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ing Formed
into an Army
to Fight with God
for His Interest on Earth
한 군대 안으로
편성되어
하나님과 함께
땅 위에 있는
그분의 이익을 위하여
(관심사를[대단히 중요한 것을] 위하여)
싸움
민수기를
단순히 방황과
반복되는 실패에 관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민수기는
승리와 영광에 관한
책이다
― 민 1:1-3, 18, 24, 45-46,
2:1-2, 17, 32, 33:52-53.
민수기는
깃발과 표지(標識)가 있는,
다시 말하면
편성과 질서가 있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제시한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거처뿐 아니라
군대를 가지셨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 민 2:17, 출 25:8, 6:26,
7:4, 12:41, 51, 13:18.
민수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광스러운 책이다.
민수기의 처음에서
하나님은
군대를 편성하셨고,
민수기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이 군대가 정복한
땅을 나누는 일에 관한
기록을 본다
― 민 1:1-3, 33:52-53.
민수기에 묘사된
그림은
하나님께서
땅을 되찾아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서
움직이시고
그분의 원수를
정복하실 수 있도록,
하나의 실체로
함께 연합된
삼일 하나님과
그분께 선택받은
백성을
보여 준다
― 민 10:33-36, 엡 3:11.
민수기의 중심 사상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삶의
의미와 증거와 중심이시며,
그들의
여정과 전쟁에
인도자와 길과 목표이시라는 것이다
― 민 1:5-53, 골 2:9.
민수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삶의 의미로서
계시되신다.
증거궤는
증거의 성막의
중심이었다
― 민 1:50, 53.
성막과 함께하는
증거궤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의미였다.
우리 인생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를 통해
표현되시는 것이다
― 골 2:9, 1:27.
하나님의 경륜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주의 목적이시고
또한 우리 인생의
의미이심을
깨닫기 시작한다
― 골 1:15-20, 2:2,
9-10, 17, 3:4, 10-11.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의미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증거이시다
― 민 1:53.
증거궤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의 증거이신
그리스도를
관심하는 것이었다.
구약에서
증거는
율법을 가리킨다.
율법이 기록된
두 돌판은
증거판이라 불리었고
(출25:21)
궤 안에 두어졌다.
증거판이
궤 안에 넣어졌기 때문에,
이 궤는
증거궤라고 불리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하나님께서
어떠한 하나님이신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묘사인
율법은
신성한 모든 속성들을 가지신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 골 2:9.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중심이시다
― 골 1:15, 18.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막 주위에
진을 친 방식으로
묘사된다
― 민 2:2.
오늘날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중심으로
취해야 한다
― 히 2:12.
그리스도는
인도자와
길과
목표이시다
― 마 23:10, 요 14:6, 빌 3:12-14.
그리스도는
움직이시고
행동하시며
항상 앞으로 나아가시는
분이시다.
앞으로 나아가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도자(마 23:10)와
우리의 길(요 14:6)과
우리의 목표(빌 3:12-14)이시다.
교회 안에서
유일한 인도자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길을 가고 있는
우리를
그분의 목표를 향하도록
인도하고 계시는데,
길과 목표는 둘 다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이다.
빌립보서 3장
12절부터 14절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표,
곧 우리의 푯대가
되셔야 함을
말해 준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힘써 나아가야 하는
목표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아니시라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그분의 집과 함께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수 있는
입지를 얻으실
길이 없을 것이다
― 마 16:16-19.
민수기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백성이
어떻게 제사장 군대로
편성되어
하나님과
여행하고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권익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 민 1:1-4:49, 9:15-10:36, 12:16,
20:1-21:35, 31:1-54, 33:1-49.
군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처소와 함께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입지를
이 땅에서
얻으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백성이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다
― 출 12:41, 51, 13:18.
민수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볼 수 있는데,
바로 군대의 편성과
그 군대의 여행과
군대의 싸움이다
― 민 10:33-36.
군대의 편성은
싸움을 위한 것이었고,
싸움을 위해서는
군대가
한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항상
한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
이동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집을 위해
건축된 한 백성을
얻으실 수 있도록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 민 33:1-49.
민수기 1장과 2장은
이스라엘 자손이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군대로 편성되었음을
계시해 준다.
이 군대는
하나님의 증거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 민 1:1-3.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증거를
보호하기 위해
싸울 수 있는
군대로 편성되었다.
민수기의 그림에 따르면,
군대는
성막이 세워진
범위 곧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성막 둘레에
진을 쳤다
― 민 2:2.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그분의 증거를 위해
싸우는 군대로
보셨다
― 출 12:41, 51, 13:18.
겉으로 보기에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었지만,
사실상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싸우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
곧 증거의 성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는
두 가지 주된 기능이
있었는데,
하나는
원수들과 싸우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대표하는
성막을 지키는
기능이었다
― 민 1:1-3, 21:1-3.
이스라엘 집을
싸우는 군대로
편성하는 것에서
우리는
창세기 1장
26절부터 28절까지에
계시된 원칙을
본다.
