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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의 내재적인 의미

The Intrinsic Significance
of the Experience of Christ
그리스도의 그 체험의
그 본질적인 중요성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비밀이다.

하나님은
비밀이시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며
(골 2:2),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엡 3:4).
따라서 교회는 사실상
비밀 속의 비밀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비밀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사랑은
제한적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살아 나타낸
합당한 사랑은
제한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비밀이다
― 엡 3:19상.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은
제한 없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빌 1:20).
그것은
우리가 의지해 살고 있는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무한하시다는 것을
온 우주에
보여 주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그의 무한한 인내로
체험한 것은
무한하신 그리스도를
확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에 의해
그리스도를 삶으로써
가지게 되는 속성들은
어떤 것이든
무한할 것이며
따라서 비밀할 것이다
― 빌 1:19-21상.

심지어 우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다함이 없으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서
확대되시는 것이다
― 마 18:21-22.

고난 가운데서
우리는 단순히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체험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확대하여,
그분을
제한이 없으신 분으로
표현할 것이다.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은
기쁨이다
― 고후 12:7-10.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비밀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어떤 면을 체험하든지
그것은 무한하다.
우리가
이 이상을 본다면,
이것은
우리의 삶을
통제할 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함을
강화할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교회생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총체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살며,
우리의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모두 더해져
교회생활을 이룬다.
우리가
교회로서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완전한 비밀이다
― 딤전 3:15-16.

바울은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빌 1:21상)
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체험하고 사는
그리스도는
비밀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 대해
어떤 확신도
가져서는 안 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체험이
비밀하기 때문이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복음의 확산을 위해
교통하는 것임을
밝혀 준다
― 빌 1:3-6.

우리가
구원받은 때부터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복음을 전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생활은
개인주의적으로가 아니라
단체적으로
복음을 확산하는 생활,
복음을 전파하는 생활이다.
우리가
복음을 확산하는 일에 있어서
더 많이 교통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많이
체험하고 누리게 된다.
이럴 때
우리의
자아와 야심과
선호와 선택은
죽음을 당한다.

우리가
말할 때든지
잠잠할 때든지,
우리의
생명과 생활과
존재와 온 인격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어야 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명령한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복음의 믿음과 더불어
한 혼으로
함께 분투하는 것’이다
― 빌 1:27.

복음의 일을 위해
한 혼이 되고
같은 혼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해
한 영 안에 있는 것보다
더 어렵다
― 빌 2:20-21, 30.

한 혼이 되려면,
우리 영 안에서
거듭난 뒤에
더 전진하여
우리 혼 안에서
변화되어야 한다
― 고후 3:18, 롬 12:2.

우리가
우리의
애정과 생각과 결정에서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한 혼을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닌 한,
우리는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 안에 있지 않은 것이며,
우리의 품행은
복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다.

교회 안의 모든 지체들이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질 때,
이 하나는
확신을 주고
굴복시키고
매혹적일 것이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대한
책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것에 관한 것이고
이러한 체험과 누림은
기쁨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이 책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 빌 1:4, 18, 25, 2:2,
17-18, 28-29, 3:1, 4:1, 4.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주로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은
우리의 혼 안에 있는 것이다.
음식을 억지로 받아먹지만
누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처럼,
많은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지만
누리지 못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없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
여기서의 문제는
우리의 혼,
곧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있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누림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봐
다소 염려가 된다.”
(위트니스 리 전집, 1978년, 1권,
그리스도를 체험함, 497쪽)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그들의 혼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많이 누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니며
혼 안에서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빌 2:2).

빌립보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의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
의견 차이가 있었으며
(빌 4:2),
사도는
이것 때문에
염려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이
같은 것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 가지 것을 생각하여
자신의 기쁨이 넘치도록
해 줄 것을 부탁했다
(2:2).

이 책의 문맥에 따르면,
‘한 가지 것’은 틀림없이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아는 것과
체험하는 것을
가리킨다
(빌 1:20-21, 2:5, 3:7-9, 4:13).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 온 존재의
중심과 전부가 되셔야 한다.

