하셨다. 즉,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고,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다. 각자 서로의 이름 안에서 어떤 것을 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이심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직역하면 ‘이름 안에서’―역자 주) 보내실 성령, 곧 보혜사께서 …”라고 말한다. 15장 26절은 “그러나 내가 아버지에게서 여러분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실재의 영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나에 대하여 증언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두 절을 읽을 때 즉시 하나의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즉, 아버지께서 그 영을 보내신 것인가, 아니면 아들께서 그 영을 보내신 것인가? 14장 26절에 따르면,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신다. 그 영께서 아버지에 의해 아들의 이름 안에서 보내어지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그 영을 보내신 분이시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15장 26절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그 영을 보내셨다. 아들께서 아버지에게서 그 영을 보내신 것과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신 것은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신 것은 아들께서 아버지에게서 그 영을 보내신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모두 그 영을 보내신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뿐 아니라 그 영께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도 오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셋이시지만 하나이시다. 즉, 셋-하나이시다.
위에서 언급된 요한복음 14장과 15장의 절들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아들의 이름 안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및 16장 23절과 24절에서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나는 젊었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이름 안에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고 배웠다. 후에 나는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의 이름 안에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신 것은 자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셨다.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는 것(요 5:43)은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하나의 도장으로 사용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안에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오셨을 때 아버지도 오셨다. 더욱이 요한복음 10장 25절에 따르면, 주 예수님은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였으나, 여러분이 믿지 않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행하는 일들이 나에 대하여 증언하지만”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행하시는 것은 아버지와 하나 되시는 것일 뿐 아니라 아버지의 인격 안에서 일들을 행하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10:30)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6장 57절에서 주 예수님은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셔서 그분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의 사상은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셨으며, 따라서 주님께서 아버지의 인격 안에 계셨고 아버지의 이름 안에 계셨다는 것이다.
2일
이름은 인격을 나타낸다. 주님의 인격은 그 영이다(고후 3:17상). 어떤 일을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하는 것은 그 영 안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 처음 ‘그분의 이름 안에서’를 언급하신 것은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서이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내 이름 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습니다. … 여러분이 무엇이든지 내 이름 안에서 구하면, 내가 이루어 주겠습니다.”(14:13-14) 14장부터 16장까지에서 그분은 반복하여 제자들에게 ‘내 이름 안에서’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어느 날 그분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실 뿐 아니라, 이 이름을 제자들도 사용할 수 있고 우리 또한 사용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 주신 이름인데, 이 이름을 예수님은 다시 우리에게 맡기셨다. 이제 우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그분의 이름이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이름 안에서’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분께서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이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이름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는 그분의 이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이름을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과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맡기셨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어떤 일이 아니라 그분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가서 무엇을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의 아들을 취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이것이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의 의미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뜻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우리의 손에 맡기실 만큼 충분히 담대하시다는 것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담대히 그분의 이름을 우리의 손에 맡기시어 우리가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실 정도로 우리를 신뢰하신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그분의 이름 안에서 하는 모든 일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이름 안에서 한 일들의 모든 결과를 기꺼이 책임지신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하나이며,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것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는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우리 또한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우리와 주 예수님은 서로 안에 거해야 한다. 즉,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또한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시게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주님의 이름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장과 15장에 계시된 기본 진리에 따르면, 주님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은 주님과 하나 되고 주님에 의해 살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하는 것이다.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고,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하셨다(5:43, 10:25). 이것은 주님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셨고(10:30),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으며(6:57),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서 일하셨음(14:10)을 의미한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표현으로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주님의 표현으로서 주님의 이름 안에서 심지어 주님보다 더 큰 일들을 했다(요 14:12).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실지로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용법에 따르면, 이 모든 절들은 어떤 사람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이 그 사람과 하나라는 의미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름은 단지 기도를 마칠 때 일종의 승인으로서 사용되는 서명이나 도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신언노트, 2023 06 04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함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들을 함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높이신 그 한 분,
곧 각각의 모든 이름들 위에 있는
그 이름을 받은 그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그분은
자신을 극도로 낮추셨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셨다.
