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nding
for the Reality
of the Body of Christ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를 위하여
섞음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최고봉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전적으로 유기적이다
— 롬 8:2, 6, 10-11, 12:4-5.
주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몸을 아는 것이
합당한 주님의 회복이다
— 고전 12:27, 엡 4:16, 골 3:15.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교회의 유기적인 요인으로
취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없으면
교회는
생명이 없는 것이며
단지 인간적인 조직일 뿐이다
— 고전 1:2, 12:12-13, 27.
몸이
교회의
내재적인 의미이다.
몸이 없으면
교회는
무의미하며
아무 가치가 없다
— 롬 12:4-5, 16:1, 4, 16.
장로들은
서로 목양하고
서로 사랑하여
몸의 생활의
본이 되어야 한다.
장로들은
서로 사랑해야 하고,
그들의 아내들도
서로 사랑해야 하며,
장로들은
서로의 자녀들을
사랑해야 한다
— 요 21:15-17, 고전 13:4-8상.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가지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몸의 실재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인 체험이다
— 엡 3:16-17상, 4:16,
골 1:27, 3:4, 15.
주님께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몸의
실질적인 표현이 없다면
주 예수님은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 엡 1:22-23, 4:16,
5:27, 30, 계 19:7.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얻고
하나님의 원수를 파멸시키는
그분의 경륜을 수행할
이기는 이들이
필요하시다.
이기는 이들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건축될 수 없고,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되지 않으면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부를 맞이하러
다시 오실 수 없다
— 엡 1:10, 3:10,
계 12:11, 19:7-9.
주님의 회복은
시온을 건축하는 것인데,
시온은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인
이기는 이들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반드시
오늘날의 시온에
도달하기를
힘써야 한다
— 엡 1:22-23, 4:16,
고전 1:2, 12:27,
계 14:1, 21:2.
하나님은
몸을
함께 섞으셨다
(고전 12:24).
‘섞다’라는 말은
‘조절하다’,
‘조화시키다’,
‘고르게 하다’,
‘연합시키다’를
의미하며,
차이점들을
잃게 하는 것을
함축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위해
섞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하고,
그 영에 의해
존재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해야 한다.
섞임은
다른 이들과
교통하기 위해
항상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함께 동역하는
다른 성도들과
교통하지 않은 채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교통은
우리를
조절하고
조화되게 하고
고르게 하고
연합되게 하기 때문이다.
한 무리의
책임 형제들이
자주 함께 모이지만
섞이지 않을 수 있다.
섞이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통과하고,
무엇이든
그 영으로 말미암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분배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함으로써,
우리가
다른 이들에 의해
만져지고
다른 이들을
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섞임은
사교적인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지체들과
권역의 교회들과
동역자들과
장로들이
누리고 체험하고 참여한
바로 그 그리스도의
섞임이다.
섞임은
하나님의 기쁨에 따른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 목표(엡3:8-10, 1:9-10)인
새 예루살렘(계 21:2)을 완결하도록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엡 1:23)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섞이는 생활 안으로
이끌어야 한다.
사도는
추천과 문안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섞이는 생활 안으로
이끌었는데,
이것은
화평의 하나님께서
사탄을
우리의 발아래
짓밟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 롬 16:1-16, 21-23, 20.
섞임의 목적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우리는
목표인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으로
이끌리기 위해
절차인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을
참으로
실행적이고 실지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주님의 회복의
최고봉은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방식으로
많은 지방 교회들을
산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유기체인
유기적인 한 몸을
산출하시는 것이다.
교회가
한 떡이라는
바울의 사상(고전 10:17)은
그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그것은
소제물에 관한
구약의 말씀에서
취한 것이었다
(레 2:4).
소제물의
고운 가루의 모든 부분은
기름과
연합되었다.
이것이 섞임이다.
섞임은
매우 높고 깊을 뿐 아니라
매우 비밀하기 때문에
누구도
좀처럼
섞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섞임은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섞이는 것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온전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의
단체적인 생활이다.
이들은
진정한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생명에 의해
살지 않고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살며,
자신들의 미덕들을 통해
그분의 속성들을
표현해 왔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세 부분으로 된
하나님-사람들이
삼일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연결 안에서
연합되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연합되는’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러한 생활이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합되는 생활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으며,
이러한 부활의
실재는
그 영이다.
