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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함

삼일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 
평안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평안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아버지는 
평안의 하나님이시며, 
평화로운 본성을 지닌 
평화로운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평안을
누린다(have; 가진다).

우리가 
누리는 평안은 
하나님 자신이다.

신약은 
하나님의 평안과 
평안의 하나님을 
모두 말한다. 
하나님의 평안과 
평안의 하나님은 
사실상 하나이다.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through our fellowship with Him;
우리의 그분과의 교통을 통하여)
우리 안으로 주입되신 
평안의 하나님이다.

세상에서 우리는 
환난을 당하지만
(have affliction;
고통[고생]을 가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평안을 얻는다(have; 가진다).

우리가 
세상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는 
근심이 있다
(our heart is troubled;
우리의 마음은
애먹는다[성가시게 된다]).
이러한 근심을 
해결하는 길은
(and the way
for this trouble
to be resolved;
또 이 걱정이
해결되는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감으로써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is for us
to enter into Christ
by believeing into Him;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믿음으로써
그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는 
두 영역이 나오는데
(there are two realms;
두 영역들이 있는데), 
하나는 온갖(all; 모든) 근심거리들이 있는 
물질적인 영역([그]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평안이 있는,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다
(and the divine and mystical realm
of the pneumatic Christ,
where the peace is;
또 그 평안이 있는
그 공기이신[영이신] 그리스도의
그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이다).

사람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류 가운데에는 
많은 규례와 풍습과 습관, 
그리고 생활하고 경배하는 
여러 방식이 생겼으며, 
그 모든 것은
인류를 
분열시키고 
흩어지게 하고 
혼란시켰다. 
각 민족과 인종 사이에는
막힌 담이 있으며, 
따라서 인류 가운데에는 
화평이 없고 
오직 적대감과 불화와 전쟁이 
있을 뿐이다.

화평하게 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주 안에는 
화평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화목제물은 
화평하게 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화목제물이라는 예표의 
성취와 실재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그분을 통해,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가지고 
우리 서로 간에도 화평을 가진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가지거나 
다른 사람들과 화평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화평을 
가질수 있다.

몸의 생활 안에서, 
몸의 생활을 위해 
우리에게는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에베소서에 계시된 대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화목 제물이시다.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 
둘 다를 위해 
완전한 구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화평, 
곧 우리의 조화이시다.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분의 죽음은 
인간 생활과 종교의 
서로 다른 규례들을
없애 버리고 폐하였다.

인종들 간의 차이와 
사회적인 계급의 차이가 
없어졌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육체 안에서 
분리시키는 규례들을
없애 버리시고, 
즉 적대감을 
소멸하시고, 
또한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을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이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다.

한 몸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경륜에 
반대되는 모든 것이 
종결될 때에만 
화평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가까워졌다.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 영으로 오셔서 
화평을 
복음으로 전하셨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화평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죽으시고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심지어 전파하시는 영으로서 
우리에게 오셔서 
화평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몸의 생활 안에서 
우리는 
화평의 매는 띠로 
그 영의 하나를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는 
인류 가운데서 
규례들 때문에 생긴 
모든 차이점을 
십자가 위에서 
없애 버리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분은 
몸을 위해 
화평을 이루셨다. 
이 화평이 
모든 믿는 이를 
함께 매야 하고, 
이처럼 
매는 띠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실행하면서 
십자가 위에 머문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평이 
매는 띠가 
될 것이고, 
우리는 
그 띠로 
그 영의 하나를 
지킬 것이다.

성막에서 
연결하는 가로대는 
화평의 매는 띠가 된 
연합된 영, 
곧 신성한 영과 
거듭난 사람의 영이 
하나로 연합된 영을 
상징한다.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화평의 매는 띠는
우리의 영이 
연결하시는 영이신 
가로지르시는 영과 
협력하는 것이다.

영적 전쟁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화평의 복음의 
견고한 기초를 
신발로 삼아 
발에 신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 대해 
화평을 이루셨고, 
이 화평은 
우리의 복음이 되었다.

이 화평의 복음은 
견고한 기초로 
세워졌고, 
이 견고한 기초는 
우리 발에 
신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신발을 신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하기 위해 
설 수 있도록
견고한 기반을 
가지게 될 것이다.

“화평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여러분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롬 16:20.