빌립보서 2장 9절에 언급된
그 이름은
다음 절에서 가리키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이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때로부터
이 땅 위에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높은 이름은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도록
높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시인할
필요가 있다.
신약에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분명한 말씀이 있다.
이렇게 높아지심으로
주님은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얻으셨다.
역사상
주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높은 이름은
결코 없었다.
우주 가운데
가장 높은 이름,
가장 위대한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빌립보서 2장
10절과 1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 있는 이들과
땅에 있는 이들과
땅 아래 있는 이들이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도록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이름은
주 예수님의 인격과 일에서
그분의 존재 전체를
표현한다.
여기서 ‘이름’이란
‘주님의 전 존재의
범위와 요소’를
의미한다.
빌립보서 2장 10절에는
우주의 세 층,
곧 하늘과 땅과 땅 아래가 나온다.
하늘에 있는 이들은
천사들이며,
땅에 있는 이들은
사람들이고,
땅 아래 있는 이들은
죽은 사람들이다.
모든 층에 있는 이들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시인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신 주 예수님을
승천 안에서
주님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입은 마땅히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이렇게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그 교회의 모든 건축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신 것 같이
초월하고 또 승천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승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 하늘들의 영역 안에
앉아 있어야 한다.
에베소서 2장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그 하늘들의 영역 안에
앉아 있다고 말한다.
오직 승천 안에 있는 사람만이
건축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만이
이기는 이들이고,
원수를 초월하며,
하늘들의 영역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탄과 또 그의 악한 권세자들은
그 공중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에 있을 때,
우리는
땅에 속하며
그 교회로 건축될 수 없다.
땅에 머무르는 사람은 항상
땅에 속한
안목들과(봄과, 관점들과) 느낌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땅에 속한
안목과 느낌을 가진 사람이
그 교회를 건축함의 일에 참여할 때
그의 안목과 느낌은
한 문제가 될 것이다.
승천 안에서
주님은
초월하셨고
모든 원수를 정복하셨다.
주님의 부활 안에서는 아직
원수들이
완전히 처리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승천하시기 전에
주님께서
아직 그 공중 아래에,
즉 그 모든
원수들과 통치자들과 또 권세자들 아래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승천하셨을 때
자신이
모든 것을
이기셨고 초월하셨으며 또 정복하셨다는 것을
그 온 우주에 전시하셨다.
바로 그때 그분께서
그 우주의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셨고,
가장 높은 이름과
가장 높은 위치와
또 가장 높은 권위를 받으셨다.
승천 안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세워지셨으며,
모든 것이
그분의 발아래
복종하게 되었다.
오늘날 그분은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이다.
그분의 몸으로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하늘들의 영역 안에 앉아 있다.
우리가
이러한 초월하는 위치
곧 승천의 위치에 있을 때 비로소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
우주 안에서
가장 높은 이름,
곧 가장 위대한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비우셔서
한 사람의 형태로
(한 사람으로서의 양식[종류] 안에)
발견되셨고,
그분께서
자신을 극도로 낮추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셨다.
이렇게 높아지심으로
주님은
각각의 모든 이름들 위에 있는,
즉 일컬어지는 각각의 모든 이름들보다
훨씬 위에 있는
그 이름을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때로부터,
역사상
주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높은 이름은
결코 없었다.
그 이름은
주 예수님의 인격과 일에 있어서
그분께서 무엇이신지의
총합의 표현이다
(그분의 존재 전체를 표현한다).
이름은
인격을 나타낸다.
주님의 인격은
그 영이다.
어떤 일을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하는 것은
그 영 안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 처음
‘그분의 이름 안에서’를 언급하신 것은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서이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내 이름 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습니다.
… 여러분이
무엇이든지
내 이름 안에서 구하면,
내가
이루어 주겠습니다.”