이 부활은
완결되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 안으로
나누어 주고
죽음을 이긴
생명을 해방하여
넣어 준다.
온전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의
이러한
단체적이고
연합되는
생활은
궁극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증가와 표현이 되는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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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위한 섞임”
6일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빌 1:21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나에게 있어서
죽음은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언급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갈보리의
나무 십자가 위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여러분이
깨달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물질적인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이전에
삼십삼 년 반 동안
매일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계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인간,
곧 참사람이 아니신가?
그렇다.
그러나 그분은
그 참사람에 의해
살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분은
그 참사람을
십자가 위에 두셨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사셨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모든 속성들과 함께
이 하나님-사람이신
예수님 안에서
살아 나타났고,
이 하나님-사람의
미덕들로
표현되었다.
그러한 생활은 원래
단지 한 개인,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었다.
그러나 이 생활은
이제
구속받고
거듭나서
신성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많은 사람들 안에서
반복되고
재생산되었다.
그들 모두는
양육받고
거룩하게 되고
변화되고
온전하게 되어,
단지 성숙된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닌
하나님-사람들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온전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의
단체적인 생활이다.
이들은
진정한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생명에 의해
살지 않고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살고 있으며,
자신들의 미덕들을 통해
그분의 속성들을
표현해 왔다.
온전하게 되는 것은
… 지속적으로
자아를 거절하고
또 다른 생명에 의해
사는 것을
훈련함으로써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갈 2:20상)
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바울은
… 자신의
타고난 사람에 대해
죽고,
신성한 생명을 가진
그의
새사람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그리스도를
살고
확대한다고
말했다
(빌 1:19-21상).
그리스도의 죽음은
일종의 틀이며,
바울은
자신을
그 죽음의 틀 안에 넣고
거기서
그 틀과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빌 3:10).
바울이라는
이 사람에게서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의
흔적과 형상을
볼 수 있었다
(갈 6:14, 17).
그의 옛 생명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에 의해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었다.
부활 능력은
그를
강건하게 하여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하게 했다.
주님은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러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신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다만 단체적인 생활이 아니라
연합되는 생활이다.
만일 우리가
‘연합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이것은
이러한 생활이
완결되고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 단어 대신
‘연합되는’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러한 생활이
완성되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듭나고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세 부분으로 된
하나님-사람들이
삼일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연결 안에서
연합되는 생활이며,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생활이다.
이 삼일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신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그리스도는
바로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의
실재이시자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결이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시다.
이러한
연합되는 생활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으며,
이러한 부활의
실재는
그 영이다.
이 부활은
완결되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 안으로
나누어 주고
죽음을 이긴
생명을
해방하여
넣어 준다.
이러한
연합되는 생활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이며,
궁극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증가와 표현이 되는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될 것이다.
이러한
연합되는 생활을
사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구출되어
변화되고
온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도
멸시하거나
유죄 판결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툼이나 배역이나 분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 대신 그들은
예루살렘 안의
고봉인
시온산처럼
주님의 회복 안에
있을 것이다.
5일
엡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름을 받았을 때
한 소망 안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고전 10:17
떡이 하나이요,
우리 많은 사람이
한 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한 교회가
많은 지방 교회들로
표현되는 것은
물질적인 이유 때문이다.
우리 믿는 이들은
온 땅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한 지방에만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여러 지방에서
살아야 하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방에 의해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에베소서 4장은
한 몸이 있다고
말한다
(4절).
바울은
비록 우리가 많지만
여전히 한 떡이며
한 몸이라고
말했다
(고전 10:17).
우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의
목표에 도달하시기 위한
절차일 뿐이다.
… 만일 우리가 단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 머물며
전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목표에서
멀리 떨어지게 된다.
에베소서 1장
22절과 23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가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몸 안에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교리적으로는 옳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라는 대답 외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며
그것은 사실이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용어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어디에
그리스도의 몸의
실지 상태와 실재가 있는가?
섞임의 목적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 나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귀히 여기는데,
이것은
어떤 목적 때문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나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이끄는
절차이다.
교회들은 몸이지만,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소유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 있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 안으로
안내되고 이끌릴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경륜을
참으로
실행적이고 실지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주님의 회복의
최고봉은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방식으로
많은 지방 교회들을
산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유기체인
유기적인 한 몸을
산출하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물질적인 몸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몸은 사실상
우리 존재의
실재가 아니다.
