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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그 영을 호흡하고 생명수를 마시며 하나님의 떡을 먹음으로써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체험함

부활 안에 계신 아들은 완결되신 영을 거룩한 숨으로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육체 되심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고 또한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음을 계시한다. 이처럼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을 완결되신 영으로서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성령은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예정되고, 14장 16절과 17절, 26절, 15장 26절, 16장 7절과 8절, 13절에서 약속된 그 영이시다. 이것은 주님께서 성령을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신 것이 또 다른 보혜사에 대한 약속을 이루신 것이었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어지신 것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사실 수 있고 제자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거하실 수 있고 그들이 그분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 영을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심으로써 주 예수님은 그분 자신을 생명과 모든 것으로 제자들 안에 넣어 주셨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성령은 사실상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신데, 그것은 이 영이 그분의 숨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영은 아들의 숨이시다.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시고, 이 영은 우리의 숨이시다.

하나님이신 말씀은 육체 되심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고, 부활 안에서 그분은 우리가 들이쉴 수 있는 거룩한 숨이 되셨다.

이제 우리에게는 말씀과 어린양과 나무와 숨이신 그리스도가 있다. 말씀은 표현을 위해 있고, 어린양은 구속을 위해 있으며, 나무는 생명을 분배하기 위해 있고, 숨은 우리의 생활을 위해 있다.

그 숨이신 완결되신 영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때 우리에게 각각의 모든 것들이 되신다. 오직 그 숨만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오직 그 숨 곧 그 영만이 이기는 이가 되실 수 있다.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체험하고자 한다면, 우리 모두는 똑같은 영적인 물, 곧 모든 것을 포함하신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마셔야 한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영적인 물은 갈라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를 가리킨다. 이 반석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이 물은 모든 것을 포함한 우리의 물이신 그 영을 예표한다.

영적인 물인 생수는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이다.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를 마실 때 우리는 부활 안에 있고 부활에 속한 사람들이 된다.

우리가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마실 때에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신다. 이것은 마심으로써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이게 되어, 주님께서 유기적으로 우리와 하나 되시고 우리의 생명과 조성 성분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도록 하나님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그리스도로 조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사람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가지신 의도는, 우리의 음식을 바꾸고 하늘에 속한 음식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먹이심으로써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일해 넣으시어 우리의 조성을 바꾸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은 우리의 떡이신 그리스도, 곧 하늘에 속한 떡, 생명의 떡, 살아 있는 떡, 참떡, 하나님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밝혀 준다.

주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떡이자 생명의 떡이자 살아 있는 떡이신 그분을 먹고 소화하고 동화하기 원하신다.

생명의 떡은 음식의 형태로 된 생명 공급이다.

‘생명의 떡’은 그 떡의 본성, 즉 생명을 가리키고, ‘살아 있는 떡’은 그 떡의 상태, 즉 살아 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경륜은 그리스도께서 내적으로 우리 안으로 오시는 문제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에 있는 ‘영적 식사’에 관한 기록은 하나님의 의도가 먹는 방식으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임을 계시한다.

먹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것들을 접촉하고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우리의 조성이 된다.

주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거듭난 새사람 안에 생명의 방식으로 흡수되실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먹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 하나님의 분배를 체험하는 길이다.

우리가 먹고 소화하고 동화한 음식은 사실상 우리가 된다. 이것은 연합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하나 되기를 갈망하시는데, 이러한 하나는 우리가 음식을 먹고 소화하고 동화할 때 발생하는 일로 예시된다.

우리는 우리가 먹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는다면, 우리는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기는 이들은 그들의 음식 공급이신 주님을 합당하게 먹는 데로 회복되었다. 그들은 생명나무와 감추어진 만나이실 뿐 아니라 풍성으로 가득한 잔치이신 그분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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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계 2:7 …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주어서 먹게 할 것이다.’

계 2:17 …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감추어진 만나를 주고, …

계 3:20 보아라,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누구든지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사람에게 그분 자신을 교리로 제시하지 않으시고 생명의 떡(요 6:35, 48)으로 제시하셨다. 신약에서 교회들이 세워졌을 때 그 교회들은 ‘먹는 교회들’이었다. 우리는 사도행전이 먹는 것의 원칙과 실재를 담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먹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받아들인 것을 소화하고 동화하여 우리의 요소와 조성 성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9장 4절과 5절에서 주님께서 믿는 이들을 그분 자신의 지체들로 여기신 사실은, 믿는 이들이 주 예수님을 그들 자신 안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분을 소화하고 동화하여 그들의 존재의 조성 성분이 되게 했음을 계시한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주님은 이기는 이들에게 생명나무(2:7)와 감추어진 만나를 주어서 먹게 하시고(17절), 그분의 풍성이 가득한 잔치에서 그분과 함께 먹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3:20). 요한계시록 2장 7절의 생명나무는 우리를 다시 창세기 2장으로 향하게 하는데, 창세기 2장은 먹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과 관련된 장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2장 17절의 감추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을 가리킨다. 게다가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언급하듯이, 주님의 풍성이 가득한 잔치에서 주님과 함께 먹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은 땅의 풍성한 소산물을 먹은 것을 가리킨다(수 5:10-12).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자신을 생명나무, 만나, 좋은 땅의 소산물로 제시하신 순서가 구약에서 이 세 가지 항목을 제시한 순서와 일치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주님은 그분을 먹는 긍정적인 방면만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또한 부정적인 방면에서 생명 공급이신 그분을 누리는 데서 믿는 이들을 빗나가게 하는 가르침들을 폭로하신다. 2장 14절과 15절에서 주님은 버가모에 있는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책망할 것이 있다. 네가 있는 그곳에 발람의 가르침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발람은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의 자손들 앞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놓게 하여 우상 앞에 바친 희생 제물을 먹고 음행을 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너에게 또한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 2장 20절을 보면, 주님은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에게 책망할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한 것이다. 그 여자는 여신언자로 자처하면서 나의 노예들을 가르치고 미혹시켜 음행하게 하고 우상 앞에 바친 희생 제물을 먹게 한다.” 죽이는 문자에 속한 교리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을 손상한다. 우리가 이런 종교적인 가르침들을 붙든다면,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적인 가르침을 주의하는 대신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우리의 영적인 음식으로 먹어야 한다.