한 가지 것은
몸의 생활인 교회생활을 위해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 한 가지가
시종일관
우리의 생각을
점유해야 한다.
우리가
이 한 가지 것을 생각한다면,
즉시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그리스도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체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빌 3:8, 10).
다른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서로 다르게 생각하게 되고,
우리 가운데
불일치가 생기게 된다.

한 가지 것 외의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반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한 가지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빌립보의
믿는 이들의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서로 다른 수준의
사랑이 있었다
(빌 2:2).

그들은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향한
같은 사랑을
가져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성도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조절되고 처리되었다면,
우리는
성도들을 사랑하면서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혼 안에서
하나 되는 것,
곧 혼 안에서
연결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보다 더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누림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면서
누림도 함께 있기 위해서는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합당한 혼,
곧 다른 성도들의 혼과 하나인
‘함께하는 혼’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교회가 건축될 수 있도록,
오늘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그분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주님의 회복 안에
보존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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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replies on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의 내재적인 의미”

6일

빌 3:8
그럴 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또한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한 가지 것을 생각하고
혼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을
격려하고 있었다.
한 가지 것은
단지 객관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생활을 위해
우리의 누림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 한 가지가
시종일관
우리의 생각을
점유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의 풍성한 누림으로
체험하여
합당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몸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린
결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릴 때,
교회생활은
자연스럽게 산출된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한 데서
나온다.

교회생활은
우리의 생각에서
마귀적인 것들을
빼앗는다.
교회생활에서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
한 가지 것,
곧 교회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만을
생각하도록 돕는다.
우리 모두는
몸의 생활을 위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순종한다.

우리는
다른 것을 생각할 때마다
불순종하고
거스르게 된다.
한 가지 것 외의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반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한 가지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형제가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했는가?
여러분은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생각하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그 일에 대해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다.
이것은
엄중한 문제이다.
불평하는 것 또한
반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불평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불순종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불평하는 것과
따지는 것과
투덜대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따지는 것과
불평하는 것에 관해
빛 비춤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의 반역을 용서하소서.
… 저는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경륜에 순종하여
한 가지 것을
생각하기 원합니다.
비록 어떤 이들이
제 마음을 상하게 하였지만,
저는
그러한 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누림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빌립보서 2장 2절에서
우리는
생각의 문제뿐만 아니라
감정의 문제도
발견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같은 사랑을 가지라고
간청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생각에서
같은 것을
생각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감정에서
같은 사랑을
가져야 했다.
오늘날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같은 사랑을 가지라는
바울의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이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정도가 서로 다른
사랑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강한 암시이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동일하다.
물론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에는
차별이 있고
그 온도도 같지 않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접촉할 때는
얼음과 같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을
접촉할 때는
끓는 물과 같다.
어떤 이들에게는
우리의 사랑이
너무 차갑다.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뜨겁다.
우리의 사랑은
누구를 향해서도
알맞아야 한다.
그것은
너무 차거나
너무 뜨거워서는
안 된다.
때로 사람들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사랑은
너무 차갑습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더 차갑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끓을 정도로
뜨겁습니다.’

온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랑을 가지는 것은
타고난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사랑은
다룸을 받지 않은
혼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런 사랑으로는
그리스도를 누릴 수 없다.
만약 성도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조절되고
다룸을 받는다면,
우리는
성도들을 사랑할 때
그리스도를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합당한지
합당하지 않은지는,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할 때
그리스도를
누리고 있는지
누리고 있지 않은지에
달려 있다.
여러분이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데
그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가지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사랑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알맞지도
합당하지도 않은
사랑이다.

 

5일

빌 2:2
여러분은
같은 것을 생각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며,
혼 안에서 연결되고,
한 가지 것을 생각하여,
나의 기쁨이
넘치도록 해 주십시오.

빌 4:4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은 주로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은
우리의 혼 안에 있는 것이다.
… 음식을 먹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음식을
먹는 것과
누리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때로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에게 억지로
어떤 음식을 먹게 한다.
아이들은
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그 음식을 먹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을
누리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먹을 때
고통을 느낀다.
때로 우리는
누리는 방식이 아닌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으로 취해야 하고
그분으로 인해
살아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체험해야만 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억지로 받아먹지만
누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처럼,
많은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지만
누리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리기보다는
고통을 겪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없으면서도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
여기서의 문제는
우리의 혼에 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에 대한
책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이것은
체험의 문제만이 아니라
누림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3:8) 또한
누림을 가리킨다.
탁월함은 주로
체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림을 위한 것이다.
…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에는
유쾌한 맛이 있다.