나의 몸은
나이지만,
나의 존재의
실재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온 땅에 세워진
교회들은
물질적인 골격이지만,
이 교회들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가
전혀 없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에 대해
정직하다면,
우리는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상황임을
인정해야 한다.
섞임의 사상은
성경에서
매우 뚜렷하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위한
섞임의 예표가 있다.
… 사도 바울은
이 섞임의 예표를
뚜렷이 언급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0장 17절에서
바울은
“떡이
하나이요,
우리 많은 사람이
한 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교회가
한 떡이라는
바울의 사상은
그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그것은
구약의 말씀에서
취한 것이었다.
레위기 2장 4절에 나오는
소제물은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든
과자나 전병이다.
고운 가루의 모든 부분은
기름과
섞이고 연합되었다.
이것이
섞임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가
고운 가루로 만들어진
한 떡, 한 과자라고
말한다.
이 고운 가루는
밀알로부터 나왔으며,
밀알들은
한 알의 밀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다
(요 12:24).
… 우리는
많은 밀알들이며
과자, 떡인
교회를 이루기 위해
고운 가루로
갈려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 안에 있는
섞임의 사상을
볼 수 있다.
섞임에 대한
진리가
성경 안에 있다.
그러나
… 섞임은
매우 높고 깊을 뿐 아니라
매우 비밀하기 때문에
누구도
좀처럼
섞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섞임은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4일
롬 16:1
내가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의 여집사인
우리의 자매 뵈뵈를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
롬 16:16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롬 16:20
화평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여러분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로마서의
마지막 세 장은
사도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에 따라
믿는 이들을
받음으로써
가지게 된
몸의 생활의
섞임과 교통을
보여 준다.
이런 설명은
역대로
성경 해설가들이
보지 못한 것이다.
로마서 16장은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섞이는 생활 안으로
이끌었던
사도의
탁월한 본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한 생활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릴 수 있다.
우리는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사도는
화평의 하나님께서
사탄을
우리의 발아래
짓밟으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추천과 문안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섞이는 생활 안으로
이끌었다
(롬 16:1-16, 21-24, 20).
로마서 16장에서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인 뵈뵈를 포함하여
적어도 스물일곱 명의
이름들을 언급하면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문안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전체적으로
성도들에게 문안했다.
이것은
그가
성도들 한 명 한 명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고
그들을
이해하며
관심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 추천과 문안은
성도들 간의
상호 관심을
보여 줄 뿐 아니라
교회들 간의
상호 교통을
보여 준다.
바로 몸 안에서
교회들의
교통을 통해
화평의 하나님께서
사탄을
우리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은혜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
이렇게 세 방면으로
체현되시는
삼일 하나님의
나타남이다.
몸 안에서 교통하고
사탄을 짓밟으며
은혜를 누림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시작된 때부터
감추어져 왔던
비밀을
완성할 수 있다.
이 비밀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이루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에 관한 것이며,
이방인들로 하여금
믿음에 순종하게 하여,
유일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롬 16:25-27).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과 섞임의
실재를 가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얼마나 추구하든,
얼마나 단순하고 겸손하든,
조만간 우리 가운데에는
문제들이 생길 것이며,
심지어 분열까지도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에 대한
이상에 통제받아야 하고,
모든 지방 교회들의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섞이는 생활 안으로
이끎으로써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이것이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이며,
이러한 다스림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 영광은
새 예루살렘,
곧 신성과 인성이
연결되고 연합되어 이루어진
우주적인 합병체이며,
이 안에서
하나님은
완전히 영광스럽게 되시고
그분의 경륜은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전반적으로 다루는
로마서는
그 결론에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은
이 책에서 논의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계획되고 관리되고 성취되며,
그 목적이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신
삼일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임을
밝혀 준다.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신
삼일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분에 의해
영원히 온전케 된
우리를 통해,
그분의 몸이 되고
그분과
하나로 연결된
우리를 통해
그분의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완전하고 충만히
표현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의
초점은
그분의 신성한 삼일성을
우리의 구속된
존재의 세 부분인
영과 혼과 몸에
일해 넣으시는 것이다.
이럴 때
구속받고
거룩하게 되고
변화된
우리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될 뿐 아니라,
신성과 인성의
연결과 연합을 이루시려는
그분의 갈망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영원토록
그분의
완결된 표현이
될 것이다.