여기서 하나님은 
사탄을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이것은 
사탄을 짓밟는 것이 
교회생활과 관계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탄을 처리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이다.

사탄이 
우리의 발아래 
짓밟히게 되는 것은 
몸의 실지적인 표현인 
합당한 지방 교회가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골로새서에 계시된 대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화목제물이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는 것은 
만물을 
그분 자신과 
화평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하여 
성취되었다.

우리는 
한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화평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몸으로부터 독립적인 
사람은 누구도 
참된 화평을 
가지지 못한다. 
몸을 의존할 때 
진정한 화평을 얻는다.

몸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몸의 지체들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일 가운데 
판정을 내리고 
조정하고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판정을 내리다’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심판을 보다, 
다스리다, 
모든 일의 통치자와 결정자로서 
보좌에 앉다’
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한다면, 
이 화평이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다툼을 
해결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수평적으로는 
성도들과 
화평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화평의 판정을 통해 
우리의 문제들은 
해결되고, 
몸의 지체들 간의 
마찰은 
사라진다. 
이럴 때 
교회 생활은 
하나와 달콤함 안에 
보존된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면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마지막 발언을 
하시며, 
최종 결정을 
내리시는 것이다.

우리가 
보좌의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의 
화평의 다스림 아래 
머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마음 상하게 하거나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의해 
그분의 화평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모든 일에서, 
모든 방면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가져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화평의 주님께서 
모든 방면에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화평을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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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plies on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함”

6일

골 1:20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어,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들에 있는 것들을 
그분을 통해 
그분 자신과 
화목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살후 3:16 
평안의 주님께서 
직접 
모든 면에서 
계속하여 
여러분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해야 한다.
서로 다른 편의 
사람들은 
판정을 내리는 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 골로새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 안에서 
판정을 내리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본다. 
판정을 내리는 
이분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논쟁을 
해결하셔야 한다. 
…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서로 다른 편들이 
논쟁하거나 
다투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리스도의 
주재하는 화평에 
자리를 내어 주어, 
이 화평, 
곧 새사람의 하나(oneness)가 
우리 안에서 
통치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이 화평, 이 하나가 
마지막 발언을 
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화평이
우리 안에서 
통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화평은 
통치자와 결정자로서 
보좌에 앉아야 한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누군가가 
여러분 안에서 
보좌에 앉으셔서 
여러분을 통치하시고 
최종 결정을 내리시는 것을 
체험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 그리스도의 
화평의 판정을 통해 
우리의 문제들은 
해결되고, 
성도들 사이의 마찰은 
사라진다. 
이럴 때 
교회생활은 
보존되고, 
새사람은 
실지적으로 유지된다.

새사람의 생활인 
교회생활은 
단지 가르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위에 있는 것들에 두고, 
하늘에 속한 전달이 
신성한 요소를 
우리 안으로 
분배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보존된다. 
그럴 때 우리는 
새사람의 새롭게 됨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 안에서 
통치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화평은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의 
특별한 한 방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화평이 
판정을 내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면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마지막 발언을 하시며, 
최종 결정을 내리시는 것이다.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행함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보존하려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판정을 내리는 화평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다면 
마찰은 
해결될 길이 
없을 것이다. 
오직 하늘들의 영역에 계시는 
그리스도, 
즉 중보 기도하시고 
사역하시고 
행정을 수행하시는 
이분만이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하시고 
마찰을 
사라지게 하실 수 있다. 
만일 한 형제와 
그의 아내가 
그들의 생각을 
하늘들에 계신 
그리스도께 둔다면 
그들은 
신성한 전달을 
체험할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화평이 
그들 안에서 
판정을 내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보좌에 앉아 
우리 안에서 
유일한 심판관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화평과 
성도들과의 
수평적인 화평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있으며, 
이 화평 안에서 
새사람인 
교회생활이 
보존되는 것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자!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을 주재할 때 
새사람의 새롭게 됨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보좌의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의 
화평의 다스림 아래 
머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마음 상하게 하거나 
손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의해 
그분의 화평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할 것이다. 
한 지방의 
교회 안에서의 
하나와 
교회들 가운데서의 
하나는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유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판정을 내리는
화평에 의하여 
유지된다. 
주님의 회복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모든 교회들과 
주님의 회복 전체는 
그리스도의 
판정을 내리는 
화평 아래 있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는 
공급하는 은혜와 
판정을 내리는 화평이 
되신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 마음 안에서 
보좌에 앉아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한다면, 
우리의 결혼 생활과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은 
하나 안에 
보존될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6절은 
이렇게 말한다.
“평안의 주님(혹은 화평의 주님)께서
직접 
모든 면에서 
계속하여 
여러분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12절부터 15절까지에 있는 
명령을 지키는 것이 
바로 모든 면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화평을 
가지는 것이다. 
어떤 교회가 
무질서하다면 
거기에는 
화평이 
있을 수 없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모든 일에서, 
모든 방면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가져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화평의 주님께서 
모든 방면에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화평을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

