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leansing of Leprosy
나병을 깨끗하게 함
나병은
고의로 지은 죄,
주제넘어 지은 죄,
작심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같이
사람 속에서 나오는
심각한 죄를
나타낸다
—레 13장.
미리암(민 12:1-10),
게하시(왕하 5:20-27),
웃시야(대하 26:16-21)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나병은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대표 권위와
하나님의 규정과
하나님의 경륜을
거스르는 거역 때문에
생긴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죄는
거역이다.
이처럼 나병은
죄를 나타낸다
— 요일 3:4.
성경에 나타난
첫 번째 죄의 사례는
사탄이
하나님을 거슬러
반역한 것이었다.
이처럼
거역인 죄는
반역한 천사장 루시퍼에게서
비롯된 것 곧 시작된 것이다
— 겔 28:13-18, 사 14:12-15.
결국 이 죄,
이 나병이
아담을 통해
인류 안으로 들어왔으며,
이 죄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 안에서
갖가지 죄들,
즉 여러 가지 모습의 거역으로
표출된다
— 롬 5:12, 19상, 7:20.
그러므로 나병 환자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을
대표한다.
아담의 자손은 모두
나병 환자들이다.
어떤 사람의 피부에
나병 증상으로 생긴
종창이나
발진이나
밝은 반점은
제멋대로이거나
다른 이들과 마찰을 일으키거나
교만하고
자기를 높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사람의 외적인 표현을
나타낸다
— 레 13:2.
레위기 13장 24절과 25절에 언급된
상태는
구원받은 사람이
화를 내거나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다른 이들을 용서하려 하지 않는 등
육체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영적인 나병의
표시임을
나타낸다.
레위기 14장에서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시고 성취하신,
풍성하고 완전하고 모든 것에 미치는
구원을 묘사한다.
이러한 구원 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
곧 여러 과정들을
통과하심으로
우리가
정결하게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시다.
“제사장은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진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도록
명령해야 한다.
또 제사장은
새들 가운데
한 마리를
흐르는 물이 담긴
질그릇 안에서
잡으라고
명령해야 한다.
그는
살아 있는 새와
그리고 백향목과
진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물건들과
그 살아 있는 새를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에 찍어,
나병에서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리고
그가 정결하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살아 있는 새는
들판에
놓아주어야 한다.”
— 레 14:4-7.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분은
정결하시고,
더러움이 전혀 없으시며,
땅 위를 날 수 있는
생명으로 충만하시다.
여기에서 새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들에서 오셨고
하늘들에 속하시며
이 땅을 초월하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죽음을 당한
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분은
우리의 더러움을
처리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들판에 놓아준
다른 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하고 영원하며 창조되지 않은
생명인
그분의 부활 생명의
힘과 능력과 에너지로 말미암아
우리의 약함에서
구출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
백향목은
예수님의
존귀하고 높아진 인성을
상징하며,
이러한 인성은
그분을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한다.
가장 작은 식물 중 하나인
우슬초는
주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가까이 오시어
사람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들과 같은
모양이 되신 것’(빌 2:7)을
상징한다.
짙은 붉은색인 진홍색은
피 흘림을 상징하며
또한 왕권을 암시한다
(마 27:28-29).
이 모든 것은
나병에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인성의 수준은 높지만
신분은 낮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분의 피를 흘리시며,
그 결과
부활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시고
존귀하고 높은 왕이
되신 것을
상징한다
— 빌 2:5-11.
나병이 나은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기를
추구해야 했는데,
이것은
나병이라는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으로
낫게 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그의 부족과 더러움을
처리받음으로써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결하게 되기를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동역하는 것이다.
질그릇은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하고
(비교 고후 4:7),
살아 있는 물 곧 생수는
하나님의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영을
상징한다
(요 7:37-39, 계 22:1).
생수가 담긴
질그릇 안에서
새를 잡은 것은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
죽으심으로써,
그분 안에 계신
영원하시고 살아 계신 영을 통해
하나님께
그분 자신을 드리신 것을
의미한다(히 9:14).
레위기 14장 6절과 7절의 기록은
주님의 완전한 구속이,
위치적인 면에서
사람을
객관적으로 정결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주관적으로,
고귀하고 높아졌는데도 겸허한
인성 안에서
피를 흘리신
주님의 고난을
체험하게 하며,
또한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영광스럽게 되심을
체험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진홍색 실의
의미 안에
함축되어 있다.
죽음을 당한
새의 피를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나병 환자에게
뿌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죄인들인 우리에게
뿌려졌고(벧전 1:2),
이러한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를
일곱 번 뿌린 것은
주님의 피가
우리를
온전히 깨끗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요일 1:7, 9).
살아 있는 새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의미한다.
살아 있는 새를
들판에 놓아주는 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정결하게 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승천도
체험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 고후 5:14-15, 엡 2:5-6, 골 3:1-4.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나병 환자의 털을
미는 것은
몸의 원수인
자아가 주는
어려움들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삭도는
십자가를 상징한다
— 레 14:9.
