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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 부분들 안에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삶

Living
in the Reality
of the Body of Christ
by Living
in the Inward Parts
of Christ Jesus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 내적인 부분들 안에서
생활함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생활함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가지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 엡 1:22-23, 3:17상, 4:16.

그리스도의 몸은
그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으로
그분 자신을 확산하시어
우리 전 존재를
점유하심으로써
건축된다
— 엡 3:16-17상, 4:16.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인 체험이다
— 골 1:27, 2:19, 3:4,
10-11, 15-16, 4:15-16.

오직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인 체험에 의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가질 수 있다
— 골 1:27, 3:4, 10-11, 2:19.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 충만이 바로
삼일 하나님의
단체적인 표현인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이다
— 엡 3:17상, 19하.

몸의 생활의
실재는
측량할 수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
결과이다
— 엡 3:17-18, 4:16.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내용은
우리의 존재 안으로
일해 넣어지신
그리스도이다
— 갈 1:15-16, 2:20, 4:19,
골 3:4, 10-11.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 부분들 안에
살아야 한다
— 빌 1:8, 엡 4:16.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사람의 속 부분들을
가지셨으며,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속 부분들 안에서
체험하신 것들은
그분의
사랑과 갈망과
느낌과 사상과
결정과 동기와
의도를 포함한,
그분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혼과
마음과 영 안에서
체험하신 것들이었다
— 눅 2:49, 요 2:17, 마 26:39,
사 53:12, 42:4, 막 2:8.

바울은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체험한
사람이었다
— 빌 2:5, 고전 2:16하, 롬 8:6.

바울은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
곧 그분의
애정과
부드러운 긍휼과
동정심에 있어서까지
그리스도와 하나였다
— 빌 1:8.

바울은
자신의 속 부분들을
고수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분의 내적 존재 전체를
취했다.

바울의 내적 존재는
바뀌고
재조정되고
개조되었다.

바울의 내적 존재는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로
재조성되었다.

진실성,
즉 정직함과
신실함과
믿을 만함과 같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바울 안에도 있었다
— 고후 11:10.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그의 타고난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
곧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타고난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성도들을 사랑했다
— 고전 16:24.

그리스도를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 부분들 안에
머물러야 한다
— 빌 1:21상, 8.

바울은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을
체험했다.
그는
성도들을
그리워하는 데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과
하나였다
— 빌 1:8.

바울은
자신의
타고난 내적 존재 안에서
살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 안에서
살았다
— 골 3:1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분의 속 부분들,
곧 그분의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 안에
있어야 한다
— 요 15:4상.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분의 속 부분들 안에
거하면서
거기서
은혜이신 그분을
누리는 것이다
— 빌 1:7, 4:23.

빌레몬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 부분들 안에서
몸의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그림을 본다
— 몬 7, 12, 20.

바울은
그리스도의 느낌을
자신의 느낌으로
취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살았다.
몸에 대한
그리스도의 느낌이
몸에 대한
그의 느낌이 되었다
— 빌 1:8.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돌보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 부분들을
자신의
속 부분들로
취했다
— 빌 1:8.

바울처럼
우리도
머리의 느낌을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
취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서
생활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다
— 골 3:12.

우리가
지체들로서
모든 일에서
머리의 느낌을
가진다면,
우리는
몸을 고려하고
몸을 돌볼 것이다
— 고전 12:12-27.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 부분들 안에
더 많이 살수록,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더 많아지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더 강해질 것이다
— 고전 12:26-27, 롬 12:15.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몸에 대한 의식과
몸을 위한 느낌을
가져야 한다.
몸은
우주적이며,
몸에 대한 의식과
몸을 위한 느낌 또한
우주적이다
— 고전 12:26-27, 빌 1:8.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살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의식해야 한다
— 롬 12:4-5, 15.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의식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감각이다
— 골 3:4, 15, 롬 8:2, 6,
10-11, 12:4-5.

우리가
이러한 감각을
훈련한다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몸과 관련된
일들에 대해
의식을 가지게 할 것이다
— 롬 12:15.