주님의 의도는 우리가 그분을 먹는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생활에서 우선적인 것은 교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우리의 음식으로 먹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룩하게 됨은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거룩하게 되려면 우리는 거룩하신 분인 주님을 먹어서, 우리의 거룩함이신 그분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주님은 합당한 음식, 하나님께서 정하신 음식을 먹는 문제를 회복하기를 갈망하신다. 이 음식은 생명나무와 만나와 좋은 땅의 소산물로 예표되는데, 이 모두는 우리에게 음식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들이다. 이 계시가 초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상실되었지만, 주님은 오셔서 이기는 이들을 부르셨다. 곧 그분을 먹는 데로 돌아옴으로써 종교적인 교리를 이길 사람들을 부르셨다. 우리는 처음으로 회복될 필요가 있다. 곧 우리에게 음식으로 공급되시는 주님을 먹는 데로 회복될 필요가 있다.

5일

요 6: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

요 6: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존재 전체 안으로 그분 자신을 일해 넣으시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을 적시시고, 우리의 감정에 침투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차지하셔서 우리의 전 존재를 소유하기 원하신다. 우리가 먹을 때, 우리의 몸 안으로 받아들인 음식은 소화되고 동화되어 우리 몸의 조성 성분이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점차 자라고 신진대사적으로 변화되어 결국에는 충분히 성장한 사람에 이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고 신진대사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고후 3:18). 그러한 변화를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새사람을 입고 교회생활 안으로 완전히 이끌리게 된다. 이러한 교회생활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인 몸의 실지적인 생활이다. 여기에는 교리나 인간 조직이 없다. 오직 생명의 성장을 위하시는 그리스도만 계신다.

요한복음 6장 27절에서 주님은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십시오.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여러분에게 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여러분은 영원한 양식, 곧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영원한 양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은 단지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양식이 되시기 위해 하늘에서 오셨다.

우리는 우리에게 매일의 양식이 되시는 주 예수님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요한복음 6장은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님에 관한 것들을 자세히 보여 주는 유일한 장이다. 주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니”(35, 48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생명의 떡이신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시고(41, 50-51, 58절), 하나님의 떡이시며(33절), 살아 있는 떡이시고(51절), 참떡이시다(32절).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신 그분은 하늘의 떡이시다. 하나님의 떡이신 그분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에게서 보내지셨으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생명의 떡이신 그분은 영원한 생명 곧 ‘조에(zoe)’를 가진 떡이시다. ‘생명의 떡’은 그 떡의 본성, 즉 생명을 가리키고, ‘살아 있는 떡’은 그 떡의 상태, 즉 살아 있음을 가리킨다. 참떡이신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실재의 떡이시다. 그리스도는 참되시며 실재이시다. 우리가 날마다 먹는 물질적인 음식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먹는 음식의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생명의 떡이시다.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여러분은 생명에 관한 많은 메시지를 듣지만 여전히 여러분에게 매일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생명의 방식으로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들을 전해 온 이유이다. 이 메시지들에서의 부담은 성경이 단지 가르침을 위한 것이 아닌 생명과 생명 공급을 위한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계명들과 규례들에 관한 가르침들을 찾기 위해 성경을 대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생명과 생명 공급을 위한 것이므로, 우리는 음식을 얻기 위해 성경을 대해야 한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누리는 음식은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님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살아 있는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

4일

고전 10:3-4 모두 똑같은 영적인 음식을 먹었고, 모두 똑같은 영적인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르는 영적인 반석에서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적인 반석으로서 믿는 이들을 따르시면서 그들에게 영적인 물을 주신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있는 ‘영적인 물’은 갈라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출 17:6)를 가리키며,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시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포함한 물이 되시는 그 영(요 7:37-39, 고전 12:13)을 예표한다. 살아 있는 영적인 반석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로 맞으셨다. 이것은 부활 안에서 그분에게서 생명수가 흘러나와, 그분의 구속된 백성 안으로 들어가 그들이 마실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맞은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명수는 그 영을 상징한다(요 7:37-39). 우리는 모두 똑같은 영적인 물을 마셔야 하며,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마셔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의도가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시는 것임을 본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믿는 이들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이라는 것과, 우리가 타락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 때문에 그분의 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셨고 구속을 성취하셨다는 것만 알 뿐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그런 후에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이게 하신다는 것을 안다. 그런 다음, 믿는 이들은 천연적인 관념에 따라 성경을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도록 가르치는 윤리책으로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죽거나 주님께서 다시 오신 후에는 그들이 주님과 함께 영원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물론 성경은 이러한 것들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들은 피상적이다. 이것들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이 아니다. 신성한 계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심으로써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려는 목적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구속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이 계시에 대한 이상을 더욱더 온전히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온전한 이상을 얻는다면, 이것이 경배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조정할 것이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을 먹고 마실 때, 삼일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일해 넣으신다. 우리의 음식과 음료이신 삼일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유기적으로 우리와 하나 되신다. 우리가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 안으로 받아들인 음식이 소화되고 동화될 때, 이렇게 소화되고 동화된 음식은 우리의 조성 성분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먹고 마신 것의 조성체이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과 물질적인 영역 모두에서 사실이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통하여 신부는 그 영과 하나 된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따르면, 그 영과 신부는 하나가 되어 목마른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마시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부르신다.

