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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인 교회 건축을 위한, 타고난 능력에 대비되는 성숙한 생명의 부활한 능력

솔로몬은 지혜의 사람이자 총명한 사람이 되었다(대하 1:10). 그러나 솔로몬이 많은 이교도 여자들을 취하고,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며, 백성이 우상에 경배하는 장소들을 세웠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와 총명을 잃어버렸다. 솔로몬은 매우 어리석게 되었고 자신의 왕국에 손상을 입혔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던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도 동일하게 자신의 정욕에 빠지는 이 끔찍하고 추악한 죄 때문에 실패하였다(삼하 11장). 솔로몬이 이 사탄적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한 것은 그의 아버지의 실패보다 훨씬 엄중한 것이었다. 솔로몬은 많은 이방 여자를 사랑하여 정욕에 빠졌고(왕상 11:1-3), 자신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신 하나님을 저버렸으며(왕상 11:9하), 자기가 사랑한 이방 여자들의 꾐에 빠져 이방 우상들을 숭배하였기 때문에(왕상 11:4-8) 타락하였다.

솔로몬이 통치하는 동안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었고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 성전이 건축된 시대는 이스라엘 자손의 역사에서 황금기였다.

유일한 장소인 예루살렘은 하나(oneness)를 상징하는 반면에 산당들은 분열을 상징한다. 온갖 종류의 악과 가증스러운 것들이 산당을 세우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신약의 용어에 따르면 온갖 종류의 악은 분열과 관련이 있다 .

놀랍게도, 하나님의 갈망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라는 터 위에 성전을 건축한 바로 그 솔로몬이 다시 산당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이 때문에 그의 후손은 그들의 왕국의 구십 퍼센트 이상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의 선민은 여러 세대에 걸쳐 그들 가운데 발생한 분열과 혼돈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잃어버렸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외국 땅에서 포로가 되어 버렸다.

솔로몬의 실패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는 지금도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경고와 경종이 되어야 하는지!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정욕의 문제에 있어서 조금만 실수를 해도 우리는 교회생활에 손상을 입힐 수 있고 교회생활의 찬란한 방면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작은 일에서도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롬 8:4).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과 함께 살고 항상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과 하나여야 한다.

솔로몬은 어둡고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죽었다(왕상 11:40-43). 그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떨어졌으며(마 6:29, 벧전 1:24) 그의 찬란한 업적은 그가 말하였던 것처럼 ‘허무 중의 허무’(전 1:2)가 되었다.

우리는 영적인 생명의 빛 아래서 솔로몬의 실패를 보아야 한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생명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최고 수준으로 누리는 데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영적인 생명이 그다지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제한 없이 정욕에 빠져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좋은 땅을 누리는 것에서 끊어졌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그의 시대의 세계에서 위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의 지혜는 전적으로 물질적인 영역에 있었으며 영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다. 솔로몬의 지혜는 장차 올 참지혜의 그림자였으며, 바울의 지혜와 완전히 달랐다.

바울의 지혜는 영적인 지혜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는 것(엡 3:17),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하며 처신하는 것(롬 8:4), 두 영 곧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이 함께 연합되어 한 영이 되는 것(롬 8:16, 고전 6:17)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들은 주로 바울에게 밝혀졌다(골 2:2, 엡 3:3-5, 9-10). 오늘날 우리가 우주 안에서 최고의 지혜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바울의 서신서들 안에 있는 진리들의 결정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참지혜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체현되셨는데,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어,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를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신다. 그 결과 우리는 삼일 하나님의 걸작품, 곧 그분의 시가 되어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신성한 구상을 전시한다.

솔로몬은 타고난 능력이 가득한 사람이었지만 생명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고, 그의 지혜는 은사에 속한 것이었지 생명의 분량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룬 업적은 그가 하나님께 은사로 받은 지혜의 역량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었지 생명의 성숙에 따라 나타난 능력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능력과,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능력의 차이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에서 우리의 타고난 존재와 타고난 능력이 무력하다는 것, 즉 부적격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에서 우리의 타고난 존재를 조금도 신뢰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인 건축을 위하여 모든 일에서 우리의 타고난 존재를 거절하고 우리의 영을 훈련하기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에는 우리의 타고난 존재를 위한 여지가 없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의 일부로서, 타고난 것은 무엇이든 자연스럽게 거절할 것이다.

교회를 건축하는 데 있어서 우리 안에 있는 타고난 모든 것은 반드시 파쇄되어야 하며, 그런 후에야 우리는 함께 연결될 수 있다. 오직 우리의 타고난 존재가 파쇄된 후에만 우리는 건축될 수 있다 ― 찬송가 603장 6-7절.

타고난 능력은 자기중심적이고 우리를 교만하게 하여,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낳는다. 부활한 능력은 교만하지 않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다.

타고난 능력은 이기적이며, 그 모든 계획과 책략은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자기 자신만을 위한다. 부활한 능력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다. 부활한 능력은 파쇄된 것이고, 자아를 위하지 않으며, 자아의 요소가 없다.

