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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먹는 것의 의미와 죽음을 패배시킴

The Significance of Eating
and the Defeat of Death
(먹음의 중요성과 죽음의 패배)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먹는 문제의
참된 의미를 알려면
먹음의 중요성을
(the significance of eating; 먹는 것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먹는다는 것은
우리 속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우리 밖에 있는
무언가를
접촉하는 것이다.

먹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접촉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무언가를
우리 속에 받아들이면,
그것은
우리 속에서
소화되어
우리의 조성 성분,
곧 우리의 존재와 조성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먹고 소화한
음식의 조성체이다.
우리가
소화한 것이
우리의 조성이
된다.

주님을 받아들여
그분을
소화하고 동화함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상에서
떡을 먹는 것으로
상징된다.

주님의 상에서
떡을 먹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서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다음
음식인 이 떡은
우리가 되고
우리는
이 떡이 된다
— 고전10:17.

우리와
우리가
먹고 소화하고 동화한
음식 사이에는
한 유기적인
합일만(union; 합병만, 결합만, 연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속으로
동화한
그 음식과
섞여진다
(are … mingled; 어울린다, 혼합된다, 연합된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음식으로
취할 때
그분과 섞여진다.

음식을
먹고 소화하고 동화하는 것은
음식이
우리의 존재와
내적으로 섞임을
포함한다
(involve an intrinsic mingling
of the food with our being;
음식과 우리 존재의
내재적인 섞임과
관계있다).
먹고 소화하고 동화하는 것은 또한
하나의 됨을 포함한다
(involve a becoming;
‘되는 것’과 관계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동화한 음식이
바로 우리의 존재가
(our very being; 우리 존재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먹고 소화하고 동화함으로써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조성과 표현에서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신다
— 요 1:1, 14, 6:57.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떡,
곧 생명의 떡과
살아 있는 떡과
하늘에서 내려온 참떡이시다
— 요 6:32-33, 48, 51.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화되고 동화되심으로써
우리의 내적 존재의
조성 성분이 될 수 있기를
원하신다
— 요6:53-57.

우리는
우리가 먹은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음식으로 먹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될 것이고
심지어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될 것이다.

우리가
천국의 실재가
되는 길은
모든 것을 포함한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다
— 마 15:26-27, 32-37.

하나님의 경륜은
외적인 것들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적으로
우리 안에 오시는
문제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그분을 취해야 한다
— 엡 3:17상, 요 6:57.

천국의 실재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 눅 17:20-21.

하늘의 왕이시자
천국 자체이신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을
떡으로
우리에게 먹이심으로써
우리를 다스리신다
— 마 15:26-27.

우리는 오직
우리의 음식이신
그리스도로 양육되어야만
천국의 실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한
떡이신
그리스도를
더 많이 먹을수록,
왕의 성분이
더 많이
우리 안으로 조성되어
우리 안에서
다스리는 요소가 되고
우리를
천국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의 증가가
되게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한
떡이신,
왕이신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내적으로 정결하게 된다.

우리의 내적 존재가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가
우리 속에 들어와야 하며,
이것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먹는 것이다
— 마 23:25-27.

우리의 음식이신
그리스도는
정결하게 하는
최상의 요소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내적 존재를
씻어 주시며,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기질이
씻어짐을
체험한다.

우리는 모두
주님에게서
내적인 씻음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씻음은
예수님을 먹는 것에서
온다.

예수님을 먹는 것이
이기는 비결이다.
이기는 이가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먹는 것이다
— 계 2:7, 17, 3:20, 요 6:57.

레위기 11장이
음식과 관련해서
죽음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음식
곧 먹는 문제가
생명이냐 죽음이냐의
문제라는 것을
가리킨다
— 레 11:2-4, 9, 24-25, 39, 47.

레위기 11장은
죽음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 레 11:24-25, 27하-28상.

죽음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죽음은
가장 추한 것이며,
반면에 생명은
가장 소중한 것이다.

에덴에서부터 계속(onwards; 지금까지의)
하나님과 사탄의
논쟁은(controversy; 싸움은)
죽음과 생명의 문제였다(issue; 토의였다)
— 창 2:9, 16-17, 3:22, 요 5:25,
롬 6:9-10, 고전 15:26, 54-55.

성경에 따르면
죽음은
죄보다
더 더럽히고 혐오스러운(
more defiling and abominable;
더 더럽고 가증한 것이다)
— 레11:31.

어떤 죄도
속건제물을 통해
즉시 용서받을 수 있었지만,
어떤 짐승이든
그 사체를 만진 사람은
저녁때까지
불결했다(was unclean; 부정하였다)
— 레 11:24-25, 27하-28상, 31하-32, 39-40.

