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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생명의 영의 법에 의해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 안에서 생활함

이기는 이가 되는 열쇠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생명의 영의 법이다. 로마서 8장은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이들을 위한 장이다.

로마서 7장은 ‘육체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체험이고, 로마서 8장은 ‘영(신성한 영이 우리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어 이 두 영이 함께 연합되어 하나가 된 영)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체험이다.

로마서 8장에서 생명의 영의 법을 누리는 것은 우리를 로마서 12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으로 인도한다. 이 법은 우리가 몸 안에서 몸을 위해 살 때 우리 안에서 운행한다.

로마서 8장은 성경 전체의 초점이고 우주의 중심이다. 따라서 우리가 로마서 8장을 체험하고 있다면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영원 과거에 하나님은 그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 안에 들어가시어 그들의 생명이 되시고 그들을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이 되게 하시려는 목적을 세우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인데, 이는 하나님의 의도가 사람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표현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들어가시어 사람의 생명과 내용이 되시고 사람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심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살고 심지어 하나님을 살아 낼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사람 안에서부터 표현되신다.

스가랴서 12장 1절은 “여호와, 곧 하늘들을 펼치시고 땅의 기초를 놓으시며 사람 안에 영을 지으시는 분께서 이렇게 선포하신다.”라고 말한다.

사람의 영은 하늘들과 땅과 동일한 위치에 놓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서 거하기를 갈망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늘들은 땅을 위해 있고, 땅은 사람을 위해 있으며, 사람은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살고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영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우주 안의 중심 초점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위대한 기적이다. 우주 안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고 우리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과 인격이시며, 우리를 그분의 집으로 만들고 계신다.

삼일 하나님은 육체 되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통과하심으로 생명의 영의 법이 되시어 ‘과학적인’ 법칙, 곧 자동적인 원칙으로 우리의 영 안에 설치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가장 큰 발견, 심지어 가장 큰 회복 중 하나이다.

로마서 8장 2절과 9절부터 11절까지에 나오는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자신, 내주하시는 영은 모두 생명을 주시는 복합되신 영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에서 ‘하나님’과 ‘영’은 동격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영께서 하나이심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의 영’과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과 ‘생명의 영’이라는 표현은 그 영께서 그리스도이시고 부활시키시는 분이시며 생명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삼일 하나님의 셋 모두가 생명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그 영은, 우리에게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결과 도달하심과 적용이 되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시다.

삼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으로서 우리 안에 계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생명과 인격으로 취함으로써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용기(容器)이다.

우리가 주님 안으로 믿어 들어감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때, 주님은 생명의 영의 법으로서 기능을 발휘하시어 하나님의 신성하고 창조되지 않은 생명(헬라어로 ‘조에’)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의 영 안으로 분배하신다. 우리는 모두 적어도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인 우리의 영이 조에라는 위대한 계시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둘 때, 우리의 혼을 대표하는 우리의 생각은 조에가 된다. 또한 생명의 영의 법의 운행을 통해 조에는 우리의 죽을 몸 안으로 분배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세 부분으로 된 우리 전 존재에서 조에의 사람들이 되어, 조에의 성인 새 예루살렘이 된다.

궁극적으로, 이 생명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게 할 것이고, 이것에 의해 주님께서 돌아오시어 우리를 다음 시대로 안내하실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과 우주의 중심 초점이 로마서 8장에 있다.

로마서 8장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께서 생명의 영의 법으로서 믿는 이들의 생활을 위해 믿는 이들에게 신성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체험하는 것이다.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우리의 영 안에 설치되신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은 전기에 비유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신성한 ‘전기’의 법으로 운행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이 법의 ‘스위치를 켜는’ 협력을 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주님과 계속 연결되어 있으면서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을 계속 접촉하는 동안,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 안에서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힘들이지 않고 작용한다.

기도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을 흡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접촉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흡수할 것이고, 하나님을 더 흡수할수록 우리의 빛과 구원이신 하나님을 더 누릴 것이다.

시편 27편 1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라고 말한다. 다윗은 아름다움이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을 접촉하고 흡수했다(시 27:4). 이처럼 다윗은 내적으로 빛 비춤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내 있는 모습 그대로”(영어 찬송가 1048장 참고)라는 찬송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상태를 개선하거나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으며,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한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내적 상태를 그분 앞에 올려놓고, 우리가 모든 방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그분께 말씀드려야 한다. 비록 우리가 약하고 혼동되고 슬프고 무슨 말을 할지 모르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내적 상태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그러한 상태를 하나님께 가져가야 한다.

우리의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 그분을 주목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그분께 경배하고 그분을 흡수함으로써 그분을 접촉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고, 그분의 달콤함을 맛보며, 빛과 능력이신 그분을 받아들이고, 내적으로 평화롭고 밝고 강하고 능력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공급하는 중에도 그분께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는 공과를 배우게 될 것이다.

기도의 의미는 또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시편 27편 4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사모할 뿐 아니라, ‘그분의 성전에서 여쭙기’를 사모한다고 말한다. 여쭙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드린 말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 곧 하나님의 표현이 된다.

참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게 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 표현하여 다시 들려드리는 것이다. “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실 때에 / 제 마음으로 주님께 ‘오, 여호와님! 제가 주님의 얼굴을 찾겠습니다.’ 하였습니다.”(시 27:8)

우리가 하나님을 실지로 만지고 접촉하고 흡수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실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내적인 말씀하심에 따라 기도할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흡수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내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하신 그분의 말씀으로 그분께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표현한다.

우리의 기도의 첫째 방면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며,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름 바르시면서 일에 대한 그분의 부담을 주시고 그분의 의도를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런 다음 우리의 기도의 둘째 방면은 일에 대한 주님의 뜻과 부담에 관해 주님께 간구하면서 주님께 여쭙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과 동역하여 기도의 목적을 수행한다.

여쭙는 기도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다. 다윗은 자주 여호와께 여쭈었기 때문에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알았다(삼상 22:10, 23:2, 4, 30:8, 삼하 2:1, 5:19, 23). 하나님께서 신언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신 후에, 다윗은 ‘여호와 앞에 앉아’(삼하 7:18) 주님께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주십시오.”(25하절)라고 말씀드렸다. 그런 다음에 다윗은,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기에 “이 종은 주님께 이렇게 기도드릴 마음을 품었습니다.”(27절)라고 주님께 말씀드렸다.

