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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끊이지 않는 번제물—살아 있는 희생 제물

번제물은 
사람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라기보다는
주로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생활을 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생활을 하도록 
그들의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레위기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제물은 
속죄제물이나 속건제물이 아니라
번제물이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첫 번째 상태, 
곧 하나님과 관련된
우리의 첫 번째 문제가 
범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표현과 대표가 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존재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산다.

번제물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목적으로 창조하신 
사람들인 우리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 스스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취해야 한다.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셨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셨다.

주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이시든지,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무엇을 행하시든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셨다.

요한복음 7장은
그리스도께서 번제물이 되실
완전한 자격을 갖고 계심을 계시한다.

제한받는 생활,
곧 자아를 위해 어떤 것도 하지 않는
제한받는 생활을
하신 분이신 주님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다.

요한복음 7장 16절부터 18절까지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본다.
주님은 자신을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셨다.

요한복음 7장은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의해 제한받는 사람이셨고,
하나님께 속하셨으며,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에게서 오셨고,
자신의 말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말하셨다는 것을 계시한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셨을 때,
그분의 말씀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표현되셨다.
그분의 말씀하심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요한복음 7장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번제물의 실재이심을 본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에 의해 제한받으시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생활을 하셨기 때문이다.

번제물의 예표에서
신성한 삼일성이 계시된다.
레위기 1장 3절과 8절과 9절에서
신성한 삼일성을 계시하는
중요한 항목들은
번제물과 회막과
여호와와 제사장과
불과 물이다.

번제물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음식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회막은 
제물을 드리는 장소이신 
아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제물들은 
회막 입구에서 드려졌다. 
제물이 
합법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회막 입구 외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드려져서는 안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것을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제물을 드리는 근거로 
취해야 한다.

레위기 1장에서 
아들 그리스도께서 
여호와께 제물로 드려지시기 때문에, 
‘여호와’는 
제물을 받으시는 분이신 
아버지를 가리킨다.

레위기 1장 8절과 9절에서 
제물을 드리는 일을 
섬기는 제사장은 
섬기는 분이신 
아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분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시고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번제물과 회막과 제사장으로 예표되신 것처럼 
아들 그리스도는, 
동시에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장소와 
제물을 드리는 일을 섬기시는 분이시다.

불은 
기쁘게 받으시는 주체이신 
하나님을 상징한다.

불은 
태워 버리고 삼킨다. 
하나님은 
제물을 태우심으로써 
이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다.

번제물을 태우는 불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입이었다.

번제물을 태우는 것은 
신성한 식사였다.

번제물의 내장과 다리를 씻는 
물은 
씻는 주체이신 
그 영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과 
그분의 매일의 행함이
성령에 의해 
계속 씻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은 
땅에 속한 것들을 접촉함으로 
더러워지는 것에서 
지켜지실 수 있었다.

레위기 1장 3절과 8절과 9절에서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 전체가 
번제물과 관련되신다는 것을 본다.

오늘날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 안에서 
계속해서 번제물을 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매일, 아침뿐만 아니라 
저녁에도 
번제물을 드리는 것이 요구되었다. 
안식일마다, 
매달 초하룻날마다, 
그리고 모든 명절 동안에 
특별한 번제물이 요구되었다.

번제물에 관한 요구 조건 때문에, 
놋 제단은 
특별히 ‘번제단’이라고 불리었다.

번제물은 
계속 드려야 하는 제물이었고, 
번제물을 태우는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어야 했다. 
이 불은 
밤낮으로 타고 있어야 했다.

“번제물은 
아침까지 밤새도록 
제단 위 석쇠 위에 있어야 하고, 
제단의 불은 
계속 타고 있어야 한다.” 
― 레 6:9.

“제단 위의 불은 
계속 타고 있어야 하며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
― 레 6:12상.

“불은 
제단 위에서 
항상 타고 있어야 하며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 
― 레 6:13.

