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기를 갈망하시는 관계가 그분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임을 계시한다.
우리는 성경에 나아올 때마다 한 가지 원칙, 곧 하나님께서 그분께 선택받은 백성과 하나 되기를 갈망하신다는 원칙을 실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된 목적은 그분 자신을 사람과 하나 되게 하시고 사람을 그분과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성한 생명과 사람의 생명이 함께 결합되어 한 생명이 되기를 갈망하신다.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 노선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이 둘을 한 본성을 가지고 한 생명에 의해 한 생활을 하는 한 실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끄셨고, 부활 안에서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을 하나로 연합하는 일을 성취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인격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기를 갈망하시는 관계는 그분과 사람이 함께 접붙여짐으로 유기적인 연결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접붙여진 생명은 교환된 생명이 아니다.
접붙여진 생명은 사람의 생명과 신성한 생명의 연합이다.
접붙임으로 비슷한 두 생명이 결합되고, 그 후에는 유기적으로 함께 자란다.
우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성한 생명과 결합될 수 있다.
우리 사람의 생명은 신성한 생명과 닮았다.
그러므로 신성한 생명과 사람의 생명은 함께 접붙여질 수 있고 함께 살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지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육체 되심, 십자가에 못 박히심, 부활의 과정들을 통과하시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셔야 했다.
우리는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으며, 이 접붙임이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하였다.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은 한 나무이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과 본성과 인격이 되신다.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진 거듭난 이들로서 우리는 접붙여진 생명, 곧 양편이 결합되어 유기적으로 자라는 생명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에 의해 살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 우리는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육체나 타고난 존재에 의해 살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 우리는 연합된 영, 즉 거듭난 사람의 영과 연합되신 신성한 영에 의해 접붙여진 생명을 살아야 한다.
접붙여진 생명 안에서 사람의 생명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에 의해 강화되고 높아지고 풍성하게 된다.
접붙여진 생명 안에서 가지는 그 본질적인 특성을 동일하게 보유하고 있지만, 더 높은 생명 안으로 접붙여짐으로써 강화되고 높아지고 변화된다.
접붙여진 생명 안에서 신성한 생명은 우리 안에서 운행하여 부정적인 요소들을 배출한다.
신성한 생명은 점진적인 방식으로 운행하여 타고난 모든 것을 제거한다.
신성한 생명은 우리의 결함과 연약함을 삼킨다.
우리의 기질의 부정적인 요소가 죽음을 당하고 나면, 주님은 우리의 기질을 버리시는 대신 그것을 높이 올리시고 사용하신다.
접붙여진 생명 안에서 신성한 생명은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것을 부활시키며, 우리의 기능을 높인다.
신성한 생명은 부정적인 것들을 배출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것을 부활시키는 일을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원래 기능들, 곧 창조될 때에 받은 기능들은 복원되고 강화되고 높아진다.
접붙여진 생명 안에서 신성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우리의 속부분들에 공급하고 우리의 전 존재를 적신다.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의 체현이시고,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진 우리는 유기적으로 그분께 연결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나무의 일부이다.
우리는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먹을 뿐 아니라, 그분과 연결되며 그분의 일부이다.
생명나무는 신성한 생명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기 위한 것이다. 가지들인 우리가 포도나무 안에 거할 때, 생명나무로부터 생명의 분배를 받고 생명나무의 일부로서 산다.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는 신성한 경륜을 위하신다. 포도나무의 가지들로서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하고 있고,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다.
우리가 포도나무 안에 거할 때, 우리 안으로 하나님의 분배, 곧 생명나무로부터 가지들 안으로 생명의 분배가 이루어진다. 이 분배가 우리를 하나님-사람들이 되게 한다.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그분을 우리의 거처로 삼는 것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높고도 완전한 체험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주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그분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나무의 일부로서 산다면, 선과 악이 아닌 생명을 주의할 것이고, 옳고 그름에 따라서가 아니라 생명과 죽음에 따라서 일들을 분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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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짐으로 생명나무의 일부가 됨”
6일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기를 그만두게 하실 의도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들이 되게 하실 의도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접붙여지신’ 하나님-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관념에는 그런 것이 없다.