주님과의 교통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과 대화함으로써, 생명의 영의 법이신 내주하시고, 설치되어 계시고, 자동적이시고, 내적으로 운행하시는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

우리가 영의 내적 감각에 주의할 때,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게 된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비결은 로마서 8장 6절에서 발견된다. 이 말씀은 생명의 영의 법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영적 체험과 관련하여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절이다 ―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생각을 육체에 두는 것은 육체 편에 서고, 육체와 협력하며, 육체에 찬성하는 것이다. 생각을 영에 두는 것은 영을 주의하고, 영의 편에 서며, 영과 협력하고, 영에 찬성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영의 내적 감각에 주의하여 생명과 평안의 내적 감각을 따를 때, 우리는 주님의 유일한 움직임을 위해 몸의 머리이신 주님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복음 봉사에서 그리스도의 포로였다. 그리스도의 포로로서 그는 자신의 바깥 환경에 통제받는 것이 아니라 ‘내 영 안에 안식’(고후 2:13)이 있는지의 여부에 통제받았다. 그의 존재에서 그의 영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었으며, 그는 그의 연합된 영에 의해 지배받고 통제받고 지시받고 움직이고 인도받았다.

궁극적으로, 내주하는 자동적인 생명의 영의 법을 누림으로써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 안에서 사는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며, 그 목표는 우리를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여 새 예루살렘이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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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롬 8:6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말 2:15 그러나 그분께서 그들을 하나로 만드시지 않았느냐? … 그러니 너희의 영을 주의하고 누구도 젊어서 얻은 아내를 배신하지 마라.

사탄은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 거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우리 영 안에 계신다. 이것은 우리를 로마서 8장 6절로 인도한다. 이 절은 참된 비결을 담고 있다. 이 절에는 세 가지 것, 곧 생각과 육체와 영이 있다.

이제 우리의 체험은 우리 자신 곧 우리의 생각을 누구에게 또는 무엇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생각을 육체 즉 사탄에게 둔다면, 그 결과는 죽음이다. 아담은 지식나무의 열매에 참여했을 때 이렇게 했으며, 동일한 결과인 죽음을 맛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생명이신 하나님께 둔다면, 그 결과는 생명과 평안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육체를 이기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죄의 법을 패배시키려고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다만 그 영과 함께 서서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 안에서의 구출이다. 우리는 영과 함께 서고 생각을 영에 두며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구출받을 것이다.

로마서 8장 6절의 비결은 우리 모두가 꼭 배워야 하는 비결이다.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지낸 후, 이제 나는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도 이 가르침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주님 자신에 관한 가르침들, 즉 주님이 누구이신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이루셨는지에 대한 가르침들은 매우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과 관련해서는 로마서 8장 6절에 대한 가르침이 가장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는 생각을 영에 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전기 기구들을 사용하는 것을 예로 들어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전기 기구의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는 방법만 알면 된다. 우리가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는 일에서 누구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와 가르침을 연구해야 하지만, 참된 비결은 로마서 8장 6절에 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로마서 8장 6절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알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거의 성취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밤낮으로 성경을 연구해 왔지만, 우리의 영적인 체험과 관련하여 로마서 8장 6절만큼 중요한 말씀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제가 당신을 선택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저의 노력과 분투를 내려놓도록 도와주십시오. 악이나 유혹을 이기려고 제 스스로 어떤 것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오히려 제가 항상 당신을 의지하고 당신과 함께 서 있으며 당신을 신뢰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저는 결코 자신을 교정하거나 구출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항상 제 자신을 당신께 맡기고 당신을 신뢰하며 당신을 의지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는 체험은 달콤하고 매우 유용하다. 그 유용성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기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 집에는 전기 기구를 언제든지 콘센트에 꽂아 사용할 수 있도록 전기가 들어와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즉시 주님께 ‘플러그를 꽂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대단히 유용하시기 때문이다. 전기가 집 안에 들어와 있고 심지어 집에서 가장 깊고 숨겨진 방에도 들어와 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에 들어와 계신다. 비록 신성한 전기가 대단히 유용할지라도,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 신성한 전기를 기꺼이 사용하려는 자원함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고 그 비결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항상 기꺼이 신성한 전기를 사용하고 ‘우리 자신을 콘센트에 꽂기’를 원해야 한다. 우리가 수많은 메시지를 들을지라도, 그 모든 메시지들에서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참된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생각을 영에 두고 항상 이 실재 안에서 살기를 실행해야 한다.

5일

시 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여 온 한 가지 그것을 구하리니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거주하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에서 여쭙는 것이라네.

시 27:8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실 때에 제 마음으로 주님께 ‘오, 여호와님! 제가 주님의 얼굴을 찾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기도의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을 흡수하는 것이고,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 곧 하나님께서 표현되시게 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말하거나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롯을 두고 기도했으며, 또한 소돔을 두고 기도했다(23-33절). 그러나 이 장의 끝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신 뒤에”(33절)라고 말한다. 비록 기도한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지만, 말씀하신 분은 여호와이셨다. 바로 여호와께서 말씀을 마치신 분이시며 의도를 표현하신 분이셨다.

참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우리가 자신의 말을 하거나 우리 자신을 표현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이며 그분 자신을 표현하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신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그분께 말씀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이다. 시편 27편 8절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밖으로 말해 내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표현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무언가를 구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표현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교회의 어떤 특별 집회를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거나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들었다고 하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내적 상태와 주님 앞에서의 우리의 상황에 대해 무언가를 말씀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하심을 느낄 것이다. 이때 우리는 하려던 기도를 멈추어야 하고, 교회의 부흥이나 특별 집회에 대해서는 잊어버려야 하며, 내적인 느낌을 따라야 한다. 우리 안에서 주님께서 “너는 육체로 가득하다.”라고 책망하신다는 느낌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 저는 육체로 가득합니다.”라고 말씀드려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고, 우리의 내적 느낌을 기도로 말해 낸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에서 일부만 내적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부르짖고 싶은 것을 기도에 많이 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 간청하고 싶은 유혹을 받은 것이다. 어떤 때에 우리는 심지어 내적 느낌을 전혀 만지지 않고 철저하게 우리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해 주시기를 구한다. 이런 기도는 백 퍼센트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이다.