우리의 죄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자백하자마자
즉시 용서받지만(요일 1:9),
우리가
영적인 죽음의
더럽힘에서부터
깨끗해질 수 있기 전에는
반드시 일정 기간의 시간이
지나야만 한다
— 민 19:9, 11.

죽음은
지극히 큰 힘이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우주에서 가장 큰 힘은
죽음이다
— 히 2:14-15, 요 1:1, 4, 11:25.

죽음은
마귀와 동맹을 맺고 있다
(allied with; 연합하였다)
— 히 2:14-15.

마귀는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죽음 또한
하나님의 원수이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없애실
마지막 원수입니다
(is the last enemy
that God will abolish;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없애 버리실
원수이다).

교회에 대한 공격은
음부의 문들로부터
곧 죽음으로부터
올 것이다
— 마 16:18.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최후의 무기는
죽음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 것만이
음부의 문들을
이길 것이다
— 요 11:25.

하나님의 의도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생명으로
충만해야 한다.

사탄이
우리 속에
죽음을
주입해 넣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죽음을
이길 수 없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 롬 5:12, 7:24, 계 1:17-18, 고전 15:22.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죽음을 맛보셨고,
마귀를 멸망시키셨으며,
죽음을 없애 버리셨다
— 히 2:9, 14-15, 딤후 1:10.

주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서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위해서
죽음을 맛보셨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그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실 수 있게 하셨다
— 히 2:9, 골 1:20.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가진
마귀를 멸망시키셨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노예 상태로 억눌려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셨다
— 히 2:14-15.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체가 되신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육체 안에 있는
마귀를
멸망시키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탄을 깨뜨리고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 창 3:15, 갈 4:4, 요 3:14, 히 2:14, 고전 2:6.

주님께서
죽음의 세력을 가진
마귀를 멸망시키셨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여
노예 상태로 억눌려 있던
우리는
그분에 의해 해방되었다
— 히 2:15.

죽음은
우리 위에서
왕 노릇 하였고(롬 5:14),
우리는 계속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죽음의 노예 상태에 있었다.

주님께서
마귀를 멸망시키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다
— 히 2:15.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통해
죽음을 없애 버리셨다
— 딤후 1:10.

그리스도는
마귀를 멸망시킨
그분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무효화하셨다.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서
‘죽음을 없애 버렸다’는 것은
죽음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아무 효력이 없게 만든 것을
의미한다.
죽음은
불 못에 던져질 때
제거될 것이다
— 계 20:14.

비록 죽음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아무 효력이 없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 딤후 1:10.

주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고
죽음을 뚫고 나오셨다
— 행 2:24, 계 1:17-18.

마귀가
주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사용한 것은
죽음이었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세력을 가진
그분의 원수를
만나러 오셨다
— 히 2:14.

주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또 죽음을 이길 것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을
죽음에 넘기셨지만,
죽음은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오히려 죽음은
주님께 패배당했고
주님은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 행 2:24.

죽음은
주님을 붙잡을 수 없었고,
무덤은
주님을 제한할 수 없었으며,
음부는
그분을 가두어 둘 수 없었다.
주님은
부활하셨다.
부활은 바로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 계 1:17-18.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죽음을 다스릴 수 있다.
신성한 생명은
우리를
왕으로 보좌에 앉혀,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죽음을
다스릴 수 있게 한다
— 고전 15:45하, 롬 8:10, 5:17.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우리는
생명을
공급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부활 생명을 체험하고 누리며,
그런 다음
이 생명이
몸의 다른 지체들 안으로
흘러갈 수 있게 하는
통로가 됨으로써
이 생명을 공급한다
— 요일 5:11-12, 16, 고후 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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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딤후 1:10
…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무효화하셨고
(nullified; 없애 버리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밝히셨습니다
(brought … to light; 드러내셨습니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을 하였다면,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사람들은 더욱
(그)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릴 것입니다.

