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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비결을 배움으로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얻어 교회 안에서 그분께 영광을 돌림

바울은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비결을 배웠다 ― 빌 4:11하-13.

“비결을 배웠습니다.”라는 말은 바울이 새로운 상황, 곧 새로운 환경 안으로 들어갔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놓일 때마다 그 환경 안에서 사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는 직역하면 ‘나는 입문하였습니다.’를 의미한다. 여기에서의 이 은유는 어떤 사람이 비밀 단체에 입문하여 그 단체의 기본적인 원칙을 배운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돌이킨 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입문하였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고(골 3:4), 그리스도를 살고(빌 1:21상), 그리스도를 확대하고(20절), 그리스도를 얻고(3:8, 12), 교회생활을 하는(1:8, 19, 2:1-4, 19-20, 4:1-3) 비결을 배웠다.

믿는 이들은 비결을 배우고 있는 제자들 곧 배우는 이들이다. 여기서 비결을 배운다는 것은, 믿는 이들이 실재의 영께서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삶의 실지 상태의 모든 실재 안으로 그들을 안내하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써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생활 안에 계셨고, 그분은 하나님과 하나이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사람의 본으로서 이 땅에서 사신 인간 생활은 그분 자신의 인성을 부인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는 생활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그러한 인간 생활을 통하여 그분의 제자로서 훈련을 받아 사람에 대한 그들의 관념이 개혁되었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인성을 부인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사셨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고’(히 5:8), ‘순종하시어 죽기까지 하셨으며,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빌 2:8).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아니라, 순종의 생명인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 그리스도의 본에 따라 그리스도를 배운다. 제자는 자신의 인간 생명 안에서 신성한 생명을 사는 사람이다.

“나는 회복 안에서 십팔 년 동안 워치만 니 형제님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았다. 내가 니 형제님에게서 본 모든 것이 나를 제자로서 훈련시켜 주는 것이 되었다.”

주님의 제자들 곧 주님께 배우는 이들인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은혜이신 그분의 훈련 아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우리 구주 하나님의 인자와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났다. 이 은혜가 ‘우리를 훈련시킴으로써, 경건하지 않은 것과 세상적인 욕망을 거절하게 하고, 현시대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하며, 복된 소망 곧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게 한다’ ― 딛 3:4, 2:11-13.

교회생활 안에 있는 자매들은 주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연장한 자매들은 주님과 하나 되어 젊은 자매들을 훈련시켜 ‘남편을 사랑하게 하고 자녀를 사랑하게 하며 신중하게 하고 순결하게 하고 집안일을 잘하게 하며 선하게 하고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딛 2:3-5.

주님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 제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가련한 죄인들에게 긍휼을 나타내 보이기를 갈망하시며,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긍휼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 비결은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던 사람이었으며(고후 12:2상),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갈망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분, 곧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이 말은 그가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한 결론의 말이다. 이 말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우리와 주님의 유기적인 관계에 관한 주님의 말씀인 “나를 떠나서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를 다른 표현 방법으로 말한 것이다.

과거에 바울은 완전히 유대 종교 안에서 율법 아래 있었고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 안에서 발견되었지만, 주님께 돌이켰을 때 율법과 그의 이전 종교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져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 되었다 ― 고후 12:2상.

이제 바울은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기대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온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잠기고 그리스도로 적셔져,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그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를 열망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그리스도는 표현되시고 확대되실 것이다.

우리는 한 면으로 그리스도께서 능력 주시는 것으로 인하여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고(빌 4:11-12), 또 다른 한 면으로 그리스도께서 능력 주시는 것으로 인하여 참되고 장중하고 의롭고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평판이 좋을 수 있다(8절).

바울이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어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인간 미덕들로 삶으로써 무한히 위대하신 그분을 확대하는 것에 적용된다. 이러한 미덕들을 지닌 삶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우리는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실지적인 길을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에서 볼 수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시다.

‘하나님께’는 누군가를 향한 동작을 나타내며, 생생한 연결과 교제의 의미에서 교통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께’의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는 가운데’이다.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한 결과는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가 기도로 그분과 교통할 때, 우리 안에 주입된 평안이신 하나님이다(빌 4:9). 하나님의 평안은 고민에 대한 안정제이고, 염려에 대한 해독제이다(요 16:33).

평안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순찰하시면서, 우리가 고요하고 안정되도록 지키신다. 우리가 염려 없는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모든 환경이 좋든 나쁘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신 것이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살며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우리의 운명을 이루도록 우리를 돕기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비결을 배우는 것은 ‘기도하면서 예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왕, 우리의 주님, 우리의 머리, 우리의 남편이시다(찬송가 568장). 하나님을 접촉하는 기도는 마음에서부터 진심으로 하는 말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슬프고 우울하고 낙심되는 상황에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문제들을 주님께 가져가 그것들에 대해 주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그분은 가장 잘 들어주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감정을 아시고, 우리의 마음을 동정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우실 수 있다.

우리는 주님과 충분히 대화하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부을 때, 주님과의 친밀함이 한 단계 더 발전하고 주님을 조금 더 알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시간에 주님을 친밀하게 접촉하는 것이 주님과 통상적인 교통을 갖는 것보다 수백 배 더 낫다. 이렇게 주님을 접촉함으로 우리는 생명이 자라게 된다.

어떤 사람이 주님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흘려 본 일이 없고, 자신의 기쁨이나 슬픔을 주님과 한 번도 나누어 본 적이 없으며, 자신의 사적인 일들에 관해 주님과 한 번도 대화해 본 적이 없다면, 그는 주님과 한 번도 친밀한 교통을 가져 본 적이 없고 주님을 전혀 깊이 안 적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주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는 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릴 수 있다.

주님은 우리 문제들 하나하나에 대해 동정하신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짊어지고자 하시며, 우리가 하는 말에 기쁘게 귀 기울이신다. 살아 있는 생명수이신 그분을 누리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반석이신 그분께 말해야 한다.

