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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앎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를 열망했다.

빌립보서에서 중심적인 문제는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알고 체험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갖는 것은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10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체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우리가 깨달은 그리스도의 탁월함이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받았고, 그런 다음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추구했다. 즉 체험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기를 추구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알다’라는 말은 ‘체험하다’와 똑같은 뜻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분을 체험하고, 그분을 누리고, 그분께 참여하고, 그분께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이처럼 그분을 체험함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단순히 그분에 관한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 자체를 얻는 것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대가를 지불함으로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체험하고 누리며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모든 것을 포함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얻는 생활이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상당히 체험하고 얻었지만, 자신이 그리스도를 완전히 체험했다거나 최대한으로 얻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바울은 여전히 목표, 곧 그리스도를 가장 충만한 정도로 얻는 것을 위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바울은 가장 충만하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유대교에서의 체험들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과거의 체험 가운데 머물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과거의 체험을 잊지 않고 그 안에 머문다면, 그 체험들이 아무리 참된 것이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더욱더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그리스도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시고 우리가 소유해야 할 그분의 풍성은 광대한 영토와 같기 때문에, 바울은 이 영토의 가장 먼 곳까지 이르기 위해 힘을 다해 수고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분 안에서 발견된 결과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로 인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 ― 빌 3:9.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의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그렇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지 못하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고 체험하기를 열망했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킨 그분의 부활 생명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이시다.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이이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보아라, 영원토록 살아 있으며,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 계 1:17하-18.

타락으로 인하여 죽음이 들어왔고, 이제는 모든 사람을 음부로 모으기 위해 운행하고 있다.

죽음과 음부의 열쇠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우리 구주의 손에 있다.

“처음과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가 이렇게 말한다.” ― 계 2:8.

‘다시 살아난’은 부활을 가리킨다.

주님은 죽으셨지만 다시 사셨다. 그분은 죽음 안으로 들어가셨지만, 죽음은 그분을 붙잡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부활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음부로 들어가셨고, 죽음을 통과하셨으며, 죽음을 이기셨고, 승리에 차서 죽음에서 나오셨다. 이것이 부활이다.

부활은 한 사람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장애물들, 심지어 모든 것 중 가장 큰 장애물인 죽음까지도 돌파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부활은 천연적인 영역의 모든 장애물을 깨뜨렸다. 따라서 예수님은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여 어떤 것에도 더 이상 매이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가장 큰 제한은 공간과 시간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제한할 수 없다.

죽음은 가장 큰 제한이지만, 부활이 죽음을 정복했다. 그러므로 부활이 모든 것 중 가장 큰 능력이다.

부활은 죽음에 의해 어떤 손상이나 해를 당하지 않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다.

죽음은 부활 생명에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죽음은 다른 형태의 생명에는 온갖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손상할 수 없는 오직 한 종류의 생명이 있는데, 바로 부활 생명이다.

부활은 죽음을 통과하고 죽음에 붙잡힐 수 없는 생명이다.

성경의 완전한 계시에 따르면, 하나님 자신이 부활 생명이시다.

그 영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부활 능력의 실재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체험하려면,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음을 보아야 한다.

부활에 대한 가장 높은 정의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시게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믿는 이들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생명 주시는 영으로 변형되신 것이다.

부활의 원칙은 타고난 생명이 죽음당하고 그 자리에 신성한 생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죽음을 통과하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것이 부활이다.

부활은 죽음 밖으로 나와 천연적인 영역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다.

부활은 어떤 사건이나 환경도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가진 우리를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 존재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부분이 부활 안에서 높아져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하나 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 의해 살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 때, 우리는 부활 안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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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요 11:25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고,