우리의 관념에는 우리 자신만이 있고, 우리는 자신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다지 좋지 않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어떤 흠들이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떤 것을 개선하려고 하고, 더 좋게 바뀌기를 기대한다.
더 좋게 바꾸는 것은 인간의 관념이다.
학교는 사람이 개선되고 전보다 나아지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사람들을 교육한다.
이런 종류의 개선이 겉으로 보기에는 약간 통하는 것 같지만, 종국에는 전보다 더 악화되고 개선될 소망이 없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생수가 강들처럼 흘러나올 때까지, 우리가 그분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신성한 생명이 인간 생명에 더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생명 안으로 접붙여지는 것이며, 두 생명이 한 생명이 되어 하나님-사람의 연합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최고 수준의 생활은 하나님-사람의 연합된 생명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께서 우리가 되시고 우리가 그분이 될 정도로, 또한 우리와 그분이 생명과 본성과 형상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하게 될 정도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정점이다.
이것은 선한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구원은 받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분명하지 않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단지 선한 행위를 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의 참된 의미는 이러한 것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겸손하고 인내하며 선행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우리가 말하는 겸손과 인내와 친절함은 하나님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보다 우리 자신을 표현한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상태가 그다지 합당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어느 날 우리 모두가 회개했고 주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불렀을 때 거룩한 숨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 안으로 접붙여지셨다.
우리 안에 계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는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시다.
그뿐 아니라 이 체현되신 삼일 하나님은 영, 곧 복합되신 생명의 영이 되셨다.
그분은 다방면을 갖고 계시며 모든 것을 포함하신다.
이 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또한 삼일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구속자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을 때, 우리는 우리 사람의 생명에 더하여 다른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
이것이 접붙여진 생명이라 불린다.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생명 안으로 접붙여졌고, 두 생명이 연결되어 한 생명이 되었다.
이것은 나무에 연결된 접붙여진 가지들과 같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시적인 결과만 있는 함양이나 개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안으로 접붙여지신 하나님께서 계신다.
그분과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생활이다.
그분은 우리의 내용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표현이 되었다.
삼일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시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영과 혼과 몸이라는 세 부분으로 된 우리의 존재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이 생명은 하나의 법과 같아서 매일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강력하게 운행한다.
삼일 하나님은 전기에 비유되실 수 있다.
그분은 과정을 거치셨고, 육체 되심과 인간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다.
이 생명의 영은 하나의 법이 되셨고 매일 우리를 규제하고 계신다.
5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져서 요한복음 15장에 계시된 포도나무의 가지들이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이 영에 의해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다.
우리가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었을 때, 모든 것을 포함하신 이 영께서 우리 안으로 오셔서 부정적인 면에서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에서 우리를 해방하셨고, 긍정적인 면에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서 그리스도의 가지들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 자신이시고, 하나님이신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삼일 하나님의 실재이신 이 생명 주시는 영은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는 그분을 먹고 누리는 것을 배울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은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분을 믿는 것이 곧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요한의 책은 우리가 그분을 마셔야 하고(4:14, 7:37) 그분을 먹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6:57).
더욱이 요한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해야 한다고 말한다(15:4).
요한복음에서의 순서는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마시며, 그분을 먹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다음에 그분을 마시는 법과 먹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분을 마시고 먹음으로써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생명나무의 실재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나무로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나무를 먹을 뿐만 아니라 이 나무 안에 거하고 있다.
우리는 이 나무에 속한 것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 나무의 한 부분이 되었다.
주님을 마시고 먹음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일부분, 곧 나무의 가지들이 된다.
가지들이 나무의 생명 즙을 흡수하는 것이 참된 마심이다.
가지들은 나무의 생명 즙을 흡수함으로써 나무를 마시고 먹는다.
