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eality
of the Body of Christ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하나님의 경륜의 최고봉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이다
― 롬 12:4-5, 고전 12:13, 27,
엡 1:22-23, 4:16, 골 1:18, 2:19.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시고
우리의 존재 안으로
조성되신
실재의 영이다
― 요 14:17, 15:26, 16:13, 요일 5:6,
엡 3:16-21, 4:4-6, 12, 16.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
(엡 4:21),
곧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생활의 실지 상태가
그분의 많은 지체들 안에
복사되어,
온전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의
단체적인 생활이 된 것이다
― 요 14:6상, 엡 4:20-24,
갈 2:20, 빌 1:8, 19-21상, 2:19-30.
예수님의 생활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는 삶이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활 안에 계셨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이다
― 엡 4:21.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생활의
반복인 생활만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생활이다.
우리는
첫 번째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의 본에 따라,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함으로써
신성한 생명을 사는
하나님-사람들이 되기 위해
주님에 의해
온전하게 되고 있다
― 마 11:29상, 17:5하, 벧전 2:21.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있는 생활은
예수님의 생활과 똑같다.
이 생활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몸의 지체들 안에서
다시 사시는 것이다
― 엡 4:21, 5:30, 고전 12:27.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되고 연합되어
단체적인 하나님-사람을
살아 내는 것이다
― 엡 4:4-6, 16, 21, 23-24.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 빌 1:19-21상.
주 예수님은
그분의 부활 안에서
많은 형제들을 산출하셨는데,
이들은
맏형님이신 그분과 함께
위대한 단체적인 하나님-사람이 된다.
이 우주적인 사람은
하나님이면서도 사람이고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이다
― 롬 8:29, 엡 2:15.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후에
생명 주시는 영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의 영과 연합되시어,
우리와 함께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사신다
― 고전 15:45하, 6:17.
이러한 종류의 생활이
주 예수님과 정확히 똑같은
우주적인 한 사람,
곧 신성한 생명에 의해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사는
사람을 산출한다
― 엡 4:21, 24, 요일 2:6, 3:1-2, 4:17.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인성과 신성,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의해
하나님과 연결되고 연합되며
하나님으로 함께 조성된
하나님-사람들이
사는 생활이다
― 요 14:20, 15:4,
엡 4:4-6, 16, 24, 빌 1:21상.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온전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의
단체적인 생활이다.
이들은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살며,
그들의 인간 미덕들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들을 표현한다
― 갈 2:20.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단체적인 생활이다
― 빌 3:10, 고전 12:12-13,
고후 4:10-12, 롬 8:13-14, 12:4-5.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하나님-사람의 생활은
십자가를 체험함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추구하는 생활이다
― 마 10:38, 16:24.
십자가는 반드시
우리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온
십자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도록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이 된
십자가이다
― 갈 6:14, 5:24.
십자가 아래 있는 생활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들과
우리의 일상생활의
모든 세세한 부분들을
만진다.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
― 빌 3:10, 요 11:25,
엡 1:19-20, 3:16, 아 2:8-13.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생활이다
― 빌 3:10.
십자가,
곧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길의
중심과 전부이다.
그리스도의 연장으로서
우리는 매일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살아야 한다
― 고전 15:31, 고후 4:10-11.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생활의
틀로 취함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사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오직 이런 종류의
단체적인 생활에 의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가질 수 있다
― 빌 3:10, 롬 12:5, 고전 2:2, 12:27.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있는 것은
연합된 영 안에
사는 것이다
― 롬 8:4, 12:4-5, 고전 6:17,
12:12-13, 27, 엡 2:22, 4:16, 23.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그분 자신을
우리와 연합시키심으로,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과 본성과 내용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 요 14:20, 15:4-5, 엡 3:16-21, 4:4-6.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안에서
그분 자신을
우리와 연합하시어
우리와
한 실체가 되신다
― 고전 6:17.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이
하나로 완전히 연합되어
한 생명과 한 생활을
가질 정도까지
구원받을 수 있다
― 요 15:4-5, 갈 2:20, 빌 1:19-21상.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은
연합된 영,
곧 사람의 영과 연합되신
신성한 영이다.
하나님께서
행하거나 성취하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초점과 관련되어 있다
― 엡 3:9, 5, 1:17, 2:22,
4:23, 5:18, 6:18.