하나님의 의도가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시는 것임을 본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먹고 마실 것이다. 식사 예법에만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자주 먹고 마시는 것을 방해한다. 나는 독일에서 공식 국빈 초청 만찬에 참석했던 어떤 중국 대사에 관해 들었다. 그 중국 대사는 합당한 에티켓과 식사 예법에 너무 주의를 기울였던 까닭에 음식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식탁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식기를 사용하는지를 관찰하는 데 시간을 다 보냈다. 아이들은 이와 다르다. 나의 어린 손녀가 우리를 방문할 때, 나의 아내는 종종 손녀에게 먹을 것을 준다. 나의 손녀는 자연스럽게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음식을 누린다. 그 아이가 먹는 방식은 우리가 어떻게 형식에 덜 주의를 기울이고 먹고 마시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하나님께 드린 참된 경배는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이 드린 것이 아니라 생수를 마시고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이 드린 것이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헛되이 경배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을 그녀의 존재 안으로 들이마심으로써 실재 안에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생수이신 그 영께서 사마리아 여인 안으로 주입되셨다. 하나님은 참된 경배를 찾고 계시며, 생수이신 그 영을 마신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참된 경배를 얻으셨다.

3일

출 17:6 이제 내가 … 반석 위에서 네 앞에 서겠다. 너는 그 반석을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물이 나와 백성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

고후 1:9 결국은 죽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반석에서 나온 물(출 17:6)은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이다. 부활은 어떤 것이 죽음을 당하고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한다. 부활은 또한 죽음을 통과한 어떤 것에서 솟아 나오는 생명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17장의 생수는 반석에서 나왔다. 성경에서 이 반석은 하나님의 구속과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 반석은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과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맞은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은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 후에 솟아 나왔다. 그리스도에 관한 이 주요 단계들이 성취된 후에야 이 물이 흘러나왔다. 성경은 우리에게 반석이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말해 준다(고전 10:4).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반석이 되실 수 있었는가? 이것은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을 포함한다. 반석이 되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육체가 되셨고 일정 기간 동안 사람들 가운데서 사셔야 했다. 결국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에 맞으셨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17장 6절은 심오한 절이다. 이 절은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포함한다.

삼일 하나님은 흐르시는 가운데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거치셨고, 그런 다음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이제 부활 안에서 그분은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생명수이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누리는 생명수는 부활 안에 있다.

생명수에는 많은 성분과 많은 요소가 있다. 우리는 이 생명수를 합당한 방식으로 마실 때마다 그 물 안에 있는 모든 요소와 물질을 공급받는다. 이 요소들은 우리 안에서 내적으로 작용한다. 체험에서 우리는 모든 성분을 포함하여 흐르는 이 물의 내적인 작용을 누린다. 우리 안에서 흐르는 물은 육체 되심이라는 요소가 없는 물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포함하는 물이고,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이다. 이 물이 바로 부활이고 또한 생명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이 물을 이기거나 정복할 수 없다.

부활은 바로 삼일 하나님, 곧 근원이신 아버지와 과정이신 아들 그리스도와 흐름이신 그 영이다. 오늘 우리는 부활 안에서 생명수를 마시고 있다. 이 물은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거쳤다. 이 물이 부활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물을 마실수록 더욱더 우리의 천연적인 상태에서 나오고, 더욱더 역경과 어려움에 당당히 승리한다. 이 생명수는 세상과 온갖 부정적인 것에서 우리를 구출한다. 생명수가 부활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수에 참여함으로 부활을 누린다.

생명수이신 생명 주시는 영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신다(계 22:1). 한편으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다른 한편으로, 그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 또한 하나님이다. 보좌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물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이 물을 마실 때 능력뿐 아니라 권위도 얻는다. 우리는 우리 안에 흐르는 생명수에 굴복한다.

그 영은 맞으신 그리스도, 갈라진 반석으로 예표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흐른다(출 17:6, 고전 10:4). 이 흐름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포함한다. 이 물을 마실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체험하고 누린다.

생명수이신 그 영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빌 3:10)과, 그리스도의 승천과, 그리고 영광스럽게 되심과 지배 권위와 머리의 권위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보좌에 앉으심을 지니시고 부활 안에서 흐르신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생명수를 마심으로써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체험이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보좌에 앉으심을 맛보았다고 증언할 수 있다.

2일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십시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고후 3:6 …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그 영은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후 3:17 더구나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

갈 3:2 … 여러분이 그 영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믿음을 들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인 ‘프뉴마(pneuma)’에는 ‘숨’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거룩한 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복음은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어린양과 포도나무에 대하여 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20장 22절에서 말씀과 하나님과 어린양과 포도나무이신 그분께서 또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숨이신 것을 본다. 한편으로 그분은 숨을 내쉬셨고 다른 한편으로 제자들은 숨을 들이쉬었다.

