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의 내재적인 건축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부활을 포함하는) 승천 안에서,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 안에서 조성된 (사도들과 신언자들과 복음 전파자들과 목자들 및 교사들과 같은) 은사 있는 사람들을 그분의 몸에게 주시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
에베소서 4장 8절은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이들을 포로로 이끌어 가셨다가, 사람들에게 은사들로 주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시편 68편 18절에서 인용한 ‘높은 곳’은 시온산(시 68:15-16)을 가리키며, 시온산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왕상 8:30) 셋째 하늘을 상징한다.
시편 68편은 언약궤가 승리를 얻은 후에, 하나님께서 바로 언약궤 안에서 시온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암시한다(민 10:35).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승리를 얻으시고 당당하게 하늘로 올라가셨는지를 묘사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우주적인 왕래를 통하여 그리고 그분의 승천 안에서, 사탄에게 사로잡혔던 이들을 그분의 포로로 이끌어 가셨다가 그분의 몸에게 은사들이 되게 하셨다.
구속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받기 전에는 사탄에게 포로가 되어 있었다.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을 포로로 이끌어 가셨다. 즉 사탄에게 포로가 된 상태에 있던 그들을 구출하셔서 자신에게 이끄셨다.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패배한 원수들의 행렬 안에 있는 포로들을 하늘들로 이끌어 가셨고, 그분의 몸에게 은사들이 되게 하셨다.
지금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패배한 원수들인 그들에 대한 승리를 축하하시며, 그분의 몸을 건축하는 그분의 사역을 위해 움직이실 때 그들을 개선 행진 가운데 있는 포로들로 이끌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더 많이 오르락내리락하시면서 우리를 사로잡으시고 정복하실수록, 그분은 더욱더 우리를 그분 자신으로 채워 주시고 조성하시어 그분의 몸에게 은사가 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의 내재적인 건축은 은사 있는 사람들이 신성한 분배 안에서 성도들을 온전하게 함으로써 모든 성도가 신약 사역의 일, 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에베소서 4장 12절의 ‘온전하게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또한 ‘완전하게 하여’, ‘장비시켜’, ‘기능들을 주어’를 의미한다. 온전하게 되는 길은 생명이 자라고 기능이 노련하게 되는 것이다.
은사 있는 사람들은 성도들이 생명 안에서 자라도록 생명나무에 따라 성도들에게 생명 공급을 주어 양육함으로써 그들을 온전하게 한다.
은사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성도들이 (그들의 분량에 따라) 할 수 있도록 그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들이 직접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한다.
사도들은 교회들을 방문하고, 교회들에게 서신을 쓰며, 그들의 동역자들이 어떤 권역에 머물면서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도록 안배함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신언자들은 성도들에게 주님을 사람들 안으로 말하는 것을 가르치고, 집회에서 말함으로 본을 세우며, 성도들이 아침마다 부흥되고 날마다 이겨서 신언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줌으로써 그들을 온전하게 한다.
복음 전파자들은 성도들을 분발시켜 복음 전파의 영 안에서 불타게 하고,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그들을 훈련시키고, 경륜적인 영의 능력으로 장비되도록 그들을 도우며, 죄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본을 세움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목자-교사들은 목양함으로써, 즉 어린 성도들을 먹이고 양육하며 또한 성장하는 성도들을 가르침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이러한 온전하게 함의 결과로 우리 모두는 믿음에서의 하나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서의 하나에 이르고, 충분히 성장한 사람에 이르며,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온전하게 함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함으로, 온갖 가르침의 바람에 밀려다니거나 파도에 요동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가르침은 사람들의 속임수이며, 사탄적인 오류의 체계에 빠지게 하는 간교한 술수이다.
목양과 가르침은 승천하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몸의 건축을 위하여 교회들에게 주신 은사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기능들이다. 이에 더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또한 사도들에게, 각 지방에 있는 모든 교회들 안에 장로들을 선택하여 세워서 그분의 양 떼를 돌보는 그분의 목양을 수행하게 하고 가르치기를 잘하여 목양을 강화하고 목양의 목표를 이루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의 내재적인 건축은 모든 지체가 머리이신 분 안으로, 그리고 머리이신 분으로부터 직접 건축함으로 이루어진다.
건축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관한 신성한 진리를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께 복종해야 하고, 그분의 신성한 생명이 우리의 모든 속부분 안으로 확장되고 증가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 있는 ‘머리이신 분’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이 머리이신 분 아래 있는 몸 안의 지체로서 자라는 것이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랄 뿐 아니라 그분의 몸 안에서도 자란다.