머리털은
사람의 영광을
상징한다.
모든 사람은
자랑할 만한
어떤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혈통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교육을,
어떤 사람은
자신의 미덕들을,
어떤 사람은
주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자랑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며
과시할 만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턱수염은
사람의 존귀를
상징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나 가문이나
심지어 영성에 관련하여
스스로를 존귀하다고 여긴다.
그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눈썹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장점과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출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온몸의 털은
사람의 타고난 힘을
상징한다.
우리는
타고난 힘,
천연적인 방법과 의견으로 가득하여,
자신이
주님을 위해
이런저런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의
모든 방면이
십자가라는 ‘삭도’를 통해
처리되고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때,
우리는
정결하게 될 것이다
— 비교 빌 3:7-11.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그리고 그 영에 의해
모든 일을 함으로써
자아를 완전히 부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해야 한다.
나병 환자가
칠 일 동안
기다리고 지켜본 후에
다시 한번
온몸의 털을 밀고
옷을 빨고
목욕을 하는 것(레 14:9)은,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죄인이
그의
타고난 생명과
일상의 행동의
각 부분을
처리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와
죄가 가득한 자아를
구체적이고 철저하며 절대적인 방식으로
진지하게 처리할 때
우리가 정결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레위기 14장 33절부터 57절까지에서
집은
우리의 참된 집인
교회의 예표이고,
집에 생긴 나병은
교회 안에 있는
죄들과 악을
상징한다.
제사장은
주님이나 주님의 대표 권위자를
상징하고,
집을 살펴보는 것은
유죄 판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치료하기 위해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 고전 1:11.
칠 일 후에
감염된 자리가 있는
돌들을 제거하는 것(레 14:40)은
온전한 기간을 두고
관찰한 후에도
교회의 문제가
여전히 번지고 있으면
문제에 연루된 믿는 이가
하나든 여럿이든
교회의 교통에서
단절시켜
외부인과 같은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질병이 번지는 것을 막고
질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롬 16:17, 딛 3:10).
다른 돌들을 가져다가
제거된 돌들이 있던 자리에
채워 넣는 것(레 14:42상)은
다른 믿는 이들(벧전 2:5)로
부족을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흙을 가져다가
그 집에 바르는 것(레 14:42하)은
주님의 은혜로운 일들에 대한
새로운 체험으로
교회가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생활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필요하다.
나병에 감염된 자리가
다시 생겨
집을 허는 것(레 14:45)은
만일 어떤 교회의 상태가
치료되거나 치유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그 교회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교 계 2:5).
교회가
주님의 은혜로운 일에 대한
새로운 체험으로
새롭게 된 후에
아무런 죄도
번지지 않으면
교회는
정결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온 교회는
영원히 효능 있는
그리스도의 피와
그분의 영원하고 살아 있는 영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완전히 정결하게 되어서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 거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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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나병에서 정결하게 됨”
6일
레 14:36
제사장은
그 감염 자리를
살펴보러 가기 전에,
그 집을
비우도록
명령해야 한다. …
레 39-40
칠 일째 되는 날에
제사장은
다시 가서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감염 자리가
그 집 벽에 번졌다면,
제사장은
그 감염 자리가 있는
돌들을 빼내어
성 밖의 부정한 곳에
버리도록
명령해야 한다.
레위기 14장에서
집은
우리의 집, 우리의 가정인
교회를 예표하며,
집에 생긴 나병은
교회 안에 있는
죄들과 악을 상징한다(33-48절).
… 36절 하반절은
주님이나 사도가
살피러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살피는 것은
유죄 판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치료하기 위해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레위기 14장 39절과 40절은
… 온전한 기간을 두고
관찰한 후에도
교회의 문제가
여전히 번지고 있으면
문제에 연루된
믿는 이가
하나든 여럿이든
교회의 교통에서
단절시켜
외부인과 같은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전 5장).
이것은
교회가
어떤 병에 걸려 있을 때
장로들이 먼저
상황을 관찰해야 함을
뜻한다.
만일 문제가
더 나빠지면
질병이 번지는 것을 막고
질병을 제거하기 위해,
그 문제의 근원
곧 그 질병에 연루된
믿는이나 믿는 이들을
교회의 교통과 교제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다른 돌들을 가져다가
제거된 돌들이 있던 자리에
채워 넣는 것은
다른 믿는 이들로
부족을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레 14:42상).
교회가
나병에 걸렸을 때,
종종 그 문제와 연루된 성도들을
교회의 교통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빈 곳을 만들게 될 것이며,
우리는
다른 믿는 이들로
이 빈 곳을 채워야 한다.
다른 흙을 가져다가
그 집에 바르는 것(레 14:42하)은
주님의 은혜로운 일들에 대한
새로운 체험으로
교회가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다.