시편 27편 4절에서 다윗은 ‘부르짖는’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간청하는’이라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여쭙는’이라고 말했다. 여쭙는 것은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8장에서 한 기도는 여쭙는 것에 대한 좋은 예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죄악으로 가득한 소돔성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정말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시겠습니까? 혹시 그 성에 의인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곳을 멸망시키시겠습니까? …”(23-24절)라고 말씀드렸다. 우리라면 이렇게 말씀드렸을 것이다. “하나님, 당신은 반드시 소돔을 구원하셔야 합니다. 그 성에 의인 오십 명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구원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그 성에 의인 오십 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것인지, 또한 의인 사십오 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것인지 여쭈었고, 하나님은 하나하나 그에게 알려 주셨다. 결국 아브라함이 그 성에 의인 열 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것인지 여쭈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다(28-32절).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가장 좋은 기도, 가장 가치 있는 기도는 우리가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이다. 부르짖는 것은 사람의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고, 간청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구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기도는 여쭙는 것이다. 여쭙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드린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 곧 하나님의 표현이 된다.

결론적으로, 기도의 의미는 하나님을 흡수하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번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만져야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과하시고 하나님께서 표현되시게 해야 한다.

4일

롬 8:4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골 4:2 기도에 꾸준히 힘쓰고,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시 27:1 여호와는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

우리는 놀라운 생명의 영의 법, 곧 과정을 거치시고 우리 안으로 분배되셨으며 지금은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삼일 하나님이신 바로 그 법을 누릴 수 있다. 이 법과 협력하는 길은 영 안에서 행하고 단순히 영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 안에 있는 것은 신성한 전기를 켜는 것이다. 영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스위치를 계속 켜 놓는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법이신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과 협력하는 길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흡수하는 것이며, 기도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을 얻는다. 하나님은 실재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분을 접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얻을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 자신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흡수하는 것에 달려 있다. 시편 27편 1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추신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빛이시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이시라고 말한다. 여기에 두 가지 다른 표현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추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언가를 성취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빛이시고 우리의 구원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바로 그것이시라는 의미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빛도, 구원도 없다.

다윗은 체험 가운데서 계시를 받음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빛이시고 그의 구원이심을 알게 되었다. 이것에 근거하여, 그는 “내가 여호와께 청하여 온 한 가지 / 그것을 구하리니 / 내 평생에 / 여호와의 집에 거주하며 /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 그분의 성전에서 여쭙는 것이라네.”(시 27:4)라고 말했다. 다윗은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을 흡수하기를 원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을 접촉하고 흡수했다. 그는 하나님을 접촉할 때 즉시 속이 밝아졌고, 하나님을 흡수할 때 즉시 그의 안에 구원을 받아들였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의 안에서 그의 빛이 되시고 그의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동안 한숨지으면서, 자신이 무능하고 약하며 일어날 수 없고 볼품없으며 목마르다는 것을 자백하고, 복음을 전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으며 형제자매를 만나도 교통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자백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내적 상태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그러한 상태를 하나님께 가져가야 한다. “내 있는 모습 그대로”(영어 찬송가 1048장)라는 찬송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상태를 개선하거나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나아가려는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상태 그대로일수록 더 좋다. 조금도 개선할 필요가 없고, 기다릴 필요도 없으며, 준비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비록 우리가 약하고 혼란스럽고 슬프고 할 말이 없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믿는 이는 반드시 매일 상당한 시간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배워야 한다.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가 좋다. 그렇지만 규칙을 정하지 말라. 규칙을 정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매일 하나님을 접촉하고, 그분을 기다리며,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르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흡수한다면 우리의 상태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능력과 힘과 승리와 열심과 일어설 힘 등 많은 것을 구할 필요가 없다. 단지 우리가 매일 하나님을 접촉하기만 한다면,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을 볼 것이다. 우리에게 빛이 필요하다면, 그분께서 빛이 되실 것이다.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그분께서 능력이 되실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이시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많이 바라보아야 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르면서 그분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그분께 감사하며 그분을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신 일과 그분의 인격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우리의 상태나 주변 환경을 보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묵상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3일

롬 8:10-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입니다. …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서 ‘법’은 모세의 율법이나 어떤 특정한 계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생명의 영의 법의 기능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다. 마치 중력의 법칙이 사물들을 땅에 떨어지게 하고, 소화의 법칙이 우리가 먹은 음식물을 소화되게 하듯이, 우리 안에 분배된 신성한 생명에도 하나의 법이 있다. 이것은 신성한 분배가 법에 의해, 곧 자동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하나의 원칙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 법이 작용함으로써 신성한 생명의 본질, 요소, 풍성이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러한 놀라운 법을 소유하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신성한 법의 작용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 신성한 법이 우리 안에서 운행할 때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8장 10절에서 영이 살아 있다고 말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이 생명, 또는 헬라어로 ‘조에’라고 말한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이 ‘조에’는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영이 ‘조에’가 되게 한다. 이제 삼일 하나님께서 생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도 생명이다.

이것을 본다면 우리는 온 우주에, 특히 사탄에게 우리의 영이 생명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인 우리의 영이 ‘조에’라고 외칠 것이다. 오, 이 계시가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성질을 내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성질을 억누르지 말라. 그 대신 단순히 이렇게 선포하라. “내 영은 ‘조에’이다!” 마찬가지로, 아내나 남편이 여러분을 힘들게 한다면, 따지지 말고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아내나 남편에게 여러분의 영이 ‘조에’임을 말해 주라.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다. 주님을 찬양하자! 우리의 영은 ‘조에’이다!