가지들은 나무의 모든 어떠함과 나무가 가진 모든 것을 흡수하고 나무 안에 거하며 나무 안에 존재한다.
나무가 없이는 가지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심지어 살거나 존재할 수도 없다.
가지들은 나무 안에 있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여러분이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여김으로써 자신을 죽음에 넘기려 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더욱더 살아날 것이다.
한번은 워치만 니 형제님이 사람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살할 수 있지만 아무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방법으로는 자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는 여러분을 십자가 위에 올려놓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다.
스스로를 죽음에 넣는 것에 대해 잊어버리라.
다만 그분을 먹고 그분 안에 거하라.
여러분이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생명 즙을 흡수할수록, 여러분은 더욱더 여러분 안에 있는 죽이는 요소를 더 느낄 것이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나무이시고, 그분의 육체 되심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이 생명나무에 참여할 수 있다.
그분은 육체 되심으로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끄셨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셨다.
또한 죽음과 부활에 의해 그분은 영이 되셨다.
그분은 육체에서 그 영, 곧 생명 주시는 영으로 변형되셨다.
이 생명 주시는 영께서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이끄시고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이끄신다.
그분은 우리를 우주적인 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이셔서 우리를 이 나무의 가지들로 만드신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온 존재를 누릴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삼일 하나님의 참된 표현인 교회가 출현할 것이다.
우리가 생명나무를 누리고 체험할 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성취될 것이다.
우리가 이 생명나무를 알고 이렇게 살아 있는 방식으로 이 생명나무를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신언노트, 2022 07 24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져서
그 생명나무의 일부가 됨
그리스도께서는
육체 되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끄셨고,
부활 안에서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셨습니다.
이로써 그분께서
하나님과 사람을
하나 안으로 섞는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는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고,
이 접붙임이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은
하나의 나무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그 가지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들에 의해
살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영이신(영적인, 공기의, 공기가 가득한)
그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육체에 의해
또는 우리의 타고난 존재에 의해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우리는
그 섞인(어우러진) 영,
즉 그 거듭난 사람의 영과 섞이신
그 신성한 영에 의해
한 접붙여진 생명을
살아야 합니다.
접붙여진 생명 안에서
사람의 생명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생명에 의해
강화되고 높아지며 풍성하게 됩니다.
우리 기질의 부정적인 요소가
죽임을 당하면,
주님은
우리의 기질을 버리시는 대신에
그것을 높이 올리시고 사용하십니다.
접붙여진 생명 안에서
신성한 생명은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것을
부활시키며,
우리의 기능을
높입니다.
신성한 생명은
부정적인 것들을 배출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것을
부활시키는 일을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원래 기능들,
곧 창조될 때에 받은 기능들은
복원되고 강화되며 높아집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한 가지 원칙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 원칙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사람과 하나 되기를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들입니다.
… 내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나도
여러분 안에 거하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이
하나임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전에
우리와 하나님은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야생올리브나무의 가지였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으로 접붙여졌습니다.
우리는
그 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으며,
이 접붙임이
우리를
그분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함으로써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분과 우리는
하나가 될 것이며,
한 생명과 한 본성과 한 생활을
가질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그 하나임은
완성되고 완결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백성이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구성 요소들이 되도록
완결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오직 하나의 의도만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 의도는 바로
그분 자신을 위한
한 유기체를
얻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 목적을 위해
우주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하게 되자,
하나님은
여자를 통해 오셔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그분 자신과 사람을
연결하시고
사람과 하나가 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육체 되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끄셨고,
부활 안에서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셔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 노선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이 둘을
한 본성을 가지고
한 생명에 의해
한 생활을 하는
한 실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었을 때,
모든 것을 포함하신
이 영께서
우리 안으로 오셔서
부정적인 면에서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에서
우리를 해방하셨고,
긍정적인 면에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서
그리스도의 가지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시고,
하나님이신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삼일 하나님의 실재이신
이 생명 주시는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먹고 누리는 것을
배울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요한복음에서의 순서는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마시며,
그분을 먹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다음에
그분을
마시는 법과
먹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을
마시고 먹음으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나무의 실재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나무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나무를
먹을 뿐만 아니라
이 나무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무에 속한 것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 나무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마시고 먹음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일부분,
곧 나무의 가지들이 됩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여김으로써
자신을
죽음에 두려고
더 많이 시도할수록
여러분은
더 많이 살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죽음에 두는 것에 대해
잊어버리십시오.
