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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그리스도를 알며, 그리스도를 추구함

Being Found in Christ,
Knowing Christ,
and Pursuing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됨,
그리스도를 앎,
또 그리스도를 추구함
 

바울의 갈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며,
자신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를
가지는 것이었다
― 빌 3:9.

바울의 깊은 속에는
자신의 온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잠기고
그리스도로 적셔져,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그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있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
― 빌 3:9상.

바울은
자신의 의를 가지지 않고,
그리스도를
그가 살아 낸
주관적인 의로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가지는
그러한 상태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했다
― 빌 3:9.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에게
의가 되시는 것에는
두 방면이 있다.

첫째 방면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께
객관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도록,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의
의가 되시는 것이다
― 롬 3:24-26, 행 13:39, 갈 3:24하.

둘째 방면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나타남이신
그리스도를 살아 냄으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의
의가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
믿는 이들이
주관적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의이시다
― 롬 4:25, 벧전 2:24상,
약 2:24, 마 5:20, 계 19:8.

빌립보서 3장 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주관적인 의는
사실상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매일의 생활,
즉 하나님과 사람에게
올바른 생활이 되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의,
곧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 스스로의
노력에서 나온 의 안에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 빌 3:6, 9.

바울은
하나님의 의 안에 살기를,
그리고 그리스도를 삶으로써
하나님을 표현하는
상태 안에서 발견되기를
갈망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러한 상태 안에
있어야 한다
― 빌 1:20-21상.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소유하기 위한
기초이자 조건이다
― 빌 3:9, 고전 1:30.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체험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며,
뛰어난 부활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를
가진 상태에서 살았다
― 빌 3:10-11.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지는 것은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빌 3:8),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10절)
체험으로 말미암은 것,
곧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체험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는 것이다
― 빌 2:17-18, 4:4, 10.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단지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을
얻는 것이다
― 고후 2:10.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을
체험하고
누리고
소유하는 것이다
― 빌 3:8, 엡 3:8.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분을 누리며,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함으로써
그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계시와 체험, 둘 다에 의해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 빌 3:10, 고전 6:17, 갈 2:20.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기를 열망했다
― 빌 3:10.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은
그분의 부활 생명인데,
이 생명이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였다
― 엡 1:19-20.

그 영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능력의
실재이시다
― 롬 8:9-11, 고전 15:45하, 요일 5:6.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능력으로
복합되신 그 영은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시면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능력을
우리의 온 존재 안으로
분배하신다
― 빌 1:19, 출 30:23-25, 롬 8:6하, 10-11.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쳐 두고
십자가의 죽음 아래에 머문다면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우리가 체험한
부활 능력이
몸을 건축할 것이다
― 빌 3:10, 엡 4:12, 16.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그분의 고난의 교통’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 마 20:22-23, 골 1:24.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며,
그런 다음 이 능력에 의해
그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 빌 3:10.

이러한 고난은 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한 것이다
― 골 1:24.

빌립보서 3장 10절은 또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의 생활의 틀로 취하기를
갈망했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한
기초이다
― 빌 1:20-21상, 3:9-10.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사시기 위해
지속적으로
그분의 타고난 생명을
죽음에 넘기신 것을
가리킨다
― 요 6:57상.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해방하고
나누어 주고
번식시키기 위해
죽음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또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한다
― 요 12:24-26, 28, 13:31, 고후 4:12.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
결과는
우리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이며,
이것은
이기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일 것이다
― 빌 3:11.

뛰어난 부활에
이른다는 것
혹은 도달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존재가
점차적으로,
계속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 살전 5:23.

뛰어난 부활은
옛 창조물로부터
새 창조물 안으로의
부활이다
― 고후 5:17, 갈 6:15.

바울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자신을
추구해야 하며,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 빌 3:12, 14상.

그리스도를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이미 획득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뒤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해야 한다
― 빌 3:12-13.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그리스도를
충만히 누리고 얻는 것이며,
상은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를
최고도로 누리는 것이다.
이러한 누림은
신약의 경주에서
승리한 경주자들에게
주는 보상이다
― 빌 3:14, 고전 9:24,
히 10:35, 11:2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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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그리스도를 알며, 그리스도를 추구함”

6일

빌 3:10-11
…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

빌 3:14
나에게 주실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상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위로 부르셨습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의
뛰어난 부활은
이기는 성도들에게
상이 되는
탁월한 부활, 특별한 부활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믿는 이는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게 될 것이다
(살전 4:16, 고전 15:52).
그러나 이기는 성도들은
그 부활의
특별하고도 탁월한 몫을
누릴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 35절에 언급된
더 좋은 부활이다.
더 좋은 부활은
첫 번째 부활인
(계 20:4-6)
생명의 부활일 뿐 아니라
(요 5:28-29),
주님의 이기는 이들이
왕국의 보상으로 받게 될
뛰어난 부활인데,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부활을
얻기를 추구했다.