‘아침까지 밤새도록’은 
번제물이 
어두운 밤인 이 시대를 거쳐 
아침까지, 
곧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까지 
태우는 장소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단 위에서 
계속 타고 있는 불은 
우주 안의 거룩한 불이신 
하나님께서 
그분께 음식으로 바쳐진 것을 
항상 받으실(태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는 것과 
그분께 바쳐진 것을 
기쁘게 받으시려는 갈망을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제물의 예표는 
우리에게 번제물을 계속 드리는 생활, 
곧 온종일 제단 위에서 불타고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번제물을 계속 드리는 
생활을 하는 것은 
살아 있는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다.

번제물은 
우리의 헌신, 
곧 우리가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의 예표이다. 
헌신의 의미는 
우리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구약에서 
매일 번제물을 드리는 것은 
신약에서 
하나님께 속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매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예표한다.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오는 
희생 제물은 
살아 있다. 
왜냐하면 부활하여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희생 제물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리며, 
이럴 때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다.

이 희생 제물은 
거룩하다. 
왜냐하면 위치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세상과 속된 모든 사람들과 일들과 사물들에서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었기 때문이고, 
또 기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한 본성을 가지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타고난 생명과 옛 창조물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거룩하게 되고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희생 제물을 기뻐하신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몸’은 복수이지만, 
‘희생 제물’은 단수이다.

비록 많은 몸들이 드려지지만, 
이 몸들이 
한 희생 제물이 된다. 
이것은 비록 우리가 많지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우리의 봉사가 
분리되고 서로 상관없는 많은 개별적인 봉사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우리의 모든 봉사는 
하나의 온전한 봉사를 
구성해야 한다. 
이 봉사는 
틀림없이 유일한데, 
그것은 이 봉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몸의 봉사이기 때문이다.

교회생활 전체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번제물이다.

믿는 이들은 
그들의 몸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산다. 
몸의 생활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주님과 그분의 몸에게 
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봉사는 
반드시 번제단에서 온 불에
근거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봉사가 
이 불에 근거하기를 원하셨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는 
반드시 번제단의 불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우리의 봉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불이 
타오르는 것에서 나오고 
이러한 불의 산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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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plies on “끊이지 않는 번제물—살아 있는 희생 제물”

6일

레 9:24 
그때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진 부분들을 불태웠다. 
온 백성이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롬 12:11 
열심을 내어 
게으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영 안에서 불타서 
주님을 섬기십시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리라고 
권유한다. 
로마서 6장 13절과 19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 몸의 지체들을 
싸우는 무기로 드리고 
섬기는 노예로 드리라고 격려했는데, 
그것은 로마서 6장이 
전쟁과 섬김에 관한 
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생활에서 중요한 문제는 
희생 제물에 관한 것, 
즉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관한 것이다. 
교회생활 전체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번제물이다. 
많은 몸들이 드려지지만 
희생 제물은 하나이다. 
왜 많은 몸들이 있지만 
희생 제물은 하나뿐인가? 
왜냐하면 많은 지체들이 
한 몸이고 
많은 믿는 이들이 
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믿는 이들은 
그들의 몸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산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권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거룩하고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합리적인 봉사입니다.”

라고 말한다. 
몸의 생활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주님과 그분의 몸에게 
드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주님의 몸을 위해 
주님께 드려야 한다. 
주님은 
그분의 구원 안에서 
우리의 몸을 
대적인 사탄의 
강탈하는 손에서 
해방시키셨다. 
이제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연결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해방된 몸을 
몸의 생활을 위해 
주님께 드릴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봉사는 
반드시 번제단에서 온 
불에 근거해야 한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서 향을 피웠다. 
향을 피우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를 
상징한다. 
향을 피우는 데 사용하는 불은 
번제단에서 가져온 것이어야 했다. 
만약 누군가가 
번제단에서 온 불로 
향을 피우지 않으면, 
즉 다른 불을 드리면, 
그의 봉사는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죽음의 심판을 받았다. 
이러한 예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가 
반드시 번제단에서 온 
불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 자손이 
성막을 따라 
광야를 여행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봉사는 
번제단에 불이 붙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번제단에 있는 불은 
하나님에게서 내려왔다. 
이스라엘 자손은 
불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하나님께 드리는 
그들의 봉사를 
시작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하나님에 의해 구출되었고, 
홍해를 건넜고, 
시나이산 기슭에 성막을 세웠지만, 
그들의 봉사의 기반이 없었으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다. 
그들의 봉사의 기반은 
불이 타고 있는 번제단이었다. 
물론 번제단만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번제단에는 
하나님에게서 내려온 
불이 있어야 했다.