머리이신 분으로부터, 신성한 분배 안에서, 온몸은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긴밀히 함께 결합되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짜이고 엮이게 된다.
우리가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랄 때, 머리이신 분으로부터 그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많은 기능들을 산출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는 생명의 성장을 통해 어느 정도의 분량을 얻으며,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과 건축을 위하여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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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에베소서 4장 15절에 언급된 ‘참된 것을 붙잡고’는 14절에 있는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교한 술수에 대조된다. 사람들의 속임수 안에서 가르침의 바람에 밀려다니다가 오류의 체계에 빠지는 것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지 못하게 한다. 이 절의 ‘참된 것’은 진리를 말한다. 진리의 첫 번째 항목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인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다. 하나님은 우주 가운데서 영원한 계획을 갖고 계시며, 그 계획은 그분의 경륜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심으로써 한 단체적인 표현을 가지시는 것이다. 두 번째 항목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이다. 세 번째 항목은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그분의 몸인 교회이다. 이 세 가지가 참된 것이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이러한 참된 것을 붙잡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 것에서 우리를 끊어지게 하거나 분리시키는 모든 가르침과 말을 거절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을 때, 우리는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랄 것이다(엡 4:15).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우리의 생명의 성장이 반드시 머리 아래 있는 몸 안의 지체들의 성장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옷 입는 방식이나 머리를 빗는 방식이나 물건을 사는 방식이나 말하는 방식과 같은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취해야 하고 그분의 머리의 권위 아래 복종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분 안으로 자랄 것이고, 그분께서 우리의 속부분, 곧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모두 차지하시도록 허락해 드릴 것이다. 이렇게 그분은 점차적으로 우리 안에서 증가하시고 자라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께 모든 일에서 머리가 되시도록 허락해 드리고 또한 모든 일에서 그분 안으로 자랄 때, 우리는 그분의 생명의 풍성을 공급받음으로써 그분에게서 무언가를 받아 몸의 다른 지체들 안으로 전달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의 성장은 그분 안으로 자라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의 기능은 그분에게서 나온 것이다. 먼저 우리는 머리 안으로 자란다. 그런 다음에 몸을 건축하기 위하여 머리에게서 나온 것을 갖게 된다.
지체들인 우리 모두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음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한다(엡 4:15).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의 지체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실재를 붙잡는다. 즉,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을 붙잡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에서 우리 안에서 증가되시게 할 것이며,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랄 것이다. 이 절에 있는 ‘머리이신 분’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이 머리이신 분 아래 있는 몸 안의 지체로서 자라는 것이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랄 뿐 아니라 그분의 몸 안에서도 자란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랄 때, 머리이신 분으로부터 그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많은 기능들을 산출할 수 있다. 에베소서 4장 16절은 “그분으로부터 온몸은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입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우리 각 사람은 생명의 성장을 통해 어느 정도의 분량을 얻으며,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과 건축을 위하여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4일
모든 성도들이 건축하는 지체들이어야 한다. … 먼저 사도와 신언자와 복음 전파자와 목자 및 교사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이것은 그들이 성도들을 건축한다는 뜻이다. 그런 후 온전하게 된 성도들이 건축하는 지체들이 된다.
에베소서 4장 16절의 ‘각 마디’는 11절에 언급된 사람들처럼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가리키고, ‘그 풍성한 공급’은 특별한 공급, 곧 그리스도의 공급인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각 지체’라는 표현은 몸의 각 지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에게는 몸의 성장을 위해 기능을 발휘하는 각자의 분량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 자라는 것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증가하시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랑 안에서 몸이 스스로 건축된다.
목양과 가르침은 승천하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몸의 건축을 위하여 교회들에게 주신 은사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기능들이다.
네 종류의 은사 있는 사람들 가운데 처음 셋인 사도들, 신언자들, 복음 전파자들의 사역은 목양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21장 15절부터 17절까지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신 것에 의해 확증된다. 목양이 없이는 사도들과 신언자들과 복음 전파자들이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요한복음 21장 15절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여, 이 사람들보다 그대가 나를 더 사랑하십니까?’ …”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주님, …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분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시키시면서 그에게 그분의 양들을 목양하고 먹이라고 명령하셨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내적 존재와 실지 인격인 우리 혼의 목자와 감독이시라고 말했다(벧전 2:25). 그런 다음에 베드로전서 5장 1절과 2절에서 장로들에게 그들의 의무가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따라’는 우리가 하나님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이해와 신학과 가르침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사람들을 목양할 때는 하나님을 살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과 하나일 때 우리는 하나님이 된다. 그러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있게 되고, 다른 이들을 목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다.