비록 빌립보 성도들이
훌륭했을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합당한 영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혼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영 안에서는 하나였을지 모르지만,
혼 안에서는 분명
하나가 아니었다.
이것이
이 서신서의 배경이다.

빌립보서가 쓰인
이유는,
빌립보 성도들이 비록
주님을 위하고
그분의 종을 돌보며
또 영 안에서
매우 합당했지만,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그들의 혼 안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생각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혼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조언하기 위해,
심지어 간청하기 위해
이 서신서를 썼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필요는
빌립보 성도들의 필요와
매우 유사하다.
1장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간구할 때마다,
나는 항상
기쁨으로 간구합니다.”
(3-4절)
나는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사랑스러운 성도들에 대해
동일한 느낌이 있다.
나는
진정으로
모든 성도들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누림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봐
다소 염려가 된다.
아마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방에 갔을 때,
처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상당한 누림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누림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여러분의 혼 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자매들의 경우는
감정에 너무 빠져 있고,
형제들의 경우는
생각에 너무 빠져 있다.
이것 외에도
우리 모두에게는
완고한 의지의
문제가 있다.
나의 부담은
이 완고한 의지가
다룸을 받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
오랫동안 있어 온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음식을
누릴 줄 모르고 먹는
어린아이들과 같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는
모든 것이 누림직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오늘
그러한 누림을
가지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그들의 혼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캠퍼스 복음 전파에
매우 활동적일 수 있다.
그들은
기도하고
찬양하며
할렐루야를 외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단지 의무감에서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그리 많지 않을 수 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이
많지 않다면,
그것은
그들이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혼 안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4일

빌 1:27
오직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 보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복음의 믿음과 더불어
한 혼으로
함께 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듣도록
해 주십시오.

빌 2:20-21
나와 같은 혼이 되어
여러분의 사정을
진심으로 돌볼 사람이
디모데 외에는
나에게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신의 일만 관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은
관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한 영과 한 혼을
가질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의 영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은
시기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인도하는 것을
볼 때
시기하게 된다.
그리고 경쟁하는 영으로
다투기 시작한다.
비록 우리의 영은
이와 같지만,
예수님의 영은
그와 같지 않으시다.
복음서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을
주목해 보라.
그분의 삶은
시기나 다툼이나 경쟁이
없는 삶이었다.
한 영과 한 혼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영 안에서만
가능하다.

한 혼이 된다는 것은
주로 한 생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한 혼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 각자가
첫째가 되기를 갈망하고,
어느 누구도 기꺼이
마지막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가
“나는
예수님의 영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즉시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될 것이고
다른 이들과
한 영과 한 혼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복음을 위해
함께 분투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립보서 1장 27절의
‘함께’라는 말은
우리가
서로 조율되며,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단체적임을 뜻한다.

빌립보서 2장 2절은 또한
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혼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애정과 사랑과
생각과 결정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는
매우 실지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자 한다면,
혼 안에서
하나가 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의
애정과 생각과 결정에서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한 혼을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닌 한,
우리는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빌립보서
1장의 마지막 부분과
2장의 첫 부분은
사실상 한 부분이며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1장 27절부터
2장 8절까지에는
하나의 사상이 흐른다.
1장 27절에서
바울은
“오직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라고 말한다.
수년 전에 내가
이 절을 읽었을 때,
나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앞에서
온전한 품행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바울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27절의 남은 부분은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 보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복음의 믿음과 더불어
한 혼으로
함께 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듣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나,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나,
혹은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는
우리에게
한 영 안에 굳게 서고
한 혼을 가지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한 영 안에 있지 않고
한 혼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활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다.
한 지방이나
한 대학에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가
있는지와 관계없이,
우리가
한 영 안에서
그리고 한 혼으로
복음을 전할 때
모든 이들은 틀림없이
깊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이것보다 더
확신을 주는 것은 없다.
교회 안의 모든 지체들이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질 때,
이 하나(oneness)는
확신을 주고
굴복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매혹할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굴복시키고 확신을 주는
하나를 가질 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것이다.
우리는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를 누릴 것이다.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우리는
영과 혼 안에서
우리의 하나를 표현한다.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이와 같이 전하면 전할수록
그리스도를 더 누리게 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혼들이 구원받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는지를
관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림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의 잔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로 잔치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영과 혼 안에서의
하나가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가
한 영 안에 있고
한 혼을 가진다면,
우리의 복음 전파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숫자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그리스도로 잔치하고
그분을 누릴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단지 체험뿐만 아니라
또한 누림을 가지게 될 것이다.