롬 8:11 또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에 의해 어떤 손상이나 해를 당하지 않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다. 죽음은 부활 생명에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죽음은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과 사람의 생명을 포함한 다른 형태의 생명에는 온갖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손상할 수 없는 오직 한 종류의 생명이 있는데, 바로 부활 생명이다. 부활은 죽음을 통과하고 죽음에 붙잡힐 수 없는 생명이다. 성경의 완전한 계시에 따르면, 하나님 자신이 부활 생명이시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의 실재는 그 영이다. 그리스도를 “거룩한 영에 따라 말하자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이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로마서 1장 4절이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더욱이 로마서 8장 11절은 “또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두 절은 모두 그 영께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의 실재이심을 가리킨다.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이 그분의 부활 능력이시며, 그 영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이 능력을 체험해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신성한 생명을 모방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 사역의 목표는 모방이 아닌 분배이다. 우리의 목표는 무언가 신성한 것을 여러분 안으로 분배함으로써, 여러분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인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한 가지 좋은 면은, 자신의 생명을 한쪽으로 제쳐 두고 십자가의 죽음 아래 둘지 그렇게 하지 않을지를 결정할 역량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이 결정을 내리실 수는 없다. 우리 스스로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것을 지지하는 강한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형제님들, 여러분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기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저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끝나고 죽음 안에 놓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그렇게 해서 죽음 안에 놓인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은 부활 생명이 일어날 기반이 될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아는 데 이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 수 없다. 우리가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사는 것이다.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우리 모두는 십자가로 가서 거기에 머물 필요가 있다. 결혼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십자가로 가는 것이다. 유일한 길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가정생활에서 그러할 뿐 아니라, 더더욱 교회생활에서도 그러하다. 교회생활에서 성도들 가운데 좋은 형제나 자매가 되려면, 먼저 우리가 십자가로 가서 못 박혀야 한다. 다른 이들을 변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에 결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십자가로 가서 거기에 머물라. 이것이 그분의 경륜에 따른 길이다. 우리가 기꺼이 십자가로 가서 거기에 머물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게 될 것이다.

사탄이 여러분을 공격할 때,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무르라. 그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의 전부이다. 사탄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본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신성한 생명이 표현되도록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 일어날 기반을 제공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격할 필요가 없다. 사실 기도하는 것조차도 항상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십자가로 가서 거기에 머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신성한 생명이 해방되어 나타나게 될 것이다.

5일

행 2:24 하나님은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에 붙잡혀 계실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엡 1:19-20 또한 믿는 우리들을 향하여 강한 권능으로 운행하는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 운행되게 하시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하늘들의 영역 안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셨으며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바울은 왜 십자가의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십자가가 부정적인 것과 관련된 죽음이고 종결이며 끝마침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부활은 긍정적인 것, 즉 죽음에서 일으켜진 생명이며 종결 후에 다시 얻어진 것이다. 부활은 죽음 밖으로 나와 천연적인 영역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다. 또한 부활은 죽음을 통해 온전해진 것이다. 여러분의 유창함은 죽음을 통과했는가? 죽음은 여러분의 입의 기능적인 능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죽음은 여러분의 입의 활동을 종결하는 것이고, 부활 안에서 그 활동을 되찾는 것이다. 여러분의 사상은 종결하는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 안에서 하나님에게서 여러분에게 돌아왔는가? 여러분의 일은 일반적인 생활의 영역 안에 있는가, 부활의 영역 안에 있는가? 일반적인 생활의 영역은 우리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인 반면, 부활의 영역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다.

부활이란 무엇인가? 부활은 곧 죽음을 통과하고 죽음 밖으로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지혜와 유창함과 타고난 매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저는 이러한 것들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러한 것들을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기꺼이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기 원하며, 이러한 것들을 죽음 안에서 포기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다시 되찾기를 원합니다.” 부활의 체험은 죽음 안에서 타고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더 이상 그것들을 의지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삼 일이나 삼 개월이나 삼 년(아무도 그 기간을 모른다)이 될 수도 있는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고 우리는 자신의 유창함과 지혜와 매력을 돌려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다시 얻더라도, 그것들은 이전과 같지 않다. 우리의 타고난 선함과 우리가 선천적으로 소유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끊어지게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감히 그러한 것들을 사용할 수 없고, 오히려 주님께서 그분의 기쁘심에 따라 그것들을 사용하시도록 그분께 맡겨 드린다. 그것들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긴다.

죽음과 부활의 체험은 하나의 순환이다. 이 체험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죽음을 통과하게 하고, 그다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돌려준다. 죽음과 다시 얻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근거 위에 놓이고, 그 영의 능력을 표현할 자격을 얻는다. 나는 맛디아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행 1:16-23). 제자들은 침례자 요한의 회개의 전파와 주님께서 침례 받으시고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부터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셨던 때까지 그들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했다. 선택받은 그 사람은 그분의 부활의 증인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성령의 능력을 기다려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능력을 기다렸던 사도들은 바로 일하러 나가지 않았다. 그들과 주님 사이에 이미 있었던 역사와 이면의 일들로 인해 그들은 예루살렘 안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오직 그러한 역사와 배경이 있는 사람만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죽음 안에서 잃고 부활 안에서 다시 얻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4일

계 1:17-18 …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이이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보아라, 영원토록 살아 있으며,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계 2:8 …처음과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가 이렇게 말한다.

