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갈망은 이 시대를 종결하고 왕국 시대를 이끌어 오는 것이다. 이것을 성취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시대적인 도구를 얻으셔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시대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주님을 앙망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를 마감하고 다음 시대 곧 왕국 시대를 이끌어 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지금은 특별한 때이다. 따라서 특별한 일을 하는 특별한 믿는 이들이 필요하다.
“가십시오.”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 “오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은 영향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 시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는 이들에게 “나아가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나아오십시오.”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 저자가 특정한 곳에 있었고, 그의 서신을 읽는 이들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나아오기를 원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 가지 것, 곧 지성소와 은혜의 보좌와 하나님 자신께 나아와야 한다. “뒤로 물러가지 말고 나아오라.” ― 히 10:22, 4:16, 7:25, 11:6.
하나님은 은혜의 보좌에 계시고, 은혜의 보좌는 지성소 안에 있다. 히브리서를 쓸 때 이 저자는 바로 지성소 안에 있으면서, 히브리 믿는 이들에게 나아오라고 부르고 있었다.
사내아이가 하늘로 휴거됨, 사탄이 땅으로 내던져짐, 왕국이 나타났다는 하늘에서의 선포는 하나님께서 사내아이를 얻으시는 것이 그분의 가장 위대한 시대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내아이를 얻으시는 것이 교회 시대를 마감하고 왕국 시대를 이끌어 오기 때문이다.
사내아이가 하나님의 보좌로 휴거되는 것은 천이백육십 일, 곧 삼 년 반(마흔두 달)의 대환난 기간 전에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을 누리는 시기에 살고 있다. 빛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실 것이지만, 우리의 힘과 능력이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 길을 갈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분께 사용되려면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에 이르고 그분의 요구를 충족할 한 무리의 이기는 이들을 선택하실 것이다. 이것이 사내아이의 원칙이다.
우주적인 빛나는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총체를 나타낸다. 궁극적으로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씨는 사내아이로 상징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더 강한 이들인 이기는 믿는 이들로 확대된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여자의 변형된 후손 곧 여자의 씨로서 우리 안으로 분배되시어, 우리 안에 있는 뱀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우리를 단체적인 여자의 씨 곧 이기는 사내아이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우리로 옛 뱀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고 하나님의 시대적인 도구가 되게 하여, 시대를 바꾸고 하나님의 왕국의 출현을 이끌어 오게 하려는 것이다.
시편 2편 8절과 9절, 요한계시록 2장 26절과 27절, 12장 5절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주 예수님과 교회 안의 이기는 이들과 사내아이가 쇠막대기로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주 예수님과 이기는 이들과 사내아이가 하나라는 것을 가리킨다. 인도하는 이기는 이(계 3:21)이신 주님은 사내아이의 머리와 중심과 실재와 생명과 본성이시며, 주님을 따르는 이기는 이들인 사내아이는 주님의 몸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옛 뱀인 사탄은 심판받고 쫓겨났다(요 12:31, 16:11). 그 심판과 선고는 결국 사내아이이자 단체적인 여자의 씨인 이기는 이들에 의해 수행되고 집행될 것이다. 이기는 믿는 이들이 사탄과 싸우는 전쟁은 사실상 사탄에게 주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것이며, 결국 사탄을 하늘에서 내쫓기 위한 것이다.
사내아이는 이기는 이들, 곧 교회를 대표해 서 있고, 온 교회가 취해야 할 위치를 취하며, 교회를 위해 그 일을 하는 이들로 구성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참여해야 하지만,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모두가 다 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한 무리, 곧 여자가 낳은 사내아이를 선택하신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더 강한 이들은 하나님을 위해 전쟁을 하고 하나님의 왕국을 땅으로 이끌어 오는 하나의 집합적인 단위로 여겨진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을 완성하시고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사내아이를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이 성취되도록, 그분의 원수를 패배시키고 그분의 왕국을 이끌어 올 사내아이가 필요하시다. 주님의 회복은 오늘날 하나님의 경륜을 실행하는 것이며, 그분의 경륜은 오직 사내아이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사내아이의 휴거는 사탄이 더 이상 하늘에서 입지를 갖지 못하게 하는 조치이다. 우리는 반드시 휴거되어 하나님의 원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필요를 채워 드려야 한다.
사내아이를 구성하는 이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로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탄 곧 마귀(참소자 혹은 비난자)를 이기며, 또한 죽기까지 자기들의 혼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내아이의 전 존재는 그리스도의 요소로 적셔지고 침투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그들의 마음 안으로 건축하시도록 그들이 날마다 강하게 되어 속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보양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완전한 전투 장비이신 그리스도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칠십 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었을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참된 이기는 이였던 느헤미야로 인하여 시대적인 움직임을 가지셨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시대적인 가치를 지닌 사람의 본이다.
예루살렘성과 그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곧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서 회복이 계속되도록 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성안에 있는 하나님의 집을 지켜 주고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기의 핵심이다.
이것은 땅 위의 하나님의 거처와 가정인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져야 함을 상징하는데, 이 왕국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수행하시도록 하나님의 행정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권익을 보호하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집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교회를 회복하시는 것의 예표이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회복하시는 것의 예표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집을 건축하시는 것과 그분의 왕국을 건축하시는 것은 함께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깨닫고 누릴 때,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갖게 된다. 우리가 더 전진하여 그분의 머리의 권위를 깨닫는다면, 집은 확대되어 하나님의 왕국인 성이 될 것이다.
느헤미야는 우리가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합당하게 진취적일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의 지도자들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잘되게 하려는 것 때문에 몹시 언짢아했다. 롯의 불순한 증가에서 나온 이 후손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미워하고 멸시했다.
이러한 반대자들의 조롱과 멸시와 비난에 대해, 느헤미야는 매우 순수했고 진취적이었으며 소심하지 않았다.
진취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느헤미야처럼 사도 바울도 하나님과 동맹을 맺었고, 이러한 동맹 안에서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느헤미야의 진취성은 그의 인간 행동의 미덕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타고난 역량과 타고난 능력과 타고난 미덕들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여 부활 안으로 곧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신 그 영 안으로 이끌려야만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 쓸모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타고난 사람 안에서 살지 않고 부활 안에서 살았다. 그는 진취적이었지만, 그의 진취성은 여러 특징들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거룩한 땅과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전과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하는) 거룩한 성을 포함한, 이 땅에서의 그분의 권익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인 느헤미야는 교통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또한 성벽을 재건하기 위하여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그 말씀에 따라 기도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신뢰했고 심지어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대표가 되었다.