마귀, 곧 뱀이
사람을 유혹하여
타락하게 한 후에,
하나님은
여자의 씨가 와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다
(창 3:15).
때가 찼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시어
처녀에게서 태어나셔서
육체가 되셨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
육체 안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육체 안에 있는
마귀를
멸망시키시기 위한 것이었다.
… 이것은
사탄을
없애고
(abolish; 폐지하고, 깨뜨리고)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bring … to nought; 실패하게 하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셨으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여
노예 상태로 있던
우리는
주님에 의해
해방되었다.
죽음이
우리 위에서
왕 노릇 했고,
우리는 계속
죽음을 두려워하며
죽음의 노예 상태로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미
마귀를 멸망시키셨고
죽음을 없애 버리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다.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을 통해
이루신 일로 인하여
죽음을 없애 버리셨다고
말한다.
‘없애 버리다’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또한
무력하게 하다, 무효화하다,
쫓아내다, 깨뜨리다,
쓸모없게 하다, 버리다 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마귀를 멸망시키는
그분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무력하게 하시고
무효화하셨다.
… 죽음은
천년왕국 후에
불 못에 던져지기 전까지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계 20:14).
죽음은
주님에 의해 멸망할
마지막 원수일 것이다
(고전 15:26).
비록 죽음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아무 효력이 없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주 예수님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죽음을 이기셨으며
죽음을 돌파하셨다
(broke through death; 뚫고 부활하셨다).
주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단지 일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싸우기 위해서였다.
그분은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분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해
반드시 승리하셔야 했다.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인
마귀가
주 예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최후의 무기는 바로
죽음이었다.
주님은
죽음의 세력을 가진
그분의 원수를
만나러 오셨다.
… 주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또 죽음을
이기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께서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그분을
이길 수 없었다.
주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죽음의 도전을 받아들이셨다.

주님은
죽음 안으로 들어가셨고,
죽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게 하셨다.
수천 년 동안
죽음은
아담의 후손들 안에서
작용하고 싸워 왔다.
(has been operating and fighting in …;
아담의 후손들에게
크나큰 문제였다).
주님을 제외하고,
죽음 안으로 들어간 모든 사람들이
죽음에 의해 패배 당했다
(every person
who has entered into death
has been overcome by death;
지금까지
죽음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나올 수 있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죽음을 이기셨다.
그분은
죽음 안으로 들어가셨을 뿐 아니라
또한 죽음에서 나오셨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없애셨고
(aboliished; 폐지하셨고, 폐하셨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음부를 이기셨다.
죽음이
그분을 붙잡아 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죽음은
그분을 붙잡아 둘
능력이 없었다
(행 2:24).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자
부활이시며
(resurrection; 부활이신 분이시며)
(요 1:1, 11:25),
파괴할 수 없는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다
(히 7:16).
그처럼 그분은
항상 살아 계신 한 분이시기 때문에
죽음은
그분을
가두어 둘 수 없다.
주님은
자신을
죽음에 넘기셨지만,
죽음은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오히려 죽음은
주님께 패배당했고
주님은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는,
죽음이
찌름을 가지지 못하고
또 음부가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With Christ, therefore,
death has no sting
and Hades has no power;
그러므로 죽음은
그리스도를 쏠 수 없고,
음부는
그분에 대해 무력하다).

죽음은
주님을 붙잡아 둘 수 없었고,
무덤은
주님을 제한할 수 없었으며,
음부는
그분을 억류할 수 없었다.
주님은 부활하셨다.
부활은
죽음으로부터의 구출이다.
부활은
죽음을 이김이다.

우리가 받은
생명은
그저 몇 가지 것들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왕들로서
우리를 왕좌에 앉혀서
모든 것들 위에 다스리게 한다.
이것은
생명 안에서
구원받는 것보다
훨씬 더 높다.

 

5일

요 11:25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고,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하기 원하시는
모든 것을 공격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목적은
교회에 있으므로,
사탄은
전문적으로
교회를 공격한다.
사탄이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를
공격할 때,
반드시 죄와 세상을 사용하여
미혹하는 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것을
쉽게 분별해 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만,
여전히 사탄의 공격을
피하지 못할 수 있다.
… 단지 죄와 세상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는
사탄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최후의 무기는
죽음이다.
죽음은
그리 쉽게 발견되지 않으며,
은밀히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
세상이나 죄를 사용하여
교회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사탄이
더럽고 포악한 죄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도덕적이고 세련된 것들도
사용한다는 것이다.
세련되고 도덕적인 많은 일이
죽음으로 가득하며,
사탄은
이러한 죽음의 일들을 통해
손쉽게
교회를 공격한다.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교리, 좋은 신학, 뛰어난 성경 해석이
아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생명, 곧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다.
모든 교리와 사상과 신학과 성경 해석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대신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 것만이
음부의 문들을
이길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죽음이 변장한
각종 모습에 불과하며,
이런 것으로는
사탄의 공격에
대항할 수 없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로
죽음을 만지지 않게 하시고,
또한 죽음을
교회 안에
가져오지 않게 하시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교회를 충만하게 하시고,
사탄이
교회를 공격할
여지가 없게 하시기를
구한다.