시편 102편의 제목은 “고통당하는 사람이 지칠 대로 지쳐 여호와 앞에 하소연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불평이 가장 좋은 기도,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불평하는 동안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도록 그분께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이 이루어지게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시편 73편은 추구하는 시편 작가의 진실한 기도를 기록한 것이다. 이 시편 작가는 자신은 고난받는데 악인들은 잘되는 것 때문에 자칫 실족할 뻔하였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순수하게 한 것이 헛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물질적으로 잘되는 것을 누리지 못하고 온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편 작가는 악인들이 잘되는 것에 관해서 느꼈던 당혹감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의 성소 안에서 얻었다(시 73:17). 먼저, 하나님의 성소 곧 그분의 처소는 우리의 영 안에 있으며(엡 2:22), 또한 하나님의 성소는 교회이다(딤전 3:15).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소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하며 교회 집회와 사역 집회에 가야 한다. 우리의 영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우리는 신성한 계시를 받고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다.

주님을 추구하는 이는 주님과 정직하게 대화하고 하나님의 성소 안에 들어감으로써 결국 주님의 빛 비춤을 받아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다. “하늘에 주님 외에 누가 제게 있겠습니까? / 땅에서도 주님 외에 바랄 것 없습니다. 제 육체와 마음은 쇠약해도 / 하나님은 제 마음의 반석이시며 제 영원한 몫이십니다.” ― 시 73:25-26.

하나님께서 그분을 추구하는 이들에 대해 갖고 계신 의도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누림에서 빗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갖고 계신 궁극적인 갈망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얻어 교회 안에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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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시 142:2 그분 앞에 내 원통함 쏟아 내고 그분 앞에 내 어려움 아뢴다네.

시 73:16-17 제가 이 일을 이해하려고 깊이 생각할 때에 그것이 제가 보기에 괴로운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그들의 종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금전의 손실을 보는 것을 주권적으로 허락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금전이 남김없이 사라져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기에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불평이 가장 좋은 기도,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불평하는 동안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도록 그분께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이 이루어지게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시편 102편 7절은 “깨어 밤을 지새우니 /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의 ‘지붕’은 유대인 가옥의 평평한 옥상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자주 지붕에 가서 기도하곤 했다(비교 행 10:9). 시편 102편 7절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에, 이 절은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마도 자주 밤에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처럼 깨어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권익에 관심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또한 이 시편 작가의 상황이기도 했다. 시온이 황폐하게 됨으로 인하여 그는 잠을 자거나 침상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 대신에 그는 지붕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그의 원통함을 쏟아 내며 그분께 시온과 성과 성전을 돌아보시기를 구했다.

시편 102편 7절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괴로움에 관한 특별한 절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집을 위한 그분의 열정과 관련되어 있다(요 2:17, 시 69:9). 그리스도는 고난받고 계셨을 때 자신의 유익에 관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집의 권익에 관심하시는 파수꾼이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한 방면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교회를 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편 73편 2절부터 16절까지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시편 작가의 고난과 당혹감을 기록하고 있다. 2절은 시편 작가가 악인들이 잘되는 것(3-12절) 때문에 자칫 실족할 뻔하였음을 가리킨다. 경건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이 사람은 고난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상황을 말했더라면, 그들은 실족하며 “율법을 지키는 이들은 모두 잘되리라.”(시 1편)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율법을 지켰지만 전혀 잘되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시편 73편 16절에서 시편 작가는 그가 당혹해했음을 말한다. “제가 이 일을 이해하려고 깊이 생각할 때에 / 그것이 제가 보기에 괴로운 일이었으나”. 이것은 무거운 말이다. 시편 작가가 그 상황을 고려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괴롭고 당혹스러웠다.

시편 작가는 그 해답을 하나님의 성소 안에서 얻었다(시 73:17). 오늘 하나님의 성소는 어디에 있는가? 먼저, 하나님의 성소 곧 그분의 처소는 우리의 영 안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성소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소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하고 교회 집회에 가야 한다. 일단 우리가 성소 안에 곧 영과 교회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악인들의 상황에 대한 또 다른 관점 곧 특별한 인식을 가지게 된다.

“하늘에 주님 외에 누가 제게 있겠습니까? / 땅에서도 주님 외에 바랄 것 없습니다.”(시 73:25) 이 절은 하나님을 순수하게 추구하는 이가 하나님을 하늘에서는 자신의 유일한 소유로, 땅에서는 자신이 바라는 유일한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것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시편 작가의 유일한 목표이셨다. 시편 작가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을 얻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빌 3:8).

시편 73편은 이러한 말씀으로 끝맺는다. “제 육체와 마음은 쇠약해도 / 하나님은 제 마음의 반석이시며 제 영원한 몫이십니다.”(26절) 여기서 우리는 시편 작가가 그의 고난과 악인들이 잘되는 것에 관해 했던 질문의 해답을 본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을 얻고 모든 일에서 잘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관심을 두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제한하시며, 심지어 많은 것들을 벗겨 내실 것이다.

5일

마 14: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이 일을 알려 드렸다.

막 6:30 사도들이 … 자기들이 행하고 가르친 모든 것을 보고하니,

민 20:8 “너는 막대기를 들고 … 회중을 불러 모아라. 그리고 … 반석을 향해 물을 내라고 말하여라. …”

주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마음속 비밀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 어떤 말씀을 드리든 들어 주신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건에서 주님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성경에서 사람들이 그분께 말씀드리는 경우는 드물다. 내가 아는 바로는 앞에서 언급된 두 곳의 말씀 외에는 없다. 한 곳은 마태복음 14장인데, 이 장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주님께 무언가를 알려 드리려고 왔다(12절). 다른 한 곳은 마가복음 6장인데, 여기서 주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 무언가를 말씀드리러 왔다(30절).