교회들 가운데를 거니시는 바로 그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교회들의 머리이시고, 교회들은 그분께 속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의 표현인 교회들 또한 살아 있고 신선하며 강해야 한다.

사람의 타락과 죄 때문에 죽음이 이 땅에 들어와, 지금은 이 땅 위에서 일하면서 죄 있는 모든 사람을 음부(陰府)에 모으고 있다. 따라서 죽음은 모으는 것이고, 음부는 가두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음부를 주관하는 열쇠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우리 구주의 손안에 있다.

‘다시 살아난’(계 2:8)은 부활을 가리킨다. 주님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다. 주님은 죽음 안으로 들어가셨지만, 죽음은 그분을 붙잡을 수 없었다(행 2:24). 왜냐하면 그분께서 부활이시기 때문이다(요 11:25). 고난당하는 교회는 주님을 그러한 분으로 알아야 하며, 그럴 때 어떠한 고난도 견딜 수 있다. 고난이 아무리 극심하더라도 교회는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은 죽음을 견딜 수 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라고 말한다. 이 절에 따르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기를 열망했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킨 그분의 부활 생명이다(엡 1:19-20).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의 실재는 그 영이다(롬 1:4). 우리가 이 능력을 알고 체험하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시되어야 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죽음은 부활의 근거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려면,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이 표현될 수 있도록 그분의 부활 능력이 솟아오를 근거가 된다.

주님께서 죽음 안으로 들어가시고 죽음에서 일어나 나오신 것은 그분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그분의 지극히 큰 부활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된다. 십자가와 무덤과 음부의 권세는 살아 계신 주님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주님은 생명의 주님이시다. 주님은 죽음에 붙잡혀 계실 수 없으셨다(행 2:24). 사탄은 세상과 환경과 십자가와 무덤과 마지막으로 음부를 이용하여 주님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주님은 이 모든 공격을 이겨 내셨다. 주님은 기꺼이 죽음의 침례를 통과하셨고, 그다음에 음부로 들어가셔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하도록 허락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살아 계신 주님이시고, 사탄은 그분을 결코 정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었고, 무덤이 그분을 제한할 수 없었으며, 음부 또한 그분을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에 그분은 부활하신 것이다. 부활은 죽음을 벗어나는 것이자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부활은 살아 있는 것과 다르다. 살아 있기 위해서는 죽음을 통과할 필요가 없지만, 부활 안에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을 통과하고 죽음에서 일어나 나와야 한다. 부활은 죽음의 시험을 견뎌 낸 것이다. 즉 죽음을 통과해서 죽음에서 일어나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이이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보아라, 영원토록 살아 있으며,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계 1:17-18)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죽으셨지만 죽음을 이기셨다. 죽음은 온 힘을 다해 주님께 대항했지만 주님을 정복할 수 없었다. 부활의 원칙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에서 일어나 나오는 것이다. 부활의 하나님께서 시험을 거치심으로, 그분께서 소유하신 생명이 흔들릴 수 없는 생명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3일

빌 3:12-14 …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으셨기 때문에, 나 또한 그리스도를 붙잡으려고 힘을 다하여 추구할 뿐입니다. 형제님들, 나는 아직 내가 붙잡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일만을 합니다. 즉 뒤에 있는 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을 향하여 힘을 다해 수고함으로써, 나에게 주실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상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위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상당히 체험하고 얻었지만, 아직 자신이 그리스도를 완전히 체험했다거나 최대한으로 얻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목표, 곧 그리스도를 가장 충만한 정도로 얻는 것을 위하여 힘을 다해 추구했다.

바울은 가장 충만하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유대교에서의 체험들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과거의 체험 가운데 머무르지도 않았다. 그는 뒤의 것을 잊어버렸다. 우리가 과거의 체험을 잊지 않고 그 안에 머문다면, 그 체험들이 아무리 참된 것이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더욱더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그리스도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시다. 우리가 소유해야 할 그분의 풍성은 광대한 영토와 같다. 바울은 이 영토의 가장 먼 곳까지 이르기 위해, 힘을 다해 수고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됨으로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바울의 관념에 따르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려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 살고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 우리는 분명 그분을 알 것이다.