(14:13-14)
14장부터 16장까지에서
그분은 반복하여
제자들에게
‘내 이름 안에서’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어느 날
그분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실 뿐 아니라,
이 이름을
제자들도 사용할 수 있고
우리 또한 사용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
주신 이름인데,
이 이름을
예수님은 다시
우리에게 맡기셨다.
이제 우리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그분의 이름이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이름 안에서’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분께서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이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이름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는
그분의 이름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이름을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과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맡기셨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어떤 일이 아니라
그분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가서 무엇을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의 아들을 취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이것이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의
의미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뜻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우리의 손에 맡기실 만큼
충분히 담대하시다는 것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담대히
그분의 이름을
우리의 손에 맡기셔서
우리가
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실 정도로
우리를 신뢰하신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그분의 이름 안에서 하는
모든 일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이름 안에서 한 일들의
모든 결과를
기꺼이 책임지신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하나이며,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것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는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우리 또한
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
우리와 주 예수님은
서로 안에 거해야 한다.
즉,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또한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시게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참으로
주님의 이름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장과 15장에 계시된
기본 진리에 따르면,
주님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은
주님과 하나 되고
주님에 의해 살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하는 것이다.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고,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셨고,
아버지 때문에 사셨으며,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서 일하셨음을
의미한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아버지의 표현으로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주님의 표현으로서
주님의 이름 안에서
심지어 더 큰 일들을 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실지로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용법에 따르면,
이 모든 절들은
어떤 사람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이
그 사람과 하나라는 의미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이름은
단지 한 기도를 마치는
한 확인(인정)으로서 사용되는
한 서명, 도장, 또는 인장이 아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는 사실상
‘주님 자신 안에서’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이름이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맡기셨고,
우리가
그분의 이름에 참여하며,
주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그분의 이름 안에서 하는
모든 일을
주님께서 기꺼이
인정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하나이며,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것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님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은
그분의 인격 안에,
그분 자신 안에
있는 것이며,
그분의 온 존재의
(그분께서 무엇이신 모든 것들의)
영역과 요소 안에
있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은
주님에 의해 살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요한복음 5장 43절에서는
아들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고,
14장 26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다.
이 두 개의 짧은 절에서
신성한 삼일이 계시된다.
신약에서
아들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고
말할 때,
이것은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신약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다고
말할 때,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과 하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와 아들은
두 가지 일을 하셨다.
즉,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고,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다.
각자 서로의 이름 안에서
어떤 것을 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이심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직역하면 ‘내 이름 안에서’)
보내실 성령,
곧 보혜사께서 …”
라고 말한다.
15장 26절은
“그러나 내가
아버지에게서
여러분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실재의 영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나에 대하여
증언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 두 절을 읽을 때 즉시
하나의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즉, 아버지께서
그 영을 보내신 것인가,
아니면 아들께서
그 영을 보내신 것인가?
14장 26절에 따르면,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신다.
그 영께서
아버지에 의해
아들의 이름 안에서
보내어지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그 영을 보내신 분이시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15장 26절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그 영을 보내셨다.
아들께서
아버지에게서
그 영을 보내신 것과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신 것은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신 것은
아들께서
아버지에게서
그 영을 보내신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모두
그 영을 보내신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뿐 아니라
그 영께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도 오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셋이시지만
하나이시다.
즉, 셋-하나이시다.
위에서 언급된
요한복음 14장과 15장의 절들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아들의 이름 안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및
16장 23절과 24절에서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
나는
젊었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께 무엇을 구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이름 안에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고
배웠다.
후에 나는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의 이름 안에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신 것은
자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셨다.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하나의 도장으로 사용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안에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오셨을 때
아버지도 오셨다.