하나는 슬픈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기쁜 그림이다. 첫째 그림은 침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의 비극적인 종말과 죽음을 알게 되는 장면이다. 이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을 장사 지낸 뒤 주 예수님께 알려 드리러 왔다. 다른 하나의 그림은 주님의 열두 제자들이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낸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제자들은 주님께 와서 이 일을 말씀드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주님께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다. 어떤 말이든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다. 많은 때 우리에게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필요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어렵고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다른 이들에게 말하고 싶지만, 그들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우리에게는 중요하고 중대한 일이지만, 다른 이들에게 얘기하면 그들은 우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어떤 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매우 즐거운 일을 말해 주면, 그 사람은 우리가 왜 기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 즐거워하지 않는다. 때로 우리가 우울해할 때, 다른 이들은 우리의 심정을 공감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가까운 사람을 장사한 후에 “나의 모든 것이 끝났다. 내게 희망이 사라졌다. 그 사람은 죽었고,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그와 함께 사라졌다.”라고 말한다. 이때가 바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이다. 우리의 슬픔을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너무 세상에 연연하고 너무 애정이 깊으며 죽은 이에게 애착을 갖는다고 꾸짖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감정을 아시고, 우리의 마음을 동정하신다. 어떤 사람은 아직 부모나 아내나 형제나 친척을 잃는 슬픔을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잃으면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이 향기를 잃었다고 느끼고, 그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때 우리는 요한의 제자들처럼 죽은 이를 묻고 주님께 가서 말씀드려야 한다. 우리는 주님과 충분히 대화하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부을 때, 주님과의 친밀함이 한 단계 더 발전하고 주님을 조금 더 알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시간에 주님을 친밀하게 접촉하는 것이 주님과 통상적인 교통을 갖는 것보다 수백 배 더 낫다. 이러한 접촉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이 자라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주님께 가져가서 말씀드려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우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주님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흘려 본 일이 없고, 자신의 기쁨이나 슬픔을 주님과 한 번도 나누어 본 적이 없으며, 자신의 사적인 일들에 관해 주님과 한 번도 대화해 본 적이 없다면, 그는 주님과 한 번도 친밀한 교통을 가져 본 적이 없고 주님을 전혀 깊이 안 적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도와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오직 주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는 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릴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말씀드리든 그분은 기꺼이 들으신다. 주님은 우리 문제들 하나하나에 대해 동정하신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일에 관심하신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다른 이들의 일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일만이 있는 것 같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슬픔을 짊어지신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짊어지고자 하시며, 우리가 하는 말에 기쁘게 귀 기울이신다.

4일

빌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의 ‘하나님께’는 누군가를 향한 동작을 나타내며, 생생한 연결과 교제의 의미에서 교통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께’의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는 가운데’이다.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한 결과는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가 기도로 그분과 교통할 때, 우리 안에 주입된 평안이신 하나님이다(빌 4:9). 하나님의 평안은 고민에 대한 안정제이고, 염려에 대한 해독제이다.

평안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순찰하시면서, 우리가 고요하고 안정되도록 지키신다.

염려는 관용과 반대된다. 염려는 관용하는 우리의 능력을 먹어 치우는 벌레와 같다. 만일 우리에게 관용이 없다면 쉽게 마음이 상하고 쉽게 성질을 낼 것이다. 화는 종종 염려에서 기인한다. 만일 내가 나의 장래와 나의 환경과 나의 가족에 대하여 걱정한다면 나는 다른 이들에 대해 기쁘지 않을 것이다. 그 걱정으로 인해 모든 사람을 못마땅해할 것이다. 오직 기쁘고 만족할 때에만 우리에게 관용이 생긴다. 그와는 반대로 슬프고 만족이 없는 사람은 쉽게 짜증을 내고 마음이 상한다. 바울은 기쁨과 만족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근심이 없었고 관용이 넘쳤다.

우리가 염려 없는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모든 환경이 좋든 나쁘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신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넘치는 확신으로 이러한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가령 어떤 형제가 상업에 종사한다고 하자. 그의 사업이 번창하여 그는 상당한 금액의 돈을 벌지도 모른다. 얼마 후에 그의 사업이 실패하고 그는 벌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잃을지도 모른다. 돈을 벌거나 잃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에게 안배하신 것이다. 만일 이 형제에게 그 환경들이 하나님의 안배하심에서 오는 것이라는 넘치는 확신이 있다면, 그는 주님의 안배에 대해 주님께 경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돈을 잃는 것이 돈을 버는 것보다 그에게 더 큰 유익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손실을 통해 그가 온전하게 되고 건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질병과 건강은 둘 다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것이고 그분에게서 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건강하기를 매우 갈망할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아픈 기간이 건강이 좋을 때보다 우리를 더 온전하게 한다. 더욱이 우리의 건강이 안 좋을 때, 우리는 건강이 좋을 때보다 더 기도하게 된다.

염려가 없는 것의 첫 번째 전제 조건은 우리가 통과하는 고난들이 하나님의 안배라는 것에 대해 넘치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신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두 마리의 참새가 인간에게 흔히 생기는 슬픈 일들과 염려거리에 대해 나눈 대화를 담은 한 이야기를 읽었다. 한 참새가 다른 참새에게 왜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하는지 물었더니, 다른 참새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 사람들은 우리처럼 그들을 돌봐 줄 아버지가 없나 봐. 우리는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돌보시니까 어떤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그렇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신다. 그러나 때때로 그분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우리의 운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곤경과 고난을 보내신다. 우리가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이 없는 삶을 약속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환경이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바울은 살고 죽는 것에 관심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확대되시는 것만을 주의했다. 그는 모든 환경이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이 염려하지 않는 길이다.

왜 어떤 성도들은 돈을 잃을까 봐 걱정하는가?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이 더 많은 돈을 갖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왜 어떤 이들은 그들의 건강에 대하여 염려하는가? 그 이유는 단순히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이나 심지어 우리의 직업을 잃는다 해도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손실은 하나님의 안배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

3일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는데 …

빌 3:9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입니다.