타고난 능력은 자기 의존과 자기 확신을 불러일으켜 스스로 행동하고,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만든다. 부활한 능력은 참으로 능력과 역량이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히 자신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부활한 능력은 성령의 통제를 받으며 감히 자신의 원함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타고난 능력에는 신성한 요소가 없다. 타고난 능력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자신의 갈망을 만족시킨다. 타고난 능력은 육체와 성질의 요소들과 섞여 있다. 따라서 인정받지 못하면 화가 나게 된다. 그러나 부활한 능력에는 육체가 없다.

타고난 능력은 일시적이며, 시험이나 좌절이나 반대를 견딜 수 없다. 부활한 능력은 아버지를 높이 찬양하며, 아버지의 뜻을 인정한다.

타고난 능력에 따라 봉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상을 받거나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기를 갈망한다. 부활한 능력에 따라 봉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얻기를 갈망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큰 뜻을 품는다.

타고난 능력은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에게 알려지며, 사람 앞에서 발휘되는 것을 좋아한다. 부활한 능력은 은밀한 가운데 일들을 하여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과 하나 되고 ‘밑으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기’를 좋아한다.

생명이 없는 타고난 능력과 역량은 뱀과 같아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독을 주입한다. 생명은 비둘기와 같아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생명을 공급하며 우리를 인성 안에서, 풍성한 속성들을 지니신 넘치시는 하나님을 그분의 향기로운 미덕들을 통해 표현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생명은 우리를 가시나무 사이에서 자라는 백합화와 어두운 밤에 빛나는 밝은 별과 같이 되게 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교회 안으로 가져오려고 할 때마다 교회의 실재는 사라진다. 오직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것만이 교회 안으로 이끌릴 수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마흔한 명의 왕들은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좋은 땅에 대한 누림을 주의하지 않았다. 심지어 다윗조차 좋은 땅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다. 우리는 그들의 본보기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악한 왕들의 그 악의 뿌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의 뿌리와 마찬가지로,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물을 담아 둘 수 없는 새는 저수조인 이방 우상들을 향해 돌아선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악 때문에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정욕에 탐닉하는 죽음의 물에 빠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음으로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왕들이다(롬 5:10, 17). 우리는 바울의 본을 따르기 위하여 분투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더 이상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신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갈 2:20).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 곧 몸의 공급을 받아 그리스도를 삶으로 그분을 확대한다고 말했다.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전 15:45하). 이 신성하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께서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의 거듭난 영과 연합되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을 연합된 영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다. 이제 두 영이 한 실체로서 함께 연합되었다.

오늘날 영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 복합되신 영, 기름 바르시는 영, 계시하시는 영,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완결인 완결되신 영이시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연합된 영, 곧 우리의 영과 연합되신 그 영께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이 연합된 영 안에서 이 연합된 영을 따라 살고 행하며 처신함으로써 참되게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려야 한다(롬 8:4, 5:10, 17). 이 연합된 영이 그리스도의 몸의 시작이며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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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빌 1:19 왜냐하면 여러분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이러한 일이 결국에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롬 8:16 그 영께서 직접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모든 왕들은 그들이 자신의 유익과 번영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위하여 다스리는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위하여 임마누엘의 땅(사 8:8)을 지킬 한 나라와 그리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모셔 오는 계보의 혈통을 이어 갈 한 백성을 얻으셔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왕들은 나실인이 되어 하나님을 자신들의 머리와 권위로 삼고, 그분의 종으로서 그분께 복종하며, 세상의 모든 쾌락(포도주)을 버려야 했다. 그러나 왕들 가운데 가장 탁월했던 다윗을 포함하여 모든 왕이 이 점에서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그리하여 왕들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그분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하늘에 속한 대제사장이시고(히 4:14), 하늘에 속한 사역자이시며(8:1-2),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고(9:15), 신약의 집행자이시다(9:16-17). 그러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단지 하늘들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영 안에서도 운행하시어 하늘을 우리에게로 이끄시며 우리를 하늘과 연결하고 계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연합된 영 안에서 머물고 살며 행하고 처신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며,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빌 1:20-21). 이와 같은 생활의 결과가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를 영 안에서 살고, 영 안에서 행하며, 영을 따라 모든 것을 하도록 간청하며 분발시킨다. 예를 들어, 우리의 머리 모양이라든가, 우리의 배우자나 자녀와 대화하는 방식도 영을 따른 것이어야 한다. 복음 전파를 위해 다른 이들을 방문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 따라서가 아니라 연합된 영을 따라서 그들을 접촉해야 한다. 더욱이 교회 집회에서 우리의 찬송과 기도와 신언은 모두 영 안에 있고 영을 따른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포함한 복합되신 이 영에 관한 성경의 다섯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 요한복음 7장 39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은 영원 안에 계셨고 또 창세기 1장 2절에 언급되셨지만,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이 영은 완결되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영광스럽게 되시고(눅 24:26)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둘째, 고린도전서 15장 45절 하반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신성하시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께서 우리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의 영과 연합되시어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을 연합된 영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다.

셋째,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즉 부활 안에서 그 영이 되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 영(18절)에 의해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넷째, 요한계시록은 ‘일곱 영’을 말한다(1:4, 3:1, 4:5, 5:6). 생명 주시는 영, 곧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신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강화되어 일곱 영이 되셨다.