 

3일

빌 1:3-6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간구할 때마다,
나는 항상
기쁨으로 간구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의 확산을 위하여
교통해 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것을 완성하실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빌립보서 1장
5절과 6절은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이
선한 일,
곧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일임을
보여 준다.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이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복음의 확산을 위해
교통하는 것임을
밝혀 준다.
5절에서
바울이
복음 전파에 대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 우리가
구원받은 때부터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복음을 전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우리는
교육이나 직업 혹은 가정을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돈을 벌거나
명성과 지위를 얻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삶,
즉 그리스도를 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은
복음을 전파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가
여러분의 직업을 물어본다면,
여러분은
“나의 직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제일 순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말할 때든지
잠잠할 때든지,
나의
생명과 생활과
존재와 온 인격은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복음을 전파하는 삶은
개인주의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반드시
단체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교통을 가지는 이유이다.
… ‘교통’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코이노니아(koinonia)’는
‘교제, 상호 교류’를
의미한다.
복음 전파에 관한 한
오늘날의 상황은
매우 빈곤하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전하더라도
단체적으로 전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전한다.
… 복음에 힘쓰는 사람들일수록
더 개인주의적인 것 같다.
그들의 복음 전파에는
결코 교통이라는 것이 없다.
복음의 확산을 위한
어떤 교통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도 없다.

비록 우리가
과거를 청산하고,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며,
내적인 기름 바름을 따를지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그다지 많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단체적으로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 나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캠퍼스 복음 전파에 대해
열망이 있는 것을 볼 때
매우 기쁘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단지 복음을 전하는 데에만
열중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그다지 많이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주로
전파하는 데 있지 않고
교통하는 데 있다.
우리는
교통을 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교통을 가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학업 성적에서
첫째가 되기를 열망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지만
복음 전파에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복음 전파에서
우리는 기꺼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를
바라야 한다.
시기와 다툼과 경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은 분명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을 가지지 않는다.
교통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젊은이들이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
열정적인 것을 볼 때
매우 기쁘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그들이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러한 교통을 가지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교통을 가지려면,
먼저 우리 자신과
자신의
야심과 명성과 지위를
제쳐 놓아야 한다.
이것이
참된 죽임이다.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은
자아와 육체와 타고난 사람을
죽인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야심과 욕망과
선호와 선택까지도
죽인다.
이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나누는 교통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하는
이유이다.
결국 빌립보서에서의
사도 바울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첫 번째 길은
복음의 확산을 위한
교통에 있다.

 

2일

고후 12:9
그러나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왜냐하면 나의 능력은
사람이 약할 때에
온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장막으로 드리워지도록
오히려 나의 약한 것을
더더욱 기쁘게 자랑하겠습니다.

딤전 3:15-16
…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기반입니다.
모두가 인정하듯이,
경건의 비밀은
위대합니다!
그분은
육체로 나타나셨고, …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비밀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어떤 면을 체험하든지
그것은 무한하다.
우리가
이 이상을 본다면,
이것은
우리의 삶을
통제할 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함을
강화할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교회생활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총체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살며,
우리의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모두 더해져
교회생활을 이룬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비밀이며,
우리가 살아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어떠함 또한
비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비밀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
말하는 것은
하나의 비밀이다.
이것은
비록 비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
체험하고 있는 것은
비밀이다.
날마다
우리의 삶은
비밀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로서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완전한 비밀이다.
이 모든 비밀들의 총체가
교회생활이다.
이 비밀은
제한이 없으신
한 분을 나타낸다.