우리는 숨을 분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숨을 우리 안으로 들이쉼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심프슨(A. B. Simpson)은 그리스도를 들이쉬는 체험에 대해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찬송들 가운데 한 곡의 시작 부분은 이렇게 말한다. “주여 내게 성령 부어 마시게 가르치며”(찬송가 210장).

하나님이신 말씀은 육체가 되셨다. 결국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힘과 부활을 거치심으로써 우리가 들이쉴 수 있는 거룩한 숨이 되셨다.

이 신성한 과정의 단계들을 본다면, 우리는 요한복음을 합당하고도 철저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에 따르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말씀은 육체가 되셨다. 29절에서 우리는 육체가 되신 이 말씀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보았다. 한편으로 그분은 구속을 성취하는 어린양이시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생명을 분배하는 나무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어린양-나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에 따르면, 포도나무의 가지들은 포도나무의 생활이다. 궁극적으로, 어린양-나무는 거룩한 숨이 되신다. 우리의 체험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말씀과 어린양과 나무와 숨이 되신다. 말씀은 표현을 위해 있고, 어린양은 구속을 위해 있으며, 나무는 생명을 분배하기 위해 있고, 숨은 우리의 생활을 위해 있다.

우리는 숨 쉬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의심할 바 없이 숨 쉬는 것을 멈추면 죽는다. 그러나 계속해서 숨 쉬면 산다. 우리가 여러 학교를 졸업했다 하더라도 결코 숨 쉬는 것은 졸업할 수 없다. 자신이 아는 것이 많고 성숙했기 때문에 숨 쉬는 것이 자신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숨 쉬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 우리의 생활을 위해 거룩한 숨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바울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명령한다(살전 5:17).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하루에 여러 번 식사하고 여러 번 마신다고 해도, 누구도 끊임없이 먹고 마시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끊임없이 숨 쉬고 있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숨 쉬는 것과 같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영적인 호흡이 될 수 있는가? 이렇게 되게 하는 길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실행해야 한다. 사는 것은 숨 쉬는 것이다. 영적으로 말해서, 숨 쉬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 영을 호흡한다.

우리의 물질적인 몸이 살기 위해서 반드시 호흡해야 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기 위해서 영적으로 반드시 호흡해야 한다. 온종일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불러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든지 주 예수님을 불러야 한다. 나는 심지어 내가 주님을 위하여 말할 때조차도 주님을 부른다는 것과 깊은 속에서 그분을 호흡한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신언노트, 2023 01 08

그 영을 호흡하고
생명수를 마시며
하나님의 떡을 먹음으로써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분배를 체험함
그 영을 호흡함,
생명의 물을 마심,
하나님의 떡을 먹음에 의해
그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하심을 체험함

부활 안에 계신 아들은
그 영을
믿는 이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성령께서는 사실상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신데,
그것은
이 영께서
그분의 숨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아들의 숨이시다.
이 절의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프뉴마(pneuma)’로서
숨, 영, 바람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 절은
“거룩한 숨을
받으십시오.”
라고 번역될 수 있다.
부활하시던 날
주 예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거룩한 숨으로
그분의 제자들 안으로 내쉬셨다.
내적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본질적인 영께서는
우리가
숨 쉬기 위한
우리의 숨이시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그 영께서는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예정되고,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 26절,
15장 26절,
16장 7절과 8절, 13절에서
약속된 그 영이시다.
따라서 주님께서
제자들 안으로
성령을 불어 넣으신 것은
보혜사 성령에 대한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이루어진 것과는 다르다.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이루어진 것은
누가복음 24장 49절에 있는
아버지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도행전 2장의
강하고 세찬 바람 같은
그 영께서는
제자들의 일을 위하여
그들 위에
능력으로 임하셨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숨인 그 영께서는
제자들의 생활을 위해
생명으로
그들에게
불어 넣어지셨다(호흡되셨다).
그 영을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심으로써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생명과
또 각각의 모든 것들로
그들 안으로
나누어 주셨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고
땅에서 자라나
새롭고 생생한
또 다른 형태로
변형되듯이,
주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육체로부터
그 영 안으로
변형되셨다(변모하셨다).
육체 안에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분께서는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치셔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체현이시듯이,
그 영께서는
그분의
실재화이시며
실재이시다.
주님께서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어지신 것은 바로
그 영으로서이시다.
주님께서
믿는 이들 안으로
받아들여지시고
그들에게서
생수의 강들로
흘러나오시는 것도 바로
그 영으로서이시다.
주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거치시어
제자들에게 돌아오셔서,
그들의 보혜사로서
그들 안에 들어가셔서
거하시기 시작하신 것도
그 영으로서이시다.
주님께서
제자들 안에
사실 수 있으시고,
제자들이
그분에 의해,
또 그분과 함께
살 수 있게 하시는 것도
그 영으로서이시다.
주님께서
제자들 안에
거하실 수 있으시고,
제자들이
그분 안에
거할 수 있게 하시는 것도
그 영으로서이다.
주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셔서
그와 함께
한 거처를 만드시는 것도
그 영으로서이시다.
주님께서
그분의 온 존재와
그분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온전히
실재가 되게 하시는 것도
그 영으로서이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과정을 거치셨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영으로서
우리 안에 사실 때에만
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요구되는
그러한 거룩함은
우리가
산출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그 영만이
한 그리스도인이 되실 수 있고,
오직 그 영만이
한 이기는 이가 되실 수 있다.
기억하라.
그 영께서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
주님, 구속자,
구주, 목자,
생명, 생명 공급이시다.