연합된 영은
하나님과 하나인 영이며,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똑같은 영이다
― 요일 5:11, 벧후 1:4.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이
우리 안에서
하나로 연합됨으로,
우리는
하나님-사람의 생활,
곧 하나님이면서도 사람이며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인
생활을 살 수 있다
― 갈 2:20, 빌 1:19-21상.
하나님-사람의 생활은
두 영,
곧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이
하나로
함께 연결되고 연합된 생활이다.
우리는
연합된 영을 따라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에 산다
― 롬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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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6일
롬 8:4
이것은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6:17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 영입니다.
믿는 이들의 거듭난 영은
완결되신 하나님의 영과
하나로 섞여야 한다
(고전 6:17).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영은
소리를 낼 수 없는
한쪽 손바닥이 되지 않고,
믿는 이들의 거듭난 영과
서로 합하여
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오늘날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이
우리 안에서
하나로 연합됨으로,
우리는
하나님-사람의 생활,
곧 하나님이면서도 사람이며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인
생활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사람의 생활은
두 영,
곧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이
하나로
함께 연결되고 연합된 생활이다.
로마서 8장 16절은
그 영께서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말한다.
… 이제 우리의 영 안에
신성한 영께서
계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신성한 영과
우리의 영의
연합이 있다.
… 이 두 영의 연합은
우리의 바깥이나
하늘에서가 아닌
우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신성한 경륜의 초점이다.
하나님께서
행하거나 성취하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초점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기본적인 영적 체험들을
가지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이
바로 이 연합된 영,
곧 사람의 영과 연합되신
신성한 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육체와 그 정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한 사람들이다.
생각과 의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조금 더 높은 수준에 속한 사람들이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사람의 영의 일부인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한 사람들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수준보다도 더한층 높은데,
왜냐하면 우리는
양심에 따라 살 뿐 아니라
연합된 영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한 사람들이다.
여기 이 수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뿐 아니라
교회생활도 가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경륜의 초점,
즉 연합된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몸의 생활 안에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직
로마서 8장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로마서 12장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우리가
겸손하고, 온유하고,
인내심 있고, 선하고,
사랑스럽고, 잘 견딘다고 해서
몸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영을 따라
곧 연합된 영을 따라,
그 영의 내주하심을 따라
처신하고 행동하고 움직이고 있을 그때에,
실지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움직이고 살고 처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몸은 무엇인가?
실지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합된 영이다.
…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사실을,
그러한 실지적인 상태를
보여 주시기 바란다!
이것을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님,
저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저는
너무나 빗나가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연합된 영의 단계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것저것을 위해 기도하며,
이것저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몸의 실재가
사실상 제 안에 있음을
깨달은 적이 없습니다.
거듭난 영과 내주하시는 영이
이제 제 안에서
실지로 하나가 되고
함께 연합되어 있습니다.
… 모든 것이
제 안에 있습니다.
저는 단지
이 연합된 영을 따라 행합니다.
저는 단지
제 생각을 영에 둡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고
여기에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 연합된 영을 따라
처신하고 행동하고 살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몸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생각을 영에 둘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과 연합되신
그 영이시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바로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생활을 한다.
우리가
이 단계에 들어갈 때,
우리는 즉시
로마서 12장에 있게 된다.
우리는
몸 안에 있게 된다.
5일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고전 15:31
형제님들,
내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가지고 있는
여러분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는데,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하나님-사람의 생활은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생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빌 3:10).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생활의 틀로 취함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사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오직 이런 종류의
단체적인 생활에 의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가질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로
십자가를 거쳐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생활을 하게 하시기를
원한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이 이상을 보게 하시기를
원한다.
오직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사람만이
눈이 열린다.
그들은
자신이 본
계시에 의해
살고 행한다.
이러한 생활만이
하나님-사람의 생활이며,
이러한 생활만이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살아 낼 수 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몇 단계들 중에서
오직 두 단계만이
우리가
날마다
체험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육체 되심이나 인간 생활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이다.
십자가는
죽음의 동의어이고,
그 영은
부활의 동의어이다.
니 형제님은
부활의 실재는 성령이고
성령은 부활의 실재이시므로,
성령이 없다면
부활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주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부활이 인격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부활의 실재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신
그리스도이다.
오늘날
하나님-사람들인
우리가
가져야 할
하나님-사람의 생활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생활,
곧 십자가와 그 영을
체험하는 생활이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은 반드시
십자가와 그 영의
생활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는 나를
보혈로 덮어 주시기를
바란다.