백성과의 관계에서 느헤미야는 이기적이지 않았고, 자기만을 관심하거나 자기 유익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백성과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언제나 기꺼이 희생하고자 했다.
총독으로서 왕의 지위에 있었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경륜이 수행되도록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인도하는 이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본이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많은 왕들과 달리 느헤미야는 이기적이지 않았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으며, 정욕에 빠지지도 않았다.
총사령관인 느헤미야는 원수와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춘 이들 가운데 있었으며 야간 파수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이러한 일들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지 않고 직접 그 일에 참여하였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총독에게 지정된 양식을 십이 년 동안 먹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어떤 보수도 받지 않고 성벽 공사에만 전념했다. 그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고 성벽 건축을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음식을 공급했다.
느헤미야는 통치자였지만 전혀 야심이 없었다. 이것은 나라를 재조성하는 일을 할 때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에스라가 필요함을 인정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느헤미야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인도자이자 완벽한 인도자였고, 장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뛰어난 본이었다. 우리가, 특별히 교회들 안의 인도자들이 그의 본을 상고해 보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럴 때 우리는 시대를 전환하기 위해 하나님을 얻고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을 흘려 내보내는 일에 본이 될 수 있다.
Hits: 8
7 replies on “느헤미야 ― 하나님께 시대적인 가치를 지닌 사람의 본”
6일
느헤미야는 자신의 타고난 사람 안에서 살지 않고 부활 안에서 살았다. 그는 진취적이었지만, 그의 진취성은 여러 특징들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거룩한 땅과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전과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하는) 거룩한 성을 사랑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인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접촉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더 나아가,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심지어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대표가 되었다.
느헤미야기 5장 14절부터 19절까지에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좋은 본을 본다. 느헤미야와 그의 형제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총독에게 지정된 양식을 십이 년 동안 먹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성벽 공사에만 전념하였다. 그와 그의 형제들과 그의 모든 부하들은 모두 함께 모여 이 공사를 하였고 밭을 사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어떤 종류의 보수도 받지 않았음을 뜻한다. 오히려, 느헤미야는 주변 민족들에게서 그에게 온 사람들 외에도 유대인들과 지도자들 백오십 명에게 그의 상에서 먹을 것을 풍족히 주었다. 또한 그는 총독에게 지정된 양식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백성이 담당하는 건축하는 봉사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총독으로서 왕의 지위에 있었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경륜이 수행되도록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윗을 포함한 모든 왕들과 달리 느헤미야는 이기적이지 않았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으며, 정욕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에게 약속하신 좋은 땅에서 최고의 몫인 왕권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는 이기적이기는커녕, 성벽을 건축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먹을 음식을 주었다. 인류 역사 가운데서 그는 아마 유일하게 그러한 방식으로 처신한 국가 지도자였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 우리가, 특별히 교회들 안의 인도자들이 그의 본을 상고해 보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경륜과 관련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권익을 사랑하였다. 하나님의 권익에는 좋은 땅과 성전과 예루살렘성이 포함된다. 비록 그는 왕이나 군대 대장과 같은 지위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권익을 돌보았다.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느헤미야는 전혀 이기적이지 않았다. 그는 사실상 유다 왕의 대행자였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느헤미야에게는 이기심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백성과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언제나 기꺼이 희생하고자 했다. 그는 보수를 받기는커녕, 백오십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생활필수품을 제공했다.
느헤미야는 또한 원수와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춘 이들 가운데 있었으며 야간 파수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이러한 일들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지 않고 직접 그 일에 참여하였다.
내가 믿기로, 육천 년간의 인간 역사 전체에서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이 결코 없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뛰어난 장로라고, 곧 장로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최상의 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오늘날 교회들 안의 모든 장로들이 느헤미야와 같기를 바란다.
5일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 훌륭한 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진취성이 부족하다. 각 대륙에 칠백 명의 진취적인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위하여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느헤미야기를 읽을 때, 느헤미야의 진취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그는 왕의 종으로서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 그리고 성의 건축에 관한 자신의 부담에 진취적으로 그 자신을 자원하여 드렸다. 그는 또한 왕에게 간청할 때도 진취적이었다. 왕이 그의 슬픈 얼굴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왕에게 담대하고도 진취적으로 예루살렘성을 위한 그의 부담을 말했다. 우리가 말씀 가운데서 이 요점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예표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어떤 것을 상징하는 타고난 역량과 미덕에 따라 일시적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 이것에 대한 한 실례가 느헤미야와 그의 진취성이다. 그의 진취성은 그의 인간적인 행동에서 나타난 미덕이었다. 성경의 예표에서 타고난 것들은 일시적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만, 신약에 나오는 예표들의 성취에서 모든 타고난 미덕들과 역량들은 십자가로 가야 한다. 그것들은 십자가에 놓여야 하며 끝나야 한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십자가에 두는 것은 그것을 종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옳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된 의미에 따르면, 십자가는 단지 어떤 것을 종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고난 것들을 부활 안으로 이끌도록 끝내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타고난 모든 것을 죽음과 장사로 이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장사 뒤에는 부활이 뒤따른다.
나는 모세가 강한 성격을 가졌다고 믿는다. 사십 세 때에 모세는 자원하여 진취적으로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를 제한하셨고, 그가 실패하고 실망하게 하셨다. 그때 모세는 사십 년간 광야에서 ‘장사되었다’. 결국 부활시키시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모세를 부활시키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의 타고난 조성에 어떤 미덕과 역량이 있게 하셨다. 마태복음 25장 15절은 ‘달란트’가 우리 ‘자신의 능력’, 즉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것과 우리가 학습한 것으로 조성된 천연적인 능력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능력은 십자가에서 끝난 다음 부활 안으로 이끌려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역량과 능력과 미덕이 십자가로 이끌려 죽도록 허락한다면, 우리는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부활 안에서 우리의 역량과 능력과 미덕은 타고난 생명 안에 있을 때보다 몇 배 더 강해질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우리의 것이지만, 죽음과 장사를 거쳐 이제 부활 안에 있다. 우리는 계속 존재하지만, 우리와 우리의 타고난 능력은 부활 안으로 인도되었다.