과거에 바울은 완전히 유대 종교 안에서 율법 아래 있었고,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주님께 돌이켰을 때, 그는 율법과 그의 이전 종교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져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 되었다(고후 12:2). 이제 바울은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 즉 유대인들과 천사들과 귀신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기대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온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잠기고 그리스도로 적셔져,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그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를 열망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그리스도는 표현되시고 확대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이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하시려고 그들 안에 사신다(빌 4:13). … 그리스도에 의해 능력을 받는 것은 안에서부터 역동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골 1:27), 밖에서부터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역동적으로 만드신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던 사람이었으며(고후 12:2),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갈망했다(빌 3:9).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그는 그리스도, 곧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이 말은 그가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한 결론의 말이다. 이 말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우리와 주님의 유기적인 관계에 관한 주님의 말씀인 “나를 떠나서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를 반대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분 안에 있는 한,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그분을 추구한다고 증언했다. 이제 4장 1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분 안에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풍족함의 비결이셨다. 그분 안에 있음으로써 바울은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의 ‘모든 것’은 12절에 언급된 것들과 8절에 열거된 미덕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고(11-12절), 참되고 장중하며 의롭고 순수하며 사랑스럽고 평판이 좋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모든 미덕을 살아 나타내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미덕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바울이 한 말이, 특별히 우리가 우리의 인간 미덕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삶으로써 무한히 위대하신 그리스도를 확대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에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즉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라는 그분의 속성대로 창조하셨다. 여섯 가지 항목, 즉 무슨 일에든지 참되며, 무슨 일에든지 장중하며, 무슨 일에든지 의로우며, 무슨 일에든지 순수하며, 무슨 일에든지 사랑스러우며, 무슨 일에든지 평판이 좋은 것은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라는 이 네 가지 신성한 속성에 속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미덕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미덕들을 지닌 삶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많은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심지어 교회를 세울 수 있지만, 이와 같은 생활, 곧 참됨과 장중함과 의로움과 순수함과 사랑스러움과 평판이 좋음 등과 같은 미덕들로 가득한 생활은 하지 못한다. 신성한 속성들을 표현하도록 우리의 인간 미덕들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살기 위해서, 우리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능력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분 자신 안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하신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해야 하고(갈 2:20), 우리 속에 그분의 형상을 이루시도록 해야 하며(4:19), 우리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도록 해야 하고(엡 3:17), 우리 안에서 확대되시도록 해야 한다(빌 1:20).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 속에 그분의 형상을 이루시며,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 안에서 확대되실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길이 준비된다. 그럴 때 우리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 능력을 받음으로써, 빌립보서 4장 8절부터 12절까지에서 말하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일

엡 4:20-21 …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들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허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혼이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분은 그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불어 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으십시오.”(요 20:22)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 안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셨다(7절). 이것은 사람을 살아 있게 했다. 즉 살아 있는 사람이 되게 했다. 부활의 날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제자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불어 넣으셨고, 그들 또한 살아 있게 되었다. 그들은 신성한 생명으로 살아 있게 되었다. 그들 안으로 불어 넣어지신 생명과 실재의 영은, 그들이 삼 년 반 동안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에게서 본 모든 것의 실재 안으로 그들을 이끄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사람의 본으로서 이 땅에서 사신 인간 생활은 그분 자신의 인성을 부인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는 생활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그러한 인간 생활을 통하여 그분의 제자로서 훈련을 받아 사람에 대한 그들의 관념이 개혁되었다. 제자들의 관념은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의 인성을 부인하심으로 하나님을 사시는 것을 봄으로써 개혁되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통해 제자로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힘은 그들이 신성한 생명을 살도록 그들의 인간 생명을 무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제자로서 훈련을 받아 그분께서 하나님의 맏아들이심을 알았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그리스도는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만을 가지셨다. 그분은 사람에게 속한 어떤 것도 갖고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그분은 신성하시고 인간적이시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생명과 본성을 지니셨지만, 이것을 부인하심으로써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사셨다. 그분의 이러한 신성하고 비밀한 생활이, 삼 년 반 동안 그분을 따르던 모든 이들을 제자로서 훈련시켰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제자로서 훈련받아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알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번성과 증가인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충분한 기도로 이 교통을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 안에 계신 그 영께 열어 드린다면, 우리는 제자로서 훈련받을 것이다. 제자로서 훈련받는 이들만이 활력 그룹의 구성원들이다. 그들은 제자로서 훈련받아 활력화되었다. 제자는 자신의 인간 생명 안에서 신성한 생명을 사는 사람이다. 사역이 활력적인가는 사람이 인간 생활에서 신성한 생명을 사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인간 생명에서 나온 신성한 것이다. 우리는 신성한 어떤 것을 해방하기 위해 자신의 인간 생명을 부인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활력화되기 위한 주된 요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이실 뿐 아니라 본이시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배우는데, 이 배움은 그분의 본에 따른 것이며,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아닌 우리의 생명이신 그분에 의해 이루어진다. 신약에 따르면 주 예수님은 우리 안에 생명으로 바로 오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이 땅에서 삼십 년을 사셨고 또 삼 년 반 동안 사역하셨다. 삼십삼 년 반을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그분은 하나의 본, 즉 일종의 틀 또는 모형을 세우셨다. 이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사복음서가 쓰인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본, 즉 하나님을 만족시키며 그분의 목적을 완수할 수 있는 삶의 모형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신약은 유일무이한 전기, 곧 네 가지 관점에서 쓰인 주 예수님의 전기를 제시한다. 주 예수님은 사복음서에 계시된 본을 세우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이 부활 안에서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다.

신언노트, 2023 07 09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비결을 배움으로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얻어
교회 안에서
그분께 영광을 돌림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는
직역하면
‘나는 입문하였습니다.’를 의미한다.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이 은유는
어떤 사람이
비밀 단체에 입문하여
그 단체의 기본적인 원칙을
배운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돌이킨 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입문하였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고,
그리스도를 살며,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얻으며,
교회생활을 하는
비결을 배웠는데,
이 모든 것은
기본적인 원칙들이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여러 특이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표현 중 하나는
4장 12절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바울은
“각각의 일과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라고
말한다.
“비결을 배웠습니다.”라는 말은
바울이
새로운 상황, 곧 새로운 환경 안으로
들어갔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놓일 때마다
그 환경 안에서 사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어떤 서양 사람이
동아시아로 가는 것은
새로운 환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가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서 생활하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 형제자매들이
동아시아를 방문할 때,
그들은
음식을 젓가락으로 먹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만일 그들이
그 비결을 배우지 못한다면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모든 것에서
비결을 배워
궁핍한 상황에 있을 줄도 알고
풍부한 상황에 있을 줄도 압니다.
나는
일종의 비밀한 지식을
전수받았습니다.”
바울이 배운
비결은 무엇인가?
바울은
특별한 비결을 배웠기 때문에,
그가
부요하든지 가난하든지,
배부르든지 배고프든지
어떤 상황에든
대처할 수 있었다.
이 비결은
4장 13절에 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비결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른다.
자동차를 타고
집회에 가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집회에 갈 때
나의 비결은 다만
자동차 안에 앉아서
다른 사람이 운전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자동차 타는 것을 거절하거나
자동차 안에 있는 것을 싫어하거나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어떤 어리석은 짓을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문젯거리가 되겠는가!
우리가 구원받은 날,
하나님은
우주에서 가장 좋은,
하늘에 속한 자동차 안에
우리를 넣으셨다.
이 자동차의 이름은
그리스도이다.
구원받은 날에
우리는
그분 안으로 넣어졌다.
우리가
실지적인 방식으로
그분 안에 있는 것을
훈련한다면,
단독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하느라
바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다만
안식하며
평안 가운데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안식 가운데 있을 것이며,
우리의 성질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은 날에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졌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고 느낀다.