즉 주님의 은혜로운 일들을
새롭게 체험함으로
그리스도의 풍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가져와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고
단지 법적인 방식으로
어떤 사람들은 제외시키고
다른 이들로 그들을 대신한다면,
이것은 교회를
공허하게 만들 것이며,
이 공허함 때문에
교회는 더욱더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하는 이들은
주님의
은혜로운 일들을 체험함으로써
교회가 새롭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금식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교회생활은
새로워질 것이고,
새 흙으로 발라질 것이며,
새로워진 교회생활로 인해
모든 지체들이
행복해질 것이다.
“만일 그 돌들을 빼내고
집 벽을 긁어낸 다음
다시 흙을 바른 후에도
집 안에
감염 자리가 다시 생기면,
제사장은
가서 살펴보아야 한다.
감염 자리가
집 안에 번졌다면,
그것은
집 안에 생긴
몹쓸 나병이니
그 집은 부정하다.
그는
그 집을
헐어야 하며,
그 집의 돌들과 재목과 모든 흙을
성 밖의 부정한 곳으로
내가야 한다.”
(레 14:43-45)
이것은
처리를 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심각한 죄들이
발생한다면
교회 전체를
헐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가장 가련한 상황이다.
만일 교회의 상태가
치료되거나 치유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그 교회는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제사장이
들어가서 살펴보아,
그 집에
다시 흙을 바른 후에
감염 자리가
집안에 번지지 않았다면,
그 감염 자리가
깨끗해진 것이니
제사장은
그 집이 정결하다고
선언해야 한다.”
(레 14:48)
이것은
교회가
주님의 은혜로운 일에 대한
새로운 체험으로
새롭게 된 후에
아무런 죄도 번지지 않으면
교회는
정결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레위기 14장 49절부터 51절까지는
집에 생긴 나병도
사람에게 생긴 나병을
정결하게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정결하게 된다는 것을
계시한다.
… 52절은
온 교회가
영원히 효능 있는 그리스도의 피와
그분의 영원하시고 살아 계신 영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 집이
정결하다는 것은
교회가
완전히 정결하게 되어서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 거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5일
레 14:8-9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옷을 빨고
털을 모두 민 다음
물로 목욕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정결하게 된다.
그런 후라야
그는
진영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천막 밖에서
칠 일 동안
머물러야 한다.
칠 일째 되는 날에
그는 다시
털을 모두
밀어야 한다.
그는
머리털과 턱수염과 눈썹까지
모든 털을 밀어야 한다.
그런 다음
옷을 빨고
물로 목욕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는
정결하게 된다.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옷을 빨고
털을 모두 민 다음
물로 목욕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정결하게 된다.”
(레 14:8상)
이것은 한 면에서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체험해야 하며,
또 다른 면에서
그에게
자신의 옛 생활과 타고난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을 처리하고 끊어 버려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위기 14장 8절 하반절 말씀은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죄인이 아직은
형제들과의 교통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깨어서 기다려야 하며
더 처리를 받아야 한다.
나병 환자는
그의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목욕한 후에도
아직은
기다려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며
더 처리를 받아야 한다.
… 사탄에게서 온
우리의 죄,
즉 우리의 나병,
우리의 거역을
처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엄중한 문제이다.
죄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죄를
느슨하거나 가볍거나 부주의하게
처리해서는 안된다.
나병 환자는
‘털을 모두 밀고
물로 목욕을 해야
정결하게 되었다’
(레 14:9).
털은
사람의 몸에서
자라나는 것으로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어려움들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털을 민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자아의 어려움을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를 처리하는
십자가의 일이다.
사람이
십자가의 처리를 받은 다음에는
그 사람 전체가
실지적으로 정결하게 된다.
이러한 처리는
단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철저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계속 반복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여러 종류의 털은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머리털은
사람의 영광을 상징하고,
턱수염은
사람의 존귀를 나타내며,
눈썹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온몸의 털은
사람의 타고난 힘을 나타낸다.
모든 사람은
자랑할 만한
어떤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혈통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교육을,
어떤 사람은
자신의 미덕들을,
어떤 사람은
주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을
자랑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며
과시할 만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성경은
이것을
머리털로 예표했다.
더욱이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나 가문의 배경을
존귀하게 여긴다.
그들은 항상
남들보다 높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이
턱수염이다.
또한 사람은
어느 정도의 타고난 아름다움,
다시 말하면
선천적으로
장점과 강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출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눈썹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으로서
우리는
타고난 힘,
천연적인 방법과 의견으로
가득하여,
자신이
주님을 위해
이런저런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우리의 온몸에
매우 긴 털이 있으며
이것을 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외적인 오염이 아니라
타고난 출생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외적인 오염은
다만 물로 씻기만 하면 되지만,
우리 자신의
타고난 문제는
십자가의 처리를 의미하는
삭도로 밀어야 한다.
이러한 처리는
깊고 철저하여,
우리 속에
상처를 주고
많은 고통을
당하게 한다.