바울의 의는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 내신 의였다. 빌립보서 3장 10절은 “나는 그리스도(를) … 알고”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는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의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그렇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다른 이를 더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노력으로 더 열정적일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지 못하게 된다. 그것보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부터 의를 살아 내실 수 있으며, 바로 이 의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한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 있는 ‘그리스도를 알고’라는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10절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아는 데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요인은 오직 하나뿐이다. 빌립보서 3장 9절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노력에 의지하여 율법을 지키고, 열정적이고,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과, 수고와, 스스로 선을 행하는 모든 행위와, 열정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모두 멈출 필요가 있다. 오직 자신의 모든 노력을 중단하고 단순히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서부터 살아 내어진 의 안에 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이 의는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말한 의이다. “이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셔서 우리에게 지혜, 곧 의와 거룩하게 함과 구속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가 되게 하신다. 우리가 자신을 멈추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가 되게 하신다. 첫째 단계에서 이 의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도록, 즉 우리가 구원받도록 한다. 둘째 단계에서 이 의는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삶, 곧 그리스도를 살아 내는 그러한 의를 살아 내도록 하고, 또한 이기는 삶을 살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 의는 구원과 이기는 것 둘 다를 포함한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이 이루어 낸 의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이기는 것도 우리 자신이 이루어 낸 의로 말미암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우리의 의로 살아 나타나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 말미암는다.

2일

빌 3:9-11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나온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진 뒤에도 왜 여전히 그리스도를 알기를 추구했는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계시로 말미암아 온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말하는 ‘그분을 아는 것’은 계시가 아닌 체험으로 말미암아 온다. 나의 체험에 따르면, 여기의 ‘알다’라는 말은 ‘체험하다’와 똑같은 뜻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분을 체험하고, 그분을 누리고, 그분께 참여하고, 그분께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먹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먼저 우리는 어떤 식품을 고를 것이고, 값을 지불한 다음 그것을 요리한다. 우리는 요리한 것을 먹음으로써 우리가 사 온 그 식품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가를 지불하여 그리스도를 얻어야 하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자신에게서 나온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 존재로부터 살아 낸 하나님 자신인 의를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한 번에 조금씩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그분을 알 수 있다. 메시지를 듣고 계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을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내가 여러분의 집을 방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 발견되겠는가? 여러분의 좋은 행위 안에서인가, 그리스도 안에서인가? 다른 이들이 우리를 지켜볼 때 우리가 있는 곳이 우리가 어느 영역에서 사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가 문화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문화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리의 선한 행동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선한 행동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리가 어느 영역 안에서 살고 있든지, 바로 그곳에서 다른 이들이 우리를 목격하고 지켜보고 발견할 것이다. 바울이 아직 율법에 따라 살고 있을 때, 그는 율법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보기 시작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것, 즉 사랑과 친절과 겸손과 지혜와 인내와 의도와 태도, 심지어 말과 어조와 표현이 되셔야 한다는 이상을 보았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이러한 탁월함으로 인해 그는 기꺼이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움에 대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그다음에 우리가 본 이 그리스도를 얻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보석 상점에 가서 진열된 많은 귀중한 보석을 본다고 해 보자. 이 보석들을 보는 것과 얻는 것은 완전히 서로 다른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단순히 그분에 관한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 자체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격의 충만이 체현되신 분이시며(골 2:9),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그림자의 실재이시다(골 2:16-17).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엡 3:8)을 체험하고 누리며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을 때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 살고 체험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런 뒤에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보거나 지켜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덕 안에서 발견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것이다. 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 우리의 의이신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 우리의 표현이 되실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단지 일반적인 방식으로 발견되지 않고, 우리가 살아 낸 그리스도 자신인 이러한 의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만족하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섬기는 이들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기뻐하고 만족할 것이다.

신언노트, 2023 07 23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앎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기 위하여(체험하기 위하여)
자신의 의를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가진
상태 안에 살았다.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지는 것은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체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이며,
그분을
충분히 알고
체험하는 것이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받았고,
그런 다음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추구했다.
즉 체험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기를
추구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얻은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
우리는
그분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항상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능가한다.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더 높은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더 높은 체험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과거 지식에
제한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구원받기 전에
여러분에게는 평안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평안과 기쁨이 있다.
나는 결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이러한 방면들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분명
주 예수님을
나의 평안과 안식과 기쁨으로 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러한 제한된 지식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의 지식은
진보해야 한다.
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매혹되게 하고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그분 외의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게 한다.
만일 우리가
뛰어난 가치를 지니신
그리스도를 본다면,
우리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뿐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종교와 철학까지도
기꺼이 해로운 것으로 여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외의 모든 것을
버리게 하는 요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이다.