더욱이 요한복음 10장 25절에 따르면,
주 예수님은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였으나,
여러분이
믿지 않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행하는 일들이
나에 대하여 증언하지만”
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행하시는 것은
아버지와 하나 되시는 것일 뿐 아니라
아버지의 인격 안에서
일들을 행하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10:30)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6장 57절에서
주 예수님은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셔서
그분께서
아버지 때문에 사신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의 사상은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셨으며,
따라서 주님께서
아버지의 인격 안에 계셨고
아버지의 이름 안에 계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계시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은
신성한 삼일과 관련된다.
요한복음 5장 43절은
아들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고
말하고,
14장 26절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다고
말한다.
이 두 절에서
신성한 삼일이 계시된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는 것은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과 하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으며,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하셨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안에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이셨고
아버지에 의해 사셨으며,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일하셨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셨고,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그 영을 보내셨다.
그 영께서
아버지에 의해
아들의 이름 안에서 보내어지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그 영을 보내신 분이시라는 것을
암시한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따르면,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그 영을 보내셨다.
아들께서
아버지에게서
그 영을 보내신 것과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그 영을 보내신 것은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모두
그 영을 보내신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봉사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해야 한다.
에베소서 5장 20절은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감사하라고
말하고,
골로새서 3장 17절은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하라고
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여러 방면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지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이것이
한 방면이다.
우리는 다만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또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에
규제받아야 한다.
이것이
다른 한 방면이다.
모든 일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기본적인 방면이다.
또한 규제의 방면이 있다.
심지어 주 예수님의 이름의 영역 안에도
규제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규제받아야 한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행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인
사람들이 있음을
온 우주에 상기시킨다.
천사들은
이 사실을 존중하며,
모든 귀신들은
이 사실을 두려워한다.
귀신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이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이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포는
큰 의미가 있다.
만약 우리가
각각의 모든 것들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는
승리한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패배한다.
우리는
이발소에 가거나
물건을 사러 가는
일상생활의 평범한 일들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이미 패배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집회에 갈 때에는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말하고
일들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정과 일상생활의 일들 안에서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하는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단지
하나의 종교적인
의례가(형식적 절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골로새서 3장 17절은
우리가
모든 것들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의 건축은
믿는 이들이
생명 안에서
자라는 데
달려 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은
“오직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합니다.”
라고 말한다.
믿는 이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자아에서 구출됨으로써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증가되시게 하는 것이다.
이 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분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부족하고
우리가
많은 문제에서
그분 밖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모든 것들 안에서’라는 어구는 특별히
두 항목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 생각 안에 있는
활동들과
우리의 입으로 우리가 말하는
말들이다.
마태복음 12장 34절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오랫동안 구원받아 왔지만(구원받았지만)
그들의 생각들과 말함에 있어서
그 머리, 곧 그리스도 안으로
성장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 머리, 곧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는 것은
그 자아로부터 구출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말에 있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지 않고
또 그 영에 의해서
제한받고 통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이용당할 것이고
그 교회를 건축함에 있어서
한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교회 안의 봉사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해야 한다.
이름은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일들을 하는 것은
그분의 인격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일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기본적인 방면이다.
우리는
우리 일상생활의
평범한 일들을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봉사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하는 것이
요구된다.
우리의 봉사는 반드시
주님에 의해 시작되고
주님의 갈망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교회 건축을 위한 봉사는
생명을 공급하는 봉사,
곧 다른 이들에게
신성한 생명을 공급해 주는 봉사이다.
교회 봉사는
생명을 공급하는 것인데,
이는 교회 봉사가
생명의 봉사이기 때문이다.
봉사하는 이들로서 우리는
생명을 공급할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대화는
다른 이들을 부패시키는
나쁜 말이 되지 않고,
반대로 그들을 건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은혜는
우리의 누림과 공급이신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말은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은혜를 전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른 이들을 건축하는 말은 언제나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이신 그리스도를 공급한다.
사도는
에베소서 4장
17절부터 32절까지의 권유에서
은혜와 실재를
그 기본 요소로 삼았다.