그리스도는
부활이시며 생명이시다.
교회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그릇이기 때문에
이 생명과 부활을
표현해야 한다.
하나님은
바로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생명으로
충만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생명이며,
사탄에게서 나온 모든 것은
바로 죽음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주된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 곧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10:10).
요한복음 전체는
생명의 문제를 말하며
죄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의 매 장이
생명과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고 부활이시며,
교회는
이 생명과 부활의
그릇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릇은
무언가를
담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물을
손으로 한 움큼 집어서
사람에게
건네줄 수 없으며,
반드시 그릇을
사용해야 한다.
물을
그릇에 담아야
다른 이에게
건네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그릇인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풍성을
분배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죽음을 이길 수 있는가?
우리 자신으로는
죽음을 이길 수 없는데,
이는 사탄이 이미
죽음을
우리 속에
주입해 넣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일의 목적은 바로
사탄을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사탄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다스리고,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써
마귀를 멸망시키셨다
(히 2:14).
주님의 죽음은
끝내는 죽음이지만,
사탄의 죽음은
아무것도 끝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완전하고 철저하다.
다른 죽음은 단지
죽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
음부의 죽음,
신체의 죽음,
불 못의 죽음은
어떤 것도 끝낼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끝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탄을 끝냈고
‘죽음’까지도 끝냈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되셨는데,
그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기 위해서였다
(히 2:9).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위해
죽으셨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것, 모든 피조물을 위해서
죽음을 맛보셨다.
주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위해서
구속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그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실 수 있다
(골 1:20).

신언노트, 2018 08 26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먹는 문제의
 참된 의미를 알려면
 먹음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우리 속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우리 밖에 있는
 무언가를
 접촉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접촉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무언가를
 우리 속에 받아들이면,
 그것은
 우리 속에서
 소화되어
 우리의 조성 성분,
 곧 우리의 존재와 조성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먹고 소화한
 음식의 조성체입니다.
우리가
 소화한 것이
 우리의 조성이
 됩니다.

주님을 받아들여
 그분을
 소화하고 동화함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상에서
 떡을 먹는 것으로
 나타내집니다.

주님의 상에서
 떡을 먹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서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다음
 음식인 이 떡은
 우리가 되고
 우리는
 이 떡이 됩니다.

우리와
 우리가
 먹고 소화하고 동화한
 음식 사이에는
 한 유기적인
 합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속으로
 동화한
 그 음식과
 섞여집니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음식으로
 취할 때
 그분과 섞여집니다.

음식을
 먹고 소화하고 동화하는 것은
 음식이
 우리의 존재와
 내적으로(본질적으로) 섞임을
 포함합니다.
먹고 소화하고 동화하는 것은 또한
 하나의 됨을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동화한 음식이
 바로 우리의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먹고 소화하고 동화함으로써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조성과 표현 안에서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떡,
 곧 생명의 떡,
 살아 있는 떡,
 하늘에서부터의 참된 떡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화되고 동화되심으로써
 우리의 내적 존재의
 조성 성분이 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음식으로 먹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이고
 신격 안에서는 아니지만
 생명 안에서 또 본성 안에서
 하나님이 되기까지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들의 왕국의 실재가
 되는 길은
 모든 것을 포함한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외적인 것들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내적으로(내부를 향하여)
 우리 안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그분을 취해야 합니다.

하늘들의 왕국의 실재는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하늘의 왕이시자
 천국 자체이신
 그리스도는
 떡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먹이심으로써
 우리 위에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음식이신
 그리스도로
 영양 공급을 받음으로써만
 하늘들의 왕국의 실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함한
 떡이신
 그리스도를
 더 많이 먹을수록,
 왕의 구성 요소들이(성분들이)
 더 많이
 우리 안으로 조성되어
 우리 안에서
 다스리는 요소가 되고
 우리를
 하늘들의 왕국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의 증가가
 되게 합니다.

모든 것을 포함한
 떡이신,
 왕이신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우리가
 내적으로(안에서)
 깨끗하게 됩니다.

우리의 내적 존재 안에서
 우리가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반드시
 우리 속에 들어와야 하고,
 이것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먹음에 의해서입니다.

우리의 음식으로서,
 그리스도는
 가장 좋은 깨끗하게 하는 요소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내적 존재를
 씻으시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기질의 씻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의
 내적인 씻음을
 필요로 합니다.
이 씻음은
 예수님을 먹는 것에서부터
 옵니다.

예수님을 먹는 것이
 이김의 비결입니다.
한 이기는 이가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레위기 11장이
 음식과 관련해서
 죽음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음식,
 곧 먹는 것이
 생명 또는 죽음의
 문제임을
 가리킵니다.