다섯째, 출애굽기 30장 23절부터 25절까지는 하나님의 영을 상징하는 올리브기름과 네 향료,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능과 그분의 부활과 그 능력을 상징하는 몰약, 육계, 창포, 계피로 복합된 거룩한 관유에 대해 말한다. 관유는 복합되신 기름 바르시는 영을 상징한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연합된 영, 곧 우리의 영과 연합되신 그 영께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이 연합된 영을 따라 살고 행하며 처신해야 한다.

5일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자기들을 위해 저수조들을 팠는데 그것들은 물을 담아 둘 수 없는 새는 저수조들이었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을 하였다면,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사람들은 더욱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존재한 방식, 즉 그들의 일상생활과 활동과 업적 가운데서 처신하고, 생활하고, 움직이며, 행동한 방식은, 하나님의 선민이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주신 좋은 땅에 참여하여 그분의 대적 사탄이 탈취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되기 위해 모든 권리를 누리는 길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보여 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몫인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께 참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권리,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백성인 우리가 악한 자, 하나님의 대적 사탄이 탈취한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이 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길을 예표하며 상징한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모두 마흔한 명의 왕들이 있었다. 처음 세 왕인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다스렸다.

나머지 서른여덟 왕들 중에서 오직 여덟 왕만이 비교적 선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 역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이들이었으며,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자신들의 군주국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에 따라 그분을 알지 못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고 위임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의 자아, 그들의 천연적인 사람을 부인하지 않았다.

악한 왕들의 그 악의 뿌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의 뿌리와 마찬가지로,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물을 담아 둘 수 없는 새는 저수조인 이방 우상들을 향해 돌아선 것이었다(렘 2:13). 이 두 가지 악 때문에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정욕에 탐닉하며 불의하게 무고한 피를 흘리는 죽음의 물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의 악이 이같이 그들의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했으므로, 그분은 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먼저는 그들을 아시리아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 나중에는 바빌론 사람들의 손에 넘기셨는데, 이들은 성전을 허물고, 거룩한 성을 불태웠으며, 거룩한 백성을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땅으로 사로잡아 가고, 거룩한 땅을 칠십 년간 황폐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선민인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땅의 누림을 상실하고, 거룩한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이 되는 대신 이방 땅에서 포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축복하신 선민을 다스리던 왕들의 비참한 역사의 비극적인 종말은,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선민인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가 되어야 한다. 다윗과 같이 단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거나, 어떤 정직한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느 정도 선하고 의롭게 되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께 참여하여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권리를 누림으로써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가 될 자격을 얻게 하지 못한다. 신약의 이기는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으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 곧 타고난 사람을 향하여 죽고, 부활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한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생명 주시는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그리스도를 살고 확대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움직이고 행동하며, 그 영을 따라 그 영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신약의 추구자들인 우리에게 필수적인데,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경주에서 승리자가 되어 교회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누리고, 왕국 시대에는 가장 충만하게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보상을 얻기 위한 것이다.

4일

마 16: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살전 2:4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아서 복음을 위임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봉사에서 출생을 통해서나 배움을 통해 얻은 타고난 힘과 능력을 거절해야 함을 보고자 한다. 우리의 타고난 힘과 능력의 어떤 것도 생명에 속한 교회 봉사에는 무익하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가 아닌 자신의 타고난 힘과 능력에 따라서 스스로 주님을 위해 행동하고 봉사할 수 있다. 우리는 힘과 능력이 있으므로 주님께 기도하거나 주님을 앙망할 필요가 없고, 주님의 뜻을 구하거나 주님의 인도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이것이 정확히 모세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가 동료 히브리인을 보호하기 위해 이집트 사람을 쳐 죽였을 때, 주님의 뜻에 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행동했다(출 2:11-12). 오늘날 기독교 안의 슬픈 상황은 사람들이 대체로 타고난 힘과 능력에 의해 스스로 주님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주님께서 그들이 행하는 것에 복을 주시기만을 기도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주님의 뜻을 위해 그다지 많이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타고난 힘과 능력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고난 힘과 능력 안에서 일할 때, 그 목표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고 그 동기는 자신의 갈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이상을 본다면 자아를 추구하는 우리의 불순한 동기가 죽음당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주님께서 어떤 일들을 하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성취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해서는 안 된다. 그 목표는 주님의 목표여야 한다.

우리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갈망과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타고난 힘과 능력과 하나이다.

타고난 힘과 능력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한다. 타고난 힘과 능력을 이기는 것은 중대하고도 주관적인 공과이다. 그것은 죄를 처리하는 것보다 더욱 주관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타고난 힘과 능력은 자아 곧 우리의 타고난 조성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타고난 힘과 능력은 우리 자아의 체현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자아를 부인한 후에, 타고난 힘과 능력을 거절하는 것과 십자가로 그것들을 처리하는 공과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타고난 힘과 능력은 십자가로 처리받으면 유용하게 된다. 십자가로 처리받은 후에 그것들은 부활 안에 있게 된다.