하나님은
사탄의 강탈하는 손으로부터
이 땅을
정복하고
되찾아오는
일에 있어서
그분을 대표하는
단체적인 한 사람을
얻기를 갈망하신다
― 엡 4:24.
하나님은
가나안이라 불리는
좋은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의
강탈하는 손에서부터
이 땅을
취해야 했다.
그들은
모든 원수들과 싸우고
그들을 패배시킴으로써
그 땅을 얻어야 했다
― 민 21:1-3.
하나님의 군대는
아모리 족속의 왕인 시혼과
바산 왕인 옥을
패배시켰다
― 민 21:1-3, 21-35.
아랏 왕(민 21:1)과
아모리 족속의 왕(21절)과
바산 왕(33절)은
요단강 동쪽에 있는
‘문지기들’로서
사탄을 위해
가나안 땅
곧 어둠의 왕국을
지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좋은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왕들이
통치하고 있는
영토를 지나가야 했으며,
그들과 싸우고
그들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차지해야 했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신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
교회가 반드시
이러한 왕들로 상징된
원수들을
패배시키고
그들의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엡 3:8, 6:10-12.
구약의 예표에서
가나안은
두 방면을
나타낸다.
긍정적인 방면에서
가나안은
풍성한 땅으로서
(신 8:7-10)
측량할 수 없는
풍성(골 1:12, 엡 3:8)을 가지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부정적인 방면에서
가나안은
사탄의 왕국 중에서
공중의 부분
곧 하늘의 부분을
상징한다.
이 세상의 왕(요 12:31)이며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엡 2:2)인
사탄은
권세를 가지고 있고
(행 26:18)
그의 천사들(마 25:41)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은
사탄의 부하들로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지배자들(엡 6:12)이다.
따라서 사탄은
그의 왕국(마 12:26)과
어둠의 권세(골 1:13)를
가지고 있다.
가나안 족속은
사탄을 따른
타락한 천사들
곧 반역한 천사들(계 12:4, 7)의
예표인데,
이들은
사탄의 왕국(비교 단 10:13, 20)에서
능력자들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이
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좋은 땅을 차지하고
누리기 위하여
가나안 족속과 맞서 싸운 것은
성도들이
모든 것을 포함한 땅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지체를 포함한
교회 전체가
‘하늘들의 영역에 있는
악한 영적인 세력들’(엡 6:12)과 맞서
영적 전쟁을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예표이다.
교회는 반드시
이러한 단체적인 전투원이 되어서
사탄의 공중의 세력과 싸워,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더 많이 얻도록 해야 하며,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고 확장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셔서
땅을
상속받으실 수 있게
해야 한다
― 마 16:27-28, 계 11:15, 12:10.
성경 전체는
우리에게
한 가지,
곧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의 의미와
증거와
중심과
인도자와
길과
목표로
취하고,
계속 나아가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군대로 편성된
한 백성을
얻으심으로써,
이 땅에서
입지를 얻으시고,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집으로
건축된
한 백성을
얻으시는 것이다
― 창 1:26-28, 출 12:41, 51, 13:18,
마 16:16-19, 엡 6:10-12, 계 17:14,
19:11-16, 21: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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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땅에서의 하나님의 권익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군대로 편성됨”
6일
엡 6:12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이 있는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지배자들과
하늘들의 영역에 있는
악한 영적인 세력들에게
대항하는 것입니다.
계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세상의 왕국이
우리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었으니,
그분께서
영원무궁히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큰 음성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예표에서
가나안은
두 방면을
나타낸다.
긍정적인 방면에서
가나안은
풍성한 땅으로서
(신 8:7-10)
측량할 수 없는
풍성(골 1:12, 엡 3:8)을 가지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부정적인 방면에서
가나안은
사탄의 어둠의 왕국 중에서
공중의 부분
곧 하늘의 부분을
상징한다.
이 세상의 왕(요 12:31)이며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엡 2:2)인
사탄은
권세(행 26:18)를 가지고 있고
그의 천사들(마 25:41)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은
사탄의 부하들로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지배자들(엡 6:12)이다.
따라서 사탄은
그의 왕국(마 12:26)과
어둠의 권세(골 1:13)를
가지고 있다.
가나안 족속은
사탄을 따른
타락한 천사들
곧 반역한 천사들(계 12:4, 7)의
예표인데,
이들은
사탄의 왕국(단10:13, 20)에서
능력자들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이
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좋은 땅을
차지하고
누리기 위하여
가나안 족속과
맞서 싸운 것은
성도들이
모든 것을 포함한 땅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지체를 포함한
교회 전체가
‘하늘들의 영역에 있는
악한 영적인 세력들’(엡 6:12)과 맞서
영적 전쟁을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예표이다
(민 21:1).
교회는 반드시
이러한 단체적인 전투원이 되어서
사탄의 공중의 세력과 싸워,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더 많이 얻도록
해야 하며,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고 확장하여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셔서
땅을
상속받으실 수 있게
해야 한다
(민 21:1).