그 영께서
우리에게
각각의 모든 것들이 되셔서
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신다.
그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적으로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영이신,
과정을 거치셨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다.
이 영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소유한다.
우리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셨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시고,
이러한 삼일 하나님께서는
완결되셨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 영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각각의 모든 것이시다.
우리에게
어떤 필요가 있거나
능력이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분께
그것을 상기시켜 드릴 수 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을 때,
그것에 대해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인 그분께서
그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개입하실 것이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인
‘프뉴마(pneuma)’에는
‘숨’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거룩한 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복음은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어린양과 포도나무에 대하여 말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20장 22절에서
말씀과 하나님과
어린양과 포도나무이신
그분께서 또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숨이신 것을 본다.
한편으로 그분께서는
숨을 내쉬셨고
다른 한편으로 제자들은
숨을 들이쉬었다.

우리는
숨을 분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숨을
우리 안으로 들이쉼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심프슨(A. B. Simpson)은
그리스도를 들이쉬는 체험에 대해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찬송들 가운데
한 곡의 시작 부분은
이렇게 말한다.
“주여
내게 성령 부어
마시게 가르치며”
(찬송가 210장).

하나님이신 말씀은
육체가 되셨다.
결국 그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힘과
부활을 거치심으로써
우리가 들이쉴 수 있는
거룩한 숨이 되셨다.

이 신성한 과정의
단계들을 본다면,
우리는
요한복음을
합당하고도 철저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에 따르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체가 되셨다.
29절에서 우리는
육체가 되신
이 말씀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보았다.
한편으로 그분께서는
구속을 성취하는 어린양이시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께서는
생명을 분배하는 나무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어린양-나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에 따르면,
포도나무의 가지들은
포도나무의 생활이다.
궁극적으로,
어린양-나무는
거룩한 숨이 되신다.
우리의 체험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과 어린양과
나무와 숨이 되신다.
말씀은
표현을 위해 있고,
어린양은
구속을 위해 있으며,
나무는
생명을 분배하기 위해 있고,
숨은
우리의 생활을 위해 있다.

우리는
숨 쉬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의심할 바 없이
숨 쉬는 것을 멈추면
죽는다.
그러나 계속해서 숨 쉬면
산다.
우리가
여러 학교를 졸업했다 하더라도 결코
숨 쉬는 것은 졸업할 수 없다.
자신이
아는 것이 많고
성숙했기 때문에
숨 쉬는 것이
자신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숨 쉬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
우리의 생활을 위해
거룩한 숨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가!

바울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명령한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하루에
여러 번 식사하고
여러 번 마신다고 해도,
누구도
끊임없이 먹고 마시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끊임없이 숨 쉬고 있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숨 쉬는 것과 같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영적인 호흡이 될 수 있는가?
이렇게 되게 하는 길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실행해야 한다.
사는 것은
숨 쉬는 것이다.
영적으로 말해서,
숨 쉬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 영을 호흡한다.

우리의 물질적인 몸이
살기 위해서 반드시
호흡해야 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기 위해서
영적으로 반드시
호흡해야 한다.
온종일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불러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든지
주 예수님을 불러야 한다.
나는 심지어 내가
주님을 위하여 말할 때조차도
주님을 부른다는 것과
깊은 속에서
그분을 호흡한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부활 안에 계신 아들은
완결되신 영을
거룩한 숨으로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육체 되심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고
또한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음을
계시한다.
이처럼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자신을
완결되신 영으로서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어지신 것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사실 수 있고
제자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거하실 수 있고
그들이
그분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시고,
이 영께서는
우리의 숨이시다.

하나님이신 말씀은
육체 되심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고,
부활 안에서 그분께서는
우리가 들이쉴 수 있는
거룩한 숨이 되셨다.

숨이신 완결되신 영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신다.
오직 숨만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오직 숨 곧 그 영만이
이기는 이가 되실 수 있다.

반석에서 나온 물은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이다.
부활은
어떤 것이
죽음을 당하고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한다.
부활은 또한
죽음을 통과한
어떤 것에서 솟아 나오는
생명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17장의 생수는
반석에서 나왔다.
성경에서 이 반석은
하나님의 구속과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 반석은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과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맞은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은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 후에
솟아 나왔다.
그리스도에 관한
이 주요 단계들이
성취된 후에야
이 물이 흘러나왔다.
성경은
우리에게
반석이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말해 준다.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반석이 되실 수 있었는가?
이것은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을
포함한다.
반석이 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셨고
일정 기간 동안
사람들 가운데서 사셔야 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에 맞으셨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17장 6절은
심오한 절이다.
이 절은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포함한다.

삼일 하나님께서
흐르시는 가운데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거치셨고,
그런 다음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이제 부활 안에서
그분께서는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생명수이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누리는 생명수는
부활 안에 있다.