뛰어난 부활에 이른다는 것은
우리의 전 존재가
점차적으로, 계속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죽은 영을
부활시키셨다
(엡 2:5-6).
그런 다음 그분은
우리 영에서부터 계속하여
우리의 혼과
(롬 8:6)
우리의 죽을 몸을
부활시키시고
(11절),
결국 우리의 전 존재,
곧 영과 혼과 몸이
그분의 생명에 의해,
그분의 생명으로
우리의 옛 존재에서
완전히 부활하도록 하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며,
상으로서 주어지는
뛰어난 부활에 이를 때까지
해야 할 경주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와 목적지가 되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곧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을 함으로써만
이 목표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옛 창조물에서부터
새 창조물이 되는
과정을 거쳐,
부활 안에 있게 된다.

바울은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푯대이시고
또한 상이시다.
푯대란
그리스도를
가장 충만히 누리고 얻는 것이다.
상은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를
최고도로 누리는 것이며,
신약의 경주에서
승리한 경주자들에게 주는
보상이다.
푯대에 도달하여
상을 얻기 위해,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추구했다.

뛰어난 부활로 불리는
부활의 이러한 탁월한 부분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추구해야 하고,
경주해야 하며,
우리의 달려야 할 길을
승리로 마쳐야 한다.

우리도
바울처럼 거듭났지만
아직 온전하게 되지 않았고
생명이 성숙하지 않았다.
우리가
주님께로 회심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도록
그리스도께 얻어졌다.
이제 우리는
아직 얻지 못하고
아직 온전하게 되지 못한
이들로서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길에서의
첫 번째 방면은
우리 자신이
얻은 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또 한 가지는
뒤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뛰어난 부활은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 중
소수의 학생들의 체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졸업식에서
소수의 뛰어난 학생들은
특별한 영예를 누릴 것이다.
…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죽은 모든 믿는 이들이 부활하지만,
몇 사람만이
뛰어난 부활, 최상의 부활을
누릴 것이다.

우리는
성경 지식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 헬라어로
‘추구하다’는 말은
‘박해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구원받기 전에
바울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박해했다.
구원받은 후에
그는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그런 정도로,
그러나 매우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추구했다.
어떤 사람을 박해하는 것은
그를 괴롭히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 우리의 온 존재와
우리의 온 힘은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데
소진되어야 한다.
나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의 필요성에
깊은 인상을 받고 분발하여,
심지어 박해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추구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떠나시도록
두지 말고,
그분을 추구하고,
그분을 쫓아가며,
긍정적인 의미에서
그분을 박해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그분을 얻게 될 것이다.

 

5일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의 생활의 틀로
취하기를 갈망했음을
가리킨다.
과자 틀 안에
반죽한 밀가루를 넣고
구워
그 틀의 모양과
같은 형상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그분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할
틀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생활을 하실 때
그러하셨던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
곧 십자가 아래서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와 같은 생활을 통해서
바울은
부활 능력을
체험하고 표현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사시기 위해
지속적으로
그분의 인간 생명을
죽음에 넘기신 것을
가리킨다
(요 6:57).
우리의 생활은
신성한 생명을 살기 위해
우리의 인간 생명에 대해 죽는
그러한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셨다.
그리스도는
두 생명,
즉 신성한 생명과
인간 생명을
가지고 계셨다.
…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단지
인간 생명만 살아 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보다 하나님의 의도는
주 예수님께서
인간 생명이라는 통로를 통해
신성한 생명을 사시는 것이었다.
… 이러한 방식에 의해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그분의 인간 생명을
죽음에 넘기심으로
신성한 생명이
흘러나올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활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틀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주 예수님의 인간 생명은
탁월했다.
그러나 그러한 탁월한 인간 생명조차도
신성한 생명을 해방하기 위하여
죽음에 넣어졌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타고난 생명의
부정적인 면들만을
죽음에 넣는다.
그들은
좋은 면들을
귀하게 여기고
보존하기를 원한다.
각 나라의 국민들은
그들 자신의 국민적 특성과 철학을
귀하게 여긴다.
중국 사람들은
그들의 철학적인 윤리를
자랑으로 여기며,
미국 사람들은
그들의 솔직함과 개방적인 것을
자랑할 것이다.
… 우리는
다른 많은 것들을
기꺼이 죽음에 넣을지라도
이러한 국민적 특성들은
대단히 귀중한 보물로
붙잡고 있다.
… 결과적으로
우리의 타고난 생명의
기본적인 요소는
죽음에 넣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요소는
우리 안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 해방되는 것을
방해하는
큰 바위가 될 것이다.