 

5일

롬 16:20 
화평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여러분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골 3:15 
그리스도의 화평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한 몸 안에 
부름을 받은 것도 
이 화평을 위한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로마서 16장 20절에서 
하나님은 
사탄을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이것은 
사탄을 짓밟는 것이 
교회생활과 
관계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탄을 
처리하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이다. 
일단 각 지방에서 
몸의 실지적인 표현인 
합당한 교회가 출현하면 
하나님은 
사탄을 
그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실 수 있고, 
그들은 
화평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주님의 넘치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어,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들에 있는 것들을 
그분을 통해 
그분 자신과
화목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분을 통해’는
‘화목을 성취하는 
능동적인 수단이신 
그리스도를 통해’를 
의미한다.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은 
만물을 위해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의존은 
평안을 가져다준다. 
사실상 의존이 
참된 평안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의존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 안에 
참된 평안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할 때 
우리는 
평안으로 가득해진다.

몸으로부터 독립적인 
어떤 형제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평안이 없다. 
… 그들은
“나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왜 내가 
여러분들과 
연결되어야 합니까? 
나는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따질 것이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평안인가? 
그것은 
참된 평안이 아니다.

주님과 몸을 
의존할 때는, 
자아가 
어떤 종류의 평안을 
만들어 내고 
그 평안을 
유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 자아가 
그러한 평안을 
지탱하기를 멈추면 
그 평안은 
사라져 버린다. 
… 우리가 
주님과 몸을 
참되게 의존한다면 
자연히 평안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참된 평안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다른 사람들도 알 것이다. 
… 몸으로부터 독립적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참된 화평을 
가지지 못한다. 
오히려 
자아가 있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서
‘판정을 내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또한 
‘심판을 보다, 
다스리다, 
모든 일의 통치자와 결정자로서 
보좌에 앉다’
로 번역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 
이 화평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합당한 몸의 생활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화평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우리 마음에서 
모든 것에 대해 
판정을 내리고 
조정하고 
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또한 
이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서 
바울은 또한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격려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해야 할 뿐 아니라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 
몸의 생활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항상 
지체들을 향하여 
화평의 상태에 
있어야 하고,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복잡하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사탄 편의 
통제 아래 
있었다. 
우리는 
안에 
어떤 다툼의 느낌 없이 
세상적인 오락과 유흥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한 편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하도록 권하고, 
또 다른 편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을 
하도록 권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내적인 판정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회의를 주재할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것이 
필요하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따르면 
주재하는 것, 
곧 판정을 내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화평이다.

 

4일

엡 4:3 
화평의 매는 띠로 
그 영의 하나를 
힘써 지키십시오.

엡6:15 
화평의 복음의 
견고한 기초를 
신발로 삼아 
발에 신고

그리스도는 
규례들로 인해 생긴 
모든 차이점을 
십자가 위에서 
없애 버리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분은 
몸을 위해 
화평을 이루셨다. 
이 화평이 
모든 믿는 이들을 
함께 매야 하고, 
이처럼 
매는 띠가 
되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화평의 매는 띠는 
사실상 
십자가가 하는 일이다. 
체험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에 갈 때마다 
우리와 다른 이들 사이에 
차이점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즉시 
차이점이 나타난다. 
이것은 
교회생활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종종 부부간의 사랑은 
그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올 때 
드러나는 차이점들 밑에 
묻혀 버린다. 
차이점들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로 가는 것뿐이다. 
우리가 
십자가로 가서 
거기에 머문다면, 
차이점들은 
사라지고 
우리는 
화평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머물러 있을 때 
이 화평은 
우리가 
그 영의 하나를 지키도록 해 주는 
매는 띠가 
될 것이다.