바울이
다소의 사울이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율법이 놀라운 것이라고 생각했고,
유대인으로서
그것을 자랑하고
그것에 대해 열정적이었다.
그는
율법을
지극히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정으로
교회를 박해했다.
어느 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하늘에서
한 줄기의 빛이
그를 비추었고,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때 그는
율법보다 훨씬 탁월하신 어떤 분,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상을 보았다.
그때부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율법보다 무한히 더 뛰어나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체현이신
살아 계신 한 인격을 보았다.
이 살아 계신 인격은
금에 비유될 수 있고,
율법은
진흙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가
금에 관해 알기 전에는
진흙을 감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금을 봄으로써
금에 대한
지식의 탁월함을 얻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얻게 된
바울의 체험을 예시해 준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우리가 깨달은
그리스도의 탁월함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를
열망했다.

빌립보서에서
중심적인 문제는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알고
체험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진 뒤에도
왜 여전히
그리스도를 알기를
추구했는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계시로 말미암아 온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말하는
‘그분을 아는 것’은
계시가 아닌
체험으로 말미암아 온다.
나의 체험에 따르면,
여기의 ‘알다’라는 말은
‘체험하다’와 똑같은 뜻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분을 체험하고,
그분을 누리고,
그분께 참여하고,
그분께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먹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먼저 우리는
어떤 식품을 고를 것이고,
값을 지불한 다음
그것을 요리한다.
우리는
요리한 것을 먹음으로써
우리가 사 온
그 식품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가를 지불하여
그리스도를 얻어야 하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자신에게서 나온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 존재로부터 살아 낸
하나님 자신인 의를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한 번에 조금씩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그분을 알 수 있다.
메시지를 듣고
계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을
교리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내가
여러분의 집을 방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 발견되겠는가?
여러분의 좋은 행위 안에서인가,
그리스도 안에서인가?
다른 이들이
우리를 지켜볼 때
우리가 있는 곳이
우리가 어느 영역에서 사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가
문화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문화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리의 선한 행동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선한 행동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리가
어느 영역 안에서 살고 있든지,
바로 그곳에서
다른 이들이
우리를
목격하고 지켜보고 발견할 것이다.
바울이 아직
율법에 따라 살고 있을 때,
그는
율법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보기 시작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것,
즉 사랑과 친절과
겸손과 지혜와
인내와 의도와 태도,
심지어 말과 어조와 표현이
되셔야 한다는
이상을 보았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이러한 탁월함으로 인해
그는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으로 여겼다.
더 나아가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움에 대한
이상을 보아야 한다.
그다음에
우리가 본
이 그리스도를 얻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보석 상점에 가서
진열된 많은 귀중한 보석을
본다고 해 보자.
이 보석들을
보는 것과 얻는 것은
완전히 서로 다른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단순히 그분에 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 자체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격의 충만이
체현되신 분이시며,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그림자의 실재이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을
체험하고 누리며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을 때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 살고
체험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런 뒤에
다른 이들이
우리를 보거나 지켜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덕 안에서 발견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것이다.
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
우리의 의이신 그분이
하나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
우리의 표현이 되실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단지 일반적인 방식으로
발견되지 않고,
우리가 살아 낸
그리스도 자신인
이러한 의 안에서
발견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만족하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섬기는 이들도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에만
기뻐하고 만족할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알다’라는 말은
‘체험하다’와 똑같은 뜻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이처럼
그분을 체험함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대가를 지불함으로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체험하고 누리며 소유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상당히 체험하고 얻었지만,
아직 자신이
그리스도를
완전히 체험했다거나
최대한으로 얻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목표,
곧 그리스도를
가장 충만한 정도로 얻는 것을 위하여
힘을 다해 추구했다.

바울은
가장 충만하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유대교에서의 체험들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과거의 체험 가운데
머무르지도 않았다.
그는
뒤의 것을 잊어버렸다.
우리가
과거의 체험을 잊지 않고
그 안에 머문다면,
그 체험들이
아무리 참된 것이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더욱더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된다.

그리스도는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하시다.
우리가 소유해야 할
그분의 풍성은
광대한 영토와 같다.
바울은
이 영토의
가장 먼 곳까지 이르기 위해,
힘을 다해
수고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됨으로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바울의 관념에 따르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려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 살고
다른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
우리는 분명
그분을 알 것이다.