단지 그분을 늘 먹고
(상식常食하고, 먹고 살며)
그분 안에 거하십시오.
여러분이
그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생명 즙을
더 많이 흡수할수록,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죽이는 요소를
더 많이 느낄 것입니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생명나무이시고,
그분의
육체 되심과 죽음과 부활 때문에
우리는 이제
이 생명나무에 함께할 수
(이 생명나무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육체 되심으로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끄셨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셨습니다.
또한 죽음과 부활에 의해
그분께서
한 영이(a Spirit) 되셨습니다.
그분은
그 육체에서
그 영, 곧 생명 주시는 한 영으로
변형되셨습니다.
이 생명 주시는 영께서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이끄시고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이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우주적인 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이셔서
우리를
이 나무의
가지들로 만드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온 존재를
누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을 누림을 통하여
삼일 하나님의
참된 표현인
그 교회가
출현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나무를
누리고 체험할 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성취될 것입니다.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의 체현이시고,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진
우리는
유기적으로
그분께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나무의 일부입니다.
생명나무는
신성한 생명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기 위해 있습니다.
가지들인 우리가
포도나무 안에
거할 때,
생명나무로부터
생명의 분배를 받고
생명나무의 일부로서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기를
그만두게 하실
의도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들이 되게 하실
의도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접붙여지신’
하나님-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개선은
겉으로 보기에는
약간 통하는 것 같지만,
종국에는
전보다 더 악화되고
개선될 소망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생수가
강들처럼 흘러나올 때까지,
우리가
그분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성한 생명이
사람의 생명에 더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생명 안으로
접붙여지는 것이며,
두 생명이
한 생명이 되어
하나님-사람의
한 섞인 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가장 높은 표준은
한 하나님-사람의
그 섞인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께서
우리가 되시고
우리가
그분이 될 정도로,
또한 우리와 그분이
생명과 본성과 형상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하게 될 정도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일해 넣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점입니다.
이것은
선한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말하는
겸손과 인내와 친절함은
하나님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우리 자신을 표현합니다.
어느 날 우리 모두가
회개했고
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 거룩한 숨이
우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 안으로
접붙여지셨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이 체현되신 삼일 하나님께서
영, 곧 복합되신 생명의 영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다방면을 가지고 계시며
모든 것을 포함하십니다.
이 영께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또한 삼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속자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을 때,
우리는
우리 사람의 생명에 더하여
다른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그 접붙여진 생명이라 불립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생명 안으로 접붙여졌고,
두 생명이 연결되어
한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나무에 연결된
접붙여진 가지들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시적인 결과만 있는
함양이나 개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안으로 접붙여지신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분과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생활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내용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표현이 되었습니다.
삼일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셨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세 부분으로 된
우리의 존재 안에서,
즉, 우리의 영, 혼, 그리고 몸 안에서
생명이 되셨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의 법과 같이,
매일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고, 자동적이며, 강력한
한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삼일 하나님은
전기에 비유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과정을 거치셨고,
육체 되심과
사람의 생활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죽음과
또 부활을
통과하셨습니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생명 주시는 그 영이 되셨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 생명의 영은
하나의 법이 되셨고
매일 우리를
규제하고 계십니다.
4일
이 접붙여진 생명은 … 교환된 생명이 아니다.
가지는 그 본질적인 특성을 동일하게 보유하고 있지만, 그 가지의 생명은 더 나은 생명에 접붙여짐으로써 높아지고 변화된다.