로마서 8장 6절을 살펴보자.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생각 역시 ‘조에’가 될 수 있음을 본다. 우리가 생각을 영에 둘 때 우리 혼을 대표하는 우리 생각은 ‘조에’가 된다. … 이것이 바로 신성한 생명이 우리 혼 안으로 분배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생각을 영으로 돌이키는 것을 실행해야 한다. 한담을 하려고 하는가? 생각을 영으로 돌이키라. 성질을 내려는 유혹을 받는가? 생각을 영으로 돌이키라.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가르침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돌아가라. 그 말씀은 삼일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영 안으로 분배될 때 우리의 영이 생명이 된다는 것을 계시하고, 또한 영에 둔 생각이 생명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로마서 8장 11절은 하나님의 분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계시한다. 이 절은 ‘조에’가 그 영을 통하여 우리 죽을 몸 안으로 분배될 수 있음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과 생각이 ‘조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까지도 ‘조에’로 충만하게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삼일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존재의 세 부분 안으로 분배되는 것에 대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필요가 있다. “주님,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저의 영은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제 제가 생각을 영에 둔다면, 저의 생각도 생명이 될 것입니다. 오, 주님, 당신을 얼마나 찬양하는지요! 당신의 내주하시는 영을 통하여 당신의 ‘조에’ 생명은 심지어 저의 죽을 몸 안으로도 분배될 수 있습니다. 주님, 이것으로 인해 당신께 경배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육체 되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을 통과하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지금 그분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으로서, 우리가 참여하고 체험하며 누릴 수 있는 신성한 ‘조에’이시다. 먼저 그분은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의 중심인 우리의 영 안으로 분배하신다. 그분은 이 중심에서 우리의 생각 안으로 ‘조에’를 확장시키시고 우리의 생각을 ‘조에’로 적시신다.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 죽을 몸 안으로 확장되시며, 그럼으로써 우리 온 존재를 ‘조에’로 만드신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조에’의 사람들이 된다.

2일

롬 8:9 그러나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여러분은 육체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롬8:11 또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

로마서 8장은 성경의 초점과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질 수 있다.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일해 넣으시는 것이다. 그분은 이 목적을 위해 우주를 창조하셨다. 로마서 8장, 특별히 1절부터 17절까지는 교리적인 가르침이나 권면이나 권유나 지침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계시와 체험에 따라 이 부분을 썼다.

로마서 8장은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세우신 후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시고 획득하신 것을 말한다. 먼저 하나님은 선민을 소유하시기 위해,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의 일을 완성하셨다. 결국 그분은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육체 되심을 이루셨다. 그런 후 하나님은 인생의 고난을 체험하기 위해 인간 생활을 통과하셨다. 그 후 그분은 모든 것을 포함한 죽음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 죽음 안에서 우리의 죄들을 없애시고 옛 창조물을 끝내시고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셨다. 그분은 죽음 안으로 들어가시고 죽음을 통과하시고 죽음에서 나오시고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육체 되심 안에서 그분은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 물질적인 몸을 입으시고 육체가 되셨다. 그리스도는 구속하는 죽음과 생명을 나누어 주는 부활 후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 영이 되셨다. 이러한 두 필요를 위해 하나님은 두 모습을 취하셨다. 첫째는 구속의 성취를 위한 육체의 모습이고, 둘째는 생명을 나누어 주기 위한 그 영의 모습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에 승천 안으로 들어가시고, 승천 안에서 사람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머리의 권위를 받으시고, 영광스럽게 되시고, 관을 쓰시고, 보좌에 앉으시어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셨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가장 높은 이름과 칭호를 받으셨다. 이분께서 바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시고 얻으시고 달성하신,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한 분께서 이제 우리에게 도달하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해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부활과 승천 안에 계신다.

로마서에서 우리는 완전히 과정을 거치신 완성되신 하나님을 본다. 그분은 모든 과정을 통과하심으로, 사람이 되심과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심을 포함한 그분의 경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 로마서 8장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성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로마서 8장에서 삼일 하나님은 그 영이 되셨다. 9절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시고, 11절에서는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라 불리신다. 그러므로 그 영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영 하나님을 포함하신다. 그분은 삼일 하나님의 삼일 영이시다.

삼일 하나님은 그 영의 형태로 우리에게 도달하신다. 삼일 하나님의 적용과 도달하심이신 그 영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결이시다.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적용되시고 도달하시는 삼일 하나님, 곧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시어 그 영이 되신 삼일 하나님을 본다. 이분은 우리 안에 내주하기를 갈망하시는데, 이는 우리의 내적 존재 전체를 차지하고 완전히 점유하기를 기다리시고 기대하시며 그것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도 우리 안에 작용하는 법칙이 있다. 그것은 내주하시는 삼일 하나님의 풍성인 생명의 영의 법이다.

이 모든 풍성을 누리는 길은 다만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 영의 일들을 생각하고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어야 한다. 그 영의 일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이다.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일들이 아닌 다른 것들에 두지 않는 것은 우리의 내적 존재 전체가 완전히 그리스도께 사로잡히기 위한 것이다.

신언노트, 2023 01 01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생명의 영의 법에 의해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 안에서 생활함
로마서 8장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에 의해
그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하심 안에서 생활함

우리는
로마서 5장에서는
아담 안에 있고,
6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7장에서는
육체 안에 있고,
8장에서는
영 안에 있다.
우리는
육체 안에 있을 때
아담을 체험하고,
영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5장의 아담은 오직
7장의 육체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고,
6장의 그리스도는 오직
8장의 영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다.
갓난아기는 틀림없이
아담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린 아기에게서
아담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체험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육체 안에 있는 것을
더욱더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가진 것을
육체 안에 있을 때
체험한다.