그분 안에 있는 비결은
실행되어야 한다.
이 비결을 실행하기 위해
우리는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둘째로, 우리는
육체와 타고난 사람을
부인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야 하며,
겸손함이나 다른 미덕들과 같은
타고난 사람에 속한
어떤 것도
귀히 여기거나
감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장점과 속성과 미덕은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신뢰를 두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스스로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또 다른 인격이 사신다.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잠시 기다리면서,
행동하는 이가
자신인지
그리스도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사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이것이
비결을 실행하는 것이다.

바울은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비결을 배웠다
― 빌 4:11하-13.

“비결을 배웠습니다.”라는 말은
바울이
새로운 상황,
곧 새로운 환경 안으로
들어갔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놓일 때마다
그 환경 안에서 사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는
직역하면
‘나는 입문하였습니다.’를 의미한다.
여기에서의 이 은유는
어떤 사람이
비밀 단체에 입문하여
그 단체의 기본적인 원칙을
배운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돌이킨 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입문하였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고,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얻고,
교회생활을 하는
비결을 배웠다.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분은
그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불어 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으십시오.”
(요 20:22)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 안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셨다.
이것은
사람을
살아 있게 했다.
즉 살아 있는 사람이
되게 했다.
부활의 날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제자들 안으로
그분 자신을 불어 넣으셨고,
그들 또한
살아 있게 되었다.
그들은
신성한 생명으로
살아 있게 되었다.
그들 안으로 불어 넣어지신
생명과 실재의 영은,
그들이
삼 년 반 동안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에게서 본
모든 것의 실재 안으로
그들을 이끄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사람의 본으로서
이 땅에서 사신
인간 생활은
그분 자신의 인성을 부인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는 생활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그러한 인간 생활을 통하여
그분의 제자로서
훈련을 받아
사람에 대한 그들의 관념이
개혁되었다.
제자들의 관념은
주 예수님께서
그분 자신의 인성을 부인하심으로
하나님을 사시는 것을 봄으로써
개혁되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힘을 통해
제자로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힘은
그들이
신성한 생명을 살도록
그들의 인간 생명을
무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제자로서 훈련을 받아
그분께서
하나님의 맏아들이심을 알았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그리스도는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만을
가지셨다.
그분은
사람에게 속한 어떤 것도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그분은
신성하시고 인간적이시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생명과 본성을 지니셨지만,
이것을 부인하심으로써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사셨다.
그분의 이러한 신성하고 비밀한 생활이,
삼 년 반 동안
그분을 따르던 모든 이들을
제자로서 훈련시켰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제자로서 훈련받아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알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번성과 증가인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충분한 기도로
이 교통을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 안에 계신 그 영께
열어 드린다면,
우리는
제자로서 훈련받을 것이다.
제자로서 훈련받는 이들만이
활력 그룹의 구성원들이다.
그들은
제자로서 훈련받아
활력화되었다.
제자는
자신의 인간 생명 안에서
신성한 생명을 사는 사람이다.
사역이
활력적인가는
사람이
인간 생활에서
신성한 생명을 사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인간 생명에서 나온
신성한 것이다.
우리는
신성한 어떤 것을
해방하기 위해
자신의 인간 생명을
부인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활력화되기 위한
주된 요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이실 뿐 아니라
본이시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배우는데,
이 배움은
그분의 본에 따른 것이며,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아닌
우리의 생명이신
그분에 의해 이루어진다.
신약에 따르면
주 예수님은
우리 안에
생명으로
바로 오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이 땅에서
삼십 년을 사셨고
또 삼 년 반 동안 사역하셨다.
삼십삼 년 반을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그분은
하나의 본,
즉 일종의 틀 또는 모형을
세우셨다.
이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사복음서가 쓰인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본,
즉 하나님을 만족시키며
그분의 목적을 완수할 수 있는
삶의 모형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신약은
유일무이한 전기,
곧 네 가지 관점에서 쓰인
주 예수님의 전기를 제시한다.
주 예수님은
사복음서에 계시된
본을 세우신 후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이 부활 안에서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다.

믿는 이들은
비결을 배우고 있는 제자들
곧 배우는 이들이다.
여기서 비결을 배운다는 것은,
믿는 이들이
실재의 영께서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삶의
실지 상태의 모든 실재 안으로
그들을 안내하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써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생활 안에 계셨고,
그분은
하나님과 하나이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사람의 본으로서
이 땅에서 사신
인간 생활은
그분 자신의 인성을 부인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는 생활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그러한 인간 생활을 통하여
그분의 제자로서 훈련을 받아
사람에 대한
그들의 관념이
개혁되었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인성을 부인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사셨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고’
(히 5:8),
‘순종하시어
죽기까지 하셨으며,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빌 2:8).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아니라,
순종의 생명인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
그리스도의 본에 따라
그리스도를 배운다.
제자는
자신의 인간 생명 안에서
신성한 생명을 사는 사람이다.

“나는
회복 안에서
십팔 년 동안
워치만 니 형제님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았다.
내가
니 형제님에게서 본 모든 것이
나를
제자로서
훈련시켜 주는 것이 되었다.”