레위기 11장은
 죽음과
 매우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죽음은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그분께서 보시기에
 죽음은
 가장 추한 것이며,
 반면에 생명은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에덴에서부터 계속
 하나님과 사탄의 논쟁은
 죽음과 생명의 토의(문제)였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죽음은
 죄보다
 더 더럽히고 또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속건제물을 통해
 어떤 죄도
 즉시 용서받을 수 있었지만,
 어떤 동물이든
 그 사체를 접촉한 사람은
 그 저녁까지
 불결했습니다.

우리의 죄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자백하자마자
 즉시 용서받지만,
 어떤 기간의 시간이
 지나야만
 우리가
 영적인 죽음의
 더럽힘에서부터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죽음은
 극도로 큰 능력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죽음이
 우주에서 가장 큰 능력입니다.

죽음은
 마귀와 연합하였습니다(동맹을 맺었습니다).

그 마귀가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에
 죽음이 또한
 하나님의 적입니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없애실
 마지막 적입니다.

교회에 대한 공격은
 음부의 문들로부터,
 곧 죽음으로부터
 올 것입니다.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최종적인 무기는
 죽음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오는(생기는) 것만이
 음부의 문들을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을 의도하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생명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 안에서는
 우리가
 죽음을
 이길 수 없는데,
 이것은
 사탄이
 우리 안으로
 죽음을
 주입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그 유일한 한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죽음을 맛보셨고,
 마귀를 파괴하셨으며,
 죽음을 무효화하셨습니다
 (사망을 못쓰게 만드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서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각각의 모든 것들을 위해서
 죽음을 맛보셨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그분 자신께
 화해시킬 수 있게(조화시킬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가진
 마귀를 멸망시키셨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노예 상태 안에 붙잡혀 있었던
 사람들을 해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체가 되신 것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사람의 육체 안에 있는
 마귀를
 파괴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을 없애시고(폐지하시고)
 무효화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죽음의 힘을 가진
 마귀를 파괴하셨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 때문에
 노예 상태 안에 붙잡혀 있었던
 우리가
 그분에 의해 해방되었습니다.

죽음은
 우리 위에 다스렸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죽음의 노예 상태 아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마귀를 파괴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것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됩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무효로 만드셨습니다
 (nullified; 못쓰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마귀를 파괴하시는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죽음을
 무효화하셨습니다
 (brought … to nought).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서)
 죽음을 없애 버리는 것은
 (to nullify death; 죽음을 무효로 만듦은)
 죽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아무 효력이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죽음은
 불 못에 던져질 때
 제거될 것입니다.

비록 죽음이 아직
 제거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이
 무효화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주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셨고
 죽음을 돌파하셨습니다(뚫고 나오셨습니다).

마귀가
 주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최후의 것이
 죽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죽음의 힘을 가지고 있는
 그분의 적을
 만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또 그분께서 죽음을 이기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분 자신을
 죽음에 넘겨 주셨지만,
 죽음은
 그분을
 억류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죽음은
 그분에 의해 패배당했고,
 또 그분은
 그것에서부터 일어나셨습니다.

죽음은
 주님을 붙잡을 수 없었고,
 무덤은
 그분을 제한할 수 없었으며,
 음부는
 그분을 억류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김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 안에서
 죽음 위에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 신성한 생명은
 왕들로서
 우리를 왕좌에 앉혀서,
 생명 안에서
 죽음 위에
 다스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우리는
 생명을
 공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안에 있는
 그 부활 생명을
 체험하고 누리며,
 그러고 나서
 이 생명이
 그 몸의 다른 지체들 안으로
 그것을 통하여 흐를 수 있는
 한 통로가 됨으로써
 이 생명을 공급합니다.

 

4일

레 11:31
이것이
기어 다니는 모든 것 가운데
너희에게
부정한 것들이다.
누구든지
이런 것들이
죽었을 때에
이것들을
만지는 사람은
저녁때까지 부정하게 된다.