은사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요 기능으로 목양하는 것에 더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또한 사도들에게, 각 지방에 있는 모든 교회들 안에 장로들(감독들)을 선택하여 세워서 그분의 양 떼를 돌보는 그분의 목양을 수행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딤전 3:1-7, 5:17상). 교회의 머리께서 은사 있는 많은 사람을 주셔서 그들이 그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목양함으로써 기능을 발휘하게 하셨지만, 몸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표현된다. 몸은 우주적이며 추상적이지만, 교회들은 어떤 곳에 위치해 있고 실질적이다. 각 지방에 있는 목자들은 훨씬 더 실지적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우주적인 목자들인 사도들에게 각 지방에 몇몇 장로들을 임명하여 그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돌보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교회들 안의 장로들의 의무는 그리스도께서 하셨고 은사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목양하는 것이다.
장로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복음서에서 가르치신 것과 은사 있는 사람들이 서신서들에서 가르친 것에 따라 목양을 강화하고 목양의 목표를 이루도록 가르칠 의무가 있다(딤전 3:2하, 5:17하). 디모데전서 3장 2절은 장로들이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습관임을 의미한다. 어떤 장로들은 조용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들은 가르치기를 잘하기 위해 특별히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또한 가르치기를 잘한다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헛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의 진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3일
에베소서 4장 11절은 은사 있는 사람들을 몸에게 주셨다고 말한다. 이 절에 있는 은사 있는 많은 사람에게는 오직 한 사역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공급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 경륜 안에 있는 유일한 사역이다.
문법적인 구조로 볼 때,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과 ‘그 사역의 일’은 동격이다. 이것은 이 두 가지가 같은 것을 말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사역의 일은 몸을 건축하는 것이다. 사도와 신언자와 복음 전파자와 목자 및 교사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한다.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목적을 위한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있는 은사 있는 사람들의 사역의 일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건축은 은사 있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직접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은사 있는 사람들이 온전하게 한 성도들로 말미암아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유일한 일은 주로 은사 있는 이들만 감당하는 책임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다. 인도하는 사도들을 포함한 은사 있는 이들과, 가장 작은 지체까지도 포함한 모든 믿는 이들이 함께 몸을 건축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은사 있는 이들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있다. 은사 있는 이들은 모든 성도들이 신약 사역의 일, 즉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신성한 분배를 통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은사 있는 사람들은 생명 공급을 주는 생명나무에 따라 성도들을 보양하여 생명이 자라게 함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창 2:9, 고전 3:2, 6). 은사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성도들도 할 수 있도록 그들을 온전하게 함으로써 성도들이 직접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한다. 사도들은 교회들을 방문하고, 교회들에게 서신을 쓰고, 그들의 동역자들을 어떤 곳에 머물도록 안배하여 그곳의 성도들을 온전하게 함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신언자들은 성도들에게 주님을 사람들 안으로 말해 내는 것을 가르치고, 집회에서 말함으로 본을 세우며, 매일 아침 부흥되고 매일 승리함으로 신언하는 삶을 살도록 도움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복음 전파자들은 복음 전파의 영 안에서 불타도록 성도들을 분발시키고, 복음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훈련시키고, 성도들이 경륜적인 영의 능력으로 장비되도록 돕고, 죄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본을 세움으로써(딤후 4:5)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목자들 및 교사들은 목양하고, 곧 어린 성도들을 먹이며 보양하고, 자라나는 성도들을 가르침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이렇게 온전하게 한 결과로 우리 모두는 믿음에서의 하나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서의 하나에 이르고, 또 충분히 성장한 사람에 이르며,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온전하게 함은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 온갖 가르침의 바람에 밀려다니거나 파도에 요동하지 않게 한다. 이 가르침은 사람들의 속임수이며, 오류의 체계에 빠지게 하는 간교한 술수이다(엡 4:14).