바울의 의는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 내신 의였다.
빌립보서 3장 10절은
“나는
그리스도(를) … 알고”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는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의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그렇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다른 이를 더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노력으로
더 열정적일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지 못하게 된다.
그것보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부터
의를 살아 내실 수 있으며,
바로 이 의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한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 있는
‘그리스도를 알고’라는 표현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10절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아는 데에는
반드시 근거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요인은
오직 하나뿐이다.
빌립보서 3장 9절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노력에 의지하여
율법을 지키고, 열정적이며,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과, 수고와,
스스로 선을 행하는 모든 행위와,
열정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모두
멈출 필요가 있다.
오직 자신의 모든 노력을 중단하고
단순히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서부터 살아 내어진 의 안에 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이 의는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말한 의이다.
“이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셔서
우리에게
지혜,
곧 의와 거룩하게 함과 구속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가 되게 하신다.
우리가
자신을 멈추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가 되게 하신다.
첫째 단계에서
이 의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도록,
즉 우리가 구원받도록 한다.
둘째 단계에서
이 의는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삶,
곧 그리스도를 살아 내는
그러한 의를 살아 내도록 하고,
또한 이기는 삶을 살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 의는
구원과 이기는 것
둘 다를 포함한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이 이루어 낸
의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이기는 것도
우리 자신이 이루어 낸
의로 말미암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우리의 의로 살아 나타나시도록
허락해 드림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모든 것을 포함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얻는 생활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분 안에서 발견된 결과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의’로 인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
― 빌 3:9.

교회들 가운데를 거니시는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교회들의 머리이시고,
교회들은
그분께 속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의 표현인
교회들 또한
살아 있고
신선하며
강해야 한다.

사람의 타락과 죄 때문에
죽음이 이 땅에 들어와,
지금은 이 땅 위에서 일하면서
죄 있는 모든 사람을
음부(陰府)에 모으고 있다.
따라서 죽음은
모으는 것이고,
음부는
가두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음부를 주관하는 열쇠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우리 구주의 손안에 있다.

‘다시 살아난’(계 2:8)은
부활을 가리킨다.
주님은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다.
주님은
죽음 안으로 들어가셨지만,
죽음은
그분을 붙잡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부활이시기 때문이다.
고난당하는 교회는
주님을
그러한 분으로 알아야 하며,
그럴 때
어떠한 고난도
견딜 수 있다.
고난이 아무리 극심하더라도
교회는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은
죽음을 견딜 수 있다.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라고
말한다.
이 절에 따르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기를 열망했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킨
그분의 부활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의 실재는
그 영이다.
우리가
이 능력을 알고 체험하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시되어야 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죽음이
부활의 근거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려면,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신성한 생명이
표현될 수 있도록
그분의 부활 능력이 솟아오를
근거가 된다.

주님께서
죽음 안으로 들어가시고
죽음에서 일어나 나오신 것은
그분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그분의
지극히 큰
부활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된다.
십자가와
무덤과
음부의 권세는
살아 계신 주님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주님은
생명의 주님이시다.
주님은
죽음에
붙잡혀 계실 수 없으셨다.
사탄은
세상과 환경과
십자가와 무덤과
마지막으로 음부를 이용하여
주님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주님은
이 모든 공격을
이겨 내셨다.
주님은 기꺼이
죽음의 침례를 통과하셨고,
그다음에
음부로 들어가셔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하도록
허락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살아 계신 주님이시고,
사탄은
그분을 결코
정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었고,
무덤이
그분을 제한할 수 없었으며,
음부 또한
그분을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에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이다.
부활은
죽음을 벗어나는 것이자
죽음을 이기는 것이다.

부활은
살아 있는 것과 다르다.
살아 있기 위해서는
죽음을 통과할
필요가 없지만,
부활 안에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을 통과하고
죽음에서 일어나
나와야 한다.
부활은
죽음의 시험을
견뎌 낸 것이다.
즉 죽음을 통과해서
죽음에서 일어나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이이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보아라,
영원토록 살아 있으며,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계 1:17-18)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죽으셨지만
죽음을 이기셨다.
죽음은
온 힘을 다해
주님께 대항했지만
주님을 정복할 수 없었다.
부활의 원칙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에서 일어나
나오는 것이다.
부활의 하나님께서
시험을 거치심으로,
그분께서 소유하신 생명이
흔들릴 수 없는 생명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고 체험하기를
열망했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킨
그분의 부활 생명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이시다.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이이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보아라,
영원토록 살아 있으며,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 계 1:17하-18.

타락으로 인하여
죽음이 들어왔고,
이제는
모든 사람을
음부로 모으기 위해
운행하고 있다.

죽음과 음부의 열쇠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우리 구주의 손에 있다.

“처음과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가 이렇게 말한다.” ― 계 2:8.