고전 15:26
마지막으로 없어져야 할
원수는
죽음입니다
(Death, the last enemy,
is being abolished;
죽음, 그 마지막 적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에덴에서부터 지금까지의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은
죽음과 생명의 문제였다. …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의 특징은
생명이고,
사탄에게 속한
모든 것의 특징은
죽음이다.
… 생명은
모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생명은
생각보다 더 깊고,
느낌과 교훈보다
더 참되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리스도와 다른 모든 사람의
큰 차이점은 바로
다른 사람들은
죽어 있지만
그분은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죽음은
그분을 만질 수 없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음을 없애 버리셨으며,
이제 동일한 목적을 위해
교회를 사용하신다.
오늘날
교회는
생명을 담는
하나님의 그릇이며,
그분의 아들의
부활 생명을 나타내고
사람들에게
이 생명을
인식하게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죽은 것은
모두 부정하다.
그러므로 부정한 것은
죽음과 같다.
죽음은
죄보다
더 더럽고 가증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념에 따르면,
죄가
죽음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
우리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관념 때문에,
우리는
거짓말이
죄라는 것을
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이
죄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죄 판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윤리적인 말일지라도
죽음으로
가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형제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죽음과 관련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그런 말이
윤리적일 수 있지만
여전히 죽음으로
가득할 수 있다.

레위기 5장은
어떤 죄도
속건제물로 인하여
즉시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계시한다
(2, 17-18절).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죄를 처리하고
죄를 용서받는 것이
쉽다는 것을
본다.
단지 속건제물을 드릴 때
우리는 용서받는다.

레위기 11장에 따르면,
어떤 동물의 사체를
만진 사람은
저녁때까지 부정하게 된다
(24-25, 27하-28상, 31하, 39-40절).
‘저녁때까지’는
매일의 생활의 끝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으로 더럽혀진 것에서
정결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체험이
이것을 증명한다.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한 후
그 죄를
주님께 자백한다면,
우리는
즉시 용서받을 것이며
그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죽음으로 더럽혀진다면,
우리는
‘저녁때까지’
정결하게 되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으로
더럽혀진 것에서
정결하게 되기까지
일정 기간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은
우리의 죄들이
용서받기 위한
요인은 아니지만,
죽음으로 더럽혀진 것에서
정결하게 되기 위한
요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만 죄들을 자백하고
주님의 보배로운 피를
우리의 상황에 적용함으로써
죄들을 처리한다.
이렇게 하는 즉시
우리는
용서받고 정결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체’를 만져
죽음으로 더럽혀진다면,
이 더러움은
일정 기간 동안
우리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죄에서
정결하게 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우리가
죽음으로 더럽혀진 것에서
정결하게 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것은
죽음이
죄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우리를 더럽힌다는 것을
증명한다.

동물의 사체를
만진 사람은
저녁때까지
부정하게 되는 반면에,
사람의 시체를
만진 사람은
칠 일 동안
부정하게 된다
(민 19:11, 13).
이것은 죽음이
죄보다
더 심각한 것일 뿐 아니라
사람의 시체가
동물의 사체보다
더 더럽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들이
가장 더럽히는 요소이다
(In the sight of God,
human beings
are the most defiling element;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 가장 더럽다).

죽음은
우주에서 극도로 큰 능력이다
(Death
is an exceedingly great power
in the universe;
우리 모두는
죽음이
우주 가운데 가장 큰 힘이며,).
누구도
죽음을
이겨 낼 수 없다
(No one
can withstand death;
누구도
이 죽음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 외에는
죽음이
우주에서 가장 큰 능력이다.
죽음이 올 때,
누구도
그것을
이겨 낼 수 없다.
역사를 통틀어(
throughout history;
동서고금을 통하여)
사람이
죽음을 이기는 길들을
탐구해 왔지만,
지금까지
죽음을 이긴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모두
죽음의 포로가 되어 왔다.

죽음은
마귀와 동맹을 맺고 있다.
마귀는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죽음 또한
하나님의 원수이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없애 버리실
원수이다.

 

3일

계 2:7
귀가 있는 사람은
그 영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주어서
먹게 할 것이다.’

계 3:20
보아라,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누구든지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우리의 내적 존재가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가
우리 속에 들어와야 하며,
이것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먹는 것이다.
자양분을 공급하는
음식이신 주 예수님은
최상의 씻는 요소이시다.
그분은
음식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단지 우리에게
자양분을 공급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내적으로
우리를 씻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손을
씻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 부분,
곧 우리의 존재를
씻으신다.
예수님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씻어지는 이 문제는
마태복음 15장의
처음 두 부분을
연결하는 고리이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러한 씻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깨끗한지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외적으로
우리의 손을
씻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내적으로 씻어지는 문제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에 의해
이렇게 내적으로 씻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먹는 것이
이기는 비결이다.
… 다른 길은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는 길,
곧 가르침을 취하는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한 길,
곧 예수님을 먹는 길을
취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날마다
우리는
그분을
생명나무와 감추어진 만나와 정찬으로
먹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기는 이들이
될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성질을 이기는
비결을 알지 못했지만,
결국 주님은
나에게
그 비결을
보여 주셨다.
우리의 성질을
이기는 비결은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만 예수님을
조금 들이마시라.
예수님은
가장 강한 ‘중화제’이시다.
그분께서
들어오실 때
즉시
우리의 화가
누그러진다.
심지어 우리가
성질을 내려고 해도
성질이 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아주 잘 안다.
이전에 나는
나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면 여길수록
더욱더
화가 났다.
그러나 이제
화가 나려고 할 때,
나는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그분께서
나의 화를
누그러지게 하신다.
더욱이 그분은
화가 변하여
찬양이 되게 하신다.