접붙임의 결과는 무엇인가?
더 좋은 나무의 진액이 접붙여진 가지에 공급될 때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제거된다.
그러면 그 가지의 원래 기능이 복원되고 강화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원래 기능을 높아지게 하시고 강화하시며 풍성하게 하신다.
이렇게 해서 자연스럽고도 자동적으로 우리의 전 존재가 적셔지고 변화되며 놀라운 열매가 산출된다.
신성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운행함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고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할 때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배출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조정할 어떤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신성한 생명은 우리 안에서 운행함으로써 부정적이고 타고난 것은 무엇이든지 점진적으로 제거한다.
신성한 생명은 또한 우리를 부활시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좋다.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신성한 생명의 부활 능력으로 복구하시고 복원하실 것이다.
신성한 생명은 부정적인 것들을 배출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것을 부활시키는 일을 한다.
하나님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혼과 마음과 영을 가진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우리 존재의 이 모든 방면을 부활 안으로 이끌고자 하신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생각은 둔했고, 감정은 치우쳐져 있었으며, 의지는 온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접촉하고 체험할수록 우리의 생각은 더 분명하고 맑아지며, 감정은 합당하게 안정되고, 의지는 조정된다.
이것은 우리의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부활을 거친 성격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천박한 성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가장 고상한 성격을 나타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타고난 기능이 신성한 생명에 의해 높이 올려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온전히 체험하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을 신실히 접촉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신실히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성격은 높이 올려질 것이다.
더 나아가 신성한 생명이 배출하고 부활시키고 높이 올릴 때, 그리스도의 풍성이 우리의 속부분들에 공급된다.
이런 이유로,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그들의 지성에 있어서 매우 명석해진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자신을 드려서 교회의 모든 집회에 참석하면서도 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활하고 높아진 기능이 그리스도의 풍성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신성한 생명은 우리의 전 존재를 적실 것이다.
이 적심은 영감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결국 우리의 존재 전체가 신성한 생명으로 흠뻑 적셔질 것이다.
이것이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풍성은 우리의 존재를 적시고 우리의 존재를 참되게 신진대사적으로 바꾸어 준다.
이 신성한 생명의 적심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
신성한 생명은 예비되었으며 우리 안에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에 관해서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을 접촉하고, 그분께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그분을 들이쉬는 데 신실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는 것이다(롬 8:6).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둘 때, 우리의 내적 존재의 어떤 부분도 영과 분리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부정적인 요소를 배출하고, 우리의 기능을 부활시키고 높이 올리며, 우리의 기능에 공급을 주고, 우리 존재의 각 부분을 적시는 고속 도로를 신성한 생명에 제공할 것이다.
이것에 관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과 각 지방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부디 우리가 본 것에 따라 살고 행하는 데 신실하기를 바란다.
3일
포도나무의 많은 가지들인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신성한 분배 안에서 삼일 하나님의 유기체를 형성한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주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들입니다.”라고 선포하셨다.
그러한 선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믿는 이들이 한 나무라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포도나무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지들인 믿는 이들로 구성된 우주적인 포도나무이다.
포도나무의 가지는 포도나무를 떠나면 마르고 죽을 것이기에 혼자 스스로 살 수 없다.
가지들과 포도나무의 관계는 우리와 주 예수님의 관계를 묘사한다.
우리의 존재,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하는 것은 반드시 주님 안에 있어야 하고, 우리 안에 계신 주님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길이 없다.
이렇게 서로 안에 거하는 것이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 유기체의 일부라는 것이 얼마나 좋고, 기적적이며, 놀랍고, 뛰어난 것인지!
그리스도는 이 유기체이시고, 우리는 이 유기체에 포함되어 있다.
가지들인 우리와 관련하여, 나무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공급과 부축과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해 사신다.
나무이신 그리스도는 또한 가지들인 그분의 믿는 이들을 통해 모든 것을 하신다.