생명수에는
많은 성분과
많은 요소가 있다.
우리는
이 생명수를
합당한 방식으로 마실 때마다
그 물 안에 있는
모든 요소와 물질을
공급받는다.
이 요소들은
우리 안에서
내적으로 작용한다.
체험에서 우리는
모든 성분을 포함하여 흐르는
이 물의 내적인 작용을 누린다.
우리 안에서 흐르는 물은
육체 되심이라는 요소가
없는 물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포함하는 물이고,
부활 안에 있는
생명수이다.
이 물이 바로
부활이고
또한 생명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이 물을
이기거나
정복할 수 없다.

부활은 바로
삼일 하나님,
곧 근원이신 아버지와
과정이신 아들 그리스도와
흐름이신 그 영이다.
오늘 우리는
부활 안에서
생명수를 마시고 있다.
이 물은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거쳤다.
이 물이
부활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물을 마실수록 더욱더
우리의 천연적인 상태에서 나오고,
더욱더 역경과 어려움에
당당히 승리한다.
이 생명수는
세상과
온갖 부정적인 것에서
우리를 구출한다.
생명수가 부활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수에 참여함으로
부활을 누린다.

생명수이신
생명 주시는 영께서는
왕좌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신다.
한편으로,
왕좌에 앉아 계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다른 한편으로,
그 왕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 또한
하나님이다.
왕좌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물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이 물을 마실 때
능력뿐 아니라
권위도 얻는다.
우리는
우리 안에 흐르는
생명수에 굴복한다.

그 영께서
맞으신 그리스도,
갈라진 반석으로 예표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흐른다.
이 흐름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포함한다.
이 물을 마실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간 생활과 죽음을
체험하고
누린다.

생명수이신 그 영께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과,
그리스도의 승천과,
그리고 영광스럽게 되심과
지배 권위와 머리의 권위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왕좌에 앉으심을 지니시고
부활 안에서 흐르신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생명수를 마심으로써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체험이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왕좌에 앉으심을
맛보았다고 증언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영적인 반석으로서
믿는 이들을 따르시면서
그들에게
영적인 물을 주신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있는
‘영적인 물’은
갈라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를 가리키며,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시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포함한
물이 되시는
그 영을 예표한다.
살아 있는 영적인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로 맞으셨다.
이것은
부활 안에서
그분에게서
생명수가 흘러나와,
그분의 구속된 백성 안으로 들어가
그들이 마실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맞은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명수는
그 영을 상징한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영적인 물을 마셔야 하며,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마셔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의도가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시는 것임을
본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믿는 이들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이라는 것과,
우리가
타락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 때문에
그분의 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셨고
구속을 성취하셨다는 것만
알 뿐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그런 후에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이게 하신다는 것을
안다.
그런 다음, 믿는 이들은
천연적인 관념에 따라
성경을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도록 가르치는
윤리책으로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죽거나
주님께서 다시 오신 후에는
그들이
주님과 함께
영원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물론 성경은
이러한 것들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들은
피상적이다.
이것들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이 아니다.
신성한 계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심으로써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려는 목적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구속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이 계시에 대한 이상을
더욱더 온전히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온전한 이상을 얻는다면,
이것이
경배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조정할 것이다.

우리가
삼일 하나님을
먹고 마실 때,
삼일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 존재 안으로
일해 넣으신다.
우리의 음식과 음료이신
삼일 하나님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유기적으로
우리와 하나 되신다.
우리가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 안으로 받아들인
음식이 소화되고 동화될 때,
이렇게 소화되고 동화된 음식은
우리의 조성 성분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먹고 마신 것의
조성체이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과
물질적인 영역 모두에서
사실이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통하여
신부는
그 영과 하나 된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따르면,
그 영과 신부는
하나가 되어
목마른 사람들에게
생명수를 마시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부르신다.

하나님의 의도가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시는 것임을
본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먹고 마실 것이다.
식사 예법에만 주의를 집중하는 것은
자주 먹고 마시는 것을
방해한다.
나는
독일에서
공식 국빈 초청 만찬에 참석했던
어떤 중국 대사에 관해 들었다.
그 중국 대사는
합당한 에티켓과 식사 예법에
너무 주의를 기울였던 까닭에
음식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식탁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식기를 사용하는지를
관찰하는 데
시간을 다 보냈다.
아이들은 이와 다르다.
나의 어린 손녀가
우리를 방문할 때,
나의 아내는 종종
손녀에게 먹을 것을 준다.
나의 손녀는
자연스럽게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음식을 누린다.
그 아이가 먹는 방식은
우리가 어떻게
형식에
덜 주의를 기울이고
먹고 마시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하나님께 드린
참된 경배는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이
드린 것이 아니라
생수를 마시고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이
드린 것이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헛되이 경배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을
그녀의 존재 안으로
들이마심으로써
실재 안에서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생수이신 그 영께서
사마리아 여인 안으로
주입되셨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경배를 찾고 계시며,
생수이신 그 영을 마신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참된 경배를 얻으셨다.

우리가
신성한 삼일의
신성한 분배하심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우리 모두는
똑같은 영적인 물,
곧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마셔야 한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영적인 물은
갈라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를 가리킨다.
이 반석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이 물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리의 물이신
그 영을 예표한다.

그 영적인 물,
곧 그 살아 있는 물은
부활 안에 있는
생명의 물이다.
부활 안에 있는
생명의 물을 마실 때
우리는
부활 안에 있고
부활에 속한
사람들이 된다.