근래 몇 년간의 소요 가운데에
나를 겨냥한
중상과 비방의 말이
매우 많았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오직 주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했다.
이것이
십자가와 그 영이다.
이 점에서 나는
니 형제님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십팔 년 동안
그와 동역하면서,
반대자들의 모든 공격이
그를 겨냥한 것임을
보았다.
그러나 니 형제님은
다만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십자가와 그 영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남편들과 또 아내들은 또한 반드시
그 십자가와 또 그 영을
그들의 생활함 안에서
계속하여
(continually; 끊임없이, 줄곧)
체험해야만 합니다.
그 큰 것들을 말할 것도 없지만,
남편들과 또 아내들 사이의
작은, 곧 일상적인 것들 안에서조차
우리는 언제나
“나는
아닙니다
(I am not;
나는 없습니다);
나는
그 십자가 위에서
죽고 있습니다
(am dying; 죽어 갑니다).”
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배우자에게 말하기 전에,
우리는
“이것이
내가 말하고 있는는 것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라고 물어보아야만 합니다.
이것을 실행하는 것이
그 십자가 위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온종일 우리는
이 종류의 체험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그 정상적인 생활입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 위에서 죽을 때,
그 영 안에서
주님께서
밖으로 데려와지시고
(is brought forth;
낳아지시고, 산출되시고, 나오게 되시고)
또 그 흘러나옴이
(the issue;
그 유출이, 그 결과가)
그 교회입니다.
그 십자가와 또 그 영이 없이는,
교회도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엇은
단지 한 사교 단체입니다
(just a club;
그저 한 동호회입니다);
그것은
그 교회도 아니고
또는 그리스도의 그 몸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그 집도 아닌데,
(이는) 주인으로서 행동하는 이가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그 왕국도 아닌데,
(이는) 왕으로서 행동하는 이가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그 짝이
될 수 없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한 하나님-사람이시고,
그분의 짝도 또한 반드시
한 하나님-사람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와 또 그 영이 없이는,
하나님이 없이
오직 사람만 있고,
그래서 하나님-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반드시
매일
그 십자가와 또 그 영을
체험해야만 하고
그 결과
다섯 측면들을 가지는
한 흘러나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교회,
그리스도의 그 몸,
하나님의 그 집,
하나님의 그 왕국,
또 그리스도의 그 짝입니다.
4일
고후 4:10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을
우리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갈 6:14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을 통하여
세상은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빌 3:10)
라고 말한다.
교통하는 것은
참여하는 것이고,
그분의 고난의
교통 안에 있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께는
하나의 본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삼십삼 년 반 동안
이 땅에서 사신
생활의 본은 바로
십자가의 본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때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태어나실 때부터
날마다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바로
그분 위에 계속
죽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분은
날마다
십자가 아래서
생활하셨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마 16:24)
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사셨다.
비록 그분은
거룩하시고
죄가 없으셨지만,
하나님께서
그분 안에 사시고
그분에게서 살아 나타나시도록
그분은 여전히
자신을 죽음에 넘기심으로
자신을 부인하셨다.
그리스도는
날마다
자신에 대해 죽으심으로써
십자가를 지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하나님-사람들인 우리도
이와 같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아래서
생활해야 한다.
즉 우리의 자아에 대해 죽고
우리의 타고난 사람과
육체의 모든 행실을
죽음에 넘김으로써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십자가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사람은
날마다
십자가 아래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교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십자가가 반드시
우리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사는
이러한 생활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들과
우리 일상생활의
모든 세세한 부분들을
만진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결혼한 형제들은 누구나
아내에게 말할 때
매우 부주의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산다면
아내에게 말하는 것까지도
점검받을 것이다.
우리가
아내에게 말하는 방식은
십자가의 죽음 아래
있는 것인가?
만일 우리가
이렇게 점검해 본다면,
아내에게 했던 말 중에
구십구 퍼센트가
해서는 안 될 말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말들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말이며
우리의 타고난 사람을 따라
한 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비평하고
판단하고
유죄 판결하는
말을 하지 않고
듣기에 좋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말인가,
아니면 자신에게서 나온 말인가?