인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실함과 오래 참음과 겸손도
제한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삶으로써
가지게 되는
속성은 어떤 것이든지
제한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비밀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사람의 미덕과
그리스도의 확대인 미덕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의 미덕에는
제한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의 관대함은 결국
바닥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살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확대인
그 관대함은
바닥이 드러날 수가 없다.
이 비밀은
마귀와
귀신들과
모든 악한 천사들을
굴복시킨다.
이것은 또한
누구에게나
확신을 심어 줄 것이다.
합당한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확대를
보고 확신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오래 참음은
비밀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확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나타나신 그리스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제한 없는 분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이다.

심지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도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그가 몇 번이나
그의 형제를 용서해야 하느냐고
여쭈었다.
그는
일곱 번까지
그의 형제를 용서해야 하느냐고
여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다함이 없는 용서이다.
이러한 용서가 바로
그리스도의 확대이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다함이 없으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수년 동안 우리는
거듭거듭
다른 이들을 용서한다.
이러한 제한이 없는 용서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확대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미덕은
다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많은 경우
우리의 고난을
덜어 주시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확대하기 위해
그분은 종종
이 고난을
증가시키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확대하기 위해
우리는
고난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고
생각해 보자.
“오, 하나님,
나의 아버지.
당신은
인자하시고
긍휼이 많으십니다.
당신은
제가 많이 참을 수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부디 저의 고난을
덜어 주소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어
우리의 고난을 덜어 주신다면,
그리스도는
확대되지 못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려면
우리에게
고난이 필요하다.
우리의 고난이 증가되는 만큼
그리스도도 확대되신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확대하게 할 수 있는지를
관심하지 말라.
이런 문제를 분석하기보다는
단순히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체험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확대한다는 것은
그분을
제한이 없으신 분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우리의 고난이
증가되는 것을 통해
확대되신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빌립보서가
기쁨의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바울은
이 책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우리에게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즐거운 환경에 있을 때
기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감옥에 있을 때에
기뻐하는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다.

 

신언노트, 2019 07 07

그리스도의 그 체험의
 그 내재적인 의미
 (그리스도를 체험함의
 그 본질적인 중요성)

그리스도의 그 체험은
 (The experience of Christ;
 그리스도를 체험함은)
 한 비밀입니다
 (a mystery;
 한 신비[불가사의, 수수께끼]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비밀이시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그 비밀이시며,
또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그 비밀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 교회가
 사실은
 (actually;
 실은, 실제로, 정말로, 지금)
 한 비밀 안에 있는(within)
 한 비밀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한 비밀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사랑은
 제한되지만
 (is limited;
 한정되지만, 제한적이지만),
한 그리스도인에 의하여
 살아 나타내진
 그 적절한 사랑은
 무한합니다
 (is unlimited;
 무한정입니다, 무제한적입니다);
이런 이유로,
 그것이 한 비밀입니다.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은
 제한 없이
 (without limitation; 한없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에 의하여
 우리가 사는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무한하시다는 것을
 그 전체의 우주에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의 무한한 인내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함은
그 무한하신 그리스도의
 그 확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의
 그 풍부한 공급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삶을 통해
 우리가 가지는
 어느 속성이든지
 무한할 것이고
 그래서
 (and thus;
 따라서, 또 그렇기 때문에)
 비밀스러울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다른 사람들을 용서함까지도
 그리스도의
 한 확대일
 (to be a magnification;
 한 증대가[찬양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용서는
 우리 안에서
 확대되고 계시는
 그 무궁무진하신 그리스도
 (the inexhaustible Christ;
 다 쓸 수 없는 그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십니다.

고통을 겪음의 그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다만
 (simply;
 그냥, 그저, 오직, 단순하게, 평이하게,
 쉽게, 소박하게, 자연스럽게, 정말)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또 그분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때
 (then;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확대할 것이고,
그분을
 무한하신 그 한 분으로
 표현할 것입니다;
고통을 겪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
 한 기쁨입니다
 (a joy;
 한 환희[큰 즐거움]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체험은
 한 비밀이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께로부터
 (of Christ; 그리스도에게서)
 체험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무한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이상을 본다면,
그것은
 우리의 생활을
 통제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행함을
 (walk; 걸음을)
 강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확대하시는 것입니다.