우리가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리스도를 마심에 의해,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신다.
왜냐하면
마심으로써
우리가
주님을
안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분께서
유기적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셔서
우리의 생명과 또 구성 요소가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집을 지으실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존재 전체 안으로
그분 자신을
일해 넣으시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적시시고,
우리의 감정에 침투하시며,
우리의 의지를 차지하셔서
우리의 전 존재를
소유하기 원하신다.
우리가
먹을 때,
우리의 몸 안으로 받아들인
음식은
소화되고 동화되어
우리 몸의
구성 요소가(조성 성분이)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점차 자라고
신진대사적으로 변형되어
결국에는 충분히 성장한 사람에
이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신성한 생명 안에서 자라고
신진대사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형된다.
그러한 변형을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새사람을 입고
교회생활 안으로
완전히 이끌리게 된다.
이러한 교회생활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인 몸의
실지적인 생활이다.
여기에는
교리나 인간 조직이 없다.
오직 생명 안에서의 성장을 위하시는
그리스도만 계신다.

요한복음 6장 27절에서
주님께서는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십시오.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여러분에게 줄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다.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여러분은
영원한 양식,
곧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없어지지 않는
양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영원한 음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분은 단지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음식이 되시기 위해
하늘에서 오셨다.

우리는
우리에게
매일의 음식이 되시는
주 예수님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요한복음 6장은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님에 관한 것들을
자세히 보여 주는
유일한 장이다.
주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니”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생명의 떡이신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시고,
하나님의 떡이시며,
살아 있는 떡이시고,
참떡이시다.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신 그분은
하늘의 떡이시다.
하나님의 떡이신 그분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에게서 보내지셨으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생명의 떡이신 그분은
영원한 생명
곧 ‘조에(zoe)’를 가진 떡이시다.
‘생명의 떡’은
그 떡의 본성,
즉 생명을 가리키고,
‘살아 있는 떡’은
그 떡의 상태,
즉 살아 있음을 가리킨다.
참떡이신 그리스도는
진리 또는 실재의 떡이시다.
그리스도는
참되시며 실재이시다.
우리가
날마다 먹는
물질적인 음식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먹는
음식의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생명의 떡이시다.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여러분은
생명에 관한
많은 메시지를 듣지만 여전히
여러분에게
매일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생명의 방식으로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들을 전해 온
이유이다.
이 메시지들에서의 부담은
성경이 단지
가르침을 위한 것이 아닌
생명과 생명 공급을 위한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계명들과 규례들에 관한
가르침들을 찾기 위해
성경을 대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생명과 생명 공급을 위한 것이므로,
우리는
음식을 얻기 위해
성경을 대해야 한다
(그것을 향해 와야 한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누리는
음식은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님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살아 있는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도록
하나님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그리스도로 조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사람을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가지신 의도는,
우리의 음식을 바꾸고
하늘에 속한 음식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먹이심으로써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일해 넣으시어
우리의 조성을
바꾸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은
우리의 떡이신
그리스도,
곧 하늘에 속한 떡,
생명의 떡,
살아 있는 떡,
참떡,
하나님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밝혀 준다.

주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떡이자
생명의 떡이자
살아 있는 떡이신
그분을
먹고 소화하고 동화하기
원하신다.

생명의 떡은
음식의 형태로 된
생명 공급이다.

‘생명의 떡’은
그 떡의 본성,
즉 생명을 가리키고,
‘살아 있는 떡’은
그 떡의 상태,
즉 살아 있음을 가리킨다.

주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사람에게
그분 자신을
교리로 제시하지 않으시고
생명의 떡으로 제시하셨다.
신약에서
교회들이 세워졌을 때
그 교회들은
‘먹는 교회들’이었다.
우리는
사도행전이
먹는 것의
원칙과 실재를
담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먹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받아들인 것을
소화하고 동화하여
우리의 요소와 조성 성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9장
4절과 5절에서
주님께서
믿는 이들을
그분 자신의 지체들로
여기신 사실은,
믿는 이들이
주 예수님을
그들 자신 안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분을
소화하고 동화하여
그들의 존재의
조성 성분이 되게 했음을
계시한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이기는 이들에게
생명나무와
감추어진 만나를 주어서
먹게 하시고,
그분의 풍성이 가득한
잔치에서
그분과 함께
먹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요한계시록 2장 7절의 생명나무는
우리를 다시
창세기 2장으로
향하게 하는데,
창세기 2장은
먹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과
관련된 장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2장 17절의
감추어진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을
가리킨다.
게다가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언급하듯이,
주님의 풍성이 가득한
잔치에서
주님과 함께 먹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은 땅의
풍성한 소산물을
먹은 것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자신을
생명나무, 만나,
좋은 땅의 소산물로
제시하신 순서가
구약에서
이 세 가지 항목을
제시한 순서와
일치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주님은
그분을 먹는
긍정적인 방면만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또한
부정적인 방면에서
생명 공급이신
그분을 누리는 데서
믿는 이들을 빗나가게 하는
가르침들을 폭로하신다.
2장 14절과 15절에서
주님은
버가모에 있는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책망할 것이 있다.
네가 있는 그곳에
발람의 가르침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발람은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의 자손들 앞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놓게 하여
우상 앞에 바친
희생 제물을 먹고
음행을 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너에게 또한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
2장 20절을 보면,
주님은
두아디라에 있는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에게
책망할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한 것이다.
그 여자는
여신언자로 자처하면서
나의 노예들을
가르치고 미혹시켜
음행하게 하고
우상 앞에 바친
희생 제물을 먹게 한다.”
죽이는 문자에 속한
교리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을 손상한다.
우리가
이런 종교적인 가르침들을 붙든다면,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적인 가르침을
주의하는 대신
우리는 반드시
주님을
우리의 영적인 음식으로
먹어야 한다.