3일
고전 12:24-25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몸을
고르게 섞으시어
부족한 지체에게
더욱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몸 안에서
분열이 없이
오히려 지체들이
서로를
동일하게 돌보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몸을
함께 섞으셨다
(고전 12:24).
‘섞다’라는 말은
‘조절하다’,
‘조화시키다’,
‘고르게 하다’,
‘연합시키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몸을
섞으시고,
조절하시고,
조화시키시고,
고르게 하시고,
연합시키셨다.
‘섞다’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차이점들을
잃게 하는 것을
함축한다.
한 형제의 특징은
빠른 것이고
다른 형제의 특징은
느린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몸의 생활 안에서
… 이런 모든 구분은
없어진다.
하나님은
민족과 피부색이 다른
모든 믿는 이들을
섞으셨다.
몸의 생활 안에서
조화되고
섞이고
조절되고
연합되고
고르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하고,
그 영에 의해 존재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해야 한다.
…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 영에 의해 존재하며
그리스도를
분배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하는 것은
우리의 입맛에 따른 것이거나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한 동역자가
어떤 일을 할 때,
그는
다른 동역자들과
교통해야 한다.
한 장로는
다른 장로들과
교통해야 한다.
교통은
우리를 고르게 하고,
… 우리를 조절하며,
… 우리를 조화되게 하고,
… 우리를 연합되게 한다.
우리는
자신이 빠른지 느린지에 대해
잊어버리고
다만 다른 이들과 함께
교통해야 한다.
우리는
함께 동역하는
다른 성도들과
교통하지 않은 채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
교통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멈출 것을
요구한다.
교회생활 안에서나
주님의 일 안에서
우리가
동역할 때,
우리 모두는
교통 없이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개별적인 지체들 간의 섞임,
어떤 권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 간의 섞임,
모든 동역자들 간의 섞임,
모든 장로들 간의 섞임이
있어야 한다.
… 이럴 때
우리는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다.
… 교통하기를 배우라.
섞이기를 배우라.
지금부터
교회들은
섞이기 위해
자주 함께 모여야 한다.
우리는
그것에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몇 차례 섞임을 실행하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입맛을 가질 것이다.
… 오늘날
우리는
현시대의
문명의 이기로 인하여
매우 편리하게
서로 섞일 수 있다.
우리가
함께 섞일 때
우리는
십자가와 그 영을
가진다.
십자가와 그 영이 없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분열이 있는
육체일 뿐이다.
… 모든 사람이
자신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함께 모일지라도
섞임이
많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을 지킨다.
이것은
육체를 따르는 사람의
방식이다.
우리는
함께 모일 때
십자가의 끝냄을
체험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어떻게 영을 따르는지,
어떻게 그리스도를 분배하는지,
어떻게 몸의 유익을 위해 말하고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섞이는 것은
여러분이
다른 이들에 의해
만져지고
다른 이들을
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섞이는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만져야 한다.
십자가를 통과하고,
그 영을 따라 일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를 분배하도록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우리는
섞임 집회에 와서
잠잠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말하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르지만,
우리는
조절되고
십자가로 제해져야 하며,
어떻게 그 영을 따라
그분의 몸의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를 분배하는지
배워야 한다.
이러한 섞임은
사교적인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지체들과
권역의 교회들과
동역자들과
장로들이
누리고 체험하고 참여한
바로 그 그리스도의
섞임이다.
섞임은
하나님의 기쁨에 따른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 목표(엡 3:8-10, 1:9-10)인
새 예루살렘(계 21:2)을
완결하도록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엡 1:23)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2일
엡 1:22-23
또 하나님은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시키시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시어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입니다.
계 1:11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에게
보내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기적인 몸은
나누어지지 않으며
또한 나누어질 수도 없다
(고전1:13상).
그것은
자치적이지 않다.
이 유일무이한
그리스도의 몸은
많은 지방 교회들 안에서
(계1:11),
삼일 하나님에게 있는
신성한 하나 안에서
(요 17:11, 21, 23),
그리고 신성한
본성과 요소와
본질과 표현과
기능과 증거 안에서
표현된다.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교회들은
하나의 신성한 본성,
하나의 신성한 요소,
하나의 신성한 본질,
하나의 신성한 표현,
하나의 신성한 기능,
하나의 신성한 증거를
가지는데,
그 이유는
교회들이
한 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모든 문제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우리 가운데는
이러한 무지가
없어야 하며
그 대신에
완전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보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
필요하며,
이것과 함께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한 무리의 하나님-사람들의
생활의
총체이자 집합이다.