나병 환자가
칠 일 동안
기다리고 지켜본 후에
다시 한번
온몸의 털을 밀고
옷을 빨고
목욕을 하는 것(레 14:9)은,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죄인이
그의
타고난 생명과
일상의 행동의 각 부분을
처리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와
죄가 가득한 자아를
구체적이고 철저하며 절대적인 방식으로
진지하게 처리할 때
우리가 정결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4일
히 9:14
더욱이
영원하신 영을 통하여
흠이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도록
우리의 양심을
얼마나 정결하게 하겠습니까?
요일 1:9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신약의 믿는 이들인
우리는
주님의 정결하게 하심을
누린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신약을
단지 읽고 이해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정결하게 함과 관련된 것의
분명하고 자세한 그림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레위기 14장의 예표들이
필요하다.
예표들에서
우리는
나병에 걸린
우리를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육체 되심으로
사람이 되신 것을
본다.
백향목으로 예표된
그분의 인성은
높고 존귀했다.
우슬초로 예표되신
그분은
사람의 모양이 되심으로
기꺼이 자신을 낮추셨다.
한 면으로
그분의 표준은 높았지만,
다른 한 면으로
그분의 신분은 아주 낮았다.
이것은 둘 다
진홍색 실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두 마리의 새는
두 가지 다른 방면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즉 죽음을 당한 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살아 있는 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이 두 방면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나병, 우리의 죄에서
정결하게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고대의 이스라엘 자손이
두 마리의 새와
백향목과
우슬초,
살아 있는 물이 담긴
질그릇 안에서
새를 잡는 것과,
살아 있는 새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진홍색 실을
함께
죽은 새의 피에 찍어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리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했다고
믿지 않는다.
…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예표들을
이해한다.
이제 우리는
정결하게 되기 위해
여러 방면을 가지신
그리스도,
많은 과정을 거치신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볼 수 있다.
그분께서
흘리신 피는
우리 위에 뿌려졌고,
이러한 피 뿌림은
죄인들인 우리를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와
연결한다.
주님의 구속,
그분의
존귀하고 높고 겸허한 인성,
그분의
부활과 승천과 영광스럽게 되심 모두가
이 예표에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백향목이
그리스도의
존귀하고 높은 인성을
예표하고,
우슬초가
그분의
겸허한 인성을
예표한다는 것을
보았다.
물론 죽음을 당한 새는
그분의 구속을 상징한다.
그분의 부활과 승천과 영광스럽게 되심은
무엇으로 상징되는가?
그분의 부활은
또 다른 새,
즉 살아 있는 새로
상징된다.
이 두 새들은
그리스도의 두 방면,
곧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한 면에서
죽음을 당한 새로
상징되신
그리스도는
죽음을 당하셨고,
또 다른 면에서
살아 있는 새로
상징되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는
부활로 말미암아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살아 있는 새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으로
상징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왕권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셨다.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으로
자신을 낮추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수치를 당하셨으며,
그분의 왕권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셨다.
그러므로 이 한 가지 예표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본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높고도 동시에 겸허한
그분의 인성,
그분의 구속,
그분의
부활과 승천과 영광스럽게 되심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살아 있는 새는
들판에 놓아주어야 한다.”
(레 14:7)
이것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정결하게 된 죄인들을
죽고 부활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의 승천도
체험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이며,
우리는 다만
그것들을
체험하고 누려야 한다.
죽음을 당한 새,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죽었다.
이제
살아 있는 새,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날아오르며 승천한다.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으며,
어떤 방해도 없다.
위의 예표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성경 전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것이
합당한 신학이며
성경적인 신학이다.
성경적인 신학은
레위기 13장과 14장에 나오는
나병과 많은 관련이 있다.
만일 이 신학이
우리의 나병과 관련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것이다.
그분은 다만
하나님이실 뿐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실 것이며,
우리는
나병 환자일 뿐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 이 예표에서
우리는
주님의 구속과
그분의 부활 안에 있는
구원의 능력을
본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았고,
지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분과 함께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3일
레 14:6-7
그는
살아 있는 새와
그리고 백향목과
진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물건들과
그 살아 있는 새를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에 찍어,
나병에서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리고
그가 정결하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살아 있는 새는
들판에
놓아주어야 한다.
백향목은
예수님의
존귀하고 높아진
인성을 상징하며,
이러한 인성은
그분을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한다.
구약에서
식물은 자주
주님의 인성을
예표한다.
특별히 나무는
주님의 인성을
예표한다.
열왕기상 4장 33절은
“그(솔로몬)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라고 말한다.
우슬초는
가장 작은 식물이었다.
레위기 14장 4절에서
우슬초는
주님께서
사람에게 가까이 오시어
사람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
‘사람들과 같은
모양이 되신 것’을
상징한다.