우리가
이러한 감각을
발전시킨다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몸 안에 있는
문제들을
감지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감각을
자주 훈련하며
또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돌본다면,
이러한 감각이
몸의 감각
곧 몸의 의식이
될 것이다
— 고후 11:28-29.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받거나
혹은 축복을 받을 때,
우리가
몸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여
동일한 어려움
혹은 동일한 축복을
느낄 것이다
— 고전 12:26-27.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 안에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의식을 발전시킨다
— 빌 1:8, 골 3:10-12, 15,
몬 7, 12, 20.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 부분들 안에
삶으로써
몸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몸을 위한
느낌을 가져야 한다
— 고전 12:26-27.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 부분들 안에
삶으로써,
곧 그분의
느낌과 관점을
우리의
느낌과 관점으로
취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서
교회생활을
실행할 것이다
— 빌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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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 부분들 안에 삶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삶”

6일

몬 7
형제님,
왜냐하면
성도들의 속 부분들이
그대를 통하여
상쾌해짐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대의 사랑에 대하여
큰 기쁨과 격려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몬 12
내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내 심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몸의 느낌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어느 한 지체가
축복을 받을 때마다,
우리가 소재하고 있는
지방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함께
기뻐할 수 있고,
심지어 다른 교회가 받은
축복으로 인하여
더욱 기뻐할 것이다.
우리가 있는
지방의 교회가 아닐지라도
단지 어떤 성도들이
어려움 혹은 축복을 받으면
우리는
그들과 동일시되어
동일한 어려움
혹은 동일한 축복을
느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단계에 이른다면,
몸에 대한
우리 속의 느낌은
풍부할 것이고,
더 이상 지방적이지 않고
지방을 초월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느낌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몸에
전달되는 공급은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주적인 풍성을
그리스도의 몸에
가져다줄 수 있다면,
몸을 위한
우리의 용도는
우주적일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비록 한 지방에서
봉사하지만
그 효과는
지방적이지 않고
우주적일 것이다.
많은 때
우리는
자신 안에
갇혀 있다.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올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지방 안에
머물러 있으며,
주님께서
우리를 넓히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는다.
몸은
우주적이고
우리 안에 있는
생명도
우주적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은
우주적이시고,
우리 안에 있는
느낌도
우주적이며,
공급도
우주적이다.
어떤 지방이
축복을 받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
죄인들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
교회의 행정을 책임지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예민한 느낌을 가지도록
훈련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영적인 일에서
우리의 용도는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많은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면
믿음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상태를
분명히 알 필요가 없다.
사실상 우리가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을 돕는 데
방해가 된다.
동시에
우리는
어리석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오면
우리는
몇 마디의 말을 듣고
즉시
그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설령 그가
어떤 상태를
설명할지라도,
우리의 영은
그의 참된 상황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훈련은
필수적이다.
우리가
형제나 자매를 접촉할 때
밖에서는
그의 말을 듣지만
안에서는
계속해서
그들의 참된 상황을
감지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몸의 의식이 있다면
즉시
몸이 하나임을
볼 것이다.
일단 이것을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일에서
개인주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일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한 가지 문제,
곧 개인주의적인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 하나님의 자녀들이
몸이 하나임을
보게 될 때,
그들은
일이 하나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개인주의적인 일에서
구출되어
몸의 일 안으로
이끌릴 것이다.
이 말은
여러분에게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일을
자신에게 속한 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이 일을
우리가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이 일을 했다면
우리는 만족한다.

몸을 보았을 때,
우리는
모든 일을
내가 하든
다른 사람이 하든
머리와 몸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모든 영광은
주님께 돌아가고
모든 축복은
교회에 돌아간다는 것을
보게 된다.

주님은
그분의 일을
한 몫씩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우리는 언제든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몫에
충성을 다해야 하고,
주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주신
그 몫을
존중해야 한다.

몸을 본
사람은
모든 지체가 다
각각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자신은
많은 지체 중의
한 지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볼 것이다.
몸을 본
사람은
자신을
특별한 지위에
놓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몸을 보게 된다면
그에게는
교만할 가능성도,
질투할 가능성도
없게 된다.
몸은
하나이기 때문에,
일을
다른 사람이 하든
우리가 하든
다 같은 것이며
차이가 없다.
일을
우리가 해도 좋고
다른 사람이 해도 좋다.
결국 영광은
주님께 돌아가고
축복은
교회에게 돌아간다.