우리는
우리의 많은 말들이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우리 자신이 한 말임을
시인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사는 것을
실행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다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한담이나
헛된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심지어 듣기 좋은 말조차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죽기에만 합당하고
십자가의 그늘 아래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지 않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참으로 우리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다면,
우리가
입을 열어
무엇을 말하든지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이렇게 점검해 줄 것이다.
“너의 이 말은
십자가를 거친 말인가?
여기에
십자가의 본이 있는가?”
물건을 사는 일에서도
원칙은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물건을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문제는
물건을 사야 하는가
사지 말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십자가이다.
넥타이 하나를 사는
작은 일에서도
우리는
십자가의 그늘 아래에
있어야 한다.
3일
요 15:4
내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나도
여러분 안에 거하겠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여러분도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
우리의 섞임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이다.
이 실재는 다만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한 무리의 사람들,
곧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곧 하나님-사람들이 된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에 의해 살지 않고
그들 안에 있는
또 다른 생명에 의해 산다.
이 다른 생명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
곧 그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그분의 거처와 처소로 삼으신
삼일 하나님이다.
에베소서 3장 17절은
그리스도께서 이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다고
말하고,
요한복음 14장 23절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서로 거처를 정할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절에 있는
‘정하다’는
‘만들다(make)’로도
번역할 수 있다―역자 주).
여기서 ‘만들다’라는 말은
작은 말이 아니다.
만드는 것은
건축하는 것이다.
거처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건축하는 것이다.
이 건축은
어떤 물질적인 것으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삼일성의
영적인 요소와 영적인 본질로
건축하는 것이다.
이 건축은 사실상
일종의 유기적인 조성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인성과 신성,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의해
하나님과 연결되고 연합되며
하나님으로 함께 조성된
하나님-사람들이
사는 생활이다.
매일 여러분은
하나님-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여러분에게는
여러분 안에 거하시고
여러분 안에 거처를 만드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여러분과 그분,
그분과 여러분은
하나로 연합되었다.
여러분은
타고난 생명,
곧 타고난 사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여러분과 나,
곧 옛사람인 타고난 사람은
십자가에서 끝났고,
주님에 의해
그분의 죽음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갈 2:20상).
우리는
우리의 타고난 사람을
십자가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룰 것이다
(빌 3:10).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셨을 때 항상
그분 자신을
거절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결코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모든 것을
아버지로 말미암아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요 6:57, 5:19, 4:34, 17:4,
14:10, 24, 5:30, 7:18).
그분은
매우 거룩하고 순수한
인간 생명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 인간 생명을
살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 인간 생명을
제쳐 두고
죽음에 넘기셨으며,
아버지의 생명에 의해 사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본이다.
우리는
이 본의 대량 재생산인
하나님-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높여진 인간 생명과
신성한 생명을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인간 생명이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높여졌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의해
곧 우리 자신에 의해
살아서는 안 된다.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갈 2:20상)
라고 말했다.
이것은
어떤 교환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계속하여
“이제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생명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생명입니다.”
(20하절)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스스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이었다.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시다.
이 모든 것이
부활 안에 있다.
여러분이
타고난 생명에 의해
살지 않고
여러분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 때,
여러분은
부활 안에 있는 것이다.
그 결과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의 실재는
부활이며,
이 부활은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와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과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이다.
무엇이
온전하게 되는 것인가?
이것은
지속적으로
자아를 거절하고
또 다른 생명에 의해 사는 것을
훈련함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 바울은
살기 위해,
죽음으로써 살았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사람에 대해
죽었고,
신성한 생명을 가진
새사람에 의해
살았다.
… 우리는
스스로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 안에서
정하신 안배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 두어졌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에 머무르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십자가 아래 있는 것이다.
… 나는 끝났다.
그러나 내 안에
새사람이 있다.
내 안에 있는
이 새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신성으로
부활하고 높여진 사람이다.
이 사람은 사실상
하나님 자신이다.
이제 나는
이 사람에 의해 산다.
2일
롬 8:29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엡 2:15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이 둘을
그분 자신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시어
화평을 이루시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은
단지 하나의 용어가 아니라
실재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되고 연합되어
단체적인 하나님-사람을
살아 내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반드시
죽음과 부활을
거쳐야 하며,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반드시
날마다 그 영 안에 있어야 하며
그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아내로서
하나님을
남편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 왔고,
또 매우 분명하고 합당하게
그 진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나는
하나님을
나의 남편으로 삼지 않고
나 자신을
남편으로 삼았다.