이러한 생활이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이며,
결국 이것이
이 시대 곧 교회 시대를
마감하고
그리스도를
다시 모셔 올 것이며,
그분으로 하여금
왕국 시대 안에서
이 하나님-사람들과 함께
이 땅을
점령하시고
소유하시며
다스리시도록
할 것이다.
그들은
교회 시대에서
온전하게 되고
완성되고
완결되었다.
그러므로 다음 시대인
왕국 시대에서
그들은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서
다스릴 것이다
(계 20:4-6).
오늘날
교회 시대에
온전하게 되고
성숙된
하나님-사람들은
교회들 가운데 있는
시온이고,
이기는 이들이며,
또한 활력 그룹들이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시온이 없고
오직 예루살렘만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격 없던 모든 성도들이
시온이 될
자격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새 예루살렘 전체가
시온이 될 것이다.
… 시온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인
지성소이다.
요한계시록 21장에는
새 예루살렘이
지성소일 것임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징이 있다.
새 예루살렘의 모양은
입방체의 모양이다
(16절).
… 그것은 바로
지성소이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는 모두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똑같은
입방체였기 때문이다
(출 26:2-8, 왕상 6:20).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변화되어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같을 뿐 아니라
외양에서도
하나님과 같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4장은
하나님의 형상이
벽옥과 같다고
말한다
(3절).
그리고 21장은
새 예루살렘 전체가
벽옥의 형상을 지녔다고
말한다
(11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사람들은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외양에서
바로 하나님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이 최고봉에
도달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모든 사람들은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외양에서
하나님인
많은 하나님들이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신
삼일 하나님과
섞인,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하나님-사람들이다.
거룩한 성은
이러한 섞임으로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증가와 표현일 것이다.
기도 외에는
이러한 최고봉에
도달할 길이 없다.
예루살렘이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큰 영역으로서
여기에 있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만,
시온
곧 이기는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
원하시고
또한 건축하시고자 하는 것은
시온
곧 이기는 이들이다.
이기는 이들이
곧 하나님께서 계신
시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있는
영적인 계시의
내재적인 실재이다.
우리는
주님의 회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주님의 회복은
시온을 건축하는 것이다.
바울의 글들이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지만,
과거에는
이것을 본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신언노트, 2019 01 06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를 위하여
섞음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 가장 높은 봉우리는
(peak; 정상은, 정점은, 최고조는)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절대적으로 유기적입니다.
주님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그 몸을
건축함을 위하여 있습니다;
따라서,
그 몸을 아는 것이
주님의
그 적절한
(the proper;
특유의, 고유의, 엄밀한 의미에서의, 진정한)
회복입니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그 몸을
그것의(its; 교회의)
유기적인 인자로
(as … factor; 요인으로, 요소로)
취합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 없이는
그 교회가
생명이 없고
(lifeless; 죽어 있고)
또 단지 사람의 한 조직에
불과합니다.
그 몸이
그 교회의
그 내재적인 의미입니다
(significance; 중요성입니다);
그 몸이 없이는
그 교회가
의미가 없고
(make no sense;
이치에 맞지 않고, 뜻이 통하지 않고,
의미를 만들지 못하고)
또 중요성을
(meaning; 의미를, 의도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 장로들은
서로를 목양해야만 하고
또 서로를 사랑해야만 하며
그 몸 생활의
한 본보기가
(a model; 한 모형이, 한 전형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 장로들은
서로를 사랑할
필요가 있고,
그들의 아내들은
서로를 사랑할
필요가 있으며,
또 그들은
서로의 아이들을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를 가지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집을(home)
우리의 마음들 안에
만드시도록
허락해 드려야만 합니다;
그 몸의 그 실재는
그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그 내적인 체험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가
그 지방의 교회들 안에
표현되는 것을
긴급하게 필요로 하십니다;
그 몸의
한 실질적인
(substantial; 상당한, 튼튼한, 실체의)
표현이 없다면(unless …; 없는 한),
주 예수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이기는 이들이
하나님의 그 경륜을
수행하여
그리스도의 그 몸을
가지는 것과
또 그분의 적을(enemy; 원수를)
파괴하는 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 이기는 이들 없이는
그리스도의 그 몸이
건축될 수 없고,
또 그리스도의 그 몸이
건축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부를 위하여
돌아오실 수 없습니다.