온전하게 되는 길은 생명이 자라고 기능이 노련하게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온전하게’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완전하게, 장비되게, 갖추어지게’라는 의미도 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은 그를 완전하게 하고, 장비되게 하며, 갖추어지게 하는 것이다. 오직 생명이 성장할 때에만 우리는 완전하게 될 수 있다. 우리가 성숙하게 되기 전에는 완전하게 될 수 없을 것이다. 성도들은 신성한 생명이 자라도록 먹어야 하고, 합당한 기술을 가지고 기능을 발휘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2일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사로잡힌 이들’은 구속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받기 전에는 사탄에게 포로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다.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을 포로로 이끌어 가셨다. 즉 사탄에게 포로가 된 상태에 있던 그들을 구출하셔서 자신에게 이끄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으로 그들을 사로잡았던 사탄을 정복하시고 이기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확대역 신약성경(The Amplified New Testament)〉은 ‘그분은 … 사로잡힌 이들을 포로로 이끌어 가셨다가’를 ‘그분께서 … 패배한 원수들의 행렬을 이끌고 가셨다가’로 번역한다. ‘패배한 원수들’은 사탄과 그의 천사들과 죄인들인 우리를 가리키고,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죄와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 그리스도는 그분께 패배한 원수들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축하하고 계시며, 그분의 몸을 건축하는 그분의 사역을 위해 움직이실 때 그들을 개선 행진 가운데 있는 포로들로 이끌고 계신다.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은사들’이란 여러 가지 봉사를 위한 능력이나 역량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1절에 있는 은사 있는 사람들, 곧 사도들, 신언자들, 복음 전파자들, 목자들 및 교사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탄과 죽음을 정복하시고 죄인들을 사탄과 죽음에서 구출하셨다. 그 후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구출된 죄인들을 그분의 부활 생명으로 이와 같은 은사들로 만드셨고, 몸을 건축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그분의 몸에게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높은 곳 곧 셋째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그것은 그분의 여정의 마지막이 아니었다. 올라가신 후에 그분은 우리 영 안으로 내려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내려오시고 올라가시면서 여행하시고, 은혜로운 방문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시다. 오늘 그리스도는 여전히 여행하고 계신다. 즉, 그분은 아직도 올라가고 내려오고 계신다. 그러나 이제 그분의 여행은 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는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다. 우리가 내려가 있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가신다. 하루 중에도 많은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하늘로 이끌려 간다.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가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시고 올라가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올라가시고 내려오신다.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신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분은 하늘에 계시는가, 땅에 계시는가? 그분께서 땅에 계신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분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말하면, 즉시 땅에 계신다고 느낄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는 모든 곳에 계신다. 에베소서 4장 9절과 10절에 따르면, 그분은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내려오시고 올라가셨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우주 안의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셨지만 여러분은 충만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는 그분의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을 통해서 우리를 그분 자신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에 의해서 우리를 몸을 위한 은사들로 조성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더 내려오시고 올라가실수록 우리는 더욱더 은사들이 된다. 그리스도는 믿는 이들 안에서 내려오시고 올라가실 때 그들을 사로잡으시고 정복하시며 그분의 몸을 위한 은사들로 조성하신다. 그리스도의 여행의 결과로 그들은 유용한 은사들이 된다.
우리가 몸을 위한 은사로서 기능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께 정복당하고 굴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기꺼이 그리스도께 사로잡히기 전에는 그분께서 우리를 몸을 위한 은사로 만드실 근거와 입지를 가지실 수 없다. 우리는 깊은 속에서부터 주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는 당신께 항복합니다. 저는 당신께 패배당했습니다. 저는 당신께 사로잡혔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 철저히 패배당하고, 사로잡히고, 얻어지고, 점령당해야 한다. 우리가 기꺼이 그리스도께 정복당하고 사로잡힐 때, 그리스도께 우리를 그분의 몸을 위한 은사들로 세우실 입지를 드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더 올라가시고 내려오실수록, 우리를 더 사로잡으시고 정복하실수록, 그분은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더 충만하게 하시어 그분의 몸을 위한 은사들로 조성하실 것이다.
신언노트, 2022 11 20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됨
스스로를 사랑으로 건축하는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
에베소서 4장
8절부터 10절까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가
모든 하늘들 위로
올라가셔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셨고
사로잡힌 이들을
포로로 이끌어 가신 분이심을
본다.
8절은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이들을
포로로 이끌어 가셨다가,
사람들에게
은사들로 주셨습니다.’ ”
라고 말한다.
시편 68편 18절에서 인용한
‘높은 곳’은
시온산을 가리키며,
시온산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셋째 하늘을 상징한다.
시편 68편은
언약궤가 승리를 얻은 후에,
하나님께서 바로
언약궤 안에서
시온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편 68편 1절은
민수기 10장 35절의 인용이다.
이것은
시편 68편의 배경이
언약궤를 중심으로 하는
성막 안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예표인 언약궤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얻었다.
결국 이 언약궤는
시온산 꼭대기로
당당하게 올라갔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승리를 얻으셨고
의기양양하게 하늘로 올라가셨는지를
묘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들에서 땅으로,
땅에서 음부로,
음부에서 다시 땅으로,
땅에서 셋째 하늘로
여행하셨다.
바로 이러한 우주적인 여행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몸에게
은사들을(선물들을) 주셨다.