성경 전체는
우리에게
한 가지,
곧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의 의미와
증거와
중심과
인도자와
길과
목표로
취하고,
계속 나아가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군대로 편성된
한 백성을
얻으심으로써,
이 땅에서
입지를 얻으시고,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집으로
건축된
한 백성을
얻으시는 것이다.
민수기는
세 부분,
곧 군대로 편성됨(1:1-9:14)과
여정(9:15-20:29, 21:4-20, 33:1-49)과
전쟁(21:1-3, 21:21-32:42, 33:50-36:13)으로
되어 있다.
한 백성을
얻으셔서
그들을
군대로
편성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성취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군대는
열두 지파로
편성되었다.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았고
이들이
열두 지파가 된 것은
놀랍다.
이 열두 지파 가운데
레위 지파는
성막의 봉사를 위해
하나님께 바쳐졌다.
이 때문에
한 지파가
부족하게 되었는데,
이 부족한 부분은
요셉이
그의 두 아들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해
두 배의 몫의
땅을 받음으로써
보충되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그 공백을 채움으로써
지파 수를
열둘로 유지했다.
더 나아가
헌신한 레위 지파 안에는
아론의 집안
곧 제사장 집안이
있었다.
레위 지파에는
세 자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막의 둘레 세 면에
진을 쳤다.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자손들은
성막의 정면에
진을 쳤다.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친
그러한 배열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군대로 편성되기 전에
온 땅은
하나님의 원수에게
점령되었었다.
그러나 민수기에서
우리는
한 족속,
곧 이스라엘 족속이
구원받고
거룩하게 되고
군대로 편성되고
대형을 이룬 것을
본다.
이것은
원수에게
수치였다.
사람의 어떤 생각으로도
민수기와 같은 책을
쓸 수 없다.
군대 편성에 관한
여러 기록들이 있지만
민수기와 같은
기록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글을
쓰실 수 있으며,
그런 군대 편성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준비하실 수 있었다.
이 군대에 속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모든 것으로,
곧 그들의
삶의 의미와
증거와
중심으로,
그리고 그들의
인도자와
길과
목표로
취한다.
5일
엡 6:10-11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강한 권능 안에서
굳세게 되어야 합니다.
마귀의 계략에 대항해
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완전한 전투 장비로
무장하십시오.
이스라엘 집을
싸우는 군대로
편성하는 것에서
우리는
창세기 1장에 계시된
원칙을
다시 본다.
즉 하나님은
사탄의
강탈하는 손으로부터
이 땅을
정복하고
되찾아 오는 일에 있어서
그분을 대표하는
단체적인 한 사람을
얻기를
갈망하신다.
하나님은
가나안이라 불리는
좋은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의
강탈하는 손에서부터
이 땅을
취해야 했다.
그들은
그 땅을
쉽게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은
서서히 전쟁을 치르면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패배시켜야 했다.
이 싸움의
목적과 목표는
그 땅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민수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중요한 원칙들이
있는 책이다.
우리는 지금
군대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야 하고,
우리가
그 군대 안에 있는지의 여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문제이다.
건축이 없다면
군대가 없다.
교회가 건축되지 않는다면
제사장 체계가 없고,
제사장 체계가 없다면
군대가 없다.
아랏 왕과
아모리 족속의 왕(민 21:21)과
바산 왕(33절)은
요단강 동쪽에 있는
‘문지기들’로서
사탄을 위해
가나안 땅
곧 어둠의 왕국을
지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좋은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왕들이
통치하고 있는
영토를 지나가야 했으며,
그들과 싸우고
그들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차지해야 했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신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
교회가 반드시
이러한 왕들로 상징된
원수들을 패배시키고
그들의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 21:1).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싸울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아랏 왕을 패배시켰고
그 백성을 멸했다
(민 21:1-3).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첫 번째 원수를
정복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또한
아모리 족속의 왕인 시혼과
그 백성,
그리고 바산 왕인 옥과
그 백성을
패배시켰다
(민 21:21-35).
이것은
그들이
가나안의 두 문지기들을
정복했음을
뜻한다.
이스라엘 자손은 또한
미디안 족속과
그 다섯 왕들을
패배시켰다
(민 31:1-12).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 족속을 패배시킴으로써
가나안 입구를 지키는
군대를 정복했다.
하나님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백성이
패배시킨 왕들은
공중에 있는
영적인 세력들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상징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세력들에게 대항해
싸워
그들을 패배시킬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 왕들에게 대항해
싸운 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확장되고
그곳에
세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좋은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원칙은 동일하다.
우리가
공중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세력들을
패배시킬 때
하나님의 왕국은
분명히 확장되고 세워진다.
거룩한 전쟁을
수행해 나가는
제사장 군대로서
하나님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처,
곧 증거궤가 함께하는
증거의 성막을
짊어졌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자신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의 어깨 위에는
하나님의 거처가
있을 뿐 아니라
거주자이신 하나님 자신도
계신다.