베드로는 심지어 감옥에 가고 죽기까지 할지라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생각할 만큼 자신의 타고난 힘과 능력을 자신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시험을 받아 작은 하녀 앞에서조차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

베드로는 극도로 패배하여 완전한 실패자가 되었다(마 26:69-75). 그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힘 곧 자신의 타고난 힘을 과신하였다.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귀했지만, 그의 타고난 힘은 거절되고 처리되어야 했다. 주님은 베드로의 타고난 힘과 자기 확신이 처리될 수 있도록, 그가 그분의 면전에서 그분을 세 번 부인함으로써 완전히 실패하도록 허락하셨다.

베드로는 실패를 통해 주님에 대한 믿음과 겸손으로 형제들을 섬기기를 배웠다(눅 22:32, 벧전 5:5-6). 베드로는 참으로 부서졌으며 타고난 능력에서 부활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 돌이키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타고난 힘과 능력을 거절하기를 배워야 한다. 타고난 힘과 능력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하며 십자가 위에 놓여야 한다. 그럴 때 그것들은 부활 안에 있게 될 것이며 신성한 요소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 봉사에서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에게 신성한 요소를 공급하는 것이 될 것이다.

3일

빌 3:3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후 1:9 결국은 죽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생명의 빛 아래서 우리는 솔로몬이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영적인 사람은 아니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생명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그의 지혜는 은사에 속한 것이었지 생명의 분량에 속한 것이 아니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이룬 업적은 그가 하나님께 은사로 받은 지혜의 역량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었지 생명의 성숙에 따라 나타난 능력이 아니었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첫째로 생명을 주의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 어느 정도의 역량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역량은 생명의 성숙이 나타난 것이어야 한다. 생명이 없는 역량은 뱀과 같아서 교회에 독을 주입한다. 생명은 비둘기와 같아서 교회에 생명을 공급한다. 우리는 오늘날의 솔로몬이 되는 대신에 합당한 생명의 분량을 가진 ‘비둘기’가 되어야 한다.

타고난 역량이 깨뜨려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장애가 된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그것은 부서지고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해야 한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유용한 이들은 역량이 있지만 그들의 역량이 깨뜨려진 이들이다.

십자가의 처리는 항상 부활에 이르게 한다. 사람의 역량이 십자가에 의해 더 처리될수록 더 유능한 사람이 된다. 사람의 지혜가 십자가에 의해 더 처리될수록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더욱이 이러한 역량과 지혜는 부활을 거친 것이다.

타고난 능력과 부활한 능력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여기에 이 둘을 비교해 주는 일곱 가지 요점이 있다.

첫째, 모든 타고난 능력은 이기적이며 그 모든 계획과 책략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다. … 넷째, 타고난 능력은 자만을 포함하며, 자신이 역량이 있다고 느끼게 하여 그 결과 자랑하고 자기에게 영광을 돌린다. … 일곱째, 타고난 능력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오직 자기 자신만을 의지한다.

부활한 능력은 정반대이다. 첫째, 파쇄되고 부활한 모든 능력은 자아를 위하지 않으며 자아의 요소가 없다. 둘째, 부활한 모든 능력에는 육체가 없다. 셋째, 부활한 능력은 결코 수완을 쓰지 않는다. 넷째, 부활한 능력은 교만하지 않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다. 다섯째, 부활한 능력은 성령의 통제를 받으며 감히 자신의 원함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여섯째, 부활한 능력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다. 일곱째, 부활한 능력은 참으로 능력과 역량이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히 자신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타고난 능력과 부활한 능력의 차이점에 대하여 분명해졌으므로 우리 자신의 체험 가운데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능력을 발휘할 때, 그 일이 자아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자의로 결정하여 개별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행하고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비평과 반대를 감수할 수 있는가? 내가 묘안을 짜내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아니면 스스로 자랑하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가? 성령에 의해 통제를 받는가 아니면 자신의 원함대로 행하는가? 나 자신의 갈망을 만족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가 아니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 결과에 대해 그분을 신뢰하는가? 나 자신의 수단에만 의지하는가 아니면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만일 우리가 자신을 엄격하게 점검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과 봉사에서 많은 영역이 아직도 타고난 조성과 옛 창조물에 속해 있어서 부활의 열매를 산출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는 일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구출이다.

2일

고전 1:24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고전 1: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이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셔서 우리에게 지혜, 곧 의와 거룩하게 함과 구속이 되셨습니다.

열왕기상 4장 29절부터 34절까지에서 우리는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그의 시대의 세계에서 위대하게 된 것을 본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매우 뛰어난 이해력을 주시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넓은 마음을 주셨다(29절). 그러므로 솔로몬은 넓은 마음을 지녔다. 30절과 31절에 따르면, 그의 지혜는 동방의 모든 자손의 지혜와 이집트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 솔로몬은 그의 지혜로 잠언 삼천 구절을 말하였고, 노래 천다섯 편을 지었다(왕상 4:32). 게다가 그는 나무들에 관하여 논하였으며, 또한 동물들과 새들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물고기들에 관하여 논하였다(33절).