성막 안에 묘사되어 있는 
하나에 이르는 데에는 
몇 단계가 있다. 
먼저, 우리는 
초기의 영, 
곧 거듭나게 하시고 
도장 찍으시는 영을 
가진다. 
그런 다음 우리는 
우리를
아카시아 나무로 변화시키는 
변화의 과정을 
가진다. 
변화됨에 따라 
신성한 본성이
나무에 입혀지게 된다. 
더욱이 그 영은 끊임없이 
우리를 가로지르고 
우리를 통과하고자 하신다.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려면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과 함께 
우리의 영이 
그분께 협력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연결하는 가로대들, 
곧 믿는 이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세 줄로 배열된 
다섯 개의 가로대들을 
가진다. 
이 모든 방면이 있을 때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 계시된 
삼일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를 가진다. 
이것은 우리가 
입히고 연결하는 금 안에서 
건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연결하시는 영이 
우리를 가로지르시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연결하시는 영은 
우리가 서 있을 수 있도록 
우리를 강화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가로지르신다. 
어떤 것이 
우리를 
수직으로가 아니라 
수평으로 관통한다. 
우리가 서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가로질러질 
필요가 있다. 
서 계시는 영은 
또한 가로지르시는 영이신 것이 
틀림없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가로질러지고자 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영이 
가로지르시는 영께 
동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기꺼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 영은 결코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연결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영이 
기꺼이 그 영과 협력하지 않는다면 
연결하시는 영은 
나를 
여러분과 
하나로 만드실 수 없다. 
연결하시는 영이 
나에게 오실 때 
이 영은 
다른 형제들의 영과 
함께 오시고, 
이 영이
나에게서 
다른 형제들에게 
가실 때에는 
나의 영과 
함께 가신다. 
연결하시는 영 혼자서는 
우리를 
연결하실 수 없다. 
우리의 영이 반드시 
연결하시는 영께 
협력해 드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기꺼이 그분에 의해 
가로질러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기꺼이 
그 영께서 
우리를 가로지르시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우 
그 영께서 
우리를 
통과하실 수 없다. 
여러분의 영은 기꺼이 
그 영과 함께 
다른 성도들에게 
가고자 하는가? 
하나님의 영께서 홀로 
우리를 연결시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그렇지 않다. 
그분께는 
우리의 영이 
그분께 동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모든 일에 
겸허하고 
온유하며 
또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지며 
그 영의 하나를 
지키는 것의 
의미이다.

이 화평의 매는 띠는 
우리의 영이 
연결하시는 영과 
협력하는 것이다. 
… 나는 
우리의 영이 
그 영께 
동의해 드릴 때에만 
우리에게 
화평의 매는 띠가 
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확실히 증언할 수 있다.

‘화평의 복음의 
견고한 기초’
(엡 6:15)라는 표현은 
화평의 복음이 
세워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 대해 
화평을 이루셨고, 
이 화평은 
우리의 복음이 되었다. 
이 화평의 복음은 
견고한 기초로 세워졌고, 
이 견고한 기초는 
우리 발에 
신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신발을 신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전쟁을 하기 위해 
설 수 있도록 
견고한 기반을 
가지게 될 것이다.

 

3일

엡 2:16-17 
또한 적대감을 
십자가로 소멸하셔서, 
이 십자가를 통하여 
이 둘을 
한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 
화평을 
복음으로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평을 복음으로 전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한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한 몸인 
교회는 
앞 절에 나오는 
한 새사람이다. 
한 몸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인 
우리 모두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이 어떠한 계시인가!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구원받았다.

우리는 대체로 
화목을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한다. 
우리는 
단체적인 화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많지 않다. 
그러나 합당하고 참된 화목은 
한 몸 안에 있다.
이 몸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도구이자 수단이다. 
골로새서 3장 15절에 따르면, 
우리는 
심지어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단체적인 관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반대로, 
우리는 
모두 함께 
구원받았고 
한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바울의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경륜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끝내 버렸지만 
바울은
이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했다. 
에베소서 2장 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방인들에게 오셔서 
화평의 복음을 
전하셨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경륜에 
반대되는 모든 것이 
종결될 때에만 
화평이 가능하다. 
우리와 하나님, 
또 우리 서로 간에 
화평이 있으려면 
종교와 정치와 
문화와 규례와 율법이 
끝나야 한다.