같은 원칙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영 안에 있을 때만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영을 따라 행할 때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체험한다.
그리스도의 풍성은
아담의 풍성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풍성을
체험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로마서 8장은
사람들을 분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또 뒤로 물러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장은
필사적으로
해방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장이다.
우리는
7장의 마지막 부분에 의해
이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오,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겠습니까?”
라고 부르짖는다.
바울은 필사적이었다.
그는 극도로
추구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해방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시도한 모든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었지만,
선을 행하는
행함은 없었다.
그는
필사적인 사람이었다.
8장은
그러한 사람을 위한 장이다.
8장은
1장에 있는 사람이나
2장에 있는 사람을 위한 장이 아니라,
7장의 끝부분과
8장의 시작 부분에 있는
사람을 위한 장이다.
그러한 필사적인 부르짖음 후에
응답이 왔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유죄판결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왜 유죄판결이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영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죄판결이 없는가?
생명의 영의 법이
바울 안에 이미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로마서 8장은
사람을 분발시키거나
뒤로 물러난 데서 돌아오도록
이끌지 않는다.
이 장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이들은 모두
필사적인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구원받고
주님을 추구하면서,
추구하는 길에서 실패한 후
필사적이게 되었다.
우리는
필사적인 이들이어야 한다.
이 장은
주님을 향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우리를 분발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이 장은
우리가
우리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조망을 제시한다.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고
필사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러한 조망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어떤 ‘방법’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조망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이루어진 것,
우리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단지 어떤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조망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법이시라는 것에 대해
분명한 조망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법이신
하나님은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지 않으신다.
오늘날 그분은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법이시다.
여러분은
그분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법이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특별한 기도를
한 적이 있는가?
나는
여러분이 계속해서
자신의 약함 안에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옛 방식으로 기도할까 봐
염려된다.
여전히 여러분은
성질을 내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주님께 구한다.
‘전기’가 이미 들어왔기에,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 달라고
‘발전소’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영의 법으로
여러분 안에 설치되어 계심을
참으로 깨달았는가?
그분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법으로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분께
협력해 드리는 것이다.

이기는 이가 되는 열쇠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생명의 영의 법이다.
로마서 8장은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이들을 위한 장이다.

로마서 7장은
‘육체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체험이고,
로마서 8장은
‘영
(신성한 영이
우리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시어
이 두 영이
함께 연합되어
하나가 된 영)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체험이다.

로마서 8장에서
생명의 영의 법을 누리는 것은
우리를
로마서 12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으로
인도한다.
이 법은
우리가
몸 안에서
몸을 위해 살 때
우리 안에서 운행한다.

로마서 8장은
성경의 초점과
우주의 중심으로
여겨질 수 있다.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께서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일해 넣으시는 것이다.
그분은
이 목적을 위해
우주를 창조하셨다.
로마서 8장,
특별히 1절부터 17절까지는
교리적인 가르침이나 권면이나
권유나 지침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계시와 체험에 따라
이 부분을 썼다.

로마서 8장은
삼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세우신 후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시고 획득하신 것을
말한다.
먼저 하나님은
선민을 소유하시기 위해,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의 일을 완성하셨다.
결국 그분은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육체 되심을 이루셨다.
그런 후 하나님은
인생의 고난을 체험하기 위해
인간 생활을 통과하셨다.
그 후 그분은
모든 것을 포함한
죽음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 죽음 안에서
우리의 죄들을 없애셨고,
그 옛 창조를 끝내셨으며,
또 그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셨다.
그분은
죽음 안으로 들어가셨고,
죽음을 통과하셨으며,
죽음에서 밖으로 나오셨고,
또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육체 되심 안에서
그분은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
물질적인 몸을 입으셨고
육체가 되셨다.
그리스도는
구속하는 죽음과
생명을 나누어 주는 부활 후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 영이 되셨다.
이러한 두 필요를 위해
하나님은
두 모습을 취하셨다.
첫째는
구속의 성취를 위한
육체의 모습이고,
둘째는
생명을 나누어 주기 위한
그 영의 모습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에
승천 안으로 들어가셨고,
승천 안에서
사람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머리의 권위를 받으셨고,
영광스럽게 되셨으며,
관을 쓰셨고,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이들의 주님이 되셨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가장 높은 이름과 칭호를
받으셨다.
이분께서 바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시고 얻으시고 달성하신,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한 분께서 이제
우리에게 도달하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와 하나 되시기 위해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부활과 승천 안에 계신다.

로마서에서 우리는
완전히 과정을 거치신
완성되신 하나님을 본다.
그분은
모든 과정을 통과하심으로,
사람이 되심과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심을 포함한
그분의 경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
로마서 8장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성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로마서 8장에서
삼일 하나님은
그 영이 되셨다.
9절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시고,
11절에서는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라 불리신다.
그러므로 그 영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영 하나님을
포함하신다.
그분은
삼일 하나님의 삼일 영이시다.

삼일 하나님은
그 영의 형태로
우리에게 도달하신다.
삼일 하나님의
적용과 도달하심이신
그 영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결이시다.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적용되시고 도달하시는 삼일 하나님,
곧 과정을 거치셨고 완결되셔서
그 영이 되신
삼일 하나님을 본다.
이분은
우리 안에 내주하기를
갈망하시는데,
이는
우리의 내적 존재 전체를 차지하고
완전히 점유하기를
기다리시고 기대하시며
그것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도
우리 안에 작용하는
법칙이 있다.
그것은
내주하시는 삼일 하나님의 풍성인
생명의 영의 법이다.

이 모든 풍성을
누리는 길은 다만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 영의 일들을 생각하고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어야 한다.
그 영의 일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이다.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일들이 아닌
다른 것들에 두지 않는 것은
우리의 내적 존재 전체가 완전히
그리스도께 사로잡히기 위한 것이다.

로마서 8장은
성경 전체의 초점이고
우주의 중심이다.
따라서 우리가
로마서 8장을
체험하고 있다면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영원 과거에 하나님은
그분께서 구속하신
사람들 안에 들어가셔서
그들의 생명이 되시고
그들을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이 되게 하시려는
목적을 세우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인데,
이는
하나님의 의도가
사람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표현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들어가시어
사람의 생명과 내용이 되시고
사람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심으로써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살고
심지어 하나님을 살아 낼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사람 안에서부터
표현되신다.

스가랴서 12장 1절은
“여호와,
곧 하늘들을 펼치시고
땅의 기초를 놓으시며
사람 안에 영을 지으시는 분께서
이렇게 선포하신다.”
라고 말한다.

사람의 영은
하늘들과 땅과
동일한 위치에 놓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서
거하기를 갈망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늘들은
그 땅을 위해 있고,
그 땅은
사람을 위해 있으며,
사람은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살고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한 영을 가지고
창조되었다.