도덕적인 표준에 따르면,
나는
나의 아내에게
나쁜 일을 하지 않았고
나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나의 남편으로 삼지 않았고
그분을 따라
말하지 않았다.
나는
자신을
남편으로 삼았고,
자신을 따라
말했으며,
자신을 따라
일에 대하여 말했다.
최근 내가 본
큰 이상으로 인하여
나는 날마다
한 가지를 훈련한다.
그것은 바로
내가
사람들에게 말할 때,
속으로
‘이것은
네가
말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네 남편이신 분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이냐?’
라고 말하며
점검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이것은
네 자신이
말하기 원하는 것이냐,
아니면 네 안에 거하시는
그 영께서
말씀하기 원하시는 것이냐?
네가
이렇게 말하려는 것은
그 영 안에서,
그 영을 따라
말하는 것이냐?’
라고 점검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표준에 따라
우리 자신을
재어 보거나
측량해 본다면,
우리는
자신이
표준에
너무나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비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이상을 보았고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너무나 적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우주 가운데에는
하늘에
하나님이 계셨고
또한 땅 위에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우주 가운데에는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그러한 분이 없었다.
…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그분은
어린 아기 때부터 시작하여
이 땅에서
삼십삼 년 반을 사셨다.
… 그분은
이러한 삼십삼 년 반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사람의
생활의 본을
살아 내셨다.
죽고 부활하신 후에
그분은
많은 형제들을
산출하셨는데,
이들은
맏형님이신 그분과 함께
이 우주 안에서
위대한 한 사람이 된다.
이 우주적인 위대한
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면서도 사람이고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인
하나님-사람이다.
그분은 먼저
이 땅에서 생활하시면서
하나의 본을
살아 내셨다.
하나님-사람이신 그분은
어떻게 생활하셨는가?
그분은
이 땅에서
사람의 생명을 가지셨고
분명 사람이셨다.
그분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셨으며
또한 주무셨다.
심지어 그분은
눈물을 흘리며 우셨고
피곤을 느끼셨다.
그분은
사람과 같으셨던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셨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그분은
인간 생명에 의해
살지 않으셨고,
그분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사셨다.
그분은
사셨지만
홀로 살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사셨다.
그분은 분명히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무엇을 하시든지 간에
스스로 하시지 않고
자신을 보내신 분에 의해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요 5:19, 8:28).
요한복음 6장 57절에서
그분은 또한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셔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살아 계신 아버지는
그분을 보내셔서
무엇을 하게 하셨는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시고
사람을 위해
구속을 성취하게 하셨다고
대답한다.
혹은 조금 더 전진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에게 가져다주셨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얕은 견해이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분을 보내시어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은
신성한 생명에 의해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살아 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생활이
주 예수님과
정확히 똑같은
우주적인 위대한 한 사람,
곧 신성한 생명에 의해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사는
사람을 산출한다.
신언노트, 2019 04 21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하나님의 경륜의
그 가장 높은 봉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우리 안으로
차츰 넣어지시고
(wrought into;
차차[서서히] 섞여지시고,
일해 넣어지시고)
또 우리의 존재 안으로
조성되시는
실재의 그 영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예수님 안에 있는 … 그 실재’
(엡 4:21),
곧 온전하게 된
그 하나님-사람들의
그 단체적인 생활로서
그분의 많은 지체들 안에
복사되는,
그 사복음서 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의,
예수님의 그 생활의
(the life; 그 생명의)
그 실제의(actual)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안에서(in which)
그분께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또 하나님을 위하여
각각의 모든 것들을 하신(did)
한 생활을
(a life; 한 생명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생활하심(living) 안에 계셨고,
또 그분께서
하나님과 하나이셨습니다
―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실재입니다.