주님의 제자들
곧 주님께 배우는 이들인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은혜이신
그분의 훈련 아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우리 구주 하나님의 인자와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났다.
이 은혜가
‘우리를 훈련시킴으로써,
경건하지 않은 것과
세상적인 욕망을
거절하게 하고,
현시대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하며,
복된 소망
곧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게 한다’
― 딛 3:4, 2:11-13.

교회생활 안에 있는 자매들은
주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에,
연장한 자매들은
주님과 하나 되어
젊은 자매들을 훈련시켜
‘남편을 사랑하게 하고
자녀를 사랑하게 하며
신중하게 하고
순결하게 하고
집안일을 잘하게 하며
선하게 하고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모독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딛 2:3-5.

주님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 제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가련한 죄인들에게
긍휼을 나타내 보이기를
갈망하시며,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긍휼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과거에 바울은
완전히 유대 종교 안에서
율법 아래 있었고,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주님께 돌이켰을 때,
그는
율법과 그의 이전 종교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져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이 되었다(고후 12:2).
이제 바울은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
즉 유대인들과 천사들과 귀신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기대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온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잠기고
그리스도로 적셔져,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그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를
열망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그리스도께서
표현되시고
확대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이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하시려고
그들 안에 사신다.
그리스도에 의해
능력을 받는 것은
안에서부터
역동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밖에서부터가 아니라
안에서부터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역동적으로 만드신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던 사람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갈망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그는
그리스도,
곧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이 말은
그가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한
결론의 말이다.
이 말은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우리와 주님의
유기적인 관계에 관한
주님의 말씀인
“나를 떠나서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를
반대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분 안에 있는 한,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그분을 추구한다고
증언했다.
이제 4장 1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분 안에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의 풍족함의 비결이셨다.
그분 안에 있음으로써
바울은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의 ‘모든 것’은
12절에 언급된 것들과
8절에 열거된 미덕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고,
참되고 장중하며
의롭고 순수하며
사랑스럽고 평판이 좋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모든 미덕을
살아 나타내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미덕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바울이 한 말이,
특별히 우리가
우리의 인간 미덕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삶으로써
무한히 위대하신
그리스도를 확대하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에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즉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라는
그분의 속성대로 창조하셨다.
여섯 가지 항목,
즉 무슨 일에든지 참되며,
무슨 일에든지 장중하며,
무슨 일에든지 의로우며,
무슨 일에든지 순수하며,
무슨 일에든지 사랑스러우며,
무슨 일에든지 평판이 좋은 것은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라는
이 네 가지 신성한 속성에 속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미덕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미덕들을 지닌
삶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많은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심지어 교회를 세울 수 있지만,
이와 같은 생활,
곧 참됨과 장중함과
의로움과 순수함과
사랑스러움과 평판이 좋음 등과 같은
미덕들로 가득한
생활은 하지 못한다.
신성한 속성들을 표현하도록
우리의 인간 미덕들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살기 위해서,
우리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능력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분 자신 안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하신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해야 하고,
우리 속에
그분의 형상을 이루시도록 해야 하며,
우리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도록 해야 하고,
우리 안에서
확대되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 속에 그분의 형상을 이루시며,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 안에서 확대되실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길이 준비된다.
그럴 때 우리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
능력을 받음으로써,
빌립보서 4장
8절부터 12절까지에서 말하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 비결은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바울이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어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인간 미덕들로 삶으로써
무한히 위대하신 그분을
확대하는 것에 적용된다.
이러한 미덕들을 지닌
삶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빌립보서 4장 6절의 ‘하나님께’는
누군가를 향한
동작을 나타내며,
생생한 연결과 교제의 의미에서
교통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께’의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교통하는 가운데’이다.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한
결과는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가
기도로 그분과 교통할 때,
우리 안에 주입된
평안이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평안은
고민에 대한 안정제이고,
염려에 대한 해독제이다.

평안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순찰하시면서,
우리가
고요하고 안정되도록
지키신다.

염려는
관용과 반대된다.
염려는
관용하는 우리의 능력을 먹어 치우는
벌레와 같다.
만일 우리에게
관용이 없다면
쉽게 마음이 상하고
쉽게 성질을 낼 것이다.
화는 종종
염려에서 기인한다.
만일 내가
나의 장래와
나의 환경과
나의 가족에 대하여
걱정한다면
나는
다른 이들에 대해
기쁘지 않을 것이다.
그 걱정으로 인해
모든 사람을
못마땅해할 것이다.
오직 기쁘고 만족할 때에만
우리에게 관용이 생긴다.
그와는 반대로
슬프고 만족이 없는 사람은 쉽게
짜증을 내고
마음이 상한다.
바울은
기쁨과 만족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근심이 없었고
관용이 넘쳤다.

우리가
염려 없는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모든 환경이
좋든 나쁘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신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넘치는 확신으로
이러한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가령 어떤 형제가
상업에 종사한다고 하자.
그의 사업이 번창하여
그는
상당한 금액의 돈을
벌지도 모른다.
얼마 후에
그의 사업이 실패하고
그는 벌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잃을지도 모른다.
돈을 벌거나 잃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에게 안배하신 것이다.
만일 이 형제에게
그 환경들이
하나님의 안배하심에서 오는 것이라는
넘치는 확신이 있다면,
그는
주님의 안배에 대해
주님께 경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돈을 잃는 것이
돈을 버는 것보다
그에게 더 큰 유익이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손실을 통해
그가
온전하게 되고
건축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질병과 건강은 둘 다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것이고
그분에게서 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건강하기를 매우 갈망할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아픈 기간이
건강이 좋을 때보다
우리를
더 온전하게 한다.
더욱이 우리의 건강이 안 좋을 때,
우리는
건강이 좋을 때보다 더
기도하게 된다.