 

5일

롬 12:4-5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각 사람이 서로
지체들입니다.

몸의 느낌은
매우 비밀하다.
만일 우리가
이 느낌이
확장되도록
허락한다면,
이 느낌은
우주적인 느낌이
될 수 있다.
엄밀히 말해서,
이 느낌은 본래
우주적이었으나
우리 안에 왔을 때
우리의 제한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주적이고
하나님의 영 또한
우주적이시다.
이 생명과 이 영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적인 느낌을
가져야 한다.
이 느낌은
너무나 크고
매우 멀리까지 미치지만
여러분과 내 안에
들어왔을 때
오히려 제한을 받는다.
우리가
막 구원받았을 때
이 느낌은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의 상태를
알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많이 파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느낌은
우리 안에서
많이 나올 수 없었다.
우리가 배운
공과에 따라
서서히 파쇄가 많아질수록
이 느낌은
더욱 증가할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다른 사람과
교회와
주님의 일을
돌보는 것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더욱 많이 파쇄되고
더욱 깊은 공과를 배우며
우리 자신에게서
더 많이 구출될수록,
우리는
이 느낌이
우주적이라는 것을
더 발견하게 된다.

골로새서 2장 17절에서
바울은
모든 그림자의 실체
곧 실재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19절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지 않고
머리를 붙드는 것에 대해
말한다.
용어가
그리스도에서 머리로
바뀐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누리면
몸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누린다면,
우리는 계속
개인주의적일 수 없을 것이다.
개인주의적인 성도들은
지속적으로
주님을 누리지 않는 이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릴수록
몸을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아침에
주님을 접촉해야 하지만,
저녁에는
교회 집회에
와야 한다.
낮에
주님을 누리고
그분의 몸인
교회의 집회를
소홀히 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설령 우리의 환경이
우리가
모든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내적 존재가
교회 집회 안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한다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몸의 의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서 온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부터
흘러넘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의
표현이다.
몸에 대한 의식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감각이다.
만일 우리가 자주
이 감각을 훈련한다면,
이 감각을 통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감지할 뿐 아니라,
주님 앞에서
다른 사람의 상태를
감지하고,
몸과 관련된
일들에 대해
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항상
이 감각을
훈련하고 발전시키고
연습하고 사용한다면,
이 감각은
몸 안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감지하게 할 것이다.

새로 구원받은 사람에게
이 감각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상태와 상황을
감지하게 할 것이다.
만일 그가
이 감각에 주의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내적인 감각에
순종함으로써
이 감각을 계발한다면,
이 감각은
발전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감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형제자매들의
영적인 상태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감각은
점차적으로 발전하고 증가하여,
그로 하여금
집회와
교회 안의 봉사와
주님의 일의 상태도
감지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것은
이 감각이
자신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더 확대되어
다른 이들과
교회와
교회 집회들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서 확대된
이 감각에 의해
우리는
이 모든 문제들을
합당하게 만질 수 있다.
이 감각이 바로
몸의 감각이다.

만일 우리가 자주
이 감각을
사용하고
훈련하며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관심한다면,
이 감각은
몸의 감각이
될 것이다.
우리의 동료 지체들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또한 그들이
연약하거나
기쁘거나
주님 안에서 승리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감지할 것이고,
그들과 동일한 느낌을
공유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짐을
감지하게 되어
그들의 짐이
우리의 짐이 되고,
그들의 체험을
감지하게 되어
그들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되며,
그들의 어려움을
감지하게 되어
그들의 어려움이
우리의 어려움이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한 몸 안에
있게 될 것이다.

 

4일

고전 12:26-27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여러분 각 사람은
그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몸에 대한
느낌을
가져야 한다.
먼저 우리는
머리의 느낌을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
취해야 한다.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심장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을
자신의 속 부분들로
취하여
교회를 돌본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느낌을
자신의 느낌으로
취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관심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느낌이
몸에 대한
그의 느낌이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바울처럼
머리의 느낌을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
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몸의 생활을
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머리의 느낌을
우리의 느낌으로
취해야 할 뿐 아니라,
그렇게 몸을 돌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몸의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우리의 동료 지체들을
돌아보며
몸에 대한 느낌으로
충만해야 한다.