솔로몬의 지혜는 전적으로 물질적인 영역에 있었으며 영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다. 솔로몬의 지혜는 바울의 지혜와 완전히 달랐다. 바울의 지혜는 영적인 지혜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는 것(엡 3:17),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하며 처신하는 것(롬 8:4), 두 영 곧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이 함께 연합되어 한 영이 되는 것(롬 8:16)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날 영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 복합되신 영, 생명 주시는 영, 내주하시는 영, 기름 바르시는 영, 계시하시는 영,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완결인 완결되신 영이시다.

여호와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구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솔로몬은 여호와께 하나님의 백성을 재판할 지혜와 슬기로운 마음을 달라고 구했다(6-9절). 지혜는 우리 영 안에 있는 것이며, 슬기는 우리 생각에 있는 것이다. 종종 우리 영 안에는 지혜가 있을지라도, 생각 안에서 슬기롭게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우리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우리 생각 안에 있는 하나님의 슬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솔로몬의 영광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해서는 안 된다. 주 예수님은 들의 백합에 대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것들 중 하나만큼 입지 못하였습니다.”(마 6:29)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솔로몬 자신이 그가 소유한 것과 이룬 것이 허무 중의 허무임을 인정했다(전 1:2).

성경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부분인 구약은 예표들과 그림자들과 상징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표들과 그림자들과 상징들의 실재는 두 번째 부분인 신약 안에 있다. 솔로몬의 지혜는 장차 올 참지혜의 그림자였다.

이 두 부분 사이의 과도기에 주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도 요한보다 큽니다.”(마 11:11)라고 말씀하셨다. 신약 시대의 개척자인 침례자 요한은 솔로몬보다 컸지만, 신약의 믿는 이들인 우리는 훨씬 더 크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위해 얼마나 많이 행하시고 그에게 얼마나 많이 주셨든지 간에, 솔로몬에게는 그 안으로 일해 넣어지신 하나님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되도록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있다. 우리는 솔로몬이 예표로서 외적으로 소유한 것을 갖고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 안에는 실재가 있는데 바로 우리 존재 안으로 그분 자신을 일해 넣으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자녀들, 즉 하나님의 종류,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이 된 우리는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었다.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거듭나고 변화되어 다른 종류로 높이 올려졌다. 우리는 단지 새 창조물에 속한 사람들만이 아닌, 하나님-사람들이다.

제자들은 마태복음 11장에 있는 침례자 요한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후에 주님은 그들에게 실재의 영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12-15).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들은 주로 바울에게 밝혀졌다(엡 3:3-5). 이것이 바울의 글이 그처럼 신약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이다. 오늘날 우리가 우주 안에서 최고의 지혜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바울의 서신서들 안에 있는 진리들의 결정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계시의 내재적인 의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참지혜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체현되셨는데,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어(고전 1:24, 30),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를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지혜인가!

신언노트, 2022 09 04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인
교회 건축을 위한,
타고난 능력에 대비되는
성숙한 생명의 부활한 능력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인
그 교회를 건축함을 위한
타고난 능력 대
생명의 성숙의 부활한 능력

솔로몬은
지혜의 사람이자
총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많은 이교도 여자들을 취하고,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며,
백성이 우상에 경배하는
장소들을 세웠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와 총명을
잃어버렸다.
솔로몬은
매우 어리석게 되었고
자신의 왕국에
손상을 입혔다.

그러한 역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매우 엄격하고 상세하게
다루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씨를 뿌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뿌린 것의
산출물을 거두게 될 것이다.
아주 조금만 부주의하더라도
거기에는
산출되는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랑이 많으시고
친절하시며
은혜와 용서가 충만하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세세한 방식으로
의로우시다.
만일 우리가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만드실 수 있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실 것이다.
우리의 행함과 행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것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잘못된 말을 하거나
무익한 말을 하지 않도록
공과를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백성이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백성이다.
우리는 심지어
작은 일들에서도 주의하기를
배워야 한다.

오늘날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왕들이다.
우리의
뜻과 갈망과
성격과 습관과 행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데
영향을 준다.
우리는
왕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서
끊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상의 누림에서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왕의 직분을
잃게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작은 일에서도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솔로몬은 또한
자신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가 사랑한
이방 여자들의 꾐에 빠져
이방 우상들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타락하였다.

솔로몬이 타락한 결과로
하나님의 징벌이 임했다.

솔로몬은
온 이스라엘을
사십 년간 다스린 후에
어둡고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죽었다.
그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떨어졌으며
그의 찬란한 업적은
그가 말하였던 것처럼
‘허무 중의 허무’가 되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최고 수준으로 누리는 데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영적인 생명이
매우 조금 성숙하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제한 없이
성적 방종에 빠져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좋은 땅을 누리는 것에서
끊어졌다.
이 때문에
그와 그의 후손은
그들의 왕국의
구십 퍼센트 이상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의 선민은
여러 세대에 걸쳐
그들 가운데 발생한
분열과 혼돈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잃어버렸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외국 땅에서
포로가 되어 버렸다.
솔로몬의 실패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는
지금도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경고와 경종이
되어야 하는지!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정욕의 문제에 있어서
조금만 실수를 해도
우리는
교회생활에
손상을 입힐 수 있고
교회생활의 찬란한 방면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열왕기상 4장
29절부터 34절까지에서
우리는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그의 시대의 세계에서
위대하게 된 것을
본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매우 뛰어난
이해력을 주시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넓은 마음을 주셨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넓은 마음을 지녔다.
30절과 31절에 따르면,
그의 지혜는
동방의 모든 자손의 지혜와
이집트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