사도는
예수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우리가
은혜와 실재가 충만한
생활을 하기 원했다.
은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지신 하나님이고,
실재는
우리에게 실재가 되도록
우리에게 계시되신 하나님이다.
우리가
실재를
살고 말할 때에
실재이신 하나님을
표현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누림을 위한
은혜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된다.
무익한 말은
소용없는 말,
효과가 없는 말이며,
긍정적인 기능이 없고,
쓸모없으며,
유익이 없고,
열매가 없는
헛된 말이다.
이러한 말을 한 사람들은
심판 날에
그 말들을
낱낱이 진술해야 할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각각의 악한 말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많이
진술해야 하겠는가!
마태복음 12장 36절은
‘모든 더러운 말’에 대해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모독하는 말’에 대해 말하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악한 말’에 대해 말하는가?
아니다.
이 절은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해 말한다.
무익한 말은
장황한 말,
어울리지 않는 말,
필요 없는 말,
잡담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하여
심판 날에
낱낱이 진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한 말로
여러분이 의롭다는 판결을 받고,
여러분이 한 말로
여러분이 죄 있다는 판결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 12:36-37)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모독하는 말이
심각할 뿐 아니라
느슨한 말도
심각한 것임을
보아야 한다.
더러운 말을 하는 것뿐 아니라
무익한 말을 하는 것도
심각한 일이다.
우리는
어떤 물건이나 죄는
갚을 방법이 있지만
무익한 말은
배상할 길이 없음을
보아야 한다.
무익한 말로
사람에게 득죄한 것은
배상할 길이 없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자백할 수 있고,
우리가 한 말을
철회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 속에
이미 들어간 말은
회수할 수 없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배상할 수 있지만
무익한 말로
남에게 득죄한 것은
배상할 방법이 없다.
이러한 죄는
주님 앞에서
계산된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하여
심판 날에
낱낱이 진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한 말로
여러분이 의롭다는 판결을 받고,
여러분이 한 말로
여러분이 죄 있다는 판결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익한 말이
생명이 새어 나가는
구멍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입을 지키려면 먼저
마음을 처리해야 한다.
주님은
“왜냐하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 12:34)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에
무엇이 있기 때문에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다면
언젠가는 말하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 가서 말할 것이며,
이 집에서 말하지 않으면
저 집에 가서 말할 것이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배우려면
마음부터 처리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결코
입을
합당하게 처리할 수 없다.
마음에
각양각색의 것이 있기 때문에
그 많은 것들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에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익한 말을
처리하려면 먼저
마음을 처리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말,
곧 우리의 모든 말은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어야 한다.
어떤 나쁜 말도
우리의 입 밖에 내지 말고,
참된 말을 하고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말만 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하여
심판 날에
낱낱이 진술해야 할 것입니다.”
― 마 12:36.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함을
알지 못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주님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여
혹은 주님의 공로에 의지하여
기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해야 함을
분명히 말한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연결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를
모든 기도 끝에 사용해야 하는
하나의 어구나 형식으로
결코 생각하지 말라.
‘주님의 이름 안에서’를 붙인다고 해서
반드시 실재가 있는 것은 아니며,
그것을 붙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재의 문제이다.
진정으로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과 하나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주님의 구하심이다.
그는
그 둘이 하나가 된
그러한 정도까지
주님과 합일되었다(합병되었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당신, 곧 그 기도하는 한 사람이
주님과의 합일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할 때,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기도하신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기도했을 때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했다고
말할 수 없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단지
우리의 기도였고,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 끝에
우리는
“오, 하나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실상
우리 스스로 기도하였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실재 안에 있고자 한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주님도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서
주 예수님은
주님 안에 사는 이들이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한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것이든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공과를 배운다면,
우리는
기도하고자 하는
열 가지 사항 중에서
오직 두 가지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나머지 여덟 가지는
주님의 뜻이 아니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실 수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하는
모든 참된 기도는 확실히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거의 같은 것임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똑같다.