여러분은
수년 전에
지금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을
더 많이 체험했을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에서
진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생명의 성장은
지연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대한
체험은 너무나 제한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더 폭넓고
더 깊이
체험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현재의 체험을 말하는 대신에
과거의 체험들을 의지해 살며
과거의 체험들만 계속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때
모든 것을 성취한
그분의 죽음을 체험한다.
첫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우리의 혼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
(요 12:25).
둘째로,
우리가 기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면,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사탄을 패배시킬 것이다
(요 12:31, 히 2:14).
셋째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해방하고
나누어 주고
번식시키기 위해
죽음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요 12:24-26, 고후 4:12).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해방되고
다른 사람들 안으로
전달되고
번성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때,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이
자연히 해방되고
이 신성한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수록
우리는
아버지를
더욱더 영광스럽게 한다
(요 12:28, 13:31). …
다섯째로,
십자가에서의 그분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이끌린다
(요 12:32).
… 바로 생명의 해방을 통해
사람들이 그렇게
그리스도께 매혹된다.
이것이
매혹하는 능력을 지닌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이다.

 

4일

엡 1:19-20
… 믿는 우리들을 향하여
강한 권능으로 운행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시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들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셔서,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기를 열망했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은
그분의 부활 생명인데,
이 생명이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게 하였다
(엡 1:19-20).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의
실재는
그 영이다
(롬 1:4).
이 능력을
알고 체험하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시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
요구된다.
죽음은
부활의 근거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려면,
우리는
그분의 생활의 본을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분의 부활 능력이
솟아오를 근거를 제공하여
그분의 신성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부터
표현되게 한다.

‘그분의 고난의 교통’,
곧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마 20:22-23, 골 1:24)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으로써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딤후 2:11).
… 그리스도께는
고난과 죽음이
먼저 오고
그다음에
부활이 뒤따랐다.
우리에게는
부활 능력이
먼저 오고,
그다음에
그분의 고난의 교통과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
뒤따른다.
우리는 먼저
그분의 부활 능력을 받는다.
그다음에
이 능력에 의해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고난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몸을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한
기초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한
근거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려면 반드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려면
우리는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그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는
위치로 이끌린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할 때
우리는
그분을 안다.

불신자들이
자신을 제쳐 놓는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안에 남는 분이신
그 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르다.
우리가
자신을 제쳐 놓으면
우리는
우리 안에 남는 분이신
그 영을 가지게 된다.
제쳐 놓아진 것은
자아이고,
남는 것은
그 영이다.
한 형제가
아내와 다투고 있을 때
자신을 제쳐 놓는다면
그 영께서 나오실 것이다.
이것이 부활 능력이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를
할 필요가 있는데,
곧 항상 자신을
제쳐 놓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죽음 아래에 두고
십자가 위에 놓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고,
부활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누리는 것이
놀랍다 할지라도,
부활 능력은 주로
우리의 누림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는
결코 이기적인 누림이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은
몸을
산출하고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 자신을
몇몇 개인을 통해
표현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많은 믿는 이들로 구성된
한 몸을 통해
그분 자신을 표현하시는 것이다.
… 그것은
단체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자신을 제쳐 두고
십자가의 죽음 아래에 머문다면
부활 능력을 누리게 될 것이다.
부활 능력은 즉시
몸을 산출할 것이다.
몸을
산출하고 건축하는
이 목표는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사탄은
이 목표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대를 불러일으킨다.
… 반대가 올 때
우리는
고난을 받는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교통 안으로 들어간다.
… 골로새서 1장 24절에 따르면,
이런 고난은
몸을 위한 것이다.