부활의 실재는 그 영이며, 그 영은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부활은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다. 우리의 타고난 역량과 능력과 미덕은 죽음과 장사를 거침으로써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서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안으로 옮겨져야 한다.
우리가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모든 타고난 역량과 능력과 미덕은 우리 가운데서 ‘야수’와 같을 것이다.
우리의 타고난 능력이라는 ‘씨’를 땅속에 뿌리는 것은 결코 손실이 아니다. 씨를 뿌릴 때 우리는 일시적으로 그것을 잃지만, 결국 부활 안에서 수확이 있게 될 것이다.
4일
이스라엘이 칠십 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었을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참된 이기는 이였던 ‘느헤미야’로 인하여 시대적인 움직임을 가지셨다. 느헤미야는 진정으로 이기는 이였다. 심지어 이방인 왕을 섬기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얻으셨기 때문에 시대적인 움직임을 가지실 수 있었다.
에스라기는 이스라엘이 포로 된 데서 돌아와 하나님의 집을 재건한 것에 대한 역사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서 하나님의 회복이 시작된 것이었다. 느헤미야기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한 것에 대한 역사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도록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서 회복이 계속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느헤미야기의 핵심은 예루살렘성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켜 주고 보호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땅 위의 하나님의 거처와 가정인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져야 함을 상징하는데, 이 왕국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수행하시도록 하나님의 행정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권익을 보호하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집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교회를 회복하시는 것의 예표이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회복하시는 것의 예표이다.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집은 그 집을 보호해 주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는 그분의 왕국을 필요로 한다.
느헤미야기 2장 17절부터 20절까지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축에 관한 말씀이다.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조롱하고 멸시하면서, 왕에게 반역하려고 그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느 2:19).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잘되게 해 주실 것이므로 그분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는 것이오. 그러나 그대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아무 몫도 권리도 기념할 것도 없소.”(느 2:20) 이러한 대답은 느헤미야가 매우 진취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분명 겁을 먹지 않았다. 겁을 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께 원수들의 비방이 그들 자신에게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성벽을 건축하여 모든 성벽이 함께 연결되고 높이가 그 절반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일할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느 4:4-6).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많이 조롱받고 비웃음을 받아도 우리는 건축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진취적이어야 한다.
한편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싸울 준비를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실 것을 믿었다. 이 문제에서도 그들은 진취적이었다. 겁을 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이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우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돕는 사람을 도우실 것이다. 역사에 의하면, 하나님은 겁을 내는 사람들을 돕지 않으신다. 진취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수 세기에 걸쳐 주님의 회복 안에서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지고 분발되었으며, 또 몇몇 사람들은 자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높은 지위에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일반인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담대했고, 강한 성격을 가졌으며, 진취적이었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진취적인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면, 바울과 마르틴 루터는 매우 진취적이었다. 니 형제님도 마찬가지였다.
느헤미야는 분명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부담에 자신을 자원하여 드렸다. 그는 예루살렘성을 재건하고자 하는 부담을 가졌다. 그의 진취성은 하나님께 매우 많이 쓰임 받았다.
3일
사내아이가 있는 곳에는 원수를 위한 여지가 없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심판받았지만, 이 심판은 집행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이 심판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실패했다. 따라서 이기는 이들이 일어나 교회의 위치를 취하여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집행해야 한다. 이기는 이들이 휴거되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려 올려간 후에는 원수를 위한 자리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추구하는 믿는 이는 깨끗한 양심이 될 때까지 양심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양심이 깨끗하게 될 때, 양심은 쉽게 약해진다. 우리의 양심이 약해지면, 대적은 우리를 항상 비난하며 우리에게 자신이 옳지 않다는 느낌을 계속 갖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덮어 주는 피로 말미암아 대적에게 대항해 서야 한다. 우리는 구속하는 피의 능력을 요구할 뿐 아니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서 자신의 몫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서 한 무리의 사람을 선택하시는 것이다. 이 한 무리는 전체 중의 한 부분, 곧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많은 사람들 중의 일부이다. 이들이 곧 여자가 낳은 사내아이이다.
사내아이의 휴거는 단지 몇몇 개인들이 들림 받는 문제만이 아니라, 더욱이 여러 시대에 걸쳐 진행된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인 옛 뱀이 수천 년 동안 하나님과 싸워 왔다. 하늘에서 이 전쟁이 벌어지자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옛 뱀인 용과 전쟁을 벌인다. 이전에 그는 뱀이었지만, 지금은 용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의 능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진 것이다. 그러나 사내아이가 들려 올라가자, 그 용은 더 이상 커질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쫓겨났다. 그러므로 사내아이의 휴거는 더 이상 하늘에 있지 못하도록 사탄을 처리하는 과정이다.
이기는 이들이 교회의 위치에 굳게 서서 교회가 했어야 할 일을 수행할 때, 그 결과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왕국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권위가 나타난다’(계 12:10). 요한계시록 12장의 사내아이는 바로 교회의 위치에 서 있는 이기는 이들로 구성되며, 그렇기 때문에 이 사내아이가 휴거되자마자 사탄이 하늘에서 내던져지고 왕국이 임하는 것이다.
이기는 이가 이기는 이인 이유는 자신을 위해 영광을 얻고 면류관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단순히 교회가 서야 할 위치에 서서 교회를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합당한 상태에 있어야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며, 감당해야 할 책임을 감당해야 하고, 서 있어야 할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실패했고,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위치에 서 있지 못했다. 다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위치에 서서 교회를 대신하여 그러한 일을 하고 있고 교회의 책임을 지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이기는 이들이다. 이기는 이들이 한 일은 온 교회가 한 일로 간주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되고, 그분은 만족하신다. 이것이 바로 사내아이의 원칙이다.
마치 사내아이가 산출되면 하나님의 목적이 더 이상 방해받을 수 없는 것 같다. 오늘날 하나님은 바로 이들을 부르고 계시며,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본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얻기 원하신다.