‘다시 살아난’은
부활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죽으셨지만
다시 사셨다.
그분께서
죽음 안으로 들어가셨지만,
죽음은
그분을
붙잡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부활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음부로 들어가셨고,
죽음을 통과하셨으며,
죽음을 이기셨고,
승리에 차서
죽음에서 나오셨다.
이것이 부활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바울은 왜
십자가의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십자가가
부정적인 것과 관련된
죽음이고 종결이며 끝마침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부활은
긍정적인 것,
즉 죽음에서 일으켜진 생명이며
종결 후에 다시 얻어진 것이다.
부활은
죽음 밖으로 나와
천연적인 영역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다.
또한 부활은
죽음을 통해
온전해진 것이다.
여러분의 유창함은
죽음을 통과했는가?
죽음은
여러분의 입의
기능적인 능력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죽음은
여러분의 입의 활동을
종결하는 것이고,
부활 안에서
그 활동을 되찾는 것이다.
여러분의 사상은
종결하는 죽음을 통과하고
부활 안에서
하나님에게서 여러분에게 돌아왔는가?
여러분의 일은
일반적인 생활의 영역 안에 있는가,
부활의 영역 안에 있는가?
일반적인 생활의 영역은
우리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인 반면,
부활의 영역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다.

부활이란 무엇인가?
부활은 곧
죽음을 통과하고
죽음 밖으로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지혜와 유창함과 타고난 매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한다.
“주님,
저는
이러한 것들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러한 것들을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기꺼이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기 원하며,
이러한 것들을
죽음 안에서 포기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다시 되찾기를 원합니다.”
부활의 체험은
죽음 안에서
타고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더 이상 그것들을 의지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삼 일이나 삼 개월이나 삼 년이
될 수도 있는
(아무도
그 기간을 모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고
우리는
자신의 유창함과 지혜와 매력을
돌려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다시 얻더라도,
그것들은
이전과 같지 않다.
우리의 타고난 선함과
우리가 선천적으로 소유한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끊어지게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감히
그러한 것들을 사용할 수 없고,
오히려 주님께서
그분의 기쁘심에 따라
그것들을 사용하시도록
그분께 맡겨 드린다.
그것들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긴다.

죽음과 부활의 체험은
하나의 순환이다.
이 체험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죽음을 통과하게 하고,
그다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돌려준다.
죽음과
다시 얻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근거 위에 놓이고,
그 영의 능력을 표현할
자격을 얻는다.
나는
맛디아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행 1:16-23).
제자들은
침례자 요한의
회개의 전파와
주님께서
침례 받으시고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부터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셨던 때까지
그들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했다.
선택받은 그 사람은
그분의 부활의 증인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성령의 능력을 기다려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능력을 기다렸던 사도들은
바로 일하러 나가지 않았다.
그들과 주님 사이에
이미 있었던 역사와
이면의 일들로 인해
그들은
예루살렘 안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오직 그러한 역사와 배경이
있는 사람만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죽음 안에서 잃고
부활 안에서 다시 얻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부활은
한 사람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장애물들,
심지어 모든 것 중 가장 큰 장애물인
죽음까지도 돌파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부활은
천연적인 영역의
모든 장애물을 깨뜨렸다.
따라서 예수님은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여
어떤 것에도
더 이상 매이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가장 큰 제한은
공간과 시간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제한할 수 없다.

죽음이
가장 큰 제한이지만,
부활이
죽음을 정복했다.
그러므로 부활이
모든 것 중
가장 큰 능력이다.