교회가
하나님의 증거를
짊어지고 있는 한,
교회는
하나님의 거처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거처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오늘날
이러한 하나님의 증거,
이러한 하나님의 거처가
우리의 어깨 위에 있다.
증거의 성막은
하나님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이
그분으로 건축되어
이 땅에 있는
그분의 거처
(신약에서는 교회)가 된 것을
상징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가
하나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일종의 예시이고,
교회의 역사는
그 예시의 실재이다.
이것은
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에
기록된 것이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
계시된 것의
예시라는 뜻이다.
증거궤는
하나님께 선택받고 구속받은 사람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가운데
궤를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우리와 친히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다.
4일
출 12:51
바로 그날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을
군대별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다.
출 13:18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을
홍해에 이르는
광야 길로
돌아가게
인도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 땅에서
전열을 갖추고
올라갔다.
빌립보서 3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푯대와 목표이셔야 함을
지적한다.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우리는
목표 없는 이들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힘써 나아가야 하는
목표이시다.
민수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이
그분의 군대로
편성되고
그들의 여행에서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것을
본다.
군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처소와 함께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입지를
이 땅에서
얻으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백성이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민수기와 레위기를
비교하고자 한다.
레위기는
구속받은 이들의
경배와 생활을
강조하는 반면에,
민수기는
구속받은 이들의
여정과 싸움을
강조한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의 구속받은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경배하고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인지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민수기에서
하나님의 구속받은 이들은
군대로 편성되었고
여행 내내
그분을 위해 싸웠다.
민수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볼 수 있는데,
바로 군대의 편성과
그 군대의 여정과
군대의 싸움이다.
군대의 편성은
싸움을 위한 것이었고,
싸움을 위해서는
군대가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항상
한 장소에서 또 다른 장소로
이동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집을 위해
건축된 한 백성을
얻으실 수 있도록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민수기에는
군대와 여정과 싸움이 있다.
민수기 1장과 2장은
이스라엘 자손이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군대로 편성되었음을
계시해 준다.
이 군대는
하나님의 증거를
보호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오늘날의 하나님의 증거인
교회의 주위에는
많은 적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과
반대 증거이기 때문에
주님의 회복에 맞서는
적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증거를 보호하는
군대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 군대가
직접적으로
회막을
돌보지 않았음을
보았다.
민수기의 그림에 따르면,
군대는
성막이 세워진
범위 곧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성막 둘레에
진을 쳤다.
회막을 지키기 위해서는
평화로운 영역이
필요했다.
열두 지파가
회막 주위에
진을 쳤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이
가는 곳마다
성막이 세워지는
평화로운 영역이 있었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교회생활의 주위에
진을 치는
청년들이 필요하다.
레위기에 이어서
봉사에 관한 책인
민수기가 있다.
민수기 4장 3절에 있는
‘봉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군 복무의 의미를
지니며,
따라서 이것은
전쟁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그분의 증거를 위해 싸우는
군대로 보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들은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
곧 증거의 성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는
두 가지 주된 기능이 있었는데,
하나는
원수들과
싸우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 안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대표하는
성막을 지키는
기능이었다.
오직 삼십 세에서
오십 세 사이에 있는
사람들만이
성막 안과
그 주위에서
일을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러나 이십 세에서
삼십 세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군인으로서
봉사할 수 있는 자격,
즉 적과 싸울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민수기 1장 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스라엘 가운데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이십 세 이상 된
모든 남자를
부대별로
세어야 한다.”
이것은
이십 세 이상의 사람들이
군인으로서의
봉사를 할
자격이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3일
마 23:10
또한 지도자라
불리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의 지도자는
오직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실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합니다.
계 1:5-6
또 신실한 증인이시자
죽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먼저 나신 분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안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분 자신의 피로
우리를
우리의 죄들에서
해방시켜 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왕국이 되게 하시어 …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의미이신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증거이시다.
구약에서
증거는
율법을 가리킨다.
율법이 기록된
두 돌판은
증거판이라
불리었고
(출 25:21),
궤 안에
두어졌다.
증거판이
궤 안에 넣어졌기 때문에,
이 궤는
증거궤라고 불리었다.
법은 언제나
그것을 만든
사람의 증거이다.
이 원칙을 적용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증거이다.
즉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하나님께서
어떠한 하나님이신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랑과 빛이시며,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는
네 가지 신성한 속성들이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묘사인
율법은
신성한 모든 속성들을 가지신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빛이시며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체현이심을
말한다
(골 2:9).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체현이시라는 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묘사이심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묘사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증거이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증거이시기 때문에
‘충성되고 신실한
증인’이라 불리신다
(계 3:14, 1:5).
하나님의 증인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증거를
지니시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삶의
의미로
취할 뿐 아니라
증언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러한 생활을 할 때,
그리스도는
그들의 증거가 되신다.
민수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증거이신 그리스도를
본다.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의 백성의
중심이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막 주위 사면 각각에
세 지파씩
진을 친 방식으로
묘사된다.