주님의 회복은
시온을
—그 새 예루살렘으로(in; 안에)
완결되는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인
그 이기는 이들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반드시 노력하여
(endeavor; 애써서)
오늘의(today’s; 오늘날의) 시온에
이르러야만 합니다
(to reach; 도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몸을
함께 섞으셨습니다;
‘섞었다(blended)’라는 그 단어는
‘조절했다(adjusted;
조정했다, 적응시켰다)’,
‘조화를 이루게 했다(harmonized;
일치시켰다, 어울리게 했다)’,
‘조율했다(tempered;
완화시켰다, 섞어서 조절했다, 고르게 했다)’,
또 ‘혼합했다(mingled;
섞었다, 어울리게 했다, 연합시켰다)’를
의미하고,
차이들을
(distinctions;
차별들을, 구별들을, 특징들을, 개성들을)
잃어버림을
내포합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를 위하여
섞이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하고
(have to go through;
겪어야만 하고, 살펴보아야만 하고)
또 그 영에 의하여
(by the Spirit; 그 영으로)
존재해야만 하며(to … be)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건축함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해야만 합니다.
섞임은(Blending; 섞음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기 위하여
(to fellowship; 교제하기 위하여)
항상 멈추어야만 한다는 것을
(that we should always stop;
언제나 끝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조화하여 움직이고 있는
(are coordinating;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공동 작용하고 있는, 동역하고 있는)
그 다른 성도들과
교통함 없이는
어떤 것도
하지 말아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교통이
우리를 조절하고,
우리가 조화를 이루게 하며,
우리를 조율하고,
또 우리를 섞기 때문입니다.
한 무리의
책임 형제들이
섞임 없이도
(without being blended;
섞이지 않고도)
자주 함께 모일 수 있습니다;
섞이는 것은
그 십자가를 통과함,
그 영에 의하여 일들을 함,
또 그분의 몸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분배하기 위해
각각의 모든 것들을 함에 의하여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만져지는 것과
또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한 섞음은
(Such a blending; … 섞임은)
사교적이지 않고
(is not social;
친목을 위하지 않고)
그 각각의 지체들,
그 권역(district; 지구, 관할 구역) 교회들,
그 동역자들,
또 그 장로들이
누리고,
체험하며,
또 참여하는
바로 그 그리스도의
섞음입니다.
그 섞음은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그 몸의
그 건축함을 위하여 있고
그분의(His; 하나님의)
충분한 기쁨에 따라
(according to … good pleasure)
하나님의 경륜의
그 최종적인 목표인
그 새 예루살렘을 완결합니다.
우리는
그 사도들의
발걸음들 안에
따라가서
(to follow in; …을 따라서[추종하여])
그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그 전체 몸의
그 섞는 생명 안으로
(into the blending life;
그 섞이는 생활 안으로)
데리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도는
추천들과
(recommendations;
천거들과, 추천서들과)
또 인사들에 의하여
(by … greetings;
문안 인사들로[안부 편지들로])
그리스도의
그 전체 몸의
그 섞는 생명 안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는데(brought)
이는 평안의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들 아래에
사탄을 짓밟으시고
(may crush;
찌그러뜨리시고, 분쇄하시고, 진압하시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그 부유한(rich; 풍부한) 은혜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섞음의(그 섞임의)
그 목적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으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목표인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 안으로
데려가지기 위하여
그 절차인
지방의 그 교회들 안에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really; 진짜로, 정말로),
실지적으로
(practically; 실질적으로, 실용적으로, 현실적으로),
실제로
(actually; 정말로, 지금, 현재)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할 수 있는
주님의 회복의
그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물질적인 방식 안에 있는
지방의 많은 교회들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유기체가 되는
한 유기적인 몸을
산출하시는 것입니다.
한 떡인 교회에 관한
바울의 사상은
그 자신의 지어낸 것이
(his own invention;
…의 고안이, 창안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소제물과 함께(with)
구약 성경에서부터
취해졌습니다;
그 소제물의
그 고운 가루의
각각의 모든 부분들은
(every part; 매 부분은)
그 기름과
섞였습니다
—그것이
그 섞임입니다.