우리가
주님 안에 살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은
주님의 생활이다.
이러한 사람이 여전히
주님 밖에 있는
목표들이나 의도들을(경향들을)
가질 수 있겠는가?
물론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기도에 관계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성경의 모든 절들 중
요한복음에 있는 이 말씀보다
더 광범위한(넓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여기에서 주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15:7)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의미에서 이 약속은
참으로 넓다.
그러나 실지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기도는 또한
매우 좁다.
왜냐하면 14장부터 16장까지에
언급된 기도는
주님 안에 있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한 면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한 면으로 그러한 기도는
주님의 이름 안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신 안에 있을 때
우리에게
여러 갈망이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우리가
돌이켜서
주님의 이름 안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우리의 갈망이 제한되고
우리가 단순히(쉽게) 구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준다.
믿는 이들이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함을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지 못한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의 합일 안에서 살고 있고,
주님과 합일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도록
허락해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기도하신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서
주 예수님은
주님 안에 사는 이들이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한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기도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하는
모든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똑같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다.
1일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높이신 분으로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신 분이시다(빌 2:9). 그리스도는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그분은 자신을 극도로 낮추셨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리셨다.
빌립보서 2장 9절에 언급된 이름은 다음 절에서 가리키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이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때로부터 이 땅 위에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높은 이름은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도록 높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시인할 필요가 있다. 신약에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분명한 말씀이 있다(행 2:21, 롬 10:13). 이렇게 높아지심으로 주님은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얻으셨다. 역사상 주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높은 이름은 결코 없었다. 우주 가운데 가장 높은 이름, 가장 위대한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빌립보서 2장 10절과 1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 있는 이들과 땅에 있는 이들과 땅 아래 있는 이들이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도록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셨습니다.” 이름은 주 예수님의 인격과 일에서 그분의 존재 전체를 표현한다. 여기서 ‘이름’이란 ‘주님의 전 존재의 범위와 요소’를 의미한다.
빌립보서 2장 10절에는 우주의 세 층, 곧 하늘과 땅과 땅 아래가 나온다. 하늘에 있는 이들은 천사들이며, 땅에 있는 이들은 사람들이고, 땅 아래 있는 이들은 죽은 사람들이다. 모든 층에 있는 이들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시인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신 주 예수님을 승천 안에서 주님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입은 마땅히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이렇게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교회를 건축하려면, 교회를 건축하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초월하시고 승천하신 것같이 초월하고 승천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승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들의 영역 안에 앉아 있어야 한다. 에베소서 2장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늘들의 영역 안에 앉아 있다고 말한다(5-6절). 오직 승천 안에 있는 사람만이 건축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만이 이기는 이들이고, 원수를 초월하며, 하늘들의 영역 안에 있기 때문이다. 사탄과 악한 권세자들은 공중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에 있을 때, 우리는 땅에 속하며 교회로 건축될 수 없다.
땅에 머무르는 사람은 항상 땅에 속한 안목과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땅에 속한 안목과 느낌을 가진 사람이 교회 건축의 일에 참여할 때 그의 안목과 느낌은 문제가 될 것이다. 승천 안에서 주님은 초월하셨고 모든 원수를 정복하셨다. 주님의 부활 안에서는 아직 원수들이 완전히 처리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승천하시기 전에 주님은 아직 공중 아래, 즉 원수들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아래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승천하셨을 때 자신이 모든 것을 이기셨고 초월하셨으며 정복하셨다는 것을 온 우주에 나타내셨다. 바로 그때 그분은 우주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셨고, 가장 높은 이름과 위치와 권위를 받으시고 보좌에 앉으셨다. 승천 안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세워지셨으며, 모든 것이 그분의 발아래 복종하게 되었다. 오늘날 그분은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이다. 그분의 몸으로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하늘들의 영역 안에 앉아 있다. 우리가 이러한 초월하는 위치 곧 승천의 위치에 있을 때 비로소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