주님의 의도는
우리가
그분을 먹는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생활에서
우선적인 것은
교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우리의 음식으로
먹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룩하게 됨은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나 거룩하게 되려면
우리는
거룩하신 분인
주님을 먹어서,
우리의 거룩함이신
그분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주님은
합당한 음식,
하나님께서 정하신 음식을
먹는 문제를
회복하기를 갈망하신다.
이 음식은
생명나무와 만나와
좋은 땅의 소산물로
예표되는데,
이 모두는
우리에게
음식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들이다.
이 계시가
초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상실되었지만,
주님께서 오셔서
이기는 이들을 부르셨다.
곧 그분을 먹는 데로 돌아옴으로써
종교적인 교리를
이길 사람들을 부르셨다.
우리는
처음으로 회복될
필요가 있다.
곧 우리에게
음식으로 공급되시는
주님을 먹는 데로
회복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경륜은
그리스도께서
내적으로
우리 안으로 오시는 문제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에 있는
‘영적 식사’에 관한 기록은
하나님의 의도가
먹는 방식으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는 것임을
계시한다.

먹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것들을
접촉하고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것들은
우리의 조성이 된다.

주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거듭난 새사람 안에
생명의 방식으로
흡수되실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먹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
하나님의 분배를
체험하는 길이다.

우리가
먹고 소화하고 동화한
음식은 사실상
우리가 된다.
이것은
섞임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하나 되기를
갈망하시는데,
이러한 하나는
우리가
음식을
먹고 소화하고 동화할 때
발생하는 일로 예시된다.

우리는
우리가 먹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는다면,
우리는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있는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기는 이들은
그들의 음식 공급이신
주님을
합당하게 먹는 데로
회복되었다.
그들은
생명나무와
감추어진 만나이실 뿐 아니라
풍성으로 가득한
진수성찬이신(잔치이신)
그분을 먹는다.

1일

요 7:39 이것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받을 그 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

요 20:22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 그들 안으로 숨을 불어 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부활 안에 계신 아들은 그 영을 믿는 이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성령은 사실상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신데, 그것은 이 영이 그분의 숨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아들의 숨이시다. 이 절의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프뉴마(pneuma)’로서 숨, 영, 바람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이 절은 “거룩한 숨을 받으십시오.”라고 번역될 수 있다. 부활하시던 날 주 예수님은 그분 자신을 거룩한 숨으로 그분의 제자들 안으로 내쉬셨다. 내적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본질적인 영은 우리가 숨 쉬기 위한 우리의 숨이시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그 영은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예정되고,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 26절, 15장 26절, 16장 7절과 8절, 13절에서 약속된 그 영이시다. 따라서 주님께서 제자들 안으로 성령을 불어 넣으신 것은 보혜사 성령에 대한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이루어진 것과는 다르다.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이루어진 것은 누가복음 24장 49절에 있는 아버지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도행전 2장의 강하고 세찬 바람 같은 그 영은 제자들의 일을 위하여 그들 위에 능력으로 임하셨다(행 1:8).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숨인 그 영은 제자들의 생활을 위해 생명으로 그들에게 불어 넣어지셨다. 그 영을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심으로써 주님은 그분 자신을 생명과 모든 것으로 그들 안에 나누어 주셨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고 땅에서 자라나 새롭고 생생한 또 다른 형태로 변화되듯이, 주님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육체에서 그 영으로 변형되셨다. 육체 안에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분은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치시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 주님께서 아버지의 체현이시듯이, 그 영은 그분의 실재화이시며 실재이시다. 주님께서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어지신 것은 바로 그 영으로서이다. 주님께서 믿는 이들 안으로 받아들여지시고 그들에게서 생수의 강들로 흘러나오시는 것도 바로 그 영으로서이다(요 7:38-39). 주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거치시어 제자들에게 돌아오셔서, 그들의 보혜사로서 그들 안에 들어가시어 거하시기 시작하신 것도 그 영으로서이다(요 14:16-17). 주님께서 제자들 안에 사실 수 있으시고, 제자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과 함께 살 수 있게 하시는 것도 그 영으로서이다(요 14:19). 주님께서 제자들 안에 거하실 수 있으시고, 제자들이 그분 안에 거할 수 있게 하시는 것도 그 영으로서이다(요 14:20, 15:4-5). 주님께서 아버지와 함께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셔서 그와 함께 서로 거처를 정하시는 것도 그 영으로서이다(요 14:23). 주님께서 그분의 온 존재와 그분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온전히 실재가 되게 하시는 것도 그 영으로서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으로서 우리 안에 사실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요구되는 그러한 거룩함은 우리가 산출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그 영만이 그리스도인이 되실 수 있고, 오직 그 영만이 이기는 이가 되실 수 있다. 기억하라. 그 영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 주님, 구속자, 구주, 목자, 생명, 생명 공급이시다.

그 영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신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전적으로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신,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다. 이 영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을 소유한다. 우리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시고, 이러한 삼일 하나님은 완결되시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위한 모든 것이시다. 우리에게 어떤 필요가 있거나 능력이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분께 그것을 상기시켜 드릴 수 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을 때, 그것에 대해 그분께 말씀드릴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인 그분은 그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개입하실 것이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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