우주 안의 중심 초점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고
지금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위대한 기적이다.
우주 안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삼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고
우리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과 인격이시며,
우리를
그분의 집으로
만들고 계신다.

삼일 하나님은
육체 되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통과하셨고
생명의 영의 법이 되셔서
한 ‘과학적인’ 법칙,
곧 한 자동적인 원칙으로
우리의 영 안에
설치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가장 큰 발견,
심지어 가장 큰 회복 중 하나이다.

로마서 8장
2절과
9절부터 11절까지에 나오는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자신,
내주하시는 영은 모두
생명을 주시는
복합되신 영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에서
‘하나님’과 ‘영’은 동격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영께서
하나이심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의 영’과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과
‘생명의 영’이라는 표현은
그 영께서
그리스도이시고
부활시키시는 분이시며
생명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삼일 하나님의 셋 모두
생명으로서
우리 안에 계시다.

로마서 8장에서
그 영은,
우리에게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결과 도달하심과 적용이 되시는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영이시다.

삼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영으로서
우리 안에 계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생명과 인격으로 취함으로써
그분을
체험하고
누리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그릇(용기)이다.

로마서 8장 2절에서
‘법’은
모세의 율법이나
어떤 특정한 계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생명의 영의 법의
기능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중력의 법칙이
사물들을
땅에 떨어지게 하고,
소화의 법칙이
우리가 먹은 음식물을
소화되게 하듯이,
우리 안에 분배된
신성한 생명에도
하나의 법이 있다.
이것은
신성한 분배가
법에 의해,
곧 자동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하나의 원칙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 법이 작용함으로써
신성한 생명의
본질, 요소, 풍성이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러한 놀라운 법을
소유하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신성한 법의 작용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 신성한 법이
우리 안에서 운행할 때
우리는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하심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8장 10절에서
영이
살아 있다고 말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이
생명,
또는 헬라어로 ‘조에’라고
말한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이 ‘조에’는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영이
‘조에’가 되게 한다.
이제 삼일 하나님께서
생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도
생명이다.

이것을 본다면
우리는
온 우주에,
특히 사탄에게
우리의 영이 생명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인
우리의 영이
‘조에’라고 외칠 것이다.
오, 이 계시가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성질을 내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성질을 억누르지 말라.
그 대신 단순히
이렇게 선포하라.
“내 영은
‘조에’이다!”
마찬가지로,
아내나 남편이
여러분을 힘들게 한다면,
따지지 말고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아내나 남편에게
여러분의 영이
‘조에’임을
말해 주라.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다.
주님을 찬양하자!
우리의 영은
‘조에’이다!

로마서 8장 6절을 살펴보자.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생각 역시
‘조에’가 될 수 있음을
본다.
우리가
생각을 영에 둘 때
우리 혼을 대표하는
우리 생각이
‘조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신성한 생명이
우리 혼 안으로
분배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생각을 영으로 돌이키는 것을
실행해야 한다.
한담을 하려고 하는가?
생각을 영으로 돌이키라.
성질을 내려는 유혹을 받는가?
생각을 영으로 돌이키라.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가르침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돌아가라.
그 말씀은
삼일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영 안으로 분배될 때
우리의 영이
생명이 된다는 것을 계시하고,
또한 영에 둔 생각이
생명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로마서 8장 11절은
하나님의 분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계시한다.
이 절은
‘조에’가
그 영을 통하여
우리 죽을 몸 안으로
분배될 수 있음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과 생각이
‘조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까지도
‘조에’로 충만하게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삼일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존재의 세 부분 안으로
분배되는 것에 대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필요가 있다.
“주님,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저의 영은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제 제가
생각을 영에 둔다면,
저의 생각도
생명이 될 것입니다.
오, 주님,
당신을 얼마나 찬양하는지요!
당신의 내주하시는 영을 통하여
당신의 ‘조에’ 생명은 심지어
저의 죽을 몸 안으로도
분배될 수 있습니다.
주님,
이것으로 인해
당신께 경배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육체 되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과 승천을 통과하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지금 그분은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영으로서,
우리가
참여하고
체험하며
누릴 수 있는
신성한 ‘조에’이시다.
먼저 그분은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의 중심인
우리의 영 안으로 분배하신다.
그분은
이 중심에서
우리의 생각 안으로
‘조에’를 확장시키시고
우리의 생각을
‘조에’로 적시신다.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 죽을 몸 안으로 확장되시며,
그럼으로써 우리 온 존재를
‘조에’로 만드신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조에’의 사람들이 된다.

우리가
주님 안으로 믿어 들어감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때,
주님은
생명의 영의 법으로서
기능을 발휘하셔서
하나님의
신성하고 창조되지 않은
생명(헬라어로 ‘조에’)이신
그분 자신을
우리의 영 안으로
분배하셨다.
우리는 모두 적어도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인
우리의 영이
조에라는
위대한 계시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둘 때,
우리의 혼을 대표하는
우리의 생각은
조에가 된다.
또한 생명의 영의 법의
운행을 통해
조에는
우리의 죽을 몸 안으로
분배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세 부분으로 된 우리 전 존재에서
조에의 사람들이 되어,
조에의 도시인
새 예루살렘이 된다.

궁극적으로, 이 생명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게 할 것이고,
이것에 의해
주님께서 돌아오셔서
우리를
다음 시대로
안내하실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경과 우주의 중심 초점이
로마서 8장에 있다.

우리는
놀라운 생명의 영의 법,
곧 과정을 거치셨고
우리 안으로 분배되셨으며
지금은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삼일 하나님이신
바로 그 법을
누릴 수 있다.
이 법과 협력하는 길은
영 안에서 행하고
단순히 영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 안에 있는 것은
신성한 전기를
켜는 것이다.
영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스위치를 계속 켜 놓는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법이신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과
협력하는 길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흡수하는 것이며,
기도를 통해 사람은
하나님을 얻는다.
하나님은 실재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분을 접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얻을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 자신을 얻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흡수하는 것에 달려 있다.
시편 27편 1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추신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빛이시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이시라고
말한다.
여기에
두 가지 다른 표현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추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언가를 성취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빛이시고
우리의 구원이시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바로 그것이시라는 의미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빛도, 구원도 없다.