한 면으로
백향목으로 예표되신
주님은
가장 높은 표준의
인성을 지니셨고,
다른 한 면으로
우슬초로 예표되신
주님은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 되시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셨다.
짙은 붉은색인
진홍색(레 14:4)은
성경의 예표에서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진홍색은
주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고,
또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으며,
그 결과
존귀하고 높은
왕이 되셨다는 것을
상징한다.
진홍색은
피 흘림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진홍색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인해
성취하신 구속을
상징한다.
진홍색은 또한
왕권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구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 구속으로 인해
왕이 되셨다.
구주는
싸우심으로
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죽으심으로,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왕이 되신 것이다.
레위기 14장 5절은
“제사장은
새들 가운데 한 마리를
흐르는 물이 담긴
질그릇 안에서
잡으라고
명령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흐르는’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살아 있는’이라는 뜻이다.
살아 있는 물로 채워진
질그릇 안에서
새 한 마리를
잡은 것은
주님께서
육체 안에서
죽으심으로써,
그분 자신을
영원하시고 살아 계신
영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신 것을
상징한다.
질그릇은
주님의
인성을 상징하고,
살아 있는 물은
하나님의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영을 상징한다.
살아 있는 물이 담긴
질그릇 안에서
새 한 마리를 잡았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영으로 충만한
그분의 인성 안에서
죽음을 당하셨음을
의미한다.
이 예표는
히브리서 9장 14절에서
성취되었다.
이 절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영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어 가실 때,
채우고 있던
살아 있는 물,
곧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살아 계신 영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홀로 계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원하신 영께서
그분 안에 계셨고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장 14절의
바울의 말이 없다면,
우리는
레위기 14장 5절의
예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예표에서는
많은 항목들이
아주 간단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질그릇과
살아 있는 물과
죽음을 당한 새 한 마리를
본다.
이 예표를
히브리서 9장 14절과 함께 둘 때,
우리는
그리스도(죽음을 당한 새)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분은
그분의 인성(질그릇) 안에 계셨으나
그분 안에는
영원하신 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살아 있는 물)이
계셨음을
본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을
충만히 채우신
그 영으로 말미암아
그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
레위기 14장 6절과 7절 상반절은
주님의 완전한 구속이,
위치적인 면에서
사람을
객관적으로
정결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주관적으로,
고귀하고 높아졌는데도 겸허한
인성 안에서
피를 흘리신
주님의 고난을
체험하게 하며,
또한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영광스럽게 되심을
체험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진홍색 실의
의미 안에
함축되어 있다.
2일
레 14:4-5
제사장은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진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도록
명령해야 한다.
또 제사장은
새들 가운데
한 마리를
흐르는 물이 담긴
질그릇 안에서
잡으라고
명령해야 한다.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고 성취하신
모든 것을 포함한 구원과
관련된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본다.
그분은
피와
그 영과
우리가 정결하게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하고 완전하고 광대한
공급을 가진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정결하게 함과 구원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완전히 체험할
필요가 있다.
레위기 14장 2절에서처럼
나병 환자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가는 것은
부정한 사람을
주님께로 데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사실상
부정한 사람들인
죄인들을
주님께로 데려간다.
제사장이
나병 환자를
살펴보기 위해
진영 밖으로 나가는 것(레 14:3상)은
주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기 위하여
본래의 위치인
하늘들을 떠나셔서
자신을 낮추어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8장에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그분을 따랐다.
보아라,
한 나병 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손을 내미시어
그에게 대시고
‘내가 원하니,
깨끗하게 되십시오.’
라고 하시자,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게 되었다.”
(1-3절)
이 나병 환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격리되고 제외되어야 했다.
그는
병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다른 이들을
접촉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나병 환자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가지고
그에게 가까이 가셔서
그를 만지셨다.
레위기 14장 4절부터 9절까지에서
우리는
정결하게 된
나병 환자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기를
추구해야 했음을
본다.
이것은
나병의 죄를
앓고 있는 사람이
비록 생명에 의해
내적으로 치료받았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과 더러움을
처리를 받은 후에야
정결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병에서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의 행동뿐 아니라
우리 편에서의 협력도
요구된다.
나병 환자이며 죄인인
우리는
정결하게 되기를
구해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추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동역하는 것이다.
나병을 치료받은 사람은
여전히 정결하게 될
필요가 있다.
치료받는 것과
정결하게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정결하게 되는
과정 혹은 절차에는
이제 우리가 살펴볼
여러 가지 항목들이 포함된다.
“제사장은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를
가져오도록
명령해야 한다.”
(레 14:4)
정결하고
생명이 충만한
이 두 마리의 새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새의 생명,
즉 땅 위의 공중에서
날 수 있는 생명으로
예표되신다.
새는
땅을 초월할 수 있다.
레위기 14장 4절 중반절에 나오는
새는
하늘들에서 오셨고
하늘들에 속하시며
이 땅을 초월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 살아 있는 새는
그리스도께서
생명이 충만하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분은
생명이 충만하시기 때문에
살아 계신다.