나무에게 가지들이 필요하고 나무가 가지들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오늘날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없이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즉 포도나무를 자라게 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는 우리 없이는 움직이실 수 없고, 일하실 수 없으며, 그 어떤 활동도 하실 수 없다.
우리가 놀랍고 뛰어나고 기이한 신성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그분이 필요하고, 이 신성한 나무가 열매 맺고 번성하고 확대되기 위해서는 그분께 반드시 우리가 필요하다.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는 생명나무(창 2:9)처럼 생명이 충만한 유기체이시다.
어떻게 우리가 그분께 접붙여질 수 있는가?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여러 과정들을 통과하실 필요가 있었던 이유이다.
그분께서 거치신 첫 번째 과정은 육체가 되신 것인데(요 1:14), 이로써 우리는 그분께 접붙여질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인 우리는 나무의 일부인 가지들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는 나무의 일부인 다윗의 순으로서 오셨다.
그분은 우리와 정확히 똑같으시다.
그러므로 그분과 우리는 서로 접붙여질 수 있다.
접붙이는 사람은 성공적인 접붙임을 위해서 접붙여지는 양쪽 부분들이 잘리고 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안다.
먼저 접붙일 부분이 죽어야 하고, 그다음으로 그 부분에 접붙여질 부분 또한 죽어야 한다.
양쪽 부분들이 죽을 때에만 접붙여지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스도 편에서는, 다윗의 순이신 그분께서(슥 3:8, 렘 23:5, 33:15) 어느 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비록 그분은 육체 안에서 죽으셨지만, 그 영 안에서 부활하셨다(벧전 3:18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분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하).
그러한 영이 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접붙임을 위해 준비되셨다.
죄인들인 우리 편에서는 회개하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생명 주시는 영이신 그분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신성한 생명을 넣어 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후에 더 이상 자신에 의해 살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 우리는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육체나 타고난 존재에 의해 살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 우리는 우리의 연합된 영에 의해 접붙여진 생명을 살아야 한다.
2일
하나님의 경륜은 신성한 생명이 우리의 존재 안으로 분배되는 문제이다.
이 분배의 결과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인 우리는 사람의 생명과 신성한 생명 둘 다를 가진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신성한 생명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하셨다.
신성한 생명이 사람의 생명 안에 들어올 때, 신성한 생명은 내용이 되고 사람의 생명은 용기(容器)와 표현이 된다.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교환된 생명으로 여긴다.
이 관념에 따르면, 우리의 생명은 보잘것없고 그리스도의 생명은 뛰어나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을 포기하고 그분의 생명과 교환하기를 요청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분께 양도하고, 그분은 그것을 그분 자신의 생명으로 대치하신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교환된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사람의 생명 안으로 분배되고 주입된 신성한 생명의 문제이다.
이것이 성경 말씀에 담겨 있는 기본 사상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그릇과 결혼 생활과 접붙임이라는 예를 사용한다.
그릇의 예는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내용으로 갖는 하나님의 용기라는 것을 보여 준다.
결혼의 예는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개성과 성격과 기질을 가진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 것을 보여 준다.
접붙임의 예는 두 생명이 결합되고, 그 후에는 유기적으로 함께 자란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릇의 예나 결혼 생활의 예는 모두 하나님의 분배와 관련하여 유기적인 것을 전혀 묘사하지 않기 때문에, 바울은 계속해서 세 번째 예로 한 나무를 다른 나무에 접붙이는 것을 사용한다.
로마서 11장 17절부터 24절까지에서 바울은 참올리브나무에 접붙여진 야생올리브나무의 가지를 예로 사용한다.
접붙임의 결과로 야생올리브나무의 가지는 참올리브나무와 함께 유기적으로 자란다.
두 나무에는 각 나무의 생명이 있지만, 이제 두 나무의 생명은 유기적으로 함께 자라서 하나의 산출물을 가진다.