2일
여자의 씨이신 주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 주님은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인 사탄을 멸망시키셨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뱀을 멸망시키고 계셨을 때 뱀은 그분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다. 이것은 사탄이 십자가에 주 예수님의 발을 못 박음으로 그분께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뜻한다.
창세기 3장 15절에 언급된 여자는 첫째로 하와이고, 둘째로 하와가 상징하는 것처럼 처녀 마리아를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씨는 주로, 마리아에게서 나신 주 예수님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우리는 여자의 씨에 관해 더 발전된 것을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묘사되어 있고 창세기 3장 15절에 상징으로 나와 있는 여자는 우주적인 여자이며, 이 여자 안에는 사내아이라고 불리는 부분이 있다.
성경에 따르면 여자는 약함을 나타내는데, 이는 여자가 더 약한 그릇이기 때문이다(벧전 3:7). 남자 특히 사내아이는 강함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다소 약한 여자이지만,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 가운데에는 더 강한 부분 곧 이기는 이들인 사내아이가 있다. 그러므로 사내아이 또한 여자의 씨의 일부이다.
이 사내아이는 개인이 아니라 단체이다. 이 단체적인 사내아이는, 사내아이의 머리와 중심과 실재와 생명과 본성이신 주 예수님을 포함한다. 시편 2편 8절과 9절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주 예수님께서 쇠막대기로 민족들을 다스리실 것을 예언한다. 요한계시록 2장 26절과 27절은 교회 안의 이기는 이들이 쇠막대기로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하고, 요한계시록 12장 5절은 사내아이가 쇠막대기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 자신과 그분의 이기는 이들이 쇠막대기로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12장 5절에 나오는 사내아이는 주 예수님과 교회 안의 이기는 이들 모두를 포함한다. 더욱이 요한계시록 20장 4절은 그리스도와 부활한 이기는 이들이 천 년 동안 왕으로서 다스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사내아이는 주 예수님 개인만도 아니고 주님과 분리된 이기는 이들만도 아니며, 이기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주 예수님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최초의 이기는 이이시다(계 3:21). 인도하는 이기는 이이신 주님은 이기는 이들의 머리와 중심과 실재와 생명과 본성이시다.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에는 주 예수님과 이기는 이들을 포함한 더 강한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과 그분의 이기는 이들이 사내아이를 구성한다.
주 예수님은 사내아이이시지만 여자에게서 태어나셨다. 이것의 영적인 의미는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원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사내아이의 근원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 사내아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자의 씨이다. 주 예수님은 그러한 근원에서 나온 씨이셨다.
인도하는 형제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오, 주님, 당신은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아십니다. 우리는 당신을 의지합니다. 주님, 당신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당신을 신뢰합니다.” 만일 인도하는 형제들이 이런 태도를 갖는다면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여자이다.
한 면으로 우리는 여자이고 또 다른 면으로 우리는 여자의 씨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원에서 나온 씨만이 강해질 수 있다. 이것은 자신 안에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강해지는 것이다. 주 예수님 자신이 앞장서서 그러한 분이 되셨다. 그분은 사내아이의 머리이시다. 이제 그분은 또한 사내아이의 중심과 실재와 생명과 본성이시다. 원수 사탄이 어떻게 이 사내아이에게 대항해 싸울 수 있겠는가!
신언노트, 2023 03 05
느헤미야
― 하나님께 시대적인 가치를 지닌
사람의 본
느헤미야
― 하나님을 향하여
시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의 한 본보기
성경에 따르면,
여자의 씨는
원수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여자의 씨는 주로
주 예수님을 가리키지만,
이기는 이들 또한
이 씨의 일부이다.
여자의 씨는
교회를 포함하며,
특별히 이기는 이들을 포함한다.
여자의 씨가
사탄을 상하게 하는 것의 성취는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사내아이에게서 볼 수 있다.
유일한 이기는 이이신
주님께서
모든 이기는 이들을
포함하신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에 대한
그분의 태도를 바꾸실 때,
그분은
시대적인 움직임을 가지신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시대적인 움직임은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온다.
하나님은
이 시대를 종결하시고
왕국 시대를 이끌어 오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목적은
평범하거나 일반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 시대를 종결하시고
또 다른 시대를
이끌어 오실 수 있는가?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시대적인 도구를
얻으셔야 한다.
사내아이의 휴거는
교회 시대를 마감하고
왕국 시대를 이끌어 온다.
사내아이는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수 있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한받으실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움직임에서
사람을 기다리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묶으시는 것은
우리가
땅에서 묶는 것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푸시는 것은
우리가
땅에서 푸는 것에 근거한다.
모든 일은 다
교회에게 달려 있다.
이기는 이가 되는 것은 주로
환난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휴거가
우리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가 아니라
주님께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모든 시대적인 움직임들 가운데
사내아이의 휴거가
가장 위대한 움직임이다.
왜냐하면 사내아이의 휴거는
사람의 권세와 마귀의 권세를 없애고
왕국을 이끌어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장 큰 특권을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 줄 것이지만,
힘과 능력은
우리가
그 길을
갈 수 있게 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분께 사용되려면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나님의 갈망은
피조물들이
타락한 피조물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에 따르면,
교회 전체가
사탄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실패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기는 이들에 의해
성취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과 동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대적인 움직임을
가지기 위해 언제나
한 무리의 이기는 이들을 얻으신다.
사백 년 후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얻으셨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 내어졌다.
그는
물에서 나왔다.
그런 다음에
이집트에서 나왔다.
모세는
죽음을 이겼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다루시기 위해
모세를 선택하셨다.
모세는
이집트 중의 이집트인
궁전에 거했다.
그의 영이
이집트를 떠났을 뿐 아니라
그의 몸도
이집트를 떠났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셨다.
“가십시오.”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
“오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은
영향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시대적인 움직임들은
한 사람에 근거한다.
이것이
이기는 이들의 원칙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나아오십시오.”라고 말한다.
우리는
세 가지 것,
곧 지성소와 은혜의 보좌와 하나님 자신께
나아와야 한다.
뒤로 물러가지 말고
나아오라.
히브리 믿는 이들은
뒤로 물러가려는
위험에 있었다.