우리는 에베소서 2장 13절에서 
우리의 타고난 관념과는 다른 
어떤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이 절은 
우리에게
“그러나 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가 
누구에게 가까워졌는가? 
우리는 
하나님에게, 
또한 서로서로에게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 절의 강조점은 
바로 우리를 구속한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서로에게 
다시 이끌고 
가까워지게 했다는 것이다. 
12절에 따르면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
‘이스라엘 공동체와 
단절되어 있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낯선 사람들이었고, 
세상에서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다.’ 
만일 12절의 빛 안에서 
13절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강조점이 
서로 가까워졌다는 것에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로부터,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가 
우리를 
다시 이끌어 왔다. 
그러므로 이 피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가까워졌다.

우리가 
한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한 면으로 
육체 때문에 주어진 
규례들로 말미암아 생긴 
적대감을
없앴다. 
다른 한 면으로 
십자가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구속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바로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한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에베소서 2장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 
화평을 
복음으로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평을 
복음으로 전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영으로서 오셔서,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성취된 
화평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은 
육체로 말미암아 분리되었던,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다. 
가까운 데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가까이 있었던,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다.

새사람을 창조하기 위하여 
규례들을 없애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영으로서 
우리에게 오셔서 
화평의 복음을 
전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영으로, 
심지어 전파하시는 영으로 
오셨음을 
의미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과 
가까운 데 있는 이들 
모두가 
화평의 이 기쁜 소식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2일

엡 2:14-15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이 둘을 
하나로 만드셨고, 
적대감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셨으며,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이 둘을 
그분 자신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시어 
화평을 이루시려는 것이며

에베소서 2장 14절과 15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화평으로서 
죽으심으로,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없애 버리시고 
적대감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물어뜨리셨음을 본다. 
…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 가운데 있는 
모든 규례들을 
없애 버리신 것을 본다.
사람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류 가운데에는 
많은 규례와 풍습과 습관, 
그리고 생활하고 경배하는 
여러 방식이 생겼다. 
민족들 사이의 
이 모든 차이점들은 
인류를 
분열시키고 
흩어지게 하고 
혼란시켰다. 
그러므로 인류 가운데는 
화평이 없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규례들을 
없애 버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특별히 그분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기 위해 
죽으셨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국가와 인종 사이에도
막힌 담이 있다. 
이러한 담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몸으로서 
하나가 될 
길이 없을 것이다.

화목제물은 
화평하게 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갖거나 
다른 사람들과 화평을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주에 화평이 있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그분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셨다’

(골 1:20). 
이제 화목제물의 
예표의 성취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님을 
그리고 우리 서로를 
화평하게 하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며 
사람과 화평하게 된다.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는 
달콤한 분이시며 
만족을 주는 분이시다. 
성경의 예표에서 
화목제물은 
하나님과 
그분을 섬기는 이들을 위한 
음식이었다. 
실지로 오늘날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는 
달콤하고 
만족을 주는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지 않다. 
온 우주 안에 
화평이 없고, 
사람들 사이에도 
화평이 없다. 
학교에 
화평이 없고, 
사회에 
화평이 없으며, 
국가들 간에도 
화평이 없다. 
국제 연합(United Nations)이 있지만 
여전히 화평이 없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자녀와 부모 사이에 
화평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고, 
서로와 화평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모든 규례들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없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분의 죽음은 
인간 생활과 종교의 
다양한 규례들을 
폐하고 
없애 버렸다. 
더욱이, 
인종들 간의 차이와 
사회적인 계급의 차이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없어졌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그분께서 
우리의 화평이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의’라는 말은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까워졌다.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 
모두를 위하여 
완전한 구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둘을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화평이시고 
우리의 조화이시다. 
인류의 타락과 
선택된 백성의 부름받음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은 
분리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이 분리는 
제거되었다. 
이제 이 둘은 
하나(oneness)의 끈인 
구속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로 매는 띠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까지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화평이 없었다. 
에베소서 2장 15절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그분의 육체 안에서 
분리시키는 규례들을 
없애 버리시고,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을 
한 새사람으로
창조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이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다.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부정적인 모든 것들을 
처리하셨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음을 
의미한다. 
이제는 더 이상 
유대인 믿는 이들과 
이방인 믿는 이들 사이에, 
또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나누어짐이 없다.