바울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어떻게 다소의 사울처럼
죄 많고
마귀적으로
그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에게
한 은사가 될 수 있었는가?
오직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를 여행하심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들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
그분께서는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나사렛의 작은 마을에서
약 삼십 년을 사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음부에 내려가셨고
삼 일 동안 음부를 둘러보셨다.
그러고 나서 부활의 날에
음부에서 나오셨다.
그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실 때까지
사십 일이라는 기간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사십 일의 끝에서
그분께서는
하늘들로 올라가셨다.
만일 우리에게
시편 68편이 없이
에베소서 4장만 있었다면,
아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들로 올라가셨을 때
포로들의 행렬을
이끌고 가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정복자로서
포로들의 행렬을 이끌고
하늘들에 들어가셨다.
그분께서는
이 포로들을
아버지께 바치셨고,
아버지께서는
이 포로들을
그리스도께 돌려주셨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포로를
사람들에게
은사들로 주셨다.
이러한 은사들 중 하나가
다소의 사울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은사들을 주신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우주를 여행하심으로써
수많은 죄인들을
모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을 사로잡았던
사탄을 패배시키셨다.
한때 우리는
사탄과 죄와 죽음에 의해서
사로잡혔던
포로들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음부로,
음부에서 다시 땅으로,
땅에서 다시 하늘로
여행하심으로써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를 얻으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강탈했고
자신의 죽음의 세력 아래 붙잡아 두었던
사탄을 정복하셨다.
우리는
사탄과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고
지금은
그리스도의 포로들이다.
모든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셋째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포로들의 행렬을
이끌고 계셨다는 것과
아버지께
이 포로들을 바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어떠한 승리에 찬
축하 행진이었겠는가!
그분께 사로잡힌 이들로서
우리는
그분에게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그분께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분을 믿을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는
그분의 행렬 안에 있으며,
그분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사로잡혔을 뿐 아니라,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 아버지께
드리셨다(선물하셨다).
그 아버지께서는
큰 감탄으로
(위대한 감상으로)
우리를 보신 후에
그 아들에게
선물들로
돌려주셨다.
이 방식으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여행을 통하여
그 몸에게
선물들이 되었다.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사로잡힌 이들’은
구속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받기 전에는
사탄에게
포로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다.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을
포로로 이끌어 가셨다.
즉 사탄에게
포로가 된 상태에 있던
그들을 구출하셔서
자신에게 이끄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으로
그들을 사로잡았던
사탄을
정복하셨고
이기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확대역 신약성경
(The Amplified New Testament)〉은
‘그분은 …
사로잡힌 이들을
포로로 이끌어 가셨다가’를
‘그분께서 …
패배한 원수들의 행렬을
이끌고 가셨다가’로
번역한다.
‘패배한 원수들’은
사탄과
그의 천사들과
그 죄인들인 우리를
가리키고,
다시 한번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죄와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 패배한 원수들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축하하고 계시며,
그분의 몸을 건축하는
그분의 사역을 위해
움직이실 때
그들을
개선 행진 가운데 있는 포로들로
이끌고 계신다.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은사들’이란
여러 가지 봉사를 위한
능력이나 역량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1절에 있는
은사 있는 사람들,
곧 사도들, 신언자들,
복음 전파자들, 목자들 및 교사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탄과 죽음을 정복하셨고
죄인들을
사탄과 죽음에서 구출하셨다.
그 후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출된 죄인들을
그분의 부활 생명으로
이와 같은 은사들로 만드셨고,
몸을 건축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그분의 몸에게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높은 곳 곧 셋째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그것은
그분의 여정의 마지막이 아니었다.
올라가신 후에
그분께서는
우리 영 안으로 내려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내려오시고 올라가시면서
여행하시고,
은혜로운 방문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시다.
오늘 그리스도는 여전히
여행하고 계신다.
즉, 그분은 아직도
올라가고 내려오고 계신다.
그러나 이제 그분의 여행은 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는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다.
우리가 내려가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가신다.
하루 중에도 많은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하늘로 이끌려 간다.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가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시고 또 올라가신다는 것이다.
그분께서
올라가시고 또 내려오신다.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신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분께서
하늘에 계시는가,
땅에 계시는가?
그분께서
땅에 계신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분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말하면,
즉시 땅에 계신다고
느낄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곳에 계신다.