그들이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있을 때,
그들이 나아오도록
격려하기 위해
히브리서가 쓰였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는 이들에게
“나아가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나아오십시오.”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 저자가
특정한 곳에 있었고,
그의 서신을 읽는 이들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나아오기를
원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을 쓸 때
저자는 바로
지성소 안에 있으면서,
히브리 믿는 이들에게
나아오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나님의 갈망은
이 시대를 종결하고
왕국 시대를 이끌어 오는 것이다.
이것을 성취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시대적인 도구를
얻으셔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시대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주님을 앙망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를 마감하고
다음 시대 곧 왕국 시대를
이끌어 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지금은
특별한 때이다.
따라서 특별한 일을 하는
특별한 믿는 이들이 필요하다.
“가십시오.”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
“오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은
영향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
시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보좌에 계시고,
은혜의 보좌는
지성소 안에 있다.
히브리서를 쓸 때
이 저자는 바로
지성소 안에 있으면서,
히브리 믿는 이들에게
나아오라고
부르고 있었다.
사내아이가
하늘로 휴거됨,
사탄이
땅으로 내던져짐,
왕국이
나타났다는
하늘에서의 선포는
하나님께서
사내아이를 얻으시는 것이
그분의
가장 위대한 시대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내아이를 얻으시는 것이
교회 시대를 마감하고
왕국 시대를 이끌어 오기 때문이다.
사내아이가
하나님의 보좌로 휴거되는 것은
천이백육십 일,
곧 삼 년 반(마흔두 달)의
대환난 기간 전에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을 누리는
시기에 살고 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실 것이지만,
우리의 힘과 능력이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 길을 갈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분께 사용되려면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여자의 씨이신
주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
주님은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인
사탄을 멸망시키셨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뱀을 멸망시키고 계셨을 때
뱀은
그분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다.
이것은
사탄이
십자가에
주 예수님의 발을 못 박음으로
그분께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뜻한다.
창세기 3장 15절에 언급된
여자는
첫째로 하와이고,
둘째로 하와가 상징하는 것처럼
처녀 마리아를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씨는 주로,
마리아에게서 나신
주 예수님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우리는
여자의 씨에 관해
더 발전된 것을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묘사되어 있고
창세기 3장 15절에 상징으로 나와 있는
여자는
우주적인 여자이며,
이 여자 안에는
사내아이라고 불리는
부분이 있다.
성경에 따르면
여자는
약함을 나타내는데,
이는
여자가
더 약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남자
특히 사내아이는
강함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다소 약한 여자이지만,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 가운데에는
더 강한 부분
곧 이기는 이들인
사내아이가 있다.
그러므로 사내아이 또한
여자의 씨의 일부이다.
이 사내아이는
개인이 아니라 단체이다.
이 단체적인 사내아이는,
사내아이의
머리와 중심과
실재와 생명과 본성이신
주 예수님을 포함한다.
시편 2편
8절과 9절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주 예수님께서
쇠막대기로
민족들을 다스리실 것을
예언한다.
요한계시록 2장
26절과 27절은
교회 안의 이기는 이들이
쇠막대기로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하고,
요한계시록 12장 5절은
사내아이가
쇠막대기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 자신과
그분의 이기는 이들이
쇠막대기로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12장 5절에 나오는
사내아이는
주 예수님과
교회 안의 이기는 이들 모두를
포함한다.
더욱이 요한계시록 20장 4절은
그리스도와
부활한 이기는 이들이
천 년 동안
왕으로서 다스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사내아이는
주 예수님 개인만도 아니고
주님과 분리된 이기는 이들만도 아니며,
이기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주 예수님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최초의 이기는 이이시다.
인도하는 이기는 이이신 주님은
이기는 이들의
머리와 중심과
실재와 생명과 본성이시다.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에는
주 예수님과
이기는 이들을 포함한
더 강한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과
그분의 이기는 이들이
사내아이를 구성한다.
주 예수님은
사내아이이시지만
여자에게서 태어나셨다.
이것의 영적인 의미는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원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사내아이의 근원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
사내아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자의 씨이다.
주 예수님은
그러한 근원에서 나온
씨이셨다.
인도하는 형제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오, 주님,
당신은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아십니다.
우리는
당신을 의지합니다.
주님,
당신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당신을 신뢰합니다.”
만일 인도하는 형제들이
이런 태도를 가진다면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여자이다.
한 면으로
우리는 여자이고
또 다른 면으로
우리는 여자의 씨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원에서 나온
씨만이
강해질 수 있다.
이것은
자신 안에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강해지는 것이다.
주 예수님 자신이
앞장서서 그러한 분이 되셨다.
그분은
사내아이의 머리이시다.
이제 그분은 또한
사내아이의
중심과 실재와
생명과 본성이시다.
원수 사탄이
어떻게 이 사내아이에게 대항해
싸울 수 있겠는가!
교회가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에 이르고
그분의 요구를 충족할
한 무리의 이기는 이들을
선택하실 것이다.
이것이
사내아이의 원칙이다.
우주적인 빛나는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총체를 나타낸다.
궁극적으로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씨는
사내아이로 상징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더 강한 이들인
이기는 믿는 이들로
확대된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여자의 변형된 후손
곧 여자의 씨로서
우리 안으로 분배되셨으며,
우리 안에 있는
뱀의 머리를 깨뜨리시고,
우리를
단체적인 여자의 씨
곧 이기는 사내아이가
되게 하시며,
이것은
우리로
옛 뱀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며,
또 하나님의 시대적인 도구가 되게 하여,
그 시대를 바꾸고
하나님의 왕국의 나타남을
알리게(안내하게, 이끌어 오게) 하려는 것이다.
시편 2편
8절과 9절,
요한계시록 2장
26절과 27절,
12장 5절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주 예수님과
교회 안의 이기는 이들과
사내아이가
쇠막대기로
민족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주 예수님과
이기는 이들과
사내아이가
하나라는 것을 가리킨다.
인도하는 이기는 이이신
주님은
사내아이의
머리와 중심과
실재와 생명과 본성이시며,
주님을 따르는 이기는 이들인
사내아이는
주님의 몸이다.
사내아이가 있는 곳에는
원수를 위한
여지가 없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심판받았지만,
이 심판은
집행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이 심판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실패했다.
따라서 이기는 이들이
일어나
교회의 위치를 취하여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집행해야 한다.