만일 지체들로서
우리가
모든 일에서
머리의 느낌을 가지고
몸을 돌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뜻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몸을
척도로
삼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 자신을
몸과 동일시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몸과
아무런 간격이 없고
더욱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생활은 완전히
몸의 생활이 될 것이며,
주님은
그분의 몸의
표현을
가지게 되실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더 많은 교통을
가짐으로써
몸에 대한 의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와 주님 사이에
교통이 많다면
우리 안의 느낌은
자연스럽게 발전할 것이다.
이럴 뿐 아니라
교통에
순종을 더할 수 있다면
우리 안의 느낌은 더욱
예민하고
풍부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느낌이 온다면
우리는
그 느낌을
긴밀하게 따라야 한다.
내적 느낌이
우리가
멈추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멈추어야 한다.
만일 내적 느낌이
우리가
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가야 한다.
이럴 때
우리의 내적 느낌은
예민하고
풍부해질 것이다.
우리 안의 느낌은
우리가
주님과 교통하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통해
발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감각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영적인 일들을
만질 때마다
언제나 이 감각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몸의 의식을
훈련할 때
좋은 상황이
생겨날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지체는
홀로
그의 짐을
지지 않게 될 것이고,
그의 동료 지체들이
그와 함께
짐을
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단순히 누군가가
우리에게 요청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몸 안에 있는
부담 때문에
기도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한 사람의 기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참으로
몸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몸의 기도는
자발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
몸의 의식이 있다면,
그는
어떤 형제에게
어려움이 있고
어떤 자매에게
무거운 짐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려움이 있는
형제의 느낌이
그에게
전해지고,
압력을 받고 있는
자매의 느낌도
그의 영 안으로
더해진다.
그는
그 형제와 자매가 가지고 있는
느낌을 똑같이 공유한다.
이 느낌은
그가
그 형제나 그 자매를 위해
기도하도록
압박하여
주님 앞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중보 기도는 바로
몸의 느낌에서
나온 것이다.
몸 안에서의
이러한 중보 기도는
우리가
내적으로 약한지
아니면 강한지를
입증해 주며,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의 지체들에 대해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관심하고 있는지를
입증해 줄 것이다.

몸의 어떤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들이
불편함을 느낀다.
우리 모든 사람이
함께 봉사할 때에도 마땅히
그와 같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느껴야 하고,
한 사람이
기뻐하면
모든 사람도 함께
기뻐해야 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이다.

 

3일

빌 2:5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

고전 16: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나의 사랑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마음과 함께
그 모든 기능들을 포함한
그분의 존재의
모든 내적인 부분들을
의미한다.

우리의 내적 존재에서
주도적인 부분은
생각이다.
…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생각이
오늘날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빌 2:5).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으로
취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천연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2장
16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유기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그분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모든 기능들을
우리도 가지고 있다.
그 생각은
그 지적인 기능(faculty; 능력),
곧 그 이해하는 기관이다(organ).
우리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한 기관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분께서 아시는 것을
우리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생명을
가질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그 생각도
가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의 생각을
흠뻑 적시셔야만 하고,
우리의 생각을
그분의 것과
하나로 만드셔야만 한다.

로마서 8장 6절에서
바울은
생각을
영에 두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생각에 관한
그의 말만큼
어조가 강하지 않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둘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져야만 한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심장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빌 1:8).
‘심장’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직역하면
내장을 의미하며,
내면적인 애정,
곧 부드러운 긍휼과
동정을
가리킨다.
바울은
성도들을
간절히 그리워할 때,
심지어 심장에서,
곧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속 부분들에서
그분과 하나였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속 부분들을
고수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음을
가리킨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분의 내적 존재 전체를
취했다.
그러므로 바울의 내적 존재는
바뀌고
재조정되고
개조되고
재조성되었다.
그의 내적 존재는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로
재조성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타고난 내적 존재 안에서
살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 안에서
살았다.

“그리스도의 진실성이
내 속에 있으니”
(고후 11:10).
여기서의 ‘진실성’은
정직함과
신실함과
믿을 만함을
의미한다.
진실성,
즉 정직함과
신실함과
믿을 만함과 같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사도 바울 안에도 있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나의 사랑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고전 16:24)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은
자신에게 속한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
곧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타고난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성도들을 사랑했다.