에베소서 4장
9절과 10절에 따르면,
그분은
모든 것들을 가득 채우시려고
내려오셨고 또 올라가셨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우주 안의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셨지만
여러분은
충만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을 통해서
우리를
그분 자신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에 의해서
우리를
몸을 위한 은사들로
조성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내려오시고 또 올라가실수록
우리는
더 많이 선물들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 안에서
내려오시고 또 올라가실 때
그들을
사로잡으시고 정복하시며
그분의 몸을 위한 은사들로
조성하신다.
그리스도의 여행의 한 결과로
그들은
유용한 선물들이 된다.
우리가
몸을 위한 은사로서
기능을 발휘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께
정복당하고
굴복되어야 한다.
우리가 기꺼이
그리스도께 사로잡히기 전에는
그분께서
우리를
몸을 위한 은사로 만드실
근거와 입지를
가지실 수 없다.
우리는
깊은 속에서부터
주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는
당신께 항복합니다.
저는
당신께 패배당했습니다.
저는
당신께 사로잡혔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 철저히
패배당하고, 사로잡히고,
얻어지고, 점령당해야 한다.
우리가 기꺼이
그리스도께
정복당하고 사로잡힐 때,
그리스도께
우리를
그분의 몸을 위한 은사들로
세우실 입지를
드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더 많이 올라가시고 또 내려오실수록,
우리를
더 많이 사로잡으시고 정복하실수록,
그분께서는
그분 자신으로
우리를 더 충만하게 하시어
그분의 몸을 위한 은사들로
조성하실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1절은
은사 있는 사람들을
몸에게 주셨다고
말한다.
이 절에 있는
은사 있는 많은 사람에게는
오직 한 사역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공급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 경륜 안에 있는
유일한 사역이다.
문법적인 구조로 볼 때,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과
‘그 사역의 일’은
동격이다.
이것은
이 두 가지가
같은 것을 말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사역의 일은
몸을 건축하는 것이다.
사도와 신언자와
복음 전파자와 목자 및 교사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한다.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목적을 위한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있는
은사 있는 사람들의
사역의 일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건축은
은사 있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직접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은사 있는 사람들이
온전하게 한 성도들로 말미암아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유일한 일은
주로 은사 있는 이들만 감당하는 책임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다.
인도하는 사도들을 포함한
은사 있는 이들과,
가장 작은 지체까지도 포함한
모든 믿는 이들이 함께
몸을 건축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은사 있는 이들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 있다.
은사 있는 이들은
모든 성도들이
신약 사역의 일,
즉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신성한 분배를 통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은사 있는 사람들은
생명 공급을 주는
생명나무에 따라
성도들을 보양하여
생명이 자라게 함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은사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성도들도 할 수 있도록
그들을 온전하게 함으로써
성도들이 직접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한다.
사도들은
교회들을 방문하고,
교회들에게 서신을 쓰고,
그들의 동역자들을
어떤 곳에 머물도록 안배하여
그곳의 성도들을 온전하게 함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신언자들은
성도들에게
주님을
사람들 안으로 말해 내는 것을
가르치고,
집회에서 말함으로
본을 세우며,
매일 아침 부흥되고
매일 승리함으로
신언하는 삶을 살도록
도움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복음 전파자들은
복음 전파의 영 안에서 불타도록
성도들을 분발시키고,
복음 진리를
그들에게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훈련시키고,
성도들이
경륜적인 영의 능력으로 장비되도록
돕고,
죄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본을 세움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목자들 및 교사들은
목양하고,
곧 어린 성도들을 먹이며 보양하고,
자라나는 성도들을 가르침으로써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이렇게 온전하게 한 결과로
우리 모두는
믿음에서의 하나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서의 하나에 이르고,
또 충분히 성장한 사람에 이르며,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온전하게 함은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
온갖 가르침의 바람에 밀려다니거나
파도에 요동하지 않게 한다.
이 가르침은
사람들의 속임수이며,
오류의 체계에 빠지게 하는
간교한 술수이다.
온전하게 되는 길은
생명이 자라고
기능이 노련하게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온전하게’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완전하게, 장비되게, 갖추어지게’라는
의미도 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은
그를
완전하게 하고,
장비되게 하며,
갖추어지게 하는 것이다.
오직 생명이 성장할 때에만
우리는
완전하게 될 수 있다.
우리가
성숙하게 되기 전에는
완전하게 될 수 없을 것이다.
성도들은
신성한 생명이 자라도록
먹어야 하고,
합당한 기술을 가지고
기능을 발휘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건축하는 지체들이어야 한다.
먼저 사도와 신언자와
복음 전파자와 목자 및 교사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한다.
이것은
그들이
성도들을 건축한다는 뜻이다.
그런 후
온전하게 된 성도들이
건축하는 지체들이 된다.