이기는 이들이
휴거되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려 올려간 후에는
원수를 위한 자리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추구하는 믿는 이는
깨끗한 양심이 될 때까지
양심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양심이
깨끗하게 될 때,
양심은
쉽게 약해진다.
우리의 양심이 약해지면,
대적은
우리를 항상 비난하며
우리에게
자신이 옳지 않다는
느낌을 계속 가지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덮어 주는
피로 말미암아
대적에게 대항해
서야 한다.
우리는
구속하는 피의 능력을
요구할 뿐 아니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서
자신의 몫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서
한 무리의 사람을
선택하시는 것이다.
이 한 무리는
전체 중의 한 부분,
곧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많은 사람들 중의
일부이다.
이들이 곧
여자가 낳은 사내아이이다.
사내아이의 휴거는
단지 몇몇 개인들이 들림 받는
문제만이 아니라,
더욱이 여러 시대에 걸쳐 진행된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인
옛 뱀이
수천 년 동안 하나님과 싸워 왔다.
하늘에서 이 전쟁이 벌어지자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옛 뱀인 용과
전쟁을 벌인다.
이전에 그는 뱀이었지만,
지금은 용의 형태로 바뀌었다.
그의 능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진 것이다.
그러나 사내아이가
들려 올라가자,
그 용은 더 이상
커질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쫓겨났다.
그러므로 사내아이의 휴거는
더 이상 하늘에 있지 못하도록
사탄을 처리하는 과정이다.
이기는 이들이
교회의 위치에 굳게 서서
교회가 했어야 할 일을 수행할 때,
그 결과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왕국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권위가 나타난다’
(계 12:10).
요한계시록 12장의 사내아이는 바로
교회의 위치에 서 있는
이기는 이들로 구성되며,
그렇기 때문에
이 사내아이가 휴거되자마자
사탄이 하늘에서 내던져지고
왕국이 임하는 것이다.
이기는 이가
이기는 이인 이유는
자신을 위해
영광을 얻고
면류관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단순히 교회가 서야 할
위치에 서서
교회를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합당한 상태에 있어야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며,
감당해야 할 책임을 감당해야 하고,
서 있어야 할 위치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실패했고,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위치에
서 있지 못했다.
다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위치에 서서
교회를 대신하여
그러한 일을 하고 있고
교회의 책임을 지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이기는 이들이다.
이기는 이들이 한 일은
온 교회가 한 일로 간주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되고,
그분은 만족하신다.
이것이 바로
사내아이의 원칙이다.
마치 사내아이가 산출되면
하나님의 목적이 더 이상
방해받을 수 없는 것 같다.
오늘날 하나님은 바로
이들을 부르고 계시며,
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본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얻기 원하신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옛 뱀인 사탄은
심판받고 쫓겨났다.
그 심판과 선고는 결국
사내아이이자
단체적인 여자의 씨인
이기는 이들에 의해
수행되고 집행될 것이다.
이기는 믿는 이들이
사탄과 싸우는 전쟁은 사실상
사탄에게
주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것이며,
결국 사탄을
하늘에서 내쫓기 위한 것이다.
사내아이는
이기는 이들,
곧 교회를 대표해
서 있고,
온 교회가 취해야 할
위치를 취하며,
교회를 위해
그 일을 하는
이들로 구성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참여해야 하지만,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모두가 다 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한 무리,
곧 여자가 낳은 사내아이를
선택하신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더 강한 이들은
하나님을 위해
전쟁을 하고
하나님의 왕국을
땅으로 이끌어 오는
하나의 집합적인 단위로
여겨진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을 완성하시고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사내아이를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이 성취되도록,
그분의 원수를 패배시키고
그분의 왕국을 이끌어 올
사내아이가 필요하시다.
주님의 회복은
오늘날
하나님의 경륜을 실행하는 것이며,
그분의 경륜은 오직
사내아이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사내아이의 휴거는
사탄이 더 이상
하늘에서
입지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조치이다.
우리는 반드시
휴거되어
하나님의 원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필요를
채워 드려야 한다.
사내아이를 구성하는 이들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로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탄
곧 마귀(참소자 혹은 비난자)를 이기며,
또한 죽기까지
자기들의 혼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내아이의 전 존재는
그리스도의 요소로
적셔지고
침투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그들의 마음 안으로 건축하시도록
그들이 날마다
강하게 되어
속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으로
보양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완전한 전투 장비이신
그리스도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칠십 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었을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참된 이기는 이였던
‘느헤미야’로 인하여
시대적인 움직임을 가지셨다.
느헤미야는
진정으로 이기는 이였다.
심지어 이방인 왕을
섬기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얻으셨기 때문에
시대적인 움직임을
가지실 수 있었다.
에스라기는
이스라엘이
포로 된 데서 돌아와
하나님의 집을 재건한 것에 대한
역사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서
하나님의 회복이
시작된 것이었다.
느헤미야기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한 것에 대한 역사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도록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서
회복이 계속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느헤미야기의 핵심은
예루살렘성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켜 주고 보호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땅 위의 하나님의 거처와 가정인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져야 함을
상징하는데,
이 왕국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수행하시도록
하나님의 행정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권익을
보호하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집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교회를 회복하시는 것의 예표이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회복하시는 것의 예표이다.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집은
그 집을 보호해 주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수행하는
그분의 왕국을
필요로 한다.
느헤미야기 2장
17절부터 20절까지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축에 관한 말씀이다.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조롱하고 멸시하면서,
왕에게 반역하려고
그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잘되게 해 주실 것이므로
그분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는 것이오.
그러나 그대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아무 몫도 권리도
기념할 것도 없소.”
(느 2:20)
이러한 대답은
느헤미야가
매우 진취적이었음을
(적극적이었음을, 공격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분명
겁을 먹지 않았다.
겁을 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께
원수들의 비방이
그들 자신에게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성벽을 건축하여
모든 성벽이
함께 연결되고
높이가 그 절반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일할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많이
조롱받고 비웃음을 받아도
우리는
건축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진취적이어야 한다.
한편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싸울 준비를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실 것을
믿었다.
이 문제에서도
그들은 진취적이었다.
겁을 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이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우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돕는 사람을
도우실 것이다.
역사에 의하면,
하나님은
겁을 내는 사람들을
돕지 않으신다.