이 절들을 함께 둔다면,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을
계속적으로 체험했던
사람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체험에 따라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다.

바울은
성도들을
간절히 그리워할 때,
심지어 심장
곧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내적인 부분들에서까지
그분과 하나였다.

빌립보서 1장
7절과 8절은
연결된 절들로서
분리할 수 없다.
8절의 시작이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 것을
주의하라.
이것은
은혜가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과
관련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 안에서
사랑했기 때문에
은혜에 참여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만
누림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분의 속 부분들 안에
거하는 것이며,
거기서
그분을
은혜로 누리는 것이다.

그 외에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사는 것에 대해
말한다.
체험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를 확대하고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 부분들 안에
거하는 것을
요구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이 되려면 반드시
그분의 속 부분들 안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부드러운 마음과
섬세한 느낌들 안에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안에 거한다면,
그리스도를
은혜로 누릴 것이고
그분을
매우 실지적으로
체험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은혜로
체험하고 누릴 때,
우리는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관심함으로 인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중에도
강건할 수 있을 것이다.

 

2일

빌 1:8
왜냐하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심장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엡 4:16
온몸은
그분에게서 나온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입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새집으로 이사할 때는 언제든지
그 집에 정착하는 데
얼마간의 시간이 든다.
그가
정착하는 것이
그 집에
그의 거처를
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신다고
말한 것의
의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의
각 부분에
정착하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에베소의 믿는 이들이
그들 안에
그리스도를 소유하였으나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의 각 부분에
거처를 정하시거나
정착하시도록
허락해 드리지 않았음을
인식하였다.
이것이
바울이
그러한 기도를 했던
이유이다.
우리의
감정과 생각과 의지
그리고 양심은 반드시
그리스도에 의하여
만져져야만 하고
또 얻어져야만 한다.
내주하시고
점유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내적인 존재의
그 모든 내적인 방들 안에
그분 자신을
완전히
정착시키실 때까지
우리의
감정과 생각과
의지와 양심을
인수하실
(to take over; 인계받으실)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 신성한 삼일에 의해
한 동역의 방식으로
수행된다.
그 셋께서는(The three)
한 아름다운 방식으로
함께 동역하셔서
그 결과
그리스도,
곧 그 삼일 하나님의
그 체현께서,
우리의 내적인 존재 안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실 수 있다.

[물로 가득 찬
한 컵에서부터의]
[그] 넘쳐흐름이
그 충만이며,
그 충만은
그 컵 안에
담겨 있는 것의
바로 그 표현이다.
우리가
그러한 한 깊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할 때,
그 삼일 하나님의 충만의
결과가 생길 것이다.
이 충만이
그 삼일 하나님의
바로 그 표현으로서의,
그 교회,
곧 그리스도의 그 몸이다.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심장(inward parts,
영어를 직역하면
‘내적인 부분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음—역자 주)’은
“내장들”을 의미한다;]
이는
내적인 애정,
그러고 나서,
부드러운
긍휼과 또 동정을(sympathy; 연민을)
의미한다.
그 성도들을
몹시 그리워함 안에서
(In longing after; 간절히 바람으로),
그 사도는
심지어
그리스도의
그 내장들,
곧 그 부드러운 내적인 부분들 안에서까지
그리스도와 하나였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누렸다는 것이
그가
그리스도의 내적인 부분들과
하나였고,
그 안에서(in which)
그가
은혜의 그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것드르이 다양한 기능들을 가진
사람의 그 내적인 부분들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스도의
그분의 속 부분들 안에서의
체험은
그분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혼과
마음과 영 안에서의
그분의 체험이었고,
그분의
사랑과 갈망과
느낌과 사상과
결정과 동기와
의도를
포함한다.

(성경의) 많은 절들이
그리스도의
내적인 부분들 안에서의
그분의 체험을
계시한다.
누가복음 2장 49절에 따르면,
주님께서
열두 살이셨을 때
그분께서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그 일들(things) 안에
있어야만 하는 줄을
여러분이
알지 못하셨습니까?”
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또한
“나는
내 아버지의 일을(business)
생각해야 합니다.”
라고 번역될 수 있다.
… 그분의 생각은
아버지의 일로
점유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생각의
그 기능을 가지고,
또 우리는
그분께서 얼마나 많이
내적으로
아버지를 위하셨는지를
안다.