 

3일

빌 3:8
그럴 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또한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단지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을
얻는 것이다
(고후 2:10).
어떤 것을 얻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을
(엡 3:8)
체험하고
누리고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얻으시고
소유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을
얻고
소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빌 3:12).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분을 체험하며,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와 함께 행하시도록 함으로써
그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계시와 체험, 둘 다에 의해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결국 그분은
우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이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기 위하여
(체험하기위하여)
자신의 의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를
가진 상태에서 살았다.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지는 것은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10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체험으로 말미암은 것,
곧 그분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
혹은 그분에 대한
완전한 지식 안에서
그분을 체험하는 것이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고,
그다음에
그리스도를 체험하기를 추구했다.
즉 체험적인 방식으로
그분을
알고 누리기를
추구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얻은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의 손실을 감수하며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알 것이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3장 9절은
8절에서 나온 것이며,
10절은
9절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8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질 때,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기꺼이 감수하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면
그분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과
그분을 체험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우리는
이 차이를
식료품을 사는 것과
산 식료품으로 요리한
음식을 먹는 것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식료품을 사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산 식료품으로 요리한
음식을 먹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 우리는
어떤 것을 사기 전에
먼저 그것에 대한
지식의 탁월함에
이끌리게 된다.
그와 같이 먼저
우리는
식료품을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지고,
그다음에
그것을
사서 얻게 되며,
결국에는
그것을 먹음으로
음식을 누리게 된다.
같은 방식으로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얻었고,
그다음에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했으며,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렸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항상
그분을
알고 누리고 체험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결코 능가할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항상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능가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의 체험이
그리스도를 아는
그의 지식을
능가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더 높은 지식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더 높은 체험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의 과거의 지식에
제한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2일

빌 3:9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입니다.

고전 1: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이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셔서
우리에게
지혜,
곧 의와 거룩하게 함과 구속이
되셨습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에서
바울은 또한
“내가 가진 의…가 아니라”
라고 말한다.
이 어구는
‘발견되려고’라는
말을 수식한다.
우리는
율법에서 나온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를
소유한 상태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의를
가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가졌다.
‘의’는
합당하고 올바른
생활을 가리킨다.
바울은
천사들과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에게서 나온
생활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나온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살아 나타나셨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움직이고 행하며
모든 것을 하면서
하나님을 살아 나타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바울의 올바른 생활 안에서
표현되셨다.
그의 생활은
그 자신의 행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교리적으로,
어떤 형제의 의가
그 자신의 의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표현인지를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의의
향기를 분간하는
방식에 의해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매우 쉽다.
우리는
시각이 아닌
후각으로
불쾌한 냄새와
유쾌한 냄새를
분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종류의 사랑은
고약한 냄새를 풍길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은
천연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일 뿐 아니라
육체에 속한 사랑이다.
비록 그것이
사랑이기는 하지만,
그 사랑은
매우 불쾌한 냄새를
지니고 있다.
또 다른 경우,
우리는
하늘에 속하고 신선하며
순수하고 달콤한
신성한 사랑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이것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통해
나타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이다.

믿음에 근거한 의는
믿음에 달려 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시도나 분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믿음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노력하거나 분투하거나 시도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살며,
더욱 그분 안에서 안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나의 믿음이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며,
이제 내가 사는 생명은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사는 생명이다
(갈 2:20).
오늘날 나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믿음에
달려 있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산출할 수 있는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믿음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나의 생명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나의 믿음이시다.
믿음으로 나는
나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으로 취한다.
나는
나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제쳐 놓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취하며,
그분에 의해 산다.
자연스럽게 나는
하나님을 살아 나타내며,
하나님은
나를 통해 나타나시고
내 속에서부터 표현되신다.
이러한 생활이야말로
합당하고 올바른 생활이다.

이러한 유형의
올바른 생활은
율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러한 생활은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를 통해
표현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이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범위
곧 다른 영역 안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역 안에 살고 있으며,
우리 안에서부터
하나님을
살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행하고 분투하는 문제가 아니라
안식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생명과 믿음이 되시는
주님 안에서
안식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올바른 생활로
살아 나타낸다.
이것이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이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상태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란다.
매일매일
천사들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상태 안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천사들아,
주님의 회복 안의
그리스도인들을 보라.
그들은
하나님을 살아 나타내는
상태에 있다.
그들은
행위나 행실을
주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생명으로
취하는 것만을
관심할 뿐이다.
그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한다.
너희는
그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살아 나타내는 상태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증거를 가진
합당한 교회생활이다.
이것이
오늘날
주님께서 갈망하시는 것이다.