세 지파로 구성된
네 개의 진영들과
레위 지파의
세 가문이
모두
궤가 있는 성막을
그들의 중심으로 취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그리스도를
삶의 의미로,
증거로,
중심으로
취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의 의미와
우리의 증거와
우리의 중심으로
취해야 함을
보여 준다.
민수기는
우리 삶의 의미이시고
우리의 증거이시며
우리의 중심이신
이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시고
행동하시며
항상 앞으로 나아가시는
분이심을
계시한다.
앞으로 나아가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도자(마 23:10)와
우리의 길(요 14:6)과
우리의 목표(빌 3:12-14)이시다.
인도하는 것은
계속 앞에서
길을 가는 것이다.
오늘날
그분은
그분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를
그분의 목표를 향하도록
인도하고 계시는데,
길과 목표는 둘 다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이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길이나 목표가 없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도자로서
가질 뿐 아니라
우리의 길과
우리의 목표로서
가진다.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이 모든 방면들에 대한
계시가 있지만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신약만 있고
그 모든 예표가 있는
구약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러한 자세하고 섬세한
묘사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삶의 의미와 증거와 중심이시며,
인도자와 길과 목표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는
민수기에 있는
묘사가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에게
삶의 의미와 증거와 중심이시며,
그들의 여정과 전쟁에
인도자와 길과 목표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아니시라면,
하나님은
이 땅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결될
그분의 집과 함께
그분의 왕국을
세울 수 있는
입지를
얻지 못하실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왕국과
하나님의 집의
완결일 것이다.
2일
골 2:9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을 지니신
그리스도 안에
거합니다.
골 1:27
하나님은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얼마나 풍성한지를
성도들에게
알리기 원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인데,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민수기의
일반적인 개략은
구속받고
거룩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로
편성되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전진하며
그분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인
모세오경에 기록된 것은
모두 예표이다.
특별히 이 책들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교회의 예표라는 것을
본다.
이스라엘이
군대로 편성된 것처럼
교회도
군대로 편성되어야 한다.
이것에 관해
우리는
현재의 상황,
곧 외적인 모습을
보지 말아야 한다.
… 비록 우리는
군대로서의 교회의
존재에 대해
의혹을 품을 수 있겠지만,
사탄은
그러한 군대가 있음을
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군대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 군대는
하나님께서
집과 함께
왕국을 얻으실 수 있도록
항상 여행하면서
싸우고 있는
신실한 모든 이들로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성경 전체의
중심 사상이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중심이신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민수기의
중심 사상은
무엇인가?
민수기의 중심 사상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삶의
의미와 증거와 중심이시며,
그들의 여정과 전쟁에
인도자와 길과 목표이시라는 것이다.
민수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삶의 의미로서
계시되신다.
광야에서의
사십 년 동안
약 이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공업이나 상업이나 농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날마다
한 가지 일,
곧 하나님의
증거궤(7:89)로 인해
바빴다.
증거궤는
성막의 중심에 있었고,
이 성막은
증거의 성막이라
불리었다
(1:50, 53).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과 함께
궤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성막과 함께하는
증거궤가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의미였다.
증거궤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궤와 성막은 모두
하나님의 증거라
불리었다.
증거궤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의 증거이신
그리스도를
관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우리가
그분과 어울리게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우주의 의미이다.
우주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표현되시는 것이다.
어디서든
하나님께서
표현되실 때
우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객관적인 방식이 아니라
주관적인 방식으로
그분의 표현을
얻으신다.
하나님은
사람 안으로
들어가셔서
사람을 통해
표현되기를
갈망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아주 특별하다.
전구마다 오직
전기를 표현하려는
목적으로
빛을 발산한다.
하지만 전기가
전구 안에
흘러 들어가지 않는다면,
전구는
존재의 목적이
없어지게 된다.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를 통해
표현되시는 것이다.
우주의 의미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내용으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미가 없는 삶에서
의미가 충만한 삶으로
우리를
구출해 주신 것을
뜻한다.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의미가 있다.
우리의 삶이
의미가 충만한 것은
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구원받기 전에
우주의 목적과
인생의 의미를
알았는가?
분명히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우리 인생의 목적과
우리의 운명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우주의 목적이나
우리 인생의 의미는
모두
비밀이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한
이상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때에만
우리는
우주의 비밀과
이 땅에서의
우리 인생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
신언노트, 2019 01 27
한 군대 안으로
편성되어
하나님과 함께
땅 위에 있는
그분의 이익을 위하여
싸움
민수기가
방랑들과
(wanderings; 방황들과)
또 반복되는 실패들의
(of; …에 관한)
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민수기는
승리와
또 영광의
한 책입니다:
그 민수기 책은
군기들과
(standards;
부대기들과, 왕기들과)
또 깃발들과 함께
(with … ensigns;
국기들[문장들]과 함께),
곧 대형들과
(formations;
진형들과, 포메이션들과)
또 정렬과 함께
(with … and order;
또 질서와[순서와, 대형과] 함께하는)
한 영광스러운 장면을
제시합니다(presents);
그 땅 위에
하나님께서
한 거처를
가지셨던 것 뿐 아니라
또한 한 군대를
가지셨던 것은
영광스러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민수기는
한 영광스러운 책입니다;
그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 군대를 형성하셨고
(formed;
구성하셨고, 편성하셨고, 정렬하셨고),
또 그 끝에는
이 군대에 의하여 정복된
그 땅의
그 나눔의
(그 땅을 나누는)
한 기록을
우리가
가집니다.