에베소서 4장 16절의
‘각 마디’는
11절에 언급된 사람들처럼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가리키고,
‘그 풍성한 공급’은
특별한 공급,
곧 그리스도의 공급인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각 지체’라는 표현은
몸의 각 지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에게는
몸의 성장을 위해
기능을 발휘하는
각자의 분량이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 자라는 것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증가하시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랑 안에서
몸이 스스로 건축된다.
목양과 가르침은
승천하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몸의 건축을 위하여
교회들에게 주신
은사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기능들이다.
네 종류의 은사 있는 사람들 가운데
처음 셋인
사도들, 신언자들, 복음 전파자들의 사역은
목양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21장
15절부터 17절까지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신 것에 의해
확증된다.
목양이 없이는
사도들과 신언자들과 복음 전파자들이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요한복음 21장 15절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여,
이 사람들보다
그대가 나를 더 사랑하십니까?’ …”
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주님,
…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분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시키시면서
그에게
그분의 양들을
목양하고 먹이라고
명령하셨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내적 존재와 실지 인격인
우리 혼의
목자와 감독이시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에
베드로전서 5장
1절과 2절에서
장로들에게
그들의 의무가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따라’는
우리가
하나님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의 이해와 신학과 가르침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사람들을 목양할 때
하나님을 살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과 하나일 때
우리는 하나님이 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가지고,
우리가
다른 이들을 목양함 안에서
하나님이다.
은사 있는 사람들의
주요 기능에 의한
목양함에 더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사도들에게,
모든 지방의 교회들 안에
장로들(감독들)을
지명해서
그분의 양 떼를
그분께서 목양하심을
수행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교회의 머리께서
은사 있는 많은 사람을 주셔서
그들이
그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해
목양함으로써 기능을 발휘하게 하셨지만,
그 몸은
그 지방의 교회들 안에서
표현된다.
몸은
우주적이며 추상적이지만,
교회들은
어떤 곳에 위치해 있고 실질적이다.
지방의 목자들은
더 실지적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사도들,
곧 그 우주적인 목자들에게
몇몇의 지방의 장로들을 임명하여
그 지방에 위치한 교회들을
돌보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 교회들 안의 장로들의 의무는
그리스도께서 하셨고
또 은사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목양하는 것이다.
그 장로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사복음서에서 가르치신 것과
은사 있는 사람들이
서신서들에서 가르친 것에 따라
목양을 강화하고
그것의 목표를 이루도록
가르칠 의무가 있다.
디모데전서 3장 2절은
장로들이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습관임을
의미한다.
어떤 장로들은
조용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들은
가르치기를 잘하기 위해
특별히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또한 가르치기를 잘한다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헛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의 진리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목양과 가르침은
승천하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몸의 건축을 위하여
교회들에게 주신
은사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기능들이다.
이에 더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또한
사도들에게,
각 지방에 있는 모든 교회들 안에
장로들을 선택하여 세워서
그분의 양 떼를 돌보는
그분의 목양을 수행하게 하고
가르치기를 잘하여
목양을 강화하고
목양의 목표를 이루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 언급된
‘참된 것을 붙잡고’는
14절에 있는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교한 술수에
대조된다.
사람들의 속임수 안에서
가르침의 바람에 밀려다니다가
오류의 체계에 빠지는 것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지 못하게 한다.
이 절의 ‘참된 것’은
진리를 말한다.
진리의 첫 번째 항목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인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가운데서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은
그분의 경륜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그분께 선택받은 사람들 안으로
분배하심으로써
한 단체적인 표현을
가지시는 것이다.
두 번째 항목은
모든 것을 포함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세 번째 항목은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그분의 몸인
교회이다.
이 세 가지가
참된 것이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이러한 참된 것을 붙잡고
그리스도 안으로 자라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 것에서
우리를
끊어지게 하거나
분리시키는
모든 가르침과 말을
거절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을 때,
우리는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우리의 생명의 성장이 반드시
머리 아래 있는
몸 안의 지체들의 성장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옷 입는 방식이나
머리를 빗는 방식이나
물건을 사는 방식이나
말하는 방식과 같은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취해야 하고
그분의 머리의 권위 아래
복종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분 안으로 자랄 것이고,
그분께서
우리의 속부분,
곧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모두 차지하시도록
허락해 드릴 것이다.
이렇게 그분께서
점차적으로
우리 안에서
증가하시고
자라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께
모든 일에서
머리가 되시도록
허락해 드리고
또한 모든 일에서
그분 안으로 자랄 때,
우리는
그분의 생명의 풍성을
공급받음으로써
그분에게서
무언가를 받아
몸의 다른 지체들 안으로
전달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의 성장은
그분 안으로 자라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의 기능은
그분에게서 나온 것이다.