그 교회 생활은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함의
 총계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살고,
또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함이
 함께 더해져서
 그 교회 생활이 됩니다
 (to make the church life;
 그 교회 생활을 만듭니다);
우리가
 그 교회로서
 함께 올 때
 (when … come together;
 하나로 합칠 때),
우리는
 한 완전한 비밀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나에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빌 1:21상);
이것은
 우리가 살아서
 그리스도일 수 있다는 것을
 (that … can live to be Christ;
 …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도록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체험하고
 또 우리가 사는(live)
 그 그리스도께서
 한 비밀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에 관한
 어떤 확신이라도
 (any assurance;
 어떤 자신감이든[장담이든, 확언이든])
 가지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체험들이
 비밀스럽기 때문입니다
 (are mysterious;
 신비롭기[기이하기, 불가사의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의 그 체험이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 복음의 그 촉진에 이르는
 (unto the furtherance …;
 그 증진[추진, 조장]을 향한,
 그 진척[발전]까지의)
 우리의 교통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unveils;
 나타내 보입니다, 덮개를 벗깁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그때부터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때까지,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복음을 전파하는
 한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또 누리는
 그 생활은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오직 단체적인,
 그 복음의 그 촉진 안에 있는
 한 생활,
 곧 복음을 전파하는
 한 생활입니다;
더 많은 교통을
 그 복음의 그 촉진 안에서
 우리가 가질수록,
더 많은 그리스도를
 (the more Christ;
 그리스도를 더 많이)
 우리가
 체험하고 또 누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아, 야심, 선호, 또 선택을
 죽입니다.

우리가
 말하든지
 아니면 조용하게 남아 있든지
 (remain silent;
 계속 조용하든지),
우리의 생명,
 우리의 생활함,
 우리의 존재,
 또 우리의 전체의 인격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전파함이어야만 합니다
 (must be a preaching of Christ;
 그리스도의 한 전파함임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그 복음에
 어울리는 한 방식으로
 (in a manner worthy of …;
 알맞은[자격이{가치가} 있는,
 합당한] 한 방식 안에서)”
 처신하라고
 (to conduct ourselves;
 우리 자신들이 행동하라고)
 명령하는데
 (charges; 맡기는데),
이는(which)
 “그 복음의 그 믿음에 따라
 (along with the faith of the gospel;
 그 복음을 믿음과 일치하여, …과 함께[더불어])
 함께 분투하는
 하나의 혼을 가지고
 (with one soul; 하나의 혼으로),
 하나의 영 안에서
 (in one spirit; 하나의 영으로)
 굳게 서는” 것입니다
 (빌 1:27):

그 복음의 일을 위하여
 하나의 혼을 가지고 있는 것과
 (To be with one soul;
 하나의 혼으로 있는 것과)
 또 같은 혼이 되는 것은
 (and to be like-souled)
그리스도의 그 체험을 위하여
 하나의 영 안에 있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나의 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의 영 안에서
 거듭나게 된 후에
 (after having been regenerated;
 거듭났던 다음에),
우리가
 더 나아가서
 우리의 혼 안에서
 변형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애정들, 생각들, 또 결정들 안에서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의 혼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혼 안에서
 하나가 아닌 한,
우리는
 그 복음의 그 촉진에 이르는
 그 교통 안에 있지 않고,
또 우리의 처신은
 그 복음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교회 안에 있는
 그 모든 지체들이
 하나의 혼을 가지고
 하나의 영 안에 있을 때,
이 하나임은
 (oneness;
 합일은, 일치는, 조화는, 일체감은,
 단일성은, 동일성은, 통일성은)
 확신시킬 것이고
 (will be convincing;
 설득력 있을 것이고),
 굴복시킬 것이며
 (will be … subduing;
 억제할 것이며),
 또 매혹적일 것이고,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할 것이며
 또 그분을 누릴 것입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빌립보서는
 그리스도의 그 체험 위에뿐 아니라
 (on …; …에 관하여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그 누림 위에의
 (on …; …에 관한)
 한 책입니다:

빌립보서가
 그리스도의
 그 체험과 또 누림에 관련되고,
이는(which)
 큰 기쁨의 결과가 되며,
 (issue in joy;
 환희를[큰 즐거움을] 산출하며),
그것은
 (it; 빌립보서는)
 큰 기쁨과
 또 큰 즐거움으로
 (rejoicing;
 환희[희열, 환호]로)
 가득 채워진
 한 책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체험은
 주로 우리의 영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그 누림은
 우리의 혼 안에 있습니다;
그들의 음식을 누림 없이
 먹게 되는
 (are made to eat;
 먹게 시켜지는[만들어지는])
 아이들과 같이,
많은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림 없이
 그분을 체험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누림 없이
 그리스도의 그 체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문제는
 우리의 혼(과)
 ―우리의 생각, 감정, 또 의지와
 함께 있습니다
 (is with …; …에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매우 많은
 그리스도의 누림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약간 걱정합니다
 (am somewhat concerned that … may;
 어느 정도[다소] 염려합니다)”
 (위트니스 리 전집, 1978년, 1권,
 그리스도를 체험함[그리스도의 그 체험], 497쪽);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그 누림을 잃어버리는
 그 이유는
그들이
 그 혼 안에 가지고 있는
 그 문제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많은 그리스도의 누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혼 안에서 연결되어
 (joined in soul;
 혼으로 접합되어[붙여져, 합쳐져,
 결합되어, 연합되어]),
 혼 안에서 하나이지 않은 것을
 (are not one in soul;
 혼으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아닌 것을])
 가리킵니다.

빌립보 사람들 가운데에
 그들의 생각함 안에서
 불일치가 있었고
 (was dissension;
 의견 충돌이[불화가, 알력이] 있었고),
이것이
 그 사도를 괴롭혔습니다
 (troubled;
 걱정[고생]시켰습니다, 성가시게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그들에게
 그 같은 것을 생각하여,
 심지어 그 같은 하나의 것을 생각하여,
 그들이
 그의 기쁨을
 충만하게 만들 수 있게 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asked; 요청했습니다):

이 책의 그 문맥에 따라,
 ‘그 하나의 것’은
 그리스도의
 그 주관적인
 지식과 또 체험을
 언급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must refer to);
그리스도께서,
 오직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의
 전체의 존재의
 그 중심임과
 (the centrality;
 그 구심성과[중심적 역할과,
 중추성과, 중심 위치를 차지함과])
 또 광범위함이
 (and universality;
 일반성이, 보편성이, 다방면성이)
 되셔야 합니다.

그 하나의 것은
 그 교회 생활,
 곧 그 몸 생활을 위한
 우리의 누림이신
 그리스도의
 그 주관적인 체험입니다;
이 하나의 것이
 줄곧
 (all the time; 내내)
 우리의 생각을
 점유해야 합니다
 (should occupy;
 차지[점령]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하나의 것을 생각한다면,
 즉시
 그리스도의 그 누림은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함은
 그리스도의
 그 지식과 또 체험의
 그 탁월함 위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 위에
 초점을 맞춤은
 우리로 하여금
 다르게 생각하게 하고
 (causes … to think differently;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초래하고),
이렇게 하여
 우리 가운데에
 불일치들을 야기합니다
 (creating; 창작[창조]합니다).

그 하나의 것 외의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반대하여
 반역하는 것입니다
 (to rebel;
 반란을 일으키는[반항하는,
 저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그 하나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함 안에 (있던)
 그 불일치 때문에,
빌립보의 그 믿는 이들이
 다른 수준들의 사랑을
 (different levels of love;
 사랑의 각각 다른 수준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임의 그 지킴을 위하여
 (for the keeping of oneness;
 하나임을 지키기 위한)
 그 모든 성도들을 향한(toward)
 그 같은 사랑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성도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조절되었고
 또 처리되었다면
 (has been … dealt with),
그때
 (then; 그러고 나서)
 우리가
 그 성도들을 사랑하면서
 (as … love)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릴 것입니다
 (will enjoy).