다윗은
체험 가운데서
계시를 받음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빛이시고
그의 구원이심을
알게 되었다.
이것에 근거하여,
그는
“내가
여호와께 청하여 온
한 가지
/ 그것을 구하리니
/ 내 평생에
/ 여호와의 집에 거주하며
/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 그분의 성전에서
여쭙는 것이라네.”
(시 27:4)라고 말했다.
다윗은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을 흡수하기를
원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을
접촉하고 흡수했다.
그는
하나님을 접촉할 때 즉시
속이 밝아졌고,
하나님을 흡수할 때 즉시
그의 안에
구원을 받아들였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의 안에서
그의 빛이 되시고
그의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동안
한숨지으면서,
자신이
무능하고 약하며
일어날 수 없고 볼품없으며
목마르다는 것을
자백하고,
복음을 전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으며
형제자매를 만나도
교통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자백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내적 상태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그러한 상태를
하나님께 가져가야 한다.
“내 있는 모습 그대로”
(영어 찬송가 1048장)라는
찬송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상태를
개선하거나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나아가려는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으며,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한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상태 그대로일수록
더 좋다.
조금도 개선할 필요가 없고,
기다릴 필요도 없으며,
준비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비록 우리가
약하고 혼란스럽고
슬프고 할 말이 없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믿는 이는 반드시
매일 상당한 시간을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배워야 한다.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가 좋다.
그렇지만 규칙을 정하지 말라.
규칙을 정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매일
하나님을 접촉하고,
그분을 기다리며,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르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흡수한다면
우리의 상태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능력과 힘과
승리와 열심과
일어설 힘 등
많은 것을 구할
필요가 없다.
단지 우리가 매일
하나님을 접촉하기만 한다면,
얼마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을
볼 것이다.
우리에게 빛이 필요하다면,
그분께서
빛이 되실 것이다.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그분께서
능력이 되실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이시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많이 바라보아야 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르면서
그분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그분께 감사하며
그분을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신 일과
그분의 인격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우리의 상태나
주변 환경을
보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묵상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께서
생명의 영의 법으로서
믿는 이들의 생활을 위해
믿는 이들에게
신성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하심을
체험하는 것이다.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우리의 영 안에 설치되신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은
전기에 비유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신성한 ‘전기’의 법으로
운행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이 법의 ‘스위치를 켜는’
협력을 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주님과 계속 연결되어 있으면서
우리의 영 안에서
주님을 계속 접촉하는 동안,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 안에서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힘들이지 않고
작용한다.

기도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을 흡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접촉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흡수할 것이고,
하나님을 더 흡수할수록
우리의 빛과 구원이신
하나님을 더 누릴 것이다.

시편 27편 1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니”
라고 말한다.
다윗은
아름다움이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을
접촉하고 흡수했다.
이처럼 다윗은
내적으로
빛 비춤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내적 상태를
그분 앞에 올려놓고,
우리가
모든 방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그분께 말씀드려야 한다.
비록 우리가
약하고 혼동되고
슬프고 무슨 말을 할지 모르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내적 상태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그러한 상태를
하나님께 가져가야 한다.

우리의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
그분을 주목하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그분께 경배하고
그분을 흡수함으로써
그분을 접촉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고,
그분의 달콤함을 맛보며,
빛과 능력이신
그분을 받아들이고,
내적으로
평화롭고 밝고
강하고 능력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공급하는 중에도
그분께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는
공과를 배우게 될 것이다.

기도의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을 흡수하는 것이고,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
곧 하나님께서 표현되시게 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말하거나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롯을 두고 기도했으며,
또한 소돔을 두고 기도했다.
그러나 이 장의 끝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신 뒤에”
라고 말한다.
비록 기도한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지만,
말씀하신 분은
여호와이셨다.
바로 여호와께서
말씀을 마치신 분이시며
의도를 표현하신 분이셨다.

참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우리가
자신의 말을 하거나
우리 자신을 표현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이며
그분 자신을
표현하시게 하는 것이다.

기도의 의미는 또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시편 27편 4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사모할 뿐 아니라,
‘그분의 성전에서 여쭙기’를
사모한다고
말한다.
여쭙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드린 말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
곧 하나님의 표현이 된다.

참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게 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 표현하여
다시 들려드리는 것이다.
“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실 때에
/ 제 마음으로
주님께
‘오, 여호와님!
제가
주님의 얼굴을 찾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시 27:8)

우리가
하나님을 실지로
만지고 접촉하고 흡수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실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내적인 말씀하심에 따라
기도할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흡수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내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하신
그분의 말씀으로
그분께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표현한다.

우리의 기도의
첫째 방면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며,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름 바르시면서
일에 대한
그분의 부담을 주시고
그분의 의도를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그런 다음
우리의 기도의
둘째 방면은
일에 대한
주님의 뜻과 부담에 관해
주님께 간구하면서
주님께 여쭙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과 동역하여
기도의 목적을 수행한다.

여쭙는 기도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다.
다윗은 자주
여호와께 여쭈었기 때문에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알았다.
하나님께서
신언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신 후에,
다윗은
‘여호와 앞에 앉아’
주님께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렸다.
그런 다음에 다윗은,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기에
“이 종은
주님께
이렇게 기도드릴
마음을 품었습니다.”라고
주님께 말씀드렸다.

주님과의 교통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과 대화함으로써,
생명의 영의 법이신
내주하시고,
설치되어 계시고,
자동적이시고,
내적으로 운행하시는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

사탄은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
거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 안에 계신다.
이것은
우리를
로마서 8장 6절로 인도한다.
이 절은
참된 비결을
담고 있다.
이 절에는
세 가지 것,
곧 생각과 육체와 영이 있다.

이제 우리의 체험은
우리 자신
곧 우리의 생각을
누구에게 또는 무엇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생각을
육체 즉 사탄에게 둔다면,
그 결과는 죽음이다.
아담은
지식나무의 열매에 참여했을 때
이렇게 했으며,
동일한 결과인
죽음을 맛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생명이신 하나님께 둔다면,
그 결과는
생명과 평안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육체를 이기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죄의 법을 패배시키려고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다만
그 영과 함께 서서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 안에서의 구출이다.
우리는
영과 함께 서고
생각을 영에 두며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구출받을 것이다.