 

1일

롬 15:33 
화평의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요 16:33 
내가 
여러분에게 
이러한 말들을 
한 것은 
여러분이 
내 안에서 
평안을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여러분이 
환난을 당하나,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하나님의 한 가지 속성은 
평안이다. 
신약은 
하나님의 평안과 
평안의 하나님을 
모두 말한다. 
평안의 하나님에 관해서 
로마서 16장 20절은
“화평의 하나님(혹은 평안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여러분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평안에 관해서 
빌립보서 4장 7절은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your hearts and your thoughts;
여러분의 마음들과 여러분의 생각들을)
지키실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평안은 사실상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우리 안에 주입된 
평안이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평안은 
고민에 대한 
안정제이고
(as the counterpoise to troubles;
걱정에 대한 평형추로서,
고난에 대한 안정으로서), 
염려에 대한 
해독제이다
(and the antidote to anxiety;
불안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 주입된다). 
평안의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 앞을
순찰하신다
(guard over …; 
… 위에서 경계하신다
[감시하신다, 지키신다, 보호하신다, 수비하신다]).
하나님의 평안과 
평안의 하나님은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평안도 역시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가 누리는 
참 평안은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평안의 하나님이시며, 
평화로운 본성을 지닌
평화로운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우리가 
화평하게 하는 이들이 되려면, 
우리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 
신성한 본성을 따라 
행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표현할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얻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죄들을 
하나님께 자백했고, 
주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했으며, 
그분의 피를 
적용했고, 
의롭다 함을 
받았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by faith;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화평을 누린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화평이 되신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으로서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고 
또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이신다.

그리스도인은 
약할 수 있지만 
강하다고 느끼며, 
고통을 느낄 수 있지만 
평안의 느낌을 가진다
(A Christian can be weak
yet feel strong;
he can feel pain
yet have
the sense of peace;
한 그리스도인은 약할 수 있지만
강하다고 느낀다;
그는 고통을 느낄 수 있지만
평안의 감각을 가진다). 
그는 
외부로부터 
환난을 당함으로 
고통을 느끼지만, 
내적으로는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만짐으로 
평안의 느낌을 가진다. 
만일 우리가 
외부로부터 
환난을 당할 때
내적으로 
전혀 평안이 없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지만 
그분 안에서 
평안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주님 안에 
사는 사람, 
영 안에 
사는 사람은 
외부로부터 
많은 환난을 당할 수 있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평안을 가진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가 
영 안에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만일 우리가 
환난 중에 있는 동안 
내적인 평안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 안에 살고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 
하물며 아무런 환난이 없을 때에도 
내적인 평안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 안에 살고 있지 않다는 
더 분명한 증거이다.

이제 완결되신 영과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신성하고 비밀한 영역에 대해 
요한복음 14장에 계시된 
내용을 살펴보자. 
1절은
“여러분은 
마음에 
근심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영역에서 
근심하는가? 
우리는 
이 땅 위에서 
물질적인 영역인 세상 안에서
(on earth,
in the world,
in the physical realm;
땅 위에서,
그 세상 안에서,
곧 그 물리적인 영역 안에서)
근심한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주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십시오.”

(직역하면,
“하나님 안으로 믿어 들어오고 
또 내 안으로 믿어 들어오십시오.”임 
—역자주)
(“Believe into God,
believe also into Me.”;
하나님 안으로 믿으라,
또한[마찬가지로, 게다가]
내 안으로 믿으라)
라고 계속 말씀하셨다. 
여기에‘ 안으로’라는 말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세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것이며, 
이러한 근심을 
해결하는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믿어 들어감으로써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영역이 나오는데, 
하나는 
온갖 근심거리들이 있는
(all the troubles are;
모든 고난들이
[곤란들, 걱정들, 재난들, 문제들, 수고들]
있는)
물질적인 영역
곧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평안이 있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 
곧 삼일 하나님이라는 
비밀한 영역이다
(mystical realm;
신비한[영적인] 영역이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주 예수님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러한 말들을 한 것은
여러분이 
내 안에서 
평안을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여러분이 
환난을 당하나,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습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물질적인 영역(‘세상’)과 
비밀한 영역(‘내[Me; 나]’), 
둘 다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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