한 종류의 생명이 다른 종류의 생명에 접붙여지려면, 그 두 생명은 반드시 매우 유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바나나나무의 가지를 복숭아나무에 접붙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건강하고 열매를 많이 맺는 복숭아나무에 접붙이는 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두 나무의 생명은 서로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원리를 신성한 생명이 사람 안으로 분배되는 것에 적용할 수 있다.
신성한 생명은 개의 생명과 접붙여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두 생명에는 유사점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성한 생명과 결합될 수 있다.
비록 우리 사람의 생명은 신성한 생명이 아니지만, 신성한 생명과 닮았다.
그러므로 이 두 생명은 함께 쉽게 접붙여질 수 있고 함께 유기적으로 자랄 수 있다.
심프슨이 지은 찬송가 365장은 보잘것없는 나무가 더 좋은 나무에 접붙여져서 더 풍성하고 달콤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한다.
보잘것없는 나무의 생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풍성하고 달콤한 나무의 생명과 더불어 하나의 단위로 함께 자란다.
다시 한번 우리는 이것이 교환된 생명이 아니라 접붙여진 생명이라는 것을 본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법칙에 따르면, 보잘것없는 생명이 더 풍성한 생명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한 생명이 보잘것없는 생명에 영향을 준다.
사실 풍성한 생명은 보잘것없는 생명의 모든 결점을 삼켜 버릴 것이며, 그렇게 해서 보잘것없는 생명을 변화시킨다.
같은 원리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의 결점들을 삼켜 버리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자신의 생명을 없애 버리지 않으신다.
그와는 반대로, 그분은 우리의 결점들을 삼켜 버리심으로써 우리의 인성을 높이 올리신다.
그분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우리의 모든 미덕을 높이 올리신다.
1일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한 가지 원칙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 원칙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사람과 하나 되기를 계획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출생의 기본 원칙과 주된 원칙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연결되시고 사람이 되시며 사람과 하나 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기본 원칙이다.
우리는 신성한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원칙을 지켜야 하는데, 이 원칙은 바로 하나님의 주된 목적이 그분 자신을 사람과 하나 되게 하시고 사람을 그분과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들입니다.
… 내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나도 여러분 안에 거하겠습니다.”(5, 4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이 하나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전에 우리와 하나님은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야생올리브나무의 가지였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으로 접붙여졌다.
우리는 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졌으며, 이 접붙임이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하였다.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함으로써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럴 때 그분과 우리는 하나 될 것이며, 한 생명과 한 본성과 한 생활을 가질 것이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하나 됨은 완성되고 완결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백성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 되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구성 요소들이 되도록 완결될 것이다.
우리는 시편에 올 때마다 이러한 사상을 붙잡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빗나갈 것이다.
나의 부담은 우리가 시편의 인간적인 관념과 신약의 신성한 사상의 대조를 보는 것이다.
우리의 관념에 따르면, 성경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주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로 피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함을 말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신약에 있는 신성한 사상이 아니다.
신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오직 하나의 의도만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 의도는 바로 그분 자신을 위한 한 유기체를 얻으시는 것이다.
영원 과거에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한 가지 일을 하기로 결정하셨는데, 그 일은 바로 그분 자신을 위한 한 유기체, 곧 그리스도의 몸을 창조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이 목적을 위해 우주와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하게 되자, 하나님은 여자를 통해 오시어 사람이 되심으로써 그분 자신과 사람을 연결하시고 사람과 하나 되실 것을 약속하셨다.
결국 그분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사심으로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셨다.
나중에 그분은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죄들 때문만이 아니라 우주 안의 모든 문제를 처리하시려고 죽으셨다.
그런 다음 그분은 부활하셨다.
그분은 육체 되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끄셨고, 부활 안에서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시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될 수 있게 하셨다.
비록 이것이 신약의 계시이지만, 이 계시를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선한 일을 하려는 천연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을 붙잡고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행위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은 약하고 유혹은 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시기를 구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 노선이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이 둘을 한 본성을 가지고 한 생명에 의해 한 생활을 하는 한 실체가 되게 하는 것임을 보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계시를 놓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