민수기 안에 있는
그 그림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목적의
그 성취를 위하여
그 땅을
다시 얻으시기 위해
(to regain;
되찾으시기 위해, 회복하시기 위해)
그 땅 위에서
움직이시고
또 그분의 원수를
정복하실 수 있도록,
하나의 실체로(as)
함께 섞인
그 삼일 하나님과
또 그분의
선택받은 백성을
보여 줍니다.
민수기의
그 중심적인 사상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의(of life; 생명의) 그 의미,
곧 그 증거,
곧 그 중심이시고,
또 그들의
여정과 또 싸움의
그 인도자,
그 길,
또 그 목표이시라는 것입니다:
민수기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for; …에 대한)
생활의 그 의미로서
계시되십니다:
그 증거의 그 궤는
그 증거의 그 성막의
그 중심이었습니다.
그 성막과 함께한
그 증거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 생활의
그 의미였습니다.
우리의
사람의 생활의
그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고
또 우리를 통하여
표현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그 이상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 자신께서
그 우주의
그 목적이시고
또한(and also)
우리의
사람의 생활의
그 의미이신 것을
깨닫기
(to realize;
실재화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그 생활의 그 의미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증거이십니다:
그 증거궤가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 생활의 그 의미는
하나님의 그 증거이신
그리스도를
주의하는
(to take care of;
신경 쓰는, 관심하는,
소중하게 여기는,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구약 안에서
그 증거는
그 율법을 언급합니다:
그 위에
그 율법이
새겨진
(was inscribed;
쓰인)
그 두 돌판들은
그 증거로
(the Testimony;
그 증거판이라)
불렸고
또 그 궤 안에
두어졌습니다
(were placed;
놓아졌습니다, 배치되었습니다).
그 증거가(the Testimony)
그 궤 안으로
놓아졌기 때문에
(Because … was put into;
두어졌기[넣어졌기] 때문에),
그 궤는
그 증거의 그 궤로
(the Ark of the Testimony;
그 증거궤로)
불렸습니다.
하나님의 그 율법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of what God is;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관한)
한 증거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하나님께서
어떤 종류의
(what kind of;
어떤)
하나님이신지
말합니다
(tells;
말해 줍니다, 알립니다,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한 자세한 묘사인
(a portrait;
한 초상[화]인, 한 인물 사진인),
그 율법은,
그분의 모든
신성한 속성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그 체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그 중심이십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그 아이들이
(the children; 그 후손들이)
그 성막 주위에
진을 치게 되었던
(were encamped;
야영하게 되었던)
그 방식에 의하여
묘사됩니다.
오늘날
그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중심으로
취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인도자
(the leader;
그 지도자[선도자, 선두, 영수, 대표]),
그 길,
또 그 목표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움직이고 계시고,
행동하고 계시며,
또 항상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시는
(and always proceeding onward)
그 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도자,
우리의 길,
또 우리의 목표이십니다.
그 교회 안에서
그 유일한 인도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 길 위에서
(on the way)
또 그분의 목표를 향하여
(and toward His goal)
인도하고 계시는데,
이는 둘 다
(both of which)
사실상 그분 자신이십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부터 14절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표,
곧 우리의 표적이
(our aim;
우리의 푯대가[목적이])
되셔야만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향하여
(toward which)
우리가
밀고 나아가는
(press;
밀어붙이는, 미는, 밀착시키는, 몰려드는,
꼭 껴안는, 꽉 잡는[쥐는], 고집하는, 간청하는)
그 목표이십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것의 모든 것들이
(all of this;
이 모든 것들이)
아니시라면,
하나님께서
땅 위에서(on earth)
그분의 집과 함께하는
(with His house;
그분의 집으로)
그분의 왕국을
건축하시는
그 기반을
(the ground;
그 장소를[땅을, 기초를, 근거를, 영역을])
얻으시는
한 길이(a way)
없을 것입니다.
그 민수기 책은
어떻게
하나님의
선택된
또 구속된
백성이
제사장의 한 군대 안으로
형성되어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과 함께
여행하고
또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지를
기록합니다:
그 군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처와 함께
(with His habitation;
그분의 거주지로)
그분의 왕국을
건축하시는
(to build up;
강화하시는)
땅 위에서의
그 기반을
얻으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백성이
싸우기 위하여
있습니다.