하나님께
한 기쁨인
그 유일한 생활은
(The only life;
그 유일한 생명은)
땅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lived)
그 생활의
한 반복인
그 생활입니다;
우리는
주님에 의하여
온전해지고 있고
하나님-사람들이 되며,
그 첫 번째 하나님-사람이신
그리스도의 그 본에 따라
우리의 타고난 생명을
부인함에 의하여
그 신성한 생명을
살고 있습니다(living; 삽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있는
한 생활함은(A living)
예수님의 그 생활하심과
같은 그것입니다(the same as);
그것은(it)
그분의 몸의 그 지체들 안에
다시 사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한 단체적인
(a corporate;
“united in one body”-Online Etymology Dictionary)
하나님-사람을
살아 내는
(to live out;
실행하는)
하나님의 사람과의
그 합일과(the union)
또 섞임입니다(and mingling):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그 하나님-사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together with;
…를 함께 가지는)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한 무리의 사람들에 의한
한 하나님-사람 생활의
(of … life; 생명의)
그 생활함입니다:
그분의 부활 안에서
주 예수님께서
많은 형제들을
산출하셨는데
그들은(who),
그 맏형님이신 그분과 함께,
큰, (곧) 단체적인
한 하나님-사람이
됩니다;
이 우주적인 사람은
하나님이면서 또 사람이고
(God yet man;
하나님이지만 사람이고)
그리고 사람이면서 또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후에,
그 생명 주시는 영께서
우리 안에 거주하시고
또 우리의 영과 섞이셔서
우리와 함께
한 하나님-사람 생활을
사십니다.
이 종류의 생활이(life; 생명이)
한 우주적인 사람 안으로
흘러나오는데
(issues in;
… 안으로 태어나는데,
…으로 생기는데[나타나는데])
그는(who)
주 예수님과
정확하게 똑같은 사람
―그 신성한 생명에 의하여
한 하나님-사람 생활을 사는
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그 하나님-사람들에 의한
한 생활함이고,
그들은(who)
인성의 신성과의
또 신성의 인성과의
그 섞임에 의하여
하나님과 함께(together with)
결합되고(united; 합병되고),
연결되며(joined; 합쳐지며),
또 (하나님으로 함께)
조성됩니다(constituted; 구성됩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온전하게 된
그 하나님-사람들에 의한
그 단체적인 생활함이고,
그들은(who)
그들의 생명에 의하여
살고 있지 않고
오직(but) 과정을 거치신
그 하나님의
그 생명에 의하여
(살고 있으며),
그분의(whose) 속성들은
그들의 미덕들을 통하여
표현됩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그리스도의 그 죽음에
같은 형상을 이룸의
(the conformity;
따름의, 순응함의, 일치함의
…과 비슷함의[닮음의, 부합함의])
한 단체적인 생활함입니다: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한 하나님-사람의 그 생활은
그 십자가의 그 체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추구함의
한 생활입니다:
그 십자가는 반드시
우리의 체험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enters)
그 십자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도록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이
되었습니다(has become).
그 십자가 아래에 있는
한 생활은
우리의 존재의
가장 깊은 그 부분들과
또 우리의 매일의 생활 안에 있는
(in … daily life;
일상생활 안의)
각각의 모든 세부 사항들을
(every detail;
하나하나의 사소한 것들을)
만집니다
(touches; 접촉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죽음에
같은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that we are conformed to …)
그리스도의 부활의
그 능력에 의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그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그 죽음에
같은 형상이 이루어짐의
한 생활함입니다: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그 죽음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그 생활을 사는
우리의 길의
(of … way; 방식의)
그 중심임과
(the centrality;
그 구심성과, 그 중요성과, 그 중심적 역할과)
또 보편성입니다
(… universality;
일반성[다면성, 광범위함, 만능]입니다).
그리스도의 계속으로서
(As … continuation;
연속[존속, 지속, 증축, 연장]으로서),
우리는
매일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생활을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생활의
그 틀로
(as the mold;
그 거푸집[주형, 모양]으로)
취함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생활을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종류의
단체적인 생활함에 의해서만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있는 것은
그 섞인 영 안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그분 자신을
우리와 섞으셔서
그 결과(so that)
그분께서
우리의 생명,
우리의 본성,
또 우리의 내용이
(content; 주제가)
되시고,
또 우리가
그분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우리와 섞으셔서
우리와 함께
하나의 실체가
(one entity;
유일한[동일한]
실재가[존재가, 실재물이, 독립체가, 본질이])
되십니다.
우리는
우리와 또 하나님께서
하나로(as one)
완전히 섞여서,
하나의 생명과
또 하나의 생활함을
가지는
그 정도까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그 초점은
그 섞인 영,
곧 사람의 그 영과(the … spirit)
섞이시는
그 신성하신 영이십니다(the … Spirit);
하나님께서
하시거나 또는 성취하시기를
의도하시는 것은
(intends to;
작정[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초점에 관련됩니다.