요한복음 2장 17절은
주님의 열정에 대해
말한다.
… 열정은
감정의 문제이다.
주 예수님 안에 있던
열정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불붙었고
불타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감정이
사용된 것을
본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서
주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기도하셨다.
이것은
체포되어
도수장으로
끌려가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주님의 기도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취하셨는데,
이것은
그분 자신의 뜻이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의 의지의
기능의 문제이다.

이사야서 53장 12절은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에 관해
이렇게 예언했다.
“그가
자기 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주 예수님은
자신의 혼을
버리셨으며
자원하여
그분의 혼을
죽음에 이르게 하셨다.
이것은 물론
그분의 혼의
기능이다.

이사야서 42장 4절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의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분은 결코
쇠하지 않으셨다.
즉 그분의 마음은 결코
낙담하지 않으셨다.

마가복음 2장 8절은
“예수님께서
… 영 안에서
다 아시고”
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은
그분의 영을
사용하셨으며
그분의 영 안에서
어떤 일들을
아셨다.
어떤 상황에 처하시든지
주님은
그분의 영을
사용하심으로
그 상황을 아셨다.
그분은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을
번제물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그분의 영을
사용하셨다.

 

신언노트, 2019 01 13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 내적인 부분들 안에서
생활함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생활함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를
 가지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들 안에
 그분의 집을
 만드시도록
 (to make; 지으시도록)
 허락해 드려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은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시고
 또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의
 생각, 감정, 또 의지 안으로
 그분 자신을
 확산하셔서
 (spreading;
 퍼뜨리셔서, 바르셔서, 칠하셔서, 펼치셔서)
 우리의 전체 존재를
 점유하시는
 그 영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건축됩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그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of …; …에 관한)
 그 내적인
 (the inner;
 그 내밀한[은밀한, 보다 친밀한, 숨은])
 체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그 내적인 체험에 의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들 안에
 그분의 집을
 만드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will be filled;
 채워질 것입니다);
이 충만이
 그 삼일 하나님의
 그 단체적인 표현인,
 그 교회,
 곧 그리스도의 그 몸입니다.

그 몸 생활의
 그 실재는
 우리의 마음들 안에
 그분의 집을
 만드시는
 측량할 수 없으신
 그 그리스도의
 그 유출입니다
 (the issue;
 그 결과[밖으로 나오심]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인
 그 교회의
 그 내용은
 우리의 존재 안으로
 일해 넣어지신
 (has been wrought;
 차츰 넣어지신, 서서히 섞이신)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 내적인 부분들 안에
 살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것들의
 다양한 기능들을 가진
 (with; …과 함께 한)
 사람의 그 내적인 부분들을
 가지셨고,
또 그분의
 내적인 부분들 안에서의(in)
 그리스도의 체험들은
그분의
 생각, 감정,
 의지, 혼,
 마음, 또 영 안에서의
 그분의 체험들이었으며,
그분의
 사랑, 갈망,
 느낌, 사상,
 결정, 동기,
 또 의도를
 포함했습니다.

물로 가득 찬
 한 컵에서부터의
 그 넘쳐흐름이
 그 충만이며,
그 충만은
 그 컵 안에
 담겨 있는 것의
 바로 그 표현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한 깊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할 때,
그 삼일 하나님의
 충만의
 결과가 생길 것입니다.
이 충만이
 그 삼일 하나님의
 바로 그 표현으로서의,
 그 교회,
 곧 그리스도의 그 몸입니다.

바울은
 그분의
 (His; 그리스도의)
 내적인 부분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계속하여
 (continually; 끊임없이, 줄곧)
 체험한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심지어
 그분의 내적인 부분들
 —그분의
 애정,
 부드러운(tender; 연한, 애정 어린) 긍휼,
 또 동정(sympathy; 연민) 안에서까지
 그리스도와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그 자신의
 내적인 부분들을
 지키지 않았고
 (did not keep;
 유지하지[남겨 두지, 고수하지] 않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내적인 부분들을
 그의 것으로
 취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생각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의
 내적인 존재 전체를
 취했습니다.