… 여기서
정결한 새 두 마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정결하시고
더러움이 전혀 없으시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우리는
정반대이다.
우리의 모든 것은
부정하지만
그분의 모든 것은
정결하다.
우리는 부정하지만
그분은 정결하시다.
새 두 마리는
한 면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더러움을
없애시도록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상징하고,
다른 한 면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약함에서
우리를 구출하시도록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들을
없애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것은
첫 번째 새로
예표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생명의 힘과 능력과 에너지로 말미암아
우리의 약함에서
구출될 수 있도록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
이 생명은
부활의 생명이며
부활 안에 있는 생명이다.
이 생명은 또한
신성한 생명이며,
영원한 생명이고,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생명이다.
우리는 두 번째 새로
예표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이 생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두 마리의 새는
그리스도의 두 방면,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신언노트, 2018 09 02
나병은
고의적인 죄,
주제넘은 죄,
결심하여 하나님을 반대함과 같이
사람 속에서부터 나오는
심각한 죄를
나타냅니다.
미리암, 게하시, 웃시야의 경우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나병은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대표 권위와
하나님의 규정과
하나님의 경륜을
반대하는
반란으로부터
나옵니다
(반대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죄는
반란이다.
그러므로 나병은
죄를 나타냅니다.
성경에 나타난
첫 번째 죄의 경우는
사탄의
하나님을 반대하는
반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반란인 죄는
반대하는 천사장 루시퍼에 의해
만들어진 곧 시작이 알려진 것입니다.
결국 이 죄,
이 나병이
아담을 통해
인류 안으로 들어왔고,
또 이 죄는
사람 안으로 들어왔으며,
그것이
사람 안에서부터
많은 종류의 죄들로,
곧 반란의 많은 나타남들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나병 환자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모두
나병 환자들입니다.
어떤 사람의 육체의 피부 위에
나병의 징후들인
부기나
발진이나
밝은 반점은
제멋대로임 안에,
다른 이들과의 마찰 안에,
또 교만과 자기를 높임 안에 있는
사람의 외적인 표현들을
나타냅니다.
레위기 13장 24절과 25절 안의 상태는
구원받은 한 사람이
그 육체에 의해 행동함,
곧, 그가
화냄,
그가
자신을 정당화함,
그가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려 하지 않음 등이
영적인 나병의
한 징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레위기 14장에서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시고 성취하신,
풍성하고 완전하며 광범위한
구원을 묘사합니다.
이 구원 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한 분,
곧 많은 과정들을
통과하셨고
우리의 깨끗하게 함을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각각의 모든 것이십니다.
“그 제사장은
깨끗하게 되려고 하는
그 한 사람을 위하여
살아 있는
깨끗한 새들 두 마리와
백향목과
(cedar wood; 삼나무와)
진홍색 실의 가닥들과
우슬초가
취해지도록
(be taken; 얻어지게)
명령할 것입니다.
또 그 제사장은
그 새들 가운데
한 마리가
흐르는 물 위에
흙으로 만든 그릇 안에서
도살되도록
명령할 것입니다.
그 살아 있는 새에 관하여,
그는
그것과
또 그 백향목과
또 그 진홍색 실의 가닥들과
또 그 우슬초를
취할 것이고,
그것들을
그 흐르는 물 위에 도살된
그 새의 피에
적실(살짝 담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그 나병에서부터
깨끗하게 되려고 하는
그 한 사람 위에
일곱 번 뿌릴 것이고
그가 깨끗하다고
선언할(표명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살아 있는 새를
그 탁 트인 들판 안으로
가게 할 것입니다.”
— 레 14:4-7.
그 두 살아 있는
깨끗한 새들은
그리스도의 예표들입니다.
그분은
깨끗하시고,
어떤 더럽힘도(오염도) 없으시며,
그 땅 위에 날 수 있는
생명으로 충만하십니다.
여기에서 새들은
그리스도께서
그 하늘들에서부터 오셨고
또 그분께서
그 하늘들에 속하시며
또 그 땅을 초월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죽임을 당한
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분은
우리의 더러움이
없어지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 탁 트인 들판 안으로 가게 한
그 두 번째 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데,
그분은
그 신성하고 영원하며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인
그분의 부활 생명의
능력과 힘과 에너지에 의해
우리의 약함으로부터
우리가 구출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하여
죽은 사람들로부터
일어나셨습니다.
백향목은
예수님의
존귀하고 들어 올려진 인성을
나타내며,
이는
그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있게 합니다;
가장 작은 식물 중 하나인
우슬초는
주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가까이 오셔서
사람의 구주가
되실 수 있도록
그분의
‘사람들의 겉모습으로(닮음 안으로) 되심’(빌 2:7) 안에서
기꺼이 낮게 되셨음을
나타냅니다.