레위기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 계셨지만, 
그들은 
아직 그분을 섬길 수 없었다. 
레위기 9장에 가서야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시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하게 하셨다.

번제물을 드리는 것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기 위한 
선결 조건이었다. 
단지 번제단만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번제물을 
번제단에 드려야 했다. 
번제물인 희생 제물을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씻고, 
번제단에 올려놓은 후에야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올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봉사가 
이러한 불에 
기반을 둔 것이 되기를 
원하셨다. 
향을 피우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였지만, 
향을 피우는 데 사용된 불은 
번제단에서 가져와야 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는 
반드시 번제단의 불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우리의 봉사는 
반드시 이러한 불로 
태워진 것의 
산물이어야 한다.

5일

롬 12:1 
그러므로 형제님들, 
내가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권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거룩하고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합리적인 봉사입니다.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각 사람이 서로 지체들입니다.

헌신의 근거를 알고 
헌신의 동기를 가지게 되면,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면 헌신이란 무엇인가? 
헌신의 의미는 무엇인가? 
… 로마서 12장 1절은 
헌신의 의미가
‘희생 제물’이 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

번제물로 드려진 희생 제물은 
… 제단 위에서 불태워져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하나님의 음식이 되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희생 제물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실 때 
만족하셨다. 
이렇게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은 
우리의 헌신의 예표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어 
만족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음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이것저것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요리되지 않은 쌀더미와 같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셔서 
우리는 본래의 쌀더미에서 분별되었고, 
과정을 거쳐 요리되어
하나님의 상인 
제단 위에 놓여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하나님의 음식이 된 것이다. 
이것이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의 의미이며, 
헌신의 의미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매일 번제물을 드릴 것을 
요구하셨는데, 
이 번제물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도록 
그분의 음식이 되었다. 
이것은 
신약에서 
하나님께 속한 우리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매일 우리 자신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예표한다. 
차이가 있다면, 
구약의 백성이 드린 것은 
단지 죽은 희생 제물이지만, 
우리가 드리는 것은 
살아 있는 희생 제물이라는 것이다. 
이 둘의 성질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하나님의 음식이 된다는 점에서 
이 둘의 의미는 동일하다.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은 
그분을 만족시켜 드리는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그분을 
만족시켜 드리는가에 있다. 
이것이 
우리의 헌신의 
참된 의미이다.

로마서 12장은 
우리의 몸을 
교회생활을 위해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리라고 말한다. 
이 희생 제물은 
살아 있다. 
왜냐하면 부활하여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희생 제물은 
모두 죽은 제물이었던 
구약의 제물들과 같지 않다. 
이 희생 제물은
또한 거룩하다. 
왜냐하면 위치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세상과 속된 모든 사람들과 
일들과 사물들에서 
하나님께 속하도록 
분별되었기 때문이고, 
또 기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한 본성을 가지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타고난 생명과 옛 창조물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거룩하게 되고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희생 제물을 
기뻐하신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몸’은 헬라어로 복수형이고
‘희생 제물’은 단수형이다. 
이것은 
비록 많은 몸들이 드려지지만 
그들이 
한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우리는 
수가 많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의 봉사가 분리되거나 
서로 상관없는 많은 개별적인 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모든 봉사는 
하나의 전체적인 봉사가 되어야 하고, 
이 봉사는 
그리스도의 한 몸의 봉사이기 때문에 
유일해야 한다.

로마서 12장에서 헌신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이다. 
이 반응은 
바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살아 있는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구약에서‘ 희생 제물’은 
가축 떼로부터 따로 세워져 
죽임을 당하고 도살되었던 
동물을 가리킨다. 
제단에 두어진 모든 것은 
다 죽음을 거쳐야 했고, 
또한 일단 죽으면 
그 생명이 끝난 것이며, 
다른 어떤 용도도 
없게 된다. 
또한 모든 희생 제물은 
두 번 드릴 수 없고 
한 번밖에 드리지 못하는데, 
이것은 처음 드려질 때 
희생 제물이 죽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희생 제물이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는 또한 
살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희생 제물이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주님의 손에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희생 제물로 
주님께 드릴 수 있으며,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다. 
살아 있는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님께 
마땅히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다.