솔로몬의 지혜는 전적으로
물질적인 영역에 있었으며
영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다.
솔로몬의 지혜는
바울의 지혜와
완전히 달랐다.
바울의 지혜는
영적인 지혜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는 것,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하며 처신하는 것,
두 영
곧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이
함께 연합되어
한 영이 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날
영 하나님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
복합되신 영,
생명 주시는 영,
내주하시는 영,
기름 바르시는 영,
계시하시는 영,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완결인
완결되신 영이시다.

우리는
솔로몬의 영광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해서는 안 된다.
주 예수님은
들의 백합에 대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것들 중 하나만큼 입지 못하였습니다.”
(마 6:29)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솔로몬 자신이
그가 소유한 것과 이룬 것이
허무 중의 허무임을
인정했다.

성경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부분인 구약은
예표들과 그림자들과 상징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표들과 그림자들과 상징들의
실재는
두 번째 부분인
신약 안에 있다.
솔로몬의 지혜는
장차 올 참지혜의
그림자였다.

신약 시대의 개척자인
침례자 요한은
솔로몬보다 컸지만,
신약의 믿는 이들인
우리는
훨씬 더 크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위해
얼마나 많이 행하시고
그에게 얼마나 많이 주셨든지 간에,
솔로몬에게는
그 안으로 일해 넣어지신
하나님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되도록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있다.
우리는
솔로몬이
예표로서
외적으로 소유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 안에는
실재가 있는데
바로 우리 존재 안으로
그분 자신을 일해 넣으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자녀들,
즉 하나님의 종류,
하나님의 가족의 구성원이 된
우리는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었다.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거듭나고 변화되어
다른 종류로
높이 올려졌다.
우리는 단지
새 창조물에 속한 사람들만이 아닌,
하나님-사람들이다.

제자들은
마태복음 11장에 있는
침례자 요한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후에 주님은
그들에게
실재의 영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들은 주로
바울에게 밝혀졌다.
이것이
바울의 글이 그처럼
신약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이다.
오늘날 우리가
우주 안에서
최고의 지혜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바울의 서신서들 안에 있는
진리들의 결정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계시의
내재적인 의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참지혜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체현되셨는데,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지혜가 되시어,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우리를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지혜인가!

영적인 생명의 빛 아래서
우리는
솔로몬이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영적인 사람은 아니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생명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그의 지혜는
은사에 속한 것이었지
생명의 분량에 속한 것이 아니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이룬 업적은
그가
하나님께
은사로 받은
지혜의 역량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었지
생명의 성숙에 따라 나타난
능력이 아니었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첫째로
생명을 주의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
어느 정도의
역량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역량은
생명의 성숙이
나타난 것이어야 한다.
생명이 없는 역량은
뱀과 같아서
교회에
독을 주입한다.
생명은
비둘기와 같아서
교회에
생명을 공급한다.
우리는
오늘날의 솔로몬이 되는 대신에
합당한 생명의 분량을 가진
‘비둘기’가 되어야 한다.

타고난 역량이
깨뜨려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장애가 된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그것은
부서지고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해야 한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유용한 이들은
역량이 있지만
그들의 역량이
깨뜨려진 이들이다.

십자가의 처리는 항상
부활에 이르게 한다.
사람의 역량이
십자가에 의해
더 처리될수록
더 유능한 사람이 된다.
사람의 지혜가
십자가에 의해
더 처리될수록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더욱이 이러한 역량과 지혜는
부활을 거친 것이다.

타고난 능력과
부활한 능력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여기에
이 둘을 비교해 주는
일곱 가지 요점이 있다.

부활한 능력은
정반대이다.
첫째,
파쇄되고 부활한 모든 능력은
자아를 위하지 않으며
자아의 요소가 없다.
둘째,
부활한 모든 능력에는
육체가 없다.
셋째,
부활한 능력은 결코
수완을 쓰지 않는다.
넷째,
부활한 능력은
교만하지 않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다.
다섯째,
부활한 능력은
성령의 통제를 받으며
감히 자신의 원함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여섯째,
부활한 능력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다.
일곱째,
부활한 능력은 참으로
능력과 역량이 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히 자신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타고난 능력과
부활한 능력의
차이점에 대하여
분명해졌으므로
우리 자신의 체험 가운데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능력을 발휘할 때,
그 일이
자아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자의로 결정하여
개별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행하고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비평과 반대를
감수할 수 있는가?
내가
묘안을 짜내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아니면 스스로 자랑하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가?
성령에 의해
통제를 받는가
아니면 자신의 원함대로
행하는가?
나 자신의 갈망을
만족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가
아니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 결과에 대해
그분을 신뢰하는가?
나 자신의 수단에만
의지하는가
아니면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만일 우리가
자신을 엄격하게 점검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과 봉사에서
많은 영역이 아직도
타고난 조성과
옛 창조물에 속해 있어서
부활의 열매를
산출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는 일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구출이다.