우리는
레위기 11장이
음식과
먹는 문제에 관한 것임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장이 또한
죽음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볼 필요가 있다.
레위기 11장에서
‘사체(사체들)’라는 단어는
열세 번 사용되었으며,
‘죽은(또는 죽다)’이라는 단어는
세 번 사용되었다.
죽음이 없다면
어떤 사체도 없을 것이다.
사실상 사체는
죽음을 가리킨다.
사체가 있는 한,
거기에는 죽음이 있다.

레위기 11장이
음식과 관련해서
죽음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음식
곧 먹는 문제가
생명이냐 죽음이냐의
문제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정결한 것들을
접촉한다면
생명을 얻을 것이지만,
부정한 것들을
접촉한다면
죽음을 얻게 될 것이다.

죽음은
추하고 가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멀리할
필요가 있다.
레위기 11장은
겉으로 보기에
부정한 것을 멀리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장은 사실상
우리에게
죽음을 멀리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멀리해야 할
죽음은 주로
물질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다.

죽음은
사탄의 일이
가지는 특징이다.
사탄이 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을
죽음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집회는
인수에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집회에
더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고 해서
그 집회가
더 좋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집회에서
죽음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죽음을 삼키고
생명을 해방하는 것이다.
집회에서
죽음이 발견되면
이것은
집회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 없음을
보아야 한다.
반대로 생명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죽음은
가장 추한 것이며,
반면에 생명은
가장 소중한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일종의 교리가 아니다.
생명을 받은 사람은
생명에 대한 체험이 있지만
그것을 묘사하기는
매우 힘들다.
생명은
흥분이나(excitement; 신남, 즐거움, 동요, 흥분시키는 것이나)
좋은 느낌들이(good feelings; 선의, 호의, 호감, 우정, 친밀감, 좋은 감정이)
아니다.
생명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2일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누구든지
이 떡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입니다.
내가 줄
떡은
곧 내 살인데,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주는 것입니다.”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내가
아버지 때문에
(because of the Father;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 때문에
(because of Me;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을 담는
하나님의 그릇이 되기를
갈망하실 뿐 아니라,
사람이
그분을
먹고 소화하며 동화하기를
갈망하신다.
우리는
물질적인 음식을
먹고 소화하고 동화할 때
힘을 얻고
강해진다.
… 결국 우리가 먹은
음식은
우리 존재의
섬유 조직과 세포가 된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내적 존재의
모든 섬유 조직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소화하고 동화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내적 존재의
조성 성분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어느 날
주 예수님을
영접한 것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한다!
그분은
생명나무이시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요 1:4).
생명나무는
먹기에 좋은 음식이며,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또한
먹기에 좋은 음식이시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기 위한
최상의 길은
먹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그릇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였다.
… 최근에 나는
먹는 것에 관해
과학적인 방식으로
조금 배우게 되었다.
어떤 것을 먹을 때
그것은 소화되어
혈액 안으로 동화된다.
결국 우리가 먹은 것은
바로 우리 존재의
세포와 유기적인 조직이 된다.
그것이 바로
먹은 것이
우리가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우리가 먹는
모든 요소로 조성된다.
영적으로도 동일하다.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먹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으로 조성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분의 형상을 가진
그분의 그릇으로 만드신 후에,
이 살아 있는 그릇을
생명이신 그분 자신을 상징하는
한 나무 앞에 두셨다.
거기서 사람은
먹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취해야 했다.
성경 말씀은
생명나무가
먹기에 좋았다고
말한다
(창 2:9).
어떤 것을
우리 안으로 취하여
그것이
우리가 되는
유일한 길은
먹는 것이다.
하나님은
먹기에 좋으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분 자신을
음식의 형태로
제시하셨다.

우리가
왕국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실재가 되게 하는 길은
그분을
생명나무와 생명수로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 두 항목,
곧 생명나무와 생명수는
영원토록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밖의 의식들이나 실행들이
아니다.
… 하나님의 경륜은
외적인 것들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적으로
우리 안에
오시는 문제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그분을 취해야 한다.