4일

벧후 1:19 
또한 우리에게는 
신언자가 말한 
더 확실한 말씀이 있습니다.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여러분은 
날이 밝고 
샛별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레 6:13 
불은 
제단 위에서 
항상 타고 있어야 하며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

헌신의 관문은 
우리가 
다른 체험들을 하기 위한 
열쇠이고, 
헌신은 
단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체험하는 
문제이다. 
구약의 예표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번제물을 드렸다. 
제단은
번제단이라고 불리었다. 
번제물은 
계속 드려야 하는 제물이었고, 
번제물을 태우는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어야 했다. 
이 불은 
밤낮으로 타고 있어야 했다. 
이 예표는 
우리가 
번제물로서의 생활, 
곧 온종일 
제단 위에서 
불태워지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가 
매일 아침 시간에 
자신을 헌신하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 
저녁 시간에 
다시 자신을 헌신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다. 
여러분은 이미 수년 동안 
주님께 헌신해 왔는데 
여전히 매일 
아침저녁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헌신해야 한다. 
그럴 뿐 아니라 
비록 율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매주 주일을 맞이할 때, 
특별히 그 주일을 위하여 
또 그 주일 동안의 봉사와 경배를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것이 옳다.

번제물은 
아침저녁으로 
매일 드려야 하는 
제물이었다. 
또한 안식일마다, 
매달 초하룻날마다, 
그리고 모든 명절 기간에 
특별한 번제물을 드렸다. 
또한 큰일이 있을 때에도 
특별한 번제물을 
드려야 했다. 
… 매일, 명절 때마다, 
그리고 큰일이 있을 때마다 
번제물을 드려야 했다. 
그러므로 번제물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제물들 중의 하나이다. 
이 때문에 놋 제단은 
특별히‘ 번제단’이라고까지 불리었다. 
이러한 제물을 
자주 드린 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도 나날이 
새롭게 헌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특별 집회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 
특별한 제물을 드려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계속 자신을 헌신한다면, 
헌신에 대한 체험이 
우리 안에서 증가되고 
더욱 구체화될 것이다.

레위기 6장 9절에서 
우리는 번제물을 멈추지 않고 
계속 불태워야 함을 본다. 
이 불이 
계속 타오르기 위해서는 
제사장들이 
불에 장작을 
계속해서 놓아야 했다.

번제물이 
아침까지 밤새도록 
제단 위의 석쇠(장작) 위에 
두어지는 것은 
또한 드려진 제물이 
어두운 밤을 지나 아침까지 
태우는 곳에 
남아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밤새도록’은 
이 모든 어두운 시대를 의미한다. 
우리가 있는 
이 시대는 
어두운 밤이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아침까지 
계속 태워져야 했다.

밤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든 
결국 아침이 올 것이다. 
즉, 해가 뜰 것이다. 
떠오르는 참된 해는 
주님의 다시 오심일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두운 밤의 시련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 때문에 빨리 오시도록 주님께 간구할수록, 
주님은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가 
더 긴 어두운 밤을 통과하도록 
그분의 다시 오심을 늦추실 것이다.

제단 위의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고 있어야 했다. 
레위기 6장 12절 상반절은
“제단 위의 불은 
계속 타고 있어야 하며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제단 위에서 
계속 타고 있는 불은 
우주 안의 거룩한 불이신 
하나님께서 
그분께 음식으로 바쳐진 것을 
항상 받으실(태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것은 
곧 우리를 태우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태워질 때, 
우리는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태워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불이 계속 타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께 바쳐진 것을 
기쁘게 받으시려는 갈망을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받으시기를 
갈망하시며, 
우리를 태우심으로써 
기쁘게 받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많이 태우실수록, 
그분은 
우리를 더욱더 기쁘게 받으신다.

3일

레 1:8-9 
그러고 나서 
제사장들인 아론의 아들들은 
각을 뜬 조각과 
머리와 
기름 덩이를 
제단 위의 
불에 놓은 장작에 
가지런히 올려놓아야 한다. 
그가 그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어 놓으면, 
제사장은 그모든 것을 
제단 위에서 태워야 한다. 
이것이 
번제물이고 
화제물이며 
여호와를 만족시키는 향기이다.