혼 안에서
 연결되어
 (joined in soul;
 혼으로 결합되어),
 혼 안에서
 하나임은
 (Being one; 하나가 됨은),
그리스도의 그 체험을 위해서뿐 아니라,
 또한 더 한층
 (but even more;
 오직 심지어 더 많이)
 그리스도의 그 누림을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의 체험은
 또한 우리의
 그리스도의 한 누림이
 되어야 합니다.

누림을 가지고
 (with enjoyment; 누림과 함께)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의 혼을 가지고
 (with one soul; 하나의 혼으로)
 하나의 영 안에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한 적절한 혼,
 곧 다른 성도들의 그 혼들과 하나인
 한 “같은 혼”을
 (a “co-soul”;
 한 “함께하는[공동의, 동료] 혼”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그 가장 중요한 것은
 (thing; 일은)
 오늘
 우리의 누림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고
그 결과(so that)
 그 교회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건축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우리가
 주님의 회복 안에 보존되는
 그 길입니다.

 

1일

빌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나에게 있어서
죽음은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비밀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겸손 또한
비밀이다.
공자(孔子)가 가르친
겸손은
비밀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겸손을 살아 나타낼 때,
이 겸손은
비밀하다.
우리가
안에서부터
살아 나타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비밀해야 한다.
우리의 겸손을 보고서
다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사는
삶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겸손하지만,
그의 겸손은
다른 이들의 겸손과
다릅니다.
그의 사랑 또한
그러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다른 이들을
사랑합니다.
그의 사랑은
비밀합니다.
그의 사랑에는
제한이 없는 것 같습니다.”
비록 인간의 사랑은
제한적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살아 나타낸
합당한 사랑은
제한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비밀이다.

나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더 이상 이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저의 인내도
바닥이 났습니다.”
우리의 인내가
고갈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인내가
그리스도의 인내가 아님을
가리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제한이 없는
인내를 살아 나타낼
필요가 있다.
환경이
우리의 인내를 고갈시킬수록
우리는
더욱더 인내할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인내가
다함이 없는
인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밀이다.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가
그토록 인내할 수 있는지
의아해한다.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은
제한 없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가 의지해 살고 있는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무한하시다는 것을
온 우주에
보여 주는 것이다.
사람의 관념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제한적인 분이시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가
그분에 의해 사는 것을
볼 때,
그분께서
제한적인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무한하신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감옥에 갇힘으로써
자신이 의지해 살았던
그리스도를
무한하신 분으로
표현하였다.
바울의 인내는
그리스도 자신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얼마나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든지
그의 인내가 고갈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인내는
다함이 없었고
제한이 없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인내가
고갈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인내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확대된 인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내로서 체험하는
그리스도는
결코 다함이 없는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에 의해 산다면,
그분은
확대되실 것이다.
즉 그분은
그분께서
다함이 없는 분이심을
보여 주실 것이다.
바울의 인내는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그의 인내는
제한이 없었다.
그러한 제한이 없는 인내가
곧 무한하신 그리스도의
확대이다.
이 우주에서
이것은
비밀이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
바울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했다고
말한다.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이 절의
‘확대되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다.
어떤 이들은
확대된다는 것이
표현되거나
높아지거나
영광스럽게 되거나
혹은 존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물론 확대된다는 것은
분명 이러한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은
‘확대되다’라는 말의
깊은 의미를
만지게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확대되신다는 것은
우리가
무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무한하심을 통해
확대되신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에
제한적이다.
많은 별거와 이혼이 있는 이유는
인간의 사랑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무한하시지만
우리는 제한적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에서든
그리스도에 의해 산다면,
그것에는
제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동일한 일에서
자신에 의해 산다면,
그것은 제한적일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고갈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은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요구를
하게 될 것이고,
결국 우리의 사랑을
고갈시킬 것이다.
남편의 사랑은
아내에 의해 고갈되고,
부모의 사랑은
자녀들에 의해 고갈되며,
장로들의 사랑은
성도들에 의해 고갈될 것이다.
우리는
고갈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결코 고갈되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면 할수록,
그분은
우리의 요구를 채우시기 위해
더욱더 많은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의해 사는 것은
그분의 무한하심에 의해
그리스도를 확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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