진취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수 세기에 걸쳐
주님의 회복 안에서
몇몇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지고
분발되었으며,
또 몇몇 사람들은
자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높은 지위에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일반인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담대했고,
강한 성격을 가졌으며,
진취적이었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진취적인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면,
바울과 마르틴 루터는
매우 진취적이었다.
니 형제님도 마찬가지였다.
느헤미야는 분명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부담에
자신을 자원하여 드렸다.
그는
예루살렘성을 재건하고자 하는
부담을 가졌다.
그의 진취성은
하나님께
매우 많이 쓰임 받았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
훌륭한 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진취성이 부족하다.
각 대륙에
칠백 명의 진취적인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위하여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느헤미야기를 읽을 때,
느헤미야의 진취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그는
왕의 종으로서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
그리고 성의 건축에 관한
자신의 부담에
진취적으로
그 자신을 자원하여 드렸다.
그는 또한
왕에게 간청할 때도
진취적이었다.
왕이
그의 슬픈 얼굴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왕에게
담대하고도 진취적으로
예루살렘성을 위한
그의 부담을 말했다.
우리가
말씀 가운데서
이 요점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의 예표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어떤 것을 상징하는
타고난 역량과 미덕에 따라
일시적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다.
이것에 대한
한 실례가
느헤미야와 그의 진취성이다.
그의 진취성은
그의 인간적인 행동에서 나타난
미덕이었다.
성경의 예표에서
타고난 것들은
일시적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지만,
신약에 나오는 예표들의 성취에서
모든 타고난 미덕들과 역량들은
십자가로 가야 한다.
그것들은
십자가에 놓여야 하며
끝나야 한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을
십자가에 두는 것은
그것을 종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옳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된 의미에 따르면,
십자가는 단지
어떤 것을 종결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고난 것들을
부활 안으로 이끌도록
끝내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타고난 모든 것을
죽음과 매장으로 이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매장 뒤에는
부활이 뒤따른다.
나는
모세가
강한 성격을 가졌다고
믿는다.
사십 세 때에 모세는
자원하여 진취적으로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를 제한하셨고,
그가
실패하고
또 실망하게 하셨다.
그때 모세는
사십 년간
광야에서 ‘매장되었다’.
결국 부활시키시는 하나님께서
안으로 오셨고(들어오셨고, 참여하셨고)
모세를 부활시키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우리의 타고난 조성에
어떤 미덕과 역량이
있게 하셨다.
마태복음 25장 15절은
‘달란트’가
우리 ‘자신의 능력’,
즉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것과
우리가 학습한 것으로 조성된
천연적인 능력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능력은
십자가에서 끝난 다음
부활 안으로
이끌려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역량과 능력과 미덕이
십자가로 이끌려 죽도록
허락한다면,
우리는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부활 안에서
우리의 역량과 능력과 미덕은
타고난 생명 안에 있을 때보다
몇 배 더
강해질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우리의 것이지만,
죽음과 매장을 거쳐
이제 부활 안에 있다.
우리는
계속 존재하지만,
우리와
우리의 타고난 능력은
부활 안으로 인도되었다.
부활의 실재는
그 영이며,
그 영은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부활은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다.
우리의 타고난 역량과 능력과 미덕은
죽음과 매장을 거침으로써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서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안으로
옮겨져야 한다.
우리가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모든 타고난 역량과 능력과 미덕은
우리 가운데서
‘야수’와(야생 짐승과) 같을 것이다.
우리의 타고난 능력이라는
‘씨’를
땅속에 뿌리는 것은
결코 손실이 아니다.
씨를 뿌릴 때 우리는
일시적으로
그것을 잃지만,
결국 부활 안에서
수확이 있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칠십 년 동안
포로로 잡혀 있었을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참된 이기는 이였던
느헤미야로 인하여
시대적인 움직임을 가지셨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시대적인 가치를 지닌
사람의 본이다.
예루살렘성과 그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위해,
곧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의 선민 가운데서
회복이 계속되도록 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성안에 있는
하나님의 집을
지켜 주고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기의 핵심이다.
이것은
땅 위의 하나님의 거처와 가정인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져야 함을
상징하는데,
이 왕국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수행하시도록
하나님의 행정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이익을 보호하는
한 영역이다.
하나님의 집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교회를 회복하시는 것의
예표이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회복하시는 것의
예표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집을 건축하시는 것과
그분의 왕국을 건축하시는 것은
함께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깨닫고 누릴 때,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가지게 된다.
우리가
더 전진하여
그분의 머리의
권위를 깨닫는다면,
집은 확대되어
하나님의 왕국인
성이 될 것이다.
느헤미야는
우리가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합당하게 진취적일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의 지도자들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잘되게 하려는 것 때문에
몹시 언짢아했다.
롯의 불순한 증가에서 나온
이 후손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미워하고 멸시했다.
이러한 반대자들의
조롱과 멸시와 비난에 대해,
느헤미야는
매우 순수했고
진취적이었으며
소심하지 않았다.
진취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도움을 받는다.
느헤미야처럼
사도 바울도
하나님과 동맹을 맺었고,
이러한 동맹 안에서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느헤미야의 진취성은
그의 인간 행동의
미덕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타고난 역량과
타고난 능력과
타고난 미덕들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여
부활 안으로
곧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신
그 영 안으로
이끌려야만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 쓸모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타고난 사람 안에서 살지 않고
부활 안에서 살았다.
그는 진취적이었지만,
그의 진취성은
여러 특징들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거룩한 땅과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전과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하는)
거룩한 도시를 사랑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인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접촉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더 나아가,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심지어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대표가 되었다.
느헤미야기 5장
14절부터 19절까지에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좋은 본을 본다.
느헤미야와 그의 형제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총독에게 지정된 양식을
십이 년 동안 먹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성벽 공사에만 전념하였다.
그와 그의 형제들과 그의 모든 부하들은
모두 함께 모여
이 공사를 하였고
밭을 사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어떤 종류의 보수도
받지 않았음을
뜻한다.
오히려, 느헤미야는
주변 민족들에게서
그에게 온 사람들 외에도
유대인들과 지도자들 백오십 명에게
그의 상에서
먹을 것을 풍족히 주었다.