부활은
죽음에 의해
어떤 손상이나 해를 당하지 않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다.
죽음은
부활 생명에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죽음은
식물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과
사람의 생명을 포함한 다른 형태의 생명에는
온갖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손상할 수 없는
오직 한 종류의 생명이 있는데,
바로 부활 생명이다.
부활은
죽음을 통과하고
죽음에 붙잡힐 수 없는 생명이다.
성경의 완전한 계시에 따르면,
하나님 자신께서
부활 생명이시다.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의
실재는 그 영이다.
그리스도를
“거룩한 영에 따라 말하자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이분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로마서 1장 4절이
이 사실을 입증해 준다.
더욱이 로마서 8장 11절은
“또한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두 절은 모두
그 영께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의
실재이심을 가리킨다.
사실상 그리스도 자신께서
그분의 부활 능력이시며,
그 영은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이 능력을
체험해야 한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신성한 생명을 모방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 사역의 목표는
모방이 아닌 분배이다.
우리의 목표는
무언가 신성한 것을
여러분 안으로 분배함으로써,
여러분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인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인간 생명의 한 가지 좋은 면은,
자신의 생명을
한쪽으로 제쳐 두고
십자가의 죽음 아래 둘지
그렇게 하지 않을지를 결정할
역량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이 결정을 내리실 수는 없다.
우리 스스로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그것을 원한다면,
그것을 지지하는
강한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형제님들,
여러분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기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저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끝나며
죽음 안에 놓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그렇게 해서
죽음 안에 놓인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은
부활 생명이 일어날
기반이 될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아는 데
이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 수 없다.
우리가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사는 것이다.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우리 모두는
십자가로 가서
거기에 머물 필요가 있다.
결혼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십자가로 가는 것이다.
유일한 길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가정생활에서 그러할 뿐 아니라,
더더욱 교회생활에서도 그러하다.
교회생활에서
성도들 가운데
좋은 형제나 자매가 되려면,
먼저 우리가
십자가로 가서
못 박혀야 한다.
다른 이들을 변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에
결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십자가로 가서
거기에 머물라.
이것이
그분의 경륜에 따른 길이다.
우리가 기꺼이
십자가로 가서
거기에 머물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을
알게 될 것이다.

사탄이
여러분을 공격할 때,
십자가로 가서
거기 머무르라.
그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의 전부이다.
사탄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본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신성한 생명이 표현되도록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이 일어날
기반을 제공한다.
따라서 우리는
반격할 필요가 없다.
사실 기도하는 것조차도
항상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십자가로 가서
거기에 머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신성한 생명이
해방되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부활은
죽음에 의해
어떤 손상이나 해를 당하지 않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다.

죽음은
부활 생명에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죽음은
다른 형태의 생명에는
온갖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손상할 수 없는
오직 한 종류의 생명이 있는데,
바로 부활 생명이다.

부활은
죽음을 통과하고
죽음에 붙잡힐 수 없는
생명이다.

성경의 완전한 계시에 따르면,
하나님 자신께서
부활 생명이시다.

그 영께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부활 능력의
실재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체험하려면,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음을
보아야 한다.

부활에 대한
가장 높은 정의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시게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믿는 이들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생명 주시는 영으로
변형되신 것이다.

부활의 원칙은
타고난 생명이
죽음당하고
그 자리에
신성한 생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죽음을 통과하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그것이 부활이다.

부활은
죽음 밖으로 나와
천연적인 영역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다.

부활은
어떤 사건이나 환경도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가진
우리를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 존재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부분이
부활 안에서 높아져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하나 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 의해 살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에 의해 살 때,
우리는
부활 안에 있는 것이다.

1일

빌 3:8 그럴 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또한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을 알고 …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기 위하여(체험하기 위하여) 자신의 의를 갖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가진 상태 안에 살았다.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갖는 것은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체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갖는 것이며, 그분을 충분히 알고 체험하는 것이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받았고, 그런 다음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추구했다. 즉 체험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기를 추구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얻은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빌 3:8)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때, 우리는 그분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항상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능가한다. 만일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더 높은 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더 높은 체험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과거 지식에 제한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구원받기 전에 여러분에게는 평안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평안과 기쁨이 있다. 나는 결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이러한 방면들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분명 주 예수님을 나의 평안과 안식과 기쁨으로 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러한 제한된 지식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아는 우리의 지식은 진보해야 한다. 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매혹되게 하고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그분 외의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게 한다. 만일 우리가 뛰어난 가치를 지니신 그리스도를 본다면, 우리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뿐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종교와 철학까지도 기꺼이 해로운 것으로 여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외의 모든 것을 버리게 하는 요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이다.

바울이 다소의 사울이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율법이 놀라운 것이라고 생각했고, 유대인으로서 그것을 자랑하고 그것에 대해 열정적이었다. 그는 율법을 지극히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율법에 대한 열정으로 교회를 박해했다. 어느 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하늘에서 한 줄기의 빛이 그를 비추었고,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때 그는 율법보다 훨씬 탁월하신 어떤 분,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이상을 보았다. 그때부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율법보다 무한히 더 뛰어나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체현이신 살아 계신 한 인격을 보았다. 이 살아 계신 인격은 금에 비유될 수 있고, 율법은 진흙에 비유될 수 있다. 우리가 금에 관해 알기 전에는 진흙을 감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금을 봄으로써 금에 대한 지식의 탁월함을 얻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얻게 된 바울의 체험을 예시해 준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은 우리가 깨달은 그리스도의 탁월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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