민수기 안에서
우리는
세 개의 것들을
(three things;
세 가지 사항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군대의 그 형성,
그(that) 군대의 그 여행들,
또 그(the) 군대의 그 싸움입니다:
그 군대의 그 형성은
싸움을 위하여 있었고,
또 그 싸움은
그 군대가
하나의 장소 안에 머무르지 않고,
여행하는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항상 이스라엘의 그 아이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계속해서 가고 있었고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과
또 그분의 집을 위하여
건축되는
한 백성을
가지실 수 있는
기반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민수기 1장과 또 2장은
이스라엘의 그 아이들이
적들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한 군대 안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계시합니다:
이 군대는
하나님의 증거의
그 보호를 위하여
필수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그 아이들은
하나님의 증거의
그 보호를 위하여
싸울 수 있는
한 군대 안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민수기 안에 있는
그 그림에 따르면,
그 군대는
그 안에(in which)
그 성막이 세워졌던,
그 범위
(the sphere;
그 영역, 그 구체),
곧 그 영역을
(the realm;
그 범위를, 그 왕국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성막 둘레에
(around; 주위에, 삥 둘러)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황무지
(the wilderness;
그 황야[광야])
안에 있던
이스라엘의 그 아이들을
그분의 증거를 위하여
싸우는
한 군대로(as)
보셨습니다
(viewed;
여기셨습니다, 유심히 바라보셨습니다).
겉보기에는,
이스라엘의 그 아이들이
그들 자신들을 위하여
싸우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증거를 위하여
싸우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among; 사이에, 속에, …에게 둘려싸여)
그 증거의 그 성막,
곧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warfare; 교전, 전쟁, 싸움) 안에
두 가지 주요한 기능들이
있었습니다:
그 적들과 싸움의
그 기능과
또 그 성막을 유지함의
(of maintaining;
지속함의, 관리함의, 지킴의, 지지함의)
그 기능이었는데,
이는(which; 그 성막은))
그 우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를
대표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그 집의
한 싸우는 군대 안으로의
그 형성 안에서,
우리는
창세기 1장
26절부터 28절까지 안에
계시되는
그 원칙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강탈하는 그 손으로부터
그 땅을
정복함과
또 다시 얻음 안에서
그분을 대표하는
단체적인 한 사람을
갈망하십니다
(desires;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이라 불리는
한 좋은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지만,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적의
강탈하는 그 손으로부터
이 땅을
취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그 모든 적들과 싸움,
곧 (그들을) 패배시킴에 의하여
(by … defeating;
물리침에 의하여, 이김에 의하여)
그 땅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군대는
시혼
곧 아모리 사람들의 그 왕과
또 옥
곧 바산의 그 왕을
패배시켰습니다:
아랏의,
아모리 사람들의,
또 바산의
그 왕들은
그 요단의
(the Jordan; 요단강의)
그 동쪽에 있는
그 ‘문 경비병들
(gate guards; 문지기들)’이었고,
사탄을 위하여,
가나안의 그 땅,
곧 어둠의 그 왕국을
지켰습니다(guarding).
이스라엘의 그 아이들이
그 좋은 땅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그들은
이(these) 왕들에 의해
통제되었던
(controlled; 억제되었던, 지배되었던)
그 영토를 통과해야만 했고
또 그들에 반대하여 싸우고,
그들을 멸망시키며,
또 그들의 영토를
인수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이
(unsearchably;
탐지할 수 없을 만큼, 헤아릴 수 없게, 불가사의하게)
부유하신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하여,
그 교회가 반드시
이 왕들에 의하여 나타내지는
그 적들의
그 영토를
패배시켜야만 하고
또 인수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구약의 그 예표 안에서,
가나안은
두 측면들을
가집니다:
그 긍정적인 면에서,
가나안,
곧 부유함의 한 땅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부유함을 가지시는(with)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typifies;
…의 전형입니다[특징을 나타냅니다]).
그 부정적인 면에서,
가나안은
사탄의 그 왕국의,
공중의 그 부분,
곧 하늘의 그 부분을
예표합니다:
이 세상의
그 통치자로서
또 그 공중의 그 권세의
그 통치자로서,
사탄은
그의 권세와
또 그의 천사들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who)
이 세상의 그 어둠의
지배자들
(principalities;
권품[權品]천사들, 작은 공국[公國]의 군주들, 대공[大公]들),
능력자들
(powers;
능품[能品]천사들, 능력들),
또 통치자들로서(as … and rulers)
그의 부하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hence;
이 때문에, 이것으로부터, 그러므로),
사탄은
그의 왕국,
곧 어둠의 그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사탄을 따르는
그 타락한 천사들,
곧 반역하는 천사들을
예표하는데,
그들은(who)
사탄의 왕국 안에서
능력자들(powers),
통치자들(rulers),
또 권세자들이
(authorities;
권위자들이, 지휘권자들이, 권세가, 당국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그 아이들이
그 좋은 땅을
소유하고
또 누릴 수 있도록(might …)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에 맞서
싸움은(The fighting)
“그 하늘들 안에 있는
그 영적인
악의 세력(forces; 유력자들, 실력자들, 군대)”에 맞선
그 모든 지체들을 포함하는,
한 전체로서의
(as a whole;
한 완전체로서의),
그 교회의
그 영적인 전투를
예표하고
이는(so that)
그 성도들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 땅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may).