우리는
교회 봉사에서
출생을 통해서나
배움을 통해 얻은
타고난 힘과 능력을
거절해야 함을
보고자 한다.
우리의 타고난 힘과 능력의
어떤 것도
생명에 속한 교회 봉사에는
무익하다.

오늘날 기독교 안의 슬픈 상황은
사람들이 대체로
타고난 힘과 능력에 의해
스스로 주님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주님께서
그들이 행하는 것에
복을 주시기만을
기도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주님의 뜻을 위해
그다지 많이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타고난 힘과 능력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고난 힘과 능력 안에서 일할 때,
그 목표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고
그 동기는
자신의 갈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이상을 본다면
자아를 추구하는
우리의 불순한 동기가
죽음당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주님께서
어떤 일들을 하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성취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해서는 안 된다.
그 목표는
주님의 목표여야 한다.

타고난 힘과 능력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한다.
타고난 힘과 능력을 이기는 것은
중대하고도 주관적인 공과이다.
그것은
죄를 처리하는 것보다
더욱 주관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타고난 힘과 능력은
자아
곧 우리의 타고난 조성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타고난 힘과 능력은
우리 자아의 체현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자아를 부인한 후에,
타고난 힘과 능력을 거절하는 것과
십자가로 그것들을 처리하는 공과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타고난 힘과 능력은
십자가로 처리받으면
유용하게 된다.
십자가로 처리받은 후에
그것들은
부활 안에 있게 된다.

베드로는
극도로 패배하여
완전한 실패자가 되었다.
그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힘
곧 자신의 타고난 힘을
과신하였다.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귀했지만,
그의 타고난 힘은
거절되고
처리되어야 했다.
주님은
베드로의 타고난 힘과 자기 확신이
처리될 수 있도록,
그가
그분의 면전에서
그분을
세 번 부인함으로써
완전히 실패하도록
허락하셨다.

베드로는
실패를 통하여
주님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해
(주님을 믿음으로)
또 겸허함을 가지고
형제들을 섬기는 것을
배웠다.
베드로는
참으로 부서졌으며
그 타고난 능력에서
부활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
돌이키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타고난 힘과 능력을
거절하기를
배워야 한다.
타고난 힘과 능력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하며
십자가 위에 놓여야 한다.
그럴 때
그것들은
부활 안에 있게 될 것이며
신성한 요소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 봉사에서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에게
신성한 요소를
공급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들이
존재한 방식,
즉 그들의
일상생활과 활동과 업적 가운데서
처신하고,
생활하고,
움직이며,
행동한
방식은,
하나님의 선민이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주신
좋은 땅에 참여하여
그분의 대적 사탄이 탈취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되기 위해
모든 권리를 누리는
길에 대한
완전한 그림을
보여 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몫인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께 참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권리,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백성인 우리가
악한 자, 하나님의 대적 사탄이
탈취한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이 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길을
예표하며 상징한다.

서른여덟 왕들 중에서
오직 여덟 왕만이
비교적 선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 역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이들이었으며,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자신들의 군주국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에 따라
그분을 알지 못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살고
위임을 수행하기 위해
그들의 자아,
그들의 천연적인 사람을
부인하지 않았다.

악한 왕들의
그 악의 뿌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의 뿌리와 마찬가지로,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물을 담아 둘 수 없는
새는 저수조인
이방 우상들을 향해
돌아선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악 때문에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정욕에 탐닉하며
불의하게 무고한 피를 흘리는
죽음의 물에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선민인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땅의 누림을
상실하고,
거룩한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이 되는 대신
이방 땅에서
포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축복하신
선민을 다스리던
왕들의 비참한 역사의
비극적인 종말은,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선민인
우리에게
엄중한 경고가 되어야 한다.
다윗과 같이
단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거나,
어떤 정직한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느 정도 선하고 의롭게 되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께 참여하여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권리를 누림으로써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가 될 자격을
얻게 하지 못한다.
신약의 이기는 이들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으로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
곧 타고난 사람을 향하여
죽고,
부활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한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하시고
생명 주시는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그리스도를
살고 확대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움직이고 행동하며,
그 영을 따라
그 영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신약의 추구자들인
우리에게
필수적인데,
이것은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경주에서
승리자가 되어
교회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누리고,
왕국 시대에는
가장 충만하게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보상을
얻기 위한 것이다.