레위기 1장 3절에 있는 회막은 
제물을 드리는 장소이신 
아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제물들은 
회막 입구에서 드려졌다. 
제물이 
합법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회막 입구 외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드려져서는 안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것을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제물을 드리는 근거로 
취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제물을 받으실 것이다. 
신명기 12장 5절부터 14절까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장소밖에서는 
어떤 것도 드리지 말라고 
명하셨다. 
… 무언가를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곧 죄이다. 
가인의 제물이 
거절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그의 제물에 대한 
근거로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신약의 여호와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 구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 출애굽기 3장 6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는 
삼일 하나님이시다. 
레위기 1장에서는 
아들 그리스도께서 
여호와께 제물로 드려지시기 때문에, 
‘여호와’는 
제물을 받으시는 분이신 
아버지를 가리킨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이 
전통적인 신학의 교리들에 따라 
체계화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레위기 1장 8절과 9절에서 
제사장은 
섬기시는 분이신 
아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제사장은 
제물을 드렸다. 
히브리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며,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시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번제물과 
회막과 
제사장으로 
예표되신 것처럼 
아들 그리스도는, 
동시에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장소와 
제물을 드리는 일을 섬기시는 분이시다.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식당과 음식과 시중드는 사람이 
모두 하나인 것과 같다. 
이것은 
삼일성에 관한 전통적인 가르침들이 
불충분하며, 
삼일성은 
사람의 지성으로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레위기 1장 8절과 9절에서 
불은 
기쁘게 받으시는 주체이신 
하나님을 상징한다.
불은 
태워 버리고 삼킨다. 
우리는 
음식물을 
우리의 입으로 
받아들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제물을 
불로 태우심으로써 
받아들이셨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불은 
여호와의 입이었다. 
… 먹는 일에서 
우리의 입이 
곧 우리의 인격이다. 
그러므로 
번제물을 태우는 불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히브리서 12장 29절은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태워 버리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신성한 불은 
심판하거나 
혹은 받아들이기 위해 
작용할 수 있다. 
번제물을 태워 버린 불은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번제물을 태우는 것은 
신성한 식사였다.

번제물의 내장과 다리를 
씻는 물은 
씻는 주체이신 
그 영을 상징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정하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과 
그분의 매일의 행함이 
물로 상징되신 
그 영에 의해 
계속 씻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은 
땅에 속한 것들을 접촉함으로 
더러워지는 것에서 
지켜지실 수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번제물이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음식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것을 보았다. 
또한 우리는 
삼일성 전체가 
번제물과 관련되신다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시고, 
아들 하나님은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장소와 섬기시는 분이시며, 
영 하나님은 
씻으시는 분이시다. 
받아들이는 불은 
신격 전체를 가리킨다. 
어떤 사람들은 
아들을 
불의 일부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들이 
제물로서 
불에 태워지시기 때문이다. 
특히 구약의 예표들을 
연구할 때, 
삼일성에 관한 
전통적이고 조직적인 가르침들은 
전적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삼일성에 관한 
조직적인 가르침들은 
끝없는 논쟁에 
문을 열어 놓는데, 
이것은 삼일성이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2일

요 7: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입니다.

요 7:18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만,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그 사람은
참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습니다.

제한받는 생활,
곧 자아를 위해 어떤 것도 하지 않는
제한받는 생활을
하신 분이신 주님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다.
주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셨을 때,
유대인들이 이상히 여기며
“이 사람은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글을 압니까?”(요 7:15)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의 가르침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만,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그 사람은
참되며,
그 사람 속에는
불의가 없습니다.”
(요 7:16-18)
여기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본다.
반대로 주님은
자신을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셨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
사람이시라는 것은,
그분께서
어떤 일을 하셨거나
어떤 말을 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나님께 속하셨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으셨으며,
하나님에게서 오셨고,
하나님을 말씀하셨다는 사실 때문이다.
요한복음 7장에는
주 예수님께서 행하신
어떤 일에 대한 기록도 없다.
이 장은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의해
제한받는 사람이셨고,
하나님께 속하셨으며,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에게서 오셨고,
자신의 말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말하셨다는 것을 계시한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셨을때,
그분의 말씀하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표현되셨다.
그분의 말씀하심을 통하여
그분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