짙은 붉은색인 진홍색은
피 흘림을 나타내고
또 왕권을 함축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나병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자신을 낮추셨고
높은 수준의
하지만 낮은 신분의
한 사람이 되셨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실 수 있으셨고
또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피를 흘리셨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부활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셨고
존귀하고 높은
왕이 되셨음을
나타냅니다.
나병에서 낫게 된 한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되기를
추구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은
나병이라는 죄로
아픈 한 사람이,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에 의해
낫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깨끗하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그의 결점들과 더럽힘이
처리받게 할 필요가
여전히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깨끗하게 되기를 추구함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우리가 동역함입니다.
그 흙으로 만든 그릇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고,
또 그 살아 있는 물은
그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을
나타냅니다;
살아 있는 물 위에
흙으로 만든 한 그릇 안에서
죽임을 당한 그 새는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인성 안에서의
그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분 안에 계셨던
그 영원하시고 살아 계시는 영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음을
나타냅니다.
레위기 14장 6절과 7절 안에 기록된 것들은
주님의 완전한 구속이
사람의 위치 안에서
그를
객관적으로
깨끗하게 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성령 안에서
주관적으로,
고귀하고, 들어 올려졌지만, 낮은
그분의 인성 안에서
그분의 피를 흘리심 안에 있는
주님의 고통을
체험할 수 있게 하고,
또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영광스럽게 되심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그 두 마리의 새들,
그 백향목,
그 우슬초,
또 그 진홍색 실의 가닥들의
의미(중요성) 안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깨끗하게 되려고 하는
나병 환자 위에
죽임을 당한
그 새의 피를
뿌림은
그리스도에 의해
흘려진 피가
그 죄인들인 우리 위에
뿌려졌고,
이 뿌림이
우리를
그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
연결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피를
일곱 번 뿌림은
주님의 피의
깨끗하게 함의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 살아 있는 새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으로
나타내집니다;
그 살아 있는 새를
탁 트인 들판 안으로 가게 하는 것은
그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깨끗하게 된 죄인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뿐 아니라
그분의 승천 또한
체험하게 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나병 환자가
그의 깨끗하게 함을 위하여
그 털을 미는 것은
그 몸의 적인
그 자아의 어려움들을
처리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면도칼은
그 십자가를 나타냅니다.
그 머리털은
사람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각각의 모든 사람들은
어떤 영역들 안에
그의 자랑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가계를(ancestry) 자랑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교육을,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미덕들을,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주님에 대한 사랑 안에 있는
그들의 열정을
자랑합니다.
거의 모든 각각의 사람들이
그 안에서
자랑하고,
그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고,
또 사람 앞에 과시하는
한 영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턱수염은
사람의 존귀를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지위나,
가족 배경이나,
또는 심지어 영성에 관련하여
그들 자신들을
존귀하게 여깁니다(평가합니다);
그들은 항상
그들이 다른 사람들 위에 있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눈썹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천부적으로)
좋고 강한 점들을
가지고 있고,
이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함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타고난 출생에서부터
나왔습니다.
그 온몸의 털은
사람의 타고난 힘을(강함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타고난 힘,
천연적인 방법들과 의견들로
가득하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이것저것을 할 수 있고
또 우리가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아의
모든 면들이
그 십자가라는 그 ‘면도칼’을 통하여
처리되고
또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것도 아닐 때,
우리는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서로 안으로
그리스도를 분배하기 위해
그 십자가를 통하여
또 그 영에 의하여
각각의 모든 것들을 함으로써
그 자아를
완전히 부인해야만 합니다.
그 나병 환자가
칠 일 동안
기다리고 지켜본 후에
다시 한 번
그의 온몸을 면도하고
그의 옷을 빨고
그의 육체를 씻는 것은,
깨끗하게 되려고 하는
한 죄인이
그의
타고난 생명과
매일의 걸음의(일상의 행함의)
각각의 모든 부분들을
처리함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와
죄 많은 자아를
확실하고, 철저하며, 또 절대적인
한 방식으로
진지하게(심각하게) 처리한다면,
우리가 깨끗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레위기 14장 33절부터 57절까지에서
그 집은
우리의 참된 집인
교회를 예표하고,
또 그 집 안에 있는 나병은
그 교회 안에 있는
죄들과 해악들을(악한 일들을)
나타냅니다;
그 제사장은
주님이나 그분의 대리 권위자를
나타내고,
또 집을 조사함은
유죄 판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치유를 위한
한 은혜입니다.
칠 일 후에
감염된(오염된) 돌들을 제거함은
온전한 기간의 시간에 관찰한 후에,
그 교회의 문제가
여전히 번지고 있다면
그 문제에 연루된
믿는 이 또는 믿는 이들이
그 교회의 교통에서부터
쫓아내져야 하고
또 외부인들과 같이
깨끗하지 않게
여겨져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그 질병의 퍼짐을 멈추고
또 그 질병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거된 돌들의 자리에
다른 돌들을 둠은
다른 믿는 이들을 써서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른 회반죽(석고반죽)으로
그 집에 다시 회반죽을 바름은
주님의 은혜로운 일들에 대한
새로운 체험들로
그 교회를 다시 시작함을(renewing; 부흥시킴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그 교회 생활에서의
한 새 출발을 위하여
필요합니다.