모든 왕들은
그들이
자신의 유익과 번영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위하여
다스리는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위하여
임마누엘의 땅을 지킬
한 나라와
그리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모셔 오는
계보의 혈통을 이어 갈
한 백성을
얻으셔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왕들은
나실인이 되어
하나님을
자신들의 머리와 권위로 삼고,
그분의 종으로서
그분께 복종하며,
세상의 모든 쾌락(포도주)을
버려야 했다.
그러나 왕들 가운데
가장 탁월했던
다윗을 포함하여
모든 왕이
이 점에서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그리하여 왕들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그분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하늘에 속한 대제사장이시고,
하늘에 속한 사역자이시며,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고,
신약의 집행자이시다.
그러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단지 하늘들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영 안에서도
운행하시어
하늘을
우리에게로 이끄시며
우리를
하늘과 연결하고 계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연합된 영 안에서
머물고 살며
행하고 처신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확대하며,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
이와 같은 생활의
결과가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를
영 안에서 살고,
영 안에서 행하며,
영을 따라 모든 것을 하도록
간청하며 분발시킨다.
예를 들어,
우리의 머리 모양이라든가,
우리의 배우자나 자녀와
대화하는 방식도
영을 따른 것이어야 한다.
복음 전파를 위해
다른 이들을 방문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 따라서가 아니라
연합된 영을 따라서
그들을 접촉해야 한다.
더욱이 교회 집회에서
우리의 찬송과 기도와 신언은 모두
영 안에 있고
영을 따른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포함한
복합되신
이 영에 관한
성경의 다섯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 요한복음 7장 39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은
영원 안에 계셨고
또 창세기 1장 2절에 언급되셨지만,
요한복음 7장 39절에서
이 영은
완결되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영광스럽게 되셨고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

둘째, 고린도전서 15장 45절 하반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라고 말한다.
신성하시고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이 영께서
우리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오시고
우리의 거듭난 영과
섞이셔서(연합되셔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을
그 섞인 영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

셋째,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즉 부활 안에서
그 영이 되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 영에 의해
그분의 형상 안으로
변형된다.

넷째, 요한계시록은
‘일곱 영’을 말한다.
생명 주시는 영,
곧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신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강화되어
일곱 영이 되셨다.

다섯째, 출애굽기 30장
23절부터 25절까지는
하나님의 영을 상징하는
올리브기름과
네 향료,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능과
그분의 부활과 그 능력을
각각 나타내는
몰약, 육계, 창포, 계피로 복합된
그 거룩한 관유에 대해
말한다.
그 관유는
그 복합적인
기름 바르시는 영을
나타낸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그 섞인 영,
곧 우리의 영과 연합되신
그 영께
우리의 완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이 섞인 영을 따라
살고
행하며
처신해야(우리의 존재를 가져야) 한다.

1일

빌 3:13 형제님들, 나는 아직 내가 붙잡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일만을 합니다. 즉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함으로써,

롬 8:4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사람이자 총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많은 이교도 여자들을 취하고,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며, 백성이 우상에 경배하는 장소들을 세웠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와 총명을 잃어버렸다. 솔로몬은 매우 어리석게 되었고 자신의 왕국에 손상을 입혔다.

그러한 역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매우 엄격하고 상세하게 다루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씨를 뿌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뿌린 것의 산출물을 거두게 될 것이다. 아주 조금만 부주의하더라도 거기에는 산출되는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랑이 많으시고 친절하시며 은혜와 용서가 충만하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며, 세세한 방식으로 의로우시다. 만일 우리가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만드실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실 것이다. 우리의 행함과 행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것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잘못된 말을 하거나 무익한 말을 하지 않도록 공과를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백성이며, 심지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백성이다. 우리는 심지어 작은 일들에서도 주의하기를 배워야 한다.

오늘날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왕들이다. 우리의 뜻과 갈망과 성격과 습관과 행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데 영향을 준다. 우리는 왕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서 끊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상의 누림에서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왕의 직분을 잃게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작은 일에서도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솔로몬의 타락은 많은 이방 여자를 사랑하여 정욕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아내와 후궁을 취한 점에서 솔로몬은 매우 어리석었다.

솔로몬은 또한 자신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신 하나님을 저버리고(왕상 11:9) 자기가 사랑한 이방 여자들의 꾐에 빠져 이방 우상들을 숭배하였기 때문에(4-8절) 타락하였다.

솔로몬이 타락한 결과로 하나님의 징벌이 임했다.

하나님은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키시어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셨고(왕상 11:14-22), 시리아 왕 르손을 일으키시어 솔로몬의 또 다른 대적자가 되게 하셨다(23-25절). 그리고 솔로몬의 신하 여로보암을 일으키시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게 하셨다(26-40절).

솔로몬은 온 이스라엘을 사십 년간 다스린 후에 어둡고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죽었다(왕상 11:41-43). 그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떨어졌으며(마 6:29, 벧전 1:24) 그의 찬란한 업적은 그가 말하였던 것처럼 ‘허무 중의 허무’(전 1:2)가 되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최고 수준으로 누리는 데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영적인 생명이 매우 조금 성숙하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제한 없이 성적 방종에 빠져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좋은 땅을 누리는 것에서 끊어졌다. 이 때문에 그와 그의 후손은 그들의 왕국의 구십 퍼센트 이상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의 선민은 여러 세대에 걸쳐 그들 가운데 발생한 분열과 혼돈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잃어버렸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외국 땅에서 포로가 되어 버렸다. 솔로몬의 실패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는 지금도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경고와 경종이 되어야 하는지!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정욕의 문제에 있어서 조금만 실수를 해도 우리는 교회생활에 손상을 입힐 수 있고 교회생활의 찬란한 방면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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