또한 그는
총독에게 지정된
양식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백성이 담당하는
건축하는 봉사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총독으로서
왕의 지위에 있었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경륜이 수행되도록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윗을 포함한 모든 왕들과 달리
느헤미야는
이기적이지 않았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으며,
정욕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민에게 약속하신
좋은 땅에서
최고의 몫인 왕권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는
이기적이기는커녕,
성벽을 건축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먹을 음식을 주었다.
인류 역사 가운데서
그는 아마
유일하게 그러한 방식으로 처신한
국가 지도자였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 우리가,
특별히 교회들 안의 인도자들이
그의 본을 상고해 보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경륜과 관련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권익을 사랑하였다.
하나님의 권익에는
좋은 땅과 성전과 예루살렘성이 포함된다.
비록 그는
왕이나 군대 대장과 같은
지위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권익을
돌보았다.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느헤미야는
전혀 이기적이지 않았다.
그는 사실상
유다 왕의 대행자였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느헤미야에게는
이기심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백성과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언제나 기꺼이 희생하고자 했다.
그는
보수를 받기는커녕,
백오십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생활필수품을 제공했다.
느헤미야는 또한
원수와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춘 이들 가운데 있었으며
야간 파수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이러한 일들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지 않고
직접 그 일에 참여하였다.
내가 믿기로,
육천 년간의 인간 역사 전체에서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이
결코 없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뛰어난 장로라고,
곧 장로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최상의 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오늘날 교회들 안의 모든 장로들이
느헤미야와 같기를 바란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타고난 사람 안에서 살지 않고
부활 안에서 살았다.
그는
진취적이었지만,
그의 진취성은
여러 특징들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거룩한 땅과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전과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하는) 거룩한 도시를
포함한,
이 땅에서의 그분의 권익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인
느헤미야는
교통 안에서
하나님을 접촉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또한 성벽을 재건하기 위하여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그 말씀에 따라
기도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신뢰했고
심지어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대표가 되었다.
백성과의 관계에서
느헤미야는
이기적이지 않았고,
자기만을 관심하거나
자기 유익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백성과 민족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언제나 기꺼이 희생하고자 했다.
총독으로서
왕의 지위에 있었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경륜이 수행되도록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인도하는 이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본이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많은 왕들과 달리
느헤미야는
이기적이지 않았고,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으며,
정욕에 빠지지도 않았다.
총사령관인 느헤미야는
원수와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춘 이들 가운데 있었으며
야간 파수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이러한 일들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지 않고
직접 그 일에 참여하였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총독에게 지정된 양식을
십이 년 동안 먹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어떤 보수도 받지 않고
성벽 공사에만 전념했다.
그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고
성벽 건축을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음식을 공급했다.
느헤미야는
통치자였지만
전혀 야심이 없었다.
이것은
나라를 재조성하는 일을 할 때
느헤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재조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에스라가 필요함을 인정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느헤미야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인도자이자
완벽한 인도자였고,
장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뛰어난 본이었다.
우리가,
특별히 교회들 안의 인도자들이
그의 본을 상고해 보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럴 때 우리는
시대를 전환하기 위해
하나님을 얻고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을 흘려 내보내는 일에
본이 될 수 있다.
1일
성경에 따르면, 여자의 씨는 원수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여자의 씨는 주로 주 예수님을 가리키지만, 이기는 이들 또한 이 씨의 일부이다. 여자의 씨는 교회를 포함하며, 특별히 이기는 이들을 포함한다. 여자의 씨가 사탄을 상하게 하는 것의 성취는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사내아이에게서 볼 수 있다. 유일한 이기는 이이신 주님은 모든 이기는 이들을 포함하신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에 대한 그분의 태도를 바꾸실 때, 그분은 시대적인 움직임을 가지신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시대적인 움직임은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온다. 하나님은 이 시대를 종결하시고 왕국 시대를 이끌어 오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목적은 평범하거나 일반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어떻게 이 시대를 종결하시고 또 다른 시대를 이끌어 오실 수 있는가?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시대적인 도구를 얻으셔야 한다.
사내아이의 휴거는 교회 시대를 마감하고 왕국 시대를 이끌어 온다. 사내아이는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수 있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한받으실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움직임에서 사람을 기다리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묶으시는 것은 우리가 땅에서 묶는 것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푸시는 것은 우리가 땅에서 푸는 것에 근거한다. 모든 일은 다 교회에게 달려 있다.
이기는 이가 되는 것은 주로 환난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휴거가 우리 자신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가 아니라 주님께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모든 시대적인 움직임들 가운데 사내아이의 휴거가 가장 위대한 움직임이다. 왜냐하면 사내아이의 휴거는 사람의 권세와 마귀의 권세를 없애고 왕국을 이끌어 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장 큰 특권을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 줄 것이지만, 힘과 능력은 우리가 그 길을 갈 수 있게 할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분께 사용되려면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나님의 갈망은 피조물들이 타락한 피조물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에 따르면, 교회 전체가 사탄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실패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기는 이들에 의해 성취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과 동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대적인 움직임을 갖기 위해 언제나 한 무리의 이기는 이들을 얻으신다.
사백 년 후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얻으셨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 내어졌다. 그는 물에서 나왔다. 그런 다음에 이집트에서 나왔다. 모세는 죽음을 이겼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다루시기 위해 모세를 선택하셨다. 모세는 이집트 중의 이집트인 궁전에 거했다. 그의 영이 이집트를 떠났을 뿐 아니라 그의 몸도 이집트를 떠났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셨다. “가십시오.”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 “오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은 영향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시대적인 움직임들은 한 사람에 근거한다. 이것이 이기는 이들의 원칙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에게 “나아오십시오.”라고 말한다. 우리는 세 가지 것, 곧 지성소와 은혜의 보좌와 하나님 자신께 나아와야 한다. 뒤로 물러가지 말고 나아오라.
히브리 믿는 이들은 뒤로 물러가려는 위험에 있었다. 그들이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있을 때, 그들이 나아오도록 격려하기 위해 히브리서가 쓰였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는 이들에게 “나아가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나아오십시오.”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 저자가 특정한 곳에 있었고, 그의 서신을 읽는 이들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나아오기를 원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을 쓸 때 저자는 바로 지성소 안에 있으면서, 히브리 믿는 이들에게 나아오라고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