염려가 없는 것의
첫 번째 전제 조건은
우리가 통과하는 고난들이
하나님의 안배라는 것에 대해
넘치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신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두 마리의 참새가
인간에게 흔히 생기는
슬픈 일들과 염려거리에 대해 나눈
대화를 담은
한 이야기를 읽었다.
한 참새가
다른 참새에게
왜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하는지 물었더니,
다른 참새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 사람들은
우리처럼
그들을 돌봐 줄
아버지가 없나 봐.
우리는
우리 아버지가
우리를 돌보시니까
어떤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그렇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신다.
그러나 때때로 그분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우리의 운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곤경과 고난을 보내신다.
우리가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이 없는 삶을
약속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환경이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바울은
살고 죽는 것에
관심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확대되시는 것만을
주의했다.
그는
모든 환경이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이
염려하지 않는 길이다.

왜 어떤 성도들은
돈을 잃을까 봐 걱정하는가?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이
더 많은 돈을 가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왜 어떤 이들은
그들의 건강에 대하여 염려하는가?
그 이유는 단순히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이나
심지어 우리의 직업을
잃는다 해도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손실은
하나님의 안배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실지적인 길을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에서 볼 수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시다.

우리가
염려 없는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모든 환경이
좋든 나쁘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신 것이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살며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우리의 운명을 이루도록
우리를 돕기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주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마음속 비밀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께 어떤 말씀을 드리든
들어 주신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건에서
주님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성경에서
사람들이
그분께 말씀드리는 경우는 드물다.
내가 아는 바로는
앞에서 언급된
두 곳의 말씀 외에는 없다.
한 곳은
마태복음 14장인데,
이 장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주님께
무언가를 알려 드리려고 왔다.
다른 한 곳은
마가복음 6장인데,
여기서 주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
무언가를 말씀드리러 왔다.

하나는
슬픈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기쁜 그림이다.
첫째 그림은
침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의
비극적인 종말과 죽음을
알게 되는 장면이다.
이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을 장사 지낸 뒤
주 예수님께
알려 드리러 왔다.
다른 하나의 그림은
주님의 열두 제자들이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낸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제자들은
주님께 와서
이 일을 말씀드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주님께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다.
어떤 말이든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다.
많은 때
우리에게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눌
누군가가 필요하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어렵고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다른 이들에게 말하고 싶지만,
그들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우리에게는
중요하고 중대한 일이지만,
다른 이들에게 얘기하면
그들은
우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어떤 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매우 즐거운 일을 말해 주면,
그 사람은
우리가 왜 기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함께 즐거워하지 않는다.
때로 우리가
우울해할 때,
다른 이들은
우리의 심정을
공감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가까운 사람을 장사한 후에
“나의 모든 것이 끝났다.
내게 희망이 사라졌다.
그 사람은 죽었고,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그와 함께 사라졌다.”
라고 말한다.
이때가 바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이다.
우리의 슬픔을
주님께 말씀드릴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너무 세상에 연연하고
너무 애정이 깊으며
죽은 이에게 애착을 갖는다고
꾸짖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감정을 아시고,
우리의 마음을 동정하신다.
어떤 사람은 아직
부모나 아내나
형제나 친척을
잃는 슬픔을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잃으면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이
향기를 잃었다고 느끼고,
그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때
우리는
요한의 제자들처럼
죽은 이를 묻고
주님께 가서
말씀드려야 한다.
우리는
주님과 충분히 대화하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쏟아부을 때,
주님과의 친밀함이
한 단계 더 발전하고
주님을
조금 더 알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시간에
주님을
친밀하게 접촉하는 것이
주님과
통상적인 교통을 가지는 것보다
수백 배 더 낫다.
이러한 접촉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이 자라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주님께 가져가서
말씀드려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우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주님 앞에서
한 번도 눈물을 흘려 본 일이 없고,
자신의 기쁨이나 슬픔을
주님과
한 번도 나누어 본 적이 없으며,
자신의 사적인 일들에 관해
주님과
한 번도 대화해 본 적이 없다면,
그는
주님과 한 번도
친밀한 교통을 가져 본 적이 없고
주님을 전혀
깊이 안 적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도와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오직 주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는 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릴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말씀드리든
그분은 기꺼이 들으신다.
주님은
우리 문제들 하나하나에 대해
동정하신다.
그분은
우리 모두의 일에
관심하신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다른 이들의 일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일만이
있는 것 같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슬픔을
짊어지신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짊어지고자 하시며,
우리가 하는 말에
기쁘게 귀 기울이신다.

능력 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비결을 배우는 것은
‘기도하면서
예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왕, 우리의 주님,
우리의 머리, 우리의 남편이시다
(찬송가 568장).
하나님을 접촉하는 기도는
마음에서부터 진심으로 하는
말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슬프고 우울하고 낙심되는
상황에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문제들을
주님께 가져가
그것들에 대해
주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그분은
가장 잘 들어주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감정을 아시고,
우리의 마음을 동정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우실 수 있다.

주님은
우리 문제들 하나하나에 대해
동정하신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짊어지고자 하시며,
우리가 하는 말에
기쁘게 귀 기울이신다.
살아 있는 생명수이신
그분을 누리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반석이신
그분께 말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가
금전의 손실을 보는 것을
주권적으로 허락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금전이
남김없이 사라져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기에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불평이
가장 좋은 기도,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불평하는 동안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도록
그분께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이 이루어지게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시편 102편 7절은
“깨어 밤을 지새우니
/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습니다.”
라고 말한다.
여기의 ‘지붕’은
유대인 가옥의
평평한 옥상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자주
지붕에 가서
기도하곤 했다.
시편 102편 7절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에,
이 절은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마도 자주 밤에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처럼
깨어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권익에 관심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또한
이 시편 작가의
상황이기도 했다.
시온이 황폐하게 됨으로 인하여
그는
잠을 자거나
침상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 대신에 그는
지붕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그의 원통함을 쏟아 내며
그분께
시온과 성과 성전을
돌아보시기를 구했다.

시편 102편 7절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괴로움에 관한
특별한 절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집을 위한
그분의 열정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고난받고 계셨을 때
자신의 유익에 관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집의 권익에 관심하시는
파수꾼이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한 방면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교회를 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편 73편
2절부터 16절까지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시편 작가의
고난과 당혹감을
기록하고 있다.
2절은
시편 작가가
악인들이 잘되는 것 때문에
자칫 실족할 뻔하였음을
가리킨다.
경건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이 사람은
고난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상황을 말했더라면,
그들은 실족하며
“율법을 지키는 이들은
모두 잘되리라.”(시 1편)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율법을 지켰지만
전혀 잘되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시편 73편 16절에서
시편 작가는
그가 당혹해했음을
말한다.
“제가
이 일을 이해하려고
깊이 생각할 때에
/ 그것이
제가 보기에
괴로운 일이었으나”.
이것은 무거운 말이다.
시편 작가가
그 상황을 고려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괴롭고 당혹스러웠다.