 

신언노트, 2019 08 04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됨,
그리스도를 앎,
또 그리스도를 추구함

바울의 갈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었고,
그의 자신의 의를
 가지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의
 믿음을 통하여 있는 것,
 곧 하나님께로부터 밖으로 있는
 (which is out of God)
 또 믿음에 기초하는
 (based;
 근거가 있는, 기반을 둔)
 그 의”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빌 3:9):

바울 안에 깊숙이
 그의 전체의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푹 잠기고
 또 그리스도로 흠뻑 적셔지게 하여
그 결과(so that)
 그를 관찰한
 모두가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게 하려는
 (might find; 발견할 수 있는)
그 열망이
 (the aspiration;
 그 포부가, 그 염원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는
 그 간절한 갈망을(desire)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그 자신의 의를
 가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그 의를
 (가짐의)
 그 상태로
 (in the condition; 그 상태 안에서),
 그리스도를
 그의
 주관적인, 곧 살아 나타내진
 (lived-out)
 의로 취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 믿는 이들에게
 의이신
 그리스도의
 두 측면들이 있습니다:

그 첫째 측면은
 그 믿는 이들의
 의이신
 그리스도이신데
그들이
 객관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 둘째 측면은
 그 믿는 이들의
 의이신
 그리스도이신데
하나님의 그 나타나심으로서
 그들에게서 살아 나타내지시는
 그리스도이시고,
그 하나님께서는
 (… God, who; 그분께서)
 그 믿는 이들에게
그들이
 주관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해서
 주어지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의이십니다.

빌립보서 3장 9절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주관적인 의는
 사실상
 우리의 매일의 생활함,
 곧 하나님과 또 사람에게 올바른
 (right with; 알맞은)
 한 생활함이 되시는(becoming)
 하나님 그분 자신이십니다:

바울은
 그 자신의 의,
 곧 그 율법을 지키는
 사람 자신의 노력에서부터 오는
 그 의 안에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삶에 의하여
 하나님의 그 의 안에
 사는 것을
 또 하나님을 표현함의
 그 상태 안에서
 발견되는 것을
 갈망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러한 한 상태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이
 그 기초, 곧 그 상태이고,
그 위에
 (on which;
 그 기반[토대, 근거, 이유], 곧 그 조건[처지] 위에)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밖으로 있는
 (is out of God)
 그 의를
 받아들이고 또 소유하는데,
이는
 (which; 그 의가)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또 그분의 부활의 그 능력
 또 그분의 고통을 겪음들의 그 교통을
 알고(체험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며,
또 그 뛰어난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그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밖으로 있는 그 의를
 가짐의 한 상태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앎의
 그 탁월함을 가지는 것은
 계시에 의하여
 있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체험
 ―그분에 관한 한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에 의하여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한 체험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또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한 그 지식을
 가지는 것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인격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한 대가를 지불함에 의하여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모든 부를
 체험하고,
 누리며,
 또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함
 (experiencing Him; 그분을 체험함),
 그분을 누림,
 그분과 하나임,
 또 그분께서
 우리 안에 사시도록 함에 의하여
 그분을 알
 (to know Christ; 그리스도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방식으로
 우리는
 계시와 또 체험
 둘 다에 의하여
 그분을 압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그 능력과
 또 그분의 고통을 겪음들의
 그 교통을
 아는 것을 열망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그 능력은
 그분의 부활 생명이고,
이는
 (which; 그것은)
 그분을
 죽은 사람들로부터
 일으켰습니다(raised):

그 영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또 그것의 능력의
 그 실재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또 그것의 능력과 함께
 (with …;
 …으로, …을 가지고)
 복합되신
 그 영께서
우리의 영에 내주하셔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또 그것의 능력을
 우리의 전체의 존재 안으로
 분배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제쳐두고
 또 그 십자가의 그 죽음 아래에
 남아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그 능력을
 체험할 것이고,
또 자발적으로
 (spontaneously;
 자연스럽게, 저절로),
 우리에 의하여 체험되는
 부활의 그 능력이
 그 몸을 건축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 안에 있는
 그 표현
 ‘그분의 고통을 겪음들의 그 교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겪음들,
 곧 그분의 부활의
 그 능력의 그 체험을 위한
 한 필요 조건 안에의
 (in … a necessary condition;
 한 필요한 상태 안으로의)
 그 참여를 언급합니다:

우리는 맨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의
 그 능력을 체험하고,
그러고 나서
 이 능력에 의하여
 그분의 고통을 겪음들 안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고통을 겪음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몸,
 곧 그 교회를 위하여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은 또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에 관하여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의 생활의
 그 틀로
 (as the mold;
 그 거푸집으로[주형으로])
 취하는 것을
 갈망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함의
 그 기초입니다
 (the base;
 그 기반[토대, 기지, 맨 아래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그 틀은
 그리스도의
 그분의 타고난 생명을
 계속해서 죽음에 두심을
 언급하고
그 결과(so that)
 그분께서
 하나님의 그 생명에 의하여
 사실 수 있었습니다
 (might live).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에 의하여,
우리가
 생명의
 그 해방, 나누어 줌, 또 증식을 위하여
 그분의 죽음 안에서
 (in;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또 우리가 또한
 그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룸의
 그 결과는
우리가
 죽은 사람들로부터
 그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이고,
이는(which)
 그 이기는 이들에게의
 한 상일 것입니다:

그 뛰어난 부활에
 이르는 것,
 곧 도달하는 것은
우리의 전체의 존재가
 점진적으로
 (gradually; 서서히)
 또 끊임없이
 (continually; 계속해서)
 부활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뛰어난 부활은
 그 옛 창조물에서부터 밖으로
 그 새 창조물 안으로의
 한 부활입니다.

바울과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추구해야 하고
 또 “그 상을 위하여
 그 목표를 향해
 (toward the goal;
 그 골문을 향해)
 추구해야 합니다
 (whould pursue;
 얻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밀고 나가야 합니다)”
 (빌 3:12, 14상):

그리스도를 추구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이르렀다고
 (we have attained;
 우리가 이미 얻었다고[달성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또 뒤에 있는 그것들을
 잊어버리고
 또 “앞에 있는 그것들을 향하여 앞으로”
 (팔다리를) 뻗어야 합니다
 (stretch;
 팔다리를[몸을] 한껏 펴야[늘여야] 합니다,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도달해야[미쳐야] 합니다)
 (빌 3:12-13).

그것을 향하여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그 목표는
 그리스도를
 충만히 누림과 또 얻음이고,
또 그 상은
 그 신약 경주의
 그 승리한 주자들에게의
 한 보상으로서
 그 천년 왕국 안에서
 그리스도를
 극도로 누림입니다.

 

1일

빌 3:8-9
… 내가
모든 것을 또한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과 9절에 따르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모든 것의 손실을 감수하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더 나아가 바울의 갈망은
자신의 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를
가진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었다.

과거에 바울은 완전히
유대 종교 안에서
율법 아래 있었고,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는
회심했을 때
율법과 이전의 종교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져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고후 12:2)
되었다.
이제 그는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
즉 유대인들과 천사들과 귀신들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기대했다.
바울의 깊은 속에는
자신의 온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잠기고
그리스도로 적셔져,
그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그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있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관찰되고 보이고 발견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을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내가
여러분의 집을 방문한다면,
나는 어디서
여러분을 발견하게 되겠는가?
여러분의 좋은 행위 안에서인가,
그리스도 안에서인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관찰할 때,
우리가 있는 장소가
우리가 사는 영역이다.
우리가
문화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문화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리가
선한 행동 안에 산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선한 행동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영역 안에 살고 있든지
우리는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보이고 관찰되고 발견된다.
바울이 아직
율법에 따라 살고 있었을 때,
그는
율법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지기 시작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것,
즉 그의
사랑, 친절, 겸손,
지혜, 인내, 의도, 태도,
심지어 말과 구변과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異象)을 보았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기꺼이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모든 것의 손실을 감수하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귀중함에 대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그다음에 우리는
우리가 본
그 그리스도를 얻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보석상에 들어가서
진열된 많은 귀중한 물건을 본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물건들을
보는 것과
얻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분에 관한
지식을 가지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격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격의 충만의 체현이시고
(골 2:9)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그림자의
실재이시다
(16-17절).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분의 모든 풍성을
(엡3:8)
체험하고 누리고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을 때
우리는 또한
그분 안에 살며
체험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런 뒤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거나 관찰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덕 안에서
발견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것이다.
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기꺼이 감수하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산다면,
우리의 의(義)이신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 앞에서
우리의 표현이 되실 것이다.
그다음에 우리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지 않고,
우리가 살아 나타낸
그리스도 자신인
바로 그 의(義)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만족하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기뻐하고
만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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