누가복음 17장 22절부터 24절까지는
바리새인들에게
질문을 받으시면서
그들 가운데 계셨던
구주 자신이
하나님의 왕국이시라는 것을
증명한다.
구주께서
계신 그곳에
하나님의 왕국이
있다.

하늘의 왕이신
주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자신을
떡으로 먹이심으로써
그들을 다스리신다.
우리는
우리의 음식이신
그분으로 양육되어야만
그분의 왕국의
합당한 백성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
왕국의 실재 안에서 사는
왕국 백성이 되는 길이다.

어떻게 우리는
왕국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길은
하나님의 뜻에
항상 순종하신 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순종의 왕국이시다.
우리는 단순히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고,
자녀들의 떡이신
그분을
먹어야 한다.
우리가
이방인인 개들일지라도
우리 모두는
상 아래에서
우리의 몫을
얻는다
(마 15:22-28).
우리 모두는
왕이신 예수님을
먹고
우리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왕의 모든 요소가
이 떡 안에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먹으면 먹을수록
왕의 성분이
더 많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할렐루야!
다스리는 요소가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한다.

 

1일

막 14:22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시어
축복하시고,
떼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으십시오,
이것이 내 몸입니다.”
라고 하시고,

고전 10:17
떡이
하나이요,
우리 많은 사람이
한 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분별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먹는 것의
중요성이다.
이 중요성을 아는 것이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먹는 것의 참된 의미를
아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우리 속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우리 밖에 있는
무언가를
접촉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접촉할 때,
… 처음에
그것은
우리와
관련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것을 먹는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
영향을 줄 것이다.
레위기 11장에서
우리가
먹는 것들은
사람들을
상징하며,
먹는다는 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을
상징한다.

먹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접촉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무언가를
우리 속에 받아들이면,
그것은
우리 속에서
소화되어
우리의 조성 성분,
곧 우리의 존재와 조성이
된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먹고 소화한
음식의
조성체이다.
결국 우리가
소화한 것이
우리가 되고,
우리의 조성 자체가 된다.
즉 우리가
먹고 소화한 것이
우리의 조성이 된다.
이것은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임을
가리킨다.
만일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접촉하는
사람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접촉할 때,
그러한 접촉이
우리를
재조성하여
그러한 종류의
사람으로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며,
우리가 받아들인
모든 것은
우리를 재조성하여
지금의 우리가 아닌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주님을
받아들여
소화하고 동화함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은
주님의 상에서
떡을 먹는 것으로
상징된다.
주님의 상에
올 때마다
우리는
한 떡을 본다.
이 한 떡은
단지 전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먹기 위한 것이다.
주 예수님은
만찬을 세우셨을 때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어,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으십시오,
이것이
내 몸입니다.”
(막 14:22)
라고 말씀하셨다.

상 위에 있는
떡은
우리가
분석하거나
단순히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떡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취하여
먹기 위한 것이다.
이 떡은
소화되고 동화되어
바로 우리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의 의미는
심오하다.

주님의 상의
떡을
먹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 공급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그런 다음 사실상
그분이
우리가 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먹는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먹은 음식이
결국 우리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음식이 우리가 될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음식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와
우리가
먹고 소화하고 동화한
음식 사이에는
유기적인 합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속으로 동화한
그 음식과
섞여진다.

섞임이
비성경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큰 실수이다.
우리가
먹고 소화하고 동화한
음식이
우리와
섞어진다는
사실을
누가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가?
사실 음식을
우리 존재 안으로
동화하는 것은
섞임을 넘어선다
(goes beyond mingling; 섞임 그 이상의 문제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것을 묘사할
단어들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과
우리가
깊은 방식으로
섞여진다는 것을
정말 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가
우리의 음식이신
삼일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참으로
그분과 섞여진다.
우리가 먹은 음식이
우리의 생명이 되려면,
그것은
우리와
섞여져야 한다.
우리의 음식이신
삼일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도
원칙은 동일하다.

우리는
음식을 먹는 것이
우리와
음식 사이의
유기적인 합일
그 이상의 것을
함축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사실상, 음식을
먹고 소화하고 동화하는 것은
음식과 우리 존재의
내재적인 섞임을
포함한다.
우리가 먹은 것은
실제로 우리의 일부가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섞임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무엇이 되는
문제이다
(a becoming; 하나의 됨이다, 한 생성이다).
우리가
소화하고 동화한
음식은 바로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음식을
완전히 소화하고 동화한 후에는
우리 안에서
그 음식의
정확한 위치가
찾아내지는 것이(to be located)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음식이
우리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음식을 동화하는 것을
예로 들어서,
주님의 상의
떡을 먹는 것의
깊은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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