주님은
제한받는 삶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에
충분히 번제물이 되실
자격이 있으셨다.
레위기에는
다섯 가지 기본 제물,
즉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물과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 나온다.
번제물은 주로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
특별하다.
번제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레위기 1장에 의하면,
이 제물은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하나님의 음식으로서
태워져서 재가 되었다.
요한복음 7장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번제물의 실재이심을 본다.
그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제한받는 삶을 사셨다.
그분은
하나님께 속하셨고,
하나님에게서 오셨으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으셨다.

누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그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제한받는 삶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요한복음 7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만일
이 장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기꺼이 제한받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들이 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번제물이 되기 위한 생활이다.

레위기 1장 3절은
“만일 제물을
소 떼에서 골라
번제물로 바치려면
… 자신이 여호와 앞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그것을
회막 입구에서 바쳐야 한다.”
라고 말한다.
8절과 9절은
“그러고 나서
제사장들인 아론의 아들들은
각을 뜬 조각과 머리와 기름 덩이를
제단 위의 불에 놓은 장작에
가지런히 올려놓아야 한다.
그가 그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어 놓으면,
제사장은 그 모든 것을
제단 위에서 태워야 한다.
이것이 번제물이고 화제물이며
여호와를 만족시키는 향기이다.”
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서
신성한 삼일성을 계시하는
중요한 항목들은
번제물과 회막과
여호와와 제사장과
불과 물이다.
예표인 번제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항목들에 대한 해석을
알아야 한다.

민수기 28장 2절에서
여호와는
“너희는
나의 제물, 나의 음식
곧 나를 만족시키는 향기인 화제물을
정해진 때에
내게 삼가 바쳐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번제물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음식이신 아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1일

레 1:3
만일 제물을 소 떼에서 골라 
번제물로 바치려면 
그는 
흠 없는 수컷을 바치되, 
자신이 
여호와 앞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그것을 
회막 입구에서 
바쳐야 한다.

요 4: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번제물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며,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번제물은 
사람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라기보다는 
주로 절대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며
온전한 생활을 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이러한 생활을 하도록 
그들의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번제물은 
하나님께서 누리시고 만족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음식이다. 
번제물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바쳐야 했다.

여러분은 
정말로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관심하는가?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것, 
여러분이 말하는 모든 것, 
여러분의 존재 전체가 
백 퍼센트 하나님만을 위한다고 
말할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취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번제물이 되시는 
그분이 필요하다. 
번제물은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시는 분이심을 상징한다. 
여러분이 사복음서를 다시 읽어 본다면, 
이 땅에서 
백 퍼센트 하나님을 위해 사셨던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의 온 존재, 
그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과 
우리 자신의 선택을 위한다. 
그러나 우리의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신다.

과거에 나는 
우리에게 속건제물이신 그리스도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졌었다. 
그러나 오늘날 
나의 인식은 바뀌었다. 
우리에게는 먼저 
번제물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첫 번째 문제가 
범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범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그다지 위하지 않는다.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에게 
잘못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 것은, 
내가 여전히 
전적으로 그분을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번째 필요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이다.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려 본 적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죄악이 가득한지를 
깨달을 수 없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회개했으며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는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기 전까지는 
자신이 얼마나 죄악이 가득한지를 
알 수 없다. 
번제물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류가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위하지 않으며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위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물로 취해야 한다. 
우리가 
번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에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죄악이 가득한지를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자신이 
얼마나 죄악이 가득한지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미움뿐 아니라
우리의 사랑까지도 
죄악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윤리적으로 말해서, 
다른 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용인되는 것이고, 
다른 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서 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사람들을 미워하고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해 
사람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위해 
미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다른 이들을 미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도 
죄이다. 
도덕적이든 비도덕적이든, 
선하든 악하든, 
사랑에 속한 것이든 미움에 속한 것이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죄이다. 
어떤 것이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위해 존재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표현과 대표가 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산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미워할 때 
하나님에게서 독립적이고, 
다른 이들을 사랑할 때도 
역시 하나님에게서 독립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미움과 사랑이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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