바울의
 내적인 존재는
 변화되었고
 (was changed),
 재배치되었으며
 (was … rearranged;
 재배열[재조정]되었으며, 다시 정리되었으며),
 또 개조되었습니다
 (was … remodeled;
 형[型]이[틀이, 거푸집이] 고쳐졌습니다,
 개작되었습니다).

그의
 내적인 존재는
 그리스도의
 그 내적인 부분들로
 재구성되었습니다
 (was reconstituted;
 재조성[재편성, 복원]되었습니다).

참됨(truthfulness; 진실함, 정직함)
 —정직함(honesty; 솔직함, 성실),
 신실함(faithfulness; 충실함, 성실함),
 또 믿음직함(trustworthiness; 신뢰성, 든든함)
 —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무엇이
 또한 바울 안에도 있었습니다.

성도들을 위한(for; 향한)
 바울의 사랑은
 그의
 타고난 사랑이 아니었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사랑이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타고난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그 사랑에 의해서
 (by …; 그 사랑으로)
 그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 내적인 부분들 안에
 머무르는 것을
 요구합니다
 (requires; 필요로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그 내적인 부분들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그 성도들을
 몹시 그리워함 안에서
 (in; … 그리워함으로)
 그분의
 내적인 부분들 안에 계시는
 (in; …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타고난 내적인 존재 안에서
 (in; … 안에 있는)
 한 생활을
 (a life; 한 생명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그 내적인 부분들 안에서
 한 생활을
 살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내적인 부분들 안에,
 곧 그분의
 부드럽고
 (tender; 애정 어리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또 섬세한
 (delicate; 부드러운, 예민한, 세심한)
 느낌들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그분의
 내적인 부분들 안에
 거주하는 것이고
 (to abide;
 머무르는 것이고, 지속하는 것이고)
 또 거기서
 은혜이신 그분을
 (Him as grace;
 그분을 은혜로)
 누리는 것입니다.

빌레몬서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 내적인 부분들 안에서
 살게 된
 (lived; 생활하게 된)
 그 몸 생활의
 한 그림을
 가집니다.

고린도전서 2장
 16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유기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그분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모든 기능들을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은
 그 지적인 기능(faculty; 능력),
 곧 그 이해하는 기관입니다(organ).
우리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한 기관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분께서 아시는 것을
 우리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생명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생각도
 가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의 생각을
 흠뻑 적시셔야만 하고
 (must … ;
 틀림없이 … 흠뻑 적시시고),
우리의 생각을
 그분의 것과
 하나로 만드셔야만 합니다
 (틀림없이 … 하나로 만드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느낌을
 그 자신의 느낌으로
 취함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살았습니다;
그 몸을 위한(for; 향한, …에 대한)
 그리스도의 느낌이
 그 몸을 위한
 그의 느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그 몸을
 돌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 내적인 부분들을
 그 자신의
 내적인 부분들로
 취했습니다.

바울과 같이,
 우리도
 그 머리의 그 느낌을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
 취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서
 우리의 생활함을 위하여
 가장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지체들로서
 각각의 모든 것들 안에서
 (in everything; 매사에)
 그 머리의 그 느낌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 몸을
 고려할 것이고
 (will consider;
 곰곰이 생각할 것이고, 숙고할[존중할] 것이고)
 또 그 몸을
 돌볼 것입니다
 (will … care for;
 …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좋아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 내적인 부분들 안에
 더 많이 살면 살수록,
그리스도의 그 몸에 관한(of; …의)
 우리의 의식은
 (consciousness;
 알아차림은, 자각은)
 더 커질 것이고
또 그리스도의 그 몸을 위한(for; 향한)
 우리의 느낌은
 (feeling;
 감각은, 감정은)
 더 강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그 몸의(of; …에 관한)
 그 의식과(the consciousness)
 또 그 몸을 위한(for; 향한, …에 대한)
 한 느낌을(a feeling)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몸은
 우주적이고
 (universal;
 전 세계적이고, 보편적이고,
 만인 공통이고, 만능이고),
 또 그 몸의
 그 의식과
 또 그 몸을 위한
 한 느낌도 또한
 우주적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살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몸을
 의식할
 (to be conscious of …;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의식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그 감각입니다(the sense):