로마서 8장 6절의
비결은
우리 모두가
꼭 배워야 하는 비결이다.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지낸 후,
이제 나는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도
이 가르침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주님 자신에 관한 가르침들,
즉 주님이 누구이신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이루셨는지에 대한 가르침들은
매우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과 관련해서는
로마서 8장 6절에 대한 가르침이
가장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는
생각을
영에 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의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전기 기구들을 사용하는 것을
예로 들어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전기 기구의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는
방법만 알면 된다.
우리가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는 일에서
누구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와 가르침을
연구해야 하지만,
참된 비결은
로마서 8장 6절에 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로마서 8장 6절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알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거의 성취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밤낮으로
성경을 연구해 왔지만,
우리의 영적인 체험과 관련하여
로마서 8장 6절만큼
중요한 말씀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제가
당신을 선택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저의 노력과 분투를 내려놓도록
도와주십시오.
악이나 유혹을 이기려고
제 스스로 어떤 것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오히려 제가 항상
당신을 의지하고
당신과 함께 서 있으며
당신을 신뢰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저는 결코
자신을
교정하거나 구출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항상 제 자신을
당신께 맡기고
당신을 신뢰하며
당신을 의지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는 체험은
달콤하고 매우 유용하다.
그 유용성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기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 집에는
전기 기구를 언제든지
콘센트에 꽂아 사용할 수 있도록
전기가 들어와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즉시
주님께
‘플러그를 꽂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대단히 유용하시기 때문이다.
전기가
집 안에
들어와 있고
심지어 집에서 가장 깊고 숨겨진 방에도
들어와 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에
들어와 계신다.
비록 신성한 전기가
대단히 유용할지라도,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그 신성한 전기를
기꺼이 사용하려는
자원함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고
그 비결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항상 기꺼이
신성한 전기를 사용하고
‘우리 자신을
콘센트에 꽂기’를
원해야 한다.
우리가
수많은 메시지를 들을지라도,
그 모든 메시지들에서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참된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생각을
영에 두고
항상 이 실재 안에서 살기를
실행해야 한다.

우리가
영의 내적 감각에 주의할 때,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게 된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비결은
로마서 8장 6절에서 발견된다.
이 말씀은
생명의 영의 법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영적 체험과 관련하여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절이다
―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생각을
육체에 두는 것은
육체 편에 서고,
육체와 협력하며,
육체에 찬성하는 것이다.
생각을
영에 두는 것은
영을 주의하고,
영의 편에 서며,
영과 협력하고,
영에 찬성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영의 내적 감각에 주의하여
생명과 평안의
내적 감각을 따를 때,
우리는
주님의 유일한 움직임을 위해
몸의 머리이신 주님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복음 봉사에서
그리스도의 포로였다.
그리스도의 포로로서
그는
자신의 바깥 환경에
통제받는 것이 아니라
‘내 영 안에 안식’이 있는지의 여부에
통제받았다.
그의 존재에서
그의 영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었으며,
그는
그의 연합된 영에 의해
지배받고 통제받고
지시받고 움직이고
인도받았다.

궁극적으로,
내주하는 자동적인 생명의 영의
법을 누림으로써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하심 안에서 사는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며,
그 목표는
우리를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여
새 예루살렘이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다.

1일

롬 7:24-25 오,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롬 8:2 왜냐하면 생명의 영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롬 8:9 그러나 … 여러분은 육체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로마서 5장에서는 아담 안에 있고, 6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7장에서는 육체 안에 있고, 8장에서는 영 안에 있다. 우리는 육체 안에 있을 때 아담을 체험하고, 영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5장의 아담은 오직 7장의 육체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고, 6장의 그리스도는 오직 8장의 영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다. 갓난아기는 틀림없이 아담 안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린 아기에게서 아담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체험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육체 안에 있는 것을 더욱더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가진 것을 육체 안에 있을 때 체험한다.

같은 원칙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영 안에 있을 때만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영을 따라 행할 때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을 체험한다. 그리스도의 풍성은 아담의 풍성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풍성을 체험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로마서 8장은 사람들을 분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또 뒤로 물러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장은 필사적으로 해방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장이다. 우리는 7장의 마지막 부분에 의해 이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오,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겠습니까?”라고 부르짖는다. 바울은 필사적이었다. 그는 극도로 추구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해방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시도한 모든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었지만, 선을 행하는 행함은 없었다. 그는 필사적인 사람이었다. 8장은 그러한 사람을 위한 장이다. 8장은 1장에 있는 사람이나 2장에 있는 사람을 위한 장이 아니라, 7장의 끝부분과 8장의 시작 부분에 있는 사람을 위한 장이다. 그러한 필사적인 부르짖음 후에 응답이 왔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유죄판결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왜 유죄판결이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영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죄판결이 없는가? 생명의 영의 법이 바울 안에 이미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로마서 8장은 사람을 분발시키거나 뒤로 물러난 데서 돌아오도록 이끌지 않는다. 이 장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이들은 모두 필사적인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구원받고 주님을 추구하면서, 추구하는 길에서 실패한 후 필사적이게 되었다. 우리는 필사적인 이들이어야 한다. 이 장은 주님을 향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우리를 분발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이 장은 우리가 우리 안에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조망을 제시한다.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고 필사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러한 조망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어떤 ‘방법’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조망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이루어진 것, 우리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단지 어떤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조망이 필요하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법이시라는 것에 대해 분명한 조망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법이신 하나님은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지 않으신다. 오늘날 그분은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법이시다. 여러분은 그분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법이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 특별한 기도를 한 적이 있는가? 나는 여러분이 계속해서 자신의 약함 안에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옛 방식으로 기도할까 봐 염려된다. 여전히 여러분은 성질을 내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주님께 구한다. ‘전기’가 이미 들어왔기에,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 달라고 ‘발전소’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영의 법으로 여러분 안에 설치되어 계심을 참으로 깨달았는가? 그분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법으로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분께 협력해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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