시편 작가는
그 해답을
하나님의 성소 안에서 얻었다.
오늘 하나님의 성소는
어디에 있는가?
먼저, 하나님의 성소 곧 그분의 처소는
우리의 영 안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성소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소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하고
교회 집회에 가야 한다.
일단 우리가
성소 안에
곧 영과 교회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악인들의 상황에 대한
또 다른 관점
곧 특별한 인식을
가지게 된다.

“하늘에
주님 외에
누가 제게 있겠습니까?
/ 땅에서도
주님 외에
바랄 것 없습니다.”
(시 73:25)
이 절은
하나님을 순수하게 추구하는 이가
하나님을
하늘에서는
자신의 유일한 소유로,
땅에서는
자신이 바라는 유일한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것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시편 작가의
유일한 목표이셨다.
시편 작가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을 얻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시편 73편은
이러한 말씀으로 끝맺는다.
“제 육체와 마음은
쇠약해도
/ 하나님은
제 마음의 반석이시며
제 영원한 몫이십니다.”
(26절)
여기서 우리는
시편 작가가
그의 고난과
악인들이 잘되는 것에 관해 했던
질문의 해답을 본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을 얻고
모든 일에서 잘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관심을 두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제한하시며,
심지어 많은 것들을
벗겨 내실 것이다.

시편 102편의 제목은
“고통당하는 사람이
지칠 대로 지쳐
여호와 앞에 하소연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불평이
가장 좋은 기도,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불평하는 동안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도록
그분께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이 이루어지게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시편 73편은
추구하는 시편 작가의
진실한 기도를
기록한 것이다.
이 시편 작가는
자신은 고난받는데
악인들은 잘되는 것 때문에
자칫 실족할 뻔하였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순수하게 한 것이
헛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물질적으로 잘되는 것을
누리지 못하고
온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편 작가는
악인들이 잘되는 것에 관해서 느꼈던
당혹감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의 성소 안에서 얻었다.
먼저, 하나님의 성소
곧 그분의 처소는
우리의 영 안에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성소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소 안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야 하며
교회 집회와 사역 집회에
가야 한다.
우리의 영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우리는
신성한 계시를 받고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다.

주님을 추구하는 이는
주님과 정직하게 대화하고
하나님의 성소 안에 들어감으로써
결국 주님의 빛 비춤을 받아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다.
“하늘에
주님 외에
누가 제게 있겠습니까?
/ 땅에서도
주님 외에
바랄 것 없습니다.
제 육체와 마음은
쇠약해도
/ 하나님은
제 마음의 반석이시며
제 영원한 몫이십니다.”
― 시 73:25-26.

하나님께서
그분을 추구하는 이들에 대해
가지고 계신 의도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누림에서
빗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가지고 계신
궁극적인 갈망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며,
그리스도를 얻어
교회 안에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다.

1일

빌 4:11-13 … 왜냐하면 나는 어떤 처지에서든지 만족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비천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고 풍부한 상태에 있을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각각의 일과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는 직역하면 ‘나는 입문하였습니다.’를 의미한다.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이 은유는 어떤 사람이 비밀 단체에 입문하여 그 단체의 기본적인 원칙을 배운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돌이킨 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입문하였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고,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얻고, 교회생활을 하는 비결을 배웠는데, 이 모든 것은 기본적인 원칙들이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여러 특이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표현 중 하나는 4장 12절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바울은 “각각의 일과 모든 일에 있어서 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라고 말한다. “비결을 배웠습니다.”라는 말은 바울이 새로운 상황, 곧 새로운 환경 안으로 들어갔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놓일 때마다 그 환경 안에서 사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어떤 서양 사람이 동아시아로 가는 것은 새로운 환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가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서 생활하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예를 들어, 미국 형제자매들이 동아시아를 방문할 때, 그들은 음식을 젓가락으로 먹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만일 그들이 그 비결을 배우지 못한다면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모든 것에서 비결을 배워 궁핍한 상황에 있을 줄도 알고 풍부한 상황에 있을 줄도 압니다. 나는 일종의 비밀한 지식을 전수받았습니다.” 바울이 배운 비결은 무엇인가? 바울은 특별한 비결을 배웠기 때문에, 그가 부요하든지 가난하든지, 배부르든지 배고프든지 어떤 상황에든 대처할 수 있었다. 이 비결은 4장 13절에 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비결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른다. 자동차를 타고 집회에 가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집회에 갈 때 나의 비결은 다만 자동차 안에 앉아서 다른 사람이 운전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자동차 타는 것을 거절하거나 자동차 안에 있는 것을 싫어하거나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어떤 어리석은 짓을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문젯거리가 되겠는가! 우리가 구원받은 날, 하나님은 우주에서 가장 좋은, 하늘에 속한 자동차 안에 우리를 넣으셨다. 이 자동차의 이름은 그리스도이다. 구원받은 날에 우리는 그분 안으로 넣어졌다. 우리가 실지적인 방식으로 그분 안에 있는 것을 훈련한다면, 단독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하느라 바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다만 안식하며 평안 가운데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안식 가운데 있을 것이며, 우리의 성질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은 날에 그리스도 안으로 넣어졌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고 느낀다.

그분 안에 있는 비결은 실행되어야 한다. 이 비결을 실행하기 위해 우리는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둘째로, 우리는 육체와 타고난 사람을 부인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겨야 하며, 겸손함이나 다른 미덕들과 같은 타고난 사람에 속한 어떤 것도 귀히 여기거나 감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장점과 속성과 미덕은 해로운 것으로 여겨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신뢰를 두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스스로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또 다른 인격이 사신다.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잠시 기다리면서, 행동하는 이가 자신인지 그리스도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사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이것이 비결을 실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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