그 교회는 반드시
그러한 한 단체적인 전투원이
되어야만 하고,
사탄의 공중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하며,
그 결과(so that)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건축함을 위하여
그리스도를(of)
더 많이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그 왕국을
세우고
(establishing;
설립하고, 확립하고, 확고하게 하고)
또 확산하여
(and spreading;
또 퍼뜨려[펼쳐, 전개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그 땅을
상속하실 수 있습니다.
그 전체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의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한 군대 안으로
형성되는
한 백성을
가지시는 것이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생활의 의미, 증거, 중심,
인도자, 길, 또 목표로
취하고
또 계속 나아가며
또 하나님을 위하여 싸워서
그 결과(so that)
그분께서
땅 위의 그 기반을
가지시고
또 그분의 왕국과
또 그분의 집으로
건축되는
한 백성을
가지시는데,
이는(which)
그 새 예루살렘 안에(in; 으로)
완결될 것입니다.
1일
민 1:1-3
… 시나이 광야에 있는
회막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수효를
그들의 가족과
그들 조상의 집안별로
조사하되,
모든 남자의 명수를
하나하나 조사하여라.
너와 아론은
이스라엘 가운데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이십 세 이상 된
모든 남자를
부대별로
세어야 한다.
대부분의 민수기 주석들을
읽어 보면,
민수기가
방황과
반복되는 실패에 관한
책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것은
그렇게 정확한 말이 아니다.
합당하게 말한다면,
민수기는
실패의 책이 아니라
승리와 영광에 관한 책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거처뿐 아니라
군대가 있는
진영을 가지셨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닌가?
민수기 2장
1절과 2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은 각자
자기 조상의
집안 표지로 세운
깃발에 따라
진을 치되,
사방에서
회막을 향하여
진을 쳐야 한다.”
각 지파는
회막 주변에
그들의 천막을
칠 수 있는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동쪽에 있는 지파는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 지파였으며,
남쪽은
르우벤과 시므온과 갓 지파였고,
서쪽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베냐민 지파였으며,
북쪽은
단과 아셀과 납달리 지파였다
(3-31절).
그 중앙에는
성막을 책임지는
레위 지파가 있었다
(1:50-53, 2:17).
제사장들은 결코
성막에서
떨어질 수 없었다.
그들은
성막과 하나였으며,
항상 성막과 함께 있었다.
중앙에
레위 지파가 있고
성막의 사방에
진을 친
열두 지파들이 있는
이 그림은
장차 올
새 예루살렘의
예시(豫示)이다.
요한계시록에
묘사되어 있는
그 성은
사방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고,
그 문들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1:12-13).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이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은
이미 오래 전에
민수기에서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건축,
이 한 가지와 관련된
한 노선을
가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본다.
구약에 있는
성막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중심이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어린양은
새 예루살렘의 중심에 있는
성전이시다
(21:22).
민수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광스러운 책이다.
민수기의 처음에서
하나님은
군대를 편성하셨고,
민수기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이 군대가 정복한
땅을 나누는
일에 관한
기록을 본다.
민수기의 시작에서
진영들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정렬되어 있었다.
민수기는
깃발과 표지(標識)가 있는,
다시 말하면
편성과 질서가 있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제시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전적으로 적용되는 것들이다.
군대는
열두 지파로
구성되며,
이 열두 지파는
각 조에
세 지파씩,
네 조로 나눈다.
… 우리는
숫자 3과 4를 보는데,
이것은
삼일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나타낸다.
연합의 원칙은
3과 4가 곱해져
12가 되는 것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해지셨을 뿐 아니라
우리와
연합되셨다.
숫자 12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해지실 뿐 아니라
우리와
연합되시는 것을
상징한다.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들의 기록으로
시작하는데,
일곱 교회들은
네 교회들로 이루어진 부분과
세 교회들로 이루어진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2:1-3:22).
이것은
숫자 3이
4에 더해져서
7이 되는 것처럼,
삼일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더해지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으로
마치는데,
새 예루살렘에서는
기본 수가
3 곱하기 4인
숫자 12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참된 건축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민수기에 묘사된
그림에서,
하나님의 움직임은
성막과 함께한
증거궤에 있었다.
즉 하나님의 움직임은
교회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으로서
(골 2:9)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인
(출 25:11 각주 1 참조)
하나님-사람이시며,
교회는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로서
(고전 3:16, 엡 2:21-22, 딤전 3:15)
그리스도의
확장과 증가이다.
민수기에 묘사된
그림은
하나님께서
땅을 되찾아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서
움직이시고
그분의 원수를
정복하실 수 있도록,
하나의 실체로
함께 연합된
삼일 하나님과
그분께 선택받은
백성을
보여 준다
(행 1:8, 민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