만약 우리가
 이 감각을
 훈련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몸에 관련된
 문제들을
 (matters; 일들을, 상황들을)
 의식하게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감각을
 기른다면
 (cultivate;
 경작한다면, 재배한다면,
 구축한다면, 쌓는다면,
 함양한다면, 계발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몸 안에 있는
 문제들을
 감지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enable us to detect;
 발견할[찾아낼]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감각을
 자주 훈련하고
 또 만약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며
 또 그 교회를 돌본다면,
이 감각이
 그 몸의,
 그 감각,
 곧 그 의식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겪거나
 또는 축복을 받을 때,
만약 우리가
 그 몸의
 그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동일시할 것이고
 (will identify;
 일체감을 가질 것이고, 공감[공명]할 것이고)
 또 그 같은
 어려움
 (hardship; 곤란, 고난)
 또는 축복을
 (blessing; 은혜를, 고마운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내적인 부분들 안에
 생활함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의식을 기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 내적인 부분들 안에
 생활함에 의하여
그 몸의
 그 의식을 가지고
 또 그 몸을 위한
 한 느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 내적인 부분들 안에
 생활함,
곧 그분의
 느낌과 봄을
 (view;
 조망을, 관점을, 시야를,
 시력을, 견해를, 의견을)
 우리의
 느낌과 봄으로
 취함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서
 그 교회 생활을
 실행할 것입니다.

 

1일

엡 3:16-17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여러분을
강하게 하셔서
속사람에
이르게 하시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려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교회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가진
몸일 뿐 아니라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가진
새사람이므로,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바울은
믿는 이들이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거처를 정하시는 것을
허락해 드림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인격으로 취하기를
기도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실 때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지만,
그분이
우리의 마음으로 퍼지실 때
그분은
우리의
인격이 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 안에서
생명으로
취할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참된 교회생활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심으로
우리의 속 존재의
구석구석까지
차지하신 결과이다.
교회의 내용은
우리가
우리의
인격으로 취한
그리스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신
그리스도이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교회의 건축에 관해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교회가 반드시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그들의 마음에서
거처를 정하시고
그들의 내적 존재 전체를
차지하시고
점유하시고
적시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 존재를
차지하실수록
우리는 더욱더
몸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건축될 수 있을 것이다
(엡 2:21-22, 4:16).
몸의 생활의
실재는
그러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인 체험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누린 것의
완결이며,
무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 존재 전체에서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 것을
체험한 것의
완결이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신 것의
최종 결과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백향목 집을
지어 드리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다윗 안으로
건축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
다윗 안으로
건축하려고 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집이요
또한 다윗의 집이
될 것이다.
이 상호 거처는 또한
요한복음 14장 23절에
계시되어 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서로 거처를 정할 것입니다.”
이 거처는
삼일 하나님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건축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거처요
또한 우리의 거처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처를 가지시는 것이
우리가
행하거나
일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건축하심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 안으로
오셔서
우리의 영에서부터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안으로
확산되시어
우리의 혼 전체를
점유하심으로써
교회를
건축하신다
(마 16:18).
이 교회는
그분의 거처이자
우리의 거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며,
우리의 부담은
이 한 가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교회가
어떻게 건축되는지에 대한
중요한 요인은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인 체험이다.
은사 있는 이들은
사람들에게
은사를 공급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공급함으로써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하고
그분 안으로
자라게 한다.
만일 우리가
에베소서 3장과 4장을
자세히 읽어 보고
주님 앞에서
이 말씀을
기도로 읽는다면,
나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상을 주셔서
이것이
교회를 건축하는
유일한 길임을
보여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교회가
지식과 은사를 통하여
건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복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지식이 많을수록
분열도 더 많아질 것이다.
우리의 은사가 많을수록
어려움도 더 많아질 것이다.
오직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인 체험에 의해서만
우리는
교회생활의 실재를
가질 수 있다.
속사람이 반드시
강하게 되어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실 것이고,
우리는
모든 일에서
그분 안으로
자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도록
충만해질 것이고,
그분과 함께
건축되어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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