나병의 감염이 되돌아온 후에
그 집을 부숨은
그 교회의 상황이
그것이
낫게 되거나, 치유될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면,
그 교회가 끝나야만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일들의
새로운 체험들로
그 교회를 다시 시작한 후에
죄가 번지고 있지 않다면,
그 교회는
깨끗하고
또 문제가 없습니다;
그 전체 교회는
그 영원히 효능 있는
그리스도의 피와
또 그분의 영원하고 살아 있는 영으로
깨끗하게 될 필요가 있고
그러므로 그 교회는
완전히 깨끗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 거처가 됩니다.
1일
레 13:2-3
어떤 사람이
피부에
종창이나
발진이나
밝은 반점이
생겨,
그 피부에
나병이 나타나면,
그를
제사장 아론이나
제사장인 그의 아들들 중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
… 만일 감염된 자리의
털이 희어졌고,
감염된 자리가
겉보기에
여느 피부보다 우묵하게 들어갔다면,
그것은
나병에 감염된 것이다.
제사장은
그를 살펴보고 나서
그가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한다.
나병은
분석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나병이
바깥에서부터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나병의 병균이
사람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발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나병이
안에서부터 나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서
나병이 생기려면
반드시 먼저
나병의 요인이
사람 안에 들어가
이 질병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병은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작용
둘 다로
이루어진다.
원인은
외부에서 오지만
작용은
내부에서 일어난다.
나병(레 13:2)은
고의로 지은 죄,
주제넘어 지은 죄,
작심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같이
사람 속에서 나오는
심각한 죄를
나타낸다.
나병은 항상
거역에서부터 온다.
미리암은
하나님의 대표 권위자인
모세에게 거역했다.
그녀의 거역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한 것이었다(민 12:1).
거역의 결과로
미리암은
나병에 걸렸다(10절).
열왕기하 5장 20절부터 27절까지에서
엘리사의 종인
게하시는
엘리사의 실행을
거역했다.
엘리사는
나병을 치료받았던 이방인인
나아만에게서
어떤 보상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게하시가
나병이 깨끗하게 된 대가로
나아만으로부터
선물들을 받은 후,
나아만의 나병이
그에게 옮겨졌다.
웃시야왕은
제사장 직분에 관한
하나님의 규정을 거역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왕은
제사장 직분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웃시야는
이 규정을 거역했고,
그 결과로
나병에 걸렸다
(대하 26:16-21).
이 세 가지의 경우에서,
나병은
먼저
거역하는 사람 안으로 들어갔고,
그런 다음에
그 사람에게서 나왔다.
구약에 따르면
나병은
어떤 원인의 결과이며,
그 원인은
하나님의 권위와
하나님의 대표 권위와
하나님의 규정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거역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와
그분의 대표 권위에
거역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규정에 거역한다.
끝으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경륜 전체에 대해서도
거역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나병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고
우리 안에서 발생했다.
나병은
죄이다.
… 첫 번째 죄의 사례는
사탄의 거역이다.
… 사탄이 거역하기 전에는
죄와 같은 것이
없었다.
죄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반역자인 천사장 루시퍼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대표 권위 혹은 대표 권위자를
거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안배와 통치와 행정을
거역하는 것이다.
총괄해서 볼 때,
죄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거역이다.
이 거역은
사탄 자신에게서
비롯되고 시작된 것이다.
결국 죄는
인류 안으로 들어왔다.
… 사람 안으로 들어온 후(롬 5:12상),
이 죄, 곧 이 나병은 이제
사람 안에서부터 나온다.
그 결과 우리는
나병에 걸린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슬러서
어떤 것을 할 때마다,
그것은
나병이 된다.
주 예수님께서
천국의 헌법을 반포하셨던
산에서 내려오신 후에
처음으로 하신 일이
한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것이었다
(마 8:1-4).
이 나병 환자는
타락한 아담의 자손을
대표한다.
아담의 자손은 모두
나병 환자들이다.
사탄이
만들어 낸
죄는
아담을 통해
인류 안에 들어와서
우리 모두를
나병 환자로 만든다.
이제 나병은
갖가지 죄들,
즉 거역의
여러 가지 모습과 표현으로
표출된다.
어떤 사람의 피부에
나병 증상으로 생긴
종창이나 발진이나 밝은 반점은
제멋대로이거나
다른 이들과 마찰을 일으키거나
교만하고
자기를 높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사람의 외적인 표현을
상징한다.
레위기 13장 24절과 25절에 언급된
상태는
구원받은 사람이
화를 내거나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다른 이들을 용서하려 하지 않는 등
육체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영적인 나병의
표시임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