거의 아무도
섞임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데
이것이
매우 높고 또 깊을 뿐 아니라
또한 매우 비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물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섞임의
그 의미는
(the significance; 그 중요성은)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그 온전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에 의한
그 단체적인 생활함이고,
그들은(who)
진짜(genuine; 진정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생명에 의하여
살고 있지 않고
오직 과정을 거치신
그 하나님의
그 생명에 의하여
(살고 있는데),
그분의(whose) 속성들이
그들의 미덕들을 통하여
표현되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몸의
그 실재는
그리스도의
그 부활 안에서
거듭났고,
변형되었으며
(transformed; 변화되었으며),
또 영광스럽게 된
세 부분으로 된
그 하나님-사람들의
그 삼일 하나님과의
그 영원한 합일 안에 있는
(in the … union)
그 섞이는 생활함입니다
(the mingling living):
이 생활함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is … going on) 때문에
우리는
‘섞이는’이라는 그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한
한 섞이는 생활함은
그리스도의
그 부활 안에 있고,
또 이 부활의
그 실재는
그 영이십니다;
이 부활은
그 믿는 이들 안으로
그 완결되신 하나님을
나누어 주고
또 죽음을 이기는
그 생명을
해방하여 줍니다.
그 온전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에 의한
이 단체적인 또 섞이는
생활함은
그 새 하늘과 또 새 땅 안에 있는
영원한
(for eternity; 영원을 위한)
하나님의 증가와 표현인
그 새 예루살렘으로(in …; 안에)
궁극적으로
(ultimately; 결국, 근본적으로)
완결됩니다
(consummates;
완전하게 됩니다, 완성[완료]됩니다).
1일
롬 12:4-5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각 사람이
서로 지체들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최고봉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용어를 알고 있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계시를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
칠십이 년 이상이나 되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 가운데서
또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를
거의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 이 실재는
어떤 종류의 조직이나
조직의 성질을 가진 어떤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결코 제도가 아닌데,
왜냐하면 어떤 제도도
유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는
절대적으로 또한 전적으로
유기적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산출된
하나님의 아들들은
단체적으로 말하면
교회이고,
유기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와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왕국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배필이다.
이러한 방면들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유기적인 요인으로
취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없으면,
교회는
생명이 없는 것이며
단지 인간적인 조직일 뿐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생명도,
하나님의 집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은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녀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왕국도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배필로서
그리스도와 어울려
그분과 한 쌍이 되는
그리스도의 신부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제시하는 방식을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하늘들의 영역에 앉히시고,
만물을
그분의 발 아래
복종시키시고,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시어
교회에게 주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엡 1:23상)
라고 말했다.
교회는 몸이다.
이것은
몸이
교회의 내재적인 의미임을
가리킨다.
몸이 없으면
교회는 무의미하며
아무 가치가 없다.
헬라어로
교회는
‘엑클레시아(ekklesia)’,
즉 부름받아 나와서
함께 모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모임의 의미는
몸이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 안에는
지구촌 곳곳에
천이백여 개 이상의
교회들이 있지만,
우리 모두는
한 몸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개별적인 교회나
개별적인 믿는 이로
여긴다면
우리는 끝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한 몸으로
여겨야 한다.
만일 우리의 물질적인 몸의
지체들이
자체 관할권을
지키려고 하고
자치적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의 몸은
끝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물질적인 몸의
모든 지체들이
서로 복종함으로써
우리의 몸이
순조롭게 활동하며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조직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회복은 여전히
여기에 있다.
회복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몸의 원칙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
만일 몸이 없다면
교회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몸이 없다면
교회는
아무런 느낌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할렐루야,
몸이 있다!
몸이 없으면
교회는 무의미하지만,
몸이 있으면
교회에는
내재적인 의미가 있다.
교회와 몸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골격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유기체임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과나무를
예로 사용할 수 있다.
나무는
골격이고
사과 열매는 바로
이 나무의
유기적인 본질이다.
… 나무는
사과를 위한 것이다.
… 교회는
사과나무와 같은
골격이고,
사과 열매가
사과나무의
유기적인 본질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은 바로
교회의
유기적인 본질이다.
이 둘은
하나이다.
교회는
존재하기 위한
골격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사람들의 만족을 위한
유기적인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