먼저 우리는
머리 안으로 자란다.
그런 다음에
몸을 건축하기 위하여
머리에게서 나온 것을
가지게 된다.
지체들인 우리 모두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음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의 지체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가
실재를 붙잡는다.
즉,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을
붙잡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에서
우리 안에서
증가되시게 할 것이며,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랄 것이다.
이 절에 있는
‘머리이신 분’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이
머리이신 분 아래 있는
몸 안의 지체로서
자라는 것이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랄 뿐 아니라
그분의 몸 안에서도 자란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랄 때,
머리이신 분으로부터
그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많은 기능들을
산출할 수 있다.
에베소서 4장 16절은
“그분으로부터
온몸은
그 풍성한 공급을 해 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가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입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우리 각 사람은
생명의 성장을 통해
어느 정도의 분량을 얻으며,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과 건축을 위하여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의
내재적인 건축은
모든 지체가
머리이신 분 안으로,
그리고 머리이신 분으로부터
직접 건축함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
곧 머리이신 분께
복종해야 하고,
그분의 신성한 생명이
우리의 모든 속부분 안으로
확장되고
증가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1일
에베소서 4장 8절부터 10절까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가 모든 하늘들 위로 올라가시어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포로로 이끌어 가신 분이심을 본다. 8절은 “성경은 말합니다.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이들을 포로로 이끌어 가셨다가, 사람들에게 은사들로 주셨습니다.’ ”라고 말한다. 시편 68편 18절에서 인용한 ‘높은 곳’은 시온산(시 68:15-16)을 가리키며, 시온산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왕상 8:30) 셋째 하늘을 상징한다. 시편 68편은 언약궤가 승리를 얻은 후에, 하나님께서 바로 언약궤 안에서 시온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편 68편 1절은 민수기 10장 35절의 인용이다. 이것은 시편 68편의 배경이 언약궤를 중심으로 하는 성막 안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예표인 언약궤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얻었다. 결국 이 언약궤는 시온산 꼭대기로 당당하게 올라갔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승리를 얻으시고 당당하게 하늘로 올라가셨는지를 묘사한다.
그리스도는 하늘들에서 땅으로, 땅에서 음부로, 음부에서 다시 땅으로, 땅에서 셋째 하늘로 여행하셨다. 바로 이러한 우주적인 여행에 의하여 그리스도는 몸에게 은사들을 주셨다.
바울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어떻게 다소의 사울처럼 죄가 있고 마귀적으로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에게 은사가 될 수 있었는가? 오직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를 여행하심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하늘들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 그분은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나사렛의 작은 마을에서 약 삼십 년을 사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음부에 내려가셨고 삼 일 동안 음부를 둘러보셨다. 그러고 나서 부활의 날에 음부에서 나오셨다. 그분은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실 때까지 사십 일이라는 기간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 사십 일의 끝에서 그분은 하늘들로 올라가셨다. 만일 우리에게 시편 68편이 없이 에베소서 4장만 있었다면, 아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들로 올라가셨을 때 포로들의 행렬을 이끌고 가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은 정복자로서 포로들의 행렬을 이끌고 하늘들에 들어가셨다. 그분은 이 포로들을 아버지께 바치셨고, 아버지는 이 포로들을 그리스도께 돌려주셨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는 이 모든 포로를 사람들에게 은사들로 주셨다. 이러한 은사들 중 하나가 다소의 사울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은사들을 주신 방법이다.
그리스도는 온 우주를 여행하심으로써 수많은 죄인들을 모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을 사로잡았던 사탄을 패배시키셨다. 한때 우리는 사탄과 죄와 죽음에 사로잡혀 갔던 포로들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음부로, 음부에서 다시 땅으로, 땅에서 다시 하늘로 여행하심으로써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를 얻으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강탈하고 자신의 죽음의 세력 아래 붙잡아 두었던 사탄을 정복하셨다. 우리는 사탄과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고 지금은 그리스도의 포로들이다. 모든 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셋째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포로들의 행렬을 이끌고 계셨다는 것과 아버지께 이 포로들을 바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어떠한 승리에 찬 축하 행진이었겠는가!
그분께 사로잡힌 이들로서 우리는 그분에게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그분께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분을 믿을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는 그분의 행렬 안에 있으며, 그분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사로잡혔을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은 우리를 아버지께 바치셨다. 아버지는 매우 감상하시면서 우리를 보신 후에 아들에게 은사들로 돌려주셨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여행을 통하여 몸에게 은사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