그 섞인 영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인 영이고
(one spirit;
유일한[같은] 영이고)
또 그것은(that)
그분의
신격(Godhead) 안에서는 아니지만
그분의
생명과 또 본성 안에서
하나님과 같은 그것입니다
(is the same as God):
그 신성하신 영과
또 사람의 그 영이
우리 안에서
하나로 섞이고
그 결과(so that)
우리는
한 하나님-사람의 그 생활
(the life; 그 생명),
곧 하나님이면서 사람이고
또 사람이면서 하나님인
한 생활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사람의 그 생활은
하나로(as one)
함께 연결되고 또 섞이는
(joined and mingled together),
그 두 영들(the two spirits),
곧 하나님의 그 영과
또 사람의 그 영의
그 생활함입니다.
우리는
그 섞인 영을 따라
행함에 의하여
(by walking;
걸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에 삽니다.
1일
요 16:13
그러나 실재의 영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모든 실재 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
엡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름을 받았을 때
한 소망 안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이며,
몸의 실재는
전적으로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실재의 영이다.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실재는
그분의
완결되신 실재의 영이다
(요 14:17, 15:26, 16:13, 요일 5:6).
삼일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과
삼일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것과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의 실재는 바로
이 실재의 영이다.
또한 삼일 하나님께서 거치신
죽음과 부활의 실재도 역시
이 실재의 영이다.
또한 이 실재의 영은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실재가 되게 하신다
(요 16:13-15).
바로 이 동일한 실재의 영께서
삼일 하나님의 모든 풍성,
곧 그분의 실재를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을 수 있게 하고
실재가 되게 하신다.
의, 거룩함,
생명, 빛,
능력, 은혜 등
모든 신성한 속성들을 포함하는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은
이 실재의 영에 의해
실재화되어,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 속성들이 된다
(롬 15:16하, 14:17, 엡 3:16).
본래 이러한 것들은
다만 하나님의 속성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속성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계신
그 영에 의해
교회 안에서
실재화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성한 속성들의 실재를
소유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육체 되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을 포함한
삼일 하나님께서 체험하신
모든 것이
이 실재의 영에 의해
실재화되어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체험이 된다.
본래 삼일 하나님은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이셨다.
그러나 실재의 영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삼일 하나님의
이러한 체험들을
우리 안에서
실재가 되게 하시어
우리의 실지 체험들이
되게 하셨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오늘날
이 땅에서
정상적인 인간 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부정적인 일들을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으로
처리할 수 있다.
우리가
화를 내지 않고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책망하지 않는 것은
실재의 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안에
실재화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영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일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은
실재의 영께서
삼일 하나님 자신의 체험들을
어떻게 교회 안에서 실재화하시어
교회의 실지 체험이
되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예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삼일 하나님의 실재의 영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가 되신다.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과 실재는 모두
전적으로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영의 문제이다.
… 그 영은
실재가 속해 있는
본질이실 뿐 아니라
실재의
본질이시다.
본질은
내적인 실질을 강조하며,
실재는
외적인 실재화를 강조한다.
그 영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내적인 실질이시기 때문에,
그 영은 또한
그리스도의 몸의
외적인 실재화이시다.
내적인 본질과 실질,
그리고 외적인 실재와 실재화는
모두
그 영께 속한 것이다.
이 영께서 바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삼일 하나님의 모든 것 안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비결이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거룩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몸을 강화하기를
원하시는데,
그러한 하나님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비결은 바로
실재의 영께 있다.
바로 실재의 영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몸에
실재가 되게 하시어,
이 몸이
거룩하게 되고
강화되게 하신다.
이제 이 영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영과
한 영으로 연결되셨다
(롬 8:9-11상, 고전 6:17).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과 연결되셔서
우리와 한 영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온 존재를
이 연합된 영으로 돌이키고
우리의 생각을
이 연합된 영에 두는 것을
훈련해야 한다
(롬 8:6하).
… 우리는 또한
이 연합된 영을 따라
생활하고 행해야 한다
(4절).
우리는
말하고
일하고
사람들을 대하고
일들을 처리할 때에
이 연합된 영을 따라야 하고,
가정에서
가족들과 대화할 때에도
이 영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연합된 영 안에 살 때,
그리스도의 몸을
살아 낼 수